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론 현대사상의 모험 10
에릭 홉스봄 지음, 강성호 옮김 / 민음사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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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가의 눈으로 바라본 현실은 방법론에서 차이가 있더라도 그것을 바꿔나갈 추동력을 얻지는 못한다. 현실은 현실일 뿐이고 방법론이나 인식론은 그것으로 그친다. 20세기가 주목한 역사가로 에릭 홉스봄을 손꼽아 보아도 그의 인식은 한계에 그친다. 한 권의 책으로 그의 사상과 생애를 논할 수는 없다. 다만, 개인적으로 안타까운 것은 변화를 이끌어 낼 힘이 부족하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살아있는 것은 선택이 아니다. 인간은 탄생부터 죽음까지 의지와 선택에 의해 실행되지 않는 것이 더 많다는 사실을 어렴풋하게 알게된다.

  인생은 불합리하고 공평하지도 않으며 세상은 더욱 더 그러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은 역사를 통한 거시적 안목을 통해서가 아니라 사회와 일상 생활을 통해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는 진리이다. 20세기를 <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로 명명했던 영민한 역사가인 에릭 홉스봄은 마르크스 역사관의 철저한 적용자이다. 그의 주저들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역사론>을 읽는 것은 순서가 뒤바뀐 것일 수도 있다. 그의 생애를 정리하는 듯한, 역사에 대한 인식 태도와 방법론을 망라한 이 책은 그의 책들을 읽어나가기 위한 방편일 수도 있겠다.

  특정한 사실과 시대적 사실을 다룬 ‘역사’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해 논의하는 글들을 모은 책이다. 결코 가볍고 만만치 않은 이론들이 상당부분 차지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에 입각한 역사주의 관점이나 아날학파에 대한 날선 비판들은 이 책을 읽기 위한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전체 21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앞부분과 뒤 부분에 제시된 이야기들만으로 충분한 가치가 있다. 결코 가볍지 않으면서도 역사에 관한 에릭 홉스봄의 견해가 잘 피력되어 있고 두고두고 곱씹어 볼만한 수많은 제언들과 통찰들이 빛을 발한다.

  선동적 역사와 이데올로기적 역사는 자기를 정당화하는 신화가 되는 경향을 지닌다. 근대 민족과 민족주의의 역사가 입증해 주는 것처럼, 이것보다 더 위험한 눈가리개는 없다.
  이러한 눈가리개를 없애려고 시도하는 것, 혹은 적어도 눈가리개를 조금 들어올리거나 이따금 들어올리는 것이 역사가의 직무이고, 역사가가 그러한 일을 하는 한 사람들이 배우려 하지 않을지라도 현대 사회에 도움이 되는 어떤 것을 말해 줄 수 있다. - P. 70


  역사를 단순히 지나간 과거에 대한 반성이나 미래를 예견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이 책에서도 강조하듯이,

역사가는 일어날 가능성이 없는 일에 대해 실제로 어느 정도 이야기할 수 있고, 일어날 가능성이 없는 일에 대해서는 더 많이 이야기할 수 있다. 역사가의 말은 그리 많이 경청되지 않는다. 그것이 역사의 본질적 속성이기도 하다. 그러나 역사가가 실제로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여 미래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데 힘을 쏟고 개선한다면, 그리고 조금 더 많이 능력을 알린다면, 사람들은 역사가의 말을 조금 더 들으려고 할 것이다. 역사가는 전부는 아니지만 일부는 보여줄 수 있다. - P. 98

고 말한다.

  경제학과 관련된 관심은 인간의 정치나 경제와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홉스봄은 마르크스의 역사관을 통해 상부구조와 하부구조 그리고 토대가 되는 경제학을 역사 안에 담아내기 위한 방법론을 제시한다.

