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이 우리를 구원한다면 - 우리 시대의 구루, 마틴 리스의 과학 에세이
마틴 리스 지음, 김아림 옮김 / 서해문집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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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류에 닥친 곤경은 끓는 물 속 개구리의 상황과 비슷하다. 스스로를 구하기에는 너무 늦을 때까지, 따뜻한 수조에서 만족하며 지내는 것이다. - 14쪽

지구 온난화로 인한 기후 위기는 하루 이틀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산화탄소와 온실 기체 방출, 화석 연료 사용, 산림 벌채 등이 원인으로 지목되지만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탐욕이 오늘을 만들었다. 어제와 오늘이 아니라 내일이 더 문제다. 지구는 공유지다. 다음 세대, 인류의 미래가 지구다. 티핑 포인트에 닿기 전에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지금 당장 행동에 옮겨야 할 일들이 한둘이 아니지만 인간은 눈 앞에 놓인 자기 이익을 포기하거나 절제할 줄 아는 동물이 아니다. 비극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폭염과 홍수, 가뭄, 해수면 상승, 열대 저기압 등 기후 변화가 우리 삶에 끼치는 영향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 될 것이다. 생존을 위협하는 위기 앞에서 누구도 책임을지지 않으려는 이유는 책임 분산 효과 때문이다. 정치, 경제, 산업, 일상 등 어느 분야, 어떤 사람도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함께 움직이지 않으면 문제 해결은 요원하다. 책임은 희생과 고통이 따른다. 각자 불편과 손해를 감수해야는 부분이 생긴다. 자기 몫을 회피하면 공유지의 비극은 계속 될 것이다.

과학은 ‘기술과 공학을 수용하기 위한 공공 담론의 일반적인 관행과 실천’이라는 마틴 리스의 정의는 의미심장하다. 철학적 기반이 없는 과학기술이 발전이 가져온 부작용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경험했고 현재 그 문제들을 직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이 인간을 여기까지 데려왔으나 지속 가능하지 않은 삶을 고민하지 않으면 결과는 충분히 예측 가능하다. 영국 왕립학회 회장과 상원의원을 지낸 저자의 화려한 이력보다 중요한 건 과학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제목처럼 ‘만약if’ 과학이 우리를 구원한다면, 아니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일까. 과학자들의 역할은 어떠해야 할까.

생물권에 대한 위협, 기후 위기와 에너지 위기, 생명공학, 컴퓨터 · 로봇 · 인공지능 등 네 가지 주제로 미래 세대를 위한 과학의 역할을 다시 살펴보자. 무엇보다 중요한 과학자들과 과학 공동체의 세계는 현실과 과학, 즉 정치와 과학, 경제와 과학 등 공동체와 과학의 관계를 다시 점검한다. 그리고 마지막은 교육이다. 협소한 과학교육의 문제가 아니라 창의성, 연구 기관, 시스템, 불평등에 이르기까지 과학의 발전과 현실과의 접점이 이뤄지는 부분들에 대해 이야기를 듣는 동안 과학은 우리를 구원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여전히 그 가능성과 희망은 불분명하다. 낙관론을 펼치는 사람들의 생각과 대안에는 ‘쿠이보노Cui bono’가 숨어 있다. 고통 분담없는 해결책, 이익을 줄이고 손해를 감수하려는 노력이 없이 가능할까 싶다.

마틴 리스의 과학 에세이는 객관적 사실들을 나열하고 다양한 경험과 현실을 토대로 문제를 지적하며 대안을 모색한다. 이성과 감성이 적절히 어우러진 쉽고 편안한 글이다. 좋은 글은 관점을 넓히고 가슴을 아프게 한다. 복잡한 이론과 획기적인 연구 결과로 장밋빛 미래를 꿈꾸게 하는 자극적인 뉴스를 사이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면 나와 현실을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사고 훈련이 필요하다. 생각도 연습이 필요하다. 사고 훈련은 각자의 선택과 노력을 통해 현실을 바꿀 수도 있다. 변화의 방향과 목적지는 늘 그러하듯, 사람마다 시대마다 천차만별이다. 우리 시대의 과학은 어디를 향해 가고 있을까. 과학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사려깊고 헌신적인 시민들의 작은 모임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마세요. 실제로 지금까지 그들만이 유일하게 그렇게 해왔습니다. -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Margaret Mead, 2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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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뇌과학 -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은 어디에서 오는가
레너드 믈로디노프 지음, 장혜인 옮김 / 까치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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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이라는 감정은 인간의 존재 조건일까. 사랑에 관한 숱한 이야기와 노래와 드라마, 영화, 그림들을 떠올려 보면 사람들은 사랑을 위해 살고 사랑 때문에 죽는 게 아닌가 싶어진다. 기쁨과 슬픔 혹은 우울, 분노, 고독, 수치, 만족, 환희, 행복 등 설명하기 어렵고 경계가 모호한 감정의 편린들은 모두 사랑에 기인한 파생상품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성의 강 건너편에 감정이 놓인 듯 변연계와 신피질의 기능과 역할은 분명히 구별되어 있는 듯하다. 그러나 레너드 믈로디노프는 감정과 이성이 서로 구분되어 서로 다른 방에 거주하는 이웃이 아닐 수도 있다고 말한다. 은행나무처럼 이성과 감정도 한데 깃들어 있다는 주장은 흥미롭다.

