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못 읽는 남자 - 실서증 없는 실독증
하워드 엥겔 지음, 배현 옮김 / 알마 / 2009년 7월
평점 :
절판


 

    알렉시아 사이니 아그라피아(Alexia sine agraphia) 

    즉, '실서증 없는 실독증'. 이렇게 풀어도 어렵다.
    그냥 확 까발려서 쉽게 말하자면, 글을 쓸 수는 있는데 읽을 수는 없는 상태란다.
    후두엽의 특정한 피질, 뇌의 시각 영역이 손상되어 읽는 능력이 상실되는 아주
    드물고 특이한 병이다.

    이 책의 작가, '하워드 앵겔'은 10여권의 탐정소설을 쓴 작가다.
    책에 대한 욕심이 많고 읽을 게 없으면 시리얼의 광고까지 읽을 정도로,
    1주일에 10권의 책을 읽는 독서광이다. '인쇄되어 있는 모든 것에
    중독되어 있는 환자'라고 스스로를 지칭할 정도로 그는 '읽기'와 '쓰기'가
    자신의 천직이자 삶의 모든 것이라던 남자.
    그저 독서를 좋아할 뿐인 일반인들도 어느 날 갑자기 저런 웃기지도 않는 병에
    걸리면 미칠 지경인데 글을 쓰는 작가인 그에게는 사형선고나 다름 없었다. 

    방금 전에 나도, 내가 쓴 윗글을 다시 읽으면서 어색한 문장 하나를 고쳐 썼다.
    그렇다.
    글쟁이에게는 꼭 필요한 부분, 자신이 쓴 글을 다시 읽고 교정 혹은 수정을 하는
    퇴고의 과정을 하워드는 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이 무슨 짖굳은 신의 장난인가. 

    그가 어느 날 - 그러니까 저 이름도 긴 병과 만난 날 - 아침,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마당에 떨어진 신문을 주으러 나갔었다. 늘 보던 신문인 것은 알겠는데 왜 그런지
    글자의 뜻을 알 수가 없었다. 마치, 뜻 모르는 외국어를 보는 듯한 지독한 낯설음.
    눈 앞에 펼쳐진 활자가 알파벳인 것은 알겠는데 도대체 이게 무슨 단어들이며 무슨
    문장들이란 말인가. 친구들이 장난을 쳤나? 생전 본 적도 없는 어느 나라의 글자인가? 

    그는 단어를 읽을 수도 뜻도 알 수가 없었다. 심하게는 자신의 이름과 나이, 주소까지도
    기억나지 않았고 종종 주변 인물들을 기억해내는데 상당한 고생을 해야만 했다.
    그도 모르는 사이 그는 뇌졸증을 앓았다는 진단을 받는다. 다른 증세도 아니고 작가에게
    글을 읽지 못하는 병이라니. 실제로 그는 본문에서 독자에게 죄송하다고 서술했다.
    자신은 퇴고를 못하므로 글이 어색할지도 모르기에. 

    그는 약 3개월에 걸쳐 병원과 재활원 치료를 받으면서, '반드시 다시 읽어 보이겠다'라는
    악착 같은 고집과 열성으로 글자 스펠링의 한 자 한 자 읽어내려고 노력을 했다.
    나처럼 컴퓨터로 열심히 글을 써도, 그는 바로 직전에 자신이 쓴 글을 읽을 수가 없었다.
    친구들이 자신의 글을 읽어주면 그걸 듣고 내용을 기억해서 어렵사리 수정을 해나갔다.
    거기다 그는 선천적으로 왼손이 기형으로 태어나서 오른손 만으로 타자를 쳐야 한다.
    그가 어떻게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했는지.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자가 어떤 각고의 노력으로 다시 이렇게 책으로 독자들을 만났는지의
    긴 여정을 보여준다. 동시에 '실서증 없는 실독증'을 앓게 된 뇌졸증 환자의 고통이 어떠
    한지도 생생히 보여준다.  

    솔직히, 나는 책의 앞,뒷면의 홍보글을 보고, 자신의 경험에 비춘 '책 못 읽는 남자'의 소설
    인 줄 알았다. 그래서 중간에 조금 실망은 했지만 그가 자신이 지금까지 썼던 탐정소설의
    주인공인 '베니 쿠퍼맨'을 내세워 저 병을 앓은 채 사건을 풀어가는 새 소설이 나왔다고
    하니 조금은 마음이 놓인다. 

