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없는 세상 - 개정판
앨런 와이즈먼 지음, 이한중 옮김, 최재천 감수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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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는 숱한 패러디를 낳았습니다. 누군가는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라고 변명하고, 누군가는 그때도, 지금도 맞거나 틀리다고 고집을 부리거나 신념을 지킵니다. 허경은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에서 “내로남불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판단과 남의 행위에 대한 판단에 일관성이 결여된 경우를, 곧 ‘자신의 행동과 타인의 행동을 재는 잣대가 다른 경우’를 도덕적으로 비판하는 담론이다.”라고 일갈합니다. 인간은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라 합리화하는 존재라는 말을 수없이 되새깁니다. 물론 이 자명한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만. 인간은 옳고 자연은 틀렸을 리 없습니다. 과학기술과 문명 발달은 선이고 이를 가로막는 생각과 태도가 악일 리도 없습니다.

인간도 동물이고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조차 부정하면 논의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나(인간)는 맞고 너(자연)은 틀리다는 논리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특별한 존재라는 자만은 혹독한 대가를 치를 것입니다. 환경의 역습은 기후 변화로 실감하고 있습니다. 그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추측과 주장이 난무합니다. 위기의식은 각자 다르고 일이 터질때까지 비관과 낙관은 교차하기 마련입니다. 물론 그 후에도 인간은 서로의 이기심과 욕망에 따라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일 것입니다. 아비규환은 공포와 불안을 숙주로 삼아 세상을, 아니 인간을 절망에 빠지게 합니다.

앨런 와이즈먼이 인류의 미래를 디스토피아로 그리기 위해 고민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과학자의 위기의식, 자료와 통계가 뒷받침된 이론적 접근으로 가득했다면 독자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어렵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해석의 오류, 또다른 자료, 통계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반론이 제기되고 후속 논의가 이어졌을 테니까요. 하지만 저널리스트의 글쓰기에는 설득의 힘이 있습니다. 상상력과 스토리텔링의 효과를 적절하게 사용할 줄 아는 저자의 글쓰기 전략은 성공적입니다. 인간이 사라진 지구라는 가정법은 발상 자체가 독특합니다. 실현 가능성이 없는 공상에 불가하지 않다는 사실에 오히려 독자들의 모골은 송연합니다. 인간 없는 세상은 정말 끔찍할까요?

그건 오로지 인간의 관점일 뿐입니다. 우주와 지구의 시간을 다시 돌아볼 필요는 없습니다. 빅뱅부터 현재까지 벌어진 일들을 추억할 수도 없고 겨우 100년을 채우지 못하는 인간은 그렇게 거시적인 안목이 필요치 않으며 하루하루 일상을 견디기 버거울 때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과학은 단순한 기술의 발전과 달리 인간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조망하는 힘을 가집니다. 인류가 걸어온 시간, 우리가 견디는 삶, 남은 미래가 오로지 과학에 기댈 수는 없지만 저자는 우리에게 관점의 이동을 촉구하는 듯합니다. 인간 없는 세상은 지구에서 그저 하나의 종種이 사라지는 일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인간이 주인이라는 착각, 우리가 지배한다는 오만,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는 생각은 고칠 수 없는 역병처럼 인간 세상에서 사라진 적이 없습니다.

‘미지의 세상으로의 여행’은 재밌습니다. 상상의 영역이니까요. 그러나 ‘그들이 내게 알려준 것들’과 ‘인류의 유산’은 동어반복과 익숙한 이야기들로 조금 지루합니다. 마지막 4장, ‘해피엔딩을 위하여’이 인상깊지만, 그리고 당연하지만, 대안과 해결책은 없습니다. 모임에서는 개인의 노력과 한계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오갔습니다. 우리 사회, 아니 공동체가 지향해야할 지점과 자본주의와 기술발달의 장단점에 대해서도 다양한 의견이 오갔습니만, 결론이나 기발한 해결책은 물론 없었습니다. 문제를 인식하고 깊이 고민하며 대화를 나누고 세계를 이해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독서 모임의 한계는 늘 ‘여기까지?’인가 싶기도 합니다. 책이 주는 기쁨과 슬픔, 행복과 고민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들과 나눈 소중한 시간을 늘 감사하게 여깁니다. 그럼 또 뵙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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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브라이언 헤어.버네사 우즈 지음, 이민아 옮김, 박한선 감수 / 디플롯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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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를 찾고자 하는 과학자가 의지해야 할 것은 회의적 태도와 실증적 토론이다. - 303쪽

