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용주의 살림지식총서 324
이유선 지음 / 살림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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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활 속에서 대하는 용어의 개념을 명확하게 정리하는 것은 어렵다. 상황과 맥락 속에서 그 의미를 파악하는 일이 잦기 때문에 컨텍스트는 텍스트의 의미를 규정한다. 하지만 문제는 컨텍스트가 본래 의미를 훼손하는 경우에 있다. 빈번하게 사용하다 보면 본래 의미를 사라지고 전혀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고 사람들에게도 인식되는 경우가 있다. 여기에는 언론이 한 몫을 제대로 한다. 지역 방언이 아니라 계층 방언처럼 비슷한 부류의 의식을 공유하는 사람들이나 특정 직업군의 사람들이 새로운 은어를 만들어 사용하는 경우와 조금 다르다. 이미 존재하는 학술적인 용어나 사람들이 알고 있는 긍정적인 의미의 용어를 아전인수 식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그러하다. 곡학아세의 대표적인 사례가 될 수 있겠다.

  실용주의는 철학 용어다. 퍼스가 처음 사용했고 듀이가 미국의 교육과 민주주의 문제를 다루면서 전성기를 맞이했다. 이후 언어분석철학의 물결로 쇠퇴했다가 로티에 의해 다시 주목 받는다. 실천적 유용성을 강조한다는 측면에서 우리가 실생활에서 사용하는 의미와 유사하다. 하지만 ‘프래그머티즘’이 나름의 원칙과 세계관을 가진 철학적 입장인데 비해 우리가 사용하는 실용주의는 특정한 태도를 말한다. 어떤 목적을 효율적으로 달성하는 것을 최우선적인 가치로 삼으면서 이념이나 원칙 같은 것은 부수적인 것으로 본다.

  이쯤 되면 어디서 많이 듣던 흘러간 옛 노래 같은 느낌이 들 것이다. 언론에서 혹은 특정 정치인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실용주의가 사실은 철학적 개념인 ‘프래그머티즘’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진짜 실용주의가 무엇이고 그것을 주장했던 철학자들이 대한민국에서 주창되고 있는 실용주의를 듣는다면 까무라 칠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실용주의적 태도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실천적 유용성이라는 측면에서 공통분모도 있고 효율성이라는 측면에서 다소 긍정적인 면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그 적용대상과 범위에 대해서도 우리가 동의할 수 있을까? 이유선의 <실용주의>는 우리가 알고 있는 실용주의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는 책이다. 표면적으로 실용주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책이지만 현실을 돌아보면 시의적절한 신문 시평(時評)처럼 읽힌다. 이념과 정치적 성향을 떠나서 통탄할 일들이 벌어지는 현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저자는 우회적인 방법으로 혹은 직설적인 화법으로 점잖게 타이르는 듯하다. 때로는 날선 비판의 목소리로 직격탄을 날리고 있다. 학문적 입장에서 철학사상을 오도하는 현실에 분노했을 것이며 많은 사람들에게 실용주의의 참모습을 알리고 싶었을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각자가 처한 현실에서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현실은 달라진다고 믿는다. 그것을 아는 것이 먼저라면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이 책은 그런 면에서 추천할 만하다.

  살림지식총서의 한계라면 제한된 분량과 피상적인 논의의 수준일 텐데 오히려 머리 아프고 복잡하지 않다는 장점을 지닌다. 말하자면 실용적인 ‘실용주의’ 책이다. 핵심을 짚고 흐름을 파악하는데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개괄적인 수준에서 혹은 교양 수준에서 얄팍하다 싶겠지만 일반인들에게,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접근성이나 실용성 측면에서 뛰어나다.