    나는 읽는 내내 너무나 무서웠다.
    마치 그 책이(용기 내어 책을 낸 하워드에겐 미안하지만) 무슨 바이러스라도 되는 양 읽으면
    읽을수록 나도 그 병에 전염될까봐 전전긍긍하는 마음으로 두려운 기분을 끝까지 떨쳐낼 수
    없었다.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혹시, 나도 저런 병에 걸리면 얼마나 큰 좌절을 느낄 것이며
    나의 유일한 행복인 독서를 못한다는 것은 소름 끼치도록 새까만 암흑에 떨어진 기분일 것이다.
    물론 책 읽어주는 사람을 고용하거나 오디오북을 이용해 시각이 아닌 청각을 통해 책을 읽을 수는
    있겠지만 그건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 하워드가 고집스럽게 다시 '눈'으로 읽기를 바랬듯이.
    눈을 통해 들어온 글자 개개들이 뇌에 전달되어 뜻을 찾고 의미를 부여하며 때로는 영상으로
    조합되면서 저장되는 그 경이로운 기분을 어떻게 버릴 수 있단 말인가.
    눈으로 맛보는 단어들의 - 이 세상엔 너무나 멋진 언어들이 많다! - 그 아름다운 형상을 뺏기다니.
    정말이다.
    저런 병을 피하기 위해 내가 좋아하는 담배를 끊으라면 당장 그 개비들의 허리를 동강낼 수도 있다.
    읽는 것 만큼 쓰는 것을(창작 활동을) 미치도록 좋아하는 나에게 형벌이 내린다면 저것만큼 끔찍한
    것이 또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나는 저 병이 무서웠다. 

    그래서 포기하지 않고 노력해서 작가의 길을 계속 걸어나가는 하워드 앵겔이 존경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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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건강법 - 개정판
아멜리 노통브 지음, 김민정 옮김 / 문학세계사 / 2008년 12월
평점 :
절판


 

    

    '아멜리 노통브'의 책을 처음 읽었다. 
    우연히, 다른 것 때문에 서점 안에서 '먹을 것'을 찾다가 구석진 곳에서 만난 그녀의 책,
    [살인자의 건강법]
    솔직히 고백하자면, 제목에 끌렸고(오랜만에 추리물이나 읽어볼까 하는 내심으로)
    책 뒷표지에 있는 그녀의 미모에서 나오는 묘한 매력에 끌렸다.
    (노려보는 듯 그러나 감미로운 눈빛이 <제 3제국>에서 나오는 '안토니오' 닮기도 했었고) 
    그리고, 더 솔직해지자면, '프랑스 문단에 아멜리 노통브 신드롬을 불러 일으키고
    천재의 탄생이라는 찬사를 받은' 이라는 그 문구가 궁금증을 일으켰다.
    도대체 내용이 어떻길래? 어떻게 썼길래?  

    소설 속에서, 대문호인 프레텍슈타 파슈(젠장, 이 어려운 발음의 이름은 책을 덮을 때까지도
    외워지지 않아서 컨닝을 해야만 하다니!)
노작가가 엘젠바이베르플라츠라는 병에 걸려서
    (왜! 그냥 '연골암'이라고 하면 안돼?! 혀가 꼬일 지경이라고! ㅡ.,ㅡ) 시한부 인생 두 달 밖에
    안 남아서 기자들과 인터뷰 하는 형식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정말이지, '내가 지금 드라마 시나리오를 읽고 있는 건가?' 싶을 정도로 그녀의 소설은 온통
    노작가와 기자와의 대화로만 구성되어 있다. 물론, 그 때문에 지루하지 않아서 끝까지 읽어낼
    수 있었지만. 엄청난 비계 덩어리에 추한 얼굴, 괴팍한 성격으로 기자들에게 마구 퍼붓는 파슈의
    거칠고 예의 없고 때로는 선정적이면서 지극히 괴짜스러운, 그러나 무지하지는 않은 폭언들이
    재밌었기에 다행이긴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아멜리! 

