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브라운을 위한 청원과 시민불복종 -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정치평론집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지음, 서경주 옮김 / 지에이소프트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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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법치주의를 외치는 자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때때로 입법기관의 기능을 무력화하거나 사법부의 판단에 저항하지 않는가. 오히려 법의 테두리 안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선을 넘지 않으며 스스로 한계를 만든다. 철저한 준법정신과 규정을 준수하는 태도가 틀렸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법이 시민의 권리와 의무를 완벽하게 규정할 수 없고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을 만들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도덕의 최소한으로서 법은 자본과 권력을 보호하거나 기득권의 이익에 복무하는 경우가 더 많다. 법을 만들고 집행하고 판단하는 사람들은 대다수 시민의 이익을 위해 싸우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왜 우리는 침묵하고 외면하거나 분노하면서도 행동하지 않을까.

사백만 명의 노예는 독립전쟁을 통해 영국의 식민지에서 벗어난 미국인에게 어떤 존재들이었을까. 숨 쉬는 공기처럼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지극히 당연하고 합리적인 제도가 아니었을까. 종교는 신의 이름을 팔아, 자본가들은 산업 발전이라는 명목으로, 정치가들은 상충하는 지역 이기주의에 편승하며 노예제도를 공고히 했던 시절은 불과 160여 년 전 일이다. 노예제도가 상식이던 시대에도 몰상식한 존 브라운이 있었다. 폭력적이고 과격한 방법이 아니면 야만의 시대를 끝낼 수 없다고 판단했던 숭고한 정신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으나 그 무모한 도전은 실패로 끝나지 않고 미국 남북전쟁(1861~1864)의 도화선이 되었다. 급진적 노예제도 폐지론자의 삶은 비현실적이다. 존 브라운은 아들을 포함해서 21명의 추종자들과 하퍼스 페리의 병기고를 급습한다. 병기고에서 탈취한 무기로 노예들을 무장시켜 노예제도를 존치하려는 남부에 대항하려는 시도를 어떻게 볼 수 있을까. 반란을 일으키려는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결국 1859년 12월 2일 처형됐으나 그가 보여준 용기와 노력은 나비효과를 일으켰다.

헨리데이비드 소로는 1859년 10월 30일, 존 브라운을 위한 청원 연설을 통해 10년 전 「시민불복종」(1849)에서 보여준 인간의 존엄성, 시민들의 기본적인 권리와 정부의 역할, 사유하는 힘과 행동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존 브라운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반란의 과정에서 보여준 실천과 태도는 단순히 법을 위반한, 사회 질서를 파괴한 범법자로 규정할 수 없게 만든다. 군주제의 전통과 유교 문화가 관습적 태도로 전해지는 한국인의 관점으로 존 브라운을 바라보면 어떨까. 찬반 투표를 거칠 필요도 없고, 논쟁의 여지가 없을지도 모른다. 정부가 멕시코와의 전쟁 비용 충당을 목적으로 국민에게 인두세를 징수하자 세금납부를 거부하다 체포되어 투옥된 소로는 또 어떤 죄를 다스렸을까. 불순한 의도와 헌법 질서를 문란케 한 죄는 물론 선전선동을 일삼는 불순분자로 몰려 내란음모 내지 국보법 위반으로 중형을 선고받지 않았을까. 시절을 잘못 만났다면 이틀을 넘기지 못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을 수도 있다. 다행히 친척이 세금을 대답 후 풀려났지만, 소로는 스무 살에 하버드를 졸업하면서 5달러를 내야 졸업장을 준다는 사실에 분노하며 졸업장을 거부했으니 될성부른 나무였는지도 모른다.

우리에겐 『월든』(1854) 으로 잘 알려져 있으나 소로는 한 사람의 시민으로 정부의 부당한 명령에 저항하는 태도를 일관되게 보여준 반항의 아이콘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속박을 거부하고 자유롭게 살아가야할 권리가 있으며 이러한 ‘천부적 권리로서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정부와 개인 역시 지배와 복종의 불평등 관계가 아니라 대등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이 소로의 핵심 사상이다. 원주민인 인디언을 정복하고 노예제도를 유지하는 정부에 대해 소로는 소비지상주의, 속물주의, 대중오락, 분별없는 기술의존에 반대했다. 월든 호숫가의 삶은 반문명적 생태주의라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누구나 그런 삶을 꿈꾸지만 아무나 실천할 수 있는 삶이 아니라는 평가도 있다. 스콧 니어링의 『조화로운 삶』, 실화를 바탕으로 한 미드 ‘맨헌트유나바머’의 주인공 테어도르 카진스키의 『산업사회와 그 미래』 등은 여전히 또 다른 세상, 현실 밖의 삶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생각의 곁가지를 마련해준다.

