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그림 읽기 - 알베르토 망구엘의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강미경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4년 3월
평점 :
품절


  그림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는 개인마다 다르다. 그림은 미술의 한 분야이지만 때때로 예술을 대표하기도 한다. 통념상 미술하면 그림을 떠올린다. 조각이나 건축도 미술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림은 그만큼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예술적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어린 시절에 수많은 시간들을 그림 그리기에 할애한다. 목적도 이유도 없다. 그림은 그저 하나의 놀이이고 유희일 뿐이다. 그것이 실용적인 목적으로 초상화나 종교화와 결합되었고 예술의 중추로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실용적인 목적이든 예술적인 목적이든 우리는 그림을 외면하고 살아갈 수는 없다. 다만 박물관과 전시관 속에 박제되어 버린 예술 작품들을 찾아다니며 관람해야 하는 번거로움은 새로운 예술의 향유 방식이기는 하다. 내가 내 발로 미술관을 찾아간 것은 10년도 되지 않는다. 슬픈 일인지 모르지만 책을 통해서 그림과 예술에 흥미를 느꼈고 직접 찾아보고 싶은 욕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예술의 전당이나 서울시립미술관에 전시회나 덕수궁, 인사동 전시회는 기회가 될 때마다 찾게 된다. 사진이나 다른 전시회도 마찬가지지만 막연한 감상 속에서 부딪히게 될 희열이나 정서적 충격을 기대하는 것은 쉽지 않다. 예를 들어, 덕수궁에서 합스부르크가에서 소장했던 비엔나미술관의 그림들을 보면서 당시와 역사와 왕가의 계보를 모른다면 얼마나 미적 감흥을 느낄 수 있을까 싶었다. 중간 중간 배경 지식을 깔아 놓기도 했고 오디오 설명기계도 비치해 놓았다. 구석구석을 들여다보도 감상하고 확인하는 그림 감상 방법은 상징과 알레고리로 똘똘 뭉쳐진 그림들의 해석 방법이다. 시대와 그림에 따라 감상 태도와 방법이 달라지는 것이다.

  알베르토 망구엘의 <독서의 역사>는 책에 관한 책으로 손 꼽을 만한 책이다. 학문과 예술을 넘나들며 유목하는 지식인들이 부럽기만 하다. 우리와 다른 지적 풍토 때문인지, 교육환경 때문인지 모르지만 바다 건너편에는 그런 인간들이 많다. 진짜 부럽다. 단순 비교를 통해 그들의 비교우위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지적 편력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데 망구엘의 눈을 빌려 몇 명의 작가를 살펴보고 몇 장의 그림을 이해하는 일은 중요하지 않다. 그가 말한 것처럼 내 방식대로 예술을 이해하고 바라보는 안목이 중요하다. 그것은 내 삶을 풍요롭게 하거나 타인과 사회를 바라보는 포용적인 시선과 넓은 시야를 가능하게 한다.

  이 책에는 조앤 미첼의 <두 대의 피아노>, 로베르 캉팽의 <화열 가리개 앞의 동정녀와 아기 예수>, 티나 모도티의 ‘무제’, 라비니아 폰타나의 <토니나 초상화>, 메리애나 가트너의 <서 있는 네 사람>, 필록세누스의 <이수스의 전투를 묘사한 모자이크화>, 파블로 피카소의 <통곡하는 여인>, 알레이자디뉴의 ‘성 베드로 조각상’, 클로드-니콜라 를두의 ‘아르케스낭’, 피터 아이젠만의 베를린 홀로코스트 기념관 모형, 가라바조의 <일곱 가지 자비스런 행동>에 대한 저자의 감상을 적혀 있다. 저자의 박학과 다양한 인문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시대의 흐름과 문화적 배경은 물론 문학과 역사를 아우르는 공시적, 통시적 관점의 시선들이 다채롭게 펼쳐진다.

