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산티아고, 혼자이면서 함께 걷는 길
김희경 지음 / 푸른숲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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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이 끝난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된다. 끝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삶은 계속된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순간들이 모여 한 생애를 이루고 그것들이 미래를 만들어 간다. 하지만 우리는 내일을 예측할 수 없다. 그래서 불안하게 흔들리고 애매하게 행동한다. 산다는 것은 과정을 즐기는 일이라고 하지만 종교적 믿음이나 확고한 신념이 없다면 거의 불가능한 경지이다.

  삶을 여행에 곧잘 비유한다. 마라톤에 비유하기도 한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뎌 조금씩 나아간다.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시간 앞에서 우리는 때때로 겸손해지고 죽음 앞에서 경건해지게 마련이다. 인생이라는 긴 여행에서 승자도 패자도 있을 수 없다.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왔는지 뒤돌아 볼 때 미소 지으며 행복했노라고 그리고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혼자 있는 시간이면 가끔씩 명상에 잠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생명이 태어나고 또 죽어간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태어났으며 어떤 길을 따라 걷고 있는지, 서로 다른 길을 걷다 마주치는 수많은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는지 말이다. 길은 어디에나 있지만 아무데로나 걸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더욱 난감하기만 하다. 편견에 사로잡힌 많은 사람들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길이 옳다고 주장한다. 중립이 있을 리 없건만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한쪽만 바라보며 격렬하게 증오한다. 삶이 길에는 정답이 없지만 모두 같은 길이라고 할 수는 없다.

  많은 사람들이 걸어간 흔적들이 남아있고 그 발자국과 땀방울들은 우리에게 훌륭한 이정표가 된다. 먼저 간 사람들에게 배우고 익히지만 사람은 여전히 많은 실수를 저지르고 용서받고 또 상처를 주고받으며 함께 걸어간다. 그 길에서 만난 사람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우리는 쉽게 알지 못한다.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야 어렴풋이, 조금씩 깨닫기 마련이다. 그래서 항상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과 미련이 남게 된다.

  일상에서 벗어나 낯선 곳으로 떠난다는 것은 귀가를 전제로 한다. 여행은 분명한 출발과 도착이 있다. 일상에서 벗어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일상으로 돌아오기 위해 떠난다. 물론 떠나기 전과 돌아온 후에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기대하기도 하고 여행 자체의 즐거움을 기대하기도 한다. 그렇게 유목과 정착을 반복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운명인지도 모른다.

  여행은 어디로 떠나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 하느냐가 중요하다. 인생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결국 인생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라고 정의하는 사람이 있다.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흙으로 돌아가는 인간에게 인생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관계 맺음의 연속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정해진 관계와 굳건한 틀 속에서 지내는 안정감이 나쁘지는 않겠지만 모든 사람이 거기에 만족하는 것도 아니다. 새로움과 낯설음에 대한 동경, 설레임과 기다림이 주는 두근거림은 여행을 떠나는 목적 가운데 하나이다. 여행의 목적에 따라 장소와 방법과 일행이 결정되겠지만 그 모든 여행은 항상 떠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

  김희경의 <나의 산티아고, 혼자이면서 함께 걷는 길>은 낭만적이지도 행복해 보이지도 않는 여행 이야기다. 저자는 프랑스의 생장피에드포르에서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800km를 걷는 순례코스를 걷는다. 카미노라고 불리우는 그 길은 한쪽 방향으로만 걷는다. 노란 화살표를 따라 걷는 순례자 혹은 여행자들의 이야기가 지루하지 않게 펼쳐진다.

  혼자서 먼 길을 여행하면서 저자가 만난 것은 자신의 내면이 아니라 낯선 사람들이다. 이 길을 걷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으리라. 걷는 목적은 저마다 달랐겠지만 걸으면서 만난 것은 다른 사람들이었다. 그들과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 스스로를 발견하고 자신을 풀어놓고 가슴속에 돌덩이 하나씩을 내려놓는다. 저자는 동생을 잃었다. 특별한 상황과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떠난 혼자만의 여행이다. 카미노를 걷는 여정과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신선하기 보다는 그 길 자체가 가진 힘이 놀랍다. 종교적 믿음과 무관하게 걷는 무슬림도 있었고 일행이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저자처럼 혼자 걷는 사람도 물론 많았다. 그들은 걸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과연 그 길에서 수많은 깨달음을 얻고 내면의 변화를 겪었을까.