독일 간첩 누명을 쓰고 투옥된 유대인 드레퓌스 대위가 무죄라고 주장하며 에밀 졸라가 「나는 고발한다」 공개선언문을 발표한(1898년) 시기보다 40여 년 앞서 소로는 존 브라운을 위한 청원 연설에 나선 것이다. 물론 이 책의 주인공은 소로가 아니라 존 브라운이다. 빅토르 위고는 이 소식을 듣고 1859년 12월 31일 《런던 뉴스》에 기고하면서 “존 브라운을 죽이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죄악이다. 그로 인해 연방에 잠재되어 있던 균열이 드러날 것이고, 머지않아 대혼란(실제로 ‘남북전쟁’이 터졌다)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말했다. 먼 훗날 말콤 X 는 “흑인 민권 운동에 같이 참여할 만한 백인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없다. 혹시 존 브라운이 다시 살아 돌아온다면 몰라도.”라고 대답했다.

어느 시대나 현실을 앞서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좀 더 멀리 바라보며, 체제에 균열을 일으키고, 변화를 시도했던 그들의 생각과 행동 때문에 인류는 조금씩 나은 세상을 만들어왔다. 존 브라운이 시도한 반란은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라 인상적이고 역사적 사건이었다. 오늘, 이 시대의 존 브라운은 누구인지, 혹시 내 생각과 행동이 존 브라운을 닮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보려면 그 목적과 방향 그리고 결국 누구에게 이익이 돌아가는지 생각해보면 된다. 우리에게 익숙한 노랫소리로 지금까지 남아 있는 존 브라운의 숭고한 ‘태도’는 여전히 우리에게도 깊은 울림을 준다.

Glory, Glory, hallelujah

His soul goes marching on

John Brown’s body lies a moldering in the gra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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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 정신
샤를 드 몽테스키외 지음, 이재형 옮김 / 문예출판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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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테스키외가 말하는 법은 모든 이법 이전에 존재하는 ‘자연의 법’으로서 새로 만들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원래 상태도 되돌려야 하는 것이다. 그 궁극적 토대는 루소처럼 ‘사회계약’이라는 인간 사이의 합의가 아니라 신의 지혜에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그 완벽한 종교적 실현은 기독교에 의해 가능하다. 정치적 자유는 오직 법 이후에 존재하며 오직 법에 의해 결정될 뿐이라는 주장은 프랑스 혁명 이전 중세적 가치관의 끝물에 놓인 금수저의 한계를 확인할 수 있다. 볼테르는 몽테스키외보다 다섯 살 연하고, 디드로와 루소는 23~24년 후에 태어났으니 완전히 다른 세대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 혁명의 사상적 단초를 제공했을 『사회계약론』과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을 비교할 수 없으나 사회를 보는 관점과 태도의 차이는 분명하며 법과 사회의 관계 설정도 전혀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갖는 의미는 법의 정신을 이해한다는 것은 이성과 실정법 사이의 간격을 이해한다는 주장이다. 개별적 존재로서 기능하는 다양한 개체들 사이의 합의된 질서와 규칙을 법의 정신이라 할 수 있다. 실정법에 대한 기본적인 정의와 태도와 달리 자연법과 만민법은 공화정(귀족정과 민주정을 포함한 개념으로 사용), 군주정, 전제정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고 적용될 수 있는데 몽테스키외는 이 책에서 그 정체들 사이의 차이와 적용의 문제를 꼼꼼하게 들여다본다.

로마는 처음에 혼합된 귀족정체였다가 혼합된 민주정체로 바뀌고 영국의 정체는 공화국의 성격을 상당히 지는 ‘혼합형 군주정체’다. 몽테스키외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분류 방법에 바탕을 두고 있으나 중도 군주제 형태를 띤 프랑스의 현실 정체와 유럽의 현실을 비교한다. 여러 나라를 여행하고 관찰하며 그 차이와 혼용을 통해 과거와 현재의 정치법과 종교법 그리고 정체에 따른 법의 의미를 분석한다. 전제정치(두려움)는 귀족적 전제정치와 국민적 전제정체로, 군주정체(명예)는 귀족정체와 민주정체로 나눌 수 있다. 공화정(덕성)은 이런 요소들이 뒤섞여 나타날 수도 있다. 몽테스키외는 미래를 예측하거나 더 나은 정체를 제안하는 대신 각 정체의 특징과 법의 역할을 설명하는데 치중한다. 물론 자유와 이성이 작동하는 범위와 한계, 그것이 제한받을 때의 위험성에 대한 경고도 잊지 않는다.

