넛지 - 똑똑한 선택을 이끄는 힘
리처드 H. 탈러 & 카스 R. 선스타인 지음, 안진환 옮김, 최정규 감수 / 리더스북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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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밥이냐 반찬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셀프서비스로 운영되는 식당의 경우를 살펴보자. 군대를 갔다 온 혹은 군 복무 중인 수많은 남성들은 식판 위에 산처럼 밥을 퍼 담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배고픈 사람들은 오늘도 구내 식당, 학교 급식실에서 양껏 밥을 담는다. 그리고 자신이 먹을 만큼 반찬을 담기 시작한다. 누가 떠주면 어쩔 수 없이 정량을 받아야 하지만 사람마다 식성과 식사량이 다르기 때문에 스스로 떠 먹는 좋을 것이다. 어찌됐든 대부분의 경우 밥과 반찬이 일렬로 배열되어 있다.

  실제 낭비되는 음식의 양은 엄청나다. 우선 개인적으로 살펴보면 음식을 많이 남긴다. 배고픈 상태에서 욕심을 내게 마련이다. 또 한 가지 문제는 먹을 만큼의 밥을 먼저 담고 나면 배를 채울만한 고기나 탕수육, 잡채 등이 반찬으로 제공되기도 한다. 그러면 밥과 반찬 중 한쪽이 남거나 둘 다 남기 마련이다. 이때 배열의 문제를 생각해 보자. 반찬을 먼저 배열하고 밥을 맨 마지막에 담도록 하면 남기는 양이 상당히 줄어들게 될 것이다. 또 대부분 사람들이 선호하는 반찬이나 배를 채울만한 종류의 반찬을 앞쪽에 배치하면 버려지는 음식의 양이 상당히 줄어들지 않을까?

  <넛지nudge>를 읽으면서 떠 오른 생각이다. 이 책의 서두 부분에서 반찬의 높이와 배열 순서에 따라 특정 음식의 소비를 현저하게 줄이거나 늘였다는 사례를 보고 마찬가지 원리로 음식쓰레기를 줄이는 방법에 대해 잠시 고민해 보았다. 사회과학의 영원한 주제인 ‘사람’은 참 재미있는 동물이다. 우리 스스로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더욱 그런지도 모르겠다. 익숙하고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생각과 행동 패턴 속에 숨어 있는 비밀들을 풀어내는 일은 특정 학문 분야의 연구 주제는 아닐 것이다.

  이 책은 경제학자 둘이 공저했다. 대중적으로 큰 관심을 모았던 <괴짜 경제학>이나 작년에 출판되어 반향을 불러 일으킨 <블랙스완>, 엊그제 읽은 <야성적 충동>에 이어 <넛지>에 이르기까지 최근 경제학은 행동 경제학의 열풍이다. 완전한 이성을 갖춘 경제적 인간이 일관성 있는 경제 활동을 벌인다는 전제 자체를 거부한 이 책들은 심리학과는 조금 다른 차원에서 인간의 경제 행위를 점검하고 있다.

  ‘넛지nudge’는 ‘눗지noodge’와 다르다. 눗지는 ‘성가신 사람, 골칫거리, 끊임없이 불평하는 사람’을 뜻하는 명사지만 넛지는 팔꿈치로 슬쩍 옆구리를 찌르기라는 말이다. 주의를 환기하거나 부드럽게 경고하기 위해 상대에게 넛지를 행하는 사람은 끊임없이 불평을 늘어놓는 눗지와 전혀 다르다. 이 책에서는 물론 눗지가 아니라 넛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 과연 넛지는 무엇이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가?

  경제 활동에 임하는 사람은 천재이면서 바보라는 가정 하에 이 책의 논의가 시작된다. 사람은 합리적이고 경제적인 인간(호모 이코노미쿠스, homo economicus)과 그저 평범한 인간(호모 사피엔스, homo sapiens)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전자를 ‘이콘(Econ)’, 후자를 ‘인간(Human)’이라고 부른다. 이콘은 좌뇌를 주로 사용할 것이고 인간은 주로 우뇌를 사용할 것이다. 이콘은 숙고 시스템을 사용하고 인간은 자동 시스템을 사용한다. 넛지는 인간을 위해 필요하며 잘못된 혹은 당연한 자동 시스템을 합리적으로 수정하기 위해 필요하다.

