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 이야기 살림지식총서 134
김준철 지음 / 살림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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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 오래된 친구를 만났을 때, 그 반가움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한 잔 술이 아니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10대 후반의 사춘기 소년들이 흔히 겪을 법한 숱한 흔적과 상처와 기억들이 혼돈으로 박제되어 있다. 그 시절을 함께 했던 친구를 10여년 만에 만났다. 풋풋했던 시절의 모습을 세월과 함께 간직한 채 오랜 공백 기간이 있었지만 형언하기 힘든 느낌으로 다가오는 친구다.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고 두고두고 떠오르고 오래 소식 전하지 않아도 어제 만난 듯 반갑게 만날 수 있는 친구를 되찾았다는 것은 표현하기 힘든 기쁨이다. 시간이 흐르고 세상이 변해도 씨익 웃고 한 잔 부딪칠 수 있는 친구.

  그 친구와 소주, 맥주, 압생트, 시바스 리갈을 마셨다. 며칠 전, 동생이 귀국하면서 시바스 리갈 18년산을 한 병 사왔다. 서점에 갔다가 <양주 이야기>라는 책이 눈에 띄었다. 생각해 보니 자주는 아니지만 주변에서 양주를 자주 접하면서 궁금했던 많은 것들이 한꺼번에 떠올랐고 호기심에 책을 샀다. 책을 통해 그것들을 전부 확인하거나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불현듯 밀려드는 갈증을 해소할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술은 많은 사람들에게 일시적인 희망과 용기를 준다. 한 잔 술은 시름을 달래고 현실의 고통을 위로해주는 역할을 하며 항상 우리 곁에 함께 해 온 친구와 같다. 홀로 마셔도 좋고 좋은 사람들과 마시면 더욱 좋다. 술 한 잔의 추억과 에피소드는 누구나 가지고 있다. 우리가 걸어온 길과 쌓여온 세월들 속에 술은 적당한 윤활유의 역할을 해 준다. 그것이 지나쳐 1인당 술 소비량 1위 국가의 명예를 차지하기도 한다.

  자신에게 맞는 주량을 측정하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다. 비틀거리지 않을 정도 혹은 평소와 다른 말과 행동을 하지 않을 정도를 말한다. 하지만 흔히 필름이 끊겼다고 말할 정도가 아니라면 술자리는 즐겁고 유쾌하게 끝나는 것이 좋다. 근심 걱정 가득한 얼굴로 친구와 마주하거나 세상의 유일한 친구로서 술을 대할 때는 술이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없다. 어떤 술을 얼마만큼 마실 수 있느냐는 문제는 개인의 취향일 뿐이다. 각 나라마다 민족이나 인종마다 특별한 문화가 있듯이 음식 문화의 일종인 술도 마찬가지이다.

  양주는 서양의 술이라는 말이다. 우리 고유의 민속주에 반대되는 개념의 말로 해방 이후 주로 미국에서 유입된 술을 통칭해서 부르는 말이다. 우리나라에도 전통적인 증류주인 소주가 있다. 원료와 제조 공정과 가공 방법에 따라 천양지차의 맛이 나는 것이 술이다. 김준철의 <양주 이야기>는 서양 술에 대한 기본적 이해를 돕는 책이다. 살림지식총서의 편집 방향과 의도, 제한된 분량이 말해주듯이 깊은 지식과 폭넓은 이야기를 들을 수는 없다. 간략하게 브리핑하듯 핵심적인 사항들을 소개하는 정도로 그친다.

  그래서 이 책은 주변에 널려 있는 양주병의 암호들을 해독하고 스카치와 브랜디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는 정도의 상식을 키울 수 있다. 스카치위스키의 경우 영국에서 발달하기 시작해서 그 원료와 증류 방법 숙성 과정에 따라 다양한 브랜드의 술들이 지금까지도 전통을 잇고 있다. 와인의 나라 프랑스는 샴페인과 꼬냑으로도 유명하다. 샹파뉴와 꼬냑 지방의 술로 지역명이 술의 대명사가 되었다는 사실도 재미있지만 꼬냑이 포도주를 다시 증류한 술이라는 사실도 새롭게 알게 되었다. 단순한 정보 차원에서 재밌게 읽을 수 있는 내용이 많다.

