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와 21세기 - 3 - 완결편
김용옥(도올) 지음 / 통나무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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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고전을 읽는다고 해서 현실의 내가 달라지지는 않는다는 자괴감. 하루 이틀 노력해서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라는 낭패감. 어쩔 수 없이 현실에 발딛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과연 고전이 주는 지혜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善行無轍迹,                         잘 가는 자는 자취를 남기지 아니하고,
善言無瑕謫,                         잘 하는 말은 흠을 남기지 아니한다.
善數不用籌策,                     잘 헤아리는 자는 주산을 쓰지 아니하고,
善閉無關楗而不可開,         잘 닫는 자는 빗장을 쓰지 않는데도 열 수가 없다.
善結無繩約而不可解.         잘 맺는 자는 끈으로 매지 않는데도 풀 수가 없다.
- 27장

고수의 세계는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다는 공통점에 대해 공감할 것이다. 눈에 보이는 모든 동작과 입으로 하는 말과 사유의 흐름에 막힘이 없고 자연스럽다. 하수는 고달프다. 시간과 노력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더욱 힘들어진다. 부단한 극기의 과정과 대상에 대한 열정만이 그러한 경지를 만들어 줄 것이다. 그러나 완벽주의에 대한 고통은 상상을 초월한다. 예를 들어 잘 하는 말은 흠을 남기지 않는다고 했는데 흠을 남기지 않는다는 말은 논쟁적인 장면에서는 불가능하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은 모두에게 나쁜 사람이다.

樸散則爲器,                       통나무에 끌질을 하면 온갖 그릇이 생겨난다.
聖人用之, 則爲官長.         성인은 이러한 이치를 터득하여 세속적 다스림의 우두머리 노릇을 한다.
故大制不割.                       그러므로 위대한 다스림은 자름이 없는 것이다.
- 28장

그릇의 효용은 비어있는 공간에서 비롯된다. 깍고 다듬고 파내어 비어진 공간만큼 그 그릇의 가치는 인정받는다. 비워야 얻을 수 있는 지극히 자명한 이치 앞에 고개가 숙여진다. 온전한 모습 그대로 끊임없이 이기적 욕망을 드러내는 자화상을 보는 것같아 부끄럽다. 정현종 시인의 시 <잃어야 얻는다>를 읽다가 두고 두고 인용했던 기억이 새롭다. 양손에 떡을 쥐고 떡이 무겁다고 불평하지는 않았는지 모르겠다.

道常無名.                                       도는 늘 이름이 없다.
樸雖小, 天下莫能臣也.                 나무는 비록 작지만 하늘 아래 아무도 그를 신하로 삼을 수 없다.
侯王若能守之, 萬物將自賓.         제후 제왕이 이 통나무를 잘 지킨다면 만물이 스스로 질서지워질 것이다.
-32장


이름을 부르는 순간 모든 것들은 규정된다. 관계가 형성되는 것도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노자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는 통나무와 이름은 도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세상과 인생의 이치를 깨닫는 것은 과연 삶의 태도와 가치를 바꿀 수 있을까? 스스로 그러하다고 생각했으나 아직도 멀었다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 수가 없다. 고미숙의 선언대로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知人者智, 自知者明.                        타인을 아는 자를 지혜롭다 할지 모르지만, 자기를 아는 자야말로 밝은 것이다.
勝人者有力, 自勝者强.                    타인을 이기는 자를 힘세다 할지 모르지만, 자기를 이기는 자야말로 강한 것이다.
知足者富, 强行者有志.                    족함을 아는 자래야 부한 것이요, 행함을 관철하는 자래야 뜻이 있는 것이다.
不失其所者久, 死而不亡者壽.        바른 자리를 잃지 않는 자래야 오래 가는 것이요, 죽어도 없어지지 않는 자래야 수하다 할 것이다.
-33장

이 세상에 가장 두려운 존재는 자신이다. 가학적 삶의 태도를 말하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지나쳐도 좋지 않다. 과연 나를 자유롭고 행복하게 한다는 것의 한계는 무엇인가. 알 수 없다. 숭산 스님의 말처럼 ‘오직 모를 뿐!’

