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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아나키스트 - 윌리엄 고드윈 수상록
윌리엄 고드윈 지음, 피터 마셜 엮음, 강미경 옮김 / 지식의숲(넥서스)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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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시인 셸리의 장인 이자 ‘프랑켄슈타인’의 작가 메리 울프턴크래프트의 아버지는 누구일까하는 질문에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 할 것이다. 윌리엄 고드윈은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인물이 아니다. 지나간 인물과 사상에 대한 연구와 관심은 시류와 영합하는 측면이 있다. 달리 말하면 사회적 관심과 필요에 따라 주목받는 시대와 사건이 달라지게 마련이다. 이런 면에서 아나키즘은 인류 역사에서 특별함을 갖는다. 그 특별함은 주변성에서 확보된다. 주류 역사의 아웃사이더들이었던 아나키즘 신봉자들의 면면이 그러하다. 어쩌면 인물의 주변성이 아니라 사상의 주변성일지도 모른다. 아나키즘은 한 번도 역사의 중심 사상이었던 적이 없기 때문에 여전히 지류로 파악되고 있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류 최초의 아나키스트로 명명되는 윌리엄 고드윈이 아니더라도 누군가 외칠 수밖에 없었던 자유의 사상이 아나키즘이이다. 그 아나키즘을 최초로 주창했던 사람이 바로 윌리엄 고드윈이라고 평가받는다.

  아나키즘이란 일반적으로 국가와 법률에 의한 강제수단을 철폐하고 자유와 평등 그리고 정의와 형제애를 실천하고자 하는 유토피아 운동으로 정의할 수 있다. 고드윈의 사상은 철저하고 견고한 사상적 토대와는 거리가 멀다. 철학자도 사회학자도 아닌 고드윈의 생각은 이론적으로 모순적인 부분도 있고, 그 삶 자체도 아이러니 하다. 노년에 국가의 연금을 받으며 생활한 것이 단적인 예이다. 그의 사상과 삶이 완벽하게 일치하는 경우 존경심보다는 두려움이 앞설 것이다. 고드윈은 그런 면에서 훨씬 인간적이다. 그가 남긴 많은 저작들 속에서 그의 사상의 단면을 짚어 볼 수 있는 글들은 단편적으로 혹은 전체적인 흐름 속에서 파악해 보아도 아나키즘의 근원을 조망해 볼 수 있는 것들이 많다. 생각의 단편들을 모아 놓은 것들이 하나의 전범이 되고 수정 보완 되면서 사회는 발전한다고 믿는다. 헤겔의 변증법적 결합은 이 때 필요해진다.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처럼 고드윈의 생각도 근본과 토대를 마련하고 모순과 단점을 수정하면서 끊임없이 국가 권력의 억압과 감시를 받으면서 조금씩 성숙해 온 것이 아닌가 싶다. 다만 아나키즘은 무엇보다도 확고한 신념을 지닌 몇몇 사람에 의해 지속적으로 발전되어온 정치 이념이나 철학적 풍토가 아니기 때문에 매우 자유롭고 유연한 흐름으로 파악해야 한다.

  우리는 일상에서 혹은 현실에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꿈을 꾼다. 국경없는 사회, 군대를 가지 않아도 되는 나라, 통일 이후의 한반도, 자동차 없는 세상, 입시없는 학교 생활 등 이루 헤아릴 수도 없다. 하지만 이런 일들이 단순히 우리가 꿈꾸는 유토피아에 불과한가? 16세기 중엽에 토마스 모어는 ‘유토피아Utopia’에서 그가 꿈꾸던 ‘능력대로 일하고 필요한 만큼 ’ 가져갈 수 있는 이상 사회를 꿈꾸었다. 공산주의 사회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는 논쟁을 넘어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와 그 관계 사이의 기본적인 규칙만이 살아 있는 사회를 꿈꿔본 적이 있다. 물론 ‘유토피아’에는 공무원도 존재하고 공동 농장과 공동 식당 등 고드윈의 생각과는 많은 부분들이 다른 이상 세계를 꿈꾼다. 고드윈은 공동 농장과 식당 같은 토마스 모어식 ‘유토피아’에 동의하지 않는다. 아나키즘의 가장 기본적 토대가 되는 자유와 평등, 자치의 개념은 일단 집단과 전체의 조화보다 개인의 행복과 쾌락이 앞선다. 물론 이 사상은 주체적이고 객관적인 정의의 실현에 의해 가능한 사회를 말한다. 국가나 정부의 붕괴가 일시적인 혼란을 가져올 수 있지만 영원한 고통과 족쇄보다 나을 것이라는 고드윈의 생각은 많은 면에서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The anarchist writings william godwin’이라는 제목으로 1986년에 출판된 이 책은 윌리엄 고드윈의 수상록이라 할 만하다. 편집자 서론에서 고드윈의 생애와 사상을 적절하게 해설하고 있으며 본문으로 들어가면 1장에서 아나키즘의 기본 원리로 글을 시작한다. 이어서 인간의 본성과 윤리, 정치, 경제, 교육, 자유로운 사회 등 주제별로 고드윈의 핵심 사상들을 엮어 놓은 것은 순전히 편찬자인 피터 마셜의 능력에 기대고 있다. 고드윈의 책이면서도 연구자의 성과가 고스란히 녹아 있는 책으로 읽힌다.