역사에서 분리된 경제학은 키가 없는 배이고, 역사가 없는 경제학자들은 배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많이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 P. 174

마르크스의 역사관은 ‘사회학적’인 것이거나 ‘경제학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학적인’ 성격과 ‘경제학적인’ 성격을 모두 지녔다는 점이 본질적인 특징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생산 관계와 재생산 관계(즉 가장 광범한 의미의 사회 조직) 그리고 물질적 생산력은 분리될 수 없다. - P. 248


그가 선언적으로 말하는 역사에 대한 강연과 발표, 언론을 게재된 기고문들은 하나같이 현재의 상황뿐만 아니라 우리가 걸어왔던 과거의 시간들을 돌아보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사건에 대한 기록들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우리는 역사를 때때로 망원경으로 바라보기도 하고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기도 한다. 그러나, 미시적인 관점에서 ‘특수사’만을 다루는 역사가 아니라 거시적인 관점에서 ‘전체사’를 다루는 것이 역사의 임무라고 주장하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하나하나의 관점 속에서 쉽게 그것들을 찾아 조합시킬 수는 없다. 이 책은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또 하나의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과거의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하는 카Carr의 견해를 우리는 여전히 역사에 대한 가장 훌륭한 정의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역사관에 기초한 에릭 홉스봄의 역사에 대한 길잡이와 안내들이 오히려 더 현실적이고 적극적인 태도가 아닐까 싶다. 역사가 현실에서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의 문제는 역사가들의 몫이 아니라 당대의 현실을 만들어가는 우리들의 요구 사항이어야 한다. 그래서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역사가들은 자신들의 주제 밖에서 객관적 관찰자와 분석자로 서 있지도 않고 서 있을 수도 없다. 우리가 옛날 텍스트를 편집하는 것 같은, 오늘날의 공공연한 열정과 멀리 떨어져 있는 어떤 것을 다루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 모두는 우리가 처한 시대와 장소에 대한 가정에 빠져 있다. - P. 442


070917-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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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비실록 - 숨겨진 절반의 역사
신명호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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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아니, 나는 얼마나 지독하게 편협한 시선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 왔는지 확인했다. 사물 혹은 사건들 속에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정교하고 치밀한 씨줄과 날줄들이 얽혀 있다. 눈에 보이지도 귀에 들리지도 않는 그 관계를 파악하는 것은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대상을 바라보는 방향과 눈높이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이나 가치관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객관적인 기준과 판단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모든 시선들이 주관적이며 하나의 기준과 판단일 뿐이라는 말이 성립된다. 이것은 양시론 혹은 양비론이다. 모두가 그럴 수 있고 전부 다 틀릴 수 있다는 생각이다. 좋은 변명이고 성급하게 일반화할 수 있는 오류이긴 하지만 설득력 있게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책을 읽고 몰랐던 사실을 확인하고 앎의 범위를 넓히고 인식의 지평을 확대하는 즐거움은 단순히 누군가를 가르치기 위한 도구이기 이전에 인간적 삶의 가장 원초적인 욕망이며 즐거움이다. 적어도 내겐 그렇다. 그런 면에서 신명호의 <조선왕비실록>은 내게 말할 수 없는 즐거움을 안겨준 책이다. 역사는 기록에 의해서만 후대에 전달된다. 과학기술이 발달하기 이전의 역사는 오로지 활자에 의해 책의 형태로만 존재한다. 물론 건축이나 미술품 유물과 유적을 통해 당시의 삶과 문화를 확인할 수도 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과거는 오로지 기록된 문자로만 전달된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아니, 내가 얼마나 맹목적인 시선으로 역사를 이해하고 받아들였는지 반성하게 된다.

  역사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사건을 어떤 관점과 시선으로 바라보느냐의 문제는 역사에 대한 접근 방식을 결정짓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이것을 사관이라고 하는데 단순하게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하다. 당시의 시대 상황이나 관련된 문제들을 해석하고 판단하는 근본적인 토대가 되기 때문이기도 하며 현재적 관점에서 적용하고 이해하는 척도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동일한 인물과 사건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은 역사가의 고유 권한일 수는 없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객관적인 자료에 의해 판단될 수 있는 것이며 정확하고 타당한 인과관계와 논리적 사유를 통해 가능한 일이다.

