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방가르드 비타 악티바 : 개념사 5
노명우 지음 / 책세상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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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도 나를 격동시키는 것은 오직 자유라는 말뿐이다.”(초현실주의 선언, 앙드레 브르통, 1924) - P. 84

  어디에도 길은 없었다. 처음부터 만들어진 길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한 사람, 두 사람 걷다보면 길이 된다. 중요한 것은 길이 아닌 곳에 처음 발을 디디는 사람이다. 도전자, 개척자, 선구자로 명명되는 그들은 소리 없이 사라지기도 하고 역사에서 영웅이 되기도 한다. 물론 그들이 어떤 사명감으로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순수하게 내적인 욕망이 넘치거나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했을 것이라 믿는다. 어떤 대가를 바라거나 이기적인 목적이라면 중간에 서 있으면 된다. 군대생활의 비법이라 전해지는 그것처럼.

  앞장 서는 사람은 외롭다. 때로는 혹독한 비난을 감수해야 하며 미쳤다는 소리도 들어야 한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는 사람에게 항상 격려와 박수가 쏟아지는 것은 아니다. 다수의 사람들이 행동한다고 해서 그것이 옳은 것은 아니다. 타성에 젖어, 습관적으로 행동하다 보면 몸은 편하고 정신도 고달프지 않다. 하던 대로 하면 된다. 남들이 하던 대로. 그러면 최소한 중간은 가고 나에게 커다란 불이익은 돌아오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걸 철이 든다고 표현하기도 하고 현실에 적응했다고 표현하기도 하며 나이가 들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긍정적 의미이든 부정적 의미이든 철들지 않는 게 나의 인생 목표 중 하나다. 나이 값 못하고 싶은 게 작은 바람이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은 나쁜 사람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얄팍한 이기심과 눈앞에 이익만 생각하며 살아가는 방법을 사람들은 정말 모르는 것일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귀찮아서 혹은 몰라서 그렇게 사는 것이라면 얘기가 달라지지만 이기적인 목적이나 뻔히 들여다보이는 이유 때문이라면 오래가지 못한다. 자신을 물론 주변 사람들도 금방 안다. 모른 척 해도. 문제는 그런 사람들의 삶의 방법과 태도가 확고한 신념이 되어 주변 사람들을 괴롭히기도 하고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위치에 오르기도 한다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큰 불행이다. 그것을 깨뜨리기 위한 연대와 실천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혼자라도 나서 척후병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흔히 찾기 어렵다.

  시대를 앞서 간 사람들의 이야기는 역사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그들 모두를 진정한 아방가르드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근대 예술 분야에서 나타난 유일한 흐름만이 아방가르드는 아닐 것이다. 도도한 시대의 흐름 속에서 현실의 문제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미래를 향한 흐름을 읽어낸 사람들을 우리는 진정한 아방가르드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아방가르드라는 말은 전투의 선봉에 선 척후병을 이르는 말이었다. 미래의 예언자이며 후위 전체를 책임져야 하는 첨단의 위치에 선 사람을 의미하는 말이 아방가르드다. 예술사에서 전위부대가 등장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역사적 관점에서 예술가들이 독립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시기에 등장한 자연스런 흐름이다. 패트런이나 궁정소속으로 신분 자체가 독립적이지 못한 예술가에게 아방가르드라는 말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끝없는 도전과 도발을 통해 기성 예술의 권위를 공격했고,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예술을 시도했던 사람들을 우리는 기억한다. 과거의 예술을 답습한 것이 아니라 미래의 예술을 시도하고 보여줬으며 온몸으로 실천했던 사람들이 아방가르드다. 회의적 시선과 비판적 관점이 아방가르드의 조건이다. 전통을 거부하고 민첩하고 용감하게 그리고 대범하게 행동으로 옮긴 예술 행위를 우리는 아방가르드라고 부른다.