감정의 목적보다 흥미로운 몸과 마음의 관계가 최근 뇌과학의 관심사를 보여준다. 감정은 어떻게 진화했는지, 핵심 정서가 무엇인지 살피는 동안 인간은 도대체 무얼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살피게 된다. 리처드 도킨스나 에드워드 윌슨 같은 과학자의 관점은 어떤 철학적 질문보다 ‘나’ 혹은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분명하게 설명해주기도 한다. 하지만 생각과 감정이 어떻게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지, 원하기와 좋아하기가 차이가 무엇인지 살피는 동안 과거로부터 그리 멀리 오지 못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스마트폰이 바꿔놓은 인류의 뇌 구조, 아니 그것이 인간의 진화에 미친 영향은 머나먼 미래에야 밝혀질 수 있는 영역이겠으나 우리가 실감하는 극적인 변화는 생각과 감정의 변화보다 흥미롭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해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 호모 파베르는 감정과 이성을 하나로 통합하는 과정을 온몸으로 보여준다. 수학자이자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 일컫는 데카르트조차도 인간의 물질적 몸과 비물질적이고 파괴할 수 없는 영혼으로 이루어졌다는 이원론을 주장했다. 과연 그런가? 이 질문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영원한 사랑, 종교적 믿음, 천국과 내세, 공덕과 업보 등 형이상학적 세계와 인간의 죽음에 대한 공포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인간은 도대체 어떤 존재일까.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려 있다는 주장은 고대 철학부터 뉴에이지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내면, 즉 감정에 역할과 중요성을 새삼스럽게 한다. 근대 계몽주의 이후 이성과 감정의 위계질서가 분명해지듯 싶지만 일상을 사는 우리를 지배하는 건 여전히 이성이 아니라 감정이다. 전가의 보도로 휘두르는 ‘내 맘이야’라는 말속에 숨은 진의는 발화자조차 알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자기 마음의 원인과 변화를 통제할 수 있거나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가능하지 않은 일인 줄 알면서 ‘해석’하려는 시도는 헛되고 헛되다. 다만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감정을 배제하거나 느낌, 추측, 판단을 줄이려는 노력은 필요하다.

저자는 우리가 느끼는 감정의 원인을 밝히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감정을 배제한 선택과 판단이 가능한가? 좌절과 분노, 쾌락과 행복은 어떻게 이해할까? 뇌과학이 밝혀낸 이론과 설명이 ‘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시간을 내 읽어볼 만하지 않을까?

대체로 한 권의 책은 분명한 목적을 향해 독자들을 끌어간다.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동원하고 저자의 생각을 보태 주장하고 설명한다. 독자를 설득하기 위해 다양하게 시도되는 방법이 효과를 거둘 수도 실패할 수도 있다. 그렇게 지난한 과정을 거쳐 한 권의 책은, 저자와 독자는 서로 타협하거나 어느 한쪽이 굴복, 좌절하거나 공감하고 연대한다. 냉소와 분노를 자아내는 책도 있고 감동과 흥분을 유발하는 책도 있다. 책을 읽은 후에 그 다양한 감정도 결국 저자의 글이 독자의 뇌를 자극하는 방법과 테크닉에 달려 있다. 좋은 책은 일시적으로 흥분을 유도하는 대신 단 한 문장 혹은 한가지 생각의 화두를 던진다. 오래 여운이 남아 두고두고 생각하게 하는 책, 설명하기 어려운 감동을 주는 책, 다른 책으로 독자를 이끄는 책이야말로 우리가 읽고 싶은 글이 아닌가.