안씨 집안 셋째 딸 다정이는 첫째 가정이, 둘째 나정이와 달리 차갑기 그지 없다. 안다정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캐릭터가 분명하게 전달되겠으나 유행하는 MBTI 성격 검사에서도 최상급 ‘T’를 확인했다. 이해와 공감은 다르다. 다정이에게 이해는 이성과 합리의 영역이지만, 공감은 추론과 가능성의 영역이다. 그렇다고 다정이가 소시오패스는 아니다. 단지, 맞장구에 서툴고 립서비스에 약하며 팩트 체크가 분명할 뿐이다.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걸 모르는 걸까. 안다정은 다정하지 않다는 사람들의 말이 서운해 오늘도 서럽게 눈물짓는다. “야, T발 너 C야?”

감정이 배제된 의사소통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말과 행동에 주관적 해석을 덧붙이거나 개인적 감정을 얹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의 왜곡과 과장에 혀를 내두른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누구든, 어느쪽이든 ‘이해’가 선행되지 않으면서 편을 들거나 욕을 하는 사람들, 인터넷 게시판, 정치인들을 보면 혐오감이 생긴다. 다정함은 감정이 아니라 객관적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는 타인과 세계에 대한 ‘태도’가 아닐까.

진화인류학자 브라이언 헤어와 버네사 우즈가 쓴 책, 제목이 이목을 끈다.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와는 다른 형식과 내용이지만 제목이 주는 첫 인상은 그러하다. 제목과 표지에 끌려 책을 사거나 읽는 다수의 독자의 필터링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에 대한 심리학적 분석은 논외로 하더라도 모든 책이 널리 읽히려는 욕망에 충실하다는 공통의 목표가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성공했다고 평가받아 마땅하다.

또 다시 등장한 머그샷 장인 트럼프의 등장으로 책의 대부분을 뜯어 고치는 대공사를 감행했다는 설명은 내가 오독한 것일까. 인류의 진화 과정에서 저지른 실수와 오류, 혹은 의도된 사고와 불행에 관한 이야기들을 평생 읽어왔고 앞으로도 읽을 예정이다. 인간이 스스로 자기가축화에 성공하며 정착생활을 통해 공동체의 질서를 만들고 문명을 발달시켜 온 과정은 경이롭지만 박수를 보내고 싶지는 않다. 왜냐하면 이 책의 저자들이 말하듯 ‘Friendiest’가 생존의 유일한 이유도 아니었을뿐더러 친화력이나 협력적 의사소통이 제대로 작동했던 시대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만큼 인류의 역사는 개인 혹은 소수에 의해 그 힘과 권력이 작동하는 현실을 수용하거나 저항하는 일상의 반복으로 점철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기가축화 ⇨ 친화력 상승 ⇨ 협력적 의사소통 ⇨ 인지능력 발달 ⇨ 자제력 향상