  우리나라에서 아나키즘은 단순히 ‘무정부주의’라는 용어로 오역되고 있다. 박홍규 교수의 <아나키즘 이야기>가 가장 정확하게 아나키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크로포트킨이나 바쿠닌의 저작을 찾아 읽는 숙제가 남겨졌지만 고드윈의 영향과 상관성보다도 아나키즘은 영원한 유토피아나 이상 세계에 대한 꿈으로 남겨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과의 투쟁과 사회 변화의 기초 사상으로서도 충분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정부와 공무원, 국가 력의 강화는 인간을 위한 조직이 아니라 군림하는 존재가 된 지는 이미 오래다. 누가 누구를 위해서 기능하는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한 발 ‘제겨 디딜 곳 없는’ 현실의 토대는 우리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라 정부와 국가가 스스로 성장하고 권력을 장악하고 독점하면서 법을 앞세워 지금도 여전히 ‘합법’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다. 새만금이나 미군 기지 이전 등의 사건에서 보듯이, 정부에서 자연을 주인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벌주고 싶을 때 꺼내드는 ‘공무집행 방해죄’가 바로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자유와 자연 그리고 자치가 아나키즘의 핵심 사상이라고 요약할 수는 없어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정의와 행복이 실현되고 쾌락이 극대화하는 가장 자연스런 삶을 원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바로 아나키즘이다.

  고드윈의 사상을 통해 아나키즘의 기원을 살펴 본다기 보다는 , <최초의 아나키스트>로 명명된 한 사람의 이야기들이 어떻게 확장되고 전해졌는지, 현재의 유용성은 어느 정도인지, 우리가 좀 더 깊이 있게 고민하고 해답을 찾고 싶은 많은 이야기들이 ‘아나키즘’ 속에 살아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볼 일이다. 고드윈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눈을 감고 존 레논의 ‘이매진’을 들어 보라.


060414-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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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버 피치 - 나는 왜 축구와 사랑에 빠졌는가
닉 혼비 지음, 이나경 옮김 / 문학사상사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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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를 좋아하는 사람 중에도 축구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 모든 스포츠가 그렇겠지만 축구만의 독특한 게임 방식이 나름의 특성과 재미를 전해 주기도 하고, 지루함과 답답함을 전해주기도 한다. 공 하나를 놓고 스물 두 명의 성인 남자들이 목숨을 건다. 축구의 룰이 다른 스포츠에 비해 간단하다는 것은 큰 매력이다. 손을 사용하지 않고 온 몸을 이용해서 상대방의 골대 안에 집어넣으면 된다. 얼마나 단순하고 깔끔한 규칙인가. 전문 용어를 몰라도 전술을 이해하지 못해도 좋다. 서로 뺐고 뺐으려는 일련의 충돌과 집착, 열정과 몰입이 보는 사람에게 전이된다. 축구를 전쟁에 비유하기도 하고 인생에 비유하기도 한다. 물론 많은 스포츠가 세상사에 비유되기도 하지만 축구만큼 인간의 전쟁과 닮은 경기는 없다. 영국에서 출발한 축구가 전 세계로 확산되기 시작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과 무관하지 않다.

영국인들에게 축구는 종교와 유사하다고까지 할 수 있다. 특히 <비버 피치>의 저자 닉 혼비같은 열성 팬의 경우는 종교보다 축구가 우선한다. 태어나면서부터 각 지역 연고팀과 끈끈한 유대관계 속에서 국가대표 팀보다 지역 연고 축구 클럽에 대한 애정과 정성이 훨씬 더 강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모습처럼 보인다. 생활과 축구가 분리되지 않는 상태인 저자에게 객관적인 시선과 축구에 대한 다양한 즐거움을 찾아내는 것은 부질없다. 이 책을 통해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축구를 얼마나 좋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저자 닉 혼비는 말한다. 나만큼 축구 좋아하는 사람 있으며 나와 바라고. 없을 것 같다.

