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정규군을 파병하던 1965년 쿠데타를 일으켜 남베트남에서 정권을 잡은 인물이 있다. 그 쿠데타를 일으킨 인물은 남베트남에서 10년간 대통령을 했던, 응우옌반티에우(Nguyễn Văn Thiệu)였다. 응우옌반티에우는 1963년 즈엉반민(Dương Văn Minh)주도했던 응오딘지엠(Ngô Ðình Diệm) 암살 쿠데타에 가담했던 인물로 한국의 박정희와 같은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박정희가 1950년대 이승만 제거 계획에 참가했던 인물이라는 점과 이후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인물이라는 점에서 티우랑 매우 흡사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티우와 더불어 같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인물이 있었다. 그가 바로 남베트남의 수상이자 공군 사령관이었던 응우옌 까오 끼( Nguyễn Cao Kỳ)다.
응우옌 까오 끼는 1930년 9월 8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지역이었던 하노이에서 태어났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한참이던 1949년 응우옌 까오 끼는 18세의 나이로 베트남국(States of Vietnam)에 있는 프랑스측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즉 이 기간 동안 프랑스 식민지군으로 복무했고, 여기서 만난 인물들 중에는 구정 공세 시기 베트콩 용의자를 즉결처분한 응우옌응옥로안(Nguyễn Ngọc Loan)이나 같이 쿠데타에 참여하게 되는 응우옌반티에우 등이 있었다. 1952년부터 디엔비엔푸 전투가 한참이던 1954년까지 끼는 프랑스령 모로코에서 조종사로 훈련받았으며, 거기서 중위 계급까지 올랐다. 마이클 매클리어에 따르면 베트남인으로는 최초로 프랑스 조종사가 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 또한 대다수의 남베트남군 군인집단이 그렇듯이 프랑스 식민지 군대에서 복무했었다. 제네바 회담 이후 베트남으로 귀국하여 즈엉반민 휘하의 남베트남군 공군에서 복무했다.
1961년부터는 탄손누트 공항에 있는 공군부대에서 복무했으며, 소령자리까지 올랐고, CIA와 협력하여 북베트남에 침투시키는 비밀공작을 계획하기도 했었다. 1963년 응우옌반티에우와 더불어 응오딘지엠을 제거하는 쿠데타에도 참가했으며, 1964년에도 즈엉반민 휘하에 놓여 있었다. 1963년 당시 끼는 미국이 가장 신뢰하는 전투기 조종사였다고 마이클 매클리어는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에 언급하기도 했다. 응오딘지엠 암살 이후 남베트남에서는 군벌들의 쿠데타가 일어났는데, 1965년 끼는 티우와 함께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내부 쿠데타를 종결시켰다. 당시 미국은 1964년 통킹만 사건을 빌미로 남베트남에 지상 병력을 파병했는데, 끼는 친미파로서 이를 적극지지했다.
1965년 6월 19일 티우와 끼는 새로운 정부를 출범시키는 것과 동시에 미국의 맥 조지 번디(McGeorge Bundy)와 맥스웰 테일러(Maxwell D. Taylor) 대사에게 전문을 보냈는데, 주요 내용은 “남베트남 사령관이 타당한 이유로 미군의 지원을 요청할 경우,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전투에 투입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마이클 매클리어의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에 따르면 당시 수상이었던 응우옌 까오 끼는 수상임에도 여전히 편대장 시절의 공군 제복을 자랑삼아 입고 다녔으며, 장식이 하나도 없는 검은색 제복이나 선홍색 작업복에 보라색 스카프를 두른 차림으로 다녔다고 한다. 당시 남베트남 주둔 미군 총사령관이었던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William Westmoreland)하고도 성향이 비슷하여 아주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고 한다. 그 둘은 사이가 좋았는데 당시 수석 보좌관이던 부이 디엠(Bùi Diễm)은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한쪽에는 끼 수상과 나(부이 디엠), 그리고 장관 몇 명이 앉았고 반대편에는 테일러 대사,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이 앉았다. 매주 이렇게 만나 토의하는 내용은 주로 사이공이나 다낭 항에 도착하는 미군들의 환영 방법이었다.”