    당신, 정말 너무하잖아! 아멜리, 당신이 글을 쓴 작가 본인이면서 스스로 스포일러를 하다니!!!!!
    세상에, 제목을 보고 '누가 살인자일까?' '살인자의 건강법이란 무엇을 은유적으로 혹은 무엇을
    꼬아서 말한 것일까' 하고 궁금해 했던 독자에게 책을 다 읽기도 전에! 그것도 초반부에 누가
    살인자인지 미리 짐작하게 해주는 것은 너무 친절한 거 아닌가!
    내가 너무 눈치가 빠른 거야? 아니야, 당신, 아멜리...정말이지. ㅜ_ㅡ
    그런 식으로 쓰면 눈치챈단 말이야. 누구라도. 그게 좀 실망스럽긴 했지만, 왜 살인자가 살인자가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나름대로 재밌었어. 또.. 파슈 노작가의 입을 통해서 나온 꽤 괜찮은
    표현들을 건질 수도 있었으니까. 

    (p.13)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 사람이라면 작가가 되지는 않았을 거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내기 위해 글을 쓴다는 말씀이십니까?" 

    (p.95)
    "귀는 입술의 울림 상자요. 내면을 향한 입이라고. (......)
     단어들은 스스로 소리를 질러대거든. 자기 안에서 울려 나오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만
     하면 되지." 

    (p.97)
    "글을 쓴다는 건 소통을 하고자 하는 게 아니오. 왜 글을 쓰냐고 물었으니,
     매우 엄정하면서도 매우 배타적인 대답을 들려드리리다.
     그건 쾌감을 느끼기 위해서요. 달리 말해 쾌감을 느낄 수 없다면 절필해야만
     한다는 얘기지." 

    (p.195)
    "글은 말이 멎는 순간 시작된다오. 정말 신비스러운 순간이지.
     표현 불가능한 상태에서 표현 가능한 상태로 넘어가는 순간 말이오.
     말과 글은 교대로 이어지지 절대 겹쳐지는 법이 없다오." 

    물론, 파슈가 이렇게 점잖고 나름대로 지적인 대화를 한 것은 %로 따지자면, 전체 책
    분량의 극히 몇 % 뿐이다. 나머지는? 온통, 괴팍하고 상대의 말에 조롱하고 호통을
    치는 차마 입에 담기 뭐한 단어들까지도 서슴지 않고 자신의 교양없음을 과시하는
    말들 일색 뿐이다. 그럼에도 파슈의 대화 때문에 중독되듯이, 한 번 빨기 시작한
    빨대를 놓지 못하고 계속 쪽쪽 거려서 그 차가움 때문에 뇌가 마비될 것 같은 통증을
    불러 일으키는 밀크 쉐이크처럼. 파슈의 익살스럽고 괘변적이며 신랄한데다 굉장히
    거만스런 그의 대화가 어찌나 시원하게 공중을 향해 내질르는지.
    '촌철살인적인 대화'? 글쎄, 난 가려운 부분을 박박 긁어서 시원한 감마저 들던데. 

    결국, 아멜리 노통브가 책 속에 스포일러를 던지는 어이 없는 짓을 했어도,
    나는 그녀의 다른 책을 주문하고 말았다. 한 권만 더 보자, 그것을 보고나서도
    '도대체 왜 그녀의 소설이 천재라는 찬사를 받기에 마땅한가?' 라는 의문이 들면,
    내 타입이 아닌 거야. 그 찬사를 받았던 때가 92년도 였다는 것을 참작하더라도
    나는 도무지 그 정도의 왕관이 왜 주어졌는지 이해가 안되니까... 

    솔직히 나는 고프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어떤 천재가 만들어 놓은 걸작을 맛보고 싶다는 배고픔.
    이젠 웬만한 - 독특하고 괴짜스럽고 깜짝 놀라서 즐겁기까지 한 - 소재들을
    다 접하다 보니... 더욱 더 자극적이며 더욱 더 신선한 것이 먹고 싶어서 이 책에
    기대를 많이 했나 보다. 

    그래도, 이야기 속의 이야기, '소년과 소녀의 사랑' 이야기는 제법 괜찮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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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2moon 2009-12-22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 읽다가 겨우겨우 중간쯤 도달했는데(;),
결국엔 독서 완료를 못했답니다.
그녀의 책과는 안 맞는 듯.
몇 권을 더 소장하고 있는데, 나눔을 해야 할 것 같아요.