인간이 진화과정에서 자연선택을 넘어 적자생존의 원리가 적용될 수 있는 요인 중 하나는 ‘친화력’이라는 설명이다. 군집 생활을 하는 동물들의 특징과 장단점, 생존을 위한 그들의 질서와 이기적 유전자와 달리 ‘Friendiest’로 인류의 과거와 현재를 조망하는 아이디어는 이채롭다. 하지만 동전의 양면처럼 가족과 친구, 부족을 향한 편협한 친절과 다정함이 다른 외집단에 대한 차별과 편견으로 이어지며 살인과 제노사이트를 가능케한다. 박한선은 ‘the Friendiest’를 ‘다정多情한 것’으로 번역하면 정분이 넘친다는 뜻으로 오해할 수 있으니, ‘우優’를 제안한다. ‘넉넉하며 도탑고 인정많고 부드럽고 품위있고 뛰어남’은 다정함과 의미 차이가 크다. 감정적 애착, 따뜻하고 부드러움 뿐 아니라 상대를 헤아리며 마음을 쓰는 태도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국어 사전에 정의된 말장난이 아니다. 번역의 실수나 오해가 아니라 한국어의 묘한 뉘앙스 차이가 진화인류학자가 전하고 싶은 깊은 의미를 친절한 웃음과 다정한 말투로 착각하면 곤란하지 않은가.

인류가 걸어온 길, 우리가 지금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과 걷고 있는 목적지가 같을 수는 없다. 그래서 최소한의 합의를 법과 질서로 표현한다. 물론 권력이 집중된 소수에 의해 법은 제멋대로 해석되고 그 법을 다루는 사람들은 법이 자기의 도구인양 커다란 착각에 빠져 허우적대지만 시간은 대체로 ‘진실’의 편에 선다고 믿는다. ‘다정한 것’의 반대말은 ‘냉정한 것’이 아니라 ‘이기적인 것’, ‘일방적인 것’, ‘적대적인 것’ 정도가 아닐까.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 자신의 말과 행동이 옳다는 오만, 실수와 잘못이 없다는 자만, 반성과 성찰을 모르는 일상이야말로 ‘다정한 것’과 거리가 먼 삶이다. 살아 남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살았는지 그 과정과 태도가 더 중요한 게 ‘인간으로서의 삶’이 아닐까.

“사람 자기가축화 가설은 우리가 친화력을 지닌 동시에 잔인한 악행을 저지를 수 있는 잠재력도 지닌 종임을 설명해준다.”라는 말은 제목과 상치된다. 디스토피아를 그린 전망들 속에서 희망을 찾고 싶은 사람들의 욕망에 부합하는 ‘다정함’은 노력하지 않아도 힘들지 않게 마음만 쓰면 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확인한다. 친화력은 타자에 대한 이해와 겸손을 바탕으로 환대와 평등의 손짓이다. 진정성을 담은 말과 태도는 아무나 가질 수 있는 삶의 자세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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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와 빈곤 - 산업 불황의 원인과, 빈부격차에 대한 탐구와 해결책 현대지성 클래식 26
헨리 조지 지음,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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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보다 앞선 다른 시대에 유토피아를 동경하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인간은 아직도 동굴 속의 비참하고 벌거벗은 상태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_아나톨 프랑스

뉴기니에 사는 원주민의 질문이 제레드 다이아몬드에게 『총, 균, 쇠』를 쓰게 했듯, 전신 뉴스 권리를 얻고자 뉴욕 출장을 갔던 언론인 헨리 조지는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와 진보와 빈곤이 어깨동무를 하는 이유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정치경제학이 답을 주지 못하는 질문에 스스로 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이 바로 위대한 저작 『진보와 빈곤』을 탄생시켰다. 학문적 호기심이나 학자적 양심이 아니라 오롯이 인간과 사회에 대한 답답함과 가슴에서 우러나온 질문으로 시작되는 이 책은 우리가 반드시 읽어야 할 현대 고전 중 하나다.

제1권 2장에서 밝히고 있듯이 “나는 경제학 교과서를 쓰려는 게 아니고, 단지 어떤 중대한 사회적 문제를 지배하는 법칙을 찾아내려고 한다.” 중대한 문제는 경제성장을 거듭하는 사회의 가난이고, 법칙은 가난을 물리치기 위한 해결책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저자는 자본주의 내부의 심각한 문제인 빈부 격차의 심화와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한 고민을 경제학자가 아닌 일반 시민들을 향해 털어놓는다. 무엇이 문제인가. 왜 그러한가. 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엇일까. 이 책은 그에 답한다.