재미있는 주장 중 하나는 풍토이론이다. 유럽과 아시아 더운 지역과 추운 지역을 대비시켜 과학적 결정론이라기보다 운명론에 가까운 자의적 주장은 위험해 보인다. 물론 당대에 이와 유사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몽테스키외도 샤르댕의 《여행기》를 인용하며 자기 생각을 펼친다. 그러나 이는 결정론이라기 보다는 입법자들이 이러한 풍토에 맞서 효과적으로 법을 제정, 운용해야 한다는 주장에 가깝다. 법의 정신은 풍토에 대한 혹은 일반적으로 물질적 원인에 대한 도덕의 승리여야 한다는 의미에 가깝다.

입법권과 집행권 그리고 사법권의 분리 이론은 이 책의 핵심 사상이다. 권력은 절제되고 중단될 수 있어야 하며 당연히 조화를 이룰 때 가장 이상적으로 작동한다. 권력 분립은 현대 민주주의 정치 체제의 핵심 중 하나다. 1789년 인권선언문 16조, “인권이 확실하게 보장되지 않거나 권력이 분리되지 않는 모든 사회는 헌법을 갖고 있지 않다.”라는 선언은 대한민국의 짧은 정치사와 오늘의 현실을 성찰하게 한다. 국민의 대표인 입법기관을 존중하지 않는 집행권자 대통령, 집행자들에게 영향을 받아 사법농단을 일으킨 판사들, 독립성을 상실한 입법권자들의 행태를 우리는 매일 목도하고 있다. 보수와 진보 따질 것 없이 진영 논리에 매몰되거나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서만 날고기는 모습은 대한민국의 정체를 의심케 한다. 몽테스키외가 주장한 대로 삼권 분립의 균형과 견제가 이뤄진다면 적어도 지금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겠으나 비대한 대통령의 권한과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입법권과 사법권 또한 문제가 심각하다.

해설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몽테스키외를 사회학의 선구자로, 프랑스혁명의 선구자로, 자유주의의 선구자로 내세우는 것은 너무 성급한 해석이다.” 쓸데없이 덧붙여진 과장된 의미 부여와 지나치게 부풀려진 오독이 때때로 아전인수식 해석을 낳는다. 이는 아마도 몽테스키외가 전하고 싶은 생각과 주장이 방대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서문에서 “나는 이 책을 수도 없이 시작했고, 수도 없이 포기했다.”고 고백하며 “20년 동안 나는 내 책이 시작하고, 커지고, 앞으로 나가고, 끝나는 것을 보았다.”고 설명한다. 이 지난한 시간 동안 유럽을 여행하고 세상을 경험하며 생각이 바뀌고 사회를 보는 관점도 달라진다. 역사에 대한 평가는 물론 법이 갖는 역할과 의미도 일관성있게 유지될 수 없을 만큼 긴 세월이다. 전체 6부 31편으로 구성돼 있지만 내용은 1~13편(1~2부), 14~25편(3~5부), 26~31편(6부)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된다. 각각 구체적인 내용과 구성을 살피는 건 내 관심사가 아니나 다소 복잡하고 체계적이지 못한 면이 있으나 정치 체제에 따른 사회의 특징과 법의 의미를 살피려는 노력, 삼권 분립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논리적 주장, 당대 사회를 토대로 종교와 사회의 관계 그리고 법의 역할에 대한 깊은 고민과 그 결과는 이후 다양한 분야에서 여러 사람에게 영감을 주고 생각의 화두를 삼기에 충분해 보인다.

