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정인섭의 <음향과 분노>는 이 작품의 번역서로는 해방 이후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유일한 작품인지 모르겠다. (*)
- 나중에 국립중앙도서관을 검색해 보니, 정인섭 번역본 말고도 곽동벽(대양서적, 1974)과 전호종(금성출판사, 1990) 번역본이 있다. 하지만 정인섭 번역본이야말로 1958년에 정음사 세계문학전집 중 한 권으로 처음 간행된 이래, 1972년(정음사), 1972년(삼중당), 1987년(자유교양사), 2000년(민족문화사), 2006년(북피아)에 이르기까지 거의 "반세기"동안 통용된 유일 번역본이나 마찬가지이다.
자세한 역사는 알 수 없으나, 번역자인 정인섭(1903-1983)이란 인물이 그야말로 무지막지 "옛날" 양반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후 1987년에 자유교양사에서 나온 <음향과 분노>나 2006년에 새로 나온 북피아의 <음향과 분노>나, 과연 번역은 제대로 되었으며 편집은 또 제대로 되었는지를 두고, 저으기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자유교양사 판 <음향과 분노>를 몇 번 읽어보려다가 실패한 이후에, 뭔가 새로운 번역본인가 싶어서 북피아 판을 기껏 도서관에서 빌려왔더니, 이건 뭐 역자 해설부터가 과거의 번역을 그대로 조판만 새로이 해서 낸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좀 허탈해졌다. 한 가지 신기한 건 87년 판에는 빠져 있었던 "부록" (포크너가 직접 덧붙였던) 이 이번 06년 판에서는 덧붙여져 있었다는 것인데, 이건 뭐, 돌아가신 저자가 다시 살아나서 작업을 한 것이 아닌 다음에야, 어떻게 이게 새로 번역이 가능했는지 모르겠다. (물론 일찍이 6, 70년대의 번역본에서는 실려 있었다가, 87년도 번역본에서 누락된 것을, 06년도 번역본에서 다시 실은 것일 수도 있지만.) 솔직히 난 과거의 번역이라 해서 무조건 홀대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정말로 50년, 100년이 지나도록 사랑받는 명 번역도 있을 수 있고, 세월이 지났다고 해서 반드시 번역 실력이 일취월장한다고 생각하진 않기 때문이다. (물론 그야말로 "정보의 홍수" 시대인 지금은 대개 과거보다는 정보가 많으니 오류 가능성이 적어졌다는 점에서는 더 낫긴 하겠지만.) 다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수십 년 전의 번역이라 하더라도, 맞춤법을 제외한 다른 면에서는 지금까지도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원문에 충실하고 오류가 적어야 하며, 또한 이것을 새로 편집, 조판해서 펴내는 경우에 출판사에서도 혹시나 그 와중에 새로운 오류가 더 생겨나지 않도록 최대한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수십 년 전에 작업한 번역원고가 아직 남아있을 리 만무하므로, 기존에 출간되어 있던 책을 새로 "입력"해서 편집하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 가장 흔한 실수는 입력자가 오타를 내거나, 혹은 한두 줄이나 한두 단락 전체를 몽창 빼먹고 입력하는 식이다. 그런 까닭에 입력자(타이피스트)나 편집자가 웬만한 눈썰미와 작품에 대한 이해를 지닌 사람이 아닌 경우에, 정말 말도 안 되는 황당한 실수가 개입되기 쉽다. 북피아의 이 책의 경우, 이런 점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아서 그야말로 "황당무계한" 실수를 담고 있다. 단적인 예로, 이건 내가 "정말" 우연히 발견한 것인데, 이 책의 458쪽에 보면 이런 문장이 나온다. "내게는 신성한 나무가 자라고 있는 창녀리 산 언덕이 보여요." 여기서 문득 "창녀리 산 언덕"이 뭔가 싶어 어리둥절해졌다. 제4장에서 흑인교회에 온 목사가 열정적으로 설교하는 대목에서, 예수의 십자가 고난을 이야기하다가 웬 "창녀리"인가 싶어 앞뒤 문맥을 살펴보니...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둘러 집에 있던 87년도 자유교양사 판본을 꺼내 비교해보니....
