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과 권리를 위한 투쟁 문예 인문클래식
루돌프 폰 예링 지음, 박홍규 옮김 / 문예출판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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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고시로 상징되는 ‘불멸의 신성가족’(김두식)은 이제 정치 권력의 정점에 섰다. 청산되지 못한 일제 잔당들이 또다시 헤게모니를 거머쥔 채 경찰, 검찰, 사학은 대한민국 사회의 근간을 위태롭게 한다. 이념과 진영 논리의 문제가 아니다. 상식과 현실은 그들만의 리그에 편입된 지 오래지만 언론과 대중은 비판적 안목없이 현실의 문제와 원인을 파악하지도 못하고 생존 경쟁에 매몰된다.

21세기에 들어 한국에서 전통적인 암기식 수험 중심의 법학을 타계하기 위해 학제적 방법을 통한 사회 현실의 인식과 사회개혁의 일환으로 로스쿨이 도입되었다. 그러나 예링이 지적한 대로 기계법학의 폐단은 여전하다. 거대한 고시학원으로 변질된 로스쿨은 한국의 수험법학 혹은 보수법학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너무 고급일지 모르지만, 그런 천박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예링의 『법과 권리를 위한 투쟁』을 읽을 필요가 있다는 박홍규의 맺음말로도 이 책의 의미는 충분히 설명된다.

“19세기 사람 예링도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황당무계한 이따위의 현실, 즉 수사와 재판이 판검사와의 연줄이나 권력과의 관계로 움직이는 이 더러운 현실에서는 그런 연줄이나 뒷배가 있는 사람들만이 그들의 이익을 위해 소송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고, 정의를 지키는 법이니 재판이니 하는 소리는 그야말로 그런 자들을 위한 헛소리에 그칠 것이다.” 판검사는 ‘권력을 위한 투쟁’을, 변호사는 ‘고수입을 위한 투쟁’을, 로스쿨 학생들은 ‘출세를 위한 투쟁’을 가열차게 멈추지 않는 현실에서 ‘법과 권리를 위한 투쟁’은 가능할까. 아니, 시민들의 권리를 위한 투쟁이 아니라면 법은 ‘법치주의’를 외치며 밥그릇을 챙기는 자들의 몫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는 예링의 지적이 오늘 우리 현실에도 유효하다는 사실이 뼈아프다.

1872년 빈 대학을 떠나며 강연한 내용이 근간이 되어 출판된 이 책은 Recht, 법 혹은 권리가 개인과 공동체를 위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돌아보게 한다. 보수적인 개념법학에 대한 비판으로 써 내려간 짧은 글은 강렬하고 인상적이다. 현실에서 우리가 겪는 경찰과 검찰 혹은 변호사의 면면에 대한 평가와 비판은 ‘법과 권리’를 대하는 시민들의 태도와 관점으로 바뀐다. 절대, 기득권을 내려놓거나 내부적인 변화와 개혁을 기다리는 헛된 꿈을 꾸지 말라. ‘투쟁에서 너의 법과 권리를 찾아라’는 예링의 모토는 시대와 상황과 무관한 삶의 태도와 방법으로 읽힌다.

예링은 “법과 권리의 목적은 평화이고, 평화에 이르는 수단은 투쟁이다.”라고 선언한다. 이 단호한 문장에 숨은 역설과 함의는 일반 시민들을 향한 가장 중요한 조언이다. 권리를 위한 투쟁은 권리자 자신의 의무이며 이 의무를 지키지 않는다면 공동체의 질서와 법체계가 무너질 것이라는 주장은 추상적이고 이념적인 법학을 현실로 끌어내려 인간의 권리감각을 일깨우고 법의 존재 이유와 현실적인 문제해결의 단초가 된다. 국가공동체의 의무의 기본이 시민 개개인의 권리를 위한 투쟁이라는 지적은 로마법에 근간을 이루는 시대정신의 재해석이다.

