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주꾼 허버트 사이먼 |
그 후 경제학에 심리학의 탁월한 견해를 도입하려는 시도는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거의 끊어져버렸다. 이런 조류 속에서 유달리 빛을 발하는 사람이 1978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허버트 사이먼(Herbert Alexander Simon)이다.
현대 경제학자 중에서 경제적 인간 가설에 대해 가장 강한 이견을 주창했고, 대체 사고방식을 제창한 사람이 바로 사이먼이다. 사이먼은 다방면에 재주가 뛰어났다. 처음에는 정치학을 배워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나, 후에 경영학, 조직학, 컴퓨터 과학, 인공지능, 인지과학, 경제학 등을 연구하여 이 분야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는 주류경제학이 가정하고 있는 합리성에 대해 인간 인지능력의 한계라는 관점에서부터 체계적인 비판을 가한 최초의 경제학자이다. 완전히 합리적일 수 없는 인간을 설명하기 위해 ‘제한된 합리성(bounded rationality)’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을 뿐만 아니라, 경제학은 제한된 합리성을 가진 인간을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현실에서 인간의 선택은 최적화된 기준에서 실행되는 것이 아니라 일정 수준 이상이 되면 선택한다는 ‘만족화(satisficing)’ 원리를 비롯해 합리성은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선택의 과정이나 방법에 대해 논해야 한다는 ‘절차적 합리성’이라는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창조했다.
이처럼 사이먼은 의사결정에서 진화의 영향을 중시했다는 점에서도 선구적이었고, 인간이 의사결정을 고려할 때에 감정 역할의 중요성을 무시할 수 없다는 주장을 한 점에 있어서도 획기적이었다. 일반적으로 사회과학자는 인간의 합리성이나 의사 결정력 또는 사회 속에서의 개인의 영향력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바로 이런 특성 때문에 사이먼은 사회과학자 중에서 최초로 감정의 중요성까지 주장한 인물이 된 것이 아닐까? 또한 사이먼은 이타성에 대해 고찰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매우 혁신적이다.
유감스럽게도 당시 사이먼의 주장은 경제학자들 사이에서는 별로 인정받지 못했다. 사이먼의 업적은 경제학과 심리학이 재결합하는 조짐이었지만 당시에는 열매를 맺지 못했다. 그 즈음은 오늘날의 주류경제학이 확립되어 힉스(J. R. Hicks), 새뮤얼슨(Paul Samuelson), 애로(K. J. Arrow)가 활약했으며, 물리학을 기본으로 하는 일반 균형이론 등 엄밀한 수학적 분석이 각광받던 시대였다.
사이먼의 논점은 매우 설득력 있는 이론이었지만 극히 개념적·이념적 단계에 머물러 있었고, 조작 가능한 모델화가 어려웠기 때문에 주류경제학자 사이에서는 널리 보급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수학적 이론을 선호하는 경제학자에게는 ‘정리 없는 이론’(Reinhard Selten 1990)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사이먼이 주장한 이론의 정당성과 중요성은 인식되었지만 비합리성이나 비이기성에 대해 다룬 적합한 이론이나 모델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경제학자들로서는 그의 이론을 무시할 수밖에 없었다.
사이먼은 2001년에 사망했지만 그의 연구 성과는 행동경제학 이론 안에 폭넓게 이어지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사이먼은 “마음의 성격을 이해하는 일은 사회제도와 사회행동, 경제학이나 정치학에 있어서 원활한 이론 구축을 이루기 위해서는 빠뜨릴 수 없는 것이다. 경제학은 인간의 이성에 대해 ‘선험적인’ 가정의 기초 아래 2세기 동안이나 이 문제를 얼버무려왔다. 이런 가정은 이제는 알맹이가 없다. 이성에 대한 선험적인 가정은 인간의 마음에 대한 진실성이 있는 이론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서술하고 있다.
현대 경제학자 중에서는 사이먼이나 조지 아커로프(George Arthur Akerlof, 2001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 토마스 셸링(Thomas Crombie Schelling, 2005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과 같은 일부 재주꾼을 제외하면 경제학과 심리학에 관해 특별한 관심을 배려한 경제학자는 출현하지 않았다.
< 출처 : 행동경제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