  인간은 어림짐작과 비현실적 낙관주의에 익숙하고 100원의 이익보다 100원의 손실을 훨씬 더 고통스러워한다. 현상유지 편향을 갖고 있다. ‘너의 가슴은 왼쪽에 있음을 기억하라’며 인간의 발전 가능성과 진보적 성향에 대해 기대와 희망을 품고 있는 나같은 인간에게도 현상유지의 보수적 편향은 내재해 있는 것이다. 그것이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액자의 법칙이라고도 하는 프레임이 어떠하냐에 따라 반응은 정반대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수술을 앞 둔 환자에게 ‘100명 90명이 5년 이상 살았다’와 ‘100명 10명이 5년 이내에 죽었다’는 말을 해 준다고 할 때 환자의 선택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심리학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인간의 이러한 특성은 이콘의 입장에서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들은 넛지의 활용을 주장한다.

  넛지는 민주당과 공화당의 이념과 무관하다는 주장이다.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생각의 오류, 행동의 패턴을 보다 합리적이고 경제적인 방향으로 이끌어 낼 수는 없는지 점검해 보자. 인센티브와 다른 넛지의 세계는 디폴트에서 시작한다. 최소 저항 경로를 따라가며 피드백을 주고 매핑을 통해 행복을 이끌어주는 조직화가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더 많은 돈을 가져다준다. 저축과 투자, 연금 특히 모기지, 학자금 대출, 신용카드 사용의 실례를 통해 우리가 얼마나 ‘멍청한’ 판단과 행동을 하고 있는지 확인하게 되면 ‘이렇게 살다 죽게 내비둬!’라고 말할 수 없게 된다. 우리는 아니 인간은 그런 동물이다.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도 넛지가 필요하다. 사회보장, 의료보험, 장기기증, 환경 등 경제 문제 뿐만 아니라 사회 시스템을 움직이는 데 있어서도 인간이 아니라 이콘이 필요하다. 관심을 갖지 않고 혹은 모르고 지나치는 일상들 속에 누군가 팔꿈치로 슬쩍 찔러준다면 어떨까? 기분 나쁘게 간섭하고 통제하거나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툭치고 지나가며 가볍게 윙크를 날려준다면 지금 나의 생각과 행동에 대해 다시 한번 고려해보지 않을까? 저자들은 이것을 자유주의적 개입주의라고 부른다. 자유에 대한 개념과 한계를 어디까지 설정할 것인가에 따라 이념의 대립으로 비화할 수 있으므로 경제학자인 두 사람은 이 부분을 조심스럽게 절충하고 있다. 그 접점에서 찾은 개념이 바로 넛지다.

  책의 말미에서 반대 의견들까지 정리하고 있다. 정성스럽고 꼼꼼한 사례 조사와 그 적용 문제들을 분석하고 있는 이 책은 쉽고 재미있다. 대학로 예술극장에서 <한밤의 세례나데>를 본 것을 제외하고 꼬박 이 책에 코를 박고 주말을 보냈다. 400페이지 넘는 분량이지만 어떤 소설보다도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를 재미있고 정확하게 분석했기 때문일 것이다. 현재의 금융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다양한 분석과 해법들 속에서 이 책이 빛을 발하는 것은 결국 어떤 문제도 이콘이 아니라 ‘인간’의 문제로 귀결되기 때문일 것이다.


090712-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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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성적 충동 - 인간의 비이성적 심리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
조지 애커로프, 로버트 J. 쉴러 지음, 김태훈 옮김, 장보형 감수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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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점의 차이는 문제의 원인을 전혀 다른 곳에서 찾아낸다. 이성적 동물이라고 굳게 믿는 인간의 모습은 우스꽝스럽게 보일 때가 많다. 얼마나 본능에 충실하며 비이성적이고 불합리한 판단을 내리는지 알고 보면 어이가 없을 정도다. 소위 지식인이나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도 예외가 없다. 이론과 실제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나며 학문적 관점과 실제 생활의 거리는 가늠할 수조차 없다.

