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기술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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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어딘가로 떠나고 싶은 욕망은 인간의 본능에 가깝다. 10만 년 전에 인류가 등장하고 겨우 1만 년 전에 정착생활이 시작되면서부터 잠재된 욕망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은 아닐까? 현대인의 일상은 과거에 비해 상상을 초월할 만큼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과학기술의 발달과 정보의 대중화로 인해 언제든 거침없이 달릴 수 있고,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갈 수 있게 되었다. 단순히 교통수단이 발달한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여행은 누구에게나 보편화되었고 대중화되었다.

  여행의 목적지는 출발지이다. 돌아오지 않기 위해 떠나는 것을 우리는 여행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결국 원점으로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과정들을 여행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돌아오기 위해서 떠나는 것은 아니지만 원점으로 회귀하는 방식의 좀 더 먼 거리로의 여행은 반복되는 일상에서의 일탈이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아니거나 특정 공간을 순환하면서 생활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여행의 욕구를 느끼지 않을지도 모른다. 유목민이나 집시처럼 떠도는 사람들에게는 삶이 곧 길고 지루한 여행일 뿐이다.

  보통의 <여행의 기술>은 여행에 필요한 기술을 설명하기 위한 책이 아니라면 면에서 제목이 부적절하다. 여행지를 소개하거나 미리 알아두어야 할 여행 정보지와는 물론 거리가 멀다. ‘알랭 드 보통’식의 여행에 관한 에세이이다. 저자가 이 책을 통해 말하는 여행은 작은 제목들에 잘 나타나 있다. 그리고 처음 접하는 독자가 아니라면 저자에 대한 정보에도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를 이해하는 것이 책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라는 책으로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보통 신드롬’을 만들어 낼 정도로 고정적이고 폭발적인 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이 작가의 매력은 예민한 감수성과 철학자로서의 깊이 있는 사색에서 기인한다. 폭넓은 독서와 사유를 알기 쉽게 풀어내면서 감성적인 부분들과 결합시켜 나가는 방식이 서툴지 않고 고백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은 후에 밀란 쿤데라의 책들을 기다린 기억이 난다. 최근의 <행복의 건축>에 이르기까지 기다리면서까지 마음 졸일 필요는 없지만 새 책이 나오면 별로 고민하지 않고 읽어보게 되는 작가가 되었다. 문학이 아니면서도 사람들에게 널리 읽히는 책을 꾸준히 써낼 수 있는 것은 보편적인 공감대를 이끌어 내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단순한 호기심이나 대중적인 인기만으로 이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출발, 동기, 풍경, 예술, 귀환’이라는 다섯 개의 주제는 여행에 관한 가장 일반적인 과정이다. 여행지에서 만나게 되는 풍경들과 예술가들과 연관된 장소 그리고 독서를 통해 저장된 풍부한 상상력과 여행하면서 손에 들고간 파스칼의 <팡세>가 어우러진 책이다. 한 개인의 여행 과정을 따라가는 일은 사실 지루하고 재미없다. 내가 가본 장소들에 대한 추억을 더듬거나 여행 정보 수집 차원이 아니라면 말이다. 보통의 여행지도 런던에서부터 암스테르담, 마드리드, 프로방스 등 유럽에 국한되어 있고 유럽의 문학과 예술을 중심으로 생각의 실마리를 풀어내고 있기 때문에 여행지에 대한 이야기나 감상들은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다만 여행을 위한 출발과 귀한 그리고 여정에서 보여준 생각의 흐름이나 감상들은 누구나 어디나 공통 분모가 되어 찾아 볼 수 있는 내용들이기 때문에 공감을 할 수 있었다.

  인생을 여행에 많이 비유한다. 죽음을 최종 목적지로 한 멀고도 긴 여행. 행선지는 바꿀 수 있지만 되돌아 갈 수 없는 시간 여행. 살아가면서 최소한의 비상구나 탈출구가 필요하다. 인간은 누구나 떠나고 싶어한다. 모태 회귀 본능처럼 바다를 동경하고 반복적인 일상으로부터 탈출을 꿈꾸는 모든 사람들의 본능에 따라 올 여름도 기형적인 휴가와 떠남과 돌아옴이 이어질 예정이다. 동시에 떠나는 여름 휴가! 그렇게라도 위안이 되고 정리가 될 수 있다면 좋겠다.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사치스런 투정일 수도 있겠지만.