  이 책은 우선 목적과 방법 면에서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 역사의 기록 자체가 왕이 중심이 되어 국가 단위의 사건과 흐름들을 위주로 되어 있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지만 그 이외의 것들에 대한 관심은 아직도 미미하다. <한국생활사박물관>가 주목받고 높은 평가를 받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선조들의 일상들이 어떠했는지 우리처럼 대다수 평범한 사람들의 삶은 어떠했는지가 서술의 초점이 되기 때문에 훨씬 더 흥미있고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들은 소외된 이웃이 아니라 역사의 주체이며 국가의 주인이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주체는 항상 왕과 양반들이었으며 권력을 쟁취한 자들의 잔치였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역사의 주제는 여성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는 어쩌면 이 책의 부제처럼 ‘절반의 역사’이다. 기록되지 않은 ‘숨겨진’ 절반의 역사는 누구에 의한 것인가? 당연히 그것은 여성들의 몫이다. 근대 이전에 여성에 대한 문제는 다른 책을 통해 충분히 확인할 수 있으며 본격적으로 여성이 주체적인 삶을 영위한 것은 불과 100년도 안된다. 지금도 물론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 지구 위의 절반이 넘는 여성들은 인권의 사각 지대에 놓여 있다.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조선시대에 비추어 판단하거나 비난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겠지만 역사에 등장하는 여성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없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랐다.

  신사임당이나 유관순이 아니라 권력의 핵심에 놓여있던 조선의 왕비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이었으며 어떻게 살았을까? 이렇게 지극히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호기심에서 출발한 책이 바로 <조선왕조실록>이다. 태조를 왕위에 오르게 한 신덕왕후 강씨, 태종 이방원의 아내였던 원경왕후 민씨, 어린 조카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세조의 아내 정희왕후 윤씨, 성종의 어머니이자 광해군의 할머니였던 인수대비 한씨, 선조의 왕비였던 인목왕후 김씨,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의 아내 혜경궁 홍씨, 너무나 유명한 고종의 아내 명성황후 민씨. 이렇게 일곱명의 파란 만장한 인생사가 이 한 권의 책을 통해 그려진다.

  출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는 과정까지 어떤 드라마나 영화보다도 극적이었던 대표적인 왕비들을 선발했다. 왕비가 되기 전 태어나는 과정과 왕비로 간택되거나 왕실의 며느리가 되는 과정 그리고 왕비가 되는 과정은 백성들의 입장에서 보면 머나먼 이야기로 읽힌다. 대표선수로 발탁된 일곱 명의 왕비는 그 어느 왕비보다도 사연 많은 여인들이다. 한 나라의 왕비로 한 남자의 아내로 무엇보다도 정치권력의 중심에 서 있던 그녀들의 삶은 눈물과 한숨으로 점철되어 있다. 저자는 단순한 역사적 자료를 제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다양한 문헌과 사료를 통해 생략되거나 보이지 않는 부분들을 유추한다. 결국 이 부분들은 역사가의 해석과 판단에 맡겨질 수밖에 없다.

  이 책은 바로 이 부분에 주목하고 있다. 조선왕조에서 벌어졌던 절체절명의 순간에 왕조의 운명을 뒤바꿀 만한 역할을 했던 왕비들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들은 비로소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역사의 중심에 선다. 남성들보다 더욱 치밀하고 냉정한 판단력을 보여주며 남편과 아들과 손자의 운명을 뒤바꾼 여인들의 열정과 눈물들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사실에 근거한 판단과 해석, 질문과 상상들 사이에서 즐겁게 시간 여행을 한 느낌이다. 일방적이고 직설적인 설명이 아니라 독자에게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고 실록이나 관련 서적을 인용하면서 차근차근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저자의 솜씨도 믿을 만했다. 깊은 여름밤 혹은 낯선 휴가지에서 이 책과 함께 과거의 역사 속으로 잠시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070722-0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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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쿠호오 이야기 - 규슈 지쿠호오 탄광을 중심으로 한 격동의 민중사, 평화교육시리즈 03
오오노 세츠코 지음, 김병진 옮김 / 커뮤니티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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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은 우리에게 많은 말을 건넨다. 헤어진 인연을 떠올리게 하기도 하고, 몰랐던 지식을 전해주기도 하며, 잊고 있던 과거를 돌아보게 하기도 한다. 책을 통해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며 사색에 잠기고 나를 돌아본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생각하고 내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그 과정은 어떠했는지 들여다보기도 한다. 그 과정과 진행 방식들이 우리의 과거이며 현재고 미래의 모습이다. 한 권씩 책을 읽어나가면서 책을 통해 인류가 걸어왔던 길을 돌아보고 나의 삶과 우리의 현재를 조망한다. 직접적인 행동과 실천의 문제가 늘 숙제로 남겨지지만 인식의 힘을 키워나가는 과정과 깊은 사색과 성찰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방식이 아닌가 싶다.