  박정희가 김재규에게 총 맞는 자리에서 역사의 현장을 묵묵히 지켜보았을 시바스 리갈과 한국인들에게 유독 인기가 높은 발렌타인 등은 독특한 향과 맛 때문인지 아니면 옷처럼 브랜드 파워가 후광효과를 발휘하는 것인지 생각해 볼 일이다. J & B나 조니워커, 글렌피딕 등의 술의 기원과 역사를 안다고 해서 양주의 맛이 달라지는건 아니지만 술에 관한 이야기를 술 안주로 삼아도 재미있을 것 같다.

  꼬냑의 경우 최상품에 나폴레옹이라는 상표를 내세운다. 헤네시와 로얄 살루트, 까뮈 등의 술병에 X O 혹은 V.S.O.P와 같은 암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확인할 수 있었고 오크통이 단순히 술을 숙성시키는 저장고가 아니라 술의 일부라는 사실도 흥미로웠다. 세상은 아는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공감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만큼 이해할 수 있다는 평범한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양주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와 잡다한 상식을 넓힐 수 있는 책으로 손색이 없다.

  또한 진과 보드카, 럼과 칵테일, 테킬라, 칵테일, 스피릿, 리큐르 등 다양한 술에 대한 개괄적인 이해를 돕는다. 간략하지만 궁금증만 해소하는 차원에서는 적당하다. 좀 더 깊이 있는 내용과 상세한 역사를 알고 싶다면 당연히 다른 책을 참고하고 구체적인 정보를 확인해야 한다. 이 책은 그저 웰빙과 음주 문화의 관점에서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양주에 관한 상식 수준의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개인적으로 품었던 호기심이 많이 해소되었고 다른 관점에서 쓴 책이 있다면 몇 권 더 읽어보고 싶어졌다.

  오래된 친구와 술 마시러 가는 동안 혹은 선물로 주고받은 양주의 내력이 궁금하다면 한 두시간을 투자해서 이 책을 읽어봐도 좋겠다. 날씨에 따라 기분에 따라 술의 종류를 선택하기도 한다. 흐린 봄날 저녁에 어울리는 술은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 술 이야기를 하다보니 또 다시 오래된 그 녀석이 생각난다.


070523-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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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5-24 0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술은 관계를 느슨하게 해주고 가깝게 해주지요.
꼬냑이라하면 프라하의 봄에서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소리나지 않게 입으로만 이야기하던 장면이 떠올라요.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sceptic 2007-05-24 2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소리 가득한 밤입니다. 님도 행복한 시간들로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와인 한 잔의 여유가 생각나는 시간입니다.
 
한국 7대 불가사의 - 과학 유산으로 보는 우리의 저력
이종호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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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V를 거의 보지 않아서 대화에 끼기 어려울 때가 있다. 세간에 화제를 모았던 드라마 <주몽>에 한나라의 철기군이 등장하고 고구려에서 그것을 물리치거나 배우려는 시도가 역사적으로 볼 때 어처구니없는 일이라고 주장하는 이종호의 <한국의 7대 불가사의>는 특별한 구석이 있다.

  불가사의不可思議는 불교에서 온 말로 표현할 수 없고 마음속에 떠오르지도 않으며 생각할 수도 없는 오묘한 이치라고 한다. 말하자면 현실 밖의 세상을 말한다. 니나와 폴이 여행하던 4차원 세계에서나 가능한 것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시간여행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는 과거의 일들을 모두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문명이 발달하고 과학은 진보하며 인간의 지식과 지혜는 누적적인 형태로 발전한다고 굳게 믿는 직선적인 세계관에 기대어 인류의 특별한 문화 유산을 두고 불가사의라고 부른다.

