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를 뒤흔든 16가지 발견
구드룬 슈리 지음, 김미선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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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인간의 생을 돌아보면 에릭슨이 이야기 한 것처럼 ‘결정적 시기’가 있었을 것이다. 대개의 경우 우리는 그 시기를 청소년기라고 본다. 하지만, 어느 순간 눈이 부실 정도로 강렬한 빛을 만나기도 하고 눈이 번쩍 뜨이는 깨달음을 얻기도 하며 평생 잊을 수 없는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그것이 사물이든 사람이든 혹은 눈에 보이지 않는 대오각성이든 가슴을 저미는 감동이든 그러한 순간을 만나게 되면 한 사람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달라지지 않더라도 눈에 띠는 생채기로 남거나 온 생애를 뒤흔들었던 아름다운 기억이 된다.

  역사란 인간의 삶의 흔적일 뿐이다. 위대한 무엇이 아니라 사회적 인간들이 살아온 궤적이다. 국가와 민족을 불문하고 인류 전체에게 깊은 영향을 끼친 사건들이나 눈부신 발전을 위해 초석을 마련한 일들을 손꼽아 본다. 그것을 선정하는 것은 물론 주관적 판단일 수밖에 없다. 구트룬 슈리가 쓴 <세계사를 뒤흔든 16가지 발견>은 인류의 역사에서 인상적인 순간들을 모아 놓은 책이다. 그 순간들로 인해 인류의 역사가 역류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달리는 열차의 궤도를 바꾸어 놓을 만큼 강렬하고 충격적인 사건들이었다.

  때로는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 지독한 노력과 가장 뛰어난 인간의 지적 능력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마법에 걸린 우연처럼 찾아올 때가 많았다. 이 책은 어쩌면 ‘세계사를 뒤흔든 16가지 우연한 사건’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하다. 고뇌하는 사람만이 역사의 진보를 이끌었다는 지극히 단순한 논리를 뒤집을 만한 일들은 대체로 노력의 과정에서 파생된 것들이지만 지독한 우연과 마주할 때도 많았다.

  쾰른 대성당의 정면 설계도 F가 발견되지 않았다면 632년 만에도 공사는 마무리 되지 못했을 것이다. 5,000년 동안 썩지 않고 냉동되어 있던 ‘외치’는 길 잃은 등산객에게 발견 되었고, 공동묘지에서 진화론의 증거를 찾은 괴테는 하인의 공을 가로챘다. 2,000년 전 로제타석의 문자를 해독한 샹폴리옹은 우연에 기대지 않았지만 의학의 새 장을 연 뢴트겐 광선이나 진시황의 무덤에서 잠자던 병마용들은 우연하게 발견되었다. 실러캔스를 발견하거나 뉴턴의 사과는 우연이라기보다는 지독한 노력과 번뜩이는 지적 능력의 결과였다.

  그러나 플레밍에 의해 푸른 곰팡이에서 발견된 페니실린처럼 인류 전체에게 획기적인 공헌을 한 우연도 없을 것이다. 이것도 물론 길을 가다 동전을 줍는 경우와는 다르다. 끊임없는 실험과 노력 가운데 건져 낸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 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낡은 장롱 속에서 획기적으로 발전된 사진의 원리나 라스코에서 우연히 발견된 동굴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재미있고 다채롭다. 변화가 주는 발전은 당연히 인간의 몫이었고 평균 수명의 연장이었으며 자연을 이해 혹은 지배하는 원리를 제공해 왔다.

  이 책에 나오는 발견들은 대부분 우연히 잊혀 진 사실들이 드러나거나 획기적인 발전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거나 당연히 자연 속에 존재하는 것들을 응용하게 된 순간들이다. 저자는 이 모든 순간에 감탄과 경외를 보내며 인류의 역사에서 ‘결정적 시기’가 있었음을 흥미롭게 포착해 내고 있다.