단순 명료한 주장에 군더더기가 없고 셰익스피어의 샤일록을 등장시켜 유대인의 편견과 재판관의 결정을 비판하는 대신 법이 추구하는 목적과 방향을 다시 점검한다.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합의에 따라 법은 계속해서 신설, 개정, 폐지된다. 법은 선악의 문제를 다루지 않으며 인간의 권리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250여 년 전 예링의 생각이 여전히 상식으로 자리 잡지 못한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지만, 너무 늦지 않게 우리 모두 관심을 가져야 할 때다. 소송 만능주의, 재판 제일주의로 예링을 오독하는 하는 사람은 없겠으나 21세기 법기술자들이 판치는 세상은 예링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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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나스 타자윤리학
김연숙 지음 / 인간사랑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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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철학의 전통은 인간의 이성을 중심으로 선, 빛, 능동성, 형상, 완전성 등에 긍정적 시선을 보냈다. 반대 항에 놓인 감성, 악, 어둠, 수동성, 질료, 불완전성 등은 지양한다. 근대의 인식론적 패러다임도 주체/객체, 이성/감성, 정신/물질의 이분법은 지속된다. 고대의 존재론적 이분법이나 최근의 인식론적 패러다임의 이분법은 이성에 우월한 가치를 부여한다. 플라톤에게 감성 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몸은 영혼의 감옥이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정념을 이성에 의한 조정과 통제의 대상으로 평가했다. 현대인은 이러한 사유의 틀에서 자유롭지 않다. 과학기술 중심의 교육체계는 물론 인문, 사회 분야도 ‘과학’을 붙여야 마땅한 대접을 받는다. 신 중심 사회에서 이성 중심 사회로의 이동은 인류를 이성적 존재로 거듭나게 했으며 야만에서 문명사회로 나아가게 했다. 그러나 숱한 순기능에도 불구하고 주체 중심의 존재론은 윤리학에 치명적 약점을 초래했다. 이 지점에서 레비나스의 타자윤리학은 후설의 현상학과 하이데거의 존재론에 반기를 든다.

“감성의 주체를 강조하는 레비나스의 윤리학을 감성의 윤리학, 타인의 호소에 귀기울이는 타자의 윤리학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라는 김연숙의 평가는 이 시대의 윤리학을 다시 점검하게 한다. 자아와 타자의 윤리적 관계는 무식해서 용감한 누구 말마따나 자유와 평등의 원리가 적용될 수 없다. 대개 윤리학은 비대칭을 전제되기 때문이다. 타자의 불행에 대한 도덕적 책임에 있어 인간의 몸과 감성 측면에 주목한 레비나스는 몸적 존재로서 타인의 호소와 요청에 노출된 존재론적 자아의 윤리에 대해 우리에게 묻고 있다.

김연숙은 사르트르의 적대적 타인관을 비판하며 “도덕성(la conscience morale)은 이성적인 의지나 이성적인 자유에 뿌리를 둔 것이 아니고 이웃을 환대하는 태도, 이웃의 삶을 나의 삶보다 더 중시하면서 이웃을 환대(hospitalité)하는 태도 속에 있는 것이다. 요컨대 레비나스는 자유를 자율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도덕적 자유는 타자의 타자성(altérité du l'autre)에 정향되어져야만 한다.”라고 정리한다. 타자의 타자성에 정향되지 않는 도덕적 자유는 심하게 말하면 현대사회에서 합법적으로 저지르는 범죄에 해당한다. 기울어진 저울에 균형점은 수학적 평균일 수 없다.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대한민국의 윤리학은 정치와 사회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공동체가 유지되는 도덕 규범조차 뿌리채 흔든다. 아니, 타자윤리학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타자는 타인과 다르다.

타자―

(외재성)

환경적 물질의 세계

대상화 가능, 자기화의 영역―향유의 관계

타인

열망과 초월의 대상―형이상학적‧윤리적 관계.

