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다수 국민이 한국전쟁 당시 미군을 자유민주주의 용사로 찬양하는 한국사회에서 미국의 본질인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20세기 당시 여러 역사적 증거들이 입증해주듯이,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트루먼 독트린(Truman Donctrine)에 따라 신제국주의(New Imperialism) 국가였다. 예를 들어 미국은 1946년 그리스 내전에 개입하여 과거 나치에 협력했던 왕당파를 지원했고, 해방 이후 한반도에서도 친일 경찰과 친일파들을 앞세워 민중을 탄압하는 이승만을 지원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한 이후 패망한 일본을 제국주의자들을 앞세워 재건한 것도 미국이었으며, 프랑스가 과거 자신의 식민지였던 베트남을 침략하여 식민지 전쟁을 일으키자, 제국주의 국가 프랑스를 위해 전쟁비용 80%를 대신 부담한 나라도 바로 미국이었다.
(미국 CIA의 과테말라 개입을 다룬 영어 서적)
미국의 중남미 지역 내정간섭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행보를 알 수 있는 아주 좋은 예시다. 니카라과, 칠레, 엘살바도르, 브라질, 멕시코, 쿠바, 아이티, 아르헨티나, 콜롬비아, 그레나다 등 수많은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이 미국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굶주림과 독재정치, 학살, 빈곤, 영양실조에 시달려야 했다. 말 그대로 미국의 중남미 통치는 대다수 중남미 민중에게 노예와 같은 삶을 강요하고 협박했다. 미국이 이러한 짓을 자행한 이유는 너무나도 분명했다. 그것은 바로 연합과일 회사(United Fruits Company)와 같은 자국 기업의 이익을 마음껏 보장해줘야 했기 때문이다. 오늘 얘기하고자 하는 과테말라 또한 미국에 의해서 주권과 인권 그리고 권리가 무참히 짓밟혔으며, 미국의 제국주의가 얼마나 추악한지를 알 수 있는 아주 좋은 예시일 것이다.
(미국의 해리 트루먼 대통령, 진성 반공주의자로 공산주의를 막겠다는 이유를 들어 무수히 많은 나라의 주권을 침해했었던 인물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던 1945년 3월 과테말라에서는 미국이 후원했던 유비코 정권이 종결되고, 새로운 내각이 등장했다. 유비코 정권은 14년 동안 미국의 지원을 받아가며 독재정치를 자행하다가, 전국적인 시위로 대통령 자리에서 쫓겨났다. 당시 미국이 후원한 유비코 정권 하에서의 삶은 아주 열악했다. 전 국민의 2%가 과테말라 전체 토지의 60%를 소유하고 있는 반면 국민의 50%는 전체 토지의 3%를 경작하면서 살았다. 심지어 원주민들의 경우 50센트도 안되는 일당으로 살아가는 수준이었다.
(하코보 아르벤스 대통령의 사진, 그는 아레발로 정권을 이어 과테말라를 더 진보적이고 정의로운 국가를 만들고 싶어했다.)
그러던 1950년 과테말라 국민은 38세의 젊은 대통령인 하코보 아르벤스(Jacobo Árbenz)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아르벤스는 소수 기득권층 위주의 사회를 개선하여 인민위 권익을 성장시키기 위한 진보적인 정책들을 추진하고자 했다. 사실 유비코 정권 이후 집권한 아레발로도 개혁을 실행했지만, 아르벤스는 이보다 더 급진적인 정책을 추구했다. 1951년 3월 과테말라의 대통령이 된 아르벤스는 취임사에서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
“우리 과테말라가 가진 모든 부를 다 합쳐도, 대부분의 평범한 국민의 생명과 자유, 품위와 건강 그리고 행복만큼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그 부를 우리는 잘 분배해야 합니다. 덜 가진 사람들은 더 혜택을 보고, 더 가진 사람들도 혜택을 누리되 덜한 정도로 하자는 것이지요. 무슨 방도가 있겠습니까? 우리 국민이 처한 가난과 열악한 건강 상태, 교육의 결핍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출처: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p.434~435
아르벤스는 법령 900을 발표해 272헥타르보다 크고 경작하지 않는 토지를 유상으로 몰수하기로 했다. CIA의 1952년도 비망록에는 과테말라의 상황이 “사회 개혁과 민족주의적 정책을 호전적으로 지지하는 공산주의자들의 영향” 때문에 “미국의 이해와 상반되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을 정도다. 르벤스는 대규모 토지개혁 정책을 예고하고, 그 첫 단계로 유나이티드 프롯 컴퍼니 소유 토지 947㎢(2억8,646만 평)에 대한 국유화에 착수했다. 이 회사가 소유한 전체 토지 2,226㎢는 과테말라 전체 경작지의 약 1/5이었는데 놀랍게도 이 중 90% 이상이 놀리는 땅이었기 때문에 농민들이 분노할 수 밖에 없었다. 아르벤스 대통령은 유나이티드 프롯 컴퍼니에 보상금으로 60만 달러를 주겠다고 제안했지만, 미국 입장에서는 가만히 눈 뜨고 토지를 몰수당하는 것 그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곧 에드워드 버네이즈를 이용해 미국 본국에 찌르고 CIA를 이용해 쿠데타를 계획했다.