  커뮤니티에서 출간된 평화교육시리즈 중 한 권인 <지쿠호오 이야기>를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만감이 교차했다. 내 아버지는 일본에서 태어났다. 탄광 갱도가 무너져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4살 때 한국으로 돌아오셨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사이에 세발 자건거를 탄 아버지의 모습이 흑백 사진으로 단 한 장 남아있다. 그 사진이 내가 알고 있는 할아버지에 대한 전부이다. 한국에 돌아와 친척들의 도움을 받으며 세 딸과 외동 아들을 키우셨던 할머니의 이야기는 전설처럼 혹은 그 시절 모든 어머니의 이야기로 친척들이나 고모들에게 후일담으로 명절 때마다 귀동냥하며 자랐다.

  할아버지가 일했던 탄광이 어디였는지 궁금하지도 않았고 어떻게 건너갔는지 물어본 적도 없다. 나와 관계없는 너무 먼 이야기였고 아버지도 할아버지의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전설처럼 가끔 흘려듣곤 했었다. ‘아이들의 힘으로 만들어가는 나라 운동본부’라는 이름이 긴 단체에서 이런 책을 만들고 번역해서 한국에서 출판한다는 것은 역사 바로 알기에 대한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일깨우는 일일 것이다. 일본이라고 해서 왜 지극히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 없겠는가. 한국의 학생들에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될까마는 맹목적인 일본문화에 대한 추종이나 비이성적인 반일 감정이나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다. 바로 알고 올바로 인식하는 데서부터 한일 관계는 재정립되어야 한다. 더욱이 지나간 역사에 대한 왜곡이나 우리가 걸어온 길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아픈 과거에 대한 반성도 성찰도 그리고 미래를 향한 제대로 된 방향 설정도 쉽지 않을 것이다.

  지쿠호오는 일본의 대표적인 탄광을 말한다. 이곳은 단순히 메이지 유신 당시부터 일본의 부의 원천과 상징이 되는 곳이 아니다. 근대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하면서 한 나라의 부국강병을 위해 민중들이 쏟았던 피와 땀의 현장이다. 일본의 대표적인 탄광이 단순히 그들만의 문제였고 과거였다면 우리가 돌아볼 필요가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그곳이 한국인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19세기 말부터 시작해서 일제 강점기 이후에는 한국인의 수가 급증했다. 토지몰수와 생활난을 이기지 못한 반강제적 이주 노동자들의 삶은 비참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노동시간과 인간 이하의 노동 환경은 짧은 설명과 간단한 삽화였지만 남의 일 같지 않아 가슴이 먹먹했다.

