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하는 인간 - 확증편향의 시대, 인간에 대한 새롭고 오래된 대답
박규철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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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건한 믿음과 단단한 신념의 반대편에 끊임없는 질문과 합리적 의심이 앉아있다. 시소게임을 하듯 시대정신과 맥락에 따라 어느 한쪽으로 무게 중심이 기운다. 이는 단순히 근대 이후 과학의 발달에 따른 자연스런 결과라고 오해하기 쉽다. 중세 신분질서의 붕괴와 이성의 빛을 따라 걷는 개인의 탄생이 인류 문명의 변곡점이라는 사실은 틀림없다. 하지만 그 이전에도 몇몇 사람은 호모 두비탄스homo dubitans, 즉 의심하는 인간으로 살았다.

우리가 다른 동물과 달리 자연을 극복, 지배하게 된 계기는 호기심과 상상력 덕분이다. ‘why not?’이 주는 창조적 혁신이 문명 발달의 초석이 됐다. 여전히 사는 대로 생각하는 사람들 건너편에는 생각한 대로 사는 소수가 앉아 있다. 누가 맞고 틀렸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과 태도의 문제다. 어떻게 살 것인지에 고민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다만 그 고민의 이유와 방법,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은 조금씩 다르다. 근대 이전에는 대부분 사람들이 이런 고민을 할 이유가 없었다. 태어나는 순간 직업이 결정됐고 삶의 길은 정해져 있으니 오히려 불안과 고독이 아닌 안정과 행복을 누렸을지 누가 알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철학자들은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의심을 멈추지 않고 깊이 생각하며 프레임을 리프레임하기 위해 노력했다. 알은 하나의 세계다. 그 알을 깨고 나오는 고통의 쾌락을 모든 사람이 원하는 건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종교와 과학의 대립과 갈등은 서로 영역 다툼을 멈춘지 오래지만 접경지역에선 여전히 날선 논쟁이 그치지 않는다. 확고한 진리를 찾아 헤맨 인간의 갈급한 욕망도 여전히 계속되지만 아무도 그것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 없다는 사실만 확인하는 중이다. 니체는 그조차도 ‘사실fact은 없다. 다만, 해석이 있을 뿐.’이라며 인정하지 않는다. 평생 공부하고 생각한 결론이 겨우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 하나만은 알고 있다고 한 소크라테스의 ‘무지無知의 지知’는 여전히 유효할까.

박규철은 확증편향의 시대에 필요한 인간형으로 『의심하는 인간』을 제시한다. 이 책은 마치 거대한 ‘의심의 계보학’처럼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으로 시작된 아카데미 학파의 회의주의와 피론학파 그리고 중세의 아쿠스티누스와 근대의 몽테뉴에 이르는 의심 철학을 역사를 샅샅히 뒤적인다. 회의주의자들은 현실에 적응하기 어렵고 사람들에게 환영받기 힘들다. 어느 조직의 리더로도 적합하지 않다. 회의주의자의 건너편에는 독단주의자가 앉아 있다. 인간은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라 합리화하는 존재다. 상황에 따라 회의주의와 독단주의를 오가며 제 잇속만 챙기는 이기주의자는 이 책에서 다루지 않는다.

논의의 중심은 아카데미 학파와 피론 학파의 회의주의다. 아카데미 학파의 아르케실라오스, 카르네아데스와 피론 학파의 아네시데모스,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의 논리 싸움은 흥미진진하다. 두 학파의 차이를 확인하기 위해 이 책을 읽을 이유는 없다. 일반 독자라면 21세기에 소환된 고대 회의주의가 근대적 인간에게 미친 영향과 21세기에 다시 소환된 이유를 고민하는 정도면 충분해 보인다. 몽테뉴 이후 데카르트와 스피노자 ‘회의주의적 방법론’, 존 로크의 라이프니츠의 계몽주의, 프리드리히 니체의 《안티 크리스트》에 영향을 미친 회의주의는 삐뚫어진 시선, 부정적 관점과 거리가 멀다. 아이러니하게도 회의주의자로서 피론이 가장 강조했던 개념은 ‘마음의 평안’이었다. 아타락시아ataraxia를 위해서는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의심하고 질문하는 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진실에 대한 탐구는 그 전까지 ‘진실’이라고 믿던

