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6월 6일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방 연합군은 노르망디에 대규모 상륙작전을 감행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성공한 이후 미군은 파죽지세로 프랑스의 수도 파리를 향해 진격해 나갔고, 그해 8월엔 프랑스 레지스탕스와 합동작전을 벌여 수도 파리를 해방시켰다. 프랑스 파리를 해방시킨 연합군은 네덜란드로 진격하기 위해 1944년 9월 이른바 마켓가든 작전을 개시했다. 네덜란드의 에인트호번과 네이메헌을 점령하는데 성공했지만, 작전의 궁극적인 목적이었던 라인강의 교량을 확보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해 10월 영미 연합군은 독일 국경근처까지는 도달했지만, 프랑스와 네덜란드에서 많은 전투를 치렀던 연합군은 휴식 상태에 들어갔기에 더 이상 진격하지 않았다.
(벌지 전투 당시 독일군 진격도)
(아르덴 숲, 벨기에에 위치한 아르덴 숲은 침엽수림이 빽빽한 숲으로 전차가 다니기에는 부적합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연합군의 진격을 방어하기에만 급급했던 히틀러는 서부전선에서의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한 마지막 도발을 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벌지 전투였다. 독일에게는 아르덴 대공세(Ardennes Counteroffensive)라고 불리는 이 전투는 아돌프 히틀러가 서부전선에서 마지막으로 감행하는 대공세였다. 쉽게 말해 독일 측에 있어서 서부전선의 생사가 걸린 마지막 도발이었다. 1944년 11월 10일 히틀러는 이른바 아르덴 공세를 취하기 위해 준비하라는 명령에 서명했다. 동프로이센에 있는 전시 본부 늑대의 성채에서 머물던 히틀러는 12월 7일 최종 공격 안을 승인했고, 히틀러의 명령을 받은 서부전선의 독일군대는 최종 공격을 준비하기 위해 행동에 나섰다.
1944년 12월 15일 당시 벨기에의 숲을 따라 형성된 아르덴 전선에는 6개의 미군 사단이 지키고 있었다. 이 가운데 3개 사단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부터 여러 전투를 치르며 지쳐있는 상태였고, 다른 3개 사단은 새로 배치된 부대였다. 이 지역의 전선은 1944년 10월부터 거의 2개월간 양측 모두 휴전상태에 들어간 상태였고, 12월엔 추운 겨울까지 맏이하여 양측 모두 다 공격할 기미는 보이지 않았었다. 따라서 영국의 전쟁영웅(아프리카 전선에서 사막의 쥐라고 불림) 버나드 몽고메리 장군과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총 지휘했던 아이젠하워도 아르덴 숲에서 독일군이 대공세를 감행할 것이라 생각지 못했다. 거기다 벨기에의 침엽수림인 아르덴 숲은 독일군의 주력 군대인 전차가 다니기엔 적합하지 못한 지역이었기에, 그런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만토이펠 장군, 만토이펠은 동부전선과 아프리카 전역 그리고 서부전선에서 활약했던 독일 측 장군이다.)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아르덴 전선에서 공격을 준비했던 독일군은 25만 명의 병사와 수천의 전차와 장갑차로 이루어진 3개 군이 공격 개시 지점으로 이동했고, 이 부대들은 12월 15일 자정 공격 지점에 집결했다. 집결한 독일군은 야전원수 룬트슈테트와 동부전선에서 활약했던 발터 모델 장군 그리고 전차부대를 지휘하는 발터 폰 만토이펠 장군의 지휘를 받았다. 1944년 12월 16일 아르덴 전선에 집결한 독일군의 공격이 시작됐다. 공격을 감행한 독일군은 1940년 이른바 서부전선 전역에 걸쳐 감행했던 전격전(Blitz Krieg)을 감행하여 휴식상태에 있던 미군들을 놀라게 했다.
(독일의 티거 전차, 티거2로 불리는 이 전차는 미군의 주력전차인 M4 셔먼전차를 매우 손쉽게 파괴하는 무시무시한 전차였다. 티거의 활용으로 미군 기갑사단은 물량에 의존하는 전술로 맞섰다.)
(벌지 전투 당시 진격하는 독일군, stg 44 소총을 들고 있는 것이 매우 흥미롭다.)