몽테스키외(1689~1755)는 16세인 1715년 백부의 고등법원 판사직을 세습한다. 배타적 특권 계층으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몽테스키외는 자신의 계급적 지위와 기독교적 윤리에 바탕을 둔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1748년 60세가 되어 펴낸 이 책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분류한 군주정, 귀족정, 민주정이 아니라 공화정, 군주정, 전제정이라는 세가지 정치체제를 중심으로 자신의 경험과 사유의 결과를 당대 현실에 맞춰 서술하고 있어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공화국은 ‘덕성이 필요하고, 군주국에는 ‘명예’가, 전제국에는 ‘두려움이’이 필수적인 조건이라는 주장이 인상적이다. 우리가 사는 21세기는 이제 민주주의가 인류의 대세로 자리잡았으나 그 정체와 무관하게 인간과 사회, 그 공동체 안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충돌은 오늘 우리가 가진 법의 정신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자연법, 만민법, 정치법, 종교법, 실정법 등 몽테스키외가 분류한 법들의 종류와 특징, 그 법들 사이의 논리적 모순과 현실 적용 문제를 적용하려는 데 이 책의 목적이 있는 건 아니다. 또한 법은 만들고 집행하고 판단하는 사람들의 것도 아니다. 시민들의 생각과 태도가 반영된 철학적 고민의 결과다. 정치 체제와 법의 정신은 바로 나, 우리가 만들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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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과 권리를 위한 투쟁 문예 인문클래식
루돌프 폰 예링 지음, 박홍규 옮김 / 문예출판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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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고시로 상징되는 ‘불멸의 신성가족’(김두식)은 이제 정치 권력의 정점에 섰다. 청산되지 못한 일제 잔당들이 또다시 헤게모니를 거머쥔 채 경찰, 검찰, 사학은 대한민국 사회의 근간을 위태롭게 한다. 이념과 진영 논리의 문제가 아니다. 상식과 현실은 그들만의 리그에 편입된 지 오래지만 언론과 대중은 비판적 안목없이 현실의 문제와 원인을 파악하지도 못하고 생존 경쟁에 매몰된다.

21세기에 들어 한국에서 전통적인 암기식 수험 중심의 법학을 타계하기 위해 학제적 방법을 통한 사회 현실의 인식과 사회개혁의 일환으로 로스쿨이 도입되었다. 그러나 예링이 지적한 대로 기계법학의 폐단은 여전하다. 거대한 고시학원으로 변질된 로스쿨은 한국의 수험법학 혹은 보수법학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너무 고급일지 모르지만, 그런 천박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예링의 『법과 권리를 위한 투쟁』을 읽을 필요가 있다는 박홍규의 맺음말로도 이 책의 의미는 충분히 설명된다.

“19세기 사람 예링도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황당무계한 이따위의 현실, 즉 수사와 재판이 판검사와의 연줄이나 권력과의 관계로 움직이는 이 더러운 현실에서는 그런 연줄이나 뒷배가 있는 사람들만이 그들의 이익을 위해 소송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고, 정의를 지키는 법이니 재판이니 하는 소리는 그야말로 그런 자들을 위한 헛소리에 그칠 것이다.” 판검사는 ‘권력을 위한 투쟁’을, 변호사는 ‘고수입을 위한 투쟁’을, 로스쿨 학생들은 ‘출세를 위한 투쟁’을 가열차게 멈추지 않는 현실에서 ‘법과 권리를 위한 투쟁’은 가능할까. 아니, 시민들의 권리를 위한 투쟁이 아니라면 법은 ‘법치주의’를 외치며 밥그릇을 챙기는 자들의 몫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는 예링의 지적이 오늘 우리 현실에도 유효하다는 사실이 뼈아프다.

1872년 빈 대학을 떠나며 강연한 내용이 근간이 되어 출판된 이 책은 Recht, 법 혹은 권리가 개인과 공동체를 위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돌아보게 한다. 보수적인 개념법학에 대한 비판으로 써 내려간 짧은 글은 강렬하고 인상적이다. 현실에서 우리가 겪는 경찰과 검찰 혹은 변호사의 면면에 대한 평가와 비판은 ‘법과 권리’를 대하는 시민들의 태도와 관점으로 바뀐다. 절대, 기득권을 내려놓거나 내부적인 변화와 개혁을 기다리는 헛된 꿈을 꾸지 말라. ‘투쟁에서 너의 법과 권리를 찾아라’는 예링의 모토는 시대와 상황과 무관한 삶의 태도와 방법으로 읽힌다.

예링은 “법과 권리의 목적은 평화이고, 평화에 이르는 수단은 투쟁이다.”라고 선언한다. 이 단호한 문장에 숨은 역설과 함의는 일반 시민들을 향한 가장 중요한 조언이다. 권리를 위한 투쟁은 권리자 자신의 의무이며 이 의무를 지키지 않는다면 공동체의 질서와 법체계가 무너질 것이라는 주장은 추상적이고 이념적인 법학을 현실로 끌어내려 인간의 권리감각을 일깨우고 법의 존재 이유와 현실적인 문제해결의 단초가 된다. 국가공동체의 의무의 기본이 시민 개개인의 권리를 위한 투쟁이라는 지적은 로마법에 근간을 이루는 시대정신의 재해석이다.