자아 안으로 동일시할 수 없는 무한성을 내포함

열망과 초월의 대상이지만 타인의 얼굴을 통해서 나타남

기후, 환경 문제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며 인구 80억 시대를 열었다. 주기적으로 인류의 삶을 위협하는 전 세계적 팬데믹과 그 후유증은 직접적으로 우리 삶에 위협으로 작용한다. 정치인들의 부작위는 범죄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 침묵하고 외면하는 사람들이 실정법을 위반하는 자들보다 더 위험하다. 구체적인 호명, 수많은 비명과 아우성을 듣지 못하는 무능이야말로 이 시대의 패륜이다.

욕구와 고통은 완화될 수 없고 만족으로 사라진다. 그러나 열망은 절대 채워지지 않는다. 최소한의 욕구를 인간적 욕구를 충족하지 못하거나 고통받는 사람들을 외면하는 자아 혹은 사회는 지속 불가능하다. 가족 이기주의 너머에 놓인 불행을 외면하는 자아의 행복은 불가능하다. 레비나스는 자아와 타자를 연결해주는 것이 ‘초월’이라고 했다. 형이상학적 타자성의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초월에로의 이행, 절대적으로 다른 타자에로 향해가는 움직임, 이행이다. 레비나스는 이같은 초월의 운동이야말로 형이상학적 관계, 윤리적 관계라고 말한다. 너와 나의 배타적 친밀성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타자에 대한 윤리적 응답, 도덕적 책임은 모든 인류에게로 확대된다. 이 같은 점에서 레비나스는 “제대로 질서 잡힌 정의는 타자와 더불어 시작한다(la justice bien ordonnée commence par autrui)”라 말한다.

서양철학의 전통을 넘어선 레비나스의 타자윤리학은 동양 윤리와 닿는 면이 많다. 이 책은 그린비 출판사에서 ‘레비나스 선집’(전6권)이 나오기 17년 전인 2001년에 출간된 책이다. 연구자의 꼼꼼한 해설과 원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당대 철학적 사유, 서양 철학과의 비교 등 공시적, 통시적 측면에서 레비나의 사상과 타자윤리학을 치우침 없이 소개하고 분석하고 있다. 자본에 종속된 인간의 이기적 욕망을 간과한 점이 아쉬움이 남는다. 또한 모든 철학적 사유와 사회학의 논의가 그러하듯 “그래서 어쩌라고?”와 같은 구체적 실천방안에 대한 진지한 논의와 대안을 마련하기 위한 고민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 언제나 그것이 궁금하다.

타자윤리에서 열망은 유한한 자아가 무한한 존재의 타자를 대하는 방법이다. 타자를 열망하는 태도는 타자를 자기 안으로 통합시키거나 자기화하는 작용이 아니라 타자를 향하여 자기 자신을 열어 젖히고 헌신하는 것이다. 타자에 대한 열망과 초월은 자아의 열림, 개시, 내 집의 현관문을 열어주고 타자를 환영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타자에게로 열려진 문, 그것은 타자에 대한 초월적 열망과 일치한다. 그리고 그것은 타자와의 충만한 관계, 윤리적이고 사회적인 관계를 의미한다. - 2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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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의 조건 - 철학이 진실을 구별하는 방법
오사 빅포르스 지음, 박세연 옮김 / 푸른숲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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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두 가지 유형의 무지, 즉 근거 없는 잘못된 믿음과 믿음의 부재가 존재한다. 이는 잘못된 정보를 받아들인 것과 정보를 전혀 받아들이지 못한 것의 차이다. - 180쪽