  다른 역사책을 통해 객관적으로 서술된 텍스트를 접하는 것과 달리 이해를 돕기 위한 그림들이 상징적이었지만 상세한 설명보다 오히려 깊은 인상을 남긴다. 지쿠호오 이야기 뿐만 아니라 야마에 살았던 사람들 그리고 한일 병합과 연락선에 실려온 사람들의 이야기는 우리 근현대사와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인 이야기들이다. 위안부와 징용에 동원된 한국인의 구체적인 수치가 분노를 배가 시키는 것은 아니지만 학생들이 이 책을 통해 그 심각성과 사실 여부 자체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다양한 교육 방법과 역사에 대한 접근 방법이 있겠지만 이렇게 민간의 노력과 적극적인 성과물들은 훨씬 더 효과적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런 노력과 과정들이 국가의 개념을 넘어서 연대와 참여의 장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가능성의 문제이다. 단순히 한국과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 책에도 언급되어 있지만 중국과 동남 아시아 여러 나라가 모두 연계되어 있는 역사이다. 국가와 국가간에 벌어진 전쟁의 원인과 결과를 분석하자는 것이 아니라 지나간 역사 속에서 가장 큰 피해자는 누구였을까를 생각해 보자. 국경을 넘어 전쟁터에서 총을 쏘며 아비규환의 지옥을 헤매였던 그 많은 사람들을 과연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싸웠을까? 갱도에서 숨이 막혀 생손톱이 다 빠지도록 벽을 긁다가 질식사한 사람들의 시체에는 성한 손톱이 하나도 없었다는 이야기를 나는 이 책보다 먼저 살아 있는 사람들을 통해 어린 시절에 전해 들었다. 그들은 한국인이기 때문에 분노해야 하는가?

  하방연대는 계층과 계급을 넘어 국경을 넘어 현실 속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 이루어져야 한다. 잘못된 과거의 역사를 돌아보고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들만의 전쟁과 그들만의 갈등 속에서 대다수 민중들의 모습은 어떠했는지, 우리가 무엇 때문에 그리고 누구를 대상으로 싸워야했는지 먼저 깨달아야 한다. 그 원인과 문제점들을 짚어보면 실타래가 풀리듯 해결방법도, 대안들도 찾아지게 된다. 물이 빠지고 바닥이 드러나듯 그렇게 선명하고 정확한 눈을 갖게 될 것이다. 이 책은 미래의 주인이 될 청소년들에게 뿌연 시야를 걷어낼 수 있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데 의의가 있을 것이다.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삽화와 일본어 원문 표기라는 방식을 택한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만 책이 크고 무겁고 비싸다. 군살을 빼고 좀 더 가볍고 저렴하게 접할 수 있는 책으로 만들어졌으면 좋았겠다. 하지만 우리가 미처 몰랐던 일본의 민중사와 조선인 탄광 노동자의 삶을 어렵지 않게 접근할 수 있는 책으로 손색이 없다.


070719-0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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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 근대 망령으로부터의 탈주, 동아시아의 멋진 반란을 위해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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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고도 외면했던 것은 아닐까? 우리가 동아시아에 속해있다는 지정학적 사실은 우리 민족 혹은 국가의 운명을 질곡의 세월로 이끌었다. 물론 이런 생각의 기저에는 수동적이고 피학적인 전제가 깔려있으나 수백여 차례의 외침을 받고도 근근이 버텨온 우리의 역사를 돌아보면 동아시아는 단순히 지리적인 범위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특히 근현대사에서 동아시의 역할과 한계 그리고 그 의미를 제대로 규명하는 작업은 여러 사람에 의해 지속적으로 시도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삐뚤어진 시각과 좁은 시야에 갇혀 오리엔탈리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20세기 초 일본의 군국주의의 군화발에 짓밟힌 민중들과 대동아공영권이라는 허황된 주장에 현혹된 위정자들이 겪은 동아시아의 역사는 동일하지 않다.

  박노자의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는 또 하나의 시원한 외침이다. 박노자를 벽안의 외부인으로 평가하는 사람은 이제 없을 것이다. 가장 한국적인 학자라고 명명하고 싶다. 한국적이라는 말은 우리의 정체성과 역사에 정통하며 한국에 대한 애정이 깊고 학문적 깊이가 만만치 않다는 말이다. 한 개인이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은 주관적이다. 역사에 객관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승리자의 것이든, 민중들에 의한 것이든 모두를 담아내든 하나의 관점은 좁은 견해를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모든 관점들이 비슷하거나 방향만 달리한다고 해서 폭넓은 관점으로 역사를 바라보거나 객관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박노자가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은 신선하다. 적어도 그의 책을 읽는 사람들은 무언가 새로운 시각과 비판적 관점을 갈망한다.