  역사를 이해하는 다양한 방식 중에 또 하나의 흥미로운 방식이 될 수 있겠다. 가볍고 재밌는 역사를 비판적 시선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살아온 과정에 대한 이해와 지식은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무엇보다도 인류의 살아온 삶의 흔적이며 지금 누리고 있는 문명과 발전의 과정을 들여다보는 일이기 때문에 시비를 가리는 일과는 많이 다르다. 사소한 것들에 대한 관심과 지나온 시간들에 대한 애정은 나와 우리를 이해하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다.

  이 책은 대중적 역사서로 손색이 없다는 평가가 가능하지만, 당연히 뒤따르는 아쉬움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깊이와 넓이를 골고루 갖추기를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욕심일 지 모른다. 이 책도 이면에 숨은 뜻과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들을 많이 전하지 못하고 객관적 사실들의 간략한 요약에도 분량이 빠듯하다. 각 장 뒤에 ‘좌충우돌 세계사, 그 오해와 진실’이라는 코너를 덧붙여 우리의 상식을 뒤집어 주는 간단한 사실들을 제공한다.

  세계사를 바라보는 관점은 누구나 다를 것이지만 객관적 사실들이 발견되거나 발명되는 과정은 궁금하기도 하고 재미도 있다. 때때로 가볍게, 그러나 질리지 않을 정도의 교양과 깊이를 원하는 책도 나오는 법이다. 이 책은 여행용(만약 이런 종류의 책이 있다면)으로 괜찮치 않을까 싶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 나와 우리를 돌아보는 데 도움이 될 만하다. 심각하고 진지한 노력과 삶의 태도도 중요하지만 한번쯤 네잎 클로버를 찾는 우연한 행운을 기대하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영화 <테이큰>에서 아버지 리암 리슨처럼 처절한 노력과 우연한 행복이 반복적으로 겹치는 인생은 없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를 맹목적으로 지켜주겠다는 불가능한 영화적 신뢰보다도 상황을 타계해 나갈 수 있는 체질로 변화시켜주어야 한다. 이 책은 우연히 만들어진 책이 아니라 인류가 반복해 온 발견들을 통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돌아보아야 할 ‘나’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나를 뒤흔든 16가지 우연’에 대해 생각해 본다.


08042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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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아이라 재판소동
데브라 하멜 지음, 류가미 옮김 / 북북서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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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이란 무엇인가? 개인의 실존적 고민이 아니라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은 어떤 속성을 지니게 되는가? 사회학적 관점이나 철학적 성찰이 아니더라도 나는 공동생활을 하는 인류의 특징에 대해 알고 싶다. 인간은 혼자서 살 수 없다는 자명한 논리를 들먹거리지 않더라도 두 사람만 모이면 규칙이 생기고 순서가 정해져야 한다. 질서는 보다 편리한 공동생활의 규칙이며 이기적 욕망을 억누르게 하는 강제력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것이 내면적 윤리의식의 함양이든 법과 제도적 장치이든 간에.

  아주 먼 그리스 시대의 직접 민주정치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30세 이상의 남성들만의 민주주의였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지만 법과 제도의 정교함과 공평한 배심원 제도는 시대를 뛰어넘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데브라 하멜의 <네아이라 재판 소동>은 흥미 진진한 추리 소설처럼 단숨에 읽힌다. 그리스의 오래된 연설문 하나로 살펴보는 당대의 사회문화적 현상들, 법률 체계, 배심원 제도, 시민권 계승 문제 등은 역사와 문화를 살펴보는 또 다른 방식으로 주목을 받기에 충분하다.