캠브리지 출신의 작가 닉혼비가 축구에 대한 열정이 어느 정도인지, 축구를 좋아한다고 말을 하려면 어느 정도가 되어야 하는지 반성(?)하게 하는 책이다. 쉽게 말하면 닉 혼비는 축구에 미친 놈이다. 어느 분야든 매니아는 있게 마련이다. 정도가 다르고 몰입의 깊이가 다를 뿐이지만 우리 주변에는 자기 생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아주 중요한 면을 가진 사람을 보면 충분히 행복해 보인다. 그것은 돈과 명예와는 무관하다. 물론 경제적인 부분이 뒷받침되어야 하지만 그걸로 해결되지 않는 나름의 독특한 즐거움을 찾아내고 즐기는 사람들이 가장 부럽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그것이 생의 즐거움이나 인생의 목적과 직결되기도 하니까. 닉 혼비는 인생과 축구가 혼연일체다. 그가 응원하는 아스날의 경기결과와 시즌 성적이 그의 생활과 인생과 기분을 좌우한다. 이 정도면 그에게 아스날은 축구 클럽이 아니라 하나의 종교다.

닉 혼비는 스스로 말한다. 나는 강박증 환자라고.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고치거나 바꿀 생각은 없다. 왜냐면 노력한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스스로 알기 때문에 미안할 뿐 노력하지 않는다. 축구가 그럴 수 있는 요소를 충분히 가지고 있다고 독자들에게 설명하거나 유혹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축구 사랑과 자신의 인생을 축구 경기와 함께 풀어내고 있는 그의 이야기들을 읽어나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독자들도 축구를 한 번 보고 싶다. 특히 아스날의 경기를 꼭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것이 이 책의 목적은 아니다. 닉 혼비는 그저 축구가 내 인생에서 어떤 의미인지 고백하고 있을 뿐이다. 솔직하고 진지하게. 아니다, 진지하게는 아니다. 이 책의 또 다른 매력은 작가인 닉 혼비의 재치있는 문장에 있다. 유머와 축구와의 결합이다. 그렇다고 해서 가벼운 농담이 아니라 짙은 페이소스를 자아내게 하는 블랙 코미디다. 순간순간 자신이 얼마나 기뻤고 행복했는지, 아스날의 경기 결과에 따라 얼마나 불행하고 우울했는지를 저자는 적절한 비유를 통해 익살스럽게 표현하고 있다. 그것이 독자들에게는 더 진한 공감대를 형성하게 한다. 읽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것이 축구가 아닌 자신이 좋아하는 다른 분야와 치환해서 읽어도 감정이 이입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닉 혼비에게는 그것이 모두 축구인 것이 문제다. 그것도 아스날이라는 축구 클럽의 경기 결과 하나 때문에.

미하이 칙센트 미하이의 <몰입의 즐거움>에 보면 하루에 ‘몰입’하는 시간의 비율이 성공의 척도라고 말한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닉 혼비처럼 ‘축구’에 완전히 ‘몰입’하는 사람들이 인생에서 성공할 확률이 높은 것일까. 부인보다 축구를 선택하겠다는 수많은 영국 남자들에게 축구는 단순한 경기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월드컵 시즌의 ‘축구과부’를 위한 호텔 패키지 상품이 불티나게 팔리는 나라 영국에서도 특별히 축구이 ‘미친’ 저자의 책은 객관과 이성으로 축구를 접근하고 싶은 사람에게은 절대 읽지 말아야 한다.