  여행은 어디로 가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 하느냐가 중요할 수도 있다. 다양한 방법과 요소들이 결합되어 평생 잊혀지지 않는 여행이 되기 때문이다. 아침마다 부딪히는 모든 풍경과 창 밖에 부는 바람소리가 여행지의 그것일 수 있다는 새로운 발견들로 이 책은 마무리 된다. 삶이 여행의 한 과정이든, 공간의 직접적인 이동 과정에서 만나는 수많은 풍경들과 낯선 사람들, 새로운 음식들이 생의 활력이 되고 목적과 방향을 수정할 수도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든 떠날 준비를 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070627-0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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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꾸와 오라이 - 황대권의 우리말 속 일본말 여행
황대권 글.그림 / 시골생활(도솔)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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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손톱이 길다며 쓰미끼리를 가져오라고 하시던 외할머니가 떠올랐다. 25년 전 외삼촌을 따라 이민을 가신 외할머니는 이제 80이 넘으셨다. 어린 시절 일본어를 배우셨고 인생의 황혼무렵에 영어 때문에 고생하실 외할머니의 고달픈 언어 생활을 돌이켜보는 일은 개인의 차원을 넘어 굴곡진 한국사의 일부분이다. 컵을 ‘고뿌’라고 하시고 접시를 ‘사라’라고 하시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까마득하다. 물론 우리들 주변에서 지금도 그런 말들이 쓰이고 있기는 하다.

  부모님 세대의 끝자락 쯤에서 일제 시대에 초등 교육을 받았던 분들의 기억과 언어 습관에 남아 있는 일본말 뿐만이 아니라 왜곡되고 변형된 형태로 남아 있는 일본어는 아직도 생활 속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 특히 공사 현장이나 당구장 등 일제 강점기에 새로 생겨난 물건이나 제도에 대한 용어들은 쉽게 고쳐지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야끼만두’를 시켜 먹고 ‘우와기’나 ‘가다마이’의 준말인 ‘마이’를 입고 생활하는 것은 분명 한국인이다. 정말 고치기 어려운 것이 일상 생활에서 사용하는 말이다.

  황대권의 <빠꾸와 오라이>는 우리말에 남아 있는 일본어에 대한 철저한 확인과 분석 작업이다. 93년 1월말부터 5월까지 대략 4개월간 1만페이지가 넘는 일본어 사전을 뒤적이며 우리말에 남아 있는 일본어의 흔적과 어원을 찾아내는 일은 황대권의 영어생활 때문에 가능했겠다. 짧은 시간 동안 자신의 언어 생활에 대한 정체성을 확인하는 일은 우리말에 녹아 있는 부끄러운 자화상을 그려보는 일이었을 것이다. 사실 말이라는 것이 떠오르는대로, 입에서 나오는대로 사용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그렇게 생활 곳곳에 깊게 자리잡은 말들을 고쳐나가는 것도 의식적인 노력 없이는 불가능하다.

  저자는 이 책에서 국어 순화나 일본어의 잔재가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나른한 봄 햇살을 받으며 사전을 뒤적이고 우리말에 녹아 있는 일본어에 대해 확인하는 게으른 풍경이 떠오를 정도로 그저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그리고 재미있게 그것들을 추억하고 있다. 엽서를 통해 여동생에게 이 글들을 전했고 그것들을 모아 출판한 책이니 감옥으로부터 전해진 엽서의 내용들이 하나의 주제로 묶인 책이다.

  일본어를 확인하고 어원을 찾아가는 방식이 유년 시절의 추억과 가족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시작된다. 정감 넘치는 60년대의 풍경과 언어 생활을 먼저 보여주고 저자의 일기장이나 에피소드를 통해 일본어가 사용된 예를 들어주니 독자들 입장에서는 수필을 읽어나가는 느낌이 든다. 같은 얘기를 하더라도 이야기하는 방식과 태도에 따라 듣는 사람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해한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할 수 있는 책이다.