L.SHIN 2009-12-23 09:21   좋아요 0 | URL
웃기게도, 이 책을 쉬지 않고 내리 읽어버렸답니다.
중간에 책을 집어 던질 정도로 형편없지는 않거든요.^^;
파슈의 괴팍하고 재치있으며 유머러스한 조롱이 묘하게 계속 책장을 넘기게 만들더군요.(웃음)
문님이 가지고 있다는 다른 책은 뭔가요?
저는 이번에 [이토록 아름다운 세 살]이라는 것을 새로 주문했답니다.

마노아 2009-12-23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멜리 작가는 워낙에 지문 없이 대사로만 치고 받아요. 저는 '시간의 옷'이 가장 재밌었어요.
초기엔 무척 많이 읽었는데 어느 순간 지치게 만들어서 요새는 휴식 중이에요.^^

L.SHIN 2009-12-23 09:24   좋아요 0 | URL
대화로만 지면을 채운다는 것은 이 책만 그런 것이 아닌가 보군요.
그건, 작가의 개성일 수도 있지만, 상황을 묘사하는 부분은 많이 떨어지는 거 아닌가,
그렇다면 도대체 어디에서 프랑스 비평계들은 '문학적이다' 라고 하는 것일까? 하는 또 다른
의문이 드는군요. -_-
[시간의 옷]은 어떤 내용인가요?

솔직히, 전 '베르나르 베르베르' 책을 다 가지고 있지만, 그 사람의 책들은 하나도 질리지
않거든요. 아멜리처럼 괴짜지만 베르나르는 최소한 '독창적이고 실험적인' 면이 있으니까요.
어쨌거나, 이번 기회에 깨달은 것은 프랑스도 독일처럼 괴짜 작가를 좋아한다는 것...

무해한모리군 2009-12-23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괴짜.. 입도 걸고 ㅎㅎ
한권 정도는 읽을만한듯 해요.

L.SHIN 2009-12-23 09:35   좋아요 0 | URL
ㅎㅎㅎ
저는, '한 권 정도로 날 평가하지마' 하고 아멜리의 원망을 안 들으려고
두 권까지는 읽으려고 합니다.(웃음)

무해한모리군 2009-12-23 10:04   좋아요 0 | URL
전 세권읽었는데, 역시 한권이었어 했는걸요!
제게는 풍미가 너무 강한 음식임

L.SHIN 2009-12-23 17:00   좋아요 0 | URL
켁, 그럼 저도 '역시 한 권이었어'라고 외치게 될까요? ㅡ.,ㅡ

무해한모리군 2009-12-24 09:57   좋아요 0 | URL
뭐 다 저같겠습니까..
먼 산....
 
내 생애의 아이들 - MBC 느낌표 선정도서
가브리엘 루아 지음,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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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9살에서 13살 사이에 만난 '아이들'은 늘 내 머리 위에서 스팀이 피어오르게 했던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언제나 징징 거렸고, 짜증나게 만들었으며, 같은 어린이였던 나를
    무척이나 곤혹스럽게 만들었던 '괴물'같은 존재였었다.
    어릴 때의 아이들로 인한 안 좋은 추억 - 그들로 인해 애꿎게 어른들한테 혼났다거나,
    나도 어린데 어리광을 피워보지 못했다거나 하는 그런 유치한 이유들 말이다 - 때문에
    나는 어느새 '아이들은 정말 싫어!' 하는 생각을 가지곤 했었다. 
    (유치하지만 어쩔 수 없다. 지금도 나는 어린애니까)
   
게다가 어릴 때 부터 동년배 친구들은 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몸의 크기는 비슷한데 내가 생각하는 것들은 그들과 달랐기 때문일까.
    남들보다 어른이 빨리 된다는 것은, '아이구, 얘가 조숙하네' 하고 어른들의 칭찬이
    따르는 좋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쟤는 뭐야' 하고 동년배들의 따돌림이라는
    슬픈 점도 있기에. 그것은, 지금의 나, 그러니까 자라지 못한 - 상처가 치유되지 못한 -
    어린애를 안에 품은, 서투른 그러나 지독하게 냉정한 어른이 되게 만들었을지도 모를 일이야.

