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누구를 ‘후배’라고 부를 때는, ‘같은 꿈을 꾸고 있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같은 방향을 보고 있는 사람들’, ‘같은 희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모두 아우르는 말이다. 때로 그 ‘같은 꿈’ 때문에 ‘같은 상처’를 입는 경험을 나누어 갖기도 해서 동질감은 더욱 짙어진다. - P. 73

아직 희망을 버릴 때가 아니다. 지금은 희망을 키워갈 때이다. - P. 145

나는 항상 부끄러움을 통해서 배운다. - P. 166

“자신이 알고 있는 제한된 지식만을 반복적으로 사용할 것을 강요받는 삶, 그것이 노동자의 가장 큰 비극입니다.” - P. 180

가족이 아닌 사람을 위해 묵묵히 자신에게 손해가 되는 길을 선택하는 모습은 그것이 비록 ‘작은’ 희생일지라도 가족을 위한 ‘큰’ 희생 못지않게 감동적이다. 피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서 부당한 권력과 자본에 의한 피해가 뻔히 예상되는 길을 선택하는 것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 P. 217

그토록 어려운 처지의 장애인도 훌륭하게 성공했으니, 그보다 더 어렵지도 않은 조건에서 성공하지 못한 사람은 불성실하거나 게으르기 때문이라는 은근한 조장이 그 글에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 사회의 모순된 억압 구조를 개인의 불성실로 은폐하고 싶어하는 불순한 시도가 글쓴이도 모르는 사이에 그 글 속에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 P. 220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노종조합이란 단어가 자신의 인생과 바늘 끝만큼이라도 관계를 맺게 될 것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들 앞에 나가 설 때마다 막막함과 무력감이 나를 짓눌러 똑바로 서 있기조차 버겁다. - P. 249

최소한 사회적 약자들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그것이 다른 많은 경험들과 함께 ‘톨스토이 예술론’을 통해 내가 깨달은 최저값이다. - P.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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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을 따라 1면 머리기사가 정해지기도 하지만 신문의 머리기사에 따라 여론이 흘러가는 경우가 더 많다는 사실에서 그 의미를 실감할 수 있을 터이다. - P. 16

삶의 현실과 신문 지면 사이에 불가피하게 놓이게 된 여과장치가 바로 편집인 셈이다. - P. 23

가치판단이 빠진 편집이란 애초부터 성립 자체가 불가능하다. - P. 24

신문 표제란 제목과 달리 기사를 종합하는 한편 역동적이고 구체적으로 그것을 드러내주어야 한다. - P. 63

사설을, 신문을 ‘비판적 안목’으로 읽을 수 있도록 교육하는 일대 방향 전환이 필요하다. - P. 226

독자 자신이 주체적으로 시시비비를 가리며 읽어야 한다. 독자 개개인의 입장에서 신문을 재편집할 때 지면 읽기란 신문 편집자와 한 판 장기를 두는 것과 같다. 상대방이 둔 수를 보며 그 의중을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 P. 280

독자 한 사람 한 사람은 ‘언론기관’이라는 골리앗 앞에서 대단히 무기력한 존재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독자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신문을 올바르게 읽어 나간다면 독자들은 골리앗을 쓰러뜨린 다윗이 될 수 있다. 신문을 볼 때 편집을 읽어야 한다는 이 책의 주제도 결국 다윗이 골리앗에게 던졌던 돌멩이를 독자들에게 전해주기 위해서였다. - P. 283

삶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거짓말을 대량으로 양산하는 ‘보이지 않는 권력’에 철저히 예속될 수밖에 없다. - P. 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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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자 케이스 스타노비치Keith Stanovich가 지적했듯, 여자는 투표를 할 수 없고 흑인은 읽는 법을 배울 수 없다는 것도 150년 전에는 상식에 속하는 문제였다. - P. 43

미디어의 맹폭격을 잘 견뎌내려면 항상 자신의 사고를 주의 깊게 성찰해야 한다. 사고에 오류가 없으면 이런 보도 내용에 휘둘릴 위험성도 적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요한 원인은 일화적인 증거에 의지하는 우리의 성향에 있다. - P. 49