  이 책은 네아이라라는 고급 창녀의 재판을 중심으로 주변 인물들의 삶을 하나하나 살펴보고 있다. 테오므네스토스가 네아이라를 고소한다. 고소 이유를 설명하는 테오므네스토스의  짤막한 연설과 뒤이어 그의 장인 아폴로도르스가 대리인으로 배심원들에게 한 연설문만으로 이 책은 완성된다. 전해지는 내용은 이렇게 간단하지만 네아이라의 남편 혹은 후견인인 스테파노스와 아폴로도르스의 원한에서 비롯된 이 재판은 네아이라의 삶을 고스란히 반추하며 엉킨 실타래를 풀어가듯 그녀를 삶을 풀어낸다.

  니카레테의 유곽에서 시작한 고급 창녀 생활에서 아테네 시민의 삶을 누리게 되는 과정과 그 모든 과정이 파헤쳐지는 재판 과정은 당대의 그리스와 아테네를 이해하는 가장 흥미있는 방법으로 채택되었다. 한 여자의 삶을 통해 한 시대를 가늠하는 것은 어떤 방법보다도 경험적 토대를 제공하며 독자들에게 실감나게 다가간다. 권력의 핵심에 서 있는 아르콘 바실레우스의 아내가 된 네아이라의 딸 파노의 인생역정 또한 예사롭지 않다. 어쩌면 네아이라보다 그의 딸 파노가 결혼한 남자의 정치적 지위 때문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 모았는지 모르겠다.

  파노가 네아이라의 딸인지 스테파노스의 딸인지 아니면 둘 사이에 태어난 딸인지 우리는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재판의 핵심은 스테파노스와 아폴로도르스 사이의 정치적 분쟁이라는 사실이다. 개인적 원한 관계가 결국 아테네 시민권 분쟁으로 비화되었고 그 과정에서 네아이라는 희생양이 되었으며 그의 삶은 태양아래 발가벗겨진다.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생의 치부를 드러내야 했던 네아이라와 파노에게 연민이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

  그러나 정작 여자는 아테네 법정에 설 수 없었다. 당연히 남편이나 가족이 대리인으로 나서야했다. 스테파노스의 연설문은 불행히도 전해지지 않는다. 이 책의 매력 혹은 아쉬움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한 쪽의 연설문을 토대로 철저하게 객관적인 입장이 되어 수천년 전의 재판을 재구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생기는 문제는 필자의 태도이다. 네아이라를 변호하는 입장이 되어야 한다. 아폴로도르스의 연설문에서 확인되지 않는 사실들과 문맥들 사이에서 보여지는 논리의 허점들을 짚어내는 것이 필자가 심혈을 기울이는 대목이다.

  당연하게도 힘없이 당해야만 했을 네아이라에게 동정을 보내고 그 과정에서 당했을 억울함을 이제와서 풀어주겠다는 공명심이 아니라 과연 아폴로도르스의 논리는 그 법정에서 어떻게 작용했을까? 아쉽게도, 숨 막히는 극적 반전이나 이야기의 대미를 장식할 만한 결론은 없다. 이후의 재판 결과나 네아이라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재판이 이토록 흥미와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수많은 그리스 시대의 연설문 중에서 특별한 내용과 방법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에는 검사도 변호사도 없었다. 배심원은 매년 6천 명이나 선발되는 시민들 가운데 무작위로 선발되었으며 원고와 피고는 스스로 변론하고 연설하며 배심원들을 설득시켰다. 이 때 배심원들도 조용히 경청하는 오늘날의 배심원과는 달리 야유를 퍼붓거나 소리를 지르고 격렬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더구나 공적 재판의 경우 501명 이상의 배심원이 하루에 선고까지 마쳐야하기 때문에 배심원들끼리의 토론이나 회의는 불가능했고 그렇게 할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이 책에서는 이렇게 재판이 이루어지는 과정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네아이라 재판을 둘러싼 과정들을 시간 순서를 짜맞춰가며 재구성하고 있어 마치 추리 소설을 읽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한다. 피고를 신랄하게 비난하고 법률 위반 사실을 주장하는 연설문만으로 원고의 입장과 숨겨진 사실들, 과장된 논리와 과잉반응들을 찾아내고 객관적인 사실들을 찾아내는 것이 이 책을 읽는 또 하나의 재미이다.

