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생활사박물관 3 - 고구려생활관 한국생활사박물관 3
한국생활사박물관 편찬위원회(3권) 지음 / 사계절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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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고칠 수 없는 본능 중 하나는 타인에 대한 분노와 증오다. 안으로 향하는 눈이 없어서다. 거울을 보면서도 자신을 들여다보지 않는 인간의 숫자는 얼마나 될까. 항상 남의 탓이다. 한 인간에 대한 관찰과 평가가 쉬운 한 마디로 대체되거나 편견과 선입견이 되어 버린 말들은 고정된다.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는 탓이다. 나와 타인과의 관계망은 그렇게 쉽고 간단하지 않다. 그 끝없는 미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 과연 시간만일까?

  인간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증오가 국가 차원으로 확대된 것이 전쟁이다. 물론 생존권 확보를 위한 동물적 본능에 의한 투쟁이 발단이 되었을 수도 있으나 이후 인간들은 끊임없이 싸워왔다. 항상 너를 탓하면서. 우리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지녔었고 호전적이고 적극적이며 자유로운 기상을 지녔다는 고구려의 멸망도 전쟁에서 비롯된다. 어느 쪽이 먼저였을까는 중요하지 않다. 국가의 존립마저 뒤흔들어버리는 갈등은 개인이든 국가든 크게 다르지 않다. 개인의 인간성이 파괴되듯 국가는 멸망에 이른다.

  고구려의 벽화에서는 특이한 두 신이 등장한다. 야철신과 제륜신이다. 야철신은 철과 도구를 담당하는 신으로 그리스나 로마신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만 바퀴를 관장하는 제륜신은 독특함을 지니고 있다. 당시 수레를 통한 운송 수단의 발달을 보여주는 증거다. 수레는 단순히 많은 물건을 손쉽게 운반할 수 있다는 인간의 지혜를 넘어서 삶의 터전과 공간을 극복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를 지닌다. 유목과 정착의 문제가 아니라 자유가 문제다. 떠나고 싶을 때 떠날 수 있는 자유 말이다. 직경 1.5미터가 넘어 보이는 바퀴는 2천 여년 전 작품으로 믿어지지 않을 만큼 찬란한 발명이다.

  왕과 귀족이 사는 성안과 성밖 사람들의 구분이 생겨나고 세금 징수가 시작되면서 인간은 끊임없이 행복해졌을까? 복잡하고 정교한 통치수단과 민중들의 삶의 모습은 반비례 관계에 있다. 벽화에 그려진 왕과 귀족들의 생활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항상 주변에 작게 그려진 사람들이다. 능력과 신분이 일치하지 않았음을 우리는 많은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교육과 예술 분야에서도 탁월한 진전을 보인 고구려는 이제 본격적인 인간 사회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된 후 예술이라는 것이 생겨난 측면도 있지만 삶의 과정 속에 드러난 부분들이 실용성을 배제한 채 본격 예술도 등장하기도 했다.

  고분에 그려진 고구려인들의 생각은 지금도 비슷하다. 인간의 끊임없는 욕망이다. 죽어서도 잘 먹고 잘 살고 싶은 욕망. 많은 부장품과 고분 천장의 그림이 그것을 말해준다. 청룡, 백호, 현무, 주작 등 각각 방위를 담당하는 동물들의 역할은 사후 세계에 인간의 두려움과 믿음을 더욱 공고히 해 주었을 것이다. 어둔 밤하늘을 바라보며 반짝이는 별들을 관찰했던 선조들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지금 우리들이 바라보는 하늘과 달랐을까? 무덤에 그려진 별 그림들은 지금과 많이 다르지 않다. 다만 명칭과 위치가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그 별들을 묶어내고 관찰하는 방식은 지금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죽어서 하늘로 간다고 믿은 것인지, 하늘로 가는 싶은 욕망을 드러낸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광개토대왕비문 해석을 놓고 아직도 일본과 견해가 다르다. 많은 설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정답과 결론을 내리지 못한 상태다. 불행했던 일제강점기에 발견된 비문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 해석과 의견에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살아보지 않은 과거를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아 보인다. 경험에 보지 못한 상황들과 감정들에 대해 더 크게 떠들고 있는 현재 우리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민족의 자부심과 영토에 대한 아쉬움의 그림자를 짙게 드리운 나라 고구려는 국가와 민족이라는 의미 이전에 일반 백성들의 입장에서 어떤 모습과 구체적인 형태의 삶에 영향을 미쳤는지 다시한번 생각하게 한다.