  50대 이상 나이를 먹은 사람들에게 이 책은 유년 시절의 추억을 길어 올리는 흑백 필름의 역할을 해 줄 것이다. 그 속에 우리가 알지 못하고 사용했던 일본말들을 확인하고 돌이켜보는 작업은 의미 있는 일이다. 35년간 일본의 억압적인 식민지 통치 아래 생활했고 해방후 6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일본의 말과 문화의 영향은 여전하다. 세대가 달라지고 시간이 흘러가면서 점차 사라지겠지만 국적 불명의 어휘들은 정확하게 그 뜻과 어원을 알고 사용하거나 정리하거나 해야 할 것이다.

  과거사 문제와 상관없이 청소년들에게 일본 문화는 매력적인가 보다. 대중가수의 노래를 따라 부르기 위해 일본어를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이나 일본인이 가진 정신과 생활 태도를 높게 평가하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일본에 대한 호의적인 태도를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에 대한 국민 정서나 감정은 논외로 하더라도 한 나라의 말과 글은 그 나라 사람들의 정신을 반영한다. 맑고 깨끗한 언어는 민족주의나 국수주의의 논란을 넘어선 자리에 있다고 믿는다. 내가 사용하는 말과 글에 대한 관심과 반성은 나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일이다.

  감옥에서의 추억과 유년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이 책을 펴냈을 저자나 출판사의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최근 유행처럼 번지는 우리말과 관련된 책들 속에 묻혀 갈 책일 수도 있겠다. 정확한 우리말과 글을 사용하기 위해서 일상속의 일본말을 확인하는 작업은 필수적이다. 이렇게 재미있는 접근 방법도 좋지 않을까 싶다. 기억과 학습이 경험과 결합될 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을 테니까.


07042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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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꿀라 2007-04-20 1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리뷰를 늘 기다리는 분 중에 한분이 인식의 힘님이랍니다. 매번 읽은 기회를 제공해 주시니 이 기쁨을 어찌 전해드려야할지....... 감사합니다.

sceptic 2007-04-23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끄럽습니다. 사적으로 끄적이는 글을 읽고 덕담 나눠주셔서 늘 감사드립니다. 행복한 봄날 보내시기 바랍니다.
 
처음처럼 - 신영복 서화 에세이
신영복 글.그림, 이승혁.장지숙 엮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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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봉 전 영화를 예매하듯이 나올 예정인 책을 예약 주문하는 것은 오로지 필자에 대한 믿음만으로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신영복 선생님의 <처음처럼>은 많이 망설였다. 필자에 대한 믿음은 있지만 출판 의도와 내용에 대한 의심은 지울 수가 없었다. <엽서> 영인본이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발췌한 내용들을 그림과 함께 엮었다면 재탕 출판의 전형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신영복’이라는 또 하나의 상업 브랜드가 생길 수도 있다는 우려를 지울 수가 없었다. 원저자의 의도와 달리 가볍고 빠른 템포로 독자에게 접근하는 책들을 무수히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고민을 하다가 결국 예약 주문을 하고 한 달 이상 책을 묵혔다가 책장을 열었다. 1시간 남짓 선생님의 글과 그림 그리고 글씨에 취한다. 전날 마신 ‘처음처럼’의 부드러운 목넘김을 떠올렸지만 <처음처럼>의 글들은 목에 턱턱 걸려버린다.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재탕에 대한 우려와 내용을 부분적으로 드러내면서 감수해야 하는 위험성을 깊이 우려했던 작가의 고민이 전해진다. 그래서 안심하고 본문을 열었다. 새로 쓰고 그린 60여편이 있다니 그만하면 충분하겠다 싶었다.

 어쩔 수 없이 시각적 이미지가 전해주는 정보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우리에게 선생님의 글씨나 그림은 편안함 이상을 전해준다. 글씨의 내용과 글씨의 모양새가 어우러져 ‘더불어함께’가는 모습이다. 형식과 내용의 거의 완벽에 가까운 결합이라고 볼 만하다. 오랜 수형기간을 ‘나의 대학 시절’이라고 밝히시는 내용에 공감할 수밖에 없다. 살과 살을 부대끼며 온몸으로 부딪혀 인간을 배우고 펜대나 굴리면서 현장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었던 삶에 대해 두려워하는 마음이 곳곳에 배어 있다.

