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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의 모택동-
*모택동(1893~1976)
모택동은 청조말기인 1893년, 호남성의 성도인 장사 부근의 상담현에서 태어났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는 빈농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평생의 동료였던 주은래나 주덕과 마찬가지로 프롤레타리아와는 거리가 먼 태생을 갖고 있다.(주은래는 학자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주덕은 운남성의 군벌이었다) 모택동의 아버지는 자수성가한 자작농으로 약간의 토지도 소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모택동을 비롯한 자식들에게 지나치게 인색하였고 자신의 장남인 모택동에게 고등교육을 시킬 생각도 갖고 있지 않았다. 가족들에게 인색하고 사랑을 줄줄 모르는 냉담한 성격의 아버지에게 모는 반항심을 품게 되었고 이러한 비뚤어진 부자관계는 그가 일생을 조반자로 살아가게 되는 토대와 배경이 되었던 것 같다.
1920년 대에 중국에서 공산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사회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꾸고 싶어하는 젊은이들의 이상과 의지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 대부분은 가정에서 권위적인 아버지와의 불화끝에 집을 뛰쳐나온 10대 후반~20대 초반의 열혈 청년들이었다. 1917년의 러시아 혁명에 깊이 영향받고, 서양 열강에게 허덕이는 후진적이고 봉건적인 중국을 공산주의라는 도구로 개혁하려는 이상을 품고 있었지만, 동시에 공산주의는 아버지 세대의 낡은 가치에 저항한다는 의미도 아울러 갖고 있었다. 1922년 부터 시작된 공산주의 운동이 그 뒤에 모든 종류의 역사와 전통을 거부하고 그것을 파괴하는 것에 전력을 기울였다는 사실이 이것을 증명한다.
다시, 젊은 반역자의 이야기로 돌아와 보면, 모택동은 호남성의 부유한 성도인 장사로 나와, 변발을 잘라버리고 중학교를 다니며 여러가지 진보적인 사상들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났을때는 혁명군에 가담하기도 하고 사범학교를 다니기도 했다. 그는 여기서 양창제라는 교수를 만나는데, 이 교수는 모의 일생에서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사람이었다. 1920년 모는 양창제의 딸과 결혼하는데, 그녀의 이름은 양계혜였다. 엄밀히 말하면 양계해는 모의 두번째 부인이었다. 고집센 그의 부친이 정해준 얼굴도 모르는 여인과의 결혼이 그의 최초의 결혼이었지만 이것은 모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는 족쇄와도 같은 인연이었을 뿐이다.
양계혜는 두 아들을 낳았는데, 1930년 국민당경찰에게 붙잡혀 처형당하고 말았다. 모택동은 1920년 북경으로 가서 중국에 공산주의를 최초로 전파한 사상가와 만나게 된다. 바로 '이대교와 진독수'가 그들이다. 21년에는 중국에 최초로 공산당을 만드는 데 힘을 보태기도 했으며, 이때 공산당의 호남성 대표로 선출되었다.
모택동이 1927년, 정강산으로 들어가 산도적(?)들을 모아 중국 공산당 최초의 군대인 '홍군'을 만든 것은 그의 일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 사실 그가 홍군을 만들기 전에는 그는 그저 공산당 내의 열성적이고 착실한 간부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공산당 내에는 그보다 영향력이 높은 중요한 인사들이 얼마든지 있었다. 그가 만든 홍군은 주덕군과 합하면서 더욱 규모가 커졌고 31년에는 서금소비에트를 세우고 그 주석이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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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경의 모택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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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안 시절의 모택동- 1935년 장정을 끝마치고 안착한 공산당의 수도 연안의 토굴집(요동)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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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택동과 주은래- 문화대혁명 당시 공산당 내의 서열 1위는 모택동, 2위는 주은래, 3위는 모의 후계자로 지목된 임표였으며 4위는 강생, 5위는 모의 야심찬 부인이었던 강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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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택동과 하자정- 양계혜가 처형당하고 1930년에 재혼한 부인인 하자정은 모의 아이를 셋이나 낳았지만 그에게 이혼당하고 말았다. 1934년, 홍군이 국민당군에게 쫓겨 대장정에 오르기 직전, 하자정은 아직 어린 두 남매를 강서성의 농부에게 맡긴다. 험난한 피난길에 아이들을 동반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 모택동은 중일 전쟁이 끝난 후에야 아이들을 찾아나설 수 있었지만 어디서도 농부와 아이들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1937년, 연안에서 하자정은 모의 딸을 낳았지만 모가 다른 여인과 바람을 피운 사실을 알게 된다. 이에 공산당 특별법정에 남편을 고발하지만, 법정은 오히려 모의 편을 들어 하자정모녀와 모와 바람을 피운 통역을 연안에서 추방시키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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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개석과 모택동- 1945년 8월 찍은 사진. 일본의 항복 후, 두 사람은 중경에서 만나 회의를 갖는다. 