  경제적 동물인 인간이 이익을 취하는 장면이나 물건을 구입하는 장면을 살펴보면 얼마나 충동적이고 감정적인 알 수 있다. 조지 애커로프와 쉴러가 공저한 <야성적 충동Animal Spirits>은 이러한 인간의 특성에서 출발한다. 이 개념은 케인스가 <고용, 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1936)에서 처음 사용한 용어다. 인간이 얼마나 비경제적 본성을 가지고 있는지 말해주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두 저자는 최근에 벌어진 세계 경제의 흐름을 읽어내는 데 ‘야성적 충동’이라는 개념을 활용하고 있다. 세계 경제의 중요한 장면들을 분석하다보면 다양한 이론적 잣대가 사용되고 경제적 용어들이 난무하지만 결국 그 실마리는 인간의 이러한 본성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황당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전 세계 언론의 격찬을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평가가 어찌됐든 이 책은 매우 흥미롭다는 사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표준경제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들을 해석하는 책이라는 장하준의 추천사가 아니라도 경제는 ‘심리’에 의해 좌우된다는 간단한 말을 분석하고 있다는 정도는 짐작할 수 있다. 금융위기가 발생할 때마다 그 원인과 대책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갑론을박한다. 하지만 대부분 매우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과정을 전제로 한다. 논리적인 설명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당연히 어느 누구도 인정하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저자는 우리의 경제 관념에 의문을 제기한다. 경제학을 변화시키고 번영을 누릴 수 있는 새롭고 신선한 시각을 ‘야성적 충동’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심리적 요인’을 통틀어 ‘야성적 충동’이라고 말했지만 알 수 없다는 의미로 사용된 것은 아니다. 경제불황의 원인이나 금융위기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찾아낸 용어는 아니다. 이 책의 1부에서 ‘자신감, 공정성, 부패와 악의, 화폐 착각, 이야기’라는 충동의 다섯 가지 요소를 제시한다. 이것들은 2부에서 설명하고 있는 ‘왜 경제는 불황에 빠지는가?’, ‘왜 일자리를 찾을 수 없는 사람들이 생기는가?’ 등 여덟 가지 경제위기에 대한 전제조건이 된다. 감수자의 말대로 여덟 가지 질문에 대한 해답으로 1부를 읽으면 더 입체적으로 접근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쨌든 저자들은 비논리적인 선택과 우연, 과대 포장, 거짓말, 비도덕적 성향 등 여러 가지 다양한 근거와 역사적 맥락을 통해 야성적 충동의 본질적 속성을 자세하게 분석하고 있다. 저자들은 이 충동으로 불황의 역사에 대한 재조명을 시도한다. 여덟 가지 질문과 대답 속에는 역사에서 얻은 교훈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원인이 달라지면 당연히 대책도 달라진다. 경제의 문제는 바로 사람들의 ‘야성적 충동’에 기인한다는 결론을 얻었다면 그로 인한 대책과 위기극복 방안들이 드러날 것이다.

  경제의 작동원리가 단 한 가지 원인으로 요약될 순 없다. 다만 이 책에서 주장하는 케인스의 ‘야성적 충동’은 최근의 경제 위기를 풀어내는 또 하나의 열쇠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받아 마땅하다. 설득력 있는 분석과 일반인들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다. 물론 경제 이론과 설명들이 친절하지 않아 정확하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전체적인 흐름과 맥락을 이해하고 저자들의 의도를 파악하는 데 큰 지장은 없다.