道常無爲, 而無不爲.                    도는 늘상 함이 없으면서도, 하지 아니함이 없다.
-37장

노자의 ‘道經’ 37장은 이렇게 끝이 난다. 38장부터 81장까지의 ‘㥁經’은 도경의 깊은 이해만으로도 충분히 그 경지를 이해할 수 있다는 도올의 말을 믿어야 할 것이다. ‘道’라는 것이 대체 뭐길에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어느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말하는가. 그 깊고 깊은 사유의 흐름을 꼼꼼히 따라가며 도올의 도움을 받았지만 암흑 속에 희미하게 떠오르는 불빛도 없다. 현실에서 찾아지지 않는 ‘길’에 대한 아쉬움과 스스로에 대한 미련스러움에 화가 나기 때문이다. 이성과 감성으로 해결되지 않는 삶의 이치와 ‘道’의 경지는 내 몫이 아닐 수도 있고 우리들 모두의 곁에 함께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렴풋한 느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반성적 성찰의 시간을 가졌다는 데 의미가 있다. 이렇게 어둠이 창 밖에 당도해 버리고 나면 반드시 빛이 있기 마련이다.


06111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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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1-13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등학교때 선(善)이 '착하다'도 되지만 '잘'이라는 말도 된다는 걸 배웠어요.친구들끼리 농담으로 공부를 잘해야 착한 어린이가 되는거라 이야기했던것이 생각납니다.

sceptic 2006-11-13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농담이 진담되는 현실이 좀 황당하기도 하죠...공부와 거리가 멀었던 어린 시절이라 쫌 많이 찔리네요...
 
노자와 21세기 - 2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1999년 12월
평점 :
절판


<노자와 21세기> 2권은 7장부터 24장까지의 내용이다. 인상 깊은 구절들을 적고 F9를 누르면서 한자로 변환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모든 사람이 그런지 알 수 없지만 한 권의 책을 읽으면서 수많은 독자들이 보이는 다양한 반응들은 그들의 삶의 형태나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만큼이나 많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天長地久,                              하늘은 너르고 땅은 오래간다.
天地所以能長且久者,               하늘과 땅이 너르고 또 오래갈 수 있는 것은,
以其不自生,                           자기를 고집하여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故能長生.                              그러므로 오래 살 수 있는 것이다.
- 7장


피 흘리며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는 유덕화의 모습과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아스팔트를 다리는 오천련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영화 <천장지구>는 깊은 인상을 남긴 청소년기의 영화다. 자기를 고집하지 않는 유일한 상태가 사랑의 빠진 인간의 감정이 아닐까? 비극적 사랑이 보여주는 안타까움에 관객들은 가슴을 졸였었다. 노자가 다시 태어나 이 영화를 보면 기겁할 일이겠지만 자기를 고집하지 않는다는 것은 시대와 상황을 불문하고 도달하기 힘든 경지다. 바람직한 상태나 상황과 현실은 늘 괴리가 있는 법이다. 그것이 학문의 세계이든 사랑이든.

上善若水.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
水善利萬物而不爭,              물은 만물을 잘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는다.
處衆人之所惡,                    뭇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처하기를 좋아한다.
故機於道.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
- 8장


노자 도덕경에서 자주 인용되는 가장 대표적인 구절 중의 하나지만 역시 기가 막히다. 다른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에 곳에 처하려는 노력은 인간에게 가식일 수 있다. 대상과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진정한 ‘道’의 실체는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처럼 그렇게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자연스러움을 인간이 닮고자하는 것은 쉽지만은 않다. 누구나 그럴 수 없다. 겉멋 든 표현이나 구호가 아니라 실천의 구절이 되었으면 좋겠다. 어떻게 하면 그런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단순 무식한 노력과 기본적인 심성에만 기댈 수는 없다.

五色令人目盲,                       갖가지 색깔은 사람의 눈을 멀게하고,
五音令人耳聾,                       갖가지 음은 사람의 귀를 멀게하고,
五味令人口爽.                       갖가지 맛은 사람의 입을 버리게 한다.
- 12장


색과 소리와 음식은 판단을 흐리게 한다. 때로는 인간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욕망들을 경계하는 이런 표현들이 거북하다. 에피큐러스 학파의 진정한 쾌락이 금욕주의로 흐르듯이 지속 가능한 영원한 쾌락을 위한 자기 극복은 필요하다. 하지만 범인들의 입장에서는 고문이다. 내 방식대로 현실의 모습 속에서 노자를 이해하고 풀이하는 나같은 수많은 독자들은 어쩌란 말인가. 맘에 새기고 뼈에 사무쳐도 실천할 수 없다면 무용지물이다. 외물에 미혹하지 않는 경지는 하루 이틀에 완성될 수 있는 내공이 아니다. 본질을 꿰뚫어볼 수 있는 감각을 키우는 것이 단지 훈련만으로 가능하다면 조금씩 흉내내고 싶다.