  아테네의 삶과 지금 우리의 삶은 단순하게 비교할 수 없다. 다만 우리는 한 시대의 단면을 들여다보기 위해 네아이라의 재판을 선택했고 아폴로도르스의 연설문을 꼼꼼하게 분석함으로써 아테네인들의 생활과 문화 그리고 역사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이 책은 단순하게 기원전에 존재했던 한 고급 창녀에 관한 재판 기록이 아니다. 민주정치의 토대가 되었던 아테네의 재판 제도와 진행과정은 물론 ‘시민권’이 갖는 역사적 의미, 사상적 배경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실과 재미를 제공한다.

  인간의 삶이라는 보편적 정서 측면에서 살펴본다면 인간의 이기적 욕망, 제도와 질서에 대한 회의, 권력과 금전의 위력 등에 대해 고대 사회와 현대를 비교할 수도 있겠다. 인간의 삶은 계속되어왔고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고 극복하는 방식이 더 발전되어왔고 정교해졌다고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이 당혹스럽다. 법은 여전히 돈과 권력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우리와 멀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080414-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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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상식 바로잡기 - 한국사 상식 44가지의 오류, 그 원인을 파헤친다!
박은봉 지음 / 책과함께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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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익점은 정말 붓두껍 속에 목화씨를 숨겨왔을까? 행주산성에서 행주치마를 사용했나? ‘현모양처’는 전통적인 여인상일까? 광화문 앞 해태는 관악산의 화기를 누르기 위해 세워졌나? 베트남 파병은 미국의 요구 때문이었나?

  우리는 얼마나 부정확한 사실들을 상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모른다.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는 믿음은 상식이 되고 곧 움직일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 된다. 그렇게 잘못 전해지는 한국사에 대한 사실들을 확인하고 바로잡는 일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 박은봉의 <한국사 상식 바로잡기>는 이러한 사실들에 대해 하나하나 그 진실을 밝히고 있는 책이다.

  마흔 네 가지 상식들에 대해 역사적인 근거와 원인을 분석하고 어떻게 잘못 전해지고 있는지 그 유래를 밝히고 있다. 크데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 어원, 인물, 유물 ․ 유적, 책․ 문헌 ․ 사진, 정치․사회 ․생활에 관한 잘못된 상식을 바로잡고 있는 책이다. 하나의 작은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관련 사료와 사진을 첨부했고 관련된 책을 소개하고 있다. 더 자세히 확인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으며 ‘사료 속으로’를 간단하게 정리해서 관련 사료를 직접 확인할 수 있다. 세세한 부분까지 편집과 구성 면에서 신경을 많이 쓴 책이다.

  책의 내용 또한 구성이나 편집만큼 꼼꼼해서 누구나 읽을 만하다. 역사적 사실들을 쉽게 풀어쓰고 있는 것은 대중 역사서의 기본이다. 이 책도 물론 이 기본에 충실하다. 흥미있게 다가갈 수 있는 주제를 중심으로 누구나 알고 있는 것들이 사실은 ‘잘못된 상식’이다. 그것을 확인하는 독자들은 쉽게 공감할 수 있고 명확한 근거를 통해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그래서 이 책은 이 책은 누구나 흥미를 가질 만한 재밌는 역사서로 손색이 없다. 이렇게 책을 즐기면서 재밌게 읽을 수 있다면 책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도 더 없이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조선이 패망한 것은 시민혁명을 통해서가 아니라 외세에 의해서이다. 뼈아픈 과거를 통해 우리가 교훈을 얻었다면 그 이전에 역사는 바뀌었을 것이다. 역사를 통해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간을 위해 역사는 항상 냉정하게 충고하고 엄숙하게 경고한다. 그것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항상 인간뿐이다. 이 책은 이런 사실들을 왜곡하거나 주관적으로 해석한 오류들에 대한 변명이다. 명확하게 잘못 전해진 상식들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확인되는 것도 있고 소문처럼 흘러와 사실처럼 굳어진 것도 있다. 어쨌든 근거 없는 낭설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일은 다른 상식에 대해서도 비판적 관점을 갖게 한다.