  독서는 저자와 끊임없는 대화의 과정이다. 의사 소통의 행위로서 독서는 읽는 과정에서 수많은 질문과 대답을 주고 받으며 독자를 깊은 사유의 세계로 안내한다. 때로는 저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나누고 때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을 품고 반론을 제기하기도 한다. 진정한 독서가 이루어지고 깊은 감동과 내면의 울림이 이어진다. 독자 개개인의 성향과 역사에 대한 관점도 영향을 미치겠지만 설득력있는 이야기와 사실에 근거한 의견들은 진정 ‘우리가 몰랐던’ 역사에 대해 한 수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동아시아라는 지역적 특수성을 배경으로 휴머니즘, 20세기에 대한 기억들, ‘근대’의 문제, 남성우월주의와 가부장제, 제국주의와 개인 그리고 양심 등 폭넓은 주제들에 관한 박노자의 단상들은 귀화 한국인 박노자를 가장 한국에 대해 잘 아는 한국인으로 보이게 한다. 단순한 저자에 대한 호감과 감탄을 넘어서 그가 말하는 동아시아의 역사와 세계 안에서의 모습들은 지금 우리의 모습을 비춰보는 거울이 된다.

  <당신들의 대한민국>이나 <나를 배반한 역사>에서 보여주었던 시각들이 불편했던 독자라면 이 책 역시 쉽고 만만하게 그의 논리에 동의하기는 어렵다.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공감할 수 있는 관점을 갖는다는 것은 가장 나쁜 관점은 아닐까? 구석구석 숨어있는 인물들과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관심 그리고 역사가 흘러온 과정 속에서 그 흐름을 읽어내고 비판적 관점을 유지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특히,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말하고 있는 중국과 러시아의 혁명에 관한 논의는 흥미롭다.

  미래 상황에 대한 가정법과 현재의 관점으로 바라본 역사 속에서 우리는 많은 교훈과 미래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 중국과 러시아의 자본주의와 개방의 물결은 사회체제 자체를 변화시킬 것이다. 경제개발을 빌미로 부의 양극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현실적인 모순들을 해결해 나간다 해도 그들의 미래를 그려내기는 어렵다. 또다시 ‘혁명’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은 충분히 가능성과 타당성이 있는 미래다. 한 번 경험한 민중들의 힘과 의지는 향후 두 나라의 사회체제의 변화와 모순 극복 방법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겠지만 주변 동아시아 국가들에게 미치는 막대한 영향력을 고려해 볼 때 하나의 가능성만으로 치부하기에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역사적으로 지리적으로 하나의 공동체나 연합이 이루진 적이 없지만 지리적 여건과 문화적 교류 때문에 끊임없는 상호적 관계를 유지해온 동아시에 대한 박노자의 이야기는 내게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비참하고 우울했던 우리의 역사가 동아시아라는 환경 속에서 겪을 수밖에 없었던 필연성, 특히 근대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일본제국주의의 광기에 피 흘리며 쓰러졌던 민중들, 위정자들의 부패와 한계는 여전히 아픈 현재로 남아있다. 단순한 과거의 역사에 대한 반성이 아니라 올바른 역사 인식을 위해 알아야 할 내용들이 충실하게 담겨 있는 이 책은 동아시에 대한 이해를 위해 필요한 중요한 디딤돌이 될 것이다.