  노명우의 <아방가르드>는 이러한 흐름과 예술사의 과거를 추억하는 책이다. 예술사는 자유를 위한 투쟁의 역사였다. 인류의 역사가 노동시간 단축의 역사였듯이 말이다. 미술관과 박물관에 박제된 예술에 대한 도전과 반항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을까? 궁정 예술과 후원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난 예술은 어떠했을까? 책세상의 개념사 시리즈는 적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참신한 기획으로 좋은 책들을 만들어 가고 있다.

  미래파 선언, 초현실주의 선언 등 아방가르드의 도발이 시작된 것은 사회, 역사적 환경에서 비롯되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사회적 배경이나 문화적 토대가 마련되지 않았다면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진다. 화장실 변기를 오브제로 사용하여 예술이라고 주장하는 뒤샹을 누구 쳐다보기나 했겠는가? 이제 그 변기는 미술품 경매장에서 1700만 달러에 거래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아방가르드는 지나간 역사의 추억이 아니라 현재 진행되고 있는 우리 시대의 예술이다.

  더더욱 독창적이고 전위적인 예술적 시도가 오히려 예술 자체에 대한 회의를 품게 하기도 한다. 하지만 거드름을 피우거나 미술관 안에 박제된 예술에 대한 거부는 계속될 것이다. 다변화되는 사회에서 고정된 예술의 실체를 규명하는 것은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모든 것은 자본에 포섭된다. 역설적으로 기존의 질서와 권위에 대한 파괴로 명성을 얻은 예술품들이 이제는 가장 상업적인 미술품이 되어버렸다. 자본주의의 산업시스템은 모든 예술품을 화폐로 환산시키는 위력을 발휘한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아방가르드의 미래를 걱정할 수밖에.

  예술 분야뿐만 아니라 사회 각 분야에 아니 우리 삶의 모든 분야에 언제나 아방가르드는 있다. 실패와 성공의 위태로운 줄타기를 감내하면서 우리는 그들을 응원하고 격려하며 동참할 준비를 해야한다. 한발 더 나아가 내가 아방가르드가 되어야 한다는 진취적인 생각과 행동이 세상을 조금 바꿀 수 있다. 나는, 아니 우리는 항상 그들이 될 준비가 되어 있으며 그들이 전해주는 미래의 메시지를 기다린다. 아방가르드는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다. 그것이 현실이다.


09031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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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이매진 - 영화와 테크놀로지에 대한 인문학적 상상
진중권 지음 / 씨네21북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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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는 예술이다. 논쟁은 끝났다. 발터 벤야민의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이 수없이 인용되며 끊임없이 논의되었지만 영화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그 위상과 역할이 달라지고 있다. 하지만 그 의미와 기능은 변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예술과 영화의 관계를 벤야민은 ‘아우라Aura’를 통해 설명했지만 사진과 영화의 복제 가능성 때문에 예술의 범위를 논하던 시대는 종언을 고했다. 대중문화로서 확고하게 자리 잡은 영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말이다.

  그것이 오락이든 예술이든 장르의 문제가 아니가 아니라 변화, 발전의 양상과 미래에 더 큰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영화는 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우리에게 더 큰 즐거움과 충격과 미적 쾌감을 전해주리라고 굳게 믿는다.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단 한 순간도 정체되어 있지 않고 살아 움직이며 진화하는 영화는 여전히 21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문화 매체로 거듭나고 있다.

  영화를 즐기는 방식과 태도가 달라지고 있지만 스크린을 통해 전해지는 이미지와 메시지는 여전히 장르의 특성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한 프레임 안에 한 장면을 보여주던 방식은 한 장면에 여러 장면을 중첩시키거나 화면을 분할하여 같은 시간에 다른 장소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등 영화의 기본적인 전제를 무너뜨리기도 한다. 형식과 내용이 파괴가 영화의 발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영화는 끊임없이 진보하고 있다. 다른 어떤 장르보다도 역동적으로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형식보다는 내용에 관심을 갖게 된다. 형식을 벗어나서 논의될 수 없는 분야가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영화읽기는 내용에 집중된다. 이런 관심은 최근 철학자 김영민의 ‘영화와 인문’ 칼럼에도 잘 반영되어 있다. 영화도 결국 인간의 문제로 귀결되고 어떻게 살 것이며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한 관심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둘러싼 수많은 존재들에 대한 관심과 인간의 상상력은 무한히 증폭된다. 영화는 늘 일상에서 벗어나 있다. 소설과 달리 비루하고 속된 일상들을 집약적으로 보여주기도 하지만 대부분 영화는 일탈된 상황을 보여준다. 100분 내외의 시간동안 관객들을 집중시키기 위한 영화의 서사는 소설의 그것과 다를 수밖에 없다. 일단 보여주기로 시선을 끄는 데는 한계가 있다. 최근 CG의 현란한 기술들은 실사와의 구별을 모하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영화가 완성될 수는 없다. 무엇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은 영화의 오래된 숙제이기도 하다. 에이젠슈테인의 <전함 포템킨>부터 <300>에 이르기까지 영화의 역사는 시대의 흐름과 기술의 발전을 반영해 왔다.