  실용주의란 무엇인가를 말하고 태동과 전개 과정을 살펴 본 다음 실용주의적 관점들을 소개하나. 마지막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실용주의가 갖는 의미를 살펴보고 있다. 당연하지만 마지막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들이 뼈에 사무친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기존의 제도와 규범을 넘어서서 새로운 틀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실용주의자가 꿈꾸는 다원주의 사회는 이런 상상력이 억압되지 않고 마음껏 나래를 펼 수 있는 사회이다. - P. 19

인간의 삶을 끊임없이 개선시키는 것을 지식의 목표로 간주하는 실용주의자들은 정치적인 측면에서 보면 태생적으로 진보주의자들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들에게 진보는 인간의 보편적 본성을 구현하는 문제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인간의 자유를 제약하는 요소들을 끊임없이 비판하고 극복해 나가는 실천의 문제이다. - P. 49 

  좌와 우, 보수와 진보의 이데올로기를 집어치우자. 모순된 말이지만 그리고 ‘실용주의’를 받아들이자. 위에서 언급한대로 제대로 된 실용주의는 새로운 틀을 만들어 나간다. 인간의 삶을 개선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는 실용주의를 실천하자. 인간의 자유를 옹호하고 단순한 돈벌이를 위한 실용주의가 아니라 인간의 가능성을 확장시키는 실용주의를 실천하자.

  현실을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에게 꿈과 이상만을 강조할 수는 없다. 우리는 누구나 현실 사회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 안에서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우리가 창조해 낼 수 있는 삶의 모습은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니다. 각자 소중한 삶의 가치를 만들어 갈 수 있는 사회는 불가능한 꿈이 아니다. 다원적이고 민주적인 사회는 꿈이 아니라 실현 가능한 삶의 모습이다. 저자의 말이 실용주의라는 철학적 개념에 대한 공허한 메아리가 아니라 우리들의 삶의 모습을 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이 되어야 한다.

  헛된 꿈을 꾸는 이상주의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실용주의적 태도만으로 사람들의 삶을 유린하거나 왜곡된 개념으로 국민들을 호도하는 짓은 더 이상 용납될 수 없다. ‘워낭소리’를 “교육을 통해 가난의 대물림을 끊으려 했던 것이 우리의 저력이 됐고 외국인도 이에 놀라고 있다”(한겨레신문, 기사등록 : 2009-02-15 오후 07:20:08 권태호기자)고 말하는 대통령이 특목고와 자사고 확대를 통해 교육 기회 불균형의 초석을 다지고 있다. 영어 광풍과 암묵적 고교 등급제, 편법 본고사의 부활을 조장, 묵인하는 실용주의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과연 그가 말하는 실용주의란 무엇인가? 허리띠 졸라매고 ‘대한민국의 힘을 믿습니다’라고 외치는 재벌의 광고 속에는 무슨 뜻이 담겨 있을까? 그들이 말하는 실용주의는 도대체 무엇인가? 과거로 회귀하는 급행열차는 오늘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껍데기는 가라. 가짜 실용주의자도 가라. 실용주의의 의미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실천하는 실용주의자가 되자.


090215-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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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철학은 무엇인가 - 근대, 이성, 주체를 중심으로 살펴본 현대 한국 철학사
강영안 지음 / 궁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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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국적 철학의 풍토는 척박하기만 하다. 얇고 빈약한 사상의 토대를 둘러보면 관객의 입장에서 비판과 냉소를 보내는 것과는 다른 허전함이 느껴진다. 대부분 서양 사상의 번역 소개에 바빠 보인다. 지식인의 지도를 그려나가며 철학자들의 역할과 한계를 확인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지적 토양의 기저에는 항상 철학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 토대는 허약하기 이를 데 없다. 개인적인 소회이긴 하겠지만 풍부한 지적, 학문적 토양이 형성되어 있다고 보기 어렵다.

  철학에 문외한인 일반인의 관점에서 토로하는 불만일 수 있으나 철학의 대중화와 글쓰기에 힘쓰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의 문제는 단순하게 논의될 수 없다. 전공자와 비전공자의 문제도 있고 전공자라 할지라도 대중화와 일반화는 다른 문제일 수도 있다. 어쨌든 철학에 관심을 가지고 서양철학자들의 논의에 관한 일반론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기도 쉽지 않고 철학자들의 주저를 번역서로 읽어나가는 데는 한계가 느껴진다.

  그래서 나의 경우 고등학교 시절 처음 접한 <철학의 기초이론>과 <철학에세이>로 철학에 입문했다. 지금도 입문 수준이지만 김용석, 강신주, 김용규, 남경태의 책들이 길잡이가 되었고 강유원, 이정우, 이기상, 김용환, 박홍규 등의 해설서를 통해 서양철학자들의 철학을 조금 맛보거나 번역서를 무턱대고 읽어보는 등의 노력으로 안개 속을 헤매기도 한다.