단순 명료한 주장에 군더더기가 없고 셰익스피어의 샤일록을 등장시켜 유대인의 편견과 재판관의 결정을 비판하는 대신 법이 추구하는 목적과 방향을 다시 점검한다.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합의에 따라 법은 계속해서 신설, 개정, 폐지된다. 법은 선악의 문제를 다루지 않으며 인간의 권리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250여 년 전 예링의 생각이 여전히 상식으로 자리 잡지 못한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지만, 너무 늦지 않게 우리 모두 관심을 가져야 할 때다. 소송 만능주의, 재판 제일주의로 예링을 오독하는 하는 사람은 없겠으나 21세기 법기술자들이 판치는 세상은 예링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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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미제라블 5 - 완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05
빅토르 위고 지음, 정기수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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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자세히 보라. 인생은 도처에 형벌을 느끼도록 그렇게 만들어져 있다. - 285쪽

긴 터널을 통과하는 것처럼 빛과 그림자가 수없이 교차했다. 롤러코스터를 타다가 질끈 감았던 눈을 뜨면 주변의 사물이 보이고 속도감을 느낄 수 있다. 정기수 번역본(민음사) 『레 미제라블』 5권은 2,556쪽이다. ‘위대한 작가’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빅토르 위고는 이 글을 통해 자신의 생애와 사상을 모두 담았다. 단순히 장편소설이라고 분류하기 어려운 긴 글이다. 팡틴, 코제트, 마리우스, 장 발장 등 주요 인물이 등장하고 자베르, 테나르디에 등 조연과 엑스트라까지 수백 명이 출연하지만 소설의 형식을 빌린 당대의 역사이며 철학이고 사회사에 해당한다. 재미있는 스토리를 넘어 신을 향한 질문과 고민, 인간이 사는 사회에 관한 성찰, 인간의 욕망과 본능에 대한 고뇌가 담긴 이 긴 텍스트를 읽는 이유는 독자마다 다를 터. 터널 안에 스치는 불빛과 명멸하는 그림자를 뒤로 하며 달리는 자동차는 저 멀리 희미한 빛을 향해 질주한다. 동전만큼 아주 작은 크기의 희미한 빛을 우리는 ‘희망’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전체 5부로 구성된 이 소설은 1부 팡틴, 2부 코제트, 3부 마리우스, 제4부 플뤼메 거리의 서정시와 생 드니 거리의 서사시, 5부 장 발장으로 나뉜다. 유일하게 사람을 앞세우지 않은 4부는 마리우스와 코제트의 사랑 그리고 1832년 6월 혁명을 설명한다. 서정시와 서사시가 교차하는 건 비단 4부뿐만이 아니다. 1부에서 미리엘 주교를 등장시켜 종교적 삶에 대한 기준을 제시하고 성찰을 요구하며 출발한 작가는 2부에서는 워털루 답사를 통해 역사적 의미를 묻고 3부에서는 질노르망을 통해 왕당파의 입장을 전한다. 4부와 5부에서는 바리케이드로 상징되는 혁명의 역사와 시가전을 생생하게 묘사하며 소설 너머 작가의 현실 인식을 직,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현대 소설의 문법에 전혀 맞지 않는 4부 7장 ‘곁말’의 등장처럼 빅토르 위고는 이 거대한 텍스트를 마치 자기 삶의 비망록처럼 다루고 있는 느낌이다. 1802년생인 작가가 간접 경험한 1815년 워털루, 혁명에 한복판에 서 있었던 1832년 6월이 서사의 중심축이다. 주인공이자 신의 현신, 고뇌하는 작가의 페르소나로 등장하는 장 발장은 1815년에 출소한다. 이야기는 여기에서 시작돼 장 발장이 죽음에 이르는 10여 년에 불과하지만, 시작은 1789년 7월 14일이며 글을 쓰고 있는 1861년 현재 시점으로 직접 등장하기도 한다. 당대의 시론時論 혹은 시평時評에 해당하는 내용이 서사의 흐름 사이사이에 등장하며 독자를 괴롭힌다. 인간은 어떤 존재이며 신은 우리에게 무엇이냐고. 지금은 어떤 시대며 우리에게 혁명은 무엇이냐고.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는 이 소설에도 적절하게 등장하며 기막힌 우연과 비현실적 문제해결로 주인공들은 숱한 위기를 넘긴다. 기본적인 서사와 스토리는 진부하나, 성경 다음으로 프랑스에서 많이 읽힐 만큼 주목받았던 이유는 자명하다. 빅토르 위고의 문체와 주제 의식이다. 인간의 삶에 대한 현실적 고뇌가 주인공을 통해 생생하게 드러나며 세밀화처럼 기막힌 묘사는 당대 소설로는 넘사벽이었을 듯싶다. 2023년에도 전혀 낡은 느낌이 들지 않는 문장의 힘이 남다르다. 결국 좋은 글은 작가의 고민의 깊이와 넓이 그리고 진정성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부와 5부의 중심인 1832년 6월은 작가의 나이 서른이었다. 직접 목격하고 고민했을 장면들을 통해 프랑스의 기나긴 혁명사, 아니 유럽과 인류 전체에 미친 그 영향은 여전히 유효한 현재 진행형의 역사다. 그래서 이 소설은 지나간 옛이야기가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생생하게 전달되는 고민과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코제트와 에포닌의 사랑은 왜 다른가. 마리우스가 왕당파 할아버지와 달리 워털루에 참전한 공화주의자 혹은 민주주의자 아버지 사이에서 마리우스가 흘린 눈물은 얼마나 많은가.