  고려장, 현모양처, 바보 온달, 홍길동, 첨성대, 운현궁, 명성황후, 담배, 처가살이 등 우리가 제대로 알고 있는 사실이 무엇일까 싶을 정도로 오해하고 편견을 가진 일들이 도처에 널려있다. 몇 가지 사례로 분류할 수 없지만 일제 식민지 지배 체제를 거치면서 35년간 왜곡된 역사를 통해 우리에게 세뇌된 사실들이 많고 박정희 군사 독재 정권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강화시키기 위한 국민 홍보, 계몽용 전시성 역사도 많았다.

  시민혁명을 거쳐 근대화를 이루고 부국강병의 길을 걸었다면 있을 수도 없는 코미디같은 일들이 벌어졌던 것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아직도 이런 사실들이 확고한 믿음으로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사소한 역사적 사실 하나를 제대로 안다고 해서 현실이 순식간에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소한 실수와 잘못 전해진 사실들은 편견이 되고 왜곡된 역사로 굳어져 모두의 생각을 변화시킬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사실을 바로잡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

  흥미 위주의 대중 역사서가 눈에 띄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지속적으로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새로운 사실들을 확인하고 거기에서 교훈을 얻고 현실을 바라보는 관점 하나를 마련할 수 있다면 좋겠다. 책이 현실을 바꿔주지는 않는다. 책을 읽은 사람들이 현실을 바꿀 뿐이다. 책은 그렇게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고 현실을 바꾸고 미래를 만들어가는 힘이 된다.

  단편적으로 역사에 대해 가지고 있는 잘못된 상식들을 바로 잡으면 현실의 왜곡된 측면들도 보이지 않을까 싶다. 중요한 것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이기 때문이다. 현재는 오래된 미래일 뿐이다. 단순하게 심심풀이용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을 돌아볼 수 있는 성찰적 태도로까지 발전할 수 있다면 좋겠다. 지금도 왜곡되고 비틀리고 잘못 전해지는 사실들이 얼마나 많은가?

  한국사에 대한 상식을 바로잡는 일은 우리들 자신의 모습을 바로잡는 일이고 내가 살아가는 우리 사회 현실을 바로잡는 시작에 불과한 일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해석일지도 모르겠다. 역사를 전공한 저자의 입장에서 잘못된 역사적 사실들을 바로잡는 일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자신의 분야에서 가장 잘 할 수 있고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실들이 왜곡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격려가 필요하다. 저자와 출판사의 의도가 독자의 필요나 요구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널리 읽혀지고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바꿔줄 수 있는 책은 좋은 책이라는 사실은 여전히 변하지 않는 진리이다. 물론, 생각의 변화가 무엇이며 어느쪽이어야 하는지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080409-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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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8-04-09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을 것처럼 보여요, 물론 역사에 대한 지식이 워낙 희박해서, 생각이 뒤집히게 되는 게 아니라, 그냥 형성될 것 같은 지식도 많을 것 같지만 말이죠 ㅋㅋ

sceptic 2008-04-10 22:58   좋아요 0 | URL
참 애매한 표현인데...읽을 만 합니다...그렇게 확실하게 자리잡게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죠...^^
 
조선왕조사 전(傳) - 한국사에 남겨진 조선의 발자취
김경수 지음 / 수막새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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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속사나 생활사와 같은 미시사가 아니라 왕조 중심의 거시적 안목에서 바라보는 역사는 왠지 허망한 신화나 전설 같은 느낌이 든다. 분명 통탄할 만한 우리의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먼 나라의 이야기로 들린다. 21세기 현실과의 괴리감을 느끼는 것은 그만큼 사람들의 삶이 급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변화의 속도에 어지럼증을 느낄 만큼 세상은 달라지고 있지만  때때로 우리는 부적응의 문제를 인식조차 하지 못한다.