  잘 모르겠지만, 거시 경제학은 경제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사회나 철학의 문제와 닿아 있는 듯하다. 심리학이나 역사학과도 무관하지 않을 테니 인문학적 관심과 자연과학적 척도가 결합될 때 보다 설득력 있는 이야기와 대안들이 논의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것이 현실 경제를 풀어내고 사람들이 보다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데 이바지해야함은 물론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이 신자유주의는 아니다. 인류가 검토해 온 다양한 제도 중에서 인간의 본성과 가장 근접한 제도가 자본주의라고 인정할 수도 없다. 하지만 현실을 부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신자유주의가 왜곡되어 시장 제일주의, 친기업주의가 될 수는 없다. 결과가 뻔히 보이는 이 정책과 입안자들은 반드시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하지만 그 부작용의 피해자는 항상 노동자들이다. 문제의 심각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책이 현재의 경제 위기를 설명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 문제들의 대안을 고민하기 위한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 우리의 삶은 계속되어야 하고 경제는 가장 큰 관심사가 되었으며 숨 쉬는 공기가 되었으니 피해 갈 수는 없다. 원론적으로 보다 나은 미래를 꿈만 꿀 수도 없다. 실현 가능한 제도의 운용과 보다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는 정책 방향을 기대한다. 우리에겐 누가 있으며 어디에 기대야 할 것인가? 거시경제의 문제를 일반인들의 노력으로 바꿀 수 없다는 자괴감이 냉소를 만들지는 말아야겠다.


090710-0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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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오바디스 한국경제 (이준구) - 이준구 교수의, 이념이 아닌 합리성의 경제를 향하여
이준구 지음 / 푸른숲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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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눈은 두 개다. 한쪽 눈을 감아보면 다른 한 쪽 눈의 중요성을 금방 알게 된다. 시야가 좁아지는 것은 물론이고 거리 측정이 잘 안 된다. 정확하게 사물의 윤곽을 유추하기도 힘들뿐더러 입체적인 느낌이 사라지고 평면으로 보이기도 한다. 가끔 윙크하듯 한쪽 눈을 번갈아 감고 두리번거리는 장난을 한다. 그러고 나면 두 눈으로 사물을 볼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감사한 마음이 든다.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두 개의 눈은 건강하지 못하다. 그것을 진보와 보수라고 부르기도 하고 좌익과 우익이라고도 한다. 새는 한 쪽 날개만으로 날지 못하니 좌익과 우익이 균형을 이루고 서로 견제하며 문제점을 보완하고 서로 경쟁한다면 가장 이상적인 사회가 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이상과 거리가 멀다. 진흙탕에서 뒹구는 개처럼 서로 물어뜯고 죽도록 싸우며 공멸의 길을 걷는다. 양비론과 양시론을 주장하는 것처럼 나쁜 평가도 없지만 그렇다고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줄 마음도 없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이념과 무관하게 작은 행복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꿈꾸는 사람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상식과 행복이라는 것도 기준이 다르고 방법이 천차만별이다. 부자의 이기주의와 가진 자의 욕망은 절제되지 않는다. 없는 사람들도 마찬가지겠지만 권력과 자본을 소유한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사회를 만들어간다. 과연 그것이 지속 가능한 행복을 약속해 줄 것인가? 역사는 그렇게 진화하고 발전해 왔다고 믿는 것일까?

  세상을 통찰할 수 있는 눈과 타인을 배려하고 ‘더불어 함께’ 걷는 길을 택하는 것은 개인의 인성으로만 돌릴 문제가 아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는 바라지도 않는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역사를 돌아보고 근대화 과정을 되짚어보면 높은 사회적 신분을 획득했거나 많은 돈을 축적한 사람들을 정당한 노력과 땀의 결과로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더욱 그런지도 모른다.

  끊임없는 생존 경쟁과 승자 독식의 잔인한 현실을 개선하고자 하는 노력보다는 승리자가 되기 위한 모든 수단과 방법이 동원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체로 돈이 많은 경우 승리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경우는 그 정도가 상식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 인과 관계도 없고 합리적인 생각도 아닌 그들만의 요구와 이기적 욕망들이 정책을 결정하고 사회를 디자인하고 있다. 기존의 외국어 고등학교나 과학고는 물론이고 자립형 사립고등학교의 확대 실시는 무엇을 말하는가. 심지어 국제중학교의 신설은 평준화의 문제점을 보완하겠다는 선의를 말하기조차 부끄럽다. 3불 정책의 근간을 뒤흔들던 바람몰이가 조금 잠잠해진 듯 하지만 그들만의 리그는 계속된다.