우리는 사물이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다는 자동차 백미러의 경고를 때때로 잊는다. 시야각을 넓히기 위한 착시현상은 일상에도 나타난다. 현상은 본질을 드러내지 못하고 결과로 원인을 파악하지 못하기 쉽다. 소설가 이현은 단편 「거의 하나였던 두 세계」에서 “나는 진실의 반대말이 주로 거짓이나 가짜라고 배워왔는데, 살면서 오히려 무지에 더 가까운 개념이 아닌가, 생각할 때가 많았다.”고 고백한다. 스웨덴의 저명한 언어철학자 오사 빅포르스는 이를 증명하듯 무지의 반대말로서 진실이 갖춰야 할 조건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가 사는 세계에 과연 ‘진실’ 따위가 존재하느냐는 냉소적 태도도 좋고, 진실 그 자체를 갈구하는 종교적 몰입도 좋다. 다만 사실fact와 진실truth 사이의 거리만큼 먼 세계에 진입하기 위해 우리가 갖춰야 할 조건에 대해서는 한번쯤 살펴봐야 하는게 아닐까.


포스트 트루스post-truth(탈진실, 진실보다 감정과 개인적 믿음이 여론 형성에 더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현상)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익숙해진 ‘대안적 진실alternative truth’이라는 말은 트럼프 당선 이후 일상적인 허위의 세계를 근사한 포장지에 불과한 게 아니라 또 하나의 진실을 창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발로가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온갖 가짜 뉴스와 추측성 보도, 편집과 일방적 프레임으로 언론의 기능을 상실한 몇몇 레거시 미디어의 헤드라인을 볼 때마다 느끼는 분노에 가까운 불편함을 설명하기 어렵다. 어이는 집을 나가고 헛웃음이 나지만 정치적 성향에 따른 이념 논리로 치부되기 십상이다. 어차피 객관적 거리가 불가능하다면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진실의 세계는 존재하기나 하는 걸까.


우리는 왜 지식에 ‘저항’하는가. 아니 그 전에 지식이란 무엇인가. 저자는 “1. 이론적 지식theoretical knowledge : 무엇을 알고 있는지knowledge that, 알고 있는”과 “2. 실천적 지식practical konwledge : 방법을 알고 있는지knowledge how, 할줄 아는”으로 나눈다. 이론과 실제의 거리만큼 추론과 경험의 세계는 타협할 수 없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로 시작하는 경험론자들과 ‘논리적으로 그게 가능하냐’는 주장이 부딪치는 자리에서 우리는 ‘의심’ 이외에 믿을 구석이 없다. “지식은 우리 모두가 협력해 만든 창작물이다. 즉, 각자가 다양한 방식으로 기여해온 인식적 노력이 누적된 결과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의 사고는 왜곡되는가. 거짓말과 가짜 뉴스가 판치는 세상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저자는 한발 더 나아가 그 원인을 교육 현장에서 찾는다. 구성주의가 교육에 미친 영향을 꼼꼼하게 살핀다. 비판적 사유의 부재가 악惡이라고 선언한 한나 아렌트의 말은 언제나 옳다. 진실 고수holding true를 위해서는 인식적 불평등epistemic injustice을 극복하고 암묵적 편견implicit bias을 이겨내는 실천적 지혜practical wisdom가 요구된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지만 저자는 최악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비판적 사고, 출처 비평, 전문가 신뢰, 토론과 팩트체크’를 제안한다. 


저마다의 상식이 다르다. 각자 선악의 기준이 다르고 공정과 정의를 보는 관점도 다르다. 내로남불이 본능이라는 핑계에도 한계가 있다. 진실의 조건마저 상대적이라면 우리는 어느 지점에서 서로 다른 생각과 개별적 사실을 확인해야 할까. 언어의 명징함, 개념의 정확성, 비판적 사유의 엄중함이 우리를 구원케 하리라. 진실의 반대말이 무지라면 겸손과 반성적 태도가 자신을 한발 나아가게 하지 않을까. 지금 생각한 대로 살고 싶다면 말릴 수는 없으나 대부분 사람들은 그게 사는 대로 생각하는 증거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분야는 다르지만 최근에 쏟아지는 논의는 개별적 진실, 즉 대안적 진실을 주장하는 이들의 태도다. ‘왜’가 아니라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서로 궁금해하는 게 아닐까. 우리라는 카테고리 안에 담을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분야별로, 쟁점마다 진실을 서로 다르게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게 최소한 내 생각과 믿음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은 기본이 아닌가. 