모든 것에 대한 의심으로부터 시작된다. - 프리드리히 니체, 3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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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러의 방 - 내가 사랑하는 그 색의 비밀 컬러 시리즈
폴 심프슨 지음, 박설영 옮김 / 윌북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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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읽었을 때 까마득한 나이였지만 얼른 서른 일곱이 되고 싶었다. 혼란과 방황에서 벗어난 진짜 어른이지만 세상에 찌들지 않은 냉소적 태도로 당당하게 홀로 설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나이처럼 보였다. 무라카미 류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책장을 넘기면서 내용과 상관없이 바다와 하늘을 섞어 놓은 색이라고 상상했다. 투명하게 맑은 민트를 떠올렸을까. 그렇게 회색으로 가득한 10대를 지나 초록과 파랑 같은 20대가 떠올랐다. 폴 심프슨의 『컬러의 방』은 지난 삶을 돌아보게 하는 기이한 미술책이다. 색의 연대기 같은, 빛의 역사를 기억하는 책은 어떻게 쓰게 된 걸까.

‘색은 영혼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색은 건반이고, 눈은 해머이며, 영혼은 수많은 현을 가진 피아노’라는 바실리 칸딘스키의 말에서 색의 자리에 그림 혹은 그, 그녀라는 단어를 놓아 보았다. 보는 것이 믿는 것이라는 신념은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자각의 순간을 위해 예비 된 절망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귀와 눈이 예민한 만큼 코와 입이 둔한 나는 가끔 흑백으로 세상을 본다는 개의 눈을 부러워한다. 미혹함이 없이 명암의 이분법적 세계가 오히려 분명하고 정확한 판단에 도움이 될 듯하다. 예민한 감각은 지나치게 많은 정보를 흡수하고 영혼을 쉽게 지치게 한다. 백색 소음 너머에 떠도는 말의 뉘앙스와 태도가 보이고 보이는 것 너머에 현상과 분리된 본질이 드러나는 순간은 생각보다 참담하다.

‘빨강의 방’으로 시작해서 노랑, 파랑, 주황, 보라, 초록, 분홍, 갈색, 검정, 회색, 하양 등 이 책에는 모두 11개의 방을 소개한다. 어느 방이 마음에 드는지 어느 방을 싫어하는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각각의 방에 잠시 머물러 그 방의 색이 내는 소리를 들어보자. 소리가 보이고 색이 들리는 경험은 비현실이 아니라 초현실적 체험이다. 저자는 세상에 존재하는 색의 역사와 의미를 단편적으로 소개한다. 거대한 벽에 다양한 에피소드와 사물들의 꼴라주. 저자는 형형색색 어지럽게 전시된 세상을 색으로 분류한다. 과거와 현재, 사람과 사물, 이미지와 상징, 상상과 현실을 뒤섞어 놓는다. 단편적인 이야기가 나열되지만 파편화된 조각이 아니라 같은 색을 향한 나름의 질서를 갖고 있다.

자연과 사물을 인식하는 방법은 학습된 개념과 언어를 도구 삼아 구별된 방에 정리된 장난감처럼 뒤죽박죽인 경우가 많다. 매우 기능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으로 외부 세계를 감각하고 인지 영역을 확장하는 사람도 있으나, 흘러가는 물처럼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사람도 많다. 관심과 재능에 따라 달라지는 개인의 취향 혹은 타고난 감각과 재능의 차이다. 절대음감이나 미각처럼 절대 시각이 있다면 색의 채도와 명도를 구별하는 능력이 아니라 각각의 색이 드러내는 아름다움과 비명을 구별하는 타고난 능력이 아닐까.

폴 심프슨은 사람들이 각자 좋아하는 색의 비밀을 가르쳐주려는 의도보다 사회적, 개인적 상징으로 기능하는 색의 역할과 의미를 나열하는 데 재미를 붙인 듯 수많은 이야기를 쏟아낸다. 역사, 종교, 스포츠, 비즈니스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색’과 연관된 스토리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래서 무슨 색을 좋아하시나요? 아니, 그래서 왜 그 색이어야 하며, 그 색은 왜 그런 의미를 갖게 되었는지 찾아 헤맨다.