  역사는 어떤 모습으로든 존재한다. 그것이 기록으로 남든 그렇지 않든. 개인이든 국가든. 지나온 시간과 쌓아온 세월에 대한 흔적들은 고스란히 사람과 사람들 사이에, 그리고 국가와 민족의 이름으로 남겨진다. 객관성이라는 성격 자체가 역사에서는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 다만 사실을 확인하고 그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하는 방식들은 지금도, 여전히, 개인이든 국가든 반복되고 있다. 정답이 있겠는가. 이기적 유전자를 지닌 인간들의 반복된 습관인 것을. 소크라테스의 말이 떠오르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너 자신을 알라’

060123-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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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신화의 수수께끼 - 아주 오래된 우리 신화 속 비밀의 문을 여는 30개의 열쇠
조현설 지음 / 한겨레출판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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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화가 가지고 있는 상상력은 예술적 상상력의 원천이다. 인류가 이룩해 온 역사와 신화는 이성의 차원이 아니라 인간의 꿈과 소망, 무의식과 욕망이 뒤섞인 본질적인 모습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신화 속에 감추어진 각 민족의 정체성은 민족과 국가를 형성하는 기원과 바탕 틀이 된다. 인류의 예술적 상상력은 여기서 출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민족의 기원과 결속을 다지고 지역사회의 일원으로 이야기를 공유하는 내밀한 관계가 형성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신화는 인류의 과거이며 현재이고 영원한 미래이다.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가 성공한 이유는 쉽게 풀어썼기 때문이다. 어렵고 복잡해서 신들의 이름이나 몇 명 외다가 책장을 덮어 버리던 이야기를 ‘신화를 이해하는 12가지 열쇠’로 풀어낸다. 저자의 신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열정이 숨어 있고 탄탄한 문장과 이해하기 쉬운 문장 구성으로 사람들에게 성큼 다가선 신화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후 신화에 대한 관심은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만화로 출간된 ‘그리스 로마 신화’는 상업 출판물이라는 여러 가지 문제점을 제외하더라도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서양 중심의 신화가 이토록 열풍을 일으키는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이야기’ 자체에 대한 관심과 흥미는 인간의 본능적 속성에 해당한다. 그것을 말릴 수는 없다.

  조현설의 <우리 신화의 수수께끼>는 편집의도와 구성면에서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를 벤치마킹하고 있다. ‘오래된 우리 신화 속 비밀의 문을 여는 30개의 열쇠’라는 부제도 그렇거니와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도 그러하다. 표절이나 아류 시비는 아니지만 다른 접근 방식에 대한 고민이 아쉽다. 더구나 우리 신화는 보편성과 지역성이 강해 쉽게 공감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이 많다. 신화는 민간에서 전승되는 전설과 민담으로 정착되거나 변형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내용도 많고 같은 이야기의 다른 결말도 많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신화는 건국 신화가 대부분이다. 단군신화를 비롯해서 주몽, 혁거세, 석탈해, 김수로 등 건국과정에서 민족의 자긍심과 우수성을 나타내는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달래산’이나 ‘달래내 길’ 등에 얽힌 오누이 설화와 홍수 설화, ‘바리데기’ 설화 등은 신화로 명명되어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하고 있다.