우리는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사실에 항상 마음을 열어놓아야 한다. - 3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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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 - ‘신이 죽은’ 시대의 내로남불
허경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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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옳은 것만큼이나 잘못된 것을 진실하게, 진심으로, 열렬히 믿을 수 있다. - 182쪽

객관적 ‘사실’에 대한 확신,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은 ‘진실’이라고 믿음 앞에서 계속 흔들린다. 각자의 기준과 판단으로 선택하고 결론 짓는 일이 반복되지만 대체로 사람들은 다른 생각 앞에서 당황한다.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인정하겠다는 똘레랑스의 정신을 실제 삶에 적용할 생각은 별로 없다. 옳고 그름, 선과 악, 밝음과 어둠, 좋음과 나쁨의 경계선이 분명하게 보이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한가. 

진리는 없고, 관점만이 존재한다. 또는 진리는 없고, 해석만이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사실은 없고 관점만이 존재한다는 주장은 니체의 전매특허가 아니다. 복잡, 다변한 세상에서 사실과 진리는 순간에 머문다. 일시적 현상에 불과한 듯 세상은 혼란스럽고 목소리 큰 놈들의 아우성에 귀가 아프다. 허경이 말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신경 쓸 것 없다. 왜 우리가 각자의 내로남불과 편향성을 수정하지 못하는지, 그것은 인간의 본성이니 어쩔 수 없다는 면죄부가 가능한지, 문명 발달과 이성의 힘으로 합리적인 토론과 공론의 장에서 합의가 불가능한 이유가 무엇인지 쉼없이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럴 수 있을까. 승리가 선이고, 성적이 모범이며, 재산이 인격인 사람들의 태도는 바뀔 수 있을까. 사람들의 관점, 편견, 인식틀은 어떻게 형성됐을까.

마르크스의 말대로 ‘무지는 논증이 아니다.’ 논점을 이해하지 못한 채 자신의 믿음이 타당함을 주장하는 사람을 종종 만난다. 어떤 사건, 사태에 관한 누군가의 믿음이 얼마나 견실한가의 문제와 그 사람이 믿는 내용이 옳은가의 문제는 전혀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종 근대 이후 과학과 철학 분야에서 사라진 ‘객관적 사실’ 운운하며 자신의 생각을 강력하게 주장하며, 심지어 타인을 설득하고 수용하지 않는 상대를 비난한다. 

이렇게 심각한 상황을 연인, 가족, 친구, 동료, 이웃과의 대화에서 매일 마주하지만 웃으며 넘어가고 애써 외면하거나 그저 서로 다른 것 뿐이라며 위로한다. 과연 그런가.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와 “너는 맞고 나는 틀리다”는 동어반복에 불과할까. 허경이 풀어내는 <2021년 대한민국 사회에서 작동하고 있(다고 내가 믿는)는 ‘일반적 인식론의 무의식적 대전제’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려는 의도>에 관한 이야기가 흥미로운 건 사람들은 왜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하는지, ‘신념’에 가득한 채 세상을 살아가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내로남불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판단과 남의 행위에 대한 판단에 일관성이 결여된 경우를, 곧 ‘자신의 행동과 타인의 행동을 재는 잣대가 다른 경우’를 도덕적으로 비판하는 담론이다. 내로남불 담론의 한복판에 선 정치권의 주류 세력인 보수와 진보, ‘국민의힘’과 ‘민주당’ 지지자들에게 날리는 펀치가 허공을 스칠 뿐일 수도 있다. 진영논리에 갇힌 사람들에게 의심하고 생각하고 고민하는 과정을 기대하기는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감정적 선동에 익숙한 사람들, 무비판적 뉴스 소비자들, 팬덤 정치의 수혜자들은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라는 생각이 아니라 자신들의 생각이 좀더 진실에 가깝고 그것을 위해 열심히 싸운다는 도덕적 정당성으로 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윤리적 기준ethical standards, 자유freedom의 평등equality, 공정fairness과 정의justice은 ‘누가, 어떤 기준으로, 어떻게 그 기준을 정할 수 있는지’ 살펴보자. 저자는 이 지점을 톺아보기 위해 칸트의 정언명령, 홉스의 리바이어던, 로크의 통치론, 존 롤스의 ‘무지의 베일’, J. S. 밀의 자유론을 들고 나왔다. 성인중심주의자, 19세기 백인 유럽중심주의자, 제국주의자, 오리엔탈리스트인 밀의 한계에도 불구하고(물론 다른 고전의 한계도 이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에서 아쉽지만 시대 상황과 사상가들의 환경을 고려해서 이 부분은 다루지 않는다) 현재 우리 사회의 갈등과 분열 양상을 고찰하는데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물론 이 이야기는 오히려 개인과 개인사이의 대화 국면, 삶의 목표과 가치에 대한 개인의 선택, 동일한 사건과 상황에 대한 서로 다른 반응을 보이는 장면에서 더욱 필요해 보인다.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가 맞을까. 아니,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나인가. 나는 왜 어떤 기준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판단하고 선택하며 살아갈까.

