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아드랑 계곡 위치)
1964년 통킹만 사건 이후 베트남 전쟁에 전면적으로 참전하게 된 미국은 1965년 3월 3500명의 미해병대를 다낭에 상륙시킨 것을 시작으로 남베트남에 주둔하는 미군 숫자를 증가시켰다. 당시 베트콩과 전투를 치르고 있던 남베트남군(ARVN)은 전투에서 베트콩에게 참패를 당하기 일쑤였다. 1963년 1월 압박 전투에서 적은 규모의 베트콩에게 대패했던 남베트남군은 1965년 빈지아 전투(Battle of Binh Gia)와 ‘동 쏘 아이 전투(Battle of Dong Xoai)’ 등에서도 패배했고, 1965년 5월 말 소규모의 베트콩 부대가 꽝응아이 근처에 있던 남베트남군 여단을 매복 공격하여 남베트남군 2개 대대를 궤멸시키기까지 했다.
(이아드랑 전투 당시 투입된 헬기 부대)
군대로써 허접한 모습을 보이던 남베트남군을 대신하여 미군 정규부대가 베트콩과 호치민 루트를 통해 증파된 북베트남군을 상대하기 시작했고, 남베트남에서 벌어지는 전투는 미군이 주로 주도하게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미군과 북베트남 정규군(NVA), 베트콩이 대략 4일에 걸쳐 치르게 된 전투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베트남 중부 고원지대에 있는 계곡 근처에서 벌어졌던 이아드랑 전투(Battle of Ia Drang)다. 사실 이 지역은 미군이 들어가기 11년 전인 1954년 6월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베트남에서 철수하게 된 프랑스군이 마지막으로 베트민에게 대패했던 장소였다. 안케 전투(Battle of An Khê)에서 프랑스군은 베트민에게 최소 5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고 패배했었고, 이것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마지막으로 치러진 전투였다.
(진격하는 북베트남군)
1965년 9월 미국은 16000명이나 되는 규모를 자랑하는 제1 기병사단과 1600대의 차량 그리고 435대의 헬기를 중부 고원지대 끝부분에 있는 안케기지에 배치해 놓았다. 그 부대는 미군의 최정예 부대로써 1876년 윌리엄 커스터 장군 휘하에서 원주민을 학살했고, 1950년 한국전쟁 당시에는 노근리 지역에서 300명의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했던 부대였다. 즉 이런 부대가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을 섬멸하기 위해 베트남 중부고원지대에 최신식 헬기까지 지원하며 투입된 것이었다. 이렇게 미군 최정예 부대가 중부고원지대에 배치되자 북베트남군 수천 명이 호치민 루트(Ho Chi Minh Trail)를 따라 현지의 베트콩 부대와 합류했다. 그들은 추퐁산(Chu Pong Mountain)에다 기지를 구축했고, 미군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M-16 소총을 들고 있는 미군)
1965년 10월 19일 북베트남측 특공대가 12명의 미군 그린베레 대원과 남베트남 병사 14명 그리고 현지 산악부족(Montagnard) 400명이 지키고 있던 플레이미(Plei Mi) 기지를 2일간 공격하여 9명의 그린베레 대원을 전투에서 사살했다. 당시 미군은 ‘은빛 작전(Operation Silver Bayonet)’하여 작전을 3단계로 나누어 진행했는데, 10월 중후반에 북베트남측 특공대의 공격이 있자, 구조작전인 1단계 작전을 진행했고, 10월 말에 1단계 작전이 끝나자 2단계 작전으로 나갔다. 2단계 작전은 헬기의 공중지원을 받는 미군 제1 기병사단이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을 추격하여 섬멸하는 작전이었다.
(지역을 수색하는 미군 병사)
1965년 11월 14일 미군은 캄보디아 국경지대 근처에 있는 이아드랑 계곡에 대규모 헬기를 동원하여 제1 기병사단 공중 강습 부대를 착륙시켰다. 한국전쟁 참전용사이자 당시 공중 강습 부대 지휘관이던 할 무어 중령은 산기슭 어긴가에 거대한 북베트남군 기지가 있다는 말을 들었었는데, 실제로 응우옌 후 안이 이끄는 부대는 미군이 착륙한 LZ X-Ray 근처 지하에 있었다. 상륙한 할 무어의 군대는 북베트남측의 탈영병 한 명을 포로로 붙잡았다. 탈영병 한 명은 “현재 산에 3개 대대로 이루어진 1600명의 병사가 있다.”고 말했다. 사실은 그보다 더 많은 북베트남군 병사 3000명이 그 근처에 있었지만 말이다.
(포위 당한 미군 지도)
그날 오후 미군 강습 부대가 거의 다 착륙하자 전투가 시작되었다. 3000명 이상의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1954년 프랑스군을 포위하여 섬멸했던 안케 전투에서처럼 미군을 포위했고, 포위 당안 할 무어의 부대는 북베트남군의 포위에 당황했다. 그 다음날인 15일에는 북베트남군과 미군이 정면에서 맞붙었다. 이 전투에선 미군과 북베트남군이 마주 볼 수 있을 정도였고, 북베트남군은 미군을 섬멸하기 위해 끊임없이 공격했다. 전투 과정에서 미군은 전투 헬기의 화력 지원과 포병의 지원을 쏟아부었다. 또한 미군 사령부에 연락하여 항공모함에서 전투기 공습까지 지원받았다.
(이아드랑 전투 둘째날을 묘사한 그림)
이 전투에서 18000발의 포격이 있었고, 무장한 UH-1 헬기는 3000발 이상의 로켓탄을 쏘았으며, 심지어 B-52 폭격기까지 이 전투에 동원되었다. 미군 측의 이런 화력 지원으로 인하여 엄청나게 많은 사상자가 북베트남군과 베트콩 측에서 나왔다. 하지만 이런 화력 지원으로 인하여 미군 또한 아군 네이팜 폭탄에 희생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인 11월 17일 북베트남군은 할 무어 중령 휘하의 미군이 지키고 있던 곳을 4번 더 공격했고, 할 무어 중령의 부대는 포병대의 지원과 막강한 헬기의 기관총 사격으로 막아냈다. 이 과정에서 미군은 북베트남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어 냈다.
(이아드랑 전투 당시 미군을 지휘했던 할 무어 중령)
1965년 11월 18일 이아드랑 전투는 끝이 났다. 이 전투에서 북베트남군 1700명 이상이 사망했던 데에 비해 미군은 308명이 전사했다. 거의 전사자 비율이 6 대 1 수준이었다. 그러나 북베트남군은 11월 18일 날 다른 대대를 매복시켜 LZ Albany 지역에 있던 미군을 섬멸했다. 공격한 북베트남군이 미군에게 너무 근접해있었기에 포병지원을 부를 수 없었고, 결국 미군은 155명이 사망하며 올버니 지역에서 북베트남군에게 패배했다. 비록 올버니 지역에서는 미군이 패배했지만, 6대1 전사자 비율로 보았을 때는 미군의 승리였기에 미국 정부는 이아드랑 전투에서 자신들이 승리했다 주장했다. 물론 비율만 가지고 보았을 때, 이아드랑 전투는 미군의 승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은 이아드랑 전투에서 승리한 것이지 베트남 전쟁에서 승리하지는 못했다. 그런 점에 있어서 이아드랑 전투는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