大道廢, 有仁義.               큰 도가 없어지니 인의가 있게 되었다.
慧智出, 有大僞.               큰 지혜가 생겨나니 큰 위선이 있게 되었다.
六親不和, 有孝慈.            육친이 불화하니 효도다 자애다 하는 것이 있게 되었다.
國家昏亂, 有忠臣.            국가가 혼란하니 충신이라는 것이 있게 되었다.
- 18장


인간을 억압하는 제도와 관계의 구속이 아니라 자유로움에 근거한 통쾌한 역설! 바로 이런 구절이 노자의 백미가 아닐까 싶다. 인의, 지혜, 효와 자애로움 그리고 충신을 뒤집어 바라보는 시원한 발상의 전환이 돋보인다.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우리에게 던져주는 18장의 의미는 색다르다. 가슴으로 읽는 구절이 다르겠지만 이 구절은 발상과 표현에 주목한다.

絶學無憂.                        배움을 끊어라! 근심이 없을지니.
- 19장


공부하기 싫은 놈들을 위한 최고의 변명이 될 수 있으니 주의요망! 그 깊은 뜻을 헤아려야 한다.

希言自然.                        말이 없는 것이야말로 스스로 그러한 것이다.
故飄風不終朝,                  그러므로 회오리 바람은 아침을 마칠 수 없고,
驟雨不終日.                     소나기는 하루를 마칠 수 없다.
孰爲此者? 天地!               누가 이렇게 만들고 있는가? 하늘과 땅이다!
- 22장


한 편의 시와 같이 아름다운 부분이다. 회오리 바람이든 소나기든 천지가 만든 것은 영원할 수 없으니 인간이야 말해 무엇하랴. 논란이 많은 해석에 대해 도올은 자신의 주장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어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나같은 문외한이야 어느 판본을 인용해서 비교하든 중요하지 않다. 미미한 해석상의 오류도 그렇다. 다만 지금, 여기 나의 문제를 비춰보는 거울의 역할을 할 따름이다. 어차피 모든 독서의 과정은 지독하게 이기적이다.


061108-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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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1-08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올이 TV에 나와 묘한 억양으로 강의했던 것이 생각납니다. 어려운 내용이지만 재미있었고 실생활과 상관없이 듣고 즐길 수 있었어요.
이 글 중간 중간에는 저와 의견이 다른 부분이 있지만 마지막 문장은 제가 책을 파고 들때마다 하는 생각입니다.

sceptic 2006-11-09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차피 모든 독서는 지극히 개인적인 과정을 거쳐 사회화의 과정을 거치기도 하니까요. 특이한 억양만큼 외모와 생각도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다만, 일반적이라는 통념에 대해서는 재고해봐야겠지만요.

비로그인 2006-11-10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올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는데요,학문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서만은 본받고 싶더군요.

sceptic 2006-11-12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연합니다. 세상과 학문에 대한 날선 목소리는 본받을만하죠.
 
노자와 21세기 - 1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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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시대가 변해도 그 가치가 변하지 않는 것이 고전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새삼 확인하게 하는 책들이 많다. 노자가 바로 그렇다. 김용옥의 <노자와 21세기>는 22세기든 23세기든 변하지 않는 세상과 삶에 대한 가치를 전해준다. 김용옥의 해설한 노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노자’가 전하는 인간 삶의 정수 때문이다. 고리타분한 고전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책장을 넘겨보자.