  이것은 다시 두 가지 문제에 부딪힌다. 첫째, 철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과 그에 대한 뚜렷한 목적과 방향이 없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체계적이고 계통적인 접근과 깊이있는 관심분야를 읽어내기 어렵다는 것이다. 어느 하나 쉬운 것이 없겠지만 인문학에 대한 깊은 이해와 다양한 관점들에 대한 접근이 쉽지 않다. 게으르고 아둔한 탓도 있겠지만 정규교육과정에서 기계적으로 암기했다가 사라져버린 지식 이외에 생활 속에서 적용하거나 접근할 만한 ‘철학하기’를 배울 수 없다. 때때로 난감하기만 하다.

  강영안의 <우리에게 철학은 무엇인가>는 한국 철학사에 대한 개설서이다. 근대, 이성, 주체를 중심으로 살펴보고 있는 이 책은 한국 철학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사적 전개 과정을 더듬고 있다. 저자가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서양 철학이 도입된 후 이 땅에서 철학을 한 첫 세대들이 철학을 어떻게 하였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과학적 합리성에 대한 관심 그리고  현대와 탈현대 또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사이에서 이성과 전통에 대한 한국 철학자들의 이해 정도를 다루고 있는 것이 이 책의 대강의 얼개이다.

  우리나라의 철학의 출발은 불행하게도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시작되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더불어 세계사의 전환점에서 우리나라에서도 민족적 자각이 이루어졌고 1920년대 후반, 1930년대 초에 해외 유학파와 경성제국대학 졸업생들의 배출과 함께 형성된다. 이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근대교육을 받았고 철학의 기본적인 도구인 어휘와 개념들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서양철학은 낯설지 않은 것이 되었다. 저자는 현실지향적 철학의 태도와 근대화, 이성적 경향과 감성적 경향을 띤 현실 파악 태도에 대해 실제 철학자들의 저서와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실증주의적 과학철학인 분석철학에 대한 관심과 반실증주의적 과학철학인 해석학과 현상학에 대한 논의를 집중적으로 설명한 2장, 전통, 근대, 탈근대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3장까지의 이 책의 주된 논의이다. 4장은 철학 용어에 대한 고찰로 서양철학에서 사용되는 용어들이 어떻게 한국어로 변화되었는지를 살피고 있다.

  일본에서 번역 수용된 용어와 개념들이 한국어로 정착되는 과정을 상세히 살피고 있는 4장은 전공자가 아니라서 대강의 과정과 흐름만을 훑어보는 정도로 만족했다. 철학자든 일반인이든 한국철학의 전개과정을 살펴보는 일은 의미 있는 일이다. 몇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어렵지 않게 정리하고 있어 읽을 만 했다. 현대 철학이 어떻게 자리 잡고 있으며 변화 발전하고 있는지 논의의 중심과 핵심을 살펴볼 수는 없지만 지금 여기에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고 전반적인 흐름이 어떠했는지를 알아 볼 수 있는 책으로는 충분하다.

  그 다음은 또다시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진다. 철학은 실용적인 학문이 아니다. 실생활에 적용할 수 있다고 하지만 학문에 기본적인 토양을 제공하는 것이 1차적 기능이 아닌가 싶다. 분석틀을 제공하고 이론적 토대를 마련해 나가는 일은 모은 학문 분야에서 요구되는 일이고 그것의 현실 적용문제는 2차적인 문제일 것이다.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지적 호기심은 인간이 지닌 고유한 특성이다. 철학이 무엇인지 나는 아직도 모른다. 영원히 무어라고 정의내리기 어려울 수도 있다. 다만 ‘앎과 삶’의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고 어떤 깨달음을 얻을 것인가에 대한 관심은 계속될 것이다. 세상에 대한 통찰력과 존재에 대한 이해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표현하는 방법과 사용하는 용어가 다를 뿐 어쩌면 모든 사람들이 철학자이고 철학하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오늘도 여전히 실존적 고민과 철학적 사유를 통해 인생에 대해, 세상에 대해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해 고민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면 욕을 먹을지도 모르겠다.