시간이 해결해주는 많은 일과 달리, 그 자리

에 머물러 박제되는 생각과 감정도 있는 법이다. 감정의 뇌과학을 읽는 독자들은 결국 최근의 연구 동향이나 새롭게 밝히진 인간 뇌의 신비가 아니라 ‘나’ 자신을 읽게 된다. 모든 독서가 자기 이해의 출발이듯, 타인과 세상을 읽는 일과의 선후 관계가 어찌 됐든 결국에 자신을 돌아보는 행위가 이성과 감정에 대한 우리의 태도여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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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의 물리학 - 아침노을과 저녁노을이 다른 이유에 관한 물리학적 탐구
황춘성 지음 / 에이도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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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질 녘, 저녁놀, 일몰, 낙조, 노을, 석양...푸른 시간, 매직 타임, 개와 늑대의 시간은 모두 동일한 시간을 가리킨다. 박재삼 시인의 「울음이 타는 가을 강」 또한 이 시간을 배경으로 삼았다. 낮이 저물고 밤이 시작될 무렵, 어둠이 걷히고 여명이 밝아올 즈음에 하늘빛은 형언하기 어렵다. 기묘한 아름다움과 슬픔, 아쉬움과 기대가 교차하기 때문일까. 붉게 물든 하늘의 장엄한 모습이 치열했던 일상과 존재론적 허무를 위로하기도 한다. 인간은 본래 하잖은 존재라며 겸손을 가르치고, 덧없는 시간 앞에서 무엇을 망설이느냐며 용기를 내라고 속삭인다. 


“어느 날 나는 해가 지는 걸 마흔세 번이나 보았어!”


몹시 슬플 때는 해지는 모습이 좋다는 어린 왕자의 말 때문이었을까. 아주 가끔, 붉은 노을이 아름다운 지평선에서 춤을 추는 상상을 한다. 얼마나 슬펐으면 하루에 마흔세 번이나 해가 지는 게 보고 싶었을지 궁금한 게 아니라 그렇게 마음대로 석양을 볼 수 있는 권력과 자유가 부러웠는지 모르겠다. 원하는 걸 손에 넣을 수 있는 사람은 억압된 욕망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다. 소혹성 B-612를 소유한 자의 슬픔은 지구별에서 오늘을 사는 70억 분의 1의 마음을 헤아리기 어렵다. 그래서일까. 어린 왕자는 부끄러움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시는 주정뱅이, 자기가 소유한 별을 세는 사업가, 가장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사막의 여우를 만나면서 조금씩 생각이 바뀐다. 자신을 객관화하기는 어려우나 타인을 평가하는 일은 너무 쉽다. 어린 왕자의 슬픔은 우리가 잃어버린 동심이 아니라 타인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 때문이 아닐까. 


현실에서 의자를 옮겨 앉으며 언제든 석양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현실적으로 지구는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노을은 너무 빨리 지기 때문이다. 지구의 둘레는 대략 40,000km이다. 지구의 하루에 해당하는 24시간으로 나누면 1666.666km이다. 평균 1,667km/h 속도로 움직이는 지구의 자전 속도는 현기증이 날 정도다. 지구는 1초에 463미터를 달린다! 극지방의 자전 속도는 0km/h이지만 우리나라의 자전 속도는 1,337km/h이다. 고속도로를 시속 130km로 달리는 자동차는 속도위반인데 우리는 그보다 100배 빠른 속도로 돌고 있는 지구별에서 불편 없이 살아간다. 때때로 자명한 과학적 진실이 비현실적이어서 사람들은 내일 당장 죽을 것처럼 살고, 영원히 살 것처럼 배우는 걸까.