  먼 미래에 역사가들은 21세기의 시대정신을 어떻게 읽어낼 것인가? 조선 왕조 500년을 한 마디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위정자들의 이야기는 인간 본성의 가장 극악한 면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하다. 김경수의 <조선 왕조사 傳>은 철저하게 왕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전傳’이라는 형식이 황제나 영웅의 일대기를 걸출한 문장가가 쓴 것이기 때문에 이 책은 ‘전傳’이 갖추어야할 형식적인 요건을 갖추고 있다.

  1392년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부터 1910년 8월 대한제국이 망해버릴 때까지 마지막 왕이었던 순종에 이르기까지 스물일곱 명의 조선 왕조에 대한 간략한 보고서에 해당하는 책이다. 단 한 명의 왕도 빼놓지 않고 연대기 순으로 재임 기간을 충실하게 적시하고 있다. 종실의 관계와 권력의 암투 과정, 당쟁과 세도 정치 사이에서 풍전등화와 같았던 조선의 왕들은 인간적인 면에서 보면 동정의 눈길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이라는 말로 대표되는 왕의 지위는 인간과 하늘의 매개자의 위치에 놓여 있다. 일반 백성들의 입장에서 보면 왕조시대는 끔찍했을 것이다. 장자라는 이유만으로 한 나라를 책임져야 했고, 가신들의 권력 투쟁 과정에서 독살 되기도 했던 조선의 왕들은 백성들과는 무관한 저 높은 곳의 무소불위의 존재였다.

  스물일곱 명의 왕 중에서 뛰어난 능력과 훌륭한 인격을 겸비한 왕을 우리는 얼마나 손꼽을 수 있을까? 조선 왕조 500년을 통틀어 최고의 르네상스였다고 평가받는 세종과 정조 정도를 제외하면 객관적인 평가 자체가 무의미하다. 물론 개인적인 능력만을 놓고 평가하는 것은 역사적 상황과 맥락을 무시한 바보 같은 짓이다. 하지만 피맺힌 한을 가슴에 담고 위정자들에게 억눌려 살았던, 자신의 운명을 온통 그들에게 내맡겨야 했던 백성들의 한숨과 눈물이 먼저 떠오르는 이유는 무얼까?

  이 책은 단편적인 역사적 사건들이 머릿속에서 맴도는 사람들에게 구슬을 꿰는 실과 같은 역할을 해 줄 것이다. 구체적이고 자세한 상황들을 모두 설명해 줄 수 없는 한계가 있는 대신 태조부터 순종까지 조선 왕조 전체를 조망하고 있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저자의 개인적인 견해와 해석, 평가 보다는 객관적인 사실들의 전후 관계와 인과 관계를 연결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는 특징도 지니고 있다. 한마디로 통시적인 관점에서 조선왕조 전체를 일괄할 수 있는 책이다.

  최근 몇 년 동안 미시사가 각광을 받았다. 어쩌면 당연한 흐름이다. 구체적인 역사, 생활 속의 역사, 민중들의 역사, 여성의 역사가 우리의 삶이고 과거라는 것은 자명하다. 위정자 중심, 승리자 중심, 왕권 중심의 역사라는 본류를 무시할 수 없지만 진정한 역사의 주인공들이 되외시 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한국생활사박물관>이 그래서 주목을 받았고 최근 이덕일의 저작들이 주목받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신명호의 <조선 왕비 신록>은 이 책과 좋은 짝이 될 만하다. 남성이 있다면 인류의 절반은 여성이다. 왕이 있으면 왕비가 있다. 당연한 이치지만 왕을 둘러싼 권력의 승계와 암투에는 왕비의 역할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간과한 것이 아닐까? ‘조선 왕조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선의 왕비들을 이해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두 책은 비교해가면서 읽을 수 있는 흥미 있는 관계에 놓여있다. 서로 다른 저자의 책이지만 다른 방식으로 왕조의 역사를 다루고 있어 서로 보완하며 읽을 만하다.