  영화 이야기는 누구에 의해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또 다르게 이야기될 수 있다. <진중권의 이매진>은 ‘씨네 21’에서 재미있게 읽었던 연재물이다. 책으로 묶이는 순서는 당연해 보인다. 신문이든 잡지든 좋은 칼럼을 읽게 되면 언제 책으로 나오게 될지 기다리게 된다. 아직도 가장 편안하고 익숙한 매체가 책이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다. 어쨌든 이 책은 영화 잡지에 1년간 실렸던 칼럼을 모은 책이다.

  저자가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은 영화에 대한 비평이라기 보다는 영화를 가지고 노는 이야기이다. ‘담론의 놀이’라는 말이 적절해 보인다. 영화가 좋다 나쁘다는 평가도 아니고 형식과 내용의 조화를 문제 삼지도 않는다. 이야기를 하다보면 당연히 언급하게 되지만 미학적 혹은 인문학적 관점에서 영화의 코드를 뽑아내는 식이다. 가령 친숙한 영화 <슈렉>은 ‘쿨미디어의 뜨거운 하이퍼리얼 효과’로 읽어내거나 ‘과거를 현재화하는 문화적 기억’으로 <화려한 휴가>를 읽어내는 등의 방법이다.

  이 방법은 영화를 통해 다양한 상상력과 시대와 상황들을 읽어내는 담론을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영화 자체에 대한 깊은 논의와 몰입의 즐거움은 얻을 수가 없다. 이것은 영화비평의 몫으로 남겨두는 저자의 방법은 타당해 보인다. 전문가 수준 이상의 영화리뷰와 다양한 매체를 통한 영화 분석에 진중권이 굳이 뛰어들 까닭이 없지 않은가. 누구든 자신의 영역과 전문 영역이 있고 그 특징을 가장 잘 살려낼 수 있어야 한다. 이 책은 그런 측면에서 진중권의 색깔을 가장 명확하게 드러내면서 또 다른 영화의 재미를 읽어낼 수 있게 하는 영화이야기 책이다.

  마셜 맥루한의 <미디어의 이해>부터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에 이르기까지 영화 장르와 접속할 수 있는 수많은 담론들이 난무하여 영화를 읽어내는 재미를 더해준다. 한 편의 영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관한 문제는 단순히 그것에서 무엇을 얻었는가와의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영화적 상상력과 재미라는 것은 서사의 즐거움과 시각적 효과만으로 전달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드라마와 영화의 차이는 아닐까 싶다.

  영화의 죽음, 복제에서 생성으로, 서사의 파괴, 기술과 신체, 시각에서 촉각으로, 미디어와 권력, 이성과 광기, 해석에 반대한다. 영원한 소년, 기억으로서 역사 등 열 개의 장으로 나누어 서너편의 영화를 묶었지만 주제별로 묶였다기 보다 하나의 관점으로 엮였기 때문에 그 영화들의 공통점을 살피는 것도 또 하나의 재미다.