황춘성은 ‘왜 아침노을과 저녁노을이 다르지?’라는 질문에 답을 찾아 한 권의 책을 썼다. 질문과 호기심은 관심의 다른 이름이다. 관심이 사랑의 시작인 것처럼. 알고 싶은 마음이 열정을 만들고 행복을 부른다. 아주 가끔, 알면 다치기도 하고 모르는 게 약일 수도 있으나 대체로 무지는 미필적 고의에 의한 ‘악’으로 판가름 난다. 지난 역사와 오늘의 현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해와 달이 가하는 조석력은 비슷하므로, 달이 해라면, 지구가 자전할 때 해로부터 멀어지는 쪽의 지구를 비추는 햇빛은 가까워지는 쪽의 지구를 비추는 햇빛보다 늘 더 많은 공기분자와 만나야 했다.”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저녁노을이 아침노을보다 붉은 이유를 깨닫게 된다. 눈에 보이는 사물과 현상 이면에는 늘 필연적이고 합리적인 이유가 숨어 있다. 물리학은 이성의 영역으로 붉은 저녁노을을 설명한다. 이문세는 “붉게 물든 노을 바라보면 슬픈 그대 얼굴 생각이나 고개 숙이네 눈물 흘러 아무 말 할 수가 없지만 난 너를 사랑하네 이 세상은 너 뿐이야 소리쳐 부르지만 저 대답 없는 노을만 붉게 타는데...”(「붉은 노을」)라고 노래했으나 황춘성은 흡수와 편광, 파동과 도플러 효과, 중력과 조석력의 세계를 보여준다. 가히 감성 파괴자라 할만하다. 아니, 오히려 모르고 싶은 이야기를 상세하게 설명한다. 마치 다섯 살짜리 조카에게 산타 할아버지가 거짓말인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하는 얄미운 삼촌 같다. 그러나 산타 할아버지와 달리 붉은 노을의 비밀을 저절로 알게 되는 사람은 없다. 하늘에 떠가는 흰 구름도,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상도 의식적 노력과 적극적 성찰과 비판적 안목이 없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사는 대로 생각하고 보이는 대로 믿는다. 그래서 노을의 물리학은 인생의 물리학, 세상을 위한 물리학으로 고쳐 읽고 싶어졌다. 사람들은 왜 그런지, 세상은 왜 이런지 들여다보고 싶어지는 건 하루 이틀의 문제가 아니지만 누구도 그럴듯한 답을 내놓은 적이 없다. 그래서 여전히 저마다 흥분된 목소리만 높이는 걸까. 오늘 저녁에는 조금 더 아름다운 저녁노을을 보고 싶다. 아니 매일매일 그렇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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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ldenbug 2022-11-09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얄미운 삼촌입니다.
리뷰를 아름답게 써 주셔서 고맙습니다. ^^

sceptic 2023-12-26 15:4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사이언스 픽션 - 과학은 어떻게 추락하는가
스튜어트 리치 지음, 김종명 옮김 / 더난출판사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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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어떻게 추락하는가. 도발적인 질문이 계속되지 않으면 오류와 무지는 뉴스와 상식으로 둔갑한다. 지치지 않는 문제 제기는 건강한 사회의 척도다. 계속되는 질문과 비판적 시선 앞에 실체적 진실이 잠시나마 드러날 뿐이다. 사이언스도 픽션이 될 수 있다. 과학자도 소설을 쓴다. 스튜어트 리치가 말하는 ‘사이언스 픽션science fiction’은 그 자체로 모순이다. 이성과 합리, 논리와 근거가 통계 조작과 무수한 인간의 의지에 따라 어떻게 일그러질까.


과학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척도는 재현성과 투명성이다. 어떤 실험 결과, 유력한 과학 잡지에 실린 논문이 재현 불가능하다면 어떨까. 그 실험과 통계 분석 과정이 투명하게 공개되지 않아도 괜찮을까. 경제와 정치, 사회와 문화 분야에서 엇갈리는 서로 다른 주장은 하물며 ‘내가 옳다’는 주장 자체가 무의미하지 않은가. 서로 다른 관점, 엇갈리는 주장 속에서 우리의 태도는 어떤가. 과학적 태도가 우리 일상에서 절실한 이유는 무엇일까.


영국의 코미디 프르그램 <브래스 아이Brass Eye>에서 인용한 “그것이 과학적 팩트다. 증거는 없다. 하지만 과학적 팩트다.”라는 문장이 ‘과학은 사회적 활동이자 인간의 실수를 드러내는 도구’라는 서문 앞에 붙어 있다. 무지는 학교를 다닌 기간이나 학위의 문제가 아니다. 직업과 나이, 종교와 인종과 성별과는 더더욱 거리가 멀다. 가장 객관적이고 논란의 여지가 없어 보이는 과학의 ‘픽션들’을 살피는 동안 참담해진다. 인간은 얼마나 미성숙하고 한없이 부족한 존재인가. 그래서 누군가는 종교를 찾고 오직 모를 뿐인 세계에 대한 이해를 포기하거나 가슴 뛰는 삶을 살라고 충고하는 건 아닐까. 