연구 결과 우리는 통계수치보다 이야기에 더 의존한다고 한다. - P. 51

사고방식은 믿음에, 믿음은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 내세울 만한 증거가 없을 경우, 믿음은 틀릴 가능성이 더 많다. 그리고 잘못된 믿음을 토대로 결정을 내리면, 결정도 잘못될 가능성이 더 커진다. 그러므로 믿음을 형성하고 결정을 내릴 때는 비판적인 사고력을 강도 높게 적용할 줄 알아야 한다. - P. 74

대부분의 사람들은 회의주의자를 모든 것에서 흠집만 찾으려는 냉소적인 사람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회의주의자는 이런 사람이 아니다. 회의주의자는 어떤 주장을 믿기 전에 그 증거를 평가해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일 뿐이다. 회의주의는 하나의 방법이지 태도가 아니라는 말이다. - P. 75

인간은 원인을 찾고 싶어 하는 동물이다. 인간에게는 세계 속에서 일정한 양상을 발견하려는 천부적인 욕구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삼라만상의 원인을 발견한 이들은 진화의 과정에서 살아남아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에 전할 수 있었다. - P. 132

우리에게는 믿음을 견고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강력한 욕구가 있다. 세계가 우리의 믿음에 들어맞는다는 것을 확인할수록, 우리 믿음이 진실이라는 생각도 더욱 강해지기 때문이다. - P. 162

우리 믿음은 소유물과 같다. 우리가 물건을 사는 이유는 그것이 유용하기 때문이다. 믿음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믿음을 간직하는 이유는 흔히 이 믿음을 뒷받침해 주는 증거 때문이 아니라, 이 믿음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를 잘못된 믿음으로 인도하는 편향적인 인식은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다음의 세 가지 질문이 좋은 출발점이 되어줄 것이다.

1) 이 믿음이 진실이기를 바라는가?
2) 이 사건이 일어나리라고 예상하고 있었는가?
3) 이런 바람과 기대가 없다면, 이 일을 다르게 인식할까?

그렇다는 답이 나왔다면, 세계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 해석하는 방식에 당신은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 P. 179

우리는 흔히 상관관계를 잘못 파악하며, 이런 오류로 건강은 물론 경제적인 면에서도 상당한 대가를 치른다. 그런데도 상관관계가 있으리라는 기대나 바람으로, 있지도 않은 상관관계를 믿을 때가 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 이런 바람과 기대가 세계를 인식하고 평가하는 방식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 P. 202

“혼돈 이론과 복합성 이론은 미래가 본질적으로 예측 불가능한 것임을 말해 준다. 이는 우리 경제와 주식 시장, 제품가격, 날씨,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개체 수, 이외의 여러 가지 다른 현상들도 마찬가지다.” 요컨대 본질적으로 예측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 P. 240

우리에게는 확인을 받으려는 타고난 성향이 있다. 기존의 믿음과 기대를 지지해 주는 정보에만 선택적으로 주의를 기울인다는 말이다. - P. 244

실제로 면접을 통한 주관적인 평가는 해로울 수 있다. 신뢰성과 타당성이 모두 부족하기 때문이다. 많은 연구 결과를 봐도, 면접관의 주관적인 평가는 지원자의 성공 여부를 가늠하는 훌륭한 지표가 될 수 없으며, 면접관들의 평가도 서로 엇갈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 P. 311

외부 세계를 인식하는 과정처럼, 과거의 사건을 기억하는 과정도 구성적이다. 암시적이고 유도적인 질문들이 기억에 영향을 미치고, 우리는 과거의 경험을 조합해서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낸다. 또 인식작용의 경우처럼 자신의 바람이나 기대에 따라 다른 기억을 끄집어낸다. - P. 343

집단이 개인보다 뛰어나지만, 집단 안에서 가장 우수한 인재는 혼자 일할 때 집단보다 더욱 훌륭한 성과를 보여준다는 말이다. - P. 371

우리가 믿음을 원하는 이유는 삶에서 확실성을 바라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은 아주 복합적이고 예측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흑백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편이 더 편해도, 자신의 믿음을 확신하는 편이 더 마음 편해도, 우리가 모르는 것이 참으로 많다는 점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 P. 377