  한 작가의 한 작품을 중심으로 작가의 작품 세계와 그를 둘러싼 주변 풍경을 재미있게 보여준다. 특별한 형식 없이 자유롭고 편안하게 풀어나가는 글이기 때문에 지루하지 않고 편안하게 그림들을 즐기며 감상하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인쇄 상태와 지질이 양호하기 때문에 조잡하지 않다. 편안한 음악과 마음의 여유가 있다면 이 책과 함께 해도 좋겠다. <독서의 역사>에 대한 좋은 기억과 강유원의 추천을 믿고 본 책이다. 책을 선별하고 도서목록을 만들어 나가는 일은 즐거움이면서도 어려운 일이다.

  미술에 관한 많은 책들이 있지만 그 책이 도구가 되어 예술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는 안목이 길러진다면 나름대로 좋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단순한 해설이나 주관적인 감상, 배경지식의 나열을 통해 독자들에게 좋은 안내자가 될 수도 있지만 해설서 이상의 의미를 찾을 수는 없다. 그래서 저자는 이런 말을 한다.

예술작품은 우리에게 감동과 영감을 주는 창조행위다. 그림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결코 말로 다 표현할 수는 없다. 물론 예술작품은 해석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도 역시 경험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는 예술작품의 본성 때문에 완전하고 결정적인 해석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예술작품은 많은 것을 시사하면서도 동시에 애매모호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 P. 230

  수전 손택은 ‘해석은 지식인이 예술에 가하는 복수’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저자는 예술작품은 해석될 수 있다고 말한다. 경험의 산물이기 때문이라는 근거가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는 작품에 대한 타당한 설명과 감상들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서로 다른 견해를 밝힌 두 사람의 관점은 조금 다르다. 하지만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지도 모를 문제이다. 그것은 관찰자 혹은 독자 개개인의 취향의 문제이기도 하다. 알고 보든, 보는 것만으로 느끼든 예술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와 진실은 다양하게 변주될 것이다.

  그것이 단 하나의 해답을 품고 있거나 직관적인 감상만 가능하다면 예술은 더 이상 예술이 아닐 것이다. 현실과 예술의 관계, 해석과 감상의 문제는 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조금씩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가을이 깊어간다. 자연보다 아름다운 예술은 없다. 자연에 대한 모방과 외경에서 예술이 출발한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만큼 창 밖에 가을비가 아름답다. 이 비 그치고 나면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을 보여주겠지만.

그림이든 조각상이든 결국 모든 형상은 망막을 현혹시켜 발견이나 기억의 환상을 야기하는 얕은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마치 우리가 입자 하나하나마다 우리의 얼굴과 목소리를 담고 있는 미립자로 이루어진 무한소의 나선에 불과한 것과 마찬가지다. - P. 432

운이 좋다면 우리는 그 안에서 진실의 작은 조각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어떤 책을 막론하고 예술작품 속에 담긴 진실을 따라잡기에는 한계가 있는 듯하다. 반신반의하면서 되는 대로 아무렇게나 적어 내려간 이 책도 예외가 아니다. - P. 432



071019-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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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정치를 만나다 - 위대한 예술가 8인의 정치코드 읽기
박홍규 지음 / 이다미디어 / 2007년 8월
평점 :
절판


  실존주의 철학자 부버는 “교육은 만남이다.”라고 선언했고, 볼노우는 “만남은 교육에 선행한다.”고 말했다. 교육에서 뿐만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행위 이전의 문제다. 서로 자아를 확인하고 관심과 공감이 형성될 때 만남은 의미를 갖는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아니라 학문과 예술도 마찬가지다. 겹쳐지고 누벼지는 지점이 없으면 만남은 불가능하다.

  최근 들어 ‘○○, ○○를 만나다’는 책 제목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특별한 홍보가 필요 없는 무임승차를 노린 새로운 마케팅 기법인 것 같다. 이다미디어의 편집팀과 홍보팀 관계자들의 각성을 요구한다. 책 제목이 성의 없어 보여 빛을 바란다. 박홍규의 책이 아니었다면 사지 않았을 <예술, 정치를 만나다>는 대중적인 시각과 접근법으로 박홍규를 새롭게 읽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위대한 예술가 8인의 정치코드 읽기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정치와 직간접적으로 자의든 타의든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예술가들의 면면을 살펴보는 책이다.