081203-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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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세계
막스 피카르트 지음, 최승자 옮김 / 까치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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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고,
한 송이 들꽃 속에서 천국을 본다.
손바닥 안에 무한을 거머쥐고
순간 속에서 영원을 붙잡는다.

                                                 - 윌리엄 블레이크, ‘순수를 꿈꾸며’중에서

  프랙탈 구조는 전체 구조가 부분 속에 나타나고, 부분의 자기 증식이 전체 형상을 만들어 내는 것을 말한다. 무한 반복의 구조 속에서 순환의 논리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끊임없는 자기 증식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시작도 끝도 없다.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본다는 말을 처음 접했을 때의 충격은 한 마디로 표현하기 어렵다.

  물론 개인적인 감동과 사색이겠지만 한 번 날개 짓으로 구만리를 날아간다는 붕새보다 길가의 핀 풀꽃의 흔들림이 더 큰 울림을 준다. 세상의 어떤 음악보다도 아름다운 소리를 정의할 수는 없다. 객관적일 수 없는 일에 기준을 마련하는 일만큼 무모한 일은 없다. 사람마다 다른 소리의 즐거움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침묵은 소리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다. 소음의 반대편, 잡음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 침묵이다. 침묵은 단순히 소리가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침묵은 분명한 하나의 소리이며 우리에게 많은 말을 건넨다.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빌리자면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주고 있다.

  물론 그 침묵은 무언의 말과 보이지 않는 메시지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절대 평화의 경지이며 무소음의 세계이고 정적이고 평화로운 세상을 뜻한다. 소리가 없다는 것은 움직임이 없다는 것이니 모든 사물이 그 자리에 정지화면으로 멈추어 선 상태를 말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단순한 소리 없음이 아니라 말과 말 사이를 가로지르는 침묵에 대해 깊은 사색과 다양한 관점을 소개한다.

  침묵의 모습은 어떠한지에 대해 시작해서 인간을 둘러싼 말과 침묵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다시 이야기하고 침묵의 의미에 대해 생각한다. 말로 이루어지지 않은 모든 소통과 의미의 전달이 사실은 침묵의 다른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발성 기관을 통해 언어로 표현되는 입말만이 소리라고 정의한다면 범위가 너무 좁아진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소리가 침묵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은 아니다. 자연에서 들려오는 새들의 노래나 바다가 들려주는 파도소리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바람소리를 통해 우리는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소리가 만들어내는 생의 감각을 절감한다. 우리에게 소리는 삶의 조건이며 이유이고 확인이다.

  하지만 영원히, 끊임없이 소리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릴 수는 없다. 만약 침묵이 없다면 소리도 의미가 없다. 우리에게 침묵은 휴식이고 안정이다. 놀라운 것은 저자가 이 책에서 보여주고 있는 ‘침묵’에 대한 집중력과 자유로운 사유의 세계이다. 하나의 주제에 천착하는 수많은 작가들을 보아왔지만 <침묵의 세계>의 저자는 집요하다. 깊은 사색과 오랜 사유의 결과가 아니라면 쉽게 쓸 수 없는 이야기들을 풀어 놓는다. 고개를 끄덕이며 때로는 공감하고 때로는 갸웃거리며 이 책을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침묵의 세계에 빠지게 된다.