    2004년, 처음으로 어떤 작은 소녀가 내게 그런 쓸데없는 고집을 조금 부서트린 경험이
    있었다. 그 소녀는 글쎄, 몇 살 쯤 이었을까? 아마도..한..초등생 저학년? -_-
    (7,8살 정도?)
    내가 일하고 있는 사무실로 처들어 와서는 내게 초롱초롱하고 이쁜 눈으로 나를 쳐다
    보았다. 아주 뚫어지게. 그 당시 같이 일했던 어떤 동료가 데려온 딸이었는데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나한테 던져놓고 자기는 일 하러 가버린 것인지!!!! ㅡ.,ㅡ 
    나는 무시하고 계속 일하려고 했지만, 소녀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눈빛은 그 어떤 레이져
    보다도 강렬해서 결국 나는 백기를 들 수 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는 내 옆머리에 구멍이
    뚫릴 것만 같았으니까!

    나는  그 소녀한테, 

    "심심해..?" 

    소녀는 대답 대신 그냥 웃었던 걸로 기억난다. 
    나는 내 일을 방해 받지 않기 위해서 소녀에게 A4 종이 1장과 아무 결제도장이나 주면서 말했다. 

   "이걸 찍으면서 놀아." 

    어린 소녀에게 색연필 대신 결제도장을 주면서 찍고 놀으라니, 지극히 나답지 않은가.
    하지만 나는 지금도 그렇고, 그 때도 그랬지만 나는 어린 아이들을 다룰 줄 모른다.
    그럼에도 신기하게 그들은 늘 나를 좋아해곤 했다. 그렇다.
    어린이들은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외계인이라는 것을.  
    소녀는 재밌게 도장을 찍으며 놀다가 A4 1장이 다 채워지면 내게로 왔다.
    그럼 나는 새로운 종이를 주었다. 적어도 A4 1장을 채우는 시간 만큼은 난 자유롭게 일할 수 있었다.
    나중엔, 도장 찍기가 질렸는지 더 이상 하지 않았다. 그건 정말 곤란하다. 난 일해야 하니까.
    그래서 펜을 주며, 

    "자, 그럼, 집과 나무와 꽃을 그려봐." 

    그럼 소녀는 눈썹 휘날리게 그려가지고 왔다. 나는 칭찬해주고 또 다시 다른 제안을 하면
    소녀는 또 그림을 그려왔다. 그 소녀는 거듭되는 나의 칭찬에 기분이 아주 흡족해졌고
    왜 그런지 나에게 엉기기 시작했다. 굳이 내가 앉아 있는 의자에 올라오려는 것이다.
    소녀는 그것이 - 내게 자신의 체온을 나눠주는 것이 - 좋아함에 대한 표시였던 것이다. 
    그리고는 끝끝내 내 허벅지 위에 그 작은 몸을 잘도 포개어 앉는 것이다.
    결국, 나는 소녀를 허벅지에 올려놓은 꼴로 일을 하고 말았다.
    소녀도 고집이 있었고 나도 고집이 있었다. 소녀는 내 얼굴을 흐믓한 표정으로 봤던 기억이
    나는데, 그러던가 말던가 결국 나는 다리가 저려서 일을 중단하고 같이 놀아줘야 했다.
    소녀는 묘한 눈빛을 하고는 웃어줬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이 뜻이었겠지. 

    '도대체 이 사람은 왜 이렇게 덩치가 클까. 나이는 나하고 비슷한 것 같은데.'

     

    이 책, 가브리엘 루아의 [내 생애의 아이들]은 아마도 그 전에 선물로 받았던 것 같다.
    나는 아이들을 좋아하지도 관심도 없었기에 그녀가 왜 이런 책을 나에게 선물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녀가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당신은 언제나 자유분방하지. 어른과 아이가 공존하면서 살아." 

    그랬던 이유였을까. 나를 그 소설속의 아이들과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나도 그
    소설처럼 동화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해던 것일까. 지금도 고개를 갸웃거리긴 하지만
    이 책을 지금에서야 읽고 난 후의 기분은, 그 때 내게 이쁜 표정을 지어 보였던 소녀처럼
    아주 흡족한 상태로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수 있었다.  

