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1 | 1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축구의 문화사 살림지식총서 90
이은호 지음 / 살림 / 200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유럽에서 축구는 다른 대륙에 비해 조금 더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특별한 의미란 단순한 스포츠를 넘어 사회 문화적 관점을 말한다. 영국에서 시작된 축구가 국가별로, 리그별로 독특한 색채와 나름의 경기 방식에 따라 운영되면서 각 나라의 문화적 전통과 깊은 관계를 맺게 된다. 이탈리아의 세리에 A, 스페인의 프리메라리가, 독일의 분데스리가, 영국의 프리미어 리그는 세계 4대 리그로 전 세계 축구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남미와 아시아, 아프리카 각국의 스타 플레이어들이 모두 이들 리그에서 활약하고 있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자국의 선수를 응원하고 가장 수준 높은 경기를 관람하는 두 가지 즐거움을 동시에 가지게 된다.

한국의 K-리그가 우리 국민들에게 주는 의미는 아주 미미하다. 지역 연고를 통해 프로구단들이 자리 잡는 데는 한계가 있어 보인다. 먼저 시작한 프로야구와 연고가 겹치기도 하고 서로 경쟁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또한 두 스포츠의 관중이 겹치는 문제도 있다. 어쨌든 2002 월드컵 이후 축구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집단 광기라는 오해 아닌 오해를 불러 일으킬만큼 열광적이다. 부분적인 열광이 전체의 축제로 확산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이 축구가 갖는 가장 큰 매력이고 장점일 지도 모른다. 우리에게도 이제 축구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재미가 된 것은 분명한 듯하다.

유럽에서 축구는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라 역사이고 문화이다. 영국과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의 프로 리그는 깊은 역사와 전통을 바탕으로 서로 경쟁적 발전 관계에 있다. 챔피언스리그나 각종 컵대회에서 자국의 이익과 애국심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클럽의 명예와 지역팬들의 열광적인 응원을 발판으로 성장한 리그는 끊임없는 경쟁과 발전을 거듭하면서 축구를 진화시키고 있다. 이 리그들의 운영 방식과 특징들은 물론 그 나라의 특성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하지만 거대 자본과 결합되어 커다란 산업이 되어버린 지금 이 클럽들은 리그를 대표하는 하나의 팀이 아니라 다국적 기업을 연상시킨다.

‘CU@K리그’라는 문구를 창안했던 붉은 악마 출신의 이은호가 쓴 <축구의 문화사>는 유럽의 명 리그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라이벌 팀에 대한 소개로 이루어져 있다. 레인저스와 셀틱, 로쏘네리와 네라주리, AC 밀란과 인터밀란, 아스날과 토튼햄, 마르세이즈와 파리지엥, OM와 PSG 가 그것이다. 유럽의 명문 클럽이면서 라이벌 팀인 이들은 정말 다양한 이유 때문에 라이벌이 되었고 뿌리 깊은 역사를 지니게 되었다. 종교, 인종 등 축구 이외의 정치적 요소와 지역간의 갈등 등 복합적 문제들이 겹쳐져 있다. 인간이 모여 사는 곳에 벌어질 수 있는 많은 갈등과 모순들이 축구에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축구는, 특히 열광하는 관중들은 선수들의 몸놀림과 경기 자체만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는 지극히 당연한 의미들을 읽어내게 된다.

한국 대표팀을 이끄는 아드보카트 감독이 글래스고 레인저스에서 5번이나 우승을 차지한 경험이 있어 그곳으로 날아갔는지 알 수 없으나 그곳 사람들에게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비쳐질지도 궁금하다. 개신교냐 카톨릭이냐 그것부터 묻지는 않겠지만 상당히 궁금하겠다. 바람직하지 않은 전통은 없어져야 하겠지만 쌓여온 시간과 역사를 하루 아침에 청산하는 것은 하늘의 색깔을 바꾸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축축한 공기만큼 땀냄새가 그립다.

미친 듯이 격렬하게 몸을 움직이고 땀을 흘려본지가 얼마나 되었나?