고전을 해석하는 방식은 풀이하는 사람의 개인적 성향이나 삶에 대한 가치관, 세상을 보는 눈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도올 김용옥은 노자를 풀이하기 전에 ‘동아시아 문명의 새로운 축’이라는 테마를 중심으로 풀어내고 있다. 도올은 책의 서두에서 21세기의 3대 과제를 ‘인간과 자연환경, 종교와 종교, 지식과 삶’의 화해로 제시했다. 이렇게 거시적인 안목에서 세계사의 흐름을 전망하는 태도는 ‘노자’를 풀이하고 이해하는 기준이 된다. 수백년, 수천년 전의 사상을 오늘에 되새기는 이유를 분명하게 밝히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텔레비전의 폐해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을 만큼 부정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러나 텔레비전을 영향과 효용을 전면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다. 김용옥은 변명처럼 EBS를 통해 ‘노자’를 강의하게된 배경을 길게 설명하고 있다. 단순히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 수만은 없겠지만 김용옥의 텔레비전을 통한 강의는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고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지식의 대중화는 가능한가라는 물음에 대한 방법으로 선택된 텔레비전이라는 매체가 과연 그 기능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어쨌든 가장 파급력 높은 매체를 통한 김용옥의 강의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노자와 21세기 1>에서는 ‘노자도덕경’이라는 책에 대한 해설이 길게 붙어 있다. 1973년에 발견된 백서帛書와 1993년에 출토된 죽간竹簡의 연구 성과까지 아우르고 있다는 점에서 ‘노자’에 관한 한 가장 최근의 정확한 해설을 곁들였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어 보인다. 오랜 시절을 거치면서 가감된 부분들에 대한 설명은 노자의 근본 정신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는 기회가 되었다. 구절 풀이에 대한 이견과 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부분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이 있을 수 있지만 여러 가지 논의 자체가 일반인들에게 심각하게 다가오지 않는 것은 물론이다. 다만 ‘노자’가 전해주는 의미들에 대해 고민하고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여전히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도올 특유의 어법이 그대로 느껴지는 이 책은 쉽고 즐거운 마음으로 ‘노자’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1권에서는 우선 6장까지를 해설하고 있다.

道可道, 非常道;         도를 도라고 말하면 그것은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
名可名, 非常名.         이름을 이름지우면 그것은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
無名, 天地之始;         이름이 없는 것을 천지의 처음이라 하고,
有名, 萬物之母.         이름이 있는 것을 만물의 어미라 한다.


노자의 핵심 사상인 ‘도道’를 제 1 장에서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의 일상적 사유를 뒤집는 역설이다. 도를 도라 하면 도가 아니라고 하면 우리는 그것을 뭐라 불러야 하나? 아니 부르지 말고 규정짓지 말고 한정하지 말라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일상과 유리된 모든 가치는 의미없다고 할 수는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도道’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고 싶다면 이 책에 한발 다가서게 된다. 워낙 긴 시간동안 많은 사람에게 소개됐고 알려진 책이지만 진지하게 다시 한번 돌아보는 시간은 즐겁기만 하다.

天地不仁,                       천지는 인자하지 않다.
以萬物爲芻狗;                 만물을 풀강아지처럼 다룰 뿐이다.
聖人不仁,                       성인은 인자하지 않다.
以百姓爲芻狗.                 백성을 풀강아지처럼 다룰 뿐이다.
天地之間, 其猶橐蘥乎!      하늘과 땅 사이는 꼭 풀무와도 같다.
虛而不屈, 動而愈出.         속은 텅 비었는데 찌부러지지 아니하고 움직일수록 더욱 더 내뿜는다.
多言數窮, 不如守中.         말이 많으면 자주 궁해지네. 그 속에 지키느니만 같지 못하네.


제 5 장의 내용이 맘에 와 닿아 옮겨 적어본다. 천지는 인자하지 않고, 성인도 인자하지 않다는 말에 공감하는 이유는 뭘까 생각해 본다. 인간의 자연에 대한 짝사랑은 부질없다. 세상 만물이 있는 그대로의 성질을 드러낼 뿐 자연은 결코 인간을 배려하지 않는다. 성인도 마찬가지다. 시혜적인 입장과 시선으로 동등하지 않은 관점으로 백성을 바라보는 성인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인상적인 부분들은 특별한 해설이 없어도, 아니 해설이 오히려 방해가 되기도 하지만 있는 그대로 사유의 단초를 공한다. 노자와의 즐거운 대화가 계속 될 수 있도록 천천히 음미해야겠다.


061104-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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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wup 2006-11-04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용옥 씨를 보고 있으면, '도는 도고, 삶은 삶이다'라는 생각도 들어요.(헤헤)

sceptic 2006-11-04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올이 도인은 아니죠...^^
 
소피의 세계 (합본)
요슈타인 가아더 지음, 장영은 옮김 / 현암사 / 199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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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사춘기 시절 가장 지독한 고민과 그리움이 있었을까? 문예반 활동을 하던 무렵 학교 축제에 그녀가 찾아왔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동아리에 가입하고 이 맘때 여학교와 시 합평회를 한 차례 가졌었다. 그해 여름 심상사에서 주최한 청소년 문학캠프에서 그녀를 두 번째 만났었다. 시화전에 출품한 판넬위에 노란 들국화가 붙어 있었다. 9월이었다. 열일곱 소년의 가슴에 봄이 왔다. 대학 3학년때 그녀는 시집을 갔다. 사춘기하면 떠오르는 얼굴이다.