    '가브리엘 루아'가 실제로 했던 교사 생활을 바탕으로 쓴 중, 단편들의 글들은 하나 하나가
    모두 바로 앞에서 상영되는 작은 드라마같이 이쁘고 동화스럽고 재밌으며 다정했다.
    고작 다섯 살 반 정도 밖에 안 되는 어린 아이들이 이쁘고 젊은 여선생님에게 드릴 크리스마스
    선물을 가지고 자신의 부모들을 달달 볶는 것에서의 오는 순수함과, (집요함과 더불어)

    "저의 엄마가 선생님의 양말을 뜨고 있어요. 정말이지 잠시라도 한 눈 팔면 안된다니까요.
     계속 지켜보고 있지 않으면 또 어딘가로 놀러갈 거에요." 

    "저는 아빠한테 분명 2파운드짜리 초콜렛을 달라고 했어요. 1파운드짜리는 모양새가 없잖아요?
     아빠가 아직 망설이고 있는 것 같지만 걱정마세요. 제가 2파운드짜리로 달라고 강조했거든요." 

    끝없이 펼쳐질 것 같은 눈발이 날리는 밤, 자신 집에 방문했던 선생님을 베를린 마차에 태워
    집으로 데려다 주기 위해 달리다가 마을이 보였다. 선생님이 '이 즐거운 시간이 끝나는 것'에
    대해 아쉬워 하자, 14살 남자 아이는 말 고삐를 돌리며, 

    "그럼 다시 되돌아갔다가 다시 이 길을 달릴까요?" 

    그 나이 청소년들이 그렇 듯, 어른스러워 보이려는 복장과 어른같은 섬세함을 지닌 채 아직은
    서툴지만 나름대로의 따뜻한 배려심을 발휘해 보이는 모습들은 나를 정말 즐겁게 해줬다.
    많은 아이들이 등장한다. 종달새처럼 노래를 잘 부르며 그 목소리로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보듬어 주는 아이, 임신만 하면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침대에 누워 있는 어머니를 대신해 혼자서
    모든 집안을 꿋꿋히 하는 집 보는 아이, 틀에 박힌 교육 보다는 산과 들로 다니면서 자연에서
    인생을 배우려는 아이... 

    1900년대 초이기 때문일까.
    그 당시 아이들의 순수함과 다정스러움, 솔직함 그리고 아이들을 사랑하는 여교사의 부드러운 마음이
    따뜻한 코코아 한 잔 마신 것처럼 너무나 편안했다. 

    물론, 알고 있었다. 어느 나라나 어느 시대나 아이들은 '순수함' 그 자체 만으로도 이쁘다는 것.
    입으로는 '난 얘들이 싫어'를 주절거리지만 막상 내 눈 앞에 있으면, 어느새 그들과 같이 놀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한다. 딱히, 내가 그들을 '어른스럽게' 이뻐해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들처럼 똑같이
    어린애기 때문에 같이 놀 뿐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게 좋은가 보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그냥, 그들은 외계 어린이인 내가 좋은가 보다. 

    아마도, 어느 때고 어떤 애를 만나도 그들은 또 다시 나와 놀자고, 내게 장난치느라 나를 잡고 있는대로
    흔들어 대겠지. 그러면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딱 하나 뿐이야. 같이 노는 것.
    저 여교사처럼 어른스럽게 애들을 이뻐하는 법은 모르거든.
    그래도 이 책을 읽고 난 후에 달라진 게 있다면, '모든 얘들이 다 짖굳은 건 아니잖아'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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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9-12-21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계 어린이'란 표현이 맘에 들어요. 악동의 눈빛을 갖고 있지만 의미심장한 미소도 지을 줄 아는 엘신님에게 딱이에요.^^
어린 아이 에피소드와 이 책에 대한 감상이 잘 어우러져 있네요. 읽으면서 내내 잔잔하게 웃을 수 있었어요. ^^*

L.SHIN 2009-12-21 13:27   좋아요 0 | URL
푸흐흐흐...
정확히 보셨네요. '악동의 눈빛'
온통 장난칠 궁리만 하고 있는 제게 딱인 별명이랍죠.^^