060529-06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축구는 어떻게 세계를 지배했는가
프랭클린 포어 지음, 안명희 옮김 / 말글빛냄 / 2005년 3월
평점 :
품절


세계화 이후에 벌어지게 될 현상들에 대해 우리는 많은 고민을 해왔고 앞으로도 계속 해 나갈 것이다. 지금 이순간도 한미 FTA의 영향에 대해서 모두가 입다물고 있다. 몇몇 시민 단체에서 주장하는 반대의 목소리도 최근의 경기불황과 높은 실업률의 결과 숨죽여 지켜보고 있다. 그 달콤한 장밋빛 미래에 대해 환상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닌지 냉정하게 돌아보아야 한다. 한미 FTA 이후 벌어질 후폭풍과 파장에 대해서 우리는 너무 무감각한 것은 아닐까 싶다. 세계화라는 미명아래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미제국주의에 의한 자본주의의 검은 그림자는 우리의 미래를 암울하게 하고 있다. 그 혜택과 결과가 모두에게 나눠질 수 있다면 더 없이 달콤하겠지만 캐나다의 경우처럼 서서히 사회복지와 사회 안전망의 부실로 이어질 수 밖에 없는 구조적 필연성을 가져오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더구나 우리는 사회 안전망 자체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화는 우리에게 긍정적이고 밝은 미래보다 불안한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지나치게 부정적인 견해가 아니라, 세계화는 거대 자본에 의한 양극화의 심화를 기초로 하고 있다. 어떻게 볼 것인가는 개인적 견해가 아니라 지금 진행되고 있는 현상들이 말해준다.

축구를 세계화와 관련지어 살펴보는 일은 아니러니하다. 우울한 세계화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스포츠, 특히 축구의 미래는 더 암울해 보인다. 저널리스트인 프랭클린 포어가 쓴 <축구는 어떻게 세계를 지배했는가>는 세계화의 관점에서 축구를 바라본다. 축구라는 경기 자체를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축구가 벌어지기 직전과 직후의 이야기들이다. 말하자면 구단의 운영과 자본의 힘들이 어떤 식으로 경기와 직간접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지 들여다 보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발로 쓴 책이라는 점이다. 전세계를 돌면서 훌리건에서부터 구단 관계자들까지 직접 취재를 통해 현장감 높은 글로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전해 준다. 축구에 관련된 책이라기 보다는 축구를 통해 바라보는 세계화의 그늘을 보여준다. 세계적인 선수와의 인터뷰나 경기 결과와는 거리가 좀 멀어져 보인다. 한 권의 책이 하나의 목적으로 묶일 수 밖에 없는 아쉬움이지만 이 책이 지닌 가치는 그것으로 충분해 보인다.

세르비아 서포터스의 민족주의를 보여주는 ‘갱스터들의 천국’을 비롯해서 셀틱과 레인저스의 종파 전쟁, 현대 유럽의 유대주의와 반유대주의, 영국의 훌리건과 브라질의 정치부패, 우크라이나 선수들 사이의 인종차별, 이탈리아의 검은 커넥션, 중동에서 축구가 갖는 의미를 적절한 인터뷰와 취재를 통해 객관적으로 보여준다. 축구를 중심축으로 전개하고 있는 내용들이 본질적으로 경기를 움직이는 제반요소들과 관련된 것들이기 때문에 또 다른 시선으로 축구를 바라보게 해주는 역할을 할 수 있는 책이다.

미국인이 저자의 한계가 드러나는 것은 사족처럼 붙어있는 마지막 장이다. 미국은 슈퍼볼의 나라다. 다른 나라와 달리 상류계층의 스포츠로 인식된 축구가 미국의 문화와 충돌하면서 분열을 일으키고 있는 모습을 주관적인 아쉬움으로 보여주는 장은 이 책의 티가 된다. 자국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겠지만 세계화를 논하는 미국인의 목소리를 일단 색안경을 끼고 보게 되는 나쁜 버릇이 있는 나로서는 더더욱 의심의 눈초리를 거둘 수가 없다.