수상이었던 끼는 아주 반민주주의적인 면모도 아주 강하게 보였다. 그는 대놓고 “사람들이 누구를 영웅으로 생각하느냐고 묻는데, 나한테 영웅은 딱 하나밖에 없다. 바로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다”라고 할 정도로 형편없었다. 또한 그는 남베트남에서 민주화 시위를 전개하던 불교도들을 탄압하는 데도 거침이 없었다. 1966년 4월 그는 다낭 지역에서 집회를 하는 불교도와 시민들을 진압하기 위해서 4,000명의 남베트남 해병을 파견했고, 직접 현장에 나가서 진압작전을 지휘했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수천명의 불교도와 시민들을 반정부 시위자 혹은 공산주의자로 몰아 투옥시켰다.
또한 그가 집권하던 시기 남베트남의 부정부패는 심하면 더 심해졌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군대의 무능력도 사라지지 않았다. 1966년만 하더라도 12만 4,000명이아 되는 남베트남 병사들이 탈영했으며, 사실상 미군의 지상병력으로 남베트남을 유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의외로 끼는 현실적인 시각을 가지기도 했었다. 대표적으로 북베트남과 공산당 그리고 호치민에 대한 입장이 그러했다. 그는 1965년 <뉴욕 타임스>의 제임스 레스턴과의 인터뷰에서 공산주의자들이 남베트남 정권보다 “사회정의와 자주독립에 대한 국민의 열망에 더 가까이 다가서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베트남 전쟁이 끝난 이후 응우옌 까오 끼는 호치민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었다.
“그는 베트남 인민들에게 존경 그 자체였다. 그는 프랑스는 물론 다른 외침에 대항하는 투쟁에 언제나 앞장섰다. 내가 어려서 철이 없었을 때, 대부분의 베트남 사람들은 호치민을 대단한 애국자로 생각했다. 나도 그를 대단히 칭송했었다.”
끼는 1967년 남베트남에서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도 참여했었고, 대통령이 되진 않았으나 남베트남 정권의 부통령으로 복무하며 티우 정권의 핵심으로 남았었다. 그러던 1971년 대선에 도전하고자 입후보하려 했지만, 후보사퇴 압력을 받고 물러났다. 1975년 4월 남베트남이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공세로 함락될 위기에 놓이자, 티우와 더불어 미국으로 망명했다. 혁명군의 탱크가 사이공 대통령궁을 통과하던 4월 30일에 USS 블루리지 호에 올라 미국으로 갔다고 한다. 미국에 가서는 캘리포니아 웨스트민스터에 정착했고 거기서 대략 28년 동안 술집을 운영했다.
그러던 2004년 남베트남 지도부로서는 최초로 통일된 베트남으로 귀환하여 현 베트남 정부와 협력하는 방향을 선택했다. 이에 따라 그의 부인과 자녀들 또한 귀환했다. 마지막 여생을 현재 베트남 정부와의 협력 및 화해의 길을 선택했기에, 적잖은 베트남계 미국인들에게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었다. 특히 현 베트남 정부에 대한 미국측의 투자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2005년 베트남 전쟁 30주년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기도 했다.
“그들(반공주의 성향의 베트남계 미국인들)은 지식도 없고 자존심도 없다”
여생을 베트남에서 다가 2011년 7월 23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프 병원에서 호흡 곤란으로 사망했고, 이후 그의 유해는 캘리포니아주 휘티어에 있는 로즈힐스 불교 묘지에 안치되었다. 향년 80이었다.
응우옌 까오 끼는 분명 프랑스군에 복무한 민족반역자였고, 존경하는 인물이 히틀러라 할 정도로 몰지각한 인물이었다. 또한 불교도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는 베트남 전쟁에서 민중이 공산당을 지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마음속으로는 현재 베트남의 국부인 호치민을 존경했다. 또한 남베트남 지도자로선 최초로 통일 베트남에 귀국하여 투자에 힘썼다. 즉 과거에 대한 청산을 본인 스스로 했다는 점에서 나름 개과천선한 인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런 점에서 상당히 흥미로운 인물이기도 하다.
참고문헌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마이클 매클리어, 유경찬(역), 을유문화사, 2002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I』, 올리버 스톤 피터 커즈닉(공저), 이광일, 들녘, 2015
https://en.wikipedia.org/wiki/Nguyễn_Cao_K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