  루벤스, 괴테, 바그너, 베르디, 피카소, 채플린, 사르트르, 레논 - 이들이 그 주인공인데 인물들 사이의 연관성으로 묶이기는 힘들다. 음악 3명, 문학과 미술이 각 2명, 영화 1명으로 장르를 구분하지 않았으며 앞에 4명은 20세기 이전, 뒤에 4명은 20세기 이후의 인물들이다. 저자가 말하듯이 이밖에 정치와 관련된 예술가들은 더 많이 있지만 박홍규의 개별적 저작이나 다른 책에서 소개된 인물들은 제외되었다.

  중세를 벗어나 르네상스와 고전주의를 거친 예술의 특징들은 미술과 음악에서 공통적인 특성으로 나타난다. ‘일그러진 진주’인 바로크와 낭만주의는 전 시대에 대한 반발과 계승 발전되었다는 주지의 사실을 굳이 확인하지 않더라도 거장들의 삶은 역동적이었고 시대의 중심에 서 있었다. 당대 최고의 화가이자 정치가로서 화려한 삶을 살았던 루벤스나 괴테, 반유대주의와 히틀러의 추종으로 유명한 바그너, 그와 비교되는 이탈리아의 베르디의 삶은 역사와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너울거리는 한 인간의 모습과 고뇌하는 예술가의 면면들을 보여준다. 예술가도 정치적 동물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생각들을 작품 속에 반영하거나 작품과 무관하게 정치적 행위들을 남겼다.

  19세기의 국가주의와 민족주의 혹은 제국주의와의 결합으로 예술은 한층 더 정치성을 띠게 된다. 격동의 20세기 명멸했던 수많은 예술가들 중에 <게르니카>를 각인시킨 피카소나 온몸으로 세상을 풍자했던 채플린, 자유와 정의를 추구했던 사르트르, 반전평화의 메시지를 노래에 담아냈던 존 레논의 생은 그들이 남긴 정치적 인간으로서의 모습이 먼저 다가오기도 한다. 만남이 예술에 선행한다는 전제가 가능하다면 표현주의 관점이라는 편향된 시각이 아니라 작품을 이해하기 위한 최소한의 선행 조건으로서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

  저자는 연대기적 요소에 따라 이들의 삶을 단순화하여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특유의 방대한 인문학적 지식과 당대의 역사와 사회, 정치 환경에 대한 해석으로 그들의 삶을 이야기하고 그들의 예술을 해석하기도 한다. 예술에 대한 모든 비평과 해석이 주관적이라는 전제하에 박홍규의 관점을 들여다본다면 공감과 관심을 충분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정치적 상황에 따라 부침이 심했던 예술가들의 삶은 누구보다도 예민하게 현실 상황에 반응했을 것이며 그들이 남긴 작품들 속에는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고뇌와 절망, 환희와 열망들이 담겨있을 지도 모른다. 조금 다른 방식으로 예술과 예술가들을 정치적으로 바라보는 것도 새로운 즐거움으로 남는다. 전혀 새로운 시도는 아니지만 ‘정치’라고 하는 하나의 코드로 읽어내는 방법은 충분한 가치와 재미를 선사한다.

  <아나키즘 이야기>에서 존 레논의 ‘이매진’으로 박홍규의 아나키즘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던 장면이 떠올랐다. 책을 읽고 귓가에 맴도는 노래를 한참동안 컬러링으로 사용했다. 예술은 고급과 저급으로 나눌 수 없고 특히 일본을 통해 유입된 미술 - 예술에 대한 개념이 어떻게 오해되었고 100년 이상 이 땅에 뿌리 깊게 고정관념을 만들어 왔는지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삼중당 문고판 <구토>를 책꽂이에서 다시 꺼내 읽어보아야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채를린 영화를 다시 꼼꼼히 보고 싶은 마음도 생겼다. 예술의 전당에서 보았던 <오르세미술관전>보다 최근에 덕수궁 미술관에서 보았던 <비엔나미술사박물관전>이 인상 깊었던 이유를 되새겨 보았다. 합스부르크 왕가 컬렉션답게 바로크의 거장들이 대거 등장했기 때문이거나 일목요연한 하나의 주제와 정리가 되어있었기 때문일까? 수백 년 전 유럽의 왕들의 호사 취미에 대한 거부감이나 가려진 민중들의 고통의 신음소리가 들렸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직접 보지 않고 먼저 읽고 알고 규정 지어버리는 그림에 대한 태도 때문일지도 모르겠으나 눈에 낀 색안경이나 관념성을 지워버리고 싶은 욕망이 앞선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게 아니라 그림은 보는 만큼 알게 되는 것은 아닐까 싶다.