  먼저 세계 7대 불가사의를 보자.  ① 이집트 기자에 있는 쿠푸왕(王)의 피라미드 ② 메소포타미아 바빌론의 공중정원(空中庭園) ③ 올림피아의 제우스상(像) ④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神殿) ⑤ 할리카르나소스의 마우솔로스 능묘(陵墓) ⑥ 로도스의 크로이소스 대거상(大巨像) ⑦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파로스 등대(燈臺)가 있다. 그 밖에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로마의 원형극장(콜로세움), 영국의 거석기념물(巨石紀念物, 스톤헨지), 이탈리아의 피사 사탑(斜塔), 이스탄불의 성(聖)소피아 성당, 중국의 만리장성, 알렉산드리아의 등대를 7대 불가사의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위와 같은 내용은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유적들을 불가사의라고 부르는 이유는 단순하다. 앞서 이야기한대로 인류의 과학과 기술은 중세이후 이성 중심의 서양의 직선적 세계관에 기인한다. 지금보다 장비와 기계들이 발달하지 못했지만 인간의 지혜와 지적 능력은 오히려 뛰어났을 것이라고 판단해 볼 수 있다. 굴삭기가 발명되면 삽질하던 인간의 근육은 퇴화하기 마련이다. 지금 우리가 놀라고 있는 것들이 그 당시에는 당연하거나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 이종호는 <한국의 7대 불가사의> 다음과 같이 선정했다. ① 고인돌 별자리 ② 신라의 황금 보검 ③ 다뉴세문경 ④ 고구려의 개마무사 ⑤ 무구정광대다라니경 ⑥ 고려 수군의 함포 ⑦ 훈민정음.

  위에 소개한 일곱 가지 문화유산이 과연 모두가 동의할만한 것들인가 하는 문제는 의미가 없다. 저자 개인의 선정이나 역사학자 일반인들의 견해가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한국 문화유산의 우수성과 독창성이 세계 문화유산에 견주어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저자의 신념을 들여다보는 과정 자체가 재미있다. 신념은 지식과 경험으로부터 비롯된다. 건축을 전공한 저자의 유럽의 중심지 파리에서 무엇을 느꼈는지, 우리 것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민족주의적인 것인지 하는 문제는 책을 통해 독자들이 판단할 몫이다.

  민족적 우수성을 홍보하기 위한 발상도 아니고 애국심의 발로도 아니라면 상대적으로 저평가 된 한국 문화의 가치를 새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우리 것이기 때문에 좋은 것이고 아름다운 것이라는 말도 위험하지만 우리 것은 무조건 안 된다는 패배주의도 경계해야 한다. 객관적인 평가야 어차피 불가능하겠지만 상대적으로 비교하는 방법은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말에게까지 철갑 옷을 입혔던 고구려의 개마무사나 서기 3000년 전에 이미 별자리를 관찰하고 고인돌에 새겨 넣었던 우리 조상의 모습을 상상해 보는 일은 책의 내용과 상관없이 즐거운 시간 여행이다. 역사적인 관점에서 문화유산에 대한 철저한 고증과 분석을 통해 우리 것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시도하고 있는 저자의 노력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제대로 알지 못해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리는 경우가 비단 문화재의 경우만은 아닐 것이다.

  과거의 불가사의에 매몰되지 않고 현재 그리고 미래에 우리가 만들어 갈 문화유산들이 우리가 걸어왔던 역사보다 더 환상적이고 재미있는 것이었으면 좋겠다는 엉뚱한 상상을 해 본다. 저자가 꼽은 문화유산들은 우리들 일상에서 마주칠 수 없는 거리감이 있는 것들이다. 민중들의 삶과 생활에서 묻어나는 불가사의나 지금보다 발달했던 물건이나 제도들에 대한 검토와 반성도 필요하다.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가장 미련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시간 여행은 계속 되어야 한다.


070425-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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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사 세트 - 전4권
한홍구 지음 / 한겨레출판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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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진보와 보수를 나누는 기준이나 방법에 객관성은 없다. 기준이나 잣대가 모두 제각각이며 상대적이다. 비교 대상에 따라 상대적으로 보수적이거나 상대적으로 진보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역사를 놓고 이야기할 때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만큼 동일한 사실을 놓고 바라보는 시각과 관점에 따라 동일한 사건에 대한 평가와 시각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누구의 시선으로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문제가 역사를 바라보는 가장 중요한 쟁점이 된다. 안중근이 독립 운동가냐 테러리스트냐의 문제는 사건을 바라보는 방향과 해석의 문제일 뿐이다.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대한민국史 1~4>는 철저하게 주관적이다. 그러나 그 주관적 평가와 관점 속에서 우리가 찾아내야 하는 것은 숨겨진 사실들이다. 대충 전해진 이야기들이나 알지 못하고 추측했던 이야기들, 혹은 소문으로 들었던 이야기들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부정확한 사실들을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프로그램이 있었지만 아직도 말해지지 않은 이야기들은 많이 있다.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흘러 역사적 사건에 대한 진실과 거짓말들이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객관적 사실 자체만을 전달하는 것도 취사선택의 문제부터 주관이 개입된다. 고무줄처럼 길이가 늘었다 줄었다하는 이야기들 속에서 균형 잡힌 시각과 자신의 관점을 유지하는 것은 독자들 개인에게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다. 근대와 현대를 명확하게 구분할 순 없지만 그 기준점들을 넘나들면서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를 들춰내는 일은 하나의 용기이다.