  저자가 이미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에서 보여주었듯이 영화 또한 예술적 상상력이 동원한 놀이에 불과하다는 관점에서 즐겨야 한다. 얼마나 깊고 다양하게 바라볼 것인가의 문제는 영화의 재미를 배가시키는 요소가 된다. 책 한 권에서 얻을 수 있는 효용과 즐거움이 영화 한 편으로 환산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닐까? 일단 재미있는 영화를 봐야 얘기가 된다. 저자는 우연에 기대고 있다고 하지만, 이 책에 소개된 영화 리스트가 일단 반갑다. 피터 그리너웨이의 <영국식 정원 살인사건>에서부터 빔 벤데스의 <베를린 천사의 시>에 이르기까지.


090127-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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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현대미학 강의 - 숭고와 시뮬라크르의 이중주 진중권 미학 에세이 2
진중권 지음 / 아트북스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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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학이라는 학문이 있는 줄도 모르고 20년 쯤 살았고, 알게 된 후로도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른 채 지금도 살고 있다. 미학은 그렇게 우리들 삶과는 무관한 것일지도 모른다. 생존과 직접 관련된 학문과 지식은 사실 그리 많지 않다. 대중들에게 친숙하고 즐겁게 다가설 수 있는 예술은 항상 친구처럼 곁에 머물러야 한다. 전문가 집단만을 위한 고급 예술이나 이론을 향유할 수 있는 계층과 문화는 쉽게 내면화되지 않는다. 그래서 부르디외는 ‘아비투스’의 개념을 통해 문화적 상징 자본의 중요성을 주장했겠지만 도대체 미학이라는 것의 실체는 아직도 내게 모호하기만 하다.

  고전에 해당하는 책들을 탐독하고 그것을 해설했거나 실제 적용 사례들을 살펴보아도 내가 ‘이것이다’라고 설명할 수 있을 만큼은 되지 않는다. 독학이 아니라 본격적으로 공부하거나 이론적 토대를 체계적으로 쌓아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고단하지만 즐길만하고 모호하지만 흥미로운 예술의 세계를 떠날 마음은 없다. 다만 명확한 실체가 포착되는 다른 분야의 무엇과는 구별되는 애매함이 늘 미진함으로 남는다는 말이다. 철학의 한 분파로 볼 수밖에 없는 미학의 특징이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자위해 보기도 한다.

  <미학오딧세이 1~3>는 내게 진지한 마음으로 그림을 통해 예술을 바라보는 관점을 고민하게 했다. 비록 남의 눈을 빌려 살펴보았지만 마그리트와 에셔의 그림에 매혹되었고 진중권의 감칠맛 나는 문장에 중독되었다. 그의 정치적 논객으로서 진중권의 포지션이 어디에 위치해 있고 어떤 식으로 열광적 지지 혹은 폭력적 비난을 받든 그의 목소리는 분명하고 논리 정연하며 나름의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다시 돌아와서 진중권의 책들은 정치와 미학으로 양분된다. 개인적으로 나는 어떤 것도 놓치고 싶지 않다. 두 분야 모두 탁월한 감각을 유지하고 있으며 날선 촉수가 살아 숨쉬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이상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기꺼이 그의 책을 읽을 것이다. 오래전에 나온 <진중권의 현대미학 강의>는 그야말로 현대적 의미에서 미학을 풀어낼 수 있는 이론가들과 예술을 접목시키고 있다.

  벤야민의 ‘산만함’에서 출발해서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에 이르기까지 ‘숭고’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예술의 중심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 분석하고 있다. 현대인의 관점이 아니라 다분히 철학적 함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따분하고 지루하며 그 의미는 안개 속에 숨어버리기도 하지만 원전의 인용이나 개념에 대한 보다 분명한 설명을 시도하고 있어 그나마 읽을 만하다. 출판사에서 선전하고 있는 것처럼 진중권이 들려주면 미학도 ‘재미’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려면 조금 더 쉽고 간단하게 설명하거나 이론적 깊이를 포기해야 한다.