이 책에서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FC 바로셀로나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앞서 <축구의 역사>나 <축구의 문화사>에서도 살펴 보았으나 프랑코 군사 독재에 맞서 누 캄푸 경기장에 모인 카탈류냐인들의 열정이 전해졌다. 바르샤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팀에게 소수 민족의 한과 열정이 어떤 식으로 표출되었을지 상상이 간다. 유니폼에 상업광고를 거부하는 그들의 축구에 대한 자부심은 단순한 경기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문화와 정신적인 자유를 상징하는 바르샤의 전시장과 축구에 대한 그들의 자부심은 국경과 민족을 초월해서 감동을 전해준다.

지금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총성없는 전쟁에 비유되는 축구가 총성과 직접 연결되는 사건들을 살펴보고 그 추악한 이면을 드러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축구를 통해 부를 축적하고 정권을 창출한 이탈리아의 베를루스코니를 어떻게 볼 것인가는 축구팬들 각자의 몫이다. 축구 경기에서 승리는 팬들의 기본적인 욕망이고 90분간 선수들이 보여주는 몸짓 하나 하나는 삶의 열정과 분노와 좌절, 환희와 기쁨을 고스란히 전해준다. 그 경기를 보다 재미있게 그리고 온몸으로 즐기기 위해서 축구 이외의 요소에 대해 눈감는 지혜보다 축구 너머에까지 애정과 관심을 갖는 것은 어떨까? 아는만큼 보이거나 모르는게 약이거나!

어쨌든 <축구는 어떻게 세계를 지배했는가>는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축구를 선택했다. 아니 축구도 결국 인류의 역사와 사회문화적 관점을 떠나서는 이해될 수 없다는 외침으로 들린다. 4년에 한 번 벌어지는 전세계인의 축제임에 틀림없는 월드컵이 ‘세계화’를 부르짖는 외침으로 들리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오늘 실시한 지방의회, 기초단체장 선거에서 한나라당이 싹쓸이 했다고 해서 ‘이민’이 대안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축구는 계속 될 것이고 인류의 역사도 계속될 것이므로! 민노당이 승리하는 그날까지! 논리의 비약인 모든 주절거림조차도 더운 날씨 탓으로 돌리면서 시원한 맥주나 한 잔!


060531-06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커피 이야기 살림지식총서 89
김성윤 지음 / 살림 / 200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투명한 유리잔에 커피를 마신다. 인스턴트 커피로 ‘테이스터스 초이스 부드러운 블랙 오리지날’이다. 이제 커피믹스는 대부분의 한국 사람이 즐기는 음료가 되었다. 이 커피믹스는 커피와 설탕과 크림의 혼합비가 1 : 3 : 2로 소위 다방커피라 불린다. 커피가 전 국민의 기호식품이 되는데 기여한 일등공신은 당연히 커피믹스다. 동서식품에서 세계 최초로 개발한 커피믹스는 불과 40여 년 만에 전 국민을 커피잔에 빠뜨렸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커피는 그만큼 우리 생활의 일부가 되어버린 중요한 필수 기호 식품이 되어버렸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커피에 중독된 사람들은 하루 한 잔으로는 택도 없다. 커피를 마시는 이유는 담배를 피우는 이유처럼 다양하다. 맛 때문에, 혹은 분위기에 맞추어, 혹은 특별한 대안 음료가 없어서…… 그러나 가장 큰 이유중의 하나는 카페인 성분 때문이다. 담배의 니코틴 성분만큼 중독성이 강하지는 않지만 각성 효과를 주기 때문에 머리가 맑아지고 기분이 상쾌해지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래서 일찍이 이슬람문화권에서 시작된 커피는 본래 약재로 쓰였다. 만병통치약처럼 영험한 효과가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후 유럽과 인도네시아, 남미로 확산되면서 세계인의 음료가 되었다. 이제 커피는 단순한 기호식품이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의 문화와 고유한 생활방식과 결합되어 독특한 맛과 향을 발하고 있다.

우리가 마시는 커피는 보통 로부스타라고 하는 싼 커피로 맛과 향에서 질이 낮다. 맛과 향이 좋지 않다는 것은 커피 원두인 체리가 잘 익지 않았거나 건조과정과 볶는 과정인 로스터 과정에서 구별되기도 한다. 아라비카라고 하는 고급 커피는 당연히 맛과 향이 뛰어나다. 고추를 말리는 방식과 유사한 건식법이 아니라 12.5%의 적정 수분을 유지하고 커피 원두를 상하지 않도록 습식법으로 건조시켜 풍부한 맛과 다양한 향을 만들어낸다. 커피의 귀족으로 불리우는 아라비카는 고산지대에서 적당한 온도와 햇볕을 받고 자란 연약한 커피를 말한다. 우리가 흔히 즐기는 로부스타 커피와는 태생부터 다른 것이다. 자메이카의 블루마운틴이 대표적인 커피다.