임금은 자본이 아니라 상품으로부터 나온다는 생각은 헨리 조지의 주장은 상식이다. 이 말이 상식이 되어 노동자의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이 헌법에 기초한 정당한 권리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 스스로도 노조에 대하 부정적 시선을 거두지 않는 타당한 이유를 알 수 없다. 그 운영에 문제가 있다면 개선할 일이다. 말썽부리는 자식을 죽이는 부모는 없다. 잘 가르쳐 사회의 일원으로 건강한 시민으로 성장하도록 온 사회가 돕는다. 그래서 한 아이는 온 마을이 기른다는 말이 있다. 절대 다수인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장하고 인간다운 삶을 지키기 위해 제정한 헌법과 법률을 무시하고 노조 자체를 불순한 집단으로 매도하거나 그 활동을 제한하는 말과 행동이야말로 노동 자체를 존중하지 않는 천박한 인식이다. 그들은, 아니 노동자인 우리는 자본가의 자본으로부터 나온 임금을 받는 게 아니라, 스스로 힘써 만든 상품과 서비스에서 창출한 부의 일부에서 나온 당연한 권리를 갖는 것이다. 임금은 자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노동에 의해 생산된다.

직업과 상관없이 누군가에게 고용되어 시간을 팔아 돈을 사는 모든 임금 노동자는 일에 대한 대가, 즉 월급이나 연봉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직시할 필요가 있다. 또한 그것이 합당한가를 살핀다.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겪는 상대적 박탈감과 빈곤감의 원인은 무엇일까. 엄청난 부를 거머쥔 사람들을 향한 태도와 생각은 어떤가. 선동적인 계급 투쟁의 시대를 거쳐 자본주의가 숨 쉬는 공기처럼 편안해지고 민주주의가 보편적 가치가 된 세상에서도 가난과 빈곤은 사라지지 않는다. 식량과 물품이 부족해서 여전히 굶어죽는 사람이 생기고 일가족이 투신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걸까.

헨리 조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토지 공유제를 주장한다. 세금 또한 토지세 하나면 충분한 이유를 설명한다. 사실 토지 공유제는 새로운 사상이 아니다. 멀리 플라톤의 『국가』에서 오비디우스의 황금시대를 거쳐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 동안 이어온 생각이다. “토지 사유제는 비교적 최근에 생겨난 것으로서 왕권신수설만큼이나 인위적이고 근거 없는 사상이다.”(384쪽)라는 말은 “역사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볼 때, 개인의 소유로 둔갑한 토지는 일종의 장물이다.”라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이미 사적 소유가 허용된지 오래 된 토지를 공유지로 다시 환원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저자는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토지 단일세를 제안한다. 그러면 형식상 토지 소유권은 현재 그대로 유지되도 상관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땅 주인으로부터 소유권을 빼앗는 일도 없고, 사람들이 소유할 수 있는 땅의 한도에 제약을 가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국가가 세금의 명목으로 지대를 가져가기 때문에, 토지는 누구 명의로 되어 있든 어떤 방식으로 분할되어 있든 실제로는 공동 재산이 될 것이고,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그 소유권의 혜택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라고 제안한다.

600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지만 헨리 조지의 핵심 사상은 명쾌하고 단순하다. 과학기술과 문명발달이 계속되는 현대사회에서도 왜 가난은 사라지지 않는지, 빈곤은 역사의 진보에서 필연적인지에 대한 의문에 대해 토지 공개념과 토지 단일세를 주장하며 개인의 좋은 삶과 공동체의 보편적 가치를 종교적 관점에서 살피며 책을 맺는다. 이후 애덤 스미스-데이비드 리카도-토머스 맬서스-J.S. 밀 등으로 이어지는 고전경제학의 대가들에 맞선 마르크스의 등장으로 재야 경제학자 헨리 조지의 아이디어는 외면받았지만 진보와 빈곤 사이에서 고민하는 후세들에게 여전히 영감을 제공한다. 치열한 경쟁과 끝없는 욕망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비극이 인간사의 숙명일까. 여전히 가난하고 대책없는 삶은 오롯이 개인의 책임일까. 능력주의에 대한 반성, 자유와 평등에 대한 해석, 노동과 임금에 대한 생각이 깊어질 때마다 이미, 아주 오래 전부터 비슷한 고민들의 흔적을 뒤적인다.