  중요한 것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다. 걷는 행위 자체가 여행이고 길이며 목적이다. 한 달이 넘도록 마냥 걸으며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과 길가에 나무와 풀과 하늘과 바람이 저자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저자는 이 책에 다 적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직접 걸어보지 않는다면 그 말들을 어찌 전해들을 수 있을까. 여행에 관한 책이 가진 태생적인 한계이다. 가이드 북이나 참고 도서는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 아닐까.

  그래도 이 책의 저자는 담담하고 편안한 문장으로 여정과 감상을 상세하게 전달하고 있다. 세심하게 메모한 듯 만남과 이별, 대화 내용, 에피소드는 물론이고 적절하게 삽입된 사진과 이정표가 여행의 기록으로 손색이 없다. 읽는 사람에게 그곳에 가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했다면 성공한 책이 아닐까 싶다.

두려움(Fear)이란 ‘실제처럼 보이는 가짜 증거(False Evidence Appearing Real)’의 약자라는 말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가짜 증거’ 때문에 마비된 채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두려움이 진화 과정에서 인간을 위험에서 보호하기 위한 신호기제로 신경에 장착되었다고 하지만, 과연 그럴까 의심스러울 때가 더 많았다. 내 미천한 경험으론, 정말 두려운 일은 아무런 전조 없이 찾아왔다. 멀쩡하고 평온했던 어느 날, 느닷없이 남동생을 잃었던 경험이 그런 경우였다. - P. 251

  유사한 경험을 했던 내겐 그냥 흘려버릴 수 없는 문장이었다. 여행은 결국 두려움을 없애기 위한 인간의 몸부림은 아닐는지. 복병처럼 숨어있는 불행, 감당할 수 없는 공포, 체험을 통한 고통. 여행은 그 모든 것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누구나 여행을 떠나야 하는 건가. 책 몇 권 짊어지고 가볍게 떠날 수 있는 자유만 허락된다면 행복하지 않을까?

090526-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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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루만지다 -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
고종석 지음 / 마음산책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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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품절


  너를 어루만지고 싶다. 부드럽고 따스하게 온몸으로 전달되는 너를 느끼고 싶다. 손 뿐만 아니라 모든 감각 기관이 동원되어 오감으로 너를 만난다.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러하듯이.

  어루만진다는 말 속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상처를 위로한다는 뜻부터 성적인 의사를 전달하려는 의도까지. 우리말 특유의 어감과 뉘앙스를 알고 있는 모국어 사용자라면 어루만진다는 말이 편안한 안정감으로 전달될 것이다. 게다가 조용한 온기를 느끼게 하며 천천히 교감한다는 뜻이 자연스럽게 배어 나온다. 추상적인 감정이나 구체적인 행위를 한마디 말로 표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어의 한계를 절감하고 때로는 보이지 않는 감정을 기막힌 언어로 표현하기도 한다.

  일상에서 무심코 스치는 말들 속에서 사랑을 찾아낸 고종석의 <어루만지다>는 독자들의 영혼을 어루만진다. 저자의 말대로 사랑은 결국 위로이고, 배려이고, 무엇보다도 열정이니까 어루만짐은 곧 사랑을 의미한다. 1996년에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은 이 책의 부제가 된 사연이다. 속편처럼 쓰였지만 체제와 내용이 전혀 다른 책에 어울리는 적절한 제목으로 보인다.

  이 책에는 마흔 개의 단어가 나온다. 입술로 시작해서 주름으로 끝나는 사랑의 변주곡들이다. 모국어에서 길어 올린 사랑의 말들은 우리에게 익숙하면서도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은 말들이 대부분이다. 어원을 밝혀 그 언어의 기원을 찾아보고 옛 문헌을 뒤적이며 현재의 말과 비교를 통해 역사적 변천 과정을 살핀다. 그 과정을 통해 우리말은 그 의미를 제 스스로 드러낸다. 사전적 의미를 곱씹고 관련 어휘들을 훑어보는 것도 적절해 보인다. 말 한마디로 시작해서 잘 차린 밥상처럼 우리말의 어휘들은 풍성하기만 하다.

  하나의 단어로 시작해서 펼쳐지는 자유 연상과 저자의 경험과 단상들을 따라가는 일은 즐거운 산책과 같다. 작은 잘 짜인 한 편의 글들이 모여 전체 책을 이루는 구성은 단순한 병렬적 나열에 불과해 보이지만 유기적인 관계가 단단해서 잘 지은 집을 연상 시키는 책이다. 무신경한 듯 싶지만 내용들이 엮어내는 통일성과 ‘사랑’과 ‘말’이라는 두 개의 핵심어에 접근하는 방식이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 두드러진다.