  두 마리 토끼를 잡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 책은 우선 우리 민족에게 잠재해 있는 신화소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다. 국가 형성 이전에 민족과 부족 간에 공유했던 변형된 이야기들은 유사성과 차별성을 지닌다. 우리 신화에 잠재된 ‘신화의 수수께끼’를 풀어내는 첫 번째 열쇠는 이렇게 주변 민족과 유사 공통체를 이루었던 이민족들의 신화에서 찾을 수 있다. 변형과 재생을 거듭한 신화는 그 전승과정과 욕망의 과정을 나타내는 적나라한 증거의 역할을 한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최초의 시도이자 훌륭한 아내자의 역할을 한다. 특히, 제주도의 신화에 대한 이야기들은 우리 신화의 다양성과 풍부함에 대한 즐거움을 배가 시킨다. 익숙한 신화든 처음 듣는 신화든 논리의 비약과 과장된 결론이 이끌어내는 호기심과 궁금증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찾으려는 과정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다.

  그러나 저자의 문장을 소설가이자 번역가인 이윤기의 문장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부적절하지만 재미있지 않다. 오랫동안 신화를 연구한 학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신뢰성과 차분하고 꼼꼼한 면을 찾을 수는 있지만 신화의 특성인 상상력과 흥미로움의 세계로 안내하지는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대중성과 아카데미즘의 중간에 선 포즈가 어정쩡하다. 아쉬운 대목이다. 좀 더 쉽고 친근하게 할머니의 옛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편안하게 읽힐 수 있는 문장이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주제와 인물을 좀 더 거칠고 단순하게 묶어 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겠다. 시중에 나와 있는 여러 가지 형태의, 그리고 여러 종류의 신화 관련 서적 중에서 뛰어난 가치와 객관성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에 남는 아쉬움이다.

  통시적, 공시적 관점의 폭넓은 시야와 현대적 의미로 여성의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 등 신화에서 소홀하게 다루어질 수 있는 부분들에 대한 지적과 해석도 훌륭하다. 이윤기는 ‘그리스 로마 신화’가 단순히 한 민족의 신화가 아니라 인류 전체의 유산이라고 말하지만 그래도 훨씬 더 재미있고 다양한 우리 신화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우선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게 권할만?nbsp;책이다.


  저자의 말대로 “신화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종교 윤리가 아니다. 신화는 본질적으로 윤리 이전의 문제, 혹은 윤리 너머에 있는 것을 말하고 싶어한다.”는 면에서 신화에 대한 관심과 흥미는 당연할 수밖에 없다. 현실 너머에 존재하는 신화의 세계는 “윤리적 인간 뒤에 숨겨진 원초적 충동, 바로 그것이다.”


06022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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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리오 휴버먼 지음 / 책벌레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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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책의 조건은 카프카의 말대로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같은 역할을 해야한다고 믿는다. 새로운 깨달음과 각성의 순간을 가져다주는 불같은 열정을 되살린다. 선동적이고 자극적인 책과는 구별되어야함은 물론이다. 그 깊이와 사유 방식의 넓이에 압도당하는 책이 좋은 책이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

  개인적으로 2005년 최고의 책 한 권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없이 존 베리의 <사상의 자유의 역사>를 꼽는다. 리뷰에 코멘트가 달려 있는 것을 지금 확인했다. 두 개의 코멘트를 읽어보니 ‘사상의 자유’의 필요성을 다시 한번 절감한다. 한 개인의 인식의 틀은 교육에 의해서, 사회적 합의에 의해서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코멘트의 주인공들은 여전히 내재된 억압의 구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호환마마보다 무섭다는 이데올로기의 편향성. 중립국에서 살아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어느 한 쪽을 선택해야 한다는 논리도 이제는 낡은 유물이 되어 버렸다. ‘이명준’이 ‘타고르호’에서 겪었던 선택과 실존적 갈등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관점과 시선의 차이가 아니라 객관적 정보의 차단과 편향된 교육이 낳은 폐해는 무서운 결과를 낳는다고 믿는다.