  왕들의 삶은 결코 행복했다고 보기 어렵다. 왕이 되기 위한 첫 번째 관문인 세자 책봉에서부터 왕위에 오르기까지의 교육과 권력 투쟁의 소용돌이는 한 인간의 삶이라는 측면에서 결코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왕위에 오르더라도 자신의 뜻과 이상만으로 조선을 통치할 수도 없었고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으나 백성들의 삶과 국가 전체의 운명을 뒤흔들만큼 일사분란하게 영향을 미칠 수도 없었다. 국내외 정세와 정치적인 상황들이 한 개인의 능력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으나 절대 고독과 개인적인 고뇌를 느끼며 운명을 달리했던 수많은 조선의 왕들을 하나씩 살펴 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널리 알려진 일반적인 사실들의 나열과 대표적인 사건들 중심의 전개라는 특징 없는 책이라는 아쉬움도 남는 책이다. 그래도 조선왕조와 세계사를 비교한 연표나 당쟁의 출발과 전개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부분들은 개인적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다.

  한국사에 남겨진 조선 왕조의 뚜렷한 족적들은 결국 근현대사에 어두운 그림자로 이어진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먼 과거의 미래였다. 미래의 과거일 오늘을 사는 우리의 삶은 그래서 더 조심스러운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지금 우리의 역사는 대통령과 정부의 역사가 아니라 이 땅에 발 딛고 서 있는 사람들 모두의 역사이다. 21세기의 역사를 우리는 지금 여기에 발로 써 나가고 있는 것이다.


080316-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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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
강명관 지음 / 푸른역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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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된 책은 삭는다. 시간은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물질적으로 동일한 것은 없다. 매 순간 변화하여 예전의 그것과 같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더욱 그러하다. 끊임없이 새로운 세포가 생겨나고 죽고 변화하여 이전의 그 사람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영혼의 경우는 말한 필요도 없다. 생각이 변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지만 헛소리다. 모든 인간의 모든 생각은 매 순간 급격한 변곡점을 갖는다. 대저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이제는 책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수준을 넘어 책에 미친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인터넷은 세상을 바꿔 놓았다. 네트웍 세상에선 ‘No network, no work’이라는 말에 공감이 갈 때도 있다. 모든 정보는 열려 있는 듯하지만 열린사회가 아니라 닫힌 사회라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실감한다. 정보화 시대에 정보의 고립 속을 헤매기 쉽다. 책은 또 다른 정보와 지식을 전해주는 단절된 네트웍이 되어 간다. 100년, 아니 50년 전의 세상만 상상해 보아도 책이 지니는 의미와 역할은 전혀 달라질 것이다. 그만큼 세상은 급격하게 혁명적 변화를 맞이하며 속도를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변해간다.

  이런 시대에 책 이야기가 유효하다면 과거에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예전에 책은 지식과 정보에 대한 독점적 지위를 확보하고 있었다. 한문을 읽고 쓸 줄 모르는 대다수 백성들은 지식과 정보에 접근하는 일조차 불가능했고 접근할 필요도 없었다. 그들만의 리그에서 살아남기 위한, 혹은 맹목적 열정주의는 슬프기도 하고 때론 아름답게 보이기도 한다. 강명관의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는 조선시대 책에 관해서 껌 좀 씹고 침 좀 뱉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아 놓은 책이다. 책을 좋아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충분한 호기심과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한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금속활자로 혁명의 완성을 꿈꾸었던 정도전에서 신채호의 영어 발음에 관한 에피소드에 이르기까지 시대 순으로 인물들을 나열했다. 밥상 좌우에 책 두 권을 펼쳐 두고 읽었다는 세종이나 광적인 수준으로 책 수집에 열을 올린 유희춘이나 책을 탄압하면서 학문을 좋아했던 이중적인 정조, 책만 읽는 바보 이덕무의 이야기 등 조선 시대를 대표할 만한 ‘책벌레’들의 이야기가 재미있다.