주기적으로 부동산 광풍이 불때마다 대통령이 바뀌고 사람들은 삶의 목적과 방법을 바꾸고 아이들에게 무엇이 중요한지 가르치지 못한다. 토지 공개념이 등장할 때마다 소환되는 헨리 조지는 공산주의자도, 빨갱이도 아닌 독실한 기독교인이다. 성실하게 열심히 살았으나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 가장으로서 너무나 당연한 질문이 생겼을 뿐이다. 도시는 매일 발전하고 누군가는 아주 잘 사는데 어떤 사람들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이렇게 가난할까. 뉴욕의 마천루와 할렘 가를 목격한 헨리 조지는 엄청난 빈부격차의 원인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고전경제학에서 일관되게 주장하는 지대, 이자, 임금의 관계와 그 설명에 문제는 없을까. 현실은 이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을 이해하고 개선하기 위한 이론이 등장하기 어려울 뿐이다.

미국의 인쇄소 식자공이었던 아일랜드 사람 헨리 조지의 최종 학력은 중학교 중퇴다. 가방끈이 한 인간의 면면을 말해주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우리는 출신학교와 학위, 직업과 이력으로 한 인간의 삶을 평가하기 일쑤다. 그가 걸어 온 길과 흔적을 무시할 수 없으나 대개 한 사람의 본질과 내면을 들여다보는 데는 한계가 있다. 학력이나 직업을 떠올리기 어려운 헨리 조지의 글은 깊은 울림을 준다. 그것은 진보와 빈곤에 관한 열정적 탐구심, 학문적 호기심, 주제에 천착하는 끈기에 문학적 감수성과 인간에 대한 연민이 보태졌기 때문일 것이다. 어렵지 않게 설명하면서도 깊이와 넓이를 확보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기존의 이론을 살피고 주장의 근거를 제시하며 차근차근 설명하는 노력이 많은 사람들을 설득하는 힘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공부‘도’ 잘한 사람이 좋은 삶을 살 가능성이 높고, 그 다음은 공부‘는’ 못한 사람이다. 공부‘도’ 못한 사람이 세 번째라면, 최악은 공부‘만’ 잘한 사람이다. 공부도 못한 사람이 아니라 공부만 잘한 사람들이 대개 세상을 망치고 타인에게 더 큰 해악을 끼치는 경우가 많다. 스스로 궁구하여 질문하고 탐구하는 사람의 자유로운 생각과 한계없는 상상력이 인류에게 더 큰 꿈과 희망을 준다고 믿는다. 사유재산 자체를 부정한 아나키스트 프루동의 급진적이고 자유로운 생각이 내겐 더 매력적이지만 실현 가능성 측면에서 헨리 조지의 주장이 조금 더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말년의 톨스토이의 삶을 생각하면 지식인의 태도와 실천이 어떠해야 하는지 알게 된다. 여러 칼럼에서 톨스토이가 수없이 인용했던 『진보와 빈곤』은 그의 생을 마무리하는 데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 대표작 『부활』에서도 네흘류도프의 입을 통해 이 책의 내용을 언급하며 개인 영지를 모두 농부들에게 나눠주며 자신의 삶을 부활하는 발판으로 삼는 장면이 나온다. 무언가 바꿀 수 없다는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이 책의 미덕은 노동가치와 잉여가치, 차액지대와 절대지대의 차이를 몰라도 괜찮다는 점이다. 경제학 용어와 이론과 통계 수치가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의 이치를 알기 쉽게 설명하며 보편적 상식을 보여준다. 우리가 살아가는 방법, 세상이 나아갈 방향은 정답이 없다. 어느 시대에나 현재를 사는 사람들의 공통된 아이디어와 합의에 의해 결정된다. 지금, 여기에서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제도와 법률, 경제 체제는 언제든 바꿀 수 있다. 바뀔 가능성을 내포한 미래를 준비하는 모든 사람이 ‘왜’라는 질문을 하지 않는다면 주어진 조건에 충실한 노예와 다름 없다. 생각은 다른 곳을 보게 한다. 질문에 답하는 대신 감정적 반응을 보이거나 침묵하고 외면하며 자신의 이익만 돌보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켤코 옳지 않다는 것도, 고쳐 나가야 한다는 사실 또한 더 잘 알고 있다고 믿는다. 토지 공유제, 지대 수익의 국가 환수, 불로소득의 근절이 철지난 유토피아의 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함께 꿈을 꾸면 현실이 된다고 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면 그것이 곧 진짜 현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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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그말리온 열린책들 세계문학 176
조지 버나드 쇼 지음, 김소임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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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비법은 나쁜 매너, 훌륭한 매너 또는 어떤 특별한 매너를 지닌다거나 하는 게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똑같은 매너를 보여 준다는 데 있다. 마치 3등칸이 없는, 한 영혼이 다른 영혼과 똑같이 소중한 천국에 와 있는 것처럼 말이지.”