...보니...
...보니...
...보니...
...보니...
그건 바로 "갈보리 산 언덕"이었던 것이다~~!!!! 도무지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옛날 책을 입력하고 편집하는 과정에서 "갈보"라는 말이 어느 "눈 밝은" 입력자/편집자의 눈에 띄어, 이 말의 보다 현대적(?)인 표기인 "창녀"로 둔갑했던 것이다. 솔직히 이런 코미디가 어디 있나? 이 책의 출간에 관여한 그들 중에 하다못해 초딩 때 부활절 계란 얻어먹으러 친구 따라 교회 한 번 가 본 사람이라도 있었으면, 이런 멍청한 실수는 하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아니, "갈보"가 "창녀"의 옛날 말이라는 건 알면서, "갈보리"가 Calvary 의 번역어이며 예수의 십자가가 세워진 처형장소라는 건 전혀 몰랐던 것일까? 책을 읽기도 전에 황당한 실수 먼저 발견하고 입맛을 쩍쩍 다시며 맨 앞면을 펴보니, 얼씨구, 꼴에 미국 랜덤하우스와 정식 계약을 한 번역본이 아닌가. 결국 다른 출판사에서 제대로 된 번역에, 제대로 된 책을 내기는 한동안(최소 5년간) 틀렸다는 뜻이 된다. 이건 참... 뭐라고 해야 할 지 모르겠다. 무식이 용감이라고나 할까, 아니면 황당의 극치라고나 할까. 하여간 출판사가 "최소한의" 양심이라도 있고, 지각이라도 있으면 부디 제대로 다시 만든 책을 펴냈으면 좋겠다. 실력 있는 포크너 전공자에 의한 완역본이 완전히 새로 나왔으면 가장 바람직하겠고, 그게 아니라면 이런 말도 안 되는 오류는 좀 잡아보라는 거다. 기왕에 우리나라에 영문학을 한답시고, 그리고 포크너를 전공한답시고 하는 자칭 "전문가"들도 마찬가지다. 이런 엉터리에 코미디 번역본이 서점에 나돌아다니도록 그 사람들은 도무지 뭘 하고 있었는지, 정말 머리 박고 반성해 마지않을 일이다. 이건 뭐, 뻑하면 무슨 번역이 좋네, 나쁘네, 어쩌네, 남이 기껏 고생한 것 트집만 잡으려 하지 말고, 전공자면 전공을 좀 살려서 제대로 좀 먼저 번역이나 해보라는 거다. 포크너의 <음향과 분노>만 해도 1987년에 나왔던 책이 2006년에 다시 나오기까지 무려 20년의 공백이 있었고, <압살롬, 압살롬!>은 장왕록 선생의 번역이 1983년에 학원사에서 나온 후, 무려 20여 년이 더 지난 지금까지도 새로운 번역본은 나오지 않고 있다. 포크너가 진정으로 미국 최고의 소설가이고, 20세기 미국 문학의 대표자이며, 자신들이 평생 그것만 파고서도 먹고 살 만한 위대한 작가라면, 어디 한 번 포크너의 작품을 한 권이라도 더 번역해서 대중화시켜보라 이거다. 국립중앙도서관에서 검색해 보면 1990년부터 2006년까지 전국 대학의 영문과 대학원에서 심사를 통과한 석, 박사학위 논문 가운데 포크너에 관한 것만 100여 편에 달하고, 그중 <음향과 분노>인지 <소리와 분노>인지 <고함과 분노>인지에 대한 개별연구만 20여 편에 달한다. 어째서 그렇게 중요한 포크너 작품의 번역본을 한낱 코미디로 전락시키는가? 이런 식의 엉터리 번역본이 판을 치는 한, 개념 없는 출판사나 무관심한 전공자나, 독자로부터 날카로운 비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