  또 하나의 즐거움은 강명관의 말투다. 시니컬하면서도 삐딱하다. 예를 들어 ‘백성과 독서물’ 즉 ‘책을 읽는 행위’와 ‘책을 읽는 백성’을 연결시킬 만한 상상력이 부족했던 지배층의 이야기는 새로운 시각으로 시대를 바라보게 한다.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여도 제 뜻을 제대로 밝히지 못하기 때문에 한글을 만들었다는 세종의 훈민정음 반포 이유는 진심이었을까? 다른 지배층도 그렇게 백성들을 극진히 염려했을까? 한문은 지배층이 백성들에게는 한글을 가르치려는 이중적 태도는 아니었을까? 꼬리를 무는 생각들은 이 책을 읽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시대를 넘어서 책에 미치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그 계기와 방법은 다르지만 항상 있어왔고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정도의 차이를 쉽게 측정할 수 없지만 한 번 빠지면 헤어나기 힘든 중독성을 지닌 것이 책이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수많은 고민들은 이미 철지난 유행가처럼 책 속에서 불리우고 새로운 고민과 통찰들을 번득이는 무림의 고수들의 칼날에 베여도 아픈 줄을 모른다. 조금 더, 조금 더 하면서 갈증과 안타까움은 깊어만 간다. 끝이 없는 호기심과 지적 욕구는 사람을 황폐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역사는 이런 미친 책벌레들이 만들어왔다고 저자는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역사를 누가 만드는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책벌레들이 만든다고 답할 것이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언어화되어 있고, 그 언어를 담아 유포하는 것이 바로 책이기 때문이다. - P. 23

혁명은 무엇으로 완성되는가. 무력에 의해 혁명은 일단 성공하지만, 그 성공이 곧 혁명의 완성은 아니다. 혁명이 내세운 이데올로기가 사회 구성원의 대뇌에 온전히 장착되고, 그 이데올로기에 따라 사고하고 행동하는 인간이 다수 출현했을 때 비로소 혁명은 완성된다. - P. 24


  책 속에 숨은 비밀과 책을 둘러싼 음모와 책을 통해 드러나는 진실들은 어떤 드라마나 영화보다도 극적이고 때로 열광의 도가니에 빠져들게 한다. 나만 그런가? 세상에 책을 좋아하는 수많은 사람들과 공감하며 낄낄대며 살아가고 싶다. 인생은 살아갈수록 덧없고 욕망은 사그라들며 허허로운 가슴은 끝간 데를 모른다. 책이 만병통치약은 아니지만 조용히 손을 내밀고 어깨를 토닥여 줄 때가 있다.

  책보다 더 즐거운 일이 있다면 기꺼이 그 일을 하겠다는 버트런드 러셀의 말은 오만에 가깝다. 책이 그리 좋은가?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사람들에게 이 책은 조용한 미소로 답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스스로를 다잡고 마음을 집중시키는 반성의 계기도 제공할지 모른다. 아니면 책과 관련된 정신 나간 사람들의 기이한 이야기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맹목적인 연암에 대한 숭배를 넘어선 평가나 허균의 이야기 등 책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과거로 여행을 떠나고 싶다면 이 책은 좋은 길잡이 역할을 할 것이다. 명쾌하고 깔끔한 문장으로 맛깔스럽게 이야기를 풀어내는 저자의 솜씨도 빼놓을 수 없는 여행의 즐거움이다.


071104-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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