  자아, 사물, 역사, 형상, 사랑을 주제로 침묵을 이야기하던 저자는 자연과 농부로 시야를 넓히고 ‘詩’와 침묵의 관계를 밝히고 있다. 조형 예술은 물론이고 잡음어로 표현된 소리와 침묵의 관계는 마치 살아 있는 대상과의 한 판 승부를 보는 듯하다. 라디오는 침묵의 절대악이 아닌가! 저자는 주제에 걸맞게 ‘라디오’가 지닌 속성을 통해 침묵을 돌아본다. 침묵이 없는 세계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마지막으로 신앙과 침묵의 관계는 제목만으로도 사람들에게 많은 말을 하고 있다. logos와 pathos의 세계를 넘나드는 하느님의 말씀은 신앙의 전부가 아니지만 저자에게 신앙은 곧 하느님과 일치한다. 어쨌든 이 세상을 구성하는 본질은 말에서, 즉 소리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침묵은 더 큰 세계를 감싸고 말과 소리까지 감싸 안을 수 있는 훨씬 더 큰 의미로 여겨진다. 한계를 말할 수 없는 침묵의 세계에 대해 저자 막스 피카르트는 조용하고 낮은 목소리로 그러나 단호하게 말한다. 그 이야기를 가만히 따라가다 보면 침묵은 단순하게 소리가 없는 상태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어둠은 침묵과 닮아있다. 하루에 두 마디만 하고 살았던 학창 시절도 있었지만 침묵하고 싶을 때 말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부딪히기도 한다. 창밖에 내린 어둠은 대체로 말이 없고 소리를 흡수하며 휴식과 안정을 준다. 침묵에 대해 한번쯤 돌이켜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면 이 책은 충분한 의미를 가질 것이다. 아니 우리 주변의 모든 소리를 다시 듣게 되었다면, 내가 뱉어내는 말들의 의미를 돌아보는 기회가 되었다면 이 책은 책 이상이 된다. 소리없는 세상은 침묵조차 소음일까?


08100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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썰레꽃 2009-03-17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잘 보고 갑니다. 친구의 추천으로 이 책을 찾게 되었는데 '인식의 힘'님의 글을 읽으니 책이 확 당겨지네요. 군더더기 없는 문장, 참 인상적입이다.

sceptic 2009-03-24 23:02   좋아요 0 | URL
천천히 음미하며 읽어야하는 책입니다. 즐거움으로 가득하시길...
 
성의 역사 1 : 지식의 의지 - 제3판 나남신서 410
미셸 푸코 지음, 이규현 옮김 / 나남출판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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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성’은 다양한 의미를 내포한다. 그 성에 내재한 의미만큼 상징하는 바도 다르고 그것에 대한 태도 또한 다르다. gender와 sex에 대한 인식의 차이만큼 우리가 받아들이는 ‘성’은 각양각색이다. 그것이 사회적 관점이든 개인적 관점이든 역사적 관점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것과는 조금 다른 측면일 수 있겠다. 미셸 푸코는 <성의 역사1~3>에서 인간의 ‘성’을 철학적 관점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 책들은 미셸 푸코의 마지막 저작이라는 데에도 의의가 있다. 4권이 예정되어 있었으나 사후 출판을 절대 반대했던 유언에 따라 아직까지 출판되지 않은 상태이다. 어쨌든 뭔가 미진함이 남아 있지만 인류학적 관점에서 인간의 ‘성’을 집요하고 철저하게 다루고 있다는 면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하나의 현상이나 대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관찰자의 주관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1권에서 저자는 전반적인 흐름과 본격적인 논의가 이루어직 전 단계로 전반적인 환경과 역사적 과정을 탐구하고 있다. <성의 역사 1>보다 ‘앎의 의지’라는 부제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철저하게 억압적인 시대였던 빅토리아 여왕 시대를 살아야했던 사람들을 필두로 억압의 가설이나 성의 장치들 그리고 죽음의 권리와 생명에 대한 권력이라는 측면에서 ‘성’의 의미를 고찰하고 있다. 성sexualite과 섹스sexe의 개념 차이에 대해 구별하며 번역자의 용어도 눈여겨 보아야 한다. 단순한 성행위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역사적 개념과 사회적 환경을 고려하여 규정된 개념이다.

  이 개념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프로이트와는 개념이 조금 다르다. 프로이트가 사용했던 성생활이나 그와 관련된 내용과는 다르게 이면에 숨어 있는 권력과 앎의 의지와 연관지어 사용한 용어인 ‘성sexualite’은 빅토리아 여왕 시대풍의 사람들에게는 억압적 요소로 작용한다. 이렇게 17~18세기를 거쳐 근대에 확립된 성의 개념과 기독교적 억압 요소가 어떤 식으로 발현되었는지가 ‘앎의 의지’에서 탐구하고자 하는 주제이다. 과연 ‘성’은 무엇이며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의 태도는 어떤 역사적 과정을 걸어왔는가? 그렇게 고착된 개념들과 태도는 어떤 변화를 거쳐 왔는가? 그것이 미셸 푸코가 탐구하고 싶었던 이유는 아닐까?