이 책은 고흐, 모네부터 나폴레옹, 비틀스까지 수많은 사람이 등장한다. 지난 시대의 추억은 오늘을 사는 나, 혹은 우리의 삶을 위해 전제 조건이다. 영상과 사진의 시대다. 개인이 브랜드가 되고 차별화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현대사회에서 색에 얽힌 이야기들은 인간의 심리와 욕망뿐 아니라 대중문화와 놀이 문화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지식과 정보에 해당한다. 어느 분야든 그러하듯 타고난 재능과 감각에 지식과 노력을 더하면 빛을 발한다. 눈부시지 않아도 자기만의 방, 내가 좋아하는 색으로 가득한 방 하는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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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도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4
서머싯 몸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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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도칼의 날카로운 칼날을 넘어서기는 어렵나니.

그러므로 현자가 이르노니, 구원으로 가는 길 역시 어려우니라. - 카타 우파니샤드

해석의 다양성을 열어 놓았더라도 ‘면도날’이 인간 구원의 가능성일 수는 없지 않을까. 그 날카로움보다 예리한 간극을 넘어서는 삶의 구도 행위 자체가 불가능에 가깝다. 서머싯 몸이 래리를 통해 말하고 싶은 궁극의 진리 혹은 삶의 불가해함을 이해하더라도 의문은 사라지지 않는다. 엘리엇과 이사벨로 대표되는 평범한 삶은 어떻게 수용 혹은 거부해야 하는가.

“내 생각엔 철학이나 종교 그리고 머리와 가슴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인생의 규칙 같은 것을 찾지 않았을까 하는데.”(349쪽) 철저하게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엘리엇 템플펀의 삶을 구술하듯 이야기하지만 사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래리 대럴이다. 실명으로 소설에 등장하는 작가의 목소리는 생경하지만 사실성과 신뢰성을 부여한다. 그러나 어떤 독자도 소설은 소설일 뿐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다만, 진지하게 호소하는 작가의 태도에 읽는 자세를 조금 고쳤을지도 모르겠다. 1944년 출간된 이 소설은 내게 비트 세대의 바이블처럼 읽히던 잭 캐루악의 『길 위에서』의 원조 혹은 유럽 버전으로 읽혔다. 두 작가 모두 헤르만 헤세의 『페터 카멘친트』를 읽었을지 모르겠으나 어느 시대든 청춘의 방황과 삶의 길 찾기를 다룬 이야기는 쉼 없이 양산된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어떤 시대에도 답을 찾은 사람이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예정이기 때문이다.

소설의 배경은 제1차 세계대전이후부터 1930년대의 프랑스 파리와 미국의 시카고 그리고 영국의 런던 등 유럽의 중심지역이다. 상류 사회의 위선과 속물근성을 대표하는 엘리엇 템플턴과의 연결고리가 그의 조카 이사벨, 이사벨의 연인 래리 등 주변 인물들과 관계로 넓혀진다. 20세기 초반 유럽이지만 신분 질서는 여전했고, 사회 계층 의식은 뚜렷했다.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세대의 이야기가 아니라서 보편적 공감을 이끌어내지만 당대 사회를 철저하게 반영하지 못해 아쉬움도 남는다. 의사의 길에서 벗어나 작가의 삶을 산 서머싯 몸은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내공을 쌓으며 ‘인간의 굴레’에 대해 고민한다. 달의 세계를 사는 래리와 6펜스의 세계를 사는 이사벨은 이수일과 심순애처럼 닿을 수 없는 곳에서 서로를 바라본다. 발 딛고 선 곳이 다르면 보는 풍경도 달라진다. 남녀 간의 ‘순수한 사랑’은 소설에서도 현실에서도 그 의미와 한계가 분명하다. 래리는 몸에게 “이사벨은 나쁜 여자는 아니지만 거짓말을 잘해요.”(39쪽)라고 말한다. 이사벨과 친해진 몸은 그레이와 결혼한 후 “거짓말은 그만두라고, 이사벨. 네가 래리를 포기한 건 다이아몬드와 모피 코트 때문이었잖아.”(343쪽)라는 말로 ‘현자 타임’을 갖게 한다. 그리고 소설 마지막 부분에서 소피 맥도널드의 죽음에 대해 추궁하며 “거짓말은 그만하지, 이사벨.”(494쪽)이라고 지적한다. 세 번의 ‘거짓말’은 모두 이사벨을 향한다. 이상주의자 래리와 현실주의자 이사벨의 접점은 없다. 사랑도 삶의 일부지만 자기 삶에 사랑이 분명하게 놓일 자리는 현실이다.