  출판된 지 5년이 지나도록 이 책을 만나지 못했던 건 게으름과 관심부족, 정보에 뒤떨어졌거나 무식의 소치로 볼 수밖에 없다. 리오 휴버먼의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는 그런 것이 존재한다면, 필독도서 목록에 반드시 올려 놓아야한다. 좋은 책의 조건은 앞서 얘기했던 것 이외에도 많은 것들이 있을 것이다. 그 이외의 것들 속에 이 책의 의미가 숨어 있다. 이 책은 새로운 정보와 죽비 같은 깨달음을 주는 책은 아니지만, 서술의 능력의 탁월함을 보여준다. 어렵고 딱딱한 경제사를 사례 중심으로 ‘살아있는 자본주의 역사’로 풀어내는 능력은 순전히 저자의 탁월한 능력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21일자 한겨레 1면은 경제 교과서에 대한 여야의 논란이 장식했다. 건설적인 토론과 논쟁은 건강한 사회를 위해 꼭 필요하다. 그러나 그들의 의도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교육과정의 탄력적 운용이 가능하다면 이 책을 경제사 기본 교재로 채택하는 운동을 벌이고 싶다. 감정적인 접근 방식이나 절대적 지지만큼 위험한 선택은 없겠지만, 이 책은 그런 위험성을 감안할 만한 책이다.

  이 책의 미덕은 객관적이며 논리적인 서술에 있다. 역자가 밝히고 있듯이 ‘우리 나라 일부 대중적 저자들처럼 좌파 사상을 통속화’한 것이 아니라 시대와 사상을 짚어내는 능력이 탁월하다. 사회사적 흐름과 역사적 사건들을 경제의 관점으로 일관성있게 서술하고 있으며 시대를 대표하는 경제학자들의 꼼꼼한 이론 분석을 통해 논리를 뒷받침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론적 접근이나 용어들을 알기 쉽게 풀어내는 능력은 아카데미즘에 매몰될 수 있는 경제사를 저널리즘으로 승화시키고 있다는 극찬을 들을 만하다. 용어의 선택이 문제가 될 소지가 있겠지만, 대중성을 확보해야 하는 주제는 깊이와 넓이를 담보하지 못할 위험성이 있다. 그러나 이 책은 그 두 가지 모두 성공한 사례로 손꼽힐 만하다.

  이 책의 출판연도는 1936년 7월이다. 21세기에도 유효하고 생생한 느낌을 받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1929년의 세계 대공황과 나치즘과 파시즘의 폭풍 속에서 이 책을 써 나간 작가의 안목에 감탄할 뿐이다. 특별한 관점과 새로운 각도가 아니다. 깨달음과 새로운 정보를 주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세 봉건제에서 자본주의 이후의 대한 독자들의 고민을 이끌어내는 능력은 ‘역사’가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기능을 제대로 읽어내고 있다는 말이다. 구 소련이 붕괴된 21세기에 유효하지 않은 한 장을 번역에서 제외됐다는 것이 아쉽지만 그것이 이 책의 가치를 떨어뜨리지는 못한다.

  잡다한 상식과 단편적인 경제사에 대한 지식으로 오히려 머리가 복잡한 사람들에게 꼭 맞는 책이다. 시기와 상관없이 만났으니 다행이다.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도 해석하는 방식도 항상 시대에 따라 기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의 생성과 발전과정이라는 측면에서 중세이후 20세기 초까지의 역사를 이해하고 싶은 사람에게 권할만한 책이다. 최고의 책은 아니겠지만 최선의 책이 될 수는 있겠다.