  각각의 글들은 주제어에 대한 단상에서 출발해서 앞서 말한대로 어원을 밝히고 역사적 과정을 통해 현재적 의미를 반추한다. 그러면서도 작가가 경험한 혹은 깊이 생각한 내용과 연결되어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느낌을 준다. 편안하면서도 공감할 수 있는 말의 깊이와 색깔이 담백하다. 작가 특유의 문체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또 다시 고종석의 이야기에 흠뻑 빠질 만하다.

  ‘미끈하다’ 처럼 점액질의 어감을 드러내는 말 뿐만 아니라, ‘발가락’이라는 꼼지락거리는 관능, ‘밴대질’이라는 민망한 단어까지 속속들이 순우리말을 나열한다는 원칙을 지켜가며 재미있게 풀어내고 있다. 글들은 일단 킬킬거리며 어깨에 힘을 빼고 읽을 수 있는 내용이어서 읽는 내내 휴식을 취하는 느낌이었다. 때로는 ‘속삭임’으로 다가오고 때로는 ‘한숨’을 내쉬기도 하며, ‘거품’을 물기도 하고 ‘그대’를 그리워하기도 한다.

  순 우리말들이 이어지는 동안 우리말에 대한 지식과 관심에 대해 부끄러워졌다. 이렇게 아름답거나 혹은 생소한 말들이 펼쳐 보이는 풍성한 밥상은 먹기도 전에 배가 부르다. 한 단어, 한 단어 갈고 닦아 빛이 나도록 만들어 놓은 작가의 노고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덕분에 우리는 어느 배우의 수상 소감처럼 밥숟가락만 들고 떠먹기만 하면 된다.

  세상에 누가 ‘사랑’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없겠는가. 아니, 누구나 책 한 권씩은 쓸 만한 이야기 거리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은 제각각이다. 과학적으로 풀어내기도 하고 소설이라는 형식을 통해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고 <어루만지다>처럼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다양한 시선으로 ‘사랑’을 에둘러 표현하기도 한다. 독자들은 충분히 즐겁고 훈훈하다.

  조금은 특별한 방식으로 ‘사랑’에 대해,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고 드러내는 ‘말’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책을 만났다. 고종석의 책을 사서 크게 후회하는 일은 없다. 눈길을 끌기 위한 표지와 제목이 조금 못마땅하기도 하지만 책을 읽다보면 그런대로 잘 어울린다는 느낌을 받는다.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누구나 한번쯤 호기심을 가졌을 법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알지 못했던 말에 대한 이야기도, 희미했던 내 사랑에 대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 이야기도 쓰여 있다.

  그래서 작가는 어루만진다는 말을 이렇게 한 마디로 정의한다.

어루만짐은 일종의 치유이고 보살핌이고 연대다. - P. 233


09021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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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기별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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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조선 시대 임금의 명령을 들이고 내는 관청이었던 승정원에서는 그 전날 처리한 일을 적어서 매일 아침마다 널리 반포했다. 일종의 관보라고 할 수 있는 이것을 ‘기별(寄別)’이라고 불렀고, 기별을 담은 종이를 ‘기별지(寄別紙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 확실히 결정된 것을 확인하려면 기별지를 받아야 알 수 있었다. 애타게 기다리던 결정이 기별지에 반포되면 일의 성사 여부를 알 수 있었으므로 그때서야 사람들은 기쁨과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사용하는 ‘기별이 왔는가?’ 하는 말의 기원이 여기에 있다.

  사람들은 여전히 기별이 올 것을 기다린다. 그것이 사람이나 소식일 수도 있고 막연한 그리움일 수도 있다.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의사 소통 불능 상태를 보여준다. 현대인의 부조리한 삶의 모습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단절된 관계로 인해 인간은 근원적 외로움을 확인한다. 고도는 어디에나 있으며 아무곳에도 없다. 그들은 고도를 기다리지만 고도가 무엇인지 언제 올 것인지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 기다림 자체가 목적이다. 희망은 그렇게 인간들을 잔인하게 고문해 왔다. 고도는 기별을 보내지 않을 것이다. 영원히.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품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만져지지 않는 것들과 불러지지 않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건널 수 없는 것들과 모든, 다가오지 않는 것들을 기어이 사랑이라고 부른다. - P. 13