면도날은 두 남녀 주인공을 예리하게 구분하고 현실과 이상의 거리를 획정하며 삶과 죽음, 사랑과 이별을 분명하게 나눈다. 또한 소설의 안과 밖을 이어보려는 서머싯 몸의 시도를 잘라버린다. 여전히 신과 인간의 문제, 즉 종교와 충돌하는 현실적 욕망을 들여다보는 듯한 기시감을 지울 수 없는 소설이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 읽었는지에 따라 모든 책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1874년생인 작가가 1944년 일흔에 출간한 소설은 자전적 경험과 구별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 그만큼 인생을 살고 나면 굳이 지어내지 않아도 조금의 각색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한 한 권의 소설이 나올 만하지 않을까.

“아무것도 안 하고 싶어.”(80쪽)라는 래리의 고백이 “그는 야망도 없고 명예욕도 없다.”(514쪽)라는 몸의 서술로 마무리 되는 소설이다. 한 인물에 대한 평가나 해석은 개별 독자의 몫이지만,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는 필경비 바틀비의 목소리만큼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래리의 목소리는 울림이 크다. 돈이 되는 일, 세속적 욕망을 달성하는 일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평생 먹고 살만큼의 돈이 있으니 배부른 소리를 하는 걸까. 래리는 결국 빈털터리로 뉴욕으로 향한다. 남은 삶이 어떠하든, 이 소설은 성자가 된 래리의 후일담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대개 누구나 그러하듯, 어떤 이야기를 듣고 나면 자연스레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분노하거나 위로를 받는다. 그 깊은 한숨의 의미는 각자 자기 삶의 목적지 혹은 방법과 태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구원을 향한 삶이 아니어도 자기만의 면도날은 무엇인지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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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에 공감한다는 착각
이길보라 저자 / 창비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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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함께 나눌 수 없다. 다만, 공감을 통해 추론할 수 있을 뿐이다. 수잔 손택은 『타인의 고통』에서 “우리는 보통 타인의 기쁨과 아픔을 공감할 수는 있다고 믿지만 그 말은 진실이 아니다. 타인의 고통을 내 방식대로 재해석하거나 유추해서 이해할 뿐, 그 사람이 느끼는 고통의 정도를 측정하거나 공유할 수는 없다. 비극은 여기에서 시작된다.”라고 냉정하게 말한 적이 있다. 아픈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 임종을 앞둔 부모 곁의 자식, 시한부 인생을 통고받은 연인은 바로 우리 자신이자 이웃이다. 그 고통은 본능적이고 감각적으로 전달되고, 때때로 육체적 고통을 동반한 슬픔으로 전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대신 아프거나 죽을 수는 없다. 모든 생의 감각은 오롯이 각자의 몫이다. 그래서 인간은 외롭고, 인생은 쓸쓸하다.