  한 권의 책을 통해 예술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 아니라 다시 바라보는 계기가 되었다. 저자의 말대로 ‘모든 예술은 정치적이다’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은 하나의 태도가 아니라 당연한 말인지도 모른다. 예술의 순수성이라는 용어가 애매하고 모호해진다. 순수성은 어디까지라고 말할 수 있을까? ‘자유’라는 가장 기본적 가치에 충실해야할 예술의 본모습을 기대하는 것은 ‘정치적 자유’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인간 영혼의 가장 본질적인 자유를 위해서만 복무하는 예술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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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2007-08-29 0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는 행위에 의해서도 가치가 만들어지지만 만든 행위 자체에서도 가치가 만들어진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보는 시각은 시대에 따라 사람에 따라 무수히 다양해지니까 꼭 가치를 부여하는 행위를 본다에서만 찾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sceptic 2007-08-30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연한 말씀이시죠. '꼭' 가치를 부여하는 행위를 본다에서만 찾을 수 없겠죠...만든 행위가 기본이고, 보는 행위는 다른 시각일 뿐이죠.
 
행복의 건축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집을 짓고 사는 동물은 인간만이 아니다. 조류에서 포유류에 이르기까지 여러 동물들이 집을 짓고 산다. 다만 기능적인 목적 이외에 아름다움이라는 목적을 더해서 집을 짓는 동물은 없다. 더구나 주거공간인 집의 개념을 넘어 예술이 되어 버린 ‘건축’은 인간만이 지닌 고유한 영역이 되었다. 건축은 ‘공간’이다. 비움으로 얻어지는 공간.

  그릇은 비어있는 공간을 위한 도구이다. 예술의 경지에 이른 도자기라도 마찬가지도 실용적 측면에서 보면 빈 공간을 위한 낭비적 요소일 뿐이다. 집도 마찬가지다. 실용적 목적에서라면 기후나 지형 주변 환경을 고려해서 가장 최적의 공간만을 고려하면 된다. 과학 기술의 발달로 주거의 형태와 문화가 형성되면서 집은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이끌어 나가기도 한다.

  건축은 이제 인간의 행복과 직결된다. 살아가는 동안 어떤 건축물 안에서 얼마만큼의 시간을 보내는지 생각해 보자. 인간의 옷만큼이나 친숙하고 중요한 공간을 만드는 건축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삶의 조건이다. 그 조건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것이 건축가만의 몫일까?

  철학자보다 에세이스트로 우리에게 익숙한 알랭 드 보통의 신작 <행복의 건축>은 건축에 관한 에세이다. 건축에 관한 기술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은 물론 아니고 건축의 학문적 관점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전문 건축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더 필요한 이야기들인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건물이 우리에게 주는 느낌과 역할 그리고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들을 생생하게 전달하기 때문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건축의 중심에는 항상 사람이 놓여 있다. 단 하나의 개인과 가족을 위한 집을 짓는 경우도 있지만 여러 사람을 위한 건물을 짓는 경우도 있고 하나의 거대한 도시를 위한 건축도 있다. 다양한 종류의 건물들은 그 목적에 따라 서로 다른 모습으로 제 역할과 소임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느낌과 미감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게 표현될 수 있다.