 그 용기는 개인이 진실을 드러내겠다는 단순하고 치기어린 공명심과는 다르다. 역사학자의 입장에서 근현대사를 지배하고 있는 검은 망령들을 찾아내고 끊임없이 사람들의 각성을 촉구하고 실천적으로 노력하는 일은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역사학자 한홍구는 그런 면에서 충분히 귀 기울여 이야기를 들을만한 사람이다.

 21세기가 시작되면서 <한겨레21>에 ‘한홍구의 역사이야기’를 연재하기 시작했고 중간에 공백기가 있었지만 2006년 8월까지 이어진 근현대사에 대한 접근 방식은 일관되고 분명하며 공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4권으로 정리된 이 책들은 단순한 역사책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근현대사 과정에서 점검해야 할 쟁점들을 비판적 관점에서 세세하게 다루고 있다.

 그것은 몇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먼저 친일파 문제이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과거사 정리 문제에서 가장 큰 쟁점이 되고 있고 어려운 숙제가 친일파 문제이다. 용어 선택의 문제에서부터 접근 방식과 처리 방법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지만 한홍구는 구체적 대안이나 미시적 관점에서 접근하지 않는다. 고개를 끄덕이며 내용에 공감했던 것은 친일파의 범위와 대상보다도 우리나라의 정체성과 직결되는 정부 수립과 정치 분야에 미친 영향들을 관련 사건들을 짚어가며 풀어냈기 때문이다. 개별적인 사건과 정치적인 문제들은 개인의 성향이나 능력보다도 과거에 벌어졌던 개별적인 사실들에 대한 인과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다만 그 과정들을 일목요연하고 정확한 기술에 의해 논리적으로 구성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관점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과 연결시켜 풀어내고 있기 때문에 때로는 흥분과 열정적인 목소리로 때로는 냉소적이고 감상적인 어법으로 이야기 한다. 이것이 이 책들의 가장 큰 단점이자 장점이다.

 철저하게 저널리즘에 기대고 있기 때문에 쉽게 읽히고, 시의성이 있으며 쟁점과 논란을 불러일으킬 만한 사건들과 어법들을 사용하고 있다. 한 역사학자의 진심어린 목소리에 담긴 감동과 애정 어린 시선들 속에서 발견하는 울분은 다른 어떤 책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한홍구의 역사이야기는 그대로 우리들의 지금 현재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 밖에도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군대 이야기가 무척 많이 나온다. 현역병들의 역할과 인권 문제에서부터 군 전체의 편제와 감축 문제에 이르기까지 세세하게 들여다보는 일들은 현실에서 월급 인상과 병역기간 단축이라는 성과(?)를  이끌어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 같던 양심적 병역거부의 문제와 감군, 모병제 등 이제는 수면위로 떠올라 군대도 바뀔 수 있다는 가능성을 국민들에게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다. 물론 한홍구의 주장으로 관철된 문제들은 아니겠지만 그간 끊임없는 문제제기와 논란 속에서 이루어진 성과라는 사실에는 동의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현대사의 질곡 속에서 가장 가슴 아픈 100만 양민 학살 문제가 있다. 해방과 한국전쟁을 전후해서 벌어진 학살자 수가 1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한다.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전장에서 총을 들고 싸우다 죽어간 군인이 아니라 이념과 복수심 때문에 죽어간 사람들의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과거사 진상 규명을 위한 국가적인 관심과 대책은 물론이거니와 우리들의 끊임없는 관심과 노력도 필요하지 않을까. 그 유가족들은 아직도 생존해 있으며 앞으로도 그 아픔은 치유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지울 수 없는 과거의 사실들을 일단 인정하고 받아들이는데서 문제의 실마리가 풀릴 것이다.