심리학자 톰 길로비치의 말처럼, “우리를 곤란에 빠뜨리는 것은, 흔히 우리가 모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것들”인 것이다. - P. 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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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뮨주의자의 현실에 대한 긍정은 항상 현실에 대한 변혁을 내포한다. 현실을 긍정하지만 그 현실에 머물지 않기에 우리는 코뮨주의가 이념이라고 말한다. - P. 7

위대한 사랑은 그 사랑의 대상을 먼저 창조한다고 했던가. 우리는 친구를 창조함으로써만 우리의 우정을 이어간다. 적을 친구라고 우기는 게 아니라, 적을 친구로 만드는 것이 우리의 우정이고 사랑이다. 혁명가는 세계를 전복하는 혁명으로 세계에 대한 그의 우정을 보여주지 않는가. 우정이나 사랑은 어떤 때 꽤나 잔혹한 행동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 P. 16

코뮨주의자로서 우리는 또한 사유화(privatization)에 반대한다. - P. 18

자본은 결핍으로 충만한 신체이다! - P. 27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말을 자신의 삶을 바꾸지 않는 변명으로 삼지 말라고. 중요한 것은 당신의 삶을 바꾸는 것이다. 그리고 여러 대안적 실험들을 소통시키고 확산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세상이 바뀐다.” - P. 29

코뮨주의는 대안적 삶에 대한 끊임없는 물음과 시도 속에서 언제든 실현된다. - P.  29

결여감을 지닌 자는 떠나지 못한다. - P. 31

자, 이제 우리도 웃으며 떠날 시간이다! - P. 31

대중이 혁명적이라는 것은 “대중이 혁명을 욕망한다는 뜻에서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을 욕망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대중은 ‘소용돌이(volution)’를 ‘반복(re-)’하는 흐름이다. 따라서 대중 바깥에서 혁명을 기획하고 계산하려는 시도는 무익하다. 혁명은 대중에게 속한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혁명은 계산 너머에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 P. 64

혁명가란 혁명의 불길을 지도하는 자가 아니라 불을 붙이는 자이다. 그는 시대의 습기를 가장 먼저 날려버린 가장 건조한 지대로서 스스로 타오름으로써 불길을 주변으로 전파하는 자이다. 전달도 증폭도 대중들의 운동이다. - P. 68

“스승이 될 수 없는 친구는 진정한 친구가 아니고, 친구가 될 수 없는 스승은 진정한 스승이 아니다.”(이탁오의 <분서> 재인용) - P. 87

혁명은 대중이 만드는 것이고, 대중의 능력에 의해 진행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 P. 104

전위는 정해진 어떤 계급적 이익이나 ‘보편적 진리’를 알려주고 전달하는 조직이 아니라, 앞서서 실험하고 앞서서 실행하며 참조할 수 있는 새로운 사례를 창안하는 그런 조직이어야 한다. - P. 105

사적 소유는 타자의 추방과 배제가 기본 특징이다. 그래서 소유권을 기초로 정의된 기본 권리들은 암묵적으로 ‘타자=위험 세력’. ‘타자=침해자’라는 인식을 전제한다. 이런 틀에서는 타자를 향한 어떤 적극적 개방이나 적극적인 구성도 사고하기 어렵다. - P. 127

코뮨주의적 소유는 ‘소유’의 의미 자체를 바꾸는 것이다. 코뮨주의적 소유에서, 소유는 여전히 ‘권리’로 불릴 수 있지만, 이때 권리는 어떤 법적 형식을 지칭한다기보다, 관계를 구성할 수 있는 ‘기예’나 ‘능력’을 의미할 것이다. - P. 137

삶의 윤리란, 서로를 갈라놓는 분리의 격자 속에 던져진 가상의 이념이 아니라, 함께 생성하는 관계를 가리키는 말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 P. 248

냉소주의자는 단지 질서들을 객관적으로 인식할 뿐이라고 주장하지만 사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나쁜 질서들을 객관적 현실로 실현하는 기획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이런 냉소주의적 태도를 작동시키는 것은 차악을 선택하지 않으면 최악의 상태에 빠질 것이라는 공포이며 자기 능력에 대한 무지와 불신이다. - P. 303