070703-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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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병사 - 어느 독일 병사의 2차 대전 회고록
기 사예르 지음, 서정태 엮음 / 루비박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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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가장 최근에 본 전쟁에 관한 영화는 <아버지의 깃발>이었다. 최초의 영화는 기억나지 않지만 로버트 드 니로의 <디어 헌터>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플래툰>이나 <풀 메탈 쟈켓>, <씬 레드 라인>, <진주만>에 이르기까지 인상적인 전쟁 영화들은 꽤 많다. 헐리웃 영화의 경우 베트남 전을 소재로 한 영화가 많았고, 당연히 지고 나서 징징거리는 내용이었다. 가해자가 양심의 가책을 받거나 공식화된 영웅담으로 흐르는 뻔한 내용들이다. 그것을 전쟁의 전부라 믿었고 미국은 항상 정의의 편에 서 있다는 정말 위험한 이데올로기를 심어주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 바로 헐리웃 전쟁 영화들이었다.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하고 불량스런 깡패 국가 미국의 모습이 감추어진 채 포장된 모습과 피상적인 추측만이 가능하던 시절의 친미 성향을 가진 정치와 역사의 관점에서 교육 받는 시절의 이야기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의 경우는 고민할 필요도 없이 거의 모든 영화가 아우슈비츠에 모아진다. <뮤직 박스>, <쉰들러리스트>, <베를린 천사의 시>를 비롯해 <피아니스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변주되어 영화팬은 물론이고 일반인들에게 영화라는 장르가 가진 위력을 마음껏 뽐내며 스크린 앞에서 좌절과 분노 그리고 현실에 대한 안도감과 행복을 만끽하는 역할을 해왔다. 그리고 독일은 여전히 깊이 머리 숙여 반성하고 있고 일본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다시 우경화로 치닫고 있다. 과거는 망각의 세월 속에 묻혀 가고 현실은 지나간 시간을 돌이킬 틈이 없다. 그러나 현재는 단지 과거의 오래된 미래일 뿐이다.


  루비박스에서 나온 <잊혀진 병사>는 일단 책의 두께가 중량감을 보여준다. 735페이지를 한 권으로 묶어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전쟁이든 역사든 사람들은 결과와 영웅만을 기억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래서 어떻게 됐어’라고 묻는다. 이 책의 저자인 기 사예르는 16세의 나이로 1942년에 전쟁에 뛰어든다. 고등학교 1학년쯤 되는 나이에 군에 자원 입대하는 소년의 생각은 불을 보듯 뻔하다. 조국에 대한 충성심과 전쟁에 대한 환상과 넘치는 에너지의 발산을 위해 뭔가 흥분된 자극이 필요했을 것이다. 프랑스계 독일인 저자는 아버지가 프랑스인이고 어머니가 독일인이다. 이런 중간자적 혈통은 포로가 된 후 결정적으로 석방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이름없는 무명 용사 기 사예르가 왜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는지 무엇이 그를 전쟁터로 이끌었는지는 이 책에서 확인할 수 없다.


  이 책의 내용은 단순하다. 16세 소년이 전쟁에 투입되어 1945년 포로가 되어 석방될 때까지 러시아와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동부 전선에서 보낸 3년간의 비망록이다. 그 기록들의 생생함에 입을 다물기 어렵다. 전쟁에 관한 어떤 책보다 더 생생하게 전쟁의 순간들을 포착했고 묘사한다. 뛰어나 글솜씨나 달변이라서가 아니라 단지 그 참혹한 현장에서 보고 들은 내용을 기록했을 뿐이다. 그래서 더욱 피비린내나는 현장을 보여준다. 전쟁에 과한 어떤 분석이나 자료들도 2차 대전의 원인이나 그 결과가 미친 영향을 살펴보는 데 그치고 있다. 몇 명이 죽었거나 다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어떤 상황이었는가를 객관적으로 살펴보는 일은 지금까지 수없이 반복되어 왔다.