독일군의 기습공격에 저항하던 미군은 결국 거센 공격에 밀렸고, 아르덴 지역의 북부전선은 오마 브래들리 장군이 2개의 기갑사단을 지원부대로 급파하라고 지시했음에도 독일군에게 돌파 당했다. 북부전선이 돌파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히틀러는 기뻐 날뛰며 12월 18일 방송을 통해 국민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어주며, “독일 군대가 디시 진격하고 있다, 크리스마스까지는 지도자에게 다시 안트베르펜 시를 선물로 바칠 것”이라고 말했다. 독일군의 진격이 벨기에의 도시 바스토뉴까지 진격할 것이라는 것을 히틀러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르덴 공세의 소식은 프랑스 정부에게 다시 한 번의 공포를 각인시켰다. 왜냐하면 4년 전 경험했던 1940년의 경험을 절대로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벌지 전투가 격렬해지자, 미군 사령부는 자신들의 최정예 부대를 전투에 투입했는데, 그게 바로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 나온 101 공수사단이었다.
(드와이트 아이젠 하워 장군,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지휘했던 아이젠 하위는 벌지 전투에서도 미군을 지휘했으며 전쟁영웅이라는 타이틀을 얻은 그는 1953년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하지만 독일군이 목표로 노리던 벨기에의 바스토뉴는 101 공수사단이 투입되었지만, 독일군의 격렬한 포위를 받고 있었다. 바스토뉴를 대상으로 한 포위전에서 독일군은 맹렬한 포격을 이 도시에 퍼부었다. 여기에 투입됐던 공수부대들도 독일군 포격에 몸을 숨기기 바빴다. 바스토뉴에서 포위전이 격렬해지자, 독일 측은 미군에게 ‘항복요청’을 보냈다. 독일측의 항복 요청에 대한 미국의 맥컬리프 준장의 반응은 다음과 같았다. ‘Nuts!’, 즉 우리말로 하자면, ‘미친놈!’, ‘또라이!’, ‘개념 상실!’을 뜻했다. 맥컬리프의 이런 반응은 항복 요구를 보냈던 만토이펠과 같은 독일군 장성들을 화나게 했지만, 미군 지휘관과 사병들의 사기를 올리는 계기가 되었다.
(바스토뉴 포위전 당시 101 공수부대 대원들, 이는 2001년에 나온 영화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도 잘 묘사되고, 콜오브듀티 유나이티드 오펜시브와 콜오브듀티 WWII에서도 잘 묘사된다.)
독일측 항복 요구가 있던 다음날 날씨가 좋아지면서 미군의 C-47 수송기가 바스토뉴에 포위된 병사들에게 보급 물자를 대량으로 공급했다. 공급 물자를 받은 부대는 다시 반격에 나섰고, 어느 시점에서 전세는 다시 연합군에게 유리해져 있었다. 바스토뉴를 포위했을 때, 만토이펠의 전차부대는 그 지역을 점령하려 했는데, 사기를 회복하고 지원병력과 물자보급까지 받은 미군의 반격을 받은 만토이펠은 바스토뉴를 점령하지 못했다. 거기다 크리스마스를 전후로 패튼 장군의 미군 기갑사단이 대량으로 진격하면서 만토이펠의 독일 전차부대들도 분쇄되었다.
(반격하는 미군 공수부대, 크리스마스 전후로 해서 미군은 독일군에 맞서 반격에 나선다.)
(전선을 사수하는 미군)
크리스마스를 전후로 해서 벌어진 전투는 결국 미군의 승리였고 12월 26일은 벌지전투의 전세가 완벽히 연합군쪽으로 역전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2일 뒤인 12월 28일 벌지 전투는 다시 한번 전개되었지만, 그 다음해인 1945년 1월 17일 패튼 부대에게 완벽히 궤멸당했던 만토이펠 군대가 철수 하면서 벌지 전투는 연합군의 승리로 끝이 났다. 2개월간 지속된 벌지 전투는 양측이 붙었던 대규모의 군사작전이었고 양측 모두 수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 미군 또한 꽤나 많이 전사하여 전사자가 대략 2만 명 가까이 됐다. 벌지 전투에서 독일군이 대대적인 반격을 가했음에도 패배했던 이유는 미군의 보급력 때문이기도 했지만, 독일군을 지휘해야할 전투 장교들의 부재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독일군의 많은 장교들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략전술의 문제도 들 수 있다. 1939년부터 1942년까지 독일군 진격의 대명사였던 전격전은 이미 연합군이 전략상 간파한 상태였다. 즉 벌지 전투는 독일군의 이런 모순들이 겹치고, 히틀러가 승리하겠다는 개인적 욕심이 겹치며 패배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결국 벌지 전투 패배 이후 독일군은 서부 전선에서 더 이상 반격하지 못했고, 이것은 제3제국의 몰락이 머지않았다는 사실을 알려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