(연설하고 있는 아르벤스 대통령)
사실 미국이 주도한 과테말라의 쿠데타는 1951년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피비 포춘(PB Fortune)’이라는 비밀공작을 승인하면서 개시됐다. 이에 따라 진보적인 아르벤스 정부의 정복공작은 시작되었으며, 1951년 6월 미국의 <뉴욕 타임스>는 “과테말라라는 암 덩어리” 운운하며 "아르벤스 대령이 대통령이 된 지 2달밖에 안된 시점에 이미 과테말라 정치에 대한 깊은 실망과 환멸"이 넘쳐나고 있다고 주장했을 정도였다. 미국의 정치공작은 참으로 집요했다. 유나이티브프루트는 과테말라가 공산주의의 위협을 받는다는 기사를 활용해 의회에 로비하는 데 당시 돈으로 50만 달러를 썼고, 이를 통해 미국 의회와 여론을 자신들 편으로 만들었다.
미국 정부가 과테말라에 무기 공급을 중단하자 아르벤스 정부는 동구권 국가인 체코로 부터 무기를 사들였는데, 미국은 서구 언론사에 이러한 무기 거래의 영향을 과장해서 전달했다. 제10회 미주대륙회의에 참석하고자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 갔던 존 포스터 덜레스는 과테말라를 강조하며 "공산주의 세력의 침입"을 규탄한다는 내용의 결의안을 추진했으며, 결과적으로 과테말라만 결의안에 반대표를 던지도록 정치공작을 했다. 심지어 NBC 방송 중계는 과테말라의 붉은 정권이라고 공공연하게 떠들어 댔다. 아르벤스 정부에 대한 미국의 공작은 이러한 여론 및 정치공작에 바탕을 둔 것이다. 아래는 인도 역사학자인 비자이 프라샤드가 쓴 <워싱턴 불렛>에서 인용한 내용이다.
“유나이티드프루트는 최고의 PR 전문가인 에드워드 버네이스를 고용해 미국 의회에 공산주의 음모론을 퍼트리도록 했다. 그는 "공산주의 선전물에서 유나이티드프루트라는 이름이 나올 때마다 이를 미국으로 대체해서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라고 썼다. 버네이스는 유나이트드프루트와 미국이 유의어이며, 그렇기에 유나이티드프루트를 공격하는 것은 미국을 향한 공격으로 봐야 한다는 논리를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것이 핵심이라고 보았다. 버네이스는 <시카고트리뷴>, <뉴스위크>, <뉴욕타임스>, <타임> 등의 기자들에게 유나이티드푸르트의 자금을 뿌려 과테말라의 공산주의자에 대해 보도하도록 했다. <뉴욕타임스>에 게재된 1951년 7월 14일자 무기명 보도에서, 기사 작성자는 고산지대에 있는 고대 마을에 사는, 글도 모르고 주류 세계의 흐름과 동떨어진 마야인이 공산주의가 또 다른 형태의 노예제임을 본능적으로 깨닫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고 썼다. 이 기자는 고산지대에 사는 그 누구도 직접 취재하지 않았고, 누군가의 말을 인용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유나이티드프루트가 준 보도자료를 갖다 썼다.”