결국 아스날의 홈구장인 ‘하이버리’ 근처로 이사하게 된 저자의 생활이 지금은 어떤지 궁금하? 무언가 미치게 할 수 있는 것을 갖고 있는 사람은 행복하지 않을까. 그런면에서 닉 혼비는 누구보다도 행복한 축구팬이다. 그간 벌어진 수많은 축구장 참사를 들먹이며 훌리건에 대한 사회정치적 분석을 시도하는 것도 닉 혼비 앞에서 무기력 해 보인다. 경계를 규정 지을 수 없으나 약간의 폭력사태를 축구팬의 열정으로 축구장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면으로 인정하면서도 죽음을 부른 일부 과격 훌리건들에 대해서는 분노와 차가운 비판을 서슴지 않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축구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사랑이 퇴색하거나 부정적인 면으로 비쳐지지는 않는다. 왜냐면 그는 가장 순수한 아스날의 팬이며 축구를 사랑하는 한 남자의 모습을 가장 솔직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조금 다른 측면에서 축구에 대한 관심과 열정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를 찬양하거나 비난할 필요는 없다. 축구에 대한 그의 열정만큼 우리에게 몰입할 수 있는 그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지 그것이 궁금하다. 나이가 들면서 지정 좌석을 가진 시즌권을 끊는 등 몇 가지 변화가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그는 여전히아스날을 응원하고 있을 것이다. 축구장을 의미하는 ‘피치’와 열정을 의미하는 ‘피버’가 모여 <피버 피치>라는 제목이 탄생했다. 우리들 인생에서 열병을 앓게 하는 무엇인가를 발견한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까하는 생각이 다시 한번 들게 하는 책이다.


060605-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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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 - 비전향 장기수 허영철의 말과 삶
허영철 지음 / 보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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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 고배율 쌍안경으로 건너다보는 북녘의 하늘은 고즈넉하다. 겨울에는 남녘을 향해 초소 옆에 앉아 한가롭게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나 초소 넘어 보급소에서 작업을 하는 모습도 자주 관측된다. 아침 저녁으로 유행가처럼 울려 퍼지는 대남 방송이 친근하기까지 해진다. 비무장지대(DMZ) 안에 무기를 반입하고 초소를 설치해서 경계 근무를 하는 것은 분명한 정전 협정 위반이다. 수색중대 GP장으로 두 개의 GP에서 적 관측 및 경계 근무를 수행했던 기억의 저편이 떠오른다.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하는 군대라는 통과의례를 혹독하게 경험했다고 생각했던 순간들이 먼저 떠올랐다.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넘어선 해석은 불가능한 것이므로.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된 이후 52년째 휴전 상태인 지구상의 유일무이한 나라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일은 어떤 것인가?

비전향 장기수 허영철이 자신의 삶을 구술하고 기록한 <역사는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를 읽다가 여러 번 흐르는 눈물을 애써 감췄다. 주변 상황 때문에 책장을 넘기다 눈물을 흘리는 일도 쉽지 않은 경험이었다. 1955년에 수감되어 1991년에 석방될 때까지 무려 36년간 세상에서 배제된 한 인간의 삶은 시간의 무게만으로도, 그것이 동시대인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만 36년의 세월동안 그가 지켜온 것은 무엇일까? 꼭 내가 살아온 인생만큼 한 평 남짓한 독방에서 홀로 지켜온 그의 신념은 오히려 궁금하지 않았다. 슬라보예 지젝의 말처럼 그것은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이었을까?

1920년생인 허영철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은 우리 민족의 근대사를 또 다른 방식으로 조망해 보는 일이다. 한 개인을 통해 우리가 겪었던 시간의 무게를 덜어보려는 것은 부질없어 보이지만 전형적 개인이 아닌 한 인간의 삶이 우리의 근현대사를 반증하고 있다. 온몸으로 고스란히 일제와 해방, 한국전쟁과 21세기를 살아내고 있는 한 인간의 삶은 나를 숙연하게 한다.

파란만장하고 굴곡진 인생은 많다. 내 인생이 소설 한 권쯤 된다고 말하지 못할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마는 허영철의 삶은 소설이 아니라 그대로 ‘역사’가 된다. 해방 공간의 이념 대립과 혼란을 수습하지 못한 채 분단 된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무감각한 역사 인식을 반성하자는 상투적인 의미와는 사뭇 다른 가슴 한구석의 결림으로 다가오는 이 책은 참으로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책이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꼭 한 번은 권해줄 만한 책이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웁다는 말 한마디 때문인지도 모른다. 전북 부안이 고향인 허영철은 2000년에 송환된 비전향 장기수보다 불행한 것일까? 통틀어 6개월도 함께 살아보지 못한 아내와의 40년만의 만남은 어떤 것일까? 이제는 정년을 앞두었을 고등학교 교사인 아들과 미국으로 건너간 딸이 보고 싶지 않았을까? 가족들의 설득은 그 어떤 모진 고문보다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다분히 인간적인 면에서 형이하학적인 욕망을 떨쳐 낼 수 있었던 한 인간의 신념과 생애는 ‘혁명’에 바쳐지고 있었다.