성격과 매너를 바꿀 수 없는데 말투와 억양을 바꿀 수 있을까. ‘미션 임파서블’의 에단 헌트처럼 무모한 도전에 내기를 거든 히긴스와 피커링의 승자는 누구인가.

신화는 인류의 꿈이자 희망이며 현실 너머 환상의 세계다. 불안과 두려움 없는 인생은 불가능하듯, 고난과 좌절을 겪지 않는 신화는 없다. 현실원칙을 넘어 쾌락원칙에 도달하려는 인간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누군가 이야기를 만들고 그 이야기에 또 다른 이야기가 보태져 거대한 신화의 세계가 탄생했으리라. 그래서 신화는 영원히 이루지 못한 꿈으로 아쉬움과 미련을 남기리라.

“우물쭈물 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라는 묘비명으로 유명한 극작가 조비 버나드 쇼가 소환한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이아는 희곡의 주인공 헨리 히긴스가 꽃파는 소녀 일라이자 둘리툴과 전혀 다르다. 목적과 태도 뿐만 아니라 개연성과 핍진성을 논할 수 없다. 신화는 신화이고, 희곡은 희곡일 뿐! 그러나 인간에겐 유사성을 토대로 비유와 상징을 즐기고 메타포의 감동을 즐길 줄 아는 DNA가 숨겨져 있다. 그것이 비록 왕의 DNA는 아닐지라도 신산스런 일상을 견디고 예술적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본능적 유전자에 해당한다.

피그말리온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키프로스의 조각가다. 나그네들을 박대한 키포스의 여인들이 아프로디테의 저주를 받아 몸을 팔게 되었고 피그말리온은 이를 탄식하며 독신으로 살았다. 현대판 전신인형의 탄생을 예고하듯 피그말리온은 상아로 아름다운 여인을 조각해서 함께 생활한다. 갈라테이아라는 이름까지 붙이고 옷도 갈아입히고 키스도 하고......진짜 연인처럼 살았으니 인터넷 가십뉴스에 나올만한 이야기다. 심지어 아프로디테 축일에 참가해서 진짜 여자로 변하게 해달라는 불가능한 소원을 빈다. 그러나 신화가 아닌가. 그 소원은 이뤄지고 백년해로하며 아들까지 낳았다는 이야기.