  보통은 이 책을 통해 건물을 통해 인간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의 의미를 곱씹게 해 준다. 다소 사색적이고 주관적인 느낌과 개인의 감정과 정서가 객관적 대상을 왜곡할 우려가 있으나 저자의 관점은 한 쪽에 치우쳐 고개를 갸웃거리게 할 만큼 삐딱하거나 독선적인 것은 아니다. 건축이 인간에게 주는 행복과 불행 혹은 건축의 역사와 문화가 각 지역에 따라 어떤 방식으로 변화해 왔는지를 여유 있고 편안한 마음으로 다가설 수 있게 해준다.

  어떤 책이든 마찬가지겠지만 책의 장점은 뒤집어 보면 단점으로 바뀐다. 건축과 관련된 인문학적 접근이라는 나의 개인적인 판단과 다르게 지극히 주관적이고 감상적인 건물들에 대한 인상 비평이라는 느낌을 줄 수도 있다. 보는 사람에 따라 책의 판단이 달라질 수 있을만큼 다양한 색깔을 띤 책이라는 말은 아니지만 자칫 ‘건축’에 대한 지식이나 건축 관련 서적으로 오해하는 독자에게는 곱지 않은 시선을 받을 수 있을 법하다.

  행복을 위한 건축은 어떤 것일까? 저자는 우선 이렇게 평범하지만 거시적 관점의 주제를 던지면서 이 책을 시작한다. 집이라는 사적이고 물질적인 장소와 심리적인 공간으로 변화해온 과정들을 살펴보면서 왜 건축이라는 분야에서까지 인간의 삶과 행복이라는 문제를 연관지어 살펴보아야 하는지 저자는 말하고 있다.

“유용하고,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것을 뭔가 아름다운 것으로 바꾸는 것, 그것이 건축의 의무다.” 카를 프리드리히 싱켈은 그렇게 주장했다. “건축이 단순한 집짓기와 구별되는 것은 장식 때문이다.” 조지 길버트 스콧 경도 그렇게 말했다. - P. 52

  건축과 관련된 옛 문헌들과 전문가의 견해를 통해 저자는 건축의 의미와 역할들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들을 자주 제공한다. 숨 쉬고 살아가는 공간 전부가 건축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건축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 마치 잠을 자거나 음식을 먹는 것처럼 이제 건축은 우리 생활의 필수 여건이 되었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와 역할을 깊이 생각하거나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은 것에 대한 신선한 충격이다.

  어떤 스타일로 지을 것인가에 대한 질문도 말하는 건물에 대한 설명도 저자의 입장에서는 기존의 건물들에 대한 다양한 견해와 비평을 통해 답을 찾아가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건축에 대한 정보와 지식을 제공하는 책이 아니지만 사람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추억의 공간, 이상과 꿈을 실현하는 공간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다소 추상적이고 주관적인 견해라는 전제를 받아들인다면 이 책은 빈 들판에 인류가 이룩해 놓은 수직에 대한 꿈들을 점검하고 있다. 수많은 빌딩과 콘크리트 건물들의 삭막함 속에서 건축에 대한 관심과 열망은 어쩌면 사치에 불과한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 삽입된 건물들과 집들이 보여주는 공간과 건축에 대한 생각들을 우리 주변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전통적인 한옥이나 옛 공간들이 보여주는 여유를 떠올렸지만 현재 우리가 거주하고 있는 집을 둘러보면 여전히 먼 곳에 위치한 그들만의 담론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예술 작품에서는 질서의 베일을 통해 혼돈이 아른거려야 한다.”(노발리스) - P. 198

혼란과 질서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건물에서만 우리는 질서를 세우는 우리의 능력이 얼마나 고마운지 알 수 있다. - P. 203