 전근대의 부정적 요소를 척결하는 시민혁명을 거치지 못한 현실에서 근대/전근대의 이분법적 도식은 우리 사회를 설명하는 데 별로 도움이 안 된다. - 1권, P. 19

 이 책의 시작 부문에서 저자의 이 말이 다소 낭만적으로 들렸다. 단 한 번도 왕의 목을 쳐보지 못한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혁명이란 말을 모른다. 시민 혁명에 의해 이전의 전근대적 요소를 척결하며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던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 유럽을 떠올렸을 저자의 낭만적 시선이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며 역사학자로서 가정법을 떠올렸을 지도 모르겠다.

 지나간 시간들에 목매고 있다가 현재의 문제들이나 미래를 향한 발걸음에 걸림돌이 되는
게 아니냐는 그들(?)의 주장은 이제 식상하다. 또 과거사 문제냐고 볼멘소리를 내는 언론들도 지겹다. 과연 이대로 시간이 흘러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과거는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을 것인가.

 현재와 미래는 과거의 연장선일 뿐이다. 과거가 없으면 현재도 미래도 없다는 너무나 당연한 논리에서 우리는 자유로울 수 없다. 아픈 역사지만, 고통스런 역사지만 우리가 걸어온 길을 뒤돌아 볼 때 우리에게 그리고 우리의 후손들에게 희망이라는 이름의 오래된 유산을 남겨 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한 역사학자의 길고 지루한 싸움은 계속 될 것이며 우리는 방관자나 구경꾼이 아니라 자각하는 민중으로 거듭나며 그들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나의 문제임을 확인할 때까지 그의 역사 이야기는 계속 되어야 한다. 비록 체계도 계통도 없고 일관된 흐름이나 시대적 구분도 없는 역사책이지만 한홍구의 <대한민국史 1~4>는 21세기를 출발하는 한국인들에게 꼭 필요한 자기성찰의 시간을 마련해 주는 역할을 한다. 좋은 책은 독자의 정수리에 쏟아지는 맑은 샘물과 같다. 그 시원한 물, 기꺼이 뒤집어쓰고 하늘 한 번 쳐다보아야 하는 책이다.


070301-028~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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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발바닥 2007-03-05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한홍구의 대한민국사를 읽으면서 평소 가지지 못했던 많은 문제의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일부 내용에는 지극히 주관적이거나 약간은 자의적이라고 느껴지는 부분도 있지만, 책에 나오듯이 미워할만한 놈을 응당 미워할 수 있게 하는 일을 하는 것은 정말 소중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sceptic 2007-03-05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뚜렷한 하나의 주관도 또 하나의 시선으로 충분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의학사상사 살림지식총서 272
여인석 지음 / 살림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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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학문의 발달은 철학에서 출발한다. 여인석의 <의학사상사>는 인류가 걸어온 의학의 발달의 역사를 더듬고 있다. 의학이 무엇이고 질병이 무엇인지 그리고 생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궁극적인 의문에서 출발한 이 책의 내용은 의학이라는 학문에 대한 역사와 철학적 배경 등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식을 세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먼저 에피스테메이다. 이 지식은 모든 실용적 목적으로부터 자유로운 지식으로 앎 자체가 목적인 이론적 지식이다. 궁극적이고 본질적인 지식이다. 사물과 세상에 대한 원리와 원인에 대한 지식이 여기에 속한다. 두 번째 지식은 테크네이다. 테크네는 실용적 목적이라는 점에서 에피스테메와 구별된다. 예를 들어 대학의 인문대나 자연대는 에피스테메에 해당하고 공대는 테크네에 해당된다. 마지막으로 엠페레이아가 있다. 이 지식은 경험적 지식이다. 전체에 통합하지 못하고 개별적이며 단편적인 지식을 말한다.