형식은 로맨스를 예상하지만 사족처럼 붙은 후일담에서 밝히듯 이 작품은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는다.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이아는 인간의 헛된 꿈과 욕망을 실현하며 대리 만족을 느끼게 하지만 조지 버나드 쇼는 신랄한 풍자와 비판의 대가다. 당대 영국의 신분 제도와 교육, 경제 문제 등을 다룬 이 연극이 뮤지컬, 영화 등 다양한 장르로 변용되어 사랑받는 이유는 빈민가 소녀를 통해 런던 상류 사회를, 인간의 허위의식과 사회적 가면을 폭로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언어학자인 히긴스는 끝까지 거리에서 꽃 파는 소녀 리자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관객의 기대와 예상을 벗어나지만 그것이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며 사적인 로맨스를 넘어 당대 사회에 대한 풍자와 해악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마치 우리 판소리처럼 걸쭉한 입담과 19금 개그가 난무하지는 않지만 히긴스의 냉소적 태도와 무례함이 피커링의 매너와 비교되어 상류사회의 빛과 그림자를 들여다보는 듯하다.

리자의 아버지 둘리틀은 중산층 도덕률에 대해 묻는다. 비보호대상 빈민에 해당하는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며 히긴스에 속물근성을 드러내지만 그것이 둘리틀 개인의 인성이 아니라 영국사회의 구조적 문제라는 점을 조지 버나드 쇼는 분명히 드러낸다. 보편적 복지와 차별적 복지의 프레임 전쟁으로 시끄러운 진영논리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복지란 무엇인지, 그 지향점과 목적지를 분명히 점검해야 하는 상황의 대한민국의 오늘을 돌아보는 데까지 나아가면 지나칠까.

전체 5막으로 구성된 희곡은 서문과 후일담이라는 사족이 길다. 연극이라는 제한적 장치로 다 드러내지 못한, 자신의 생각과 의도를 자세히 설명하는 TMI가 너무 많다. 하지만 희곡은 지루하지 않으며 내용은 진부하지 않다. 여전히 세련된 작품으로 읽고 볼 수 있을만큼 시대를 앞선 듯 인간의 욕망과 내면을 잘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신화에서 이름과 모티프를 가져왔으나 피그말리온이나 갈라테이아의 재해석이 아니라 그들과 전혀 다른 인간 세계의 히긴스와 리자 이야기라서 더욱 매력적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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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치와 자본주의
베르너 좀바르트 지음, 이상률 옮김 / 문예출판사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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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과 사치품을 구별해야 할 필요는 없다. 밴드왜건 효과의 극대화가 유행을 만들고 ‘인싸’와 ‘아싸’를 구별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스놉 효과를 노리는 사람들만 명품을 소비하는 건 아니다. 고가의 물건은 나름의 효용 때문에 그만한 값을 지불하고 구매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지 않으면 팔리지 않는다. 그것이 타인의 부러움과 시샘이든 자기 만족과 인쟁 투쟁이든.

자유와 평등이 보장된 민주주의 사회에서 ‘사치’는 왕과 귀족의 전유물이었다는 철지난 유행가 같은 소리에 한번쯤 귀 기울여보는 건 어떤가. 1913년, 베르너 좀바르트는 사치가 자본주의를 촉발했다는 신박한 주장을 내 놓는다. 인간의 허영심과 상위 계급에 대한 모방이 사치를 조장했고 그것이 서민들에게 유행하면서 자본주의에 활력을 불어넣었다는 주장은 초기 자본주의 모델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참고가 될 만하다. 장에 가는 어머니의 에코백과 영부인의 명품백은 장소와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된다. 때로는 마트에 들고가는 명품백과 대통령 전용기에 오르는 에코백이 자리를 바꾼다. 계급과 계층에 따른 소비와 자본주의적 욕망에 시비를 걸 사람은 많지 않다. 아니, 우리 시대의 자본주의는 이를 흠모하며 삶의 목적과 보람이 되기도 한다. 100년도 지난 베르너 좀바르트의 사치와 자본주의가 새롭게 읽히는 건 숨쉬듯 편안한 자본주의의 출발과 중세 계급 사회의 사치가가 근대사회로 전환되면서 어떻게 일반적인 생활방식으로 자리잡게 되었는지 살펴보는 생각의 실마리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중세와 근대의 강은 넓고도 깊다. 자본주의가 확고하게 자리잡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고 우리가 아는 자본주의는 시대와 국가에 따라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변해왔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과 자본주의의 메커니즘은 본질적으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궁정에서 출발한 사치는 시민의 부와 새로운 귀족, 즉 신흥자본가의 등장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저자는 16~18세기를 집중적으로 조망한다. 대도시의 발생은 사랑을 세속화했고 고급 창녀의 등장 배경이 되었다. 1~3장은 4~5장을 위한 사적 전개 과정이다. 사치가 어떻게 자리잡게 되었으며 사치에서 자본주의가 배태된 배경을 추적한다. 그러면 이 책의 제목이 된 ‘사치’란 무엇일까.