흔들림없는 편안함. 어느 침대 회사의 광고 카피다. 인간은 흔들리는 존재의 가지 끝에서 불안을 느낀다. 그 불안은 자유를 위해 마땅히 치러야 하는 세금 같은 것이다. 처음 바닥을 찍을 때 견디지 못하면 그 다음 바닥이 불안하다. 어차피 파도는 밀려온다. 아무리 발버둥 우아한 자유형으로만 헤엄칠 수 없다. 때로는 숨을 참고 수면 아래로 내려가 고요한 잠영을 해야 할 때가 있다. 바닥을 발을 딛고 힘차게 떠오르고 싶을 때까지 그대로 있는 순간은 즐길 수는 없을까. 소리가 없는 세상, 침묵과 정적이 주는 편안함이 수면 위의 소란한 세상과 맞닿는 지점의 경계는 분명한가. 너는 맞고 나는 틀릴까. 

나는 ‘철학이 건강한 불편함을 지향한다’고 믿는다. - 2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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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한국어로 철학하기 - 철학의 개념과 번역어를 살피다 메멘토 문고·나의 독법 2
신우승.김은정.이승택 지음 / 메멘토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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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런 책은 없지, 누가 이걸 좀 써줬으면 좋겠는데, 이 분야를 좀 정리하는 사람은 없나... 책을 읽다 문득문득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를 때가 많다. 번역본을 느낄 때마다 느끼는 한계 때문에 원서에 대한 욕망이 커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발번역에 분노하고 비문에 고개를 젓는 대신 원문을 읽으면 문제가 해결된다는 걸 알면서도 한숨 쉬기를 반복한다. 그리고 누군가 대신해주길 기다린 건 아닐까 싶다. 게으른 독자의 탐욕을 채워줄 출판사, 번역가, 전문가의 노력에 기대고 산지 오래다.


너무 늦었지만 꼭 필요한 책을 만나 읽는 내내 반가웠고 논의의 출발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현대 한국어로 철학하기는 ‘철학’의 자리에 문학, 역사학, 사회학, 심리학 등도 놓여야 한다. 에드워드 윌슨의 ‘consilience’를 최재천이 ‘통섭統攝’으로 번역하면서 벌어진 논쟁부터 의학, 법학 용어에 이르기까지 일본식 한자어로 중역된 거의 모든 분야의 용어들이 때때로 낯설고 이해를 방해하며 오독의 여지를 남긴다. 언어는 사물과 개념을 확정하고 의미를 포착하는 도구다. 한국어에 대응하는 마땅한 단어가 없으면 지식 체계가 어그러진다. 어떤 개념에 상응하는 정확한 용어는 학제 간에 통합과 발전의 기본적 토대다. 필자와 독자 사이도 마찬가지다.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되거나 모호한 지시 대상은 대상을 흐리게 하고 문해력을 떨어뜨리는 원인이 된다.