누구나 깊이 고민하고 생각하며 산다고 착각하지만 대개 ‘생각’의 방법과 태도가 한없이 부족하다. 안다는 믿음이 편견과 오해를 만들고 집단 최면에 사로잡힌다. 각종 건강식품부터 생활용품에 이르기까지 과학적 실험과 검증을 거쳤다는 주장에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시간과 돈과 노력을 허비하며 사는지 모른다. 그 구체적인 사례를 짚어내기 위해 이 책을 읽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각자의 상식, 모두의 팩트, 변함없는 진실은 언제나 안녕하지 못하다. 


저자는 과학의 작동 방식을 설명하고 그 반복 재현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우리에게 익숙한 짐바르도와 밀그램의 심리실험으로 포문을 연다. 과학의 위기를 자초한 과학자들의 대표적 사례에 당당하게 이름을 올린 한국의 황우석을 우리는 잘 기억하고 있다. ‘조작, 편향, 부주의, 과장’이라는 네 가지 문제점을 통해 실수와 오류를 은폐하려는 학자들의 속내를 들여다본 후에 잃어버린 과학의 정신을 되찾는 길을 제시하며 책은 마무리된다. 삐뚤어진 현실은 현상에 불과하다 본질적인 문제는 대개 공명심, 권력, 이해관계와 결탁한 자본주의 논리가 숨어 있다. 넓은 의미의 정치적 요소가 발견되는 과학계의 허구는 특히 위험해 보인다. 우리는 과학이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인류 문명의 발달과 미래를 책임지고 있는 최소한의 객관적 지식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찰스 다윈의 말처럼 과학자는 “바라는 것도, 애착도 없어야 한다. 단지 돌과 같은 심장을 가져야 한다.” 어렵고도 어려운 일이다. 인간의 심장은 돌이 아니고 감정을 담당하는 변연계가 본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주관적 판단과 편견, 감정이 뒤섞인 인간의 과학은 그래서 더욱 위험하다. 각종 실험과 통계로 입증된 이론, 권위 있는 잡지에 교차 검증이 끝난 논문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받아들일 수 있을까.


보편주의에 입각해서 사심없이 공동체를 위해 조직적인 회의주의를 채택하자는 머튼 규범이 현실에서 가능할까. 어떤 조직에서 일이 진행되고, 정부에서 정책이 시행되고, 국회에서 입법활동이 이뤄지는 과정을 생각해 보면 현실은 더욱 심각해 보인다. 과학적 엄밀함까지는 아니어도 머튼 규범의 필요성 정도는 공감해야 하지 않을까. 각자의 진실, 각자의 상식, 각자의 공정, 각자의 정의, 각자의 논리가 오늘도 상대방을 겨누고 공동체를 지옥으로 이끈다. 과학은 우리가 지켜야 하는 최소한 객관성을 확보해야 하지 않을까. 한발 나아가기 위한 시작은 어디서부터인지 몰라서 모두 숨죽여 엎드려 있는 건 아닐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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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조금은 이상한 것을 믿는다 - 누구나 한 번쯤은 믿어봤을 재밌거나 이상하거나 위험한 생각들, 스켑틱 특별 합본호
니콜라 고브리트 외 지음, 스켑틱 협회 편집부 엮음 / 바다출판사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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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무지가 빚어낸 상상력은 아름답다. 그러나 쥘 베른의 『지구 속 여행』(1864)이 무지의 산물은 아니다. 우리는 모두 조금은 이상한 것을 믿지만 인류의 집단지성은 그것이 개연성 있는 허구의 세계인지, 이성적으로 가능한 과학적 현실인지 구별할 정도의 이성은 갖추게 됐다. 지구공동설에 기반한 이 기막힌 상상의 세계는 이제 SF 소설로 분류됐지만 당대에는 북극 탐험의 기폭제된 어느 사내의 미친 열정에 빚지고 있다. 지구 내부가 비었다는 공동설을 주장한 존 클리브스 시머스는 북극을 통해 속이 빈 지구 내부로 들어가려는 꿈을 꾸며 현실과 상상의 세계 양쪽에 모두 영향을 미쳤다. 탐험대가 마침내 북극에 도착하기 불과 수십 년 전인 1829년에 49세로 사망했으나 그의 아이디어는 다른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이상한 것을 믿는 게 꼭 삶에 부정적 영향만 미치는 건 아니다. 동전의 양면처럼 유토피아를 꿈꾸고 지구의 내부에 또 다른 구체가 존재한다는 상상력은 환상적이지 않은가. 그러나 대체로 지나치면 독이 된다. 현실 부정의 논리로 작용하거나 극단적 맹신주의로 흐를 때는 자신의 삶을 망가뜨린다. 종교, 과학, 신념 등 그것이 어떤 명목이든. 