  김훈에게 바다는 고도와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바다의 기별>은 ‘사랑의 기별’일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나 바다가 있고 고도가 있고 사랑이 있다. 그러나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는 것처럼 닿을 수 없는 슬픈 거리를 유지한다. 아니 어쩌면 실체 없는 대상에 대한 영원한 그리움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일상에서 길어올린 감상들을 형식이나 서사 구조와 무관하게 써내려간 이런 종류의 글들을 통해 독자들은 두 가지를 얻는다. 하나는 소설이 아닌 작가를 읽는다. 그의 생각과 감성, 생활인으로서 일상과 인간적인 면모와 접하게 된다. 친근감을 느끼게 되고 그의 작품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며 소설의 형식으로 풀어내지 못한 수다를 들을 수 있다.

  또 하나는 낯설게 하기다. 시인과 마찬가지로 소설가는 사람과 사물의 차이를 읽어내고 그 틈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다. 물론 그것은 언어라는 모호한 매체를 통해 독자에게 분명하게 전달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김훈의 문장은 탄력있고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은 정확한 문장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언제나 그의 글을 읽고 나면 군더더기 없는, 단백한 음식을 먹고 난 후의 느낌이다.

  이번 산문집도 마찬가지다. 생활인으로서 혹은 언어를 사용하는 작가로서 즐거움과 괴로움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특히 ‘말과 사물’ 한 편의 글로도 이 책을 읽을 충분한 이유가 있다. 우리가 얼마나 더 김훈의 소설을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의 소설을 이해하는 혹은 의도를 읽어내는 혹은 재미를 느낄 수 있는 단서 하나를 발견했다.

  하지만 아쉬움이 남는다. 김훈의 산문집은 잡문집이다. 구체적인 대상과 일관된 생각의 흐름을 읽어내기에 부족하다. 한 권의 책으로 묶이기에 부족하다면 기다려야 할 것이다. 부록으로 책들의 서문과 수상소감들을 모아 겨우 분량을 채웠다. 상업 출판의 극단을 보는 듯하다. 의미없는 책은 없겠지만 이런 책은 독자를 슬프게 한다. 김훈의 문장은 정확하고 분명하다. 모호한 흐름이나 지나친 수사가 거의 없다. 감성이 풍부하지만 의미가 불분명하게 전달되지 않는다. 문제가 되는 것은 내용이 아니라 한 권의 책이다.

  에세이가 누구나 가볍고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에 동의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종류의 책을 혐오한다. 내용과 물리적 형식이 어그러져 김훈의 글들이 허공을 맴돈다. 출판사는 과작(寡作)의 작가인 김훈의 책을 팔고 싶은 욕망을 자제할 필요가 있다. 그것만 아니라면 이 책을 혐오할 이유가 없다. 시간이 날 때 서점에 서서 읽기에 좋은 책이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다.


09020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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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승달도 눈부시다 - 선시가 있는 풍경
김영옥 지음 / 호미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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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다양한 풍경 속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상황은 많지 않다. 현실은 언제나 치열하고 경쟁적이며 옆을 돌아볼 틈조차 없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쉴 사이 없이 뛰고 또 뛰다가 가끔 하늘을 올려다보고 한숨을 쉰다. 추적추적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전 생애를 뒤돌아보거나 막연한 미래를 걱정한다.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인생이 무어냐는 질문은 참 부질없다. 정답이 필요 없을 뿐더러 있다고 해도 모두가 그것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삶의 방법과 태도를 가지고 있지만 가끔씩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필요하다. 어디로 가려는지 고개를 들고 조금 멀리 내다보고, 잠시 쉬어 뒤돌아보면 지금 여기가 보인다. 불가佛家에서는 인연因緣으로 관계를 풀어내지만 그 끝도 시작도 알 수 없는 세계는 범인의 세계와 거리가 멀게만 느껴진다. 그래도 나는 때때로 산사를 찾는다. 물론 종교적 목적은 아니다. 고즈넉한 산속의 거처는 인간의 삶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아침에 도道를 얻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하지만 깨달음이 생의 목표가 아니라면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그저 사는 동안 치열하게 앎과 삶의 과정을 즐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욕심을 버리는 일이 쉽진 않으나 그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는 조금씩 알 것 같은 나이가 되었나보다. 경쟁논리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끝없는 욕망의 노예가 되지 않을 수 있다면 성공한 인생이 아닐까?