처음 번역되는 개념에 대한 충분한 논의와 합의 없이 번역가, 학자에 의해 최초로 도입된 용어는 그대로 정착되는 경우가 많다. 그 이후에 벌어지는 혼란과 갑론을박의 비용은 상상하기 어렵다. 특히 철학이 그렇다. 누구나 쉽게 원전을 읽고 자기만의 ‘철학하기’가 불가능에 가깝다. 2차 저작물에 의한 해설과 설명이 없으면 접근 자체가 쉽지 않아 철학은 ‘난해한 것’, ‘어려운 것’이라는 선입견을 만들었다. 물론 지식은 일차적으로 체계적인 개념의 구조물이다. 기초부터 차근차근 배우고 익히며 코끼리 다리를 더듬듯 한발 한발 나아가야 하지만, 일상에서 활용되는 의미와 다른 개념으로 사용된다면 철학은 아득히 멀고 흐릿한 성안에 갇히게 되지 않을까.

책 전체 분량은 많지 않다. 철학 용어 14개를 골라 신우승이 문제를 지적하고 새로운 용어를 제한하면 김은정과 이승택이 반론을 한 후 신우승이 다시 정리하는 방식으로 구성했다. ‘주장-반론-재반론’의 과정이 흥미롭고 각자의 생각이 보태져 논의가 확대된다. 그렇다고 해서 최종적으로 제안된 용어가 정답은 아니다. 이 책은 이런 논의의 촉매로서 충분하다. 이런 논쟁은 계속 이어져야 마땅하며 궁극적으로 한국어로 철학하기가 가능해져야 한다. 철학뿐 아니라 사회학, 심리학, 의학, 법학, 역사학 등 거의 모든 학문 분야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문제다. be동사가 없는 한국어에서 ‘존재’는 ‘이다’와 ‘있다’로 번역해도 충분할까. 객관적, 형이상학, 인식하다, 공리 등 일상생활에서도 자주 사용되는 용어를 꼼꼼히 들여다보는 일은 헝클어진 머릿속을 정리하는 기분이 든다.

철학이 생각을 정리하는 도구라면 그 도구인 언어부터 명확해야 한다. 논리적인 사고, 이성적 판단은 수많은 생각과 생각을 통해 한 인간의 삶을 결정한다. 사유의 도구인 언어는 발화된 순간 청자에게 이해와 오해를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행동으로 증명되고 결과로 나타나기 전까지 그 숱한 혼란은 모두 개념의 혼란과 사용하는 언어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

짧지만 강렬한 책은 ‘필수’적이며, 독자에서 충분히 만족감을 준다. 책의 역할과 의미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된 책이다. 신우승, 김은정, 이승택은 공교롭게도 학부에서 철학을 전공하지 않았다. 대학원과 박사과정에서 철학을 공부했으니 출발선에서 습관적으로 개념을 배우고 익힌 사람들이 아니다. 질문과 의심의 학문인 철학에서 당연히 이뤄져야 하는 논쟁이 이런 식으로라도 계속해서 이어졌으면 싶다. 함석헌 등 순우리말로 철학하기 운동을 벌인 선배들이 없지 않으나 오히려 낯선 순우리말이 철학에서 멀어지는 역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서양 철학에 대한 한국인의 의식과 개념이 어떻게 갈무리되는지는 오로지 번역에 따라 달라진다. 완전히 일치하지 않더라도 조금 더 정확하고 분명한 한국어가 통용됐으면 좋겠다. 게으른 독자의 소망은 누군가에 의해 조금씩 이뤄질지도 모르겠다. 어디선가 이렇게 고민하고 땀 흘리는 분들의 수고에 경의를 보낸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읽고 알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기만입니다. -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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