 의학은 엠페레이아에서 출발했다. 경험을 통해 개별 질병들에 대한 치유법과 처방을 내렸다. 차츰 테크네로 발전해서 에피스테메를 추구하는 학문으로 발전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의학뿐만 아니라 다른 학문에도 적용될 수 있는 일반론일 수 있지만 현대 의학의 관점에서 고대 의학을 발달 과정을 돌아보는 일은 의학을 전공하지 않은 일반인에게도 관심을 가질 만하다. 의사에 따라 환자의 질병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같은 증상에 대해서도 서로 다른 원인과 처방을 내릴 수도 있고 객관적이고 관습적인 치료나 처방이 아니라 개별 환자들에 대한 관심과 인간의 질병과 생명의 본질에 대한 관심과 연구를 지속하는 의사는 분명히 구별될 것이다. 의사 한 명이 신체의 모든 분야와 질병에 대해 통달할 수는 없지만 전체적이고 통합적인 관점에서 환자와 질병을 다루는 태도는 매우 중요하다. 가벼운 증상인 경우 평균 진료 시간 3분을 넘지 않는 현실을 감안하면 우리의 몸은 정형화된 질병들의 이름 속으로 규정된다. 같은 곳에 같은 증상이 있어도 원인과 처방이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은 막연한 것일까.

 질병은 몸의 균형상태가 깨지면서 시작된다. 수많은 원인 중 가장 큰 원인을 찾아 치료하고 건강을 회복한다. 같은 증상이 반복되는데도 같은 처방이 효과가 없을 때가 있다. 질병의 원인에 대한, 혹은 생명 자체에 대한 인간의 탐구는 계속되겠지만 현대 의학으로도 풀리지 않는 현상들은 의학의 발전 단계에서 우리가 어디쯤 걸어가고 있는지 확인할 수 없다는 이유가 될 수도 있다.

 더구나 한의학과 서양의학은 충돌이나 대립보다 상호 보완적인 측면에서 관계 맺고 같은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협진 체제가 요구된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들이다. 병원에서 고치지 못하는 것을 한의원에서 손쉽게 낫게 하거나 그 반대의 경우가 허다하다. 현대인들은 사회의 발전이나 문명의 발달에 따라 훨씬 더 다양하고 복잡한 원인에 의한 질병들에 의해 고통 받는다. 고통 받는 환자 입장에서는 의학의 발달 과정을 돌아보고 하나의 고정된 의사 양성과정과 치료법이 주는 형식들을 걷어내고 싶을 때가 있다. 오랜 시간 동안 연구과 숙련을 거쳐 환자의 몸과 마음의 병을 치유할 수 있는 자격을 얻은 의사들의 질병과 생명에 대한 태도와 마음가짐이 궁금하다.

 어떤 분야든 전문가 집단의 노력과 자세에 따라 그 대상은 판이하게 달라진다. 의학의 경우 중요성을 두 번 거론할 필요도 없이 인간의 몸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의학이 걸어온 역사와 의학에 대한 관점들을 들여다 보는 일은 우리 몸에 대한 관심이다. 한 마디로 규정될 수도 없고 규정된다고 해서 의학의 발달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겠지만, 의학이 나갈 방향과 의사들이 질병과 생명에 대해 갖는 연구 태도와 환자에 대한 자세를 반성해 보는 시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이 갖는 의미이다.


070226-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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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꿀라 2007-02-27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랫만에 들어와 리뷰를 읽고 갑니다. 잘지내고 계시죠.

sceptic 2007-02-27 2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별일 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님도 늘 건강하세요.

외로운 발바닥 2007-03-05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주변에 의사들이 많아서 기본적으로는 의사들에게 호감을 갖고 있습니다. 개인별로 의사, 또는 병원과 관련하여 가진 경험으로 인해 의사들에 대한 생각이 정말 크게 차이나는 것 같습니다. 의료사고문제, 보험수가 적정화문제, 전공의들에 대한 착취문제, 의과대학 내부의 군대보다 더한 권력구조, 의사들에 대한 무조건적 적대심의 사회적 확산 등 정말 골치아픈 문제가 많은 것 같습니다. 어쨌든 의사들도 만족하면서 환자를 볼 수 있어야 결국 환자들한테도 이익인데 주변에 보는 의사들 중 상당수가 직업에 대한 만족도가 상당히 낮은 것 같아 걱정입니다...

sceptic 2007-03-05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사라는 직업 자체보다도 의사의 역할과 일반인이 가지고 있는 의학에 대한 개념도 한번쯤 생각해보아야하지 않을까 싶어져요...
 