  참선參禪만으로 깨달음을 얻거나 도道를 얻는 것은 아니다. 한 알의 모래 속에 우주가 들어있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인간은 한없는 자유를 느낄 것이다. <초승달도 눈부시다!>라고 느끼는 순간 세상은 밝고 환한 빛으로 가득하다. 김영옥은 그 풍경들을 담담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풀어 놓는다. 달빛 아래 조용히 흐르는 산사의 계곡 물소리처럼 시원하고 나지막하게 들리는 문장들은 담백한 차 한 잔과 어울린다.

꿈같고 환영 같은
육십칠 년 세월이여
흰 새 날아가고 물안개 걷히니
가을 물이 하늘에 닿았네
- 천동 정각, ‘임종게’

내 무덤, 푸르고
푸르러져
그 푸르름 속에 함몰되어
아득히 그 흔적조차 없어졌을 때,
그 때 비로소
개울들 늘 이쁜 물소리로 가득하고
길들 모두 명상의 침묵으로 가득하리니.
그 때 비로소
삶 속의 죽음의 길 혹은 죽음 속의 삶의 길
새로 하나 트이지 않겠는가.
- 최승자, ‘미망 혹은 비망 8’


  소리 없는 창 밖에 내리는 빗소리처럼 아득하기만 하다. 죽음은 명상과 침묵의 연장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길 때쯤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 그것조차 욕심이겠지만.

그 때 고요히 바람이 불었나니
맑고 가난한 솔씨 하나
홀로 바다로 날아가
바다에 깊게 뿌리를 내렸나니
- 정호승, ‘해인의 바다’중

옷 한 벌과 밥그릇 한 개로
산문을 자유로이 들고 나네
저 모든 산의 눈을 다 밟은 뒤에
이제는 돌아와 흰 구름 위에 누웠네
- 벽송 지엄, ‘의선 스님에게’


  선시禪詩가 있는 풍경은 소리도 없다. 오규원의 시가 보여주는 언어의 진경처럼 맑고 투명하다. 빛도 색도 없는 물과 같다. 저자는 지하수처럼 시원하고 맑고 깨끗한 선시禪詩와 함께 산중의 모습을 아름답게 보여준다. 수행과정이 결코 만만하거나 즐겁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그것을 통해 진리를 얻고자 하는 산사의 풍경이 숙연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산길이 산을 내려와 문득
뒤돌아보면 따라 내려오는
저문 산, 물을 건너면
먼저 건너가 뒤돌아보는 저문 산
- 장석남, ‘산길이 산을 내려와’중

파란 바람아 불어오니라 불어가니라
알려고 하는 자에게만 비밀을 일러 주고
저 나뭇가지들을 흔들어 주어라
- 고형렬, ‘바람 나뭇잎’중


  알려고 하는 자에게만 비밀을 알려주는 바람을 찾아 늘 길 떠날 준비를 하고 싶다. 끝없이 버리고 또 버리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싶다. 도道를 얻으려는 것조차 욕망이니 그것조차 내려놓고서. 아득한 지평선을 향해. 그렇게.

080601-0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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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할 권리
김연수 지음 / 창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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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돌아올 현실이 존재하는 한 여행은 영원히 모든 사람들에게 꿈이며 환상이고 향수이고 추억이다. 정착 생활 이전의 인간 생활은 정처없는 ‘떠돎’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근원적으로 ‘저기-멀리’를 동경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인간은 그렇게 생래적으로 미지의 세계에 대한 환상과 그리움을 가지고 태어났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우리 안에 유목적 유전자가 존재한다고 말이다.

  빅토르 위고는 사람을 세 종류로 분류했다. 떠나온 고향을 그리워하는 못난 사람, 어느 곳에 정착하든 그곳이 고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고향은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하는 유목적인 사람이 그것이다. 물론 위고는 정착하지 않고 끊임없이 떠나는 사람을 가장 상급의 인간이라고 평가했다. 근원적으로 정착과 이동의 모순과 역설 속에서 인간의 역사는 도약과 좌절을 거듭했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가 알고 있는 수많은 역사는 민족 간의 이동이나 머물지 않으려는 인간들의 충돌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여행과 사뭇 동떨어진 이야기로 들리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일이 어쩌면 이렇게 끝없는 동경과 그리움의 과정인지도 모른다. 떠나고 싶은 욕망과 안주하고 싶은 욕망은 늘 부딪힌다. 안전의 욕구와 호기심은 묘한 대조를 이루면서 인간의 삶에 팽팽한 긴장감을 주기도 한다. 이동의 자유를 제한했던 시대와 국가를 기억한다면 여행에 대한 동경과 자유와 행복은 더욱 소중하게 여겨진다.