시가전은 바리케이드 이쪽과 저쪽을 모두 담진 못했다. 객관적 역사 서술과 달리 소설가는 인물을 통해 혁명의 당위성과 의미를 담아낼 뿐이다. 그 장엄하고 숭고한 장면들을 통해 ‘진보는 국민들의 영원한 생명’이라는 작가의 목소리를 전달하면 그뿐이다. 해석과 평가는 오롯이 독자의 몫이다. 전멸한 시민군을 통해 혁명, 즉 폭동과 반란에 정당성을 부여하려 했다는 평가는 지나치게 협소한 해석일 것이다. 빅토르 위고는 역사적 ‘진보’의 힘을 믿었다. 소설 전체를 지배하는 사상과 관념은 낭만주의와 계몽주의가 아니라 사랑과 우정, 혁명과 진보, 용서와 화해 그리고 속죄 의식이다.

악인으로 등장해 소설 전체를 지배하는 자베르와 테나르디에는 전혀 다른 길을 걷는다. 자베르가 자신의 신념과 고뇌를 통해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데 비해 테나르디에는 독자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끝까지 악역을 감당한다. 에포닌과 가브로슈가 묘한 인연의 연결고리로 소설 곳곳에 등장하지만 결국 코제트와 마리우스 그리고 장 발장을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 ‘ABC의 벗들’이나 파리의 부랑자들이 다수 등장하며 이야기는 매우 현실적이면서도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려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

본질적인 문제에 천착하면서도 다양한 인간의 욕망과 선택의 고뇌를 보여주려는 작가의 노력은 조금 지루하고 사색적인 문장과 숨 가쁘고 긴박한 호흡의 적절한 배치로 빛난다. 다만 소설의 마무리는 못내 아쉽다. 결국 장 발장의 긴 행로가 상속을 위한 것이었을까. 마리우스와 코제트의 행복을 위해 전한 60만 프랑을 어떻게 벌었는지 설명하며 그것이 정당한 돈임을 역설하는 장면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500프랑을 남겼다는 설명은 신의 아바타 역할을 해온 장 발장의 캐릭터에 균열을 일으킨다. 그것이 설령 당대 부르주아의 일반적 상식과 서민들의 소망이었다 할지라도 소설은 세습과 상속, 불로 소득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다는 아쉬움을 남긴다. 왜냐하면 이 소설은 미리엘 주교의 삶을 묘사하며 시작했기 때문이다.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5부 장 발장은 시가전과 마리우스를 살려내는 장 발장의 초인적 노력을 보여준다. 특히 파리의 하수구에 대한 묘사가 인상적이다. 이후 해피엔딩을 향한 스토리의 수습과 얽힌 실타래를 풀어가는 과정은 반전 없이 진행된다. 장 발장으로 대표되는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반의 프랑스가 궁금해서 지금 이 소설을 읽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고전을 읽는 이유가 대개 그러하듯이 변치 않는 인간의 보편성, 당대 사회와 역사의 단면이 보여주는 특수성 그리고 그 숱한 알레고리가 오늘 우리 삶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놀라운 기시감 때문이 아닐까.