  건축에 대한 다양한 정의 속에서 저자는 “아름다움은 부분들 사이의 일치된 관계의 산물이다.(233페이지)”라는 인상적인 말을 남겨 놓았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모든 공간에 대한 애정과 관심은 곧 행복과 직결된다. 고정관념을 깨거나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거나 그 둘이 잘 조화를 이루거나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공간들은 우리에게 행복을 주어야 한다. 삽화가 들어간 비닐 하드 커버로 표지를 감싼 책의 디자인만큼만 행복을 전해주는 집에 살고 싶다. 이 책은 손에 잡히는 촉감과 시각적 이미지, 물리적 실용성 측면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070520-0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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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비뫼 2007-05-21 0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저도 구입할까 하다가 미뤄둔 책인데 읽고 싶어집니다. 서평 잘 읽었습니다.
건축과 인간의 삶 그들의 관계에 대해 잠시 생각을 해봅니다.

sceptic 2007-05-21 1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국 인간을 둘러 싼 모든 것들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건축도 인간의 삶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참 많은 생각을 하면서 읽게 됩니다.

드팀전 2007-06-09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주의 마이리뷰 축하해요.^^

sceptic 2007-06-10 1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메일 받고 알았어요...^^...감사합니다...이 달 책 구입비 줄게됐어요...
 
홀로 앉아 금琴을 타고 샘터 우리문화 톺아보기 2
이지양 지음 / 샘터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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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창문 너머 멀리 바라다 보이는 녹음이 짙은 산에 바람이 분다. 나무들은 제멋대로 부는 바람에 몸을 맡겨 같은 방향으로 때로는 다른 방향으로 뒤척인다. 초록빛으로 가득한 숲의 나무들이 서로 엉켜 흔들리는 모습을 보면 바람 소리가 들린다.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유지태가 모으던 숲의 바람 소리들이 들리는 것 같다. 귀에 들리지 않는 소리를 본다. 그렇게 소리를 듣지 않고 볼 수도 있다. 눈으로 보는 소리도 때로는 마음을 흔든다.

홀로 앉아 금(琴)을 타고 홀로 잔을 들어 마시니
거문고 소리는 이미 내 귀를 거스르지 않고
술 또한 내 입을 거스르지 않네
어찌 꼭 지음(知音)을 기다릴 건가
또한 함께 술 마실 벗 기달 것도 없구려
뜻에만 맞으면 즐겁다는 말
이 말을 나는 가져보려네

  세상을 벗어나 절대 고독의 경지에 이른 사람의 시가 아니다. 조선 시대 어느 선비의 시 구절에서 청아한 거문고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시대의 지향하는 이상향이나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는 세월 따라 변해왔다. 우리 선조들의 지향점을 오늘에 되새기는 일은 복고적 현학취가 아니라 우리들 삶의 모습에 대한 성찰과 사색의 시간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태도는 늘 현재에 있지 않다. 과거 우리의 삶과 미래의 희망에 비추어 끊임없이 비교된다. 그래서 사람들이 느끼는 행복은 절대적 척도가 없는 상대적 가치라고 말한다. 내가 가진 것보다 남이 얼마나 가졌는지 확인하고 나의 행복이나 불행도 타인의 그것과 비교해서 결정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행복은 이 시를 지은 선비의 그것과 비교할 수 있을까?

  이지양의 <홀로 앉아 금琴을 타고>는 고문서에서 건져 올린 우리 전통 음악에 관한 이야기이다. 먼지 묻은 책들 속에서 소리를 건져 올리는 일은 무모해 보인다. 하지만 저자는 귀에 들리는 소리의 느낌들을 음악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통해 상상하게 해 준다. 직접 듣지 않고 음악과 관련된 책을 읽는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백번 읽어도 한 번 듣느니만 못하다. 그런 줄 알면서도 이 책을 쓴 저자의 목적은 분명하다. 이 책을 통해 우리 음악을 알리고자 하는 마음이다. 국수주의나 민족주의와 같은 거대한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오늘 한겨레에 최장집 교수의 ‘거대 담론’에 대한 비판을 읽으면서 입맛이 썼다. 논리와 정교함을 비판하기에 앞서 평화나 인권과 같은 거대 담론이 우리들의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는다는 자명한 진리가 그 첫 째 이유였고 그와 같은 논란이 벌어지는 것 자체가 유감스러웠다. 우리 삶과 직, 간접적으로 연관된 문제들을 쉽게 결론 내리거나 어느 한 쪽 편을 들 수가 없다. 다만 건강한 토론과 논쟁들 속에서 우리 사회의 미래 가치들이 떠오르고 정치와 사회 전반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결론들이 도출된다면 좋겠지만 소모적인 논쟁으로 흐를 수 있다는 우려가 드는 것은 우리 사회가 가치 지향적이지 못하다는 개인적인 생각때문인지도 모른다.