  발터 벤야민, 마르틴 하이데거, 테오도르 아도르노, 자크 데리다, 미셸 푸코, 질 들뢰즈, 장-프랑수아 리오타르, 장 보드리야르 등 8명의 철학자는 이름만으로도 현기증이 난다. 그드르이 책 한 두권씩을 건드려 보았지만 내 머릿속은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하기만 하다. 쉽게 하나의 축으로 꿰어지지도 않고 어설프게 그들의 이론이 적용되지도 않는다. 그것은 순전히 개인적인 두둔함의 증거일 뿐이겠지만 속이 쓰린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이들이 전하는 메시지를 분석하는데 있어서 저자는 핵심 개념들을 선택해서 집중수렴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각 장마다 조금씩 연결되고 전체가 또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로 살아 숨쉬기를 바라는 저자의 노골적인 요구처럼 훌륭한 텍스트인지는 증거할 수 없으나 시간과 돈이 아깝지는 않았다. 긴 여정으로 생각한다면 또 다른 텍스트를 위한 징검다리 역할로는 충분하다는 것이 개인적인 소회이다.

  한 권의 책을 읽어나가는데 저자의 머리말은 항구의 등대와 같다. 글을 쓴 목적이나 핵심 개념을 밝혀 놓고 있으니 그것을 따라가다 보면 주변 경치를 제대로 즐기지는 못해도 내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 지 정도는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쉽지 않은 여행이었으나 또 다시 떠날 채비는 갖추었나 보다. 희미한 풍경들 속에서 안개를 걷어내고 눈꺼풀의 이슬 방울을 털어내는 일은 순전히 독자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의 예술은 모든 현실에 대한 반영이며 결과이기도 하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것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나 스스로에 대한 관심과 반성이라고 볼 수도 있다. 틈틈이 정리하고 확인하고 또 연결고리들을 찾아내는 연습은 계속되겠지만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 속에서 그 의미를 확인하고 의도를 찾아내고 상징을 풀어내는 일은 하나의 놀이 일수도 있다. 즐거운 게임을 그만 둘 일은 없을 것 같다.

  사용가치가 아니라 교환가치를 무한 증폭시켜 물신화하는 자본의 패턴은 이제 누구나 쉽게 적응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지만 그 안에 숨어 있는 폭력과 그늘에 대한 시선을 거둘 수는 없다. 예술도 예외일 수는 없다. 그것을 바라볼 수 있는 눈과 그것에 대한 고민들이 어쩌면 현대미학의 역할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미학은 단순히 예술에 대한 숭고한 이데올로기가 아닐 것이므로.


080822-0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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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보다 소중한 우리미술가 33 - 오늘의 한국미술대가와 중진작가 33인을 찾아서
임두빈 지음 / 가람기획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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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흐, 피카소, 렘브란트, 샤갈, 마티스, 잭슨폴록, 베르메르, 마그리트, 에셔 등 생각 없이 떠오르는 수많은 서양의 화가들이 있지만 우리의 화가는 김홍도, 신윤복, 장승업, 이중섭, 김환기 등 대표적인 몇 명의 작가를 빼 놓고는 이름을 떠 올리기 힘들다. 우리는 ‘미술’하면 자연스럽게 ‘서양미술사’를 떠 올렸고 대부분의 책들은 서양의 화가들을 다루고 있으며 나 또한 자연스럽게 그들에게 관심을 가졌고 그들이 소개하는 세계를 먼저 알게 되었다. 핑계 아닌 핑계를 대자면 모든 학문과 예술 분야에서 준거 집단은 항상 유럽이다.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인류의 학문과 예술을 이끌어 왔으나 왜 우리 것에는 항상 소홀한 것일까?

  보잘것 없거나 부끄럽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깊은 이해와 연구가 부족하고 대중적으로 소개하려는 노력도 게을리 했을 것이다. 대중들도 현역 작가들에 대한 관심과 전시회를 찾기보다는 대대적인 홍보를 통해 대규모 유럽 화가들의 전시회를 즐겨 찾게 된다. 한국화 뿐만 아니라 해방 이후 우리 미술사를 이끌어 온 거장들에 대한 관심도 필요하고 중요하다. 또한 현재 동시대를 고민하는 작가들에 대한 애정은 우리나라 미술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전제 조건이다.