그가 이루지 못한 ‘혁명’은 언제 이루어질 것인가. ‘공화국’이 있었기 때문에 견뎌낼 수 있었다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성적이고 공식적인, 혹은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태도로 그의 삶을 들여다보는 일은 부질없다. 항상 ‘인간’을 중심에 두고 세상과 사회에 눈 뜰 무렵의 한 혁명가가 변하지 않고 늘 푸른 소나무처럼 지켜낼 수 있었던 신념을 이야기하는 것도 무의미하다. 내가 숙연해진 것은 오로지 시간이다. 36년을 견뎌낼 수 있었던 무기를 우리는 무엇이라 이름 붙일 수 없을 것이다. 이념도 사상도 이데올로기도 광기도 집착도 아닌 그 무엇을 읽어내는 것은 쉽지 않다. 80대 노인의 목소리는 덤덤하고 차분하다. 소리 높혀 자신의 주장을 펼치지도 않는다. 그가 살아온 세월과 쌓아온 시간들을 풀어놓는다. 이것이 우리가 겪었던 삶이었다고.

“국가란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착취, 억압하고 지배하기 위한 독재기구다.” - P. 172

북의 체제를 비판하거나 결과론적 입장에서 소련과 동구권의 붕괴를 이야기하며 허영철의 삶을 단정짓거나 평가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 체제의 우월성을 이야기하는 것도 그에게는 우습다. 자유 민주주의라고 말하는 이 땅의 민중들의 삶을 보라. 그리고 아직도 꿈꾸고 그 꿈을 실현하고 싶을 한 혁명가의 생각의 언저리를 반추해 보는 것이 이 책을 읽는 목적이다. 국가에 대한 허영철의 젊은 날의 발언은 아나키스트의 목소리로 들린다. 당과 공화국은 그에게 국가가 아닌 이상향이었다. 그의 말이 틀렸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을까?

아내와 두 자식이 담장 너머에 살고 있는 남쪽 출신의 炷徨?장기수. 때때로 면회와 편지를 통해 그들의 고통스런 삶을 지켜보아야하는 허영철의 가슴 속엔 무엇이 들어 있었나. 자신의 선택과 판단을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을까? 끊임없이 쏟아지는 의문과 불편함은 이 책을 읽는 내내 지속될 것이다. 문제는 그가 짊어지고 감내한 세월 속에 켜켜이 묻어 있는 고민들이 어쩌면 아직도 지속되고 있다는데 있다. 자본주의 이후의 문제 말이다. 단순히 이상향을 꿈꾸던 몽상가의 허망한 말로쯤으로 여길 수 없는 분명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김산과 님웨일즈의 <아리랑>을 통해 그리고 조정래의 <인간연습>으로 인상 깊었던 실존 인물의 이 막막한 한 생애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온몸으로 역사의 소용돌이 한 복판에 서 있었던 그의 삶이 지금 현재도 이어지고 있다는 데 그 고민의 핵심이 묻어난다. 불꽃처럼 살다가 산화한 체 게바라의 극적인 삶이 ‘20세기의 가장 완벽한 인간’이라는 다소 거북한 사르트르의 평가로 대표된다면 이 땅에서 ‘역사는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고 스스로 고백하는 허영철의 삶에 대한 평가는 우리들의 몫이 아니다. 근현대사를 위한 어떤 훌륭한 텍스트보다도 우선 이 책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이제는 사상 문제가 아니고 양심의 문제이지.(1990. 1. 8 친지 허종규, 허춘과의 면회) - P. 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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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휘소 평전 - 한국이 낳은 천재 물리학자 이휘소의 삶과 죽음
강주상 지음 / 럭스미디어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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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전은 개인의 일대기를 서술자의 평가를 통해 살펴볼 수 있는 책이다. 객관적 사실들을 고증하고 자료를 열거하여 구성하는 전기와 다른 특징이다. 그렇다고 해서 평전에 허구fiction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사실fact를 바탕으로 하되 서술자의 해석과 평가 적절한 분석들이 더해지면 한 사람의 생애가 오롯이 떠오른다. 한 사람의 일생을 평가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개별적 사실들에 대한 인과 관계를 적절히 구성하고 배열하는 일련의 과정이라는 말이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훈련된 글쓰기와 철저한 고증만이 책을 빛나게 한다. 단순한 사실들의 연대기적 나열은 읽는 사람의 눈꺼풀을 끄집어 내린다.