302moon 2009-12-22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렸을 적 그랬던 거 같아요.
꼬맹이였을 적에는 동갑의 친구들과 거의 못 어울리고,
저보다 어린 친구들이나 오빠들과 더 떠들며 놀았던.
새 친구들과 사귀었어도,
약간의 시간이 흐르면,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멀어지거나,
그들 쪽에서 서서히, 날 멀리했던 기억이 남아 있어요.
그런 이야기를 제 어설픈 소설에서 살짝 풀어낸 적 있는데,
혹 읽으셨을까? (웃음)
 
두뇌 비타민 - 세계 최고 아이디어맨들의 창의력 트레이닝 239
스테판 머마우 외 지음, 강수정 옮김 / 한겨레출판 / 2009년 6월
평점 :
절판


 

    내가 K에게 테라스에서 뜬금없이 말했다. 

    "여기서 계란을 떨어트릴 거에요. 깨지지 않게-" 

    "여기서요?"  

    '여기서'란 지상 5층이다. 2009년 내가 얻은 수확 중 가장 좋은 것은
    바로 이 친구(우리는 서로를 '벗'이라 부르지만) K를 얻은 것이다.
    워낙에 대화가 잘 통하고 나를 잘 챙겨주는 친구이기에 시시콜콜 내가
    생각하는 바를 서슴없이 이야기 하다 보니 저런 뜬금없는 소리도 내뱉었다. 

    나는 재밌는 것을 좋아한다. 

    나 스스로를 '또라이' 혹은 '괴짜'라고 지칭할 정도로 상상력이나 창의력이
    높은 편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어린애 같은 근성이 무척 많은 때문일 것이리라.
    실제로, 이 책에서 계속 강조되는 것은 '어린애의 눈으로 모든 것을 보아라'이다.
    나는 책을 펼쳐서 K에게 보여주었다. 

    "여기 봐요. 어떤 수단이나 재료를 써도 상관없이 깨지지만 않게 계란을 2층에서
     떨어 트리라는 실험을 하라고 하잖아요. 난 여기서 떨어트릴 거에요.(웃음)" 

    "어떻게요?" 

    난 내가 그린 그림을 보여주었다.  
    가로, 세로가 30×30cm 인 아주 질기고 튼튼한 비닐 안에 가득찬 솜이 들어 있고, 
    그 한 가운데에 날계란이 있는 [그림 1]과
    80~90% 정도만 채운 물이나 젤리류를 담은 같은 비닐 속 중앙에 날계란이
    한 가운데에 오도록 줄로 묶어 둔 [그림 2].
    그림을 본 K는 조금 미심쩍어 하는 표정을 보였다.
    그래서 나는 내가 왜 이런 방법을 택했는지 설명을 했다. 

    "솜은 충격을 흡수하기 때문에 단순하게 제일 먼저 생각한 거구요.
     두 번째 비닐에 왜 80-90%만 물이나 젤리류를 채운다고 했냐면,
     밑에 떨어질 때의 충격으로 비닐이 터지지 않게 여유 공간을 남겨둔 거에요." 

    이해력이 빠른 K는 내 말을 금방 이해했다. 물론, 실제 실험을 했을 때 생각치 못한
    변수가 있을 것이라는, 내 생각이 보기 좋게 실패할 것이라는 말은 쏙 빼버렸다.흐흐. 

    여기서 눈치 빠른 사람은 이 책이 어떤 녀석인지 벌써 알았을 것이다.
    그렇다.
    이 책은 실생활에서 쉽게 할 수 있는 창의력 훈련 제조기다.
    아주 다양하고 재밌는 갖가지 '제안'들은 해보고 싶은 의욕과 도전하고 싶은
    창의력을 샘솟게 한다. 한 페이지마다 늘 새로운 주제를 가지고 '이것을 해보아라' 라고
    제시하므로 매일 한, 두 페이지씩 보면서 재밌게 놀면 좋다는 생각을 했다.
    이게 중요한 뽀.인.트다. 

    재밌게 놀 것.
    즐겁게 상상할 것.
    반드시 꼭 직접 해볼 것. 