  잔디 위에 네 개의 돌이 있고 그 사이에 물이 담긴 바가지에 놓여 있는, 정갈한 황규백의 그림이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고흐보다 소중한 우리 미술가 33>은 오늘의 한국 미술 대가와 중진 작가 33인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차례를 보며 화가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바라보다가 그래도 아는 들어 보았거나 아는 이름 몇이 등장해서 반가웠다. 자세히 알지는 모르지만 여기저기 귀동냥 눈동냥 한 작가들이겠지만 우리 미술가들에 대해서는 참 아는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두빈은 그림을 잘 그리면서 글도 잘 쓰는 사람이다. 다양한 수상 경력과 화려한 이력을 가지고 있으며 미술평론으로 등단한 경력까지 보태고 있다. 이미 <한국미술사 101가지 장면>으로 독자들을 만났다고 하나 나는 처음 대하는 작가이다. 어쨌든 그 역사를 전공하다가 미술사를 연구한 사람과 달리 그림을 전공한 사람답게 작품을 대하는 안목과 애정이 남다르다. 그러나 그의 글은 장식적인 데가 많고 담백하고 진솔한 맛이 조금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항상 느끼지만 글은 마음의 갈피까지도 세세하게 드러내고 낱낱의 표정과 숨결까지도 드러낸다. 그래서 두렵고 조심스럽다. 더구나 공적인 글쓰기라면 더욱 그러하다. 임두빈은 미술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차고 넘친다. 그것을 바라보는 안목이 탁월하고 작품과의 교감이 뛰어나며 개별 작가들을 잘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세련되면서도 문안한 글들이 보기 좋은 그림들과 함께 독자들을 우리 미술이 주는 즐거움이 무엇인지 차근차근 설명해 주고 있다.

  책의 내용에 대해서는 설명하기가 곤란하다. 그림과 조각을 보면서 느껴야 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개별 작가들을 작업실을 방문하는 길부터 독자들에게 안내한다. 마치 기행문처럼 시작한다. 작업실의 위치와 분위기를 전해주고 사진으로 보여준다. 그곳에 탄생한 작품들을 소개하고 작가의 작품 세계를 안내하기도 하며 인터뷰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기도 한다. 오랜 시간 동안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은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책이다. 가장 대중적인 화가가 되어버린 ‘고흐’와 비교해서 책 제목을 정한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만 우리 미술가들의 면면을 들여다보고 그들의 작품 세계를 들여다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하나의 모래알에 온 우주가 담겨있다는 윌리엄 브레이크의 시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한 명 한 명의 진정한 예술가가 탄생시킨 작품들은 그대로 영혼과 영혼의 교감이 이루어지는 공간이 된다. 그것이 그림이든 조각이든 상관없이 깊은 내면의 울림과 공감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임두빈은 이런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수많은 작가들을 직접 방문하고 인터뷰하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몇 가지 아쉬움은 지울 수가 없다. 먼저 학력과 수상 경력 위주의 작가 소개를 눈에 걸린다. 서울대 미대 출신 몇 명을 제외하면 홍익대 미대 동문회 소개 자료 같은 느낌이다.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극소수를 제외하면 모두 저자의 스승, 선후배들이다. 학벌로 연결된 미술계의 풍토를 문제 삼는다는 것은 지나친 해석일 수 있으나 작가 선정 자체에 일정한 기준이 제시되어 있지 않고 주관적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기는 힘들 수도 있다. 대가와 중진이라는 전제를 이해하더라도 다양성이 부족하다는 측면에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작업으로 예술 세계를 펼치고 있는 작가들이 골고루 소개되었다면 더욱 빛났을 것이다.

  또 하나의 아쉬움은 현 미술계나 사이비로 명명된 작가들에 대한 감정적 성토이다. 그들이 누구인지 실체가 무엇인지 독자들은 알 길이 없다. 학생보다 못한 교수 직함을 가진 사이비 예술가들이 많다고 신랄하게 비판하는 저자의 진심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명확한 기준과 나름의 분류 방법이라도 제시했다면 더욱 많은 공감을 얻었을 것이다. 지나친 엘리트 의식이나 일방적인 찬사와 경외감은 아무리 좋은 그림이라도 거부감을 갖게 마련이다. 아직 활동 중인 작가들이기 때문에 남은 시간에 대한 기대와 바람을 함께 표현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은 지울 수가 없다.