93년에 출간된 김진명의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가 아니었다면 이휘소라는 사람이 그렇게 사람들에게 알려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한 사람의 생애가 영화처럼 극적일 수 있다는 것은 가끔 소설보다 훨씬 더 영화같은 현실을 접하는 우리들을 당혹케한다. 핵무기와 관련된 박정희와 이휘소의 관계나 미국과의 상황들이 모두 현실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이휘소의 죽음에 의문을 제기했다. 우리는 소설을 소설로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할까?

영화 <그때 그사람들>에 대한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은 기각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도 마찬가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유족측은 패소했다. 죽은 사람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하는 것이 유족들의 주장이었지만 법원은 이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명성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명예에 대한 해석이 각자 달랐다.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는 않지만 역사적 사건을 다루는 사람들은 아직 끝나지 않은 역사와 죽지 않고 살아있는 유족들에 대해 당연히 부담을 갖는다. 그것에 대한 기준도 정답도 없기 때문에 현실에서는 늘 충돌이 일어난다.

강주상은 이휘소의 제자로 물리학을 전공한 학자다. 이휘소의 평전을 쓰기에 적합하지 않은 이유가 그의 전공 때문만은 아니다. 이휘소에 대한 가장 많은 자료를 갖고 있기 때문에 평전을 써서도 안된다. 직접 곁에서 이휘소를 지켜보고 그와 관계를 맺은 사람으로 그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고 믿지만 평전은 강주상의 의도와 다른 종류의 것이 되어 버렸다.

개인적인 판단이지만 이 책은 크게 세 가지 의미를 지닌다. 첫째, 이휘소의 뛰어난 능력에 대한 부분이다. 약관의 나이에 도미해서 석박사 과정을 거쳐 프린스턴 고등연구원으로 일하며 오펜하이머와 교류하고 페르미 연구소에서 일했던 과정을 통해 그의 뛰어난 수학적 계산 능력과 분석 능력 등 이론 물리학의 세계적인 학자가 되는 과정을 영웅적인 시선으로 서술한다.

둘째, 이휘소의 능력과 업적을 알리기 위해서는 그의 전공 분야를 알려야 한다. 이 책의 상당부분이 이론 물리학에 관한 강의로 채워져 있다. 무식한 나로서는 하품을 하며 억지로 읽었다. 과학 잡지의 기자처럼 독자들에게 알기쉽고 간단하게 설명할 자신이 없으면 길게 쓰지 말아야할 부분이었다. 차라리 리처드 파인만의 <여섯가지 물리학 이야기>처럼 일반 독자와 무식한 대중을 상대로 한 이야기라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읽겠지만 평전에서는 무리한 내용 전개로 밖에 볼 수 없다.

셋째, 핵물리학자로 의문사 했다는 오해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미망인을 비롯해서 강주상 본인등 이휘소의 지인들은 그의 안타까운 죽음이 많은 사람들에게 소설처럼 영화처럼 비쳐지는 것이 싫었을 것이다. 그래서 본문 내용과 동일한 내용의 부록까지 부쳐 ‘강주상의 회고’와 ‘소문과 억측들’까지 덧붙이는 기이한 형태의 평전이 되었다.

세가지 목적이 적절하게 어우러졌다면 즐겁고 유익한 책이 될 수 있었으나 결과는 실패로 돌아간 듯 보인다. 이 책은 ‘강주상 지음’으로 되어 있으나 필자 스스로를 객관화하여 끝까지 ‘강주상은...’이라고 스스로를 칭한다. 본문 188페이지 단 한번 “필자는 ‘그렇다’고 믿는다.”는 문장이 나온다. 나머지는 누가 쓴 것인지 알 수 없다. ‘이휘소 평전을 쓰면서’에서 강주상은 이 책을 ‘전기’라고 여러 번 표현한다. 책의 제목까지 헤매고 있다. 책을 시작하기 전에 ‘프롤로그’가 다시 덧붙혀진다. 알 수 없는 체계로 구성되어 있는 짧은 책이다. 상당한 허점과 실수를 연발하고 있는 이 책은 출판사의 편집인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 한 번 일깨워준다.

크게 6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어 이휘소의 생애를 일별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지만 장소의 이동과 시간의 변화만으로 그의 생애를 그가 남긴 업적과 직장으로 나누고 있어 설득력이 약하다. 유족과 지인들의 입장에서 2006년 과학기술한림원 ‘한국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된 것을 기념하기 위한 책일 수도 있지만 소설속의 이휘소가 아닌 이론 물리학자 이휘소를 전면적으로 보여주기에는 부족한 면이 많은 책이다. 주관적, 감정적 서술이 드러나는 부분들을 삭제한다면 전기에 가까운 책이다.


060913-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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