  자유 시장 경제 체제를 옹호하고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어 달라고 외치는 (주)대한민국에서 박노자의 말대로 ‘노동하기 좋은 나라’가 왜 되기 힘든 것인가 하는 대답과 고민이 자본주의 역사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세계화’가 피할 수 없는 흐름이 되어 버린 지금 리오 휴버먼의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가 갖는 의미는 탁월한 경제 학자들의 견해와 미래 학자(?)로 명명된 사람들에 해 다각도로 논의되어 왔고 논의 되고 있다. 이후의 문제 제기는, 즉 ‘자본주의에서 어디로’에 이어지는 문제는 우리가 살아내고 있는 현실이다. 아는 것과 가르치는 것이 다르듯이 책을 쓴다는 것은 특별한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한 책이다.


06022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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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속의 세계 -상 - 우리는 어떻게 세계와 소통했는가
정수일 지음 / 창비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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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정학적 위치와 역사적 맥락 속에서 현재를 확인하는 일은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역할을 한다. 흔히들 ‘세계 속의 한국’이 갖는 의미와 역할을 이해하기 위해서 과거를 돌아본다고 생각하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당연하게도 ‘세계’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는 작업이다. 정체성을 확인하는 가장 단순한 작업 중에 하나가 ‘역사’에 대한 재평가라고 말한다. 그러나 역사에 관한 한 어느 누구도 하나의 통일된 관점이나 기준으로 설명할 수도 없고 이해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래서 늘 새로운 견해와 다른 각도에서 서술되는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있다. 사관에 따라 잘못 씌어진 역사에 의해 우리들 머릿속에 심어진 우리 역사에 대한 편견들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활발한 토론과 자기 학습 능력을 키워주는 교육제도와 시스템이라면 얘기가 좀 달라지겠지만 맹목적 주입식 암기식 교육 방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교육현실에서 ‘역사’ 교육은 특히 그러하다. 일단 주입된 사관은 스스로 깨치고 확인하기 전에는 고스란히 하나의 집단 무의식으로 고착된다.

  민족이라는 개념 역시 마찬가지다. 단일 민족이란 무엇인가? 혈연의 단일성을 쉽게 떠올리지만 저자의 말대로 우리나라 275개 성씨 중 136개가 귀화 성씨라는 사실은 ‘한핏줄’을 무색케 한다. 한 나라의 민족의식은 역사를 통해 확인되며 혈연 공동체를 넘어서 같은 역사를 공유하고 있다는 역사 공동체의 관점으로 바라봐야 한다. 그러나 개인을 넘어선 민족은 의미가 없음은 당연한 일이다. 특히 타 민족이나 국가와의 비교 우위에 서고 싶어하는 우생학적, 역사적 우월감은 그 근본 뿌리부터 현재 우리가 발딛고 서 있는 전 세계에 대한 편견과 아집으로 고정될 우려가 있다. 경계해야 할 일이다. 섣불리 민족주의나 국가주의에 매몰되는 일처럼 두려운 일은 없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과 민족 정체성을 확인하는 일과는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역사에서 확인되듯이 위정자들은 민족과 국가를 내세워 ‘개인’을 희생하도록 강요해 왔다. 그 민족과 국가는 일부 특권층과 권력층의 직권남용과 공인된 권리를 옹호하기 위한 가면으로 민중들을 현혹시켜왔기 때문이다. 단 한가지의 역할론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지만 위험성에 대한 수많은 역사적 교훈과 경험들은 우리를 소심하게 할 수 밖에 없다. 역사적 작용과 반작용 속에서 다양한 이념들이 가진 의미를 확인하는 일은 미시사를 연구하는 일보다 우선되어야 한다. 거시적인 안목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일은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 민족과 역사를 어떻게 바라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세계 속의 한국을 어떻게 바라 볼 것인가 하는 문제에 선행한다.