  마지막으로 예술에 대한 관점이다. 철학적 문제이긴 하나 동시대의 미술가들이기 때문에 더욱 궁금해지는 문제이기도 하다. 도대체 예술이란 무엇이며 인간에게 어떤 것인가? 교외의 넓직한 작업실과 몇 백 평 혹은 몇 천 평씩이나 되는 농원이나 전시 공간을 가진 미술가 들은 당연한 대가라고 볼 수도 있으나 그들의 예술 세계는 고흐의 ‘감자먹는 사람들’과 비교된다. 우리와 좀 더 밀착된 혹은 동시대인들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는 미술가가 한 사람이라도 33인 속에 뽑혔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라 대중 속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친숙한 예술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도 미술가들의 임무가 아닐까 싶다. 우리 미술가에 대한 애정과 관심으로 보답하는 일은 물론 우리들의 몫이다. 그렇지만 이만한 공력과 노력이 돋보이는 책 한 권이 탄생까지 저자의 부단한 노력과 세심한 노력이 가려지는 것은 아니다. 서양 미술이 아니라 우리 미술가들에 대해 궁금한 사람에게는 부끄럼 없이 권할 만한 책이라는 사실에는 동의할 수밖에 없다. 자, 이제 그들을 만나러 가보자.


080517-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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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로와 아름다운 은행가 - 빈도 알토비티 초상화 이야기
데이비드 앨런 브라운.제인 반 님멘 지음, 김현경 옮김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예술은 우리를 특별한 매혹의 세계로 안내한다.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설명할 수 없는 미적 감수성은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정신적 기쁨이다. 한 화가의 그림이나 성향에 몰입하는 것은 위험할 수도 있고 다양하고 폭넓은 그림에 대한 애정으로 확산될 수도 있다. 우리 주변에서 쉽게 접근하기는 어렵지만 예술, 특히 그림은 볼 때마다 새로운 느낌과 감동을 전해주기도 하고 그림 하나가 주는 감동을 평생 잊기 어려울 수도 있다.

  르네상스를 빛낸 화가 중의 한 명인 라파엘로의 그림은 부드러운 빛과 여유 있는 인물들의 표정으로 기억된다. 그 중에서 젊은 피렌체 사람의 초상화 ‘빈도 알토비티’라는 젊은이는 대단한 매력을 발산한다. 데이비드 앨런 브라운과 제인 반 님멘이 쓴 <라파엘로와 아름다운 은행가>는 빈도 알토비티 초상화에 관한 이야기이다. 한 작가의 한 작품을 중심으로 이렇게 역사를 가로지르는 드라마 같은 이야기들이 숨어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했다.

  이 책은 한마디로 ‘빈도 알토비티’ 초상화에 관한 보고서이다.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은행가였던 주인공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사실적으로 묘사했다면 요즘 말로 얼짱에 수많은 오빠부대를 거느릴 만한 미남이다. 단순하게 잘 생겼다는 말은 물론 아니다. 사진이 아니라 그림을 통해 보여지는 것 너머까지 전하는 능력을 지닌 라파엘로의 그림은 보는 사람을 매혹시키기에 충분하다.

  특히 이 은행가의 그림은 모나리자와 비교되기도 하고 있으며 이 그림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매력을 묘사하고 있다. 금발의 젊은 남자가 오른쪽 어깨너머로 정면을 응시한다. 검은 모자를 쓰고 있고 푸른색 망토를 걸치고 있다. 볼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으며 이마와 금발 머리에 부딪히는 빛은 환하게 반사된다. 귀밑머리는 가늘고 섬세하다. 아직 솜털이 벗겨지지도 않은 것 같은 남자는 미소년처럼 보인다. 하지만 내 눈에 옥의 티처럼 보이는 반지 낀 왼손은 아무리 보아도 어색하다. 오른쪽 어깨부분 가슴에 얹은 손은 나중에 그려 넣었다는 심중을 굳힐 수밖에 없다. 녹색 화면을 배경으로 관객을 응시하는 젊은 은행가의 눈은 깊고 푸르다. 빨간 입술과 오똑한 코, 짙은 눈썹과 하얀 등은 현실 밖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한다.