빅토르 위고는 이 소설을 1845년부터 1862년까지 17년간 집필했다. 1815년 6월 워털루 전투, 왕정복고, 1832년 6월 혁명은 물론 수도원 생활, 파리의 부랑자들, 시가지의 모습과 하수도 등 당대의 역사이며 풍속화인 이 소설은 그 어떤 작품과 비교 불가능한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작품을 작가는 이렇게 겸손하다. “지상에 무지와 빈곤이 존재하는 한, 이 책 같은 종류의 책들도 무익하지는 않으리라.”

시적 서정성과 거대 담론을 오가며 서사의 힘을 보여주는 빅토르 위고는 미움받는 자를 사랑하고 타락한 자를 구원하는 종교철학을 보여주기 위해 긴 시간 고민하지는 않았으리라. 이 세상에는 절대 악이란 존재하지 않고 모든 인간 속에 신이 존재한다는 믿음, 역사는 진보를 거듭하며 혁명을 통해 한발씩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을 겪는 평범한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이 곳곳에 배치되어 이 길고 긴 텍스트가 남긴 여운이 가시질 않는다.

도스토옙스키『죄와 벌』이나 톨스토이가『부활』보다 먼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신과 인간의 문제를 역사적 진보와 혁명으로 다룬 이 소설에 더 애정이 가는 건 순전히 개인적인 취향이다.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지만 『레 미제라블』은 내게 ‘사랑과 혁명’에 대해 조금 더 깊이 고민하는 시간을 주었다. “인류의 일반적인 생활을 ‘진보’라 부른다. 인류의 집단적인 걸음걸이를 ‘진보’라고 부른다. 진보는 전진한다. 그것은 천국적이고 신적인 것을 향해 지상적이고 인간적인 대여행을 한다.”라는 말에 공감했고, “혁명은 사고에서가 아니라 필연에서 나온다. 하나의 혁명은 인위에서 실제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혁명은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되므로 존재한다.”라는 문장에 숙연해졌다. 나로부터의 혁명, 자기 안에 사랑이 먼저다. 어쩌면 불가능한 꿈일지라도.

사랑하는 것 또는 사랑한 것,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런 다음엔 아무것도 원하지 마라. 인생의 어두운 주름살 속에서 찾아낼 진주는 그밖에 없다. 사랑하는 것은 하나의 완성이다. - 352쪽

미완의 인생이면 어떤가. 그 또한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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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미제라블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02
빅토르 위고 지음, 정기수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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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1815년 6월 17일과 18일 사이의 밤에 비가 오지 않았더라면 유럽의 미래는 달라졌으리라. - 2권, 22쪽

보나파르트의 꿈이 아니라 프랑스, 아니 유럽의 미래가 뒤바뀐 역사적 전투에 대한 해석과 평가는 여전하다. 우리가 기억하는, 아니 기록된 순간이 갖는 의미는 실제보다 해석의 문제다. 그것은 국가 혹은 인류가 아니라 개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돌이켜 보게 되는 일, 선택의 순간들 사이에 ‘실수’는 없다. 축적된 경험과 상황 판단, 정보 분석...휴리스틱이 작동한 최선은 시간의 불가역성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할 뿐이다. 벨기에 수도 브뤼셀 남동쪽에 위치한 워털루에 선 빅토르 위고를 상상해 본다. 1861년의 빅토르 위고의 눈에 비친 전투는 시간을 거슬러 46년 전의 현장을 사진처럼 선명하다. 우연과 필연이 뒤섞인 순간들, 아쉬움과 감탄이 혼재한 상황을 그림처럼 묘사하는 2권 ‘워털루’는 왜 빅토르 위고를 위대한 작가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보나파르트의 자신감과 판을 읽는 능력, 웰링턴의 위기와 불안감, 장교와 병사들의 애국심과 용기, 전투의 치열함과 비극적 결말이 주는 카타르시스까지 완벽한 드라마를 본 듯한 환영에 사로잡힌다.