출처: 워싱턴 불렛 p.88~89
미국의 CIA는 과테말라의 우익 군부 잔당들과 접촉하여 아르벤스 정부의 전복을 위한 구체적인 작전계획을 수립했다. 아르벤스가 1953년 8월 12일 2차 토지 수용을 단행한 후, CIA 작전조정위원회(Operation Coordinationg Board)는 아르벤스를 최우선 순위로 놓고 작전을 진행할 것을 명령했다. CIA는 300만 달러를 투입해 카스티요 아르마스(니카라과의 독재자 소모사의 지원을 받앗던 인물)의 용변단을 훈련시키고 전체 군 수뇌부가 아르마스를 지지하도록 만들려고 시도했다. 미국이 과테말라 체제 전복 시점부터 현재까지 이용하는 정권 교체 매뉴얼을 간단하게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고 할 수 있다.
1.‘여론’을 공작하라
2. 현지에 적임자를 임명하라
3. 군 장성을 준비해라
4.경제가 비명을 지르도록 만들라
5. 외교적으로 고립시켜라
6. 대규모 시위를 조직하라
7. 청신호
8. 암살 연구
9. 부인하라
더 나아가 CIA는 1953년 9월 11일, 대과테말라 하이브리드 전쟁 보고서를 작성했는데, 이 보고서의 핵심 내용은 경제적 압박이었다. 보고서는 과테말라 정부의 경제가 압박에 취약한 점을 고려해 석유 공급, 해운업, 주요 수출입 물품 등 가능한 부문을 겨냥한 비밀 경제 전쟁 방식이 적용될 것이라고 써 있는데, 아래에 후술된 칠레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미국의 닉슨 정부가 아옌데 정부에게 가했던 살인적인 경제제재 계획 및 국가 뒤흔들기 방식은 과테말라에서 선행학습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54년 6월 CIA에서 훈련받은 용병들이 온두라스와 니카라과 소재 기지를 떠나 과테말라로 침투했고, 미국은 항공지원을 해가며 이들을 도왔으며, 아르벤스 정권을 전복하고자 했다. 6월 27일 아르벤스는 저항해봐야 소용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사퇴했다. 정권을 무너뜨렸다.
(미국의 지원한 과테말라 군부 쿠데타를 표현한 풍자화)
(과테말라 독재자와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
쿠데타로 인해 지도자 자리에서 사임한 아르벤스는 고별 라디오 연설에서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일은 유나이티드 프룻 컴퍼니가 미국 고위층과 결탁해 벌인 일이며, 앞으로 20년간 피로 얼룩진 파시스트 독재가 계속될 것이라고 경고했는데, 놀랍게도 아르벤스의 발언은 현실이 됐다. 과테말라에서의 체제 전복이 성공한 이후 미국의 덜레스 국무장관은 미국 대중에게 연설하는 자리에서 소련 공산주의에 대한 민주주의의 승리라는 말이 안되는 발언을 하며 쿠데타를 극찬했다.
쿠데타 이후에는 친미정부가 개혁을 깡그리 되돌렸지만 1960년부터 쿠바와 니카라과의 지원을 받은 좌파 반군들이 속속들이 일어나기 시작해, 1996년까지 자그마치 36년간이나 내전이 지속되었다. 과테말라 정부 공식기관인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Histrorical Charification Commision)’는 1999년에 발표한 보고서에서 과테말라 정부군이 다수의 마야 원주민 마을에서 저지른 626건의 대량학살사건을 상세히 설명하고, 이를 “제노사이드”로 규정했는데, 이 보고어에 따르면 CIA를 비롯한 미국 정부기관들이 정부군의 학살행위를 직간접적으로 지원했으며, 학살행위로 인한 전체 사망자는 20만 명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물론 미국 정부는 당시 과테말라의 친미적인 정권이 미국이 기본적인 인간의 가치를 옹호하는 국가라고 믿었지만, 문제는 1980년대 레이건 행정부만 보더라도 실상은 딴판이었다. 당시 뉴욕 타임스의 칼럼니스트 앤서니 루이스는 칼럼에서 소위 반송이라는 명분 아래 미국이 라틴 아메리카의 독재자들을 지원하고 있다고 주장했으며, 과테말라의 경우 정부군이 헬기를 타고 농촌 마을에 들이닥쳐 벌초용 칼로 여성들을 난도질하고 오두막을 불태우고 주민들의 눈알을 뽑아내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는 보도를 상세히 소개했다. 루이스는 당시 과테말라 친미 정부의 게릴라 소탕작전을 제노사이드에 가까운 대량학살로 규정했다. 뻔뻔스럽게도 미국은 이후 자신들이 세운 친미 정부 하에서 자행된 학살을 돕고 방조했지만, 자신들의 관여한 행위를 부정했었다. 아래는 <워싱턴 불렛>에 나오는 내용이다.