  쉰이 조금 넘은 나이에 자선사업에 올인하며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직을 은퇴하는 빌 게이츠, 전재산의 85%에 달하는 수선 수십조에 이르는 재산을 빌게이츠 재단에 기부하는 워렌 버핏을 우리는 길러낼 수 없는가. 상속세 감세안에 진심으로 반대하는 그들을 보며 최소한 그 정도 폼나는 부자를 우리 사회는 길러낼 수 없냐고 우리 교육에게 묻는다.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이준구는 왜 사회비평을 시작했을까? <쿠오 바디스 한국 경제>를 읽으며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경제학자의 사회비평은 넓이과 깊이 면에서 색다르지도 않고 새롭지도 않다. 문장과 비유가 탁월한 설득력을 발휘하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의 사회적 위치가 이미 하나의 메시지다. 그가 이명박 정부를 비판한다면 무언가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사람들은 생각하기 쉽다. 그것이 바로 지식인의 책무이다. 사회적 발언이 가져올 파장과 의미를 고려하여 상식에 부합하고 미래를 위한 제언들이 필요하다. 사르트르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을 생각하며 ‘마지못해 사회비평의 붓을 들다’는 프롤로그를 읽기 시작했다.

  흡인력 있는 문장도 아니고 기막힌 비유나 감각적인 표현도 없지만 이준구의 사회비평은 학자다운 면모를 고루 갖추고 있다. 우선 차분하고 냉정한 사유 방식이다. 흥분해서 외치는 비명은 옳은 말이라도 설득력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경제학적 관점에서 관련 분야의 정책이나 사회 현상을 설명할 때 상식을 넘지 않는 분석과 비판의 날을 세운다. 스스로는 과격하다고 표현했지만 난장에 가까운 싸움판에서 보자면 양반의 말투다. 깊은 학문적 토대나 이론적 잣대를 들이밀지 않아도 사람들은 상식을 이야기하면 쉽게 알아듣는다. 이준구의 한국 경제를 위한 제언들은 그래서 성공을 거두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대운하로 촉발된 토목공화국 논란은 이미 우석훈에 의해서 신랄하게 비판 과정을 거쳤다. 좌우를 넘어 건강하고 행복한 대한민국을 위해 우리 사회가 어디로, 어떻게 나아가야할지 고민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 책을 필독서로 꼽아주고 싶다. 주택시장 문제와 종부세에 관한 오해와 진실은 슬픔에 가깝다. 언론이라고 볼 수도 없는 조중동의 거짓말과 위선은 안타깝기까지 하다.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연민의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진짜 ‘아마추어’ 정부의 모든 면을 보여주는 이명박 정부에는 영혼이 없다. 교육과 시장 모두 실패한다면 그들에 대한 평가의 가혹함을 넘어 우리 사회의 미래가 암울해진다. 복지부동하고 정권의 눈치를 보던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둘 목소리를 낼 준비를 하고 있다고 믿는다. 서울대 교수들의 ‘민주주의 후퇴’ 시국선언 준비 뉴스는 우리 사회의 상식이 살아있음을 반증한다. 이 책을 통해 이준구 교수가 말하고 싶었던 것도 거창한 경제 이론이나 국민들을 위한 학문의 대중화가 아니다. 건강한 상식을 가지고 보다 많은 국민들을 위한 사회로 나아가야 할 대한민국의 지표에 관한 이야기다. 도대체 한국 경제는 어디로 가고 있단 말인가.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잘못된 길에 들어선 한국 경제에 대한 애정 어린 충고이자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미래 사회에 대한 고민이다.


09060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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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황의 경제학
폴 크루그먼 지음, 안진환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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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이 경제의 중심이 된 것은 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다는 명성만으로도 최근 각광받는 폴 크루그먼이 한국을 방문했다. 이 학자는 앞으로 불황이 L자형으로 4~5년간 지속될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을 내 놓았다. 그의 전망이 적중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발언이 지속적으로 주목받는 이유는 그간 그가 보여준 냉정한 판단과 분석 그리고 정확한 미래 예측 때문이다.