  소설가 김연수의 <여행할 권리>는 산문집이다. 대한민국, 그러니까 우리의 현실 밖에서 생활하면서 겪고 느낀 산문집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여행’과는 거리가 좀 있다. 잠시 현지를 돌아보는 이야기나 스치듯 낯선 곳의 감상과 여정을 적어놓은 책이 아니다. 물론 그런 부분이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독일과 중국, 미국, 일본을 통해 길어 올린 작가의 내면의 풍경들이다. 각국에 체류하면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감각적으로 그리고 특유의 유머러스한 문체로 밝고 경쾌하게 표현된다.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을 만나는 즐거움 혹은 곤혹스러움을 재미있고 편안하게 풀어내고 있어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책이다.

  일정 기간 체류하면서 적어나간 글들은 다양한 사유의 흐름을 보여준다. 문학과 역사에 대한 아픈 성찰도 엿보이고 우리가 알지 못했던 사소함에 대해서도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세상에 넘쳐나는 수많은 여행 관련 책들 속에서 단순히 작가이기 때문에 이 책을 선택할 필요는 없다. 이 책을 선택하는 독자들은 김연수를 좋아하거나, 소설가의 눈에 비친 것들에 대한 호기심을 갖고 있거나, 낯선 세계에 대한 막연한 이야기를 좋아하거나 아니면 그저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어야 할 것 같다.

  훈츈, 밤베르크, 버클리, 옌지, 룽징, 토오쿄오 그리고 서울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김연수의 종횡무진 여행기는 얼굴을 웃음을 띠고 편안하고 간편한 복장으로 나서는 기분이다. 심각하고 사색적인 풍경도 아니고 우울하고 반성적인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물론 사물과 풍경들에 대한 관찰과 흥미가 아니라 사람과 문학, 역사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색다른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읽어 낸 큰 장점은 유머와 편안함이다. 자칫 가벼움으로 흐를 수도 있지만 다져진 내공과 문장이 힘이 차고 넘치지는 않는다. 적절한 수준에서 조절되고 독자들 입장에서 문안하게 읽어낼 수 있을 정도는 된다.

  가벼운 마음으로 여행의 기록으로 혹은 이국적인 사람들과 낯선 곳에 관한 감상 차원에서 읽혀질 수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다소 산만한 감은 지울 수가 없다. 편안한 주제로 묶어 내기는 했지만 장소나 방법의 일관성은 없다. 자유롭고 편안한 느낌이 오히려 장점이 될 수도 있지만 마지막에서 발언하고 있는 ‘우리에게 오직 질문하고 여행할 권리’가 있다는 도발적인 주장이 책 전체에서 설득력 있게 제시되고 있지는 못하다.

  소설가이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여행의 조건과 권리가 우리에게 주어지지는 않는다. 일반적인 관점과 방법과는 거리가 먼 것이 장점이자 단점이다. 색다른 ‘여행’에 관한 관점으로는 훌륭하게 읽힐 수 있지만 그렇게 만만하거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일상적인 여정과 색다른 것을 제시하는 책들 사이에서 이 책은 나름의 재미와 독특함을 지니고 있기는 하다.

  어찌되었든 김연수의 글은 읽을 만하고 그의 문장들은 나를 즐겁게 한다. 낄낄거리며 술 한 잔 하고 싶은 생각이 들게 하는 작가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혼자만의 생각이지만 즐겁다. 어쩌랴 상상은 자유고 현실은 구속이니.

  여행은 어디를 가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냐가 문제다. 어떤 술을 마시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마시느냐가 중요하듯이 말이다. 어디를 가든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들은 사람마다 다르고 즐기고 바라보는 방법도 제각각이다. 집을 중심으로 반경 1km이내에서 모두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을 굳이 여행을 통해 확인 할 필요는 없다. 아, 그것도 나름의 방법인가?

  내일은 매주 돌아오는 토요일이다. 누군가는 떠나고 누군가는 돌아오는 시간이다. 요일과 무슨 없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동’하고 ‘일탈’하는 날임에는 틀림없다. 김연수의 말대로 오직 질문하고 여행할 권리를 포기하고 사는 건 아닌지 한번 쯤 확인해 보는 건 어떨까 싶다. 떠나고 남는 것도 일종의 습관이므로.


080530-0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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