자살 살림지식총서 222
이진홍 지음 / 살림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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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교시절 문예반 시화전에 걸었던 시의 마지막 부분이다. 사춘기의 우울한 자화상의 반영이기도 하고 생에 대한 환멸을 다른 다른 방식으로 표현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자살과 살자를 뒤짚어 결국 ‘살자’로 결론 내렸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죽음을 염려하거나 두려하는 것과 자살은 다른 문제이다. 생명의 탄생과 소멸 과정을 생의 자연스런 과정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우리들의 운명이다. 그 자연스러움에 대한 반역이 자살이다.

 자신의 생에 대한 주체적 권리로서 자살을 바라볼 것인지 아니면 반인륜적이고 반사회적인 행동으로 바라볼 것인지에 대한 문제는 자살의 문제를 개인과 사회,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물론 개인의 문제로 국한시킨다 하더라도 자유인의 권리인지 아니면 불가피한 선택인지의 문제는 남게 된다. 인간이 자신에게 행사할 수 있는 마지막 자유인가, 생의 극단에서 불가피하게 선택하는 절망인가.

 2005년 통계에 따르면 교통사고 사망자보다 자살로 사망한 사람이 1.5배나 된다. 하루도 빠짐없이 뉴스시간마다 마주하는 교통사고와 사망자들의 모습 이면에 감추어진 자살은 점차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1만 2천여 명이 한 해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대한민국에서만 매일 30여명이 자살로 죽는다는 이야기다. 최근의 연예인들이 자살로 생을 마감해 뉴스에 오르내리지만 신분과 나이, 직업, 종교와 무관하게 지속되는 자살은 무엇인가.

 이진홍의 <자살>은 사회적 측면에서 그리고 문화와 환경, 윤리적 측면에서 다각도로 자살의 의미를 살펴보는 책이다. 살림지식총서의 특성상 제한된 분량이지만 에밀 뒤르깽의 <자살론>이나 죽음과 관련된 책들이 부담스럽다면 가볍게 접근해 볼만 책이다. 자살을 역사적 측면에서 고차원적으로 바라보는 책도 아니고 심리적 배경이나 사회 문화적 관점으로 깊이있게 다루고 있지는 못하지만 가볍게 그러나 진지하게 읽을 만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살은 설사 그 사람 자신에 있어서는 부정한 일이 아니라 할지라도 국가에 대해서는 하나의 부정이다”라고 단언했다.(니코마코스 윤리학, 제5권 15장) - P. 25

아주 오래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말은 자살을 개인이 아닌 국가의 차원에서 바라본다. 개인의 인권보다 국가의 권력이 우선시되던 시대이니 당연한 말이다. 관점은 달라졌지만 종교와 사회적 분위기 그리고 때로는 유행처럼 번져나가기도 한다. 주변에서 마주치는 사고사나 병사, 자연사와 달리 자살은 그 휴유증과 파장이 만만치 않다.

대개의 경우에는 오직 스스로를 파괴해 버리고자 했던 강력한 의지를 제외한 다른 분명한 해독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자살의 원인은 영원한 비밀로 남을 뿐이다. - P. 53

유서로 밝혀진 단순한 이유만으로 알 수 없는 자살의 원인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 때문만은 아니더라도 생에 대한 욕망을 극복할 만한 강렬한 유혹은 무엇일 수 있을까하는 궁금증은 자살의 유혹이나 충동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은 이해하기 어렵다. 비록 미수에 그치건 성공하건 개인의 운명은 이후에 극명하게 갈라지게 된다. 그것은 단순한 생과 사의 문제가 아니라 죽음과 삶을 받아들이는 태도의 문제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쉽게 말하고 더 쉽게 잊는다. 지나간 시간들과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망각은 생을 좀 더 행복하고 단순하게 살아갈 수 있는 원천이 되는지도 모르지만 묻혀버린 진실 속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저자 이진홍은 이런 말로 <자살>이라는 책을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진실을 말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극지에 서는 것과 같이 위험한 일이다.”(태공망, 文師)


070223-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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