  책을 읽으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다. 인간이라는 동물종이 ‘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은 역사와 철학의 접점 속에서 끊임없이 정교해지는 억압의 구조였다. 질서와 절제를 미덕으로 한 기원후 1~2세기 혹은 기원후 4세기 경 그리스와 로마에서 시작된 논의들과 저작들 속에서 먼지 묻은 ‘성’에 대한 개념들을 끄집어내는 저자의 수고로움과 노력이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그것은 단순히 역사적 관점에서 ‘성’을 바라본다는 의미만은 아니다. 역사가는 통시적 관점에서 ‘성’을 둘러싸고 있는 혹은 ‘성’과 관련된 사건 혹은 현상들을 정리하고 분석하는 데 그칠 것이다. 그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이 아니라 나름의 한계를 지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미셸 푸코는 한 발 나아가 문헌들을 뒤적이며 그들이 주장했던 연애, 결혼, 가정, 동성애와 관련된 의미망들을 촘촘하게 엮어내고 있다.

쾌락과 권력은 서로 상쇄되지도 서로 등을 돌리지도 않는다. 쾌락과 권력은 서로 뒤쫓고 서로 겹치며 서로 재활성화한다. 쾌락과 권력은 복잡하고 확실한 자극과 선동의 매커니즘에 따라 서로 연관된다. - 1권, P.70

  근대로 이행과정에서 성은 어둠 속에 침잠한다. 그것은 섹스를 ‘비밀’스런 것으로 운명지어버린 과정에 놓여 있다. 그래서 오히려 끊임없이 증폭되고 오해되고 억압받아 온 것은 아닐까? 기독교적 윤리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기원후 1~4세기 문헌들을 고찰하려는 미셸 푸코 태도는 일견 당연해 보인다. 그 발원지를 찾아 변형 혹은 왜곡 된 사적 과정을 고찰하려는 것은 현재를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다만 쾌락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그것을 통제하는 권력과 지식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교묘하게 비틀고 가리고 헤집으며 자유로운 사유 방식을 택하는 저자의 개방적 태도가 오히려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결론에 익숙하고 주장을 준비하고 있는 독자의 입장에서 보면 어리둥절하게 1권이 끝나 버린다.

  쾌락은 도덕적으로 옳지 않은가? 대답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도덕이란 무엇인가? 우선 저자가 ‘도덕’을 어떻게 정의하는지 살펴보자.

‘도덕’이란 단어의 모호성은 다들 알고 있다. 이것은 가족, 교육기관, 교회 등과 같은 다양한 규제체제를 통해 개인이나 그룹들에 제시되는 행동규칙과 가치들의 총체를 의미한다. -2권, P. 41

  쾌락의 활용에 대해 논하고 있는 2권은 형식면에서 서론과 결론을 갖추고 있다. 세 권 중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 양생술과 가정관리술, 연애술과 진정한 사랑에 대해 논하고 있는 2권은 전 기독교 시대의 쾌락에 대해 역사적으로 추적하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리스와 로마에서 논의됐던 쾌락의 종류와 의미를 살펴보고 그것을 대하는 태도와 방법을 논한다. 그것은 단순히 사적 전개 과정을 보여주는데 그치지 않고 진정한 사랑의 의미가 무엇인지 인간의 삶에서 쾌락이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 돌아보게 하는 역할을 한다.

  남성과 여성의 차이와 오해에서 비롯되는 관계 설정. 그것이 도덕과 결합될 때 빚어지는 억압의 메커니즘과 교묘한 틀이 숨어 있다. 우리는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 1권이 1976년에 발간되고 8년이 지나 2권과 3권이 출판된다. 현재적 의미를 살펴보는 것보다 그것을 밝히기 위해서는 우선 과거로의 여행을 떠났을 저자를 생각하며 그 이후의 이야기들이 더없이 궁금해진다. 4권으로 출판 예정이었던 ‘육체의 고백’을 기다려 보면 조금은 궁금증이 풀릴 듯도 하다.