안산 동산고 재학 중 혼자 여행을 떠난 이길보라는 ‘로드 스쿨러’가 되어 돌아온다. 농인聾人(청각 장애인을 병리적으로 대하는 차별적 시선과 편견을 거부하고 수화언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음성언어를 중심으로 의사소통하는 사람을 청인이라 부른다.) 부모를 둔 공부잘하는 모범생, 일찍 철이 든 맏딸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성장 과정, 다큐멘터리에 대한 관심과 애정, 글을 쓰는 작가로서의 삶을 담담하게 풀어낸 글들이 읽는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흔들어 놓는다. 차별은 본능일까. 나와 다른 종에 대한 경계가 생존확률을 높인 적자생존의 DNA라는 진화생물학적 설명이 편견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허나, 머리로는 안 되는 줄 알면서 가슴이 시키는 대로 사는 게 일반적인 태도다. 문명사회를 이뤄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내세우며 민주국가에서 사는 개인에게 인권 감수성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다. 나의 권리만큼 너의 권리도 소중하다는 당연한 인식이 부족한 공동체는 적자생존의 원리가 작동하는 정글과 크게 다르지 않다. 부와 권력에 따라 의무가 다를 수 없고 헌법정신을 자의적으로 해석해서도 안 된다는 생각이 상식이다. 대통령부터 비정규직 알바생까지 개인의 권리와 의무, 시민의 책무는 동등하다. 그 말과 행동의 무게가 다르다고 해서 특권과 특혜가 주어지는 사회는 미래가 없다. 장애인과 노조에 가입한 사람들은 불가촉천민이 아니다. 가족이고 이웃이며 나 자신이다. 그들 모두가 국민이다. 이기적 행동과 불법 행위가 될 수는 없으나 문명국가에서 시민에게 주어진 기본적인 권리를 제한하거나 헌법에 위배되는 법률과 시행령으로 통제하려는 생각 자체가 대단히 위험하다. 피아 전환의 순간, 책임질 수 없는 말과 행동으로 분노와 박수가 교차하는 태도는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착각’에 불과하다.

이 책의 제목처럼 고통에 공감한다는 착각은 ‘선량한 차별주의자’의 다른 버전으로 읽힌다.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처럼 대통령이나 야당 대표의 편을 들며 핏대를 세우는 사람들의 생각은 과연 어디에서 출발한 것일까. ‘all or nothing’을 외치는 극한 대립과 갈등은 결국 나만 옳고 너는 틀렸다는 오만이다. 이길보라는 자신의 부모를 통해 세상을 배웠다. 아니 자신의 삶을 통해 타인의 생각과 태도를 읽는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공동체를 들여다본다. 감정이 앞서거나 논리가 부족한 생각이 허물이 될 수 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이 책은 농인 자녀로 태어나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30대 여성의 관점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모든 글은 한계가 있다. 그 한계의 다른 말은 글쓴이의 개성이자 고유하고 빛나는 글의 특징이다. 특수한 경험을 일반화시켜 타인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이길보라의 글에는 울림이 있다. 비록 그 생각과 감정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글을 쓰는 태도와 방법은 눈여겨볼 만하다.

또 하나 우리가 살펴야 하는 지점은 이길보라의 끊임없는 도전과 용기다.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노력, 자기 성장을 위해 보다 넓은 안목을 키우려는 태도가 우리를 한뼘 성장시킨다. ‘why not?’ 질문하지 않고 의심이 없는 생활처럼 무기력한 삶은 없다. 고인물은 썩는다. 자기 생각과 감정의 한계를 살피고 이것이 진짜 ‘공감’인지 ‘착각’인지 다시 한번 돌아보는 과정 자체가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가져야 할 태도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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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뇌과학 -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은 어디에서 오는가
레너드 믈로디노프 지음, 장혜인 옮김 / 까치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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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이라는 감정은 인간의 존재 조건일까. 사랑에 관한 숱한 이야기와 노래와 드라마, 영화, 그림들을 떠올려 보면 사람들은 사랑을 위해 살고 사랑 때문에 죽는 게 아닌가 싶어진다. 기쁨과 슬픔 혹은 우울, 분노, 고독, 수치, 만족, 환희, 행복 등 설명하기 어렵고 경계가 모호한 감정의 편린들은 모두 사랑에 기인한 파생상품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성의 강 건너편에 감정이 놓인 듯 변연계와 신피질의 기능과 역할은 분명히 구별되어 있는 듯하다. 그러나 레너드 믈로디노프는 감정과 이성이 서로 구분되어 서로 다른 방에 거주하는 이웃이 아닐 수도 있다고 말한다. 은행나무처럼 이성과 감정도 한데 깃들어 있다는 주장은 흥미롭다.