  ‘한국 속의 세계’라는 용어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민족에 대한 자부심과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가 분명하다. 이 책은 냄비처럼 들끓었던 중국의 ‘동북공정’과 맞물려 한겨레 신문사에서 기획한 대국민 홍보용 내지 우리 역사 바로 알기 혹은 한국 문화의 우수성을 확인하고 자긍심과 우월감 고취하기의 일환으로 연재됐던 글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서술과 사실 확인 차원에서 냉정하고 정확하며 꼼꼼한 고증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 이 책이 지닌 가장 큰 장점이다. 통시적 관점을 넘어서 공시적 관점에서 바라본 역사는 분명히 차이가 난다. 씨줄과 날줄로 엮어야 옷감을 짤 수 있듯이 단선적인 역사 서술이 1차원라면 시간과 공간을 아우르는 2차원적 관점은 우리 역사에 대한 새로운 시야를 갖게 하며 세계사와 맞물려 납득할 만한 구체적 사실들을 확인하게 된다.

  ‘국사’와 ‘세계사’를 구분하지 말고 ‘역사’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쉬운 문제는 아닐 것이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과과정에서부터 이런 작업이나 노력들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싶다. 고조선에서 조선까지 통시적 관점에서 바라본 우리의 역사는 고립된 역사가 아니다. 외침과 방어 생존과 독립으로 이어지는 우리의 역사는 처절한 고통의 역사로만 여겨진다. 내가 받은 역사 교육은 그렇다. 그러면서 끝까지 잘 버티고 용케 살아남았다는 느낌으로 끝이었다. 통시적 관점에서 바라본 우리의 역사는 큰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고 하나의 연속된 흐름을 가지기 위해 그렇게 서술되거나 가르칠 수밖에 없는 문제인지 고민해 볼 일이다.

  저자가 고민했던 부분은 기준은 공시적 관점에서 바라본 ‘문명교류사’로서의 한국 역사다. 짤막한 연재물로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깊이있게 다루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 역사적 흐름이나 연속선상에서 전체를 조망하는 일은 당연히 불가능하다. 한 책에서 모든 것을 구할 수는 없다. 이 책은 피카레스크식 구성을 지닌 소설처럼 작은 단편들이 하나의 주제를 향 각개 전투하는 방식이다. 몰랐던 사실을 아는 즐거움과 우리 역사에 대한 닫힌 관점을 열린 관점으로 전환하는데 일정부분 역할을 하고 있다.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 왜곡 부분과 일본의 임나일본부, 칠지도에 대한 저자의 격한 목소리는 다소 감정적인 면이 드러나지만 역사학자로서 당연한 의분이라고 본다. 냉정함과 객관성을 잃지 않을 수 있는 정도라면 단점이라기보다 책을 읽는 재미로 볼 수도 있다. 앞서 말했듯이 저자의 견해에 대한 적절한 비판적 안목이 전제되었을 때 가능한 일이다.

  『타임즈』에 조선의 “양반들은 개혁을 부패나 직권남용 같은 자신들의 공인된 권리의 상실”로, “자신들의 삶의 양식을 빼앗아가는 악”으로 간주한다(1897. 9. 17)는 이야기가 역사를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하는 교훈으로 각인된다. “인류에게 있어 가장 큰 비극은 지나간 역사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한다는 데 있다.”는 아놀드 토인비의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여전히 ‘혁명’을 꿈꾸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기적 민족주의나 국가 우월주의의 위험성을 걷어 낸다면 우리 민족과 국가도 ‘관계’ 속에 발생하고 성장해 왔다는 역사에 대한 당연한 인식이 필요한 책이다. 서로 다른 문명들의 삼투압 작용을 배제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따로 또 같이’ 살아온 인류에 대한 확인 작업이 단편적이지만 분명한 의미를 지닌 책이다.