  급변하는 경제 환경이 어떻게 달라질지 예측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원숭이와 펀드매니저의 수익률 분석처럼 아무리 정교한 이론으로도 예측하기 힘든 경우도 있다. 대한민국의 경제, 세계 경제의 흐름이 우리 생활에 미치는 영향은 엄청나지만 그것을 읽어내는 눈을 갖는 것은 매우 어렵다. 폴 크루그먼의 <불황의 경제학>은 그 눈을 대신 할 수 있는 좋은 안내서이다.

  이 책은 현상을 표현하는데 치중하지 않고 그 현상의 분석을 위한 책이다. 분석은 대안을 위해 필요하다. 책머리에 밝히고 있듯이 지금까지 벌어졌던 위기들은 왜 벌어졌는지, 피해를 입은 나라들은 어떻게 회복할 수 있는지, 앞으로 이런 일이 반복적으로 발생하지 않지 위해서는 어떻게 예방할 것인가에 관심을 두고 있다. 이 책의 궁극적인 목적은 사례연구의 이론을 개발하는 것, 다시 말해 이 문제에 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를 밝혀내는 것이다.

  분석을 위해서는 자연스럽게 과정을 설명해야 하고 현상을 보여줘야 한다. 책을 쓰는 목적이 뚜렷하고 방법도 명확하다. 내용은 차치하고도 글쓰기의 방법에 있어서도 배울 점이 많은 책이다.

소위 전문가들이 심각한 주제는 반드시 심각하게 접근해야만 한다고 믿고 있다. 어려운 이야기일수록 이에 걸맞은 어려운 언어로 표현해야 하며, 가벼운 말이나 쉬운 설명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새롭고 생소한 현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아이디어들을 ‘갖고 놀’(play) 준비가 돼있어야 한다. 내가 ‘갖고 논다’는 표현을 쓴 것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경제학이든 다른 분야에서든 별난 기질이 없는 엄숙한 사람이 신선한 통찰력을 발휘하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 P. 15

  누구나(?) 한 번 쯤은 고민해 보았을 문제다. 폴 크루그먼은 어쩌면 천재가 아니라 즐기는 사람이라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천재는 즐기는 사람을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려운 문제를 쉽게 풀어낼 수 있는 물리학자였던 리처드 파인만처럼 저자는 어려운 경제문제를 알기 쉽게 분석하고 그 분석을 통해 자연스럽게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경제의 핵심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아니,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정치와 경제는 복잡해지고 예측가능성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정치경제학이 정치로부터 분리된 후 오히려 정치를 이끌고 있다. 항상 문제의 핵심에는 ‘경제’가 놓여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경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구소련의 붕괴는 단순한 정치 체제의 붕괴나 한 국가의 파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역사적으로 가장 의미 있는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될 구소련의 붕괴는 자본주의라는 경제 체제의 승리를 의미한다. 그러나 승리한 자본주의가 완벽한 제도이거나 훌륭한 시스템이기 때문에 사회주의적 경제 시스템을 붕괴시킨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 내의 산적한 문제는 1930년의 대공황을 포함해서 라틴 아메리카의 위기, 일본의 장기 침체, 아시아의 IMF 구제금융으로 이어지면서 해결되지 않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저자는 부적절한 정책과 헤지펀드의 실체를 파헤치며 이러한 결과에 대한 원인을 분석하고 향후 대책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한다. 미국, 아니 세계의 경제 대통령으로 일컫던 그린스펀을 거품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근거는 경제에 관한 역사적 관점에서 가장 정확하고 타당한 판단을 내리고 있다.

  그림자 금융, 공포의 총합에서 보여주는 비판적 관점은 지나온 과거에 대한 뼈아픈 반성이며 날카로운 지적이다. 돌아온 ‘불황 경제학’을 설파하는 저자가 대한민국에서 이렇게 부정적 전망을 내놓았다면 미네르바처럼 허위사실 유포로 구속되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최근 개성공단을 놓고 이명박과 김대중, 박지원과 정몽준이 보여주는 관점의 차이는 옳고 그름을 떠나 경제적 관점이 아니라 정치적 관점의 차이이다. 경제대통령을 표방하고 나선 대통령의 이념과 태도는 훨씬 급진적이다. 그간의 상식과 합리를 뒤엎는 발언들과 가진자들을 위해 노동자들을 법으로 다스리겠다는 발상을 어떻게 보아 넘겨야 할지 모르겠다.