 내용과 글씨들은 너무나 익숙하고 친근하다. 저자의 책들을 읽고 강연을 들었던 사람이라면 다시 사서 볼 필요가 없다. 이 책의 목적은 내용에 있지 않고 조화와 연합에 있다. 글씨와 그림들이 내용을 바탕으로 연합군이 되어 드러내는 힘은 예상치 못한 효과가 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30, 40대를 넘어 10대와 20대에게도 하방연대의 힘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자신을 세상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자신에게 맞추려는 우직한 사람이 되는 것은 어떨까 생각해보는 시간을 마련해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20년 20일을 감옥에서 보낸 노인의 재미없는 책이 아니라 친근하고 편안하게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책으로 평가받을 수 있기를 지극히 주관적으로 희망해 본다. 랜덤하우스의 기획과 신영복이라는 이름이 결합되어 탄생한 책이지만 외적 조건들보다 서화에세이가 갖는 파괴력쪽에 힘을 실어 주고 싶은 바람이다. 책을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부담없이 권할 수 있는 책도 한 권쯤 필요하다는 점에서 좋은 점수를 주고 싶다.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는 새싹처럼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겨울 저녁에도
마치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
언제나 새날을 시작하고 있다.”
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가는 끊임없는 시작입니다. - P. 18

 처음이 갖는 무수히 많은 의미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된다. 술을 처음 마실때처럼 아침에도 개운하고 뒤끝이 없는 소주의 의미도 마찬가지겠지만. 언제나 새날인것처럼 그렇게 살고 싶다. 다른 의미에서 하루살이가 되고 싶다. 오늘과 다른 새로운 희망으로 시작할 수 있는 매일 매일은 얼마나 근사한가. 근사한 꿈은 꿀수록 좋은 것이 아닌지.

인생의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라고 합니다.
냉철한 머리보다 따뜻한 가슴이
그만큼 더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가장 먼 여행이 있습니다.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입니다.
발은 실천입니다.
현장이며 숲입니다. - P. 50

 말없이 깊이 공감하며 실천으로 대답할 일이다. 머릿속의 앎과 지식들이 손과 발로 실천되지 못하거나 현실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의미 없는 일이다. 살아가면서 그 방법론에 대해서는 갑론을박하고 있다. ‘더불어함께’라는 방법론은 더더욱 모호하고 어렵기만하다. 실천적인 사람들의 일관된 모습을 부럽기보다 두렵다. 그곳에서 찾을 수 있는 보람과 행복은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으니 그곳에 있을 것이다.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지도 못했는데 ‘발’까지는 언제 가나……

올바른 인식은 과학적 분석이나 많은 정보가 아니라
대상과 필자가 맺는 ‘관계’로부터 옵니다.
애정의 젖줄로 연결되거나 운명의 핏줄로 연결됨이 없이
대상을 관찰하는 관계는 ‘관계없는’ 것과 같습니다. - P. 191

 누구나 살아가면서 어려워하는 부분들이 있겠지만 가장 중요하다는 ‘관계’를 잘 맺지 못하는 성향의 나 같은 사람은 사회생활이 힘들다. ‘관계없는’ 것으로 전제하면 편하지만 ‘이성’과 ‘감성’ 부분의 부조화는 개인의 성향을 넘어 ‘관계’의 기본을 부정한다. 관계 맺기의 기본이 타인에 대한 관심과 이해인지 믿음과 배려인지에 따라 미묘하게 달라진다. 어려운 일이지만 올바른 ‘인식’은 과학적 분석이나 많은 정보가 아니라 대상에 대한 ‘관계’로부터 온다는 말이 아프게 다가온다.

 ‘가슴’을 만나면 곧바로 ‘발’에게 가야겠다.


070317-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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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17 14: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잉크냄새 2007-03-20 0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예약주문하고 받은후 얼핏 넘긴 책장에서 기존의 책과는 다른 약간은 재탕 형식의 분위기가 있지 않나 싶어서 아직 펼치지 않고 있었는데 그 불식을 없애주는군요.

sceptic 2007-03-20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마천님 살다보면 헷갈릴수 있지요...^^

잉크냄새님, 출판사가 마케팅에 능한 회사라서 좀 삐딱한 시선으로 보지만 책은 걱정보다 괜찮았다는 생각입니다.
 