060225-029(상), 030(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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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의 역사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96
알프레드 바알 지음, 지현 옮김 / 시공사 / 199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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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는 놀이가 아닌 노동이 되었다. - P. 70

가장 감명 깊은 근대 축구에 대한 평가로 기억될 문장이다. 그러나 그들의 노동이 우리를 즐겁게 한다. 근대 이후 우리가 받아들인 모든 스포츠는 이제 재미와 감동을 너머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다른 스포츠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야하는 부분도 많이 있지만 축구의 역사는 특별하다. 온 국민의 사랑과 열망이 녹아 있다는 섣부른 판단도 가능한 종목이기 때문이다. 물론 축구도 근대의 물결과 더불어 우리에게 전해졌고 매스 미디어의 보급과 함께 확산되었으며 대중적 관심을 불러 모았다. 동네 꼬맹이들까지 축구공 하나로 놀이를 시작하게 된 것은 그리 오래 전이 아니지만 말이다.

아마추어에서 프로로의 전환은 축구를 ‘놀이’에서 ‘노동’으로 변화시켰다. 하는 즐거움에서 보는 즐거움으로 바뀌어도 여전히 축구는 매력적이다. 현대의 축구는 자본과 결합되어 하나의 산업이 되어버렸지만 축구에 대한 사람들의 열정은 식지 않는다. 때때로 축구의 위기론이 퍼지고 관심이 멀어진 듯 하지만 월드컵이 열리는 해가 되면 온 국민의 관심은 마치 하나의 종교와 같은 위치에 까지 오르는 것이 현실이 되었다. 영국 BBC가 한국에서 축구를 ‘종교’에 비유한 것은 여러 가지 함의를 지닌다. 축구의 종주국에서 받게 된 평가는 긍정적으로 비쳐지기도 하지만 냄비처럼 끓어오르다가 월드컵이 끝나면 모두 축제의 한마당으로 여기고 돌아서는 태도가 재미있게 비칠수도 있을 것이다. 어찌됐든 바야흐로 월드컵은 이제 시작되었다.

19세기 후반 영국에서 시작된 축구는 아이러니하게도 영국의 무관심 속에 1904년 FIFA가 창립되었고 영국은 2년 후에 가입하게 된다. 우루과이에서 1930년 제 1 회 월드컵이 개최된 이후 축구는 세계인의 축제로 자리잡는다. 내가 기억하는 월드컵은 1986년 멕시코 월드컵부터다.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박창선이 월드컵 첫 골을 날렸고, 이탈리와의 경기에서 허정무, 최순호가 골을 터트렸다. 4년마다 흥분했고 현재도 재미있게 축구를 즐긴다. 월드컵의 역사는 100년도 안된다. 오히려 유럽의 컵대회가 훨씬 사람들의 흥미와 관심을 불러일으킬만하다. 다만 지역적 특성과 연고지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게임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고 보면 축구조차도 유럽과 서양 중심이다. 물론 축구 선진국 남미를 빼놓을수는 없다.

시공디스커버리 총서 중 하나인 <축구의 역사>는 사진과 그림등 시각 자료와 함께 축구의 역사를 소개하고 있다. 축구의 시작과 발전 근대 축구의 스포츠 외적 목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관점에서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어 전체를 조망하는데 편리하다. 물론 짧은 분량으로 깊이는 없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부록처럼 붙어 있는 ‘기록과 증언’이다. 축구에 대한 열정과 생생한 기록들이 실려 있어 감동을 전해준다.

축구는 정치의 도구로 이용되기도 했고 이제는 자본과 결합되어 거대 산업이 되어버렸다. 목적과 의도, 시각의 올바른 수정을 위해서라도 축구를 바로 보고 즐길 준비를 하는 것은 물론 축구를 더 재미있게 즐기기 위해서다. 축제는 즐기면 된다. 이제 축구의 문화사를 더듬어 봐야겠다. 오늘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 국내에서 마지막 평가전을 치르는 날이다. 선수들의 동작 하나 하나를 그들의 땀과 열정을 즐길 준비가 되었다.

자본도 이데올로기도 잠시 잊고 축구에 몰입하는 즐거움을 갖는 것은 맹목적인 축구 사랑도 분위기에 휩쓸리는 냄비 근성도 아닌 생활의 즐거움이다. 흥분하지 말고 즐기는 축구가 될 수 있기를.


060526-0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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