1999년 스타벅스 이대점이 오픈하면서 바야흐로 제 2의 커피 전성시대가 도래했다. 대학시절 한끼 식사를 해결할 수 있었던 자장면과 라면의 가격을 훌쩍 뛰어넘는 에스프레소 커피 한 통씩을 손에 들고 다니며 마시는 장면을 어렵지 않게 마주하게 된 것이다. 에스프레소는 이탈리아말로 빠르다는 뜻으로 뜨겁고 강한 압축기에 의해 커피 원두를 순간적으로 걸러낸다. 물론 여기에 우유를 섞고 휘핑크림을 얹거나 캐러맬을 혼합한 커피를 대부분의 사람들 선호한다. 테이크 아웃 커피 위주인 스타벅스는 우리나라에서 매장에서 마시고 갈 수 있는 분위가 더 선호된다.

차와 커피는 대화를 이끌어주기도 하고 한가로움을 같이하는 친구가 되기도 한다. 하나의 문화현상이자 실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커피가 주는 즐거움은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이해할 것이다. 하지만 커피에 대한 지식이 맛을 배가시키지는 않는다. 하지만 깊은 이해는 깊은 애정을 낳는다. 특히 계절과도 깊은 상관관계가 있는 것이 모든 음식의 특징이 아닐까 싶다. 비오는 날은 커피의 향이 특히 진하고 강하게 느껴진다.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며 연인과 마셨던 자판기 커피 한 잔의 추억은 강렬한 미감으로 남겨지는 것이다.

커피 탄생의 간략한 역사와 제조 과정 그리고 각 나라의 커피 문화를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는 책이지만 매일 마시던 커피에 대해 궁금한 독자라면 왼손에 <커피 이야기>를 오른손에 커피 한 잔을 들고 읽을 만한 책이다. 다만,

커피의 맛뿐만 아니라 커피를 재배하는 사람들의 땀, 커피 생산을 위해 희생되는 환경에 대해서도 한 모금쯤 음미해 보는 것이 어떨까. - P. 85

는 말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공정거래 커피에 대한 의미를 돌아보게 한다. 커피 1잔당 4원이라는 잔인한 가격은 커피 재배 노동자들의 땀을 착취하고 있다. 대규모 중간 거래상과 다국적 로스터들이 대부분의 수익을 거둬가는 자본의 논리는 커피에도 여지없이 적용된다. 노동자들의 최저 생계비를 지불하고 구입했음을 인증해주는 공정거래 커피가 널리 확산되길 바랄 뿐이다. 자본주의는 결국 소비자의 손에 의해 좌우되는 구조일 수밖에 없다. 올바른 소비자 운동과 더불어 커피의 맛을 잃지 않길 바란다. 물론 차가 아니라 커피를 고집하는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말이겠지만.


060714-07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화의 기원
르네 지라르 지음, 김진식 옮김 / 기파랑(기파랑에크리) / 2006년 6월
평점 :
절판


‘단 하나의 주제에 대한 기나긴 논증’이라는 저자의 서문은 르네 지라르의 가장 중요한 이해의 척도다. 내용보다 서문의 제목이 눈에 선명하다. 각 장에서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을 인용한 것은 저자의 다윈에 대한 존경심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문학에서 비롯된 지라르의 지루한 여정은 인류학을 넘어 문화의 기원으로까지 확산된다. 그가 말하는 <문화의 기원>은 물론 그가 지금까지 주장해온 희생양과 모방적 욕망에 대한 정리 작업에 해당된다.