성적 활동이 이와 같이 도덕적 평가와 구분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성행위가 그 자체로 하나의 악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이 원죄의 표지를 지니고 있기 때문도 아니다. - 2권, P. 64

  인류가 활용해 온 쾌락은 도덕적 평가의 대상이 아니다. 기독교적 윤리로서 악이나 원죄로서 바라보아서는 결코 그 의미와 삶의 연관성을 찾아낼 수 없다는 이야기로 들린다. 결혼과 가정, 연애와 소년애에 대한 상세한 서술과 고찰은 그 갈피 속에서 드러나는 의미들을 읽어내야 한다. 미셸 푸코는 문장들 사이에 여백과 생략이 많다. 결론짓고 정리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그것들을 모조리 독자에게 숙제로 남긴다. 아니 그 텍스트를 대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해석해 달라는 주문은 아니겠지만 수많은 가능성과 상상력과 사유의 단초들을 열오 놓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마지막 3권에서 내세운 주제는 ‘자기 배려’이다. 그런데 이 자기 배려는 협소한 이기적 관점이 아니다. 국가의 관점에서 영속적인 사회를 유지하려는 태도나 어떤 질서 그리고 자연 질서와 합일되는 전통 속에서 자신의 쾌락을 꿈꾸게 하고 있다. 고대의 전통이 사라진 시대, 근대를 거치면서 우리는 그 자연스럽고 질서 정연한 전통과 결별한 것은 아닐까? 육체적 관점과 아내, 그리고 소년들을 통해 ‘성’과 사랑이 지닌 의미와 질서들을 일별하는 것이 3권의 내용이다.

  교양 있는 인간형이란 자신의 육체는 물론 조화롭게 계발된 정신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정치적 인간으로 이상형은 이렇듯 쾌락을 조절하고 아내는 물론 다른 소년들과의 관계 들이 국가의 정치적, 문화적 개념 속에서 검토되어야 한다. 이러한 전통들이 오늘에 되새겨져야 한다는 주장은 물론 아닐 것이다. 저자는 이런 관점과 논의들 속에서 진정한 쾌락은 자신에 대한 배려와 관계들 속에서 맺어지는 ‘절제’에서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억압과 권력의 구조가 아니라 스스로의 선택과 주체적인 삶이 주는 행복에서 우리는 한 발 멀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자연이 성적 쾌락에 부여한 상위기능, 성적 쾌락이 전달하고 따라서 소모시켜야 할 물질의 가치, 바로 이런 것들이 성적 쾌락을 질병에 근접시키는 것이다. 1, 2세기의 의사들이 그 같은 양면성을 최초로, 그리고 유일하게 표명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한 양면성에 대해 과거에 입증된 것보다 더 발전되고 더 복잡하며, 더 체계적인 병리학을 기술하였다. - 3권, P. 135

  의사들과 철학자들의 공모로부터 기독교의 윤리는 시작되었다. 신과 인간의 관계를 잘못 이해하고 왜곡된 종교는 인간의 삶의 황폐화한다. 신의 존재 여부를 떠나 자연이 인간에게 부여한 육체로부터 모든 것은 시작된다. 종족이 보존되고 또 하나의 쾌락을 추구하기 위한 ‘성’이 문화와 역사적 관점에서 어떤 양상으로 변모되었는지 살펴보는 것은 탈근대의 시각에서 접근해 보아야 할 문제는 아닌가? 아니면, 21세기를 살아가야 하는 나의 삶에 대한 또 다른 시각과 통찰을 위한 인식 도구로서 역할을 해야 하는가?


080108-00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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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푸코 살림지식총서 25
양운덕 지음 / 살림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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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셸 푸코의 이름을 처음 본 순간 그 의미와 무관하게 코를 간질이는 맵싸한 풋고추가 생각났다. 강렬한 자극만큼 그의 인상 또한 선명하다. 단 한 올의 머리카락도 보이지 않는 헤어스타일(?)이 민망했기 때문이다.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겠다는 말이 아니라 그저 우선 귀에 들리고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그와의 첫 만남에 관한 이야기다. 외계인에 가까운 느낌으로 그를 만나면서 글을 통해 만난 그는 더욱 그러했다. 프랑스인 특유의 난해하고 복잡한 문장, 상징과 은유가 풍부한 표현은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다른 철학자의 글들에 비해 좀 나은 편이지만 역사적 관점, 특히 17~8세기 고전주의 시대의 관점에서 발원한 그의 사유의 세계를 따라잡기가 쉽지 않았다.