  이 한 장의 그림이 그려진 것은 1512년경이었고 주문받은 그림은 라파엘로에 의해 예술작품으로 탄생한다. 16세기 이탈리아의 부유한 집안에서 초상화는 각별한 의미를 가진다. 결혼기념이나 조상들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이렇게 탄생한 젊은 은행가의 초상화는 수백 년 동안 상속과 매각을 통해 주인이 바뀌다가 지금은 위싱턴의 미국국립미술관에 걸려있다.
우여곡절을 겪는 동안 그림의 행방과 그림을 둘러싼 수많은 사건들은 마치 영화처럼 인상적이다. 통시적 관점에서 그림의 이동이 보여주는 경로는 그대로 당대 사회의 역사와 문화적 요인들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미술사 여행을 이 초상화 하나로 떠날 때 지루할 거라는 생각을 했다. 특별히 관심 갖고 있던 작가도 아니고 그림이 주는 이미지나 느낌이 환상적인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초상화는 초상화일 뿐이다. 과장과 왜곡이 보태지기도 하겠지만 초상화가 주는 감동이 얼마나 클 것인가에 대한 생각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적어도 내게는 통용되는 사실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그림 한 점이 500여 년의 세월을 견뎌온 과정이 그대로 소설처럼 흥미롭기도 하고 충분한 의미를 찾을 수도 있다.

  무관심한 태도와 경직된 사고에서 창의력이나 기발한 아이디어가 나오기 어렵다. 내가 생각한 것이 옳고 다른 사람의 견해가 틀리다는 오만은 이미 수구와 보수를 넘나드는 위험한 생각이다. 콘크리트처럼 생각이 굳어지면 깨지기 전까지 바뀌지 않는다. 그림에 대한 숱한 해석과 다양한 논의들은 풍성한 잔치와 같다. 긴 세월 속에서도 그 빛과 이미지를 잃지 않았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예술적 감동은 여전하다. 미술사에 대한 상상력과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는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그림은 이후에도 여러 사람에 의해 확대 재생산 된다. 수많은 복제가 이루어지고 비슷한 유형의 인물들이 미술사에 자주 등장한다. 그만큼 이 그림에 대한 동료나 후대 화가들에 대한 영향력이 컸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한 장의 초상화가 보여주는 종횡무진 서양 미술사에 얽힌 에피소드들은 논픽션 드라마처럼 흥미 있지만 번역된 문장이 매끄럽지 않기 때문인지 전체적인 흐름이 이어지지 않고 끊어진 국수처럼 따로 떨어진 느낌이다. 유기적인 문장들 간의 결합이 아쉽기만 하다.

  또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내용 밖의 문제이다. 본문 237페이지와 이후 부록과 주를 포함해 370페이지이다. 부록과 옮긴이의 말은 물론 마땅히 들어가야 한다. 주도 빼놓을 수는 없다. 하지만 본문 237페이지에 불과한 책의 가격은 무려 29,000원이다. 어지간해서 책값 이야기는 잘 안하는데 하드커버와 컬러 도판이 필연적이었다고 해도 이 책을 화집이 아닌 일반 도서로 판매할 목적이었다면 지나친 가격이다. 소장 가치가 있는 책도 아니고 그저 르네상스 시대 한 그림에 대한 후일담으로 재미있게 접근할 수 있는 편집과 디자인 그리고 가격을 제시할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싶다.

어깨너머 아득한 눈빛을 던지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가 맨 처음 떠올랐던 이 책의 표지가 화면에 가득하다. 그림은 언제나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주기만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인간이 휴식할 수 있는 영혼의 안식처를 제공하며 우리를 이상적 유토피아로 이끌기도 한다. 완전한 저 너머의 세계에 가고 싶지만 이 책의 목적은 거기에 있지는 않다.


080328-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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