  책과 관련된 잡다한 비판이나 분석도 마찬가지다 우리 음악이기 때문에 들어야 한다거나 옛것이니까 되살려 전통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우리가 많은 것을 잃어가고 있다는 뼈아픈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작은 소득이다. 듣기 싫지만 우리 음악이니 열심히 찾아 들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다만 귀에 익숙하고 여러 사람이 좋아하는 음악과 우리 음악은 얼마나 멀어져 있는가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그 역할을 충분히 했다고 본다.

  우리 옛 음악에 관한 문화를 소개하는 것으로 이 책은 시작된다. 수룡음이나 염양춘, 봉황곡, 대취타 등 개별 곡을 통해 역사와 그 주변을 상세히 설명하는 대목은 기억에 오래 남을 수가 없다. 제목만 들어보았거나 처음 듣는 곡들에 대한 설명이 가슴에 남지 않는다. 한 곡 한 곡 찾아 들으면서 이 책을 음미하는 방법이 가장 좋은 이 책의 사용법이다. 도산십이곡이나 농부가, 회심곡에 대한 설명들은 가사를 익히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소리를 가늠해 볼만 했다. 선비들의 애환과 멋뿐만 아니라 서민들이 즐겼던 곡들도 소개되어 있으며 5장에서는 우리 귀에 가자 익숙한 판소리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져 있어 다행스럽다.

  지루한 음악 이론이나 우리 전통에 대한 맹목적인 찬양과는 거리가 멀다. 기본적인 서술 방식은 저자 개인의 감상과 역사적인 관점의 해설이다. 객관적 사실들과 주관적인 감상이 적절하게 뒤섞여 지루하지 않고 저자의 이야기에 빠져든다. 특히 음악을 들을 수는 없지만 상당한 분량의 그림들이 이해를 돕는다. 듣는 대신 그림을 보며 상상할 수 있다. 다양한 풍속화와 민화, 사진 등 정성을 쏟은 자료들 때문에 지루하지 않게 읽을 수 있도록 배려한 편집이 돋보이는 책이다. 공을 들인 흔적들은 독자에게 말없이 전해진다.

  노래 가사와 한글 번역 부분들은 들리지 않을 뿐 분위기와 내용을 감상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다는 ‘회심곡’ 같은 노래는 꼭 한 번 제대로 들어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면 저자의 의도는 절반쯤 성공한 것 같다. 알지 못해서 보지 못하고 들리지 않는 많은 것들이 있다. 들리지 않는 우리의 귀를 조금은 더 열어 줄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이나 소리를 찾을 수 있는 책이다.


070517-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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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모든 얼굴 - 현대 회화의 사유
이정우 지음 / 한길사 / 2007년 1월
평점 :
품절


  지난 겨울 마그리트전에서 느낀 것은 일차적으로 원본에 대한 강렬함이었다. 진중권의 <미학오딧세이>나 다른 책들을 통해 만났던 그림들을 볼 때마다 원본 없는 이미지를 머릿속에 간직하고 있었다는 이상한 느낌이 든다. 마치 영화배우를 스크린이 아닌 실제로 만났을 때의 당혹감 같은 것일 수도 있겠다. 이미지를 통해 원본의 아우라를 잃어버린 예술을 접하는 일은 감동없는 그림 읽기에 불과할 때가 있다. 이런 그림, 혹은 이미지들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철학아카데미 원장 이정우는 <세계의 모든 얼굴>에서 현대 회화의 사유 방식을 보여준다. 철학의 개념들과 현대인들의 사유 방식을 그림이라는 창을 통해 보여준다. 그 창은 맑고 투명한 창이 아니라 왜곡되고 구부러진 볼록 렌즈나 오목렌즈와 비슷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에 대한 이해 없이는 현대 회화의 사유도 읽을 수가 없다.