  그러나 이 책처럼 그저 있는 그대로의 현실과 전쟁의 순간들을 다큐멘터리처럼 그려내고 있는 자료는 없을 것이다. 전쟁을 미화하고 있지 않는 것은 물론 어떤 이데올로기나 국가적차원의 이유나 접근, 설명도 필요없다. 단순히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생명의 숭고함과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쳤던 그 순간의 기록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을 뿐이다. 스스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느끼며 전쟁을 반대하거나 몸담았던 시간들에 대한 반성과 회의도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단순한 사실의 기록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 그 상세하고 구체적인 상황들과 그 현장에서 인간이 느껴야 했던 모든 것들이 이 책에는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나도 그랬지만 많은 사람들은 전쟁을 이렇게 이해한다.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의 한계로 치부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전쟁터에 생각없이 뛰어들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너무 많은 사람들이 손쉽게 전쟁에 대해서 배운다. 그들은 안락한 의자에 앉아 발을 불가에 뻗고 평소처럼 다음 날 일할 준비를 하면서 베르‰窩犬?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읽기만 한다. - P. 366


  장교가 아닌 병사의 입장은 전쟁을 대하는 태도와 마음이 다르다. 죽고 죽이는 현장에서 오로지 살아남아야겠다는 본능이 앞서기도 하고 전우의 죽음으로 울부짖기도 하며 배고픔과 추위를 견뎌내야 한다는 생각 뿐이다. 전쟁은 그들만의 리그로 전개될 뿐이다. 위정자들의 오판과 권력에 대한 욕망, 교묘한 정치적 선동과 대중들의 야합은 인류의 파멸을 재촉할 뿐이다. 여전히, 지금도 전쟁은 계속되고 있지 않은가?


  히틀러나 아이히만 같은 인간에 대한 연구와 대중 심리나 아우슈비츠에 관한 수많은 저작들조차도 ‘전쟁’이 무엇인지 제대로 밝혀주지 못할뿐더러 독자들에게 ‘전쟁’을 제대로 알려주지도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책장을 넘기면서 손에 피를 묻히는 기분이었다. 내가 경험했던 군대와 ‘전쟁’에 관한 피상적인 개념들은 하나 둘 사라지고 만다. 인간의 절규와 죽음의 아비규환 그리고 영하 30도의 추위와 굶주림은 살아야겠다는 본능 이외에 그 어떤 욕망으로도 설명되지 않는다. 처절했던 전쟁의 기록들을 긴 호흡으로 훑어보며 무거워진 마음을 추스르기 힘들었다.


그들은 극심한 두려움에 모든 신념이 사라졌고 어떤 일에도 누그러지지 않았다. 그들은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모든 작전에 앞서 두려움을 느꼈다.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한 사람들에게도 자신도 모르게 나무 꼭대기를 비추는 태양빛처럼 공포가 엄습해왔다. - P. 571


독일인은 영웅인가. 미치광이인가? 누가 이런 극단적인 희생정신을 평가할 수 있을까? 침묵 속에 아이들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보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 P.

619

  

  적들이 몰려올 때 느껴야하는 두려움과 공포는 전쟁 상황이나 피아간의 식별을 넘어 당연한 본능으로 세포 구석구석까지 고스란히 전달된다. 타인의 죽음과 고통을 바라보며 전쟁에 대해 순간순간 떠오르는 상념들을 저자는 날것으로 제시한다. 어떤 화려한 수식이나 포장도 없고 개념화하지 않는다. 그 순간들의 기록과 상념들을 그대로 독자에게 전달된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처절한 육성이 귓가에 어른거린다.

 이 책은 1967년, 그러니까 전쟁이 끝나고도 20여년이 끝난 후에 쓰여진 독일 병사의 비망록이다. 패전국의 어느 병사가 쓴 회고록이 승전국의 전쟁 영웅이 쓴 이야기보다 값진 이유는 독자가 책을 통해 확인할 일이다.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지독한 전쟁 경험을 하며 이름 없는 병사가 생각한 것은 다음 몇 줄로 요약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전쟁의 이론이나 전략가의 충고보다도 독자들의 가슴에 깊이 각인될 수 있을 것이다. 반전평화를 부르짖는 수많은 함성과 요구들보다 처절하고 참혹한 살육의 현장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들에 한 번 쯤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나는 인간성에 호소하지 않고 복수를 원하지도 않는다. 나는 분별력을 잃었기 때문에 지금 이 글을 제외하고는 침묵하며 지냈다. 그리고 외로움 속에서 용서보다 더 강한 것은 없다는 것을 배웠다. - P. 678


  

070608-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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