“아르벤스가 타도되고 공산주의자들이 살해당했을 때 미국은 관련 책임을 부인했다. 그러나 내심으로는 전율했다. CIA 국장 앨런 덜레스는 주 온두라스 미국 대사 화이팅 윌로어에게 쿠데타(실제로 덜레스는 혁명이라고 불렀다.) 전문을 보냈다. 나중에 월로어는 덜레스가 보낸 전문이 사실상 나 아니었으면 혁명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고 말했다. 미국 정부는 1966년 제정된 정보공개법에 따른 언론인의 정보 공개 요청을 거부하거나 무시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활동을 은폐해 왔다. 소련이 붕괴하기 전까지 그 어떠한 문서도 공개되지 않았다. 이러한 문서 공개 거부는 과테말라군이 반대 세력에게 자행한 학살을 미국이 조장하고 관여하며 공모한 것과 함께 이루어졌다. 미국 국무부의 바이론 바키는 1968년 3월 내부 비망록에 CIA가 과테말라에서 용인하고 자행한 폭력이 라틴 아메리카 내에서 우리의 이미지, 우리가 대의명분으로 내세우는 것의 신뢰도 측면에서 지대한 문제를 가져다주었다고 적었다.”
출처: 워싱턴 불렛 p.117~118
(과테말라에서 자행된 학살을 표기한 지도)
(이후 진상규명 과정에서 발견된 학살당한 이들의 유해)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미국의 덜레스 국무장관은 과테말라가 공산 제국주의에서 구원됐으며, 이는 미주 국가들의 위대한 전통에 영광스러운 새 장을 추가한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러한 덜레스의 발언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미국은 뻔뻔스럽게도 자신들이 정치공작과 독재정치 수립을 이러한 방법으로 옹호하고 미화했다. 과테말라 정부 전복작전에 참여했던 한 예비역 해병대 대령은 이후 책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미국)의 성공은 결국 31년간의 억압적인 군부 통치와 과테말라인 10만여 명의 죽음을 가져왔다.”
출처: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p.441
놀랍게도 당시 과테말라 정부 전복애 참여했던 일부 인사들은 1961년 존 F. 케네디가 주도했던 피그스만 침공작전 때도 모습을 드러냈다. 미국에 맞서 진보적인 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던 하코보 아르벤스는 사임하면서 “20년간 피로 얼룩진 파시스트 독재”가 계속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이는 지나친 낙관이었다. 피로 얼룩진 과테말라의 파시스트 독재는 40년이나 지속됐기 때문이다. 과테말라 사건 당시 이를 직접 두눈으로 지켜본 젊은 아르헨티나의 젊은 여행객이 있었다. 그는 쿠데타군이 학살극을 벌이자 아르헨티나 대사관으로 피신했다. 결국 그는 혁명에서는 무장투쟁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됐으며, 몇 년 뒤 이를 실천하게 됐다. 그가 바로 피델 카스트로와 더불어 쿠바 혁명을 주도한 체게바라다(Che Guevara).
참고문헌
노엄 촘스키, 김보경, 『미국이 진정으로 원하는것』, 한울, 1997
노엄 촘스키, 황의방, 『패권인가 생존인가』, 까치, 2004
올리버 스톤 피터 커즈닉, 이광일,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들녘, 2015
올리버 스톤 피터 커즈닉, 이광일,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I』, 들녘, 2015
김남기, 『반공주의가 외면하는 미국역사의 진실』, 어깨걸고, 2021
비자이 프라샤드, 심태은, 『워싱턴 불렛』, 두번째테제,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