중고등 학생 시절의 미술 시간이 떠오른다. 시대별로 미술 사조를 외우고, 누가 어떤 작품을 그렸는지 연결지어 외우고, 작품 속에 구도와 시점, 그리고 그 작품이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까지 모두 책에 쓰여진 대로 달달 외워야만 했다. 그렇게 해야 미술시험 에서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다. 미술사조나 시대는 외워서 알아야 한다 처도 미술에 대한 해석마저 외워야 했던 사실이 좀 깝깝하게 느껴진다. 그 작품을 그린 화가가 아닌 이상, 그 작품에 대한 모든 것을 제대로 해석해 낼 수 있을까? 다시 말하면 미술 작품에 대한 절대적 해석이 존재할까? 라는 의문이 든다.
사회적으로 공유되는 '일반적' 해석의 틀에 따라 읽어내는 것은 스투디움(studium)이라 하고, 오직 보는 이 혼자만이 느끼는 '개별적'인 해석을 푼크툼(punctum)'이라 한다. 진중권님은 이 책을 통해 미술의 푼크툼을 강조하고 있었다. 작품을 보며 스스로 물음을 제기하고 스스로 대답하는 것이다. 이 책은 여러 화가들의 12작품을 통한 진중권님의 푼크툼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그럼 이 책에 나와 있는 작품 중 피터르 브뤼헐의 <교수대 위의 까치>를 살펴 보자.
![](http://image.aladin.co.kr/Community/mypaper/pimg_773094196536580.jpg)
이 작품을 처음 접했을 때 난 그다지 이 작품에 흥미를 못느꼈다. 교수대 위에 올라가 있는 까치가 눈에 띄긴 했지만, 그냥 그렇고 그런(?) 작품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상한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우선 교수대의 모양이 3차원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이상한 모양을 하고 있다. 또 춤을 추는 사람들, 똥누는 사람 등 오밀조밀 모여있는 사람들의 모습도 예사롭지 않다. 이 작품이 뭘 말하려는 것인지 금새 와닿지 않는다. 솔직히 그 시대 네덜란드의 관습과 시대상을 알지 못하고 이 작품을 자세히 이해한다는 것은 좀 무리다. 또 까치에서 오는 관습과 속담도 다양하다. 또 그림을 그릴 당시 화가 피터스 브뤼헐의 상태도 알아야 한다. 이 그림을 통해 진중권님은 화가의 개인적인 관점에서부터 관습, 정치 사회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폭넓은 각도로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이렇 듯 어떤 작품에 대한 절대적 해석은 없다. 해석에 대한 견해도 다양하지만, 어떤 작품은 일부러 작가가 제제를 모호하게 숨겨 작품의 진정한 의도를 살짝 감추거나 다른 것으로 오해하게끔 유도하기도 한다. 또 원래 의도와 다르게 표현되어 다른 뜻으로 완성된 작품도 있다. 그런 작품들을 감상하고 나름대로 해석해보는 것은 내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흥미로운 일이었다. 결국 다양한 푼크툼들이 모여 하나의 스투디움을 형성해 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현재의 스투디움이 아니라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푼크툼이라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난 단순한 미술작품을 넘어 우리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스투디움' 정서에 대한 안타까움을 느꼈다. 창조적 사고의 결여라는 말로 대신 표현하여도 좋을 것 같다. 고정된 형식과 틀을 정해놓고 일방적으로 주입시키는 교육과 사회적 패턴들... 그런 획일적 사고의 끝은 결국 무력감으로 이어질지 모른다. 해놓은 대로 생각없이 따라가야 하는 것들에 대해선 어떤 의욕도 흥미도 일으키기 어려울 것 같다. 특히 이런 미술이나 음악, 문학 등에 대한 '스투디움' 행태는 이 분야에 쉽게 친숙하지 못하고 거부감 마저 들게 할 것 같다. 미술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즐기려면, 그 작품이 나 자신의 감성을 자극해야 하고, 내 자신이 느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설사 어설픈 해석과 감상일지라도, 내 자신의 '푼크툼'이라면 그 자체로 나만의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