감정의 목적보다 흥미로운 몸과 마음의 관계가 최근 뇌과학의 관심사를 보여준다. 감정은 어떻게 진화했는지, 핵심 정서가 무엇인지 살피는 동안 인간은 도대체 무얼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살피게 된다. 리처드 도킨스나 에드워드 윌슨 같은 과학자의 관점은 어떤 철학적 질문보다 ‘나’ 혹은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분명하게 설명해주기도 한다. 하지만 생각과 감정이 어떻게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지, 원하기와 좋아하기가 차이가 무엇인지 살피는 동안 과거로부터 그리 멀리 오지 못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스마트폰이 바꿔놓은 인류의 뇌 구조, 아니 그것이 인간의 진화에 미친 영향은 머나먼 미래에야 밝혀질 수 있는 영역이겠으나 우리가 실감하는 극적인 변화는 생각과 감정의 변화보다 흥미롭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해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 호모 파베르는 감정과 이성을 하나로 통합하는 과정을 온몸으로 보여준다. 수학자이자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 일컫는 데카르트조차도 인간의 물질적 몸과 비물질적이고 파괴할 수 없는 영혼으로 이루어졌다는 이원론을 주장했다. 과연 그런가? 이 질문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영원한 사랑, 종교적 믿음, 천국과 내세, 공덕과 업보 등 형이상학적 세계와 인간의 죽음에 대한 공포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인간은 도대체 어떤 존재일까.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려 있다는 주장은 고대 철학부터 뉴에이지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내면, 즉 감정에 역할과 중요성을 새삼스럽게 한다. 근대 계몽주의 이후 이성과 감정의 위계질서가 분명해지듯 싶지만 일상을 사는 우리를 지배하는 건 여전히 이성이 아니라 감정이다. 전가의 보도로 휘두르는 ‘내 맘이야’라는 말속에 숨은 진의는 발화자조차 알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자기 마음의 원인과 변화를 통제할 수 있거나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가능하지 않은 일인 줄 알면서 ‘해석’하려는 시도는 헛되고 헛되다. 다만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감정을 배제하거나 느낌, 추측, 판단을 줄이려는 노력은 필요하다.

저자는 우리가 느끼는 감정의 원인을 밝히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감정을 배제한 선택과 판단이 가능한가? 좌절과 분노, 쾌락과 행복은 어떻게 이해할까? 뇌과학이 밝혀낸 이론과 설명이 ‘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시간을 내 읽어볼 만하지 않을까?

대체로 한 권의 책은 분명한 목적을 향해 독자들을 끌어간다.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동원하고 저자의 생각을 보태 주장하고 설명한다. 독자를 설득하기 위해 다양하게 시도되는 방법이 효과를 거둘 수도 실패할 수도 있다. 그렇게 지난한 과정을 거쳐 한 권의 책은, 저자와 독자는 서로 타협하거나 어느 한쪽이 굴복, 좌절하거나 공감하고 연대한다. 냉소와 분노를 자아내는 책도 있고 감동과 흥분을 유발하는 책도 있다. 책을 읽은 후에 그 다양한 감정도 결국 저자의 글이 독자의 뇌를 자극하는 방법과 테크닉에 달려 있다. 좋은 책은 일시적으로 흥분을 유도하는 대신 단 한 문장 혹은 한가지 생각의 화두를 던진다. 오래 여운이 남아 두고두고 생각하게 하는 책, 설명하기 어려운 감동을 주는 책, 다른 책으로 독자를 이끄는 책이야말로 우리가 읽고 싶은 글이 아닌가.

시간이 해결해주는 많은 일과 달리, 그 자리

에 머물러 박제되는 생각과 감정도 있는 법이다. 감정의 뇌과학을 읽는 독자들은 결국 최근의 연구 동향이나 새롭게 밝히진 인간 뇌의 신비가 아니라 ‘나’ 자신을 읽게 된다. 모든 독서가 자기 이해의 출발이듯, 타인과 세상을 읽는 일과의 선후 관계가 어찌 됐든 결국에 자신을 돌아보는 행위가 이성과 감정에 대한 우리의 태도여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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