“사치란 필요한 것을 넘어서는 모든 소비이다. 이것은 분명히 상대적인 정의이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 때에만 명료한 내용을 지닌다. 이것을 확실하게 하는 데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우선 그것을 주관적으로 어떤 가치판단(윤리적인 것이든, 심미적인 것이든, 또는 그 어떤 조류의 것이든지 간에)에 근거할 수 있다. 아니면 그 필요한 것을 잴 수 있는 어떤 객관적인 척도를 찾으려고 시도할 수 있다.” 좀 당황스런 기준이지만 주관적 가치판단과 객관적인 척도를 살피자는 주장이다.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만 ‘필요한 것을 넘어서는 모든 소비’라는 간단한 정의도 문제다. ‘필요’의 기준과 수준이 다르다.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상식’이 서로 다르듯, 필요는 ‘욕망’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베르너 좀바르트는 이 기준을 저 멀리 왕과 귀족에서, 가깝게는 도시생활에서 찾는다. 순수한 사치산업과 혼합산업, 사치소비의 혁명적인 힘으로 마무리되는 일련의 과정은 근대 자본주의를 추동하는 힘으로서 사치의 역할과 힘을 보여준다.

1899년 소스타인 베블런은 『유한 계급론』을 통해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에 새로운 안목을 보탰다. 개인적으로 매우 인상깊었던 관점 중의 하나다. 주류 경제학자들이 자본주의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방식은 정치가 배제된 형태의 통계와 결과론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미 벌어진 현상에 대한 해석은 현실을 이해하고 다가올 미래를 예측하는 데 생각보다 큰 도움을 주지 못한다. 만약 그랬다면 노벨 경제학상 수장자를 대통령이나 경제관료로 활용해야 하지 않을까. 여전히, 경제학 전공자들이 실물 경제를 움직이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으나 살림살이가 나아지는 경우는 드물고 불황과 공황을 예측할 수도 없었다. 정치와 심리가 경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 각종 지표들로 무장한 예측들이 난무하지만 ‘인간’의 삶을 중심으로 생활밀착형 경제학을 들고 나온 사람은 많지 않다. 아마르티아 센이 불평등과 빈곤에 대해 깊이 고민했으나 ‘자유로서의 발전’은 여전히 요원하다.

이제 다시, 아니 언제나 그러하듯 왜곡된 자본과 개인의 이기적 욕망은 비정상적인 괴물을 양산해왔다. 합리적 선택과 이성적 판단으로 작동하지 않는 경제는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이 난무한다. 오래 전 베르너 좀바르트도 자본주의의 ‘현재’를 고민하기 위해 통시적 관점으로 과거를 돌아보며 미래를 전망했으리라. 현재는 과거의 결과다. 도미노처럼 쓰러지는 시간의 연속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니 우리는 현재의 결과로서 미래를 맞이할 뿐이다. 지금, 여기서 우리는 어떤 선택과 행동으로 미래를 만들어가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그것이 개인의 노력과 한계라고 해도 흐름을 짚어내고 전체를 조망하는 안목이 필요하지 않은 건 아니지 않은가.

이렇게 해서 그 자신이 ―이미 우리가 본 바와 같이―비합법적인 사랑의 합법적인 자식인 사치가 자본주의를 낳은 것이다. - 2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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