역사적 해석과 인물에 대한 평가는 현대 소설과 달리 작가의 직접 개입으로 이뤄진다. 빅토르 위고의 거친 숨소리가 들리고 안타까운 탄식이 흘러나온다. 현장 답사를 통해 지형, 지물을 세세히 파악한 빅토르 위고는 워털루 전투 관련 보고서와 통계를 인용하며 입체적 시선으로 1815년 6월 18일을 살핀다. 전체 5부로 구성된 ‘레 미제라블’은 빵 한 조각을 훔쳐 18년간 감옥살이를 한 억울한 사내 장 발장의 인생 이야기라고 요약될 수 없다. 2권의 주인공은 코제트다. 워털루 전쟁에서 살아남은 퐁 메르시의 아들 마리우스와 테나르디에가 3권의 주인공으로 다시 등장하니, 소설 전체 구성에서 소환당한 과거 혹은 역사는 거대한 복선이거나 생의 부조리와 불가해한 삶의 필연을 설명하기 위한 주제 의식에 해당한다.

이 이야기는 인간 삶의 거대한 수레바퀴를 추동하는 힘의 근원에 관한 고찰이다. 신에게 부여받은 삶의 원리, 즉 종교적 윤리와 신이 부여한 운명을 대하는 삶의 태도를 묻는다. 빅토르 위고가 스스로 밝히듯 신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등장시킨 어떤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다. 코제트를 찾아나선 마들렌 영감은 고르보 누옥을 거쳐 수도원에 잠입한다. ‘감옥과 죄수’는 ‘수녀원과 수녀’와 같으면서 다르다. 인간은 원죄와 속죄로 신에게 현실을 저당잡힌다. 중세적 세계관, 즉 종교적 절대주의와 계급사회의 모순에 대한 작가의 통찰은 날카롭다. 신랄한 비판과 감정적 증오 대신 냉정한 평가와 이성적 분노를 담아낸다.

혁명이란 무엇인가를 이해하고 싶다면 그것을 ‘진보’라고 불러 보라. 그리고 만약 진보란 무엇인가를 이해하고 싶다면 그것을 ‘내일’이라고 불러 보라. ‘내일’은 억제할 수 없게 자신의 일을 하는데, 그 일을 바로 오늘부터 한다. 그것은 이상하게도 언제나 제 목적에 도달한다. - 85쪽

코제트를 착취하던 테나르디에 부부는 고르보 누옥에 종드레트라는 이름으로 스며든다. 워털루 전투에서 테나르디에게 목숨을 빚졌다고 믿는 퐁 메르시의 아들 마리우스가 3권의 주인공이다. 철저한 왕당파 외조부 질노르망의 손에 자란 마리우스가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과정과 공화주의자 혹은 민주주의자로 거듭나는 과정은 시간의 사슬에 묶여 사는 우리는 미래를 위해 결국 현실의 구조를 파악하고 근본적인 원인과 객관적 사실을 파악해야 한다고 충고하는 듯하다. 부르주아의 논리와 상퀼로트의 이익이 충돌하듯 혁명은 계속되고 ‘레 미제라블’이 혼거하는 현실에서 개별 독자는 스스로 자신을 어디에 위치시킬지 궁금해졌다.

재탈옥 8년 만인 1831년, 뤽상부르 공원에 나타난 르블랑과 라누아르는 숙명적으로 마리우스와 연결된다. 오늘을 사는 우리의 일상과 다름없이 기막힌 우연과 피할 수 없는 우연은 소설 내내 지속된다. ‘ABC의 벗’들과 ‘파트롱 미네트’로 불리는 인간 군상이 대거 등장하는 3권에서 주목할 만한 이야기는 없다. 종드레트의 아들 가브로슈부터 질노르망, 앙졸라, 콩브페르, 쿠르페락 등 인물에 집중한 작가는 혁명 전후의 프랑스 사회를 묘사하고 인물 묘사를 통해 당대 현실을 다양하게 보려주려 노력한다. 소설적 장치로서 장 발장과 코제트가 등장하지만 인물과 인물들 사이의 질긴 인연과 자베르로 상징되는 악인과의 대결구도는 서사 구조의 한 축일 뿐이다.

또다시 위기를 넘긴 장 발장과 코제트의 운명은 어찌 될 것인가. 남은 4, 5권에서는 또 어떤 이야기를 통해 신과 인간 그리고 현실과 운명의 문제를 풀어낼까. 몇몇 주인공 혹은 몇몇 사건으로 정리할 수 없는 ‘레 미제라블’의 이야기는 오늘도 계속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현재적 유용성을 가진다.

나는 승리를 별로 존중하지 않는다. 이기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참다운 영광은 설득하는 것이다. 그러니 뭔가를 좀 논증하도록 애써 보아라! - 1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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