  그림을 통해 현대사회의 사상의 흐름을 읽어내고 세계의 면들을 밝혀내는 작업은 단순한 회화와 철학의 만남을 넘어서 세계를 인식하고 사유하는 또 하나의 틀을 제공한다. 분석틀은 세상에 대한 잣대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의식에 대한 것일 수 있다. 안과 밖을 통틀어 제대로 이해되지 않고 분석되지 않는 것들에 대한 틈을 메우는 작업의 결과물로 이 책을 이해하면 안될까 싶다.

의미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파고들어 그것을 회화로 표현한 사람이 르네 마그리트이다. 마그리트는 현대 회화에서 유니크한 위치를 차지한다. - P. 116

마그리트는 하나의 면을 찾는데 집중한 사람이 아니라 그런 면들을 가로지르면서 世界 자체를 찾아간 사람이다. 즉 면들을 가로질러 보다 입체적인 존재론을 추구한 사람이다. 이런 점에서 마그리트의 회화는 회화에 대한 회화, 메타회화, 회화의 철학이라고도 할 수 있다. - P. 117

  예를 들면, 마그리트의 그림들에 대한 저자의 견해를 이렇게 살펴볼 수 있다. 그림을 보는 방식이 사람마다 다르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림을 도구로 사용하는 것도 아니고 그림을 철학적으로 해석하는 것도 아니고 이 모든 것일 수 있는 방식을 보여주는 책이 <세계의 모든 얼굴>이다.

  그림을 통해 무한한 상상력을 엿볼 수도 있지만 제공된 이미지들은 지각된 것 이상을 넘어설 수 없다. 회화에서 재현이냐, 표현이냐를 따지는 것은 논재의 의미가 없다. 회화의 역사를 통해 世界(유일무이한 전체로서의 세계)에 대한 태도를 읽어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철학의 목표가 구체적이고 특정한 장면을 보여주는 세계에 대한 규명이나 사유에 있지 않고 世界에 대한 모든 얼굴들을 보여주는 작업이라면 철학과 회화는 분명 거부할 수 없는 공통된 운명을 지닌 듯하다. 그 면들을 찾아보는 것은 물론 감상자의 몫이고 즐거움이고 권리겠지만 철학자의 이야기에 귀기울여 보는 것도 재미있다.

내면세계의 대부분은 외면세계에서 온다는 것을 명심하자. 상상은 지각에 근거하는 것이다. 우리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을 상상하지 못한다. 상상이란 지각된 것의 변형이다. - P. 33

회화는 재현/표현의 이분법으로 이해될 수 없다. 회화는 언제나 世界(유일무이한 전체로서의 세계)의 무한한 얼굴들을 드러내는 작업인 것이다. - P. 34

  그림이나 철학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이해하고 알아갈 수 있을까? 철학아카데미에서 사흘에 걸쳐 진행된 강의의 내용을 책으로 묶어 놓은 이 책은 우리가 익수하게 접했던 수 많은 그림들 속에서 미처 읽어내지 못한 특별한 부분들에 대해 이야기 한다. 특히 인상파 이후 입체파와 추상화가 대표되는 현대 회화의 난해함에 대한 거친 도전이기도 하다.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나버릴 수도 있는 이 시대의 회화가 가진 맹목성과 불안감을 적절하게 분석하고 있다. 시간이 흐르고 나서 이 그림들과 이런 종류의 책들이 모두 자기 기만에 불과하다는 결론이 나올 때까지는 유효하다는 말이다. 누가 알겠는가, 회화의 독창성과 활기가 여기서 끝나버릴지. 그러나 회화의 존재 탐구는 계속되리라고 나도 믿는다.

오늘날 회화는 예전과 같은 독창성과 활기를 보여주지는 못하는 것같다. 그러나 화가들의 영혼이 죽지 않는 한 회화의 존재 탐구는 계속 되리라고 믿는다. - P. 195


070407-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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