스켑틱 협회는 1992년 마이클 셔머가 설립한 비영리 과학 교육기관이다. 한국 스켑틱이 계간지 형태로 3, 6, 9, 12월에 발간된다. 이 책은 인간의 멍청함에 대한 보고서다. 전혀 이성적이지 않은데 생각하는 동물이라는 착각 속에 사는 인간의 무모함에 대한 비판적 시선은 불편하다.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학문인 과학 분야조차 이상한 믿음은 계속된다. 일상에서 부딪치는 문제는 너무 익숙해서 과학이라는 말이 남발된다. 인상은 과학이고, 침대도 과학이고, MBTI도 과학이고, 혈액형과 별자리도 과학이다. 물은 답을 알고 있고 휴대폰은 암을 유발하고 음식으로 뇌를 고치며 음이온이 건강을 관리하는게 가능할까. 회의적인 회의주의의 시선은 리처드 도킨스, 스티븐 핑거, 샘 해리스 등 55,000명 이상의 회원을 거느린 협회의 명성만큼 세상을 구원하지 못하고 있다. 지속적인 해명 혹은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아니 세상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믿는 걸까. 


특허청이 “음이온과 원적외선을 방출하는 토르말린, 모나자이트, 옥, 황토가 체온상승, 혈액순환 및 신진 대사 촉진, 성인병 예방 등에 효과가 있다”라는 발명가의 엉터리 주장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인정해준 셈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런 특허 중 상당수가 과거 미래창조부가 관리하는 구각연구개발 사업으로 개발되었다는 것이다. 정부가 세금으로 소비자의 건강을 위협하는 엉터리 기술을 개발하고, 특허까지 내주었다는 뜻이다. - 108쪽


인지 부조화, UFO, 예지몽, 유체이탈, 심령사진 등 이 책에는 성격과 운명, 일상 속 과학, 저세상에 관한 이상한 믿음 등 조금씩 한번은 그럴 수도 있는 게 아닌가 싶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여전히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들, 파란색 냄새를 맡는 소녀, 천국을 보았던 임사 체험자 등 우리 주변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야기’들이 확대 재생산된다. 인간의 본성 중 하나인 이야기에 대한 호감이 만들어낸 재미로만 치부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어느새 진실이 되고 운명을 좌우하기도 한다. 종말론을 믿는 사람들부터, 점을 보는 사람들, 징크스를 믿는 운동선수까지 우리 곁에는 다양한 형태의 이상한 것들이 널려 있다. 이것은 단순히 믿음의 문제가 아니다. 사고 방식과 태도의 문제다. 


마이클 셔머의 『스켑틱』을 인상 깊게 본 터라 이 책은 정기구독 잡지의 특별판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듯하다. 국내외 저자들이 들려주는 유사 과학에서 음모론까지 다양한 ‘이상한 것’들이 소개되고 그 믿음의 근거와 사람들의 관심을 보여준다. 물론 각 주제를 맡은 회의주의자들은 그 실체를 파헤쳐 분명한 증거 혹은 논리적 근거로 이상한 건 그냥 이상한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의심하고 질문하고 성찰하는 게 귀찮으면 이상한 것을 믿으며 살면 된다. 우리는 자기 삶의 방식을 선택하고 목적과 방법에 따라 나름대로 재미와 행복을 추구하며 산다. 다른 걸 틀렸다고 하지 않는다면 삶은 각자의 영역에 속한다. 그것이 타인에게 주는 영향, 공적인 영역에서의 태도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면. 그러나 대개의 경우 사회적 관계, 정치적 표현, 종교적 태도, 일상적 습관에 드러나는 다양한 ‘이상한 것’들을 우리는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어떤 호소의 말도 들리지 않고, 진실의 조건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살 수는 없지 않는가. 


확신을 가진 사람은 마음을 바꾸기 어렵다. 그에게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그는 당신을 외면할 것이다. 사실이나 수치를 보여주면, 그는 출처를 물을 것이다. 논리에 호소해도 그는 논점을 피해갈 것이다. - 레온 페스팅거, 1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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