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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사 세트 - 전4권
한홍구 지음 / 한겨레출판 / 2006년 12월
평점 :
절판
진보와 보수를 나누는 기준이나 방법에 객관성은 없다. 기준이나 잣대가 모두 제각각이며 상대적이다. 비교 대상에 따라 상대적으로 보수적이거나 상대적으로 진보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역사를 놓고 이야기할 때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만큼 동일한 사실을 놓고 바라보는 시각과 관점에 따라 동일한 사건에 대한 평가와 시각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누구의 시선으로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문제가 역사를 바라보는 가장 중요한 쟁점이 된다. 안중근이 독립 운동가냐 테러리스트냐의 문제는 사건을 바라보는 방향과 해석의 문제일 뿐이다.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대한민국史 1~4>는 철저하게 주관적이다. 그러나 그 주관적 평가와 관점 속에서 우리가 찾아내야 하는 것은 숨겨진 사실들이다. 대충 전해진 이야기들이나 알지 못하고 추측했던 이야기들, 혹은 소문으로 들었던 이야기들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부정확한 사실들을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프로그램이 있었지만 아직도 말해지지 않은 이야기들은 많이 있다.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흘러 역사적 사건에 대한 진실과 거짓말들이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객관적 사실 자체만을 전달하는 것도 취사선택의 문제부터 주관이 개입된다. 고무줄처럼 길이가 늘었다 줄었다하는 이야기들 속에서 균형 잡힌 시각과 자신의 관점을 유지하는 것은 독자들 개인에게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다. 근대와 현대를 명확하게 구분할 순 없지만 그 기준점들을 넘나들면서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를 들춰내는 일은 하나의 용기이다.
그 용기는 개인이 진실을 드러내겠다는 단순하고 치기어린 공명심과는 다르다. 역사학자의 입장에서 근현대사를 지배하고 있는 검은 망령들을 찾아내고 끊임없이 사람들의 각성을 촉구하고 실천적으로 노력하는 일은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역사학자 한홍구는 그런 면에서 충분히 귀 기울여 이야기를 들을만한 사람이다.
21세기가 시작되면서 <한겨레21>에 ‘한홍구의 역사이야기’를 연재하기 시작했고 중간에 공백기가 있었지만 2006년 8월까지 이어진 근현대사에 대한 접근 방식은 일관되고 분명하며 공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4권으로 정리된 이 책들은 단순한 역사책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근현대사 과정에서 점검해야 할 쟁점들을 비판적 관점에서 세세하게 다루고 있다.
그것은 몇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먼저 친일파 문제이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과거사 정리 문제에서 가장 큰 쟁점이 되고 있고 어려운 숙제가 친일파 문제이다. 용어 선택의 문제에서부터 접근 방식과 처리 방법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지만 한홍구는 구체적 대안이나 미시적 관점에서 접근하지 않는다. 고개를 끄덕이며 내용에 공감했던 것은 친일파의 범위와 대상보다도 우리나라의 정체성과 직결되는 정부 수립과 정치 분야에 미친 영향들을 관련 사건들을 짚어가며 풀어냈기 때문이다. 개별적인 사건과 정치적인 문제들은 개인의 성향이나 능력보다도 과거에 벌어졌던 개별적인 사실들에 대한 인과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다만 그 과정들을 일목요연하고 정확한 기술에 의해 논리적으로 구성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관점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과 연결시켜 풀어내고 있기 때문에 때로는 흥분과 열정적인 목소리로 때로는 냉소적이고 감상적인 어법으로 이야기 한다. 이것이 이 책들의 가장 큰 단점이자 장점이다.
철저하게 저널리즘에 기대고 있기 때문에 쉽게 읽히고, 시의성이 있으며 쟁점과 논란을 불러일으킬 만한 사건들과 어법들을 사용하고 있다. 한 역사학자의 진심어린 목소리에 담긴 감동과 애정 어린 시선들 속에서 발견하는 울분은 다른 어떤 책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한홍구의 역사이야기는 그대로 우리들의 지금 현재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 밖에도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군대 이야기가 무척 많이 나온다. 현역병들의 역할과 인권 문제에서부터 군 전체의 편제와 감축 문제에 이르기까지 세세하게 들여다보는 일들은 현실에서 월급 인상과 병역기간 단축이라는 성과(?)를 이끌어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 같던 양심적 병역거부의 문제와 감군, 모병제 등 이제는 수면위로 떠올라 군대도 바뀔 수 있다는 가능성을 국민들에게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다. 물론 한홍구의 주장으로 관철된 문제들은 아니겠지만 그간 끊임없는 문제제기와 논란 속에서 이루어진 성과라는 사실에는 동의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현대사의 질곡 속에서 가장 가슴 아픈 100만 양민 학살 문제가 있다. 해방과 한국전쟁을 전후해서 벌어진 학살자 수가 1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한다.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전장에서 총을 들고 싸우다 죽어간 군인이 아니라 이념과 복수심 때문에 죽어간 사람들의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과거사 진상 규명을 위한 국가적인 관심과 대책은 물론이거니와 우리들의 끊임없는 관심과 노력도 필요하지 않을까. 그 유가족들은 아직도 생존해 있으며 앞으로도 그 아픔은 치유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지울 수 없는 과거의 사실들을 일단 인정하고 받아들이는데서 문제의 실마리가 풀릴 것이다.
전근대의 부정적 요소를 척결하는 시민혁명을 거치지 못한 현실에서 근대/전근대의 이분법적 도식은 우리 사회를 설명하는 데 별로 도움이 안 된다. - 1권, P. 19
이 책의 시작 부문에서 저자의 이 말이 다소 낭만적으로 들렸다. 단 한 번도 왕의 목을 쳐보지 못한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혁명이란 말을 모른다. 시민 혁명에 의해 이전의 전근대적 요소를 척결하며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던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 유럽을 떠올렸을 저자의 낭만적 시선이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며 역사학자로서 가정법을 떠올렸을 지도 모르겠다.
지나간 시간들에 목매고 있다가 현재의 문제들이나 미래를 향한 발걸음에 걸림돌이 되는
게 아니냐는 그들(?)의 주장은 이제 식상하다. 또 과거사 문제냐고 볼멘소리를 내는 언론들도 지겹다. 과연 이대로 시간이 흘러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과거는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을 것인가.
현재와 미래는 과거의 연장선일 뿐이다. 과거가 없으면 현재도 미래도 없다는 너무나 당연한 논리에서 우리는 자유로울 수 없다. 아픈 역사지만, 고통스런 역사지만 우리가 걸어온 길을 뒤돌아 볼 때 우리에게 그리고 우리의 후손들에게 희망이라는 이름의 오래된 유산을 남겨 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한 역사학자의 길고 지루한 싸움은 계속 될 것이며 우리는 방관자나 구경꾼이 아니라 자각하는 민중으로 거듭나며 그들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나의 문제임을 확인할 때까지 그의 역사 이야기는 계속 되어야 한다. 비록 체계도 계통도 없고 일관된 흐름이나 시대적 구분도 없는 역사책이지만 한홍구의 <대한민국史 1~4>는 21세기를 출발하는 한국인들에게 꼭 필요한 자기성찰의 시간을 마련해 주는 역할을 한다. 좋은 책은 독자의 정수리에 쏟아지는 맑은 샘물과 같다. 그 시원한 물, 기꺼이 뒤집어쓰고 하늘 한 번 쳐다보아야 하는 책이다.
070301-028~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