  다시 문제는 경제가 되겠지만 정치와 뗄 수 없는 관계인만큼 불황의 경제학을 정치로 풀어내야한다는 압박은 당연하다. 불황의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의 자세와 태도는 중요하지 않다. 시스템의 문제이며 금융 정책과 제도의 문제이고 정책의 문제로 귀결된다. 개인은 방관자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시장이 경제를 주도하고 개인의 경제적 활동과 행동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게 아니라 개인은 전체 시스템의 구성원일 뿐이다.

  우리가 맞고 있는 ‘불황의 경제’ 시대에는 공급이 아닌 수요중심 경제학이 전개된다. 그 분석과 대안에 대해서는 우리나라에 맞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미국의 경제학자가 던지는 한국 경제의 화두는 성장과 분배의 문제가 아니라 불황을 맞이하는 우리의 자세이다. ‘문제는 경제야, 이 바보야!(It's The Economy, Stupid!)’를 외치며 부시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된 빌 클린턴이 있지만 이명박도 오바마도 비슷한 말을 외치며 대통령에 당선됐지만 경제를 대하는 방식도 해법도 각기 다를 것이다.

  손 놓고 앉아 기다릴 수만은 없겠지만 허리띠를 졸라매자는 같지도 않은 말을 주워섬길 수도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 문제는 경제지만 그것을 어떻게 풀어 낼 것인가는 수만 가지 방법이 있다. 우리는 폴 크루그먼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 볼 수 있지 않을까? 그게 누구의 의견이든 상관없지만 우리의 방향과 태도를 먼저 결정해야 한다. 그런데 그게 가능하기는 한 것인가?   

090520-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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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스위치 - Web2.0 시대, 거대한 변환이 시작된다
니콜라스 카 지음, 임종기 옮김 / 동아시아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시대의 흐름을 예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과거의 역사를 돌아보는 일이다. 니콜라스 카의 <빅 스위치>는 다시 쓰여지는 세계 경제의 방식에 대해 고찰하는 책이다. 웹 2.0 시대로 명명되는 21세기 초에 디지털 비즈니스는 어떤 방향으로 진화할 것인가. 그 해답은 분화된 네트워크에 있다. 저자가 유틸리티 경제학이라고 명명한 미래 경제는 접속하는 모든 네트워크의 활용에 달려있다.

  이 책의 제목처럼 커다란 스위치를 통해 모든 컴퓨터가 접속되어 있고 비즈니스는 새로운 모델로 끊임없이 진화한다. 시스템의 창조자는 테크놀로지의 혁명을 능가한다. 생각의 전환이 큰 변화를 몰고 온다. 조그마한 상상력은 전체를 뒤바꾸는 상상력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결코 물량적 공세로 불가능한 변화를 가능케 하고 있다. 정보기술 산업의 탄생은 전통적 비즈니스 모델에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정보통신 분야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구글을 모델로 삼아 미래 사회의 변화를 점치고 있는 저자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연결고리를 분산과 네트워크의 접속에서 찾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의 변화, 아니 최근 수십 년간의 변화는 그 이전 수백 년간의 변화를 능가한다. 산업뿐만 아니라 사회, 정치 그리고 예술 분야에 이르기까지 전체 세계의 양상을 변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미래 사회에서 우리가 적응해야 하는 분야는 단순히 정보와 기술 분야의 발전된 양상이 아니라 전체 시스템의 변화와 더불어 미래에 대한 전망과 생각의 속도로 귀결된다.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따라 세상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달라질 것이다. 이 책은 우리에게 단순히 새로운 경제 시스템에 대한 고민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비즈니스에 대한 마인드를 키워주는 책이 아니라 사소한 삶의 양상과 미래 사회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보여주는 책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는 이렇게 다양한 분야에서 벌어지는 생각의 차이들 속에서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090427-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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