    두뇌는 상상력 혹은 창의력을 키울 때 매우 활성화 된다.
    어릴 때 왕성한 호기심으로 세상을 접했을 때는 누구나 그리고, 만들고,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기를 좋아했다. 어른이 되면서 부터 사람들은 더 이상 상상을 하지 않는다.
    그것은 매우 슬픈 일이다!!! 동시에 스스로 뇌를 썩게 만드는 주범이다. 

    회사에서 실적을 높이는 유능한 사람이 되고 싶든, 학교에서 똑똑한 수재가 되고 싶든,
    자신의 두뇌 지능 지수를 높이고 싶은 사람이든 모두에게 꾸준한 창의력 훈련은 필수품이다.
    몸의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하고 근육을 키우면 뭐하는가.
    뇌는 굳어가고 있는데.
    몸에 비타민이나 영양제가 필요하듯이 뇌도 필요하다.
    약을 먹을 필요는 없다.
    그저 우리는 매일 종이와 펜, 그리고 가끔씩 약간의 준비 재료만 가지고 있으면 된다. 

    그리고 자신의 뇌와 신나게 놀면 그만이다. 

    그러는 사이 본인도 모르게 새로운 뇌세포가 깨어나서,
    장담하건데 스스로 '어라, 나 똑똑해진 거 같아' 라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테니까. 

    * 흥미 유발을 위한, 내가 재밌다고 생각한 부분을 힌트로 주자면,
      (아직 120개 까지 밖에 못 봤고, 직접 해본 것은 몇 개 안되지만!) 

    (005번) 직선 4개와 동그라미 1개로 여러 감정을 표현한 상형문자 만들기
    (019번) 위에서 언급한 계란 깨지지 않게 떨어트리기
    (071번) 동굴 주민에게 '빨간색' 설명하기 (그들은 색의 이름을 모른다는 가정하에)
    (080번) 패스트 푸드 어린이 세트에 딸려 나오는 장난감을 주듯이 중세 시대의 어린이들에게
               점심 세트에 선물을 준다면 어떤 걸로?
    (104번) 현금 뿐만 아니라 다른 물건도 인출할 수 있는 CD기를 만들어라 

    감이 잡히는가? 실제로 해보면 훨씬 재미 있다.^ㅡ^ 

  

    정말이지, 내가 책에 별 ☆ 4개를 박아준 게 얼마만인지.
    두뇌 훈련에 창의력만큼 효과적이고 확실한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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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2moon 2009-12-10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쩐지 이 책, 나랑 통할 것 같아요.
엄청 끌어당기고 있어요. (웃음)
더 좋은 건 말이죠?
우리가 만나서, 같이 실험해보는 거예요. 어때요?:)

L.SHIN 2009-12-11 09:14   좋아요 0 | URL
그거 정말 좋죠! 실험은 원래 같이 하는 게 재밌거든요.
문님의 거주지부터 제가 있는 곳 까지의 수백 키로미터의 거리가 아주 사소한 문제로
자리 잡고 있기는 하지만 말입니다.(웃음)
 
네 이웃의 지식을 탐하라
빈스 에버르트 지음, 조경수 옮김 / 이순(웅진)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제목에 혹했다.
    지식을 탐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 것도 얻은 게 없었다.
    그저, 작가의 엉뚱하고 재밌는 필체에 몇 번 피식 했을 뿐.
    이래서 책은 직접 들춰보고 내 입맛에 꼭 맞는지 확인을 해야 한다.
    모니터 속의 책 표지와 제목, 책에 대한 간결한 홍보글만 보고 골랐다가는
    이렇게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물론, 모든 책의 평은 주관적이다.
    나에게는 별☆ 한 개 짜리 밖에 안 되는 책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별☆ 세 개 짜리 책이 될 수도 있다. 

    깊이 있고 해박하며 '지식 다운' 지식이 아니어도 상관 없다면,
    누구에게나 쉽게 읽힐 수 있는 일반적인 생활의 지식쯤 될까?
    이상하게도 나는 재치꾼 독일 작가를 자꾸 만나게 되나 보다.
    예전에 읽었던 '호어스트'의 [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이 아니지]와
    비슷한 필체와 익살이 들어 있어 읽는데 지루함은 없다. 

    내용에 비해 너무 거창했던 제목 - 끝내주는 낚시였다.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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