그러나, 머나먼 옛 이야기를 경청하듯 그의 말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문화의 기원’을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대담집 형식으로 되어 있는 이 책을 읽다보면 무수한 의문들과 부딪치게 된다. 케임브리지 대학 이탈리아어과 교수인 피에라올로 안토넬로와 리우데자네이루 대학 비교문학 교수인 조앙 세자르 데 카스트로 로크는 르네 지라르와의 대담을 통해 그가 지금까지 이룩한 학문적 성과를 정리하기 위한 질문들을 던진다. 물론 논쟁적 질문과 그에게 반기를 들었던 학자들의 견해를 인용하기도 한다. 지라르는 첫 저서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을 비롯해서 <폭력과 성스러움>등을 통해 보여주었던 일관된 주장을 하나의 흐름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희생양과 모방적 욕망에 대한 끈질기고도 집요한 탐구의 결과물들이다.

기독교를 통해 본 예수의 모습은 지라르에게 집단의 폭력과 무책임한 모방에 대한 희생양으로 인식된다. 그가 말하는 예수의 모습을 한 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조심스럽다. 다양한 문화적 풍토와 인간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무의식들을 확인하는 작업은 어쩌면 현재형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인류가 쌓아온 수많은 역사적 사건과 인간의 행동들을 토대로 그가 읽어내고 싶었던 것은 당연히 인간과 사회적 관점에서 바라본 ‘폭력’이다. 그것을 읽어내는 방식에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렵다. 특히 에피큐러스 학파를 제외한 무신론에 대한 언급과 이슬람 문화권에 내재한 폭력적 성향을 최근의 9.11테러와의 관련성 측면에서 해석하는 이야기들은 논란이 많을 수 있다. 종교와 폭력을 상징적으로 이해하는 방식은 정답이 있을 수 없다. 논의의 주변부에서 핵심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나같은 얼치기에게도 많은 문제점이 보인다. 무엇이 문제인지는 스스로 확인할 일이다.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을 모방한 제목 <문화의 기원>은 폭력과 희생양에 대한 모방이론을 토대로 지속되고 있는 르네 지라르의 작업에 대한 총결산에 해당된다. 인문학적 관심의 정점에는 항상 현실이 자리잡아야 한다고 믿는다. 아카데미 프랑세즈 ‘불멸의 40인’에 선정됐다는 옮긴이의 친절한 해설은 그의 주장과 이야기에 권위를 부여할 수는 있겠지만 그의 주장에 대한 논쟁점들을 제공하지는 못하고 있다. 특히 한국어판을 위해 뒤에 덧붙혔다는 레지 드브레에 대한 반론은 ‘레지 드브레’의 글을 읽지 않은 상태의 나에게는 무용지물이었다. 지라르가 반박하는 글임에도 불구하고 레지 드브레의 글에 흥미가 생겼다. 지나친 반골 기질 때문일까?

흔히 우리들 주변에서 발견할 수 있는 현실의 문제들을 ‘세상의 기원’을 탐구하기 위한 지라르의 견해와 연구를 통해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여기서 말하는 세상의 기원은 인간의 기원으로 바꾸어 이해해도 상관없다. 아니, 인간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에 대한 기원을 탐구해온 저자의 목소리로 이해해야 좋을 것 같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속성과 지나온 시간들과의 싸움은 언제나 지루하고 공허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한 권의 책과 한 명의 천재적인 인간이 통찰해낸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전해줄 수 있을 것인가. 학문의 의무와 역할에 대한 새삼스런 의문이 쏟아진다. 나름의 방식으로 세상을 판단하고 재단하는 모든 개인들에게 ‘객관’과 ‘주관’의 기준이 있기는 한 것인가. 숭산 스님의 말대로 오직 모를뿐!인가.

세상의 기원이든 문화의 기원이든 지금도 여전히 우리들 주변에 널려 있는 희생양들과 모방적 욕망에 대한 그의 견해에는 동의할 수밖에 없다. 다만 그것을 논증하는 방식에 대한 논의는 그들의 몫이다.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욕망의 부피와 크기를 확인하는 일보다 더 큰 고통은 없다. 그 고통이 타인의 고통을 통해서라면 더욱 암담하다. 발딛고 서 있는 현실의 모순들을 해결해 줄 수 있는 특별한 처방이 아니라 그 모순들을 확인하는 1차적 과정 자체에 목적과 의미를 둔다는 측면에서만 이 책은 나에게 의미가 있다.


060802-08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1 | 1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