민들레는 장미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황대권 지음 / 열림원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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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꽃으로 장미를 연상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 화려한 외모와 강렬한 붉은 빛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서양의 꽃이지만 특별한 행사와 기념일을 위해 사람들은 장미를 준비한다. 생의 가장 화려한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 하지만 장미는 꽃이 진 후에 가장 흉한 모습을 보여준다. 거꾸로 뒤집어 정성스레 말려준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으면 지저분한 낙화의 모습은 절정의 순간과 대비되어 참혹하기까지 하다.

 우리 나라 길가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민들레와 장미를 비교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손쉬운 대비 효과를 가져오지만 적절한 방법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장미는 장미대로, 민들레는 민들레대로 나름의 아름다움과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편견과 사회적 상징이 부여될 뿐이다. 민들레가 장미를 부러워하지 않는 것처럼 장미도 민들레를 부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야생초편지>의 작가 황대권의 <민들레는 장미를 부러워하지 않는다>는 과학기술과 자본주의로 대표되는 시대에 대한 반론이다. 1985년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13년이나 복역한 작가의 이력은 신영복 선생의 그것처럼 책을 읽는 내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후광효과를 가지게 된다. 환경과 생태적 측면에서 사물을 바라보고 인간 세상을 재단하는 것은 또 하나의 편견이 될 수 있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저자의 이야기가 현실과 동떨어진 유토피아같은 얘기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다.

 누군가 어떤 이야기를 할 때 그 이야기의 ‘현실성’ 측면에서 살펴보는 사람이 있고, 논리와 이성의 측면에 초점을 맞추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정서와 공감대를 맨 앞에 두는 사람도 있다. 저자의 이야기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바라보고 어떤 측면에서 이야기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것은 독자 개인의 문제로 돌려야겠다. ‘산처럼 생각하기, 똑바로 바라보기, 멀리 내다보기’라는 세 부분으로 엮인 책은 저자의 마음과 생각들을 담아낸 맑은 물과 같다. 농촌과 환경을 앞세워 맹목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이야기는 아니기 때문에 과격하지도 않고 억지스럽지도 않다. 편안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저자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잃은 것이 없이 많은 것들을 성취하고 만들어가며 산다고 생각했던 도시의 삶에 대해 돌아보게 된다.

 농부 철학자 ‘피에르 라비’와는 다르면서도 유사한 측면이 많다. 스스로를 ‘생태 공동체 운동가’로 불리기를 원하는 작가의 생각은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헤매고 있다. 물론 이 책의 목적이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거나 이론을 펼치는 책이 아니기는 하지만 사회 각 분야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에 대한 개인적인 견해와 다른 위치에서 바라보는 관점으로 이야기하기 때문에 신선한 부분도 있다. 하지만 정확하고 분명한 목소리는 부족하고 책의 구성은 엉성하다.

 마음밭에 심어놓은 작은 풀꽃들이 피어난다고 해서 그것들을 꺾어 꽃다발을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꺾지 않으면 안되는 순간이 올 때까지, 아니면 필요한 꽃들만 꺾어야 한다. 그저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사물과 사건에 대한 다양한 시선이 궁금한 사람들은 많지 않다. 정갈하고 깨끗한 마음의 결들을 담아내고 있지만 시골 냇가에서 맑은 물 한 잔을 마신 후의 덤덤함 이상은 얻지 못했다.