사뮈엘 베케트는 “예술가가 된다는 것은 아무도 실패해본 적이 없는 방식으로 실패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유머리스트에게도 어울리는 정의이다. 유머리스트는 빈번히 실패한다. 그러나 아무도 실패해 본 적 없는 새로운 방식으로만 실패한다. 그는 피로감 없이 유쾌하고 즐거운 실패들을 이어간다. 그는 자신의 실패, 과오, 심지어는 자신의 성공과도 쉽게 헤어질 수 있을 만큼 이별 능력의 최대치를 지녔기 때문이다. - P. 322

코뮨주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현실 너머의 이념으로 주어지고 의지의 조직화로 성취되는 초월적 관념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를 해체하는 운동 속에서 구성되는 공통적(commune) 삶의 양식이다. ‘공통적’이란 어떤 의미인가? 관념론자들은 서로 다른 개체들이 동일한 관념, 표상, 속성을 공유하는 사태를 공통적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유물론자에게 공통성은 관념의 동일성이 아니다. 공통성은 관념 이전에, 관념과 무관하게 운동하는 물질의 고유한 양태이다. 공통성은 서로 다른 힘과 방향을 지닌 운동(흐름)들이 연합하면서 구성하는 신체성이다. - P. 328

마르크스는 이렇게 ‘모든 사람이 그가 원하는 분야에서 자신을 도야할 수 있는’ 상태, ‘오늘은 이 일, 내일은 저 일을 하는 것’이 가능한 사태를 자유라고 불렀다. - P. 375

코뮨주의란 복수의 개인들이 능동적으로 이러한 집합체인 코뮨을 구성해 가는 활동이다. 능력의 관점에서 보자면 코뮨주의란 복수의 개체들의 능력이 서로 증대하도록 적극적으로 협력-체인 코뮨을 만들어 가는 활동이다. 코뮨의 구성을 통하여 집합체의 잠재력의 폭이 커지며, 협력하는 각인들은 하고자 하는 바를 더욱 잘 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코뮨주의란 바로 협력-체, 즉 코뮨의 능동적이고 의식적인 구성을 통하여 능력을 증대해 가는 활동인 것이다. - P. 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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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윤리를 비루하게 모방하고 있는 자본주의 윤리는 노동자의 육체를 저주한다. 그리고 생산자에게는 가능한 최소한의 필수품만 주고, 그들의 즐거움과 온갖 열정을 억누르며, 휴식이나 감사의 인사도 없이 계속해서 돌고 도는 기계의 일부로 남아 있는 저주 받은 운명을 살도록 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고 있다. - P. 10

자본주의 문명이 지배하는 국가의 노동자 계급은 기이한 환몽에 사로잡혀 있다. 이러한 망상이 개인과 사회에 온갖 재난을 불러 일으켜, 지난 2세기 동안 인류는 크나큰 고통을 겪어왔다. 다름 아니라 노동에 대한 사랑, 일에 대한 격력한 열정이 바로 이러한 환상의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으며, 이러한 열정이 어찌나 격렬한지 한 개인뿐만 아니라 후손들의 생명력까지 소진한 지경에 이르렀다. - P. 14

프롤레타리아들은 매우 형이상학적인 법률가들이 꾸며낸 부르주아 혁명기의 인권선언보다 천 배는 더 고귀하고 신성한 이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선언해야만 한다. 하루에 세 시간만 일하고, 나머지 낮과 밤 시간은 한가로움과 축제를 위해 남겨두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 P. 38

노동자 계급이 자신을 지배하면서 본성까지 타락시키고 있는 악을 뿌리 뽑아버리려면 가공할 만한 힘으로 떨쳐 일어나야 한다. 단지 자본가들의 착취의 권리만을 의미할 뿐인 ‘인권선언(Rights of Man)’ 또는 단지 불행할 수 있는 권리만을 의미할 뿐인 ‘일할 권리(Right to Work)’가 아니라 누구든 하루 세 시간 이상을 일할 수 없도록 금지하는 철의 법칙을 주조(鑄造)하기 위해 봉기해야 하는 것이다. - P. 71

영국의 기계공들은 1872년경에는 노동 시간을 9시간으로 단축시켰고, 1880년경에는 토요일을 반공휴일로 만들어 주당 52시간만 일하는 ‘영국식 주말’이 널리 확산되었다. - P.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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