  <감시와 처벌>을 거쳐 <광기의 역사>를 통해 이번엔 <성의 역사>를 만날 차례다. 순서와 무관하게 시간 날 때마다 한 권씩 손이 가는 이유는 탁월한 안목 때문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가르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아침에 찡그리며 눈을 뜨고 피곤에 지쳐 밤에 잠이들 때까지 나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생각’하며 보내는지 모르겠다. 일상에 대한 반추, 일을 하기 위한 고민 이외에 세상과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사유의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미셸 푸코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68혁명의 불명예를 안고 있지만 행동하는 양심과 실천하는 지식인이 아니라고 해서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다. 그를 위한 변명이 아니라 현재적 유용성에 대한 사유의 밑거름이다. 삼십대 초반부터 정점에 달한 그의 사유는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우회적인 답변이기도 하다. 불과 몇 백년을 거치면서 우리의 ‘신체’와 ‘권력’의 관계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탐구하기 위해서 그를 제외하고 생각할 수는 없다.

  신체에 깃든 규율과 통제, 절차, 질서 등은 근대적 일상을 이해하기 위한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군대와 학교에서 병원과 직장에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우리들의 모습은 하나의 병영을 방불케 한다. 낙오자가 되지 않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움직이는 우리들의 신체는 이미 보이지 않는 감시와 통제의 눈길을 벗어나기 어렵다. 시선은 하나의 권력이다. 무언의 억압과 규율을 만들어낸다. 신체를 조절하는 것은 효과적이고 특별한 장치들이 동원된다. 벤담이 개발한 판옵티콘과 광인을 다루는 수용소와 병원이 그것이다.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기준 자체가 역사적 관점으로 판별해야 하는 변곡점이 되고 개인이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유의 한계는 점점 좁하지기만 한다.

  양운덕의 <미셸 푸코>는 그의 저서들을 통해 천착해온 ‘신체’와 ‘권력’이 빚어내는 근대의 주체 문제를 거론한다. 권력을 보는 과점이나 근대적 신체를 만드는 규율의 기술, 신체를 훈련 시키는 권력 장치, 생명을 관리하는 성의 문제 틀에 대해 핵심적인 관심사를 설명해 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계몽주의에 대한 비판적 태도에서,

서구 역사에서 계몽은 진리의 진보와 자유의 역사를 결합시키는 시도였다. 즉, 계몽은 진리의 성장이 바로 주체의 자유를 확대시킨다고 믿는다. 푸코는 이런 믿음에 따라서 계몽에 찬성할 것인가, 반대할 것인가에 대한 선택을 강요하는 태도가 바람직한지를 질문한다. - P. 84

  푸코의 질문의 핵심은 항상 냉소적이고 풍자적인 문장의 뉘앙스에 놓여있다. 대안을 제시하거나 이것이다라고 결론 내리지 않는 그의 태도는 판소리의 창자와 유사하다. 슬쩍 빗겨서서 딴지 걸고 돌아서 시침떼고 정확하고 날카롭게 핵심을 찔러놓지만 방향을 제시하거나 굵고 강렬한 목소리로 주장하지 않는다. 참 맥빠지는 게릴라 전술같은 글쓰기지만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다.

푸코는 스스로를 주체로 아는 개인들을 말하고, 행위하고, 사고하도록 만드는 사건들을 ‘역사적’으로 탐구하면서 고고학적이며 계보학적인 비판적 방법을 사용한다. - P. 85

  필연적 역사라고 믿는 것들 사이에 구멍이 존재한다. 우리는 그것을 우연성이라고 부른다. 우연이 모여 필연이 되기도 하고 인연이 되기도 한다. 현재 사회 구성원들의 기계적인 작동원리와 역사 원칙들은 그렇게 우연적이 것들과 필연적인 실제 사이의 경계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미셸 푸코는 그 경계를 밝히거나 그 언저리를 보여주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것은 아닐까? 이제 그의 글을 좀 더 신경써서 읽어 볼 차례이다.


08010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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