070215-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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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한 마음
함민복 지음 / 풀그림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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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는 가지를 벨 때마다 흔들림이 심해지고
흔들림에 흔들림 가지가 무성해져 나무는 부들부들 몸통을 떤다

나무는 최선을 다해 중심을 잡고 있었구나
가지 하나 이파리 하나하나까지
흔들리지 않으려 흔들렸었구나
흔들려 덜 흔들렸었구나
흔들림의 중심에 나무는 서 있었구나     - 본문 ‘흔들린다’ 중에서

 사람은 자연을 닮고 싶어 하는 게 아니라 자연의 일부일 뿐이다. 산과 물과 바람과 돌은 언제나 스스로 그러한 몸짓으로 거기에 있다. 어떤 모습으로든 본성은 변하지 않지만 달라지는 것은 단지 사람들의 마음일 뿐이다. 이 땅에 존재하는 가장 가난한 시인이라고 설명하면 함민복 시인이 기분 나쁠라나? 강화도 바닷가에서 고욤나무 옆에 땅에 누워 하늘을 덮고 사는 시인의 삶은 비현실적이다. 현실적이라는 말 속에는 물론 ‘자본’이 숨어 있다.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자본주의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있다. 아니 너무나 정확하게 지켜지고 있다.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사십대 중반을 넘기고 있는 가난한 시인은 바닷가에서 무얼 하며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의 두 번째 산문집 <미안한 마음>은 읽은 사람을 참 미안하게 만든다. 참 부끄럽게 만든다. 스스로에 대한 반성과 성찰의 기회가 제공되는 책이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거나 내가 그렇게 살지 못하기 때문에 한 번쯤 눈길을 던져보는 생활이 아니다. 자발적이든 아니든 바닷가에서 시인이 살아가는 모습과 이야기들은 경의롭기만하다.

 시인이 아닌 바닷가 사람들의 삶은 고달프고 팍팍하며 시인의 생활은 아름답다고 바라보는 시선은 경계해야 한다. 이 책을 통해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언제 어디서든 고달프고 신산스런 생활의 모습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점이다. 다만 그것들을 바라보는 감각이며 여린 감수성이며 따스한 손길이다. 오감이 열린 채 섬세하게 발달한 감각세포로 길어올린 이야기들은 그대로 산문이 시가 된다.

 낭만과 거리가 먼 바다의 높은 파도와 먹을 것 부족하고 편리한 시설과 거리가 먼 시골 생활에 무슨 특별한 것이 있을까. 도시의 문명과 유리된 시인의 삶을 동경하는 것은 불경스럽다. 박제된 수채화가 아니라 시인은 그대로 강화도 바닷가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익선이 형과 석양주를 나눠마시고 배를 타고 고기를 잡으러 나가고 시를 쓰는 생활이 고결한 종교인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나는 시인의 생활 속에서, 그의 시선에서 생의 진정성을 본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왜 사나라는 사치스런 질문 대신 고추밭에 물을 주고 쓰러진 옥수수대가 스스로 일어서는 모습을 지켜보고 고욤나무가 건네는 이야기를 듣는 시인의 생활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거기에 답이 있다. 자연으로 돌아가라, 무소유의 삶을 살라는 비현실적인 주장이 아니다. 겸손하고 침작하게 지금 현재의 모습을 반성하고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이 마련되어 있다.

 시가 주는 강렬함보다 산문이 주는 잔잔함은 때때로 훨씬 더 긴 여운을 남긴다. 짤막한 산문들을 삽화와 더불어 예쁘게 꾸며낸 출판사의 솜씨는 별로 칭찬하고 싶지 않다. 본능적으로 상업적인 냄새가 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인이 가진 마음을 흐리게 할 수는 없어 보인다. <우울씨의 일일>에서 보여주었던 가난의 힘과 자본의 힘을 넘어 이제는 고개 숙여 겸손하게 보이는 모습이 <말랑말랑한 힘>을 보여준다.

 이쁜 색시 만나 장가도 가고 아이와 함께 바닷가를 산책하는 즐거움도 누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혼자 사는 모습이 자발적인 행복의 최전선이 아니라면 말이다. 어쨌든 강화도에 갈 때 마다 떠오르는 시인이 있다는 건 개인적인 감상일 뿐이다. 리얼리스트로서 치열하게 부딪힐 수 있는 여건을 충분히 소유한 시인의 자연 귀의가 아쉽고 안타깝게 여겨지기도 하지만 함민복의 몫이 그것이 아니라면 또 다른 모습과 이야기로 독자들을 설득하는 것도 타당하겠다. 시인의 말대로,

현재란 시간의 섬이다. 세월이 가는 길, 세상 모든 ‘멈춤들’의 정거장인 시간은 현재의 물이다. - P. 41


070129-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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