서로의 속내를 감추고 만난 독재자들,,, 4년 후 공산당군(인민해방군)은 내전에서 승리하여 정식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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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과 모택동(1954)- 둘 다 너무 뚱뚱하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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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택동과 장남 모안영- 양계혜가 낳은 장남, 모안영은 동생 모안청과 함께 러시아에서 교육받았지만, 50년대 후반, 중소분쟁이후(어쩌면 그 이전부터) 모택동은 자신의 아들들을 러시아로 보내 교육시킨 것을 후회했다. 장남인 모안영은 6.25 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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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를 즐기는 모택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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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모택동- 1950년대부터 임표에 의한 모택동의 우상화는 시작되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이것은 당연시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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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향응과 모택동- 하향응은 송경령과 더불어 중국혁명의 어머니라고 할만한 인물이다. 그녀는 또한 중국의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화가이기도 하다. 국부 손문(쑨원)의 동지이자 국민당의 좌파였던 남편 료중개가 암살당한 후 그녀는 송경령과 더불어 국민당내부의 좌파를 이끌며 공산당과의 연합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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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택동과 중국의 마지막 황제, 부의- 공산당 인사들은 부의를 신중히 다뤘다. 부의는 청조의 마지막 황제로서 공산주의가 어떠한 인간유형도(심지어는 황제조차도) '공산주의적 인간'으로 개조해 낼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산 증거였기때문이다.( 장개석이라면 그를 간단히 죽여 없앴을 것이다) 1967년,문화혁명의 와중에 부의는 방광암에 걸려 돌봐주는 이 없이 병원의 한구석에서 쓸쓸히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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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택동과 에드가 스노우- 에드가 스노우는 중국홍군, 더 정확히 말해, 중국 최초의 공산주의자들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린 책 "중국의 붉은 별"로 유명해진 미국출신의 기자이다. 그는 전 생애에 걸쳐 죽는 순간까지도 변함없이 중국공산당과 모택동을 신뢰했다. 그는 중국과 대결관계에 있는 소련이나 모택동에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해 철저히 나쁘게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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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워홀의 실크스크린 작품, 마오(Mao)-
모택동의 실책은 1956년의 반우파 투쟁과 58년의 대약진 운동, 그 후의 문화대혁명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그는 6억 5천 만명의 중국인민들을 대상으로 어처구니없는 공산주의 체제 실험을 반복했고 자신의 권력의지를 드러낸 문화대혁명에서 중국의 경제, 문화상태를 약 20년 정도 후퇴시켰다.
56년에 우파로 지목된 사람들은 아무 잘못도 없이 우연히 우파로 지목되었으며 그후 마오가 죽을때까지 약 22년 간 강제수용소에 격리되어 죽는 것 보다도 못한 삶을 연명했다.
58년 시작된 3면 홍기운동의 일환이었던, 대약진은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농부의 아들로 죽었던 모의 한계를 분명히 드러내 주었다. 대약진 기간동안 아이들은 엄마의 품을 떠나 병영화된 탁아소에서 집단으로 양육되었으며 이는 가족이라는 제도자체를 없애려는 모의 어리석은 야심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또한 참새와 파리가 해조, 해충이라는 모의 주장에 따라 중국인들은 들판으로 내몰려 이것들을 잡아야했다. 모의 주장에 의하면 이것들을 없애야 농업생산량이 늘고 쾌적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중국인들은 공공장소에 나갈때마다 파리채를 휴대해야 했다. 어디든 집밖으로 나가려면 파리채가 필수였다. 재화가 귀한 중국에서 혹여 파리채를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그 사람은 외출을 포기하고 집안에만 있어야 했다.
또한 "사유재산의 부정"를 가장 기본으로 하는 공산주의 사회에서 집의 담벽은 사유재산을 상징하는 것이라 해서 온 중국의 담을 철거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이에 따라 인민들은 담벽을 허물었고, (당연하게도)도둑은 증가했다. 가장 엽기적인 사건은 1965년에 있었다. 800년 역사를 자랑하는 북경성을 허물어 버린 것이다. 북경 외곽을 둘러싼 수십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성벽을 모의 명령 한마디에 철거시켜 버린 것이다. 이제 우리는 박물관에서나 북경성을 볼 수 있을 뿐이다.거대한 북경성의 성벽이 무너지는 소리는 중국의 자랑스러운 역사와 전통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였다.
중국에는 "500년마다 한번씩 반드시 황제가 일어선다" 는 전설이 있다. 1960년대에 중국인들은 이 황제가 모택동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에게는 야심찬 공산주의체제의 설계도가 있었고 개인숭배에 세뇌당한 중국인민들은 이 설계도가 약속하는 천국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천국은 계급투쟁을 핵심으로 하여 사람들의 창의성과 의지를 서서히 말살시키는, 평균화된(평등이 아니라) 자급자족사회였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