  누구나 그러했듯이 아마 그 무렵부터 ‘나는 누구인가’를 생각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 ‘세상은 어떤 곳일까’…… 그 시절 책방에서 뒤적이던 ‘쇼펜하우어 인생론’이나 ‘니체 인생론’은 아직도 책꽂이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 쓰고 힘겨웠던(?) 사춘기를 가끔씩 떠올려준다. 그때 이 책 ‘소피의 세계’를 만났더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을 하며 내내 책을 읽었다.

  생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과 막막함을 경험해 본 사람은 허무주의자가 되거나 실존주의자가 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고민과 두려움을 떨쳐버리기 위해 우리는 철저한 감각적 현실적 존재로 생을 맞이하게 된다. 보편적 삶의 모습이고 그것이 옳다 그르다 판단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요슈타인 가아더는 교사답다. 가르쳐 본 사람은 안다. 아는 것과 가르치는 것의 분명한 차이를. 깊이 고민해보지 않았거나 관심이 없을 수 있는 철학의 문제들을 쉽고 재미있게 설명하기 위한 그의 고민과 노력이 감동적이다. 마치 공부하기 싫어하는 학생들에게 동기를 유발하고 공부에 재미를 붙일 수 있게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려주려는 것처럼 말이다. 현학적 취미나 지식의 허영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현존재의 모습을 이런 방식으로 보여주는 책은 없었다. 인문학의 기본 소양을 文․史․哲이라고 하지만 두 장르가 결합되는 경우는 대개 문학과 역사다. 철학과 문학의 만남은 작가의 사상에 반영된 주제의식의 발현이거나 작품 내적 구조의 치밀한 구성일때가 많다. 이렇게 직접 철학을 이야기하기 위해 소설의 형식을 빌린 경우는 없을 것이다. 그 시도가 가상한 것이 아니라 너무나 훌륭하게 성공하고 있다. 소설속에 두 주인공 소피와 힐데의 역할 인식은 다름아닌 소설을 읽고 있는 우리들의 삶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존재의 심연으로 내려가 나를 바라보는 행위와 그 의미 찾기는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삶의 숙제 같은 것이기도 하다.

  고3 3월 모의고사에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관한 지문이 출제되었다. 학생들의 반응은 대단했다. 그에 따른 문제들은 오답율이 50%를 넘었고 깊은 좌절과 한숨의 공감이 넓게 퍼져 나갔다. 윤리 시간을 통해 암기한 단편적 철학 지식이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물론 이 책을 읽은 학생이 있었다면 정답을 맞췄을 거라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청소년기에 읽고 고민해야할 문제들과 경험해야할 것들에 대한 아쉬움이다.

  중앙 공원의 분수가 하늘 높이 솟아 오르고 있다. 하늘은 흐리고 일요일의 오후는 한가로울 것이다. 나는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는가, 세상은 무엇으로부터 생겨 났을까? 수수께끼같은 질문들은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대하는 태도를 진지하게 혹은 즐겁게 해 줄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2005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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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21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갑니다~ thanks to~

sceptic 2007-11-22 09:5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님도 즐겁게 읽으시기 바랍니다.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수련 옮김 / 인간사랑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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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내가 살고 있는 21세기를 한 세대, 아니 22세기의 후세들이 어떻게 정리하게 될지 궁금하기도 하고 흥미롭기도하다. 물론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게임과 같이 우리가 만들어 가야할 미래는 아득하고 막막하기만 하다. 전지구적 환경의 변화는 경제, 정치, 군사, 환경, 특히 문화적 징후들은 우리가 예측할 수 없을만큼 급박한 변화와 조정을 거치고 있는 상태다.

  수 백년 간 지속된 인류의 사상적 변모는 사회변동과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간다. 사회정치적 배경과 인간의 사유방식은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 세상을 인식하고 우리를 돌아보는 철학방식은 중심개념과 논의의 초점이 하나로 일치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특히 근대 이후 ‘다양성’이라는 가장 두드러진 특성을 보여주는 일련의 현상들은 계급의 붕괴와 시민사회의 발달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각종 예술과 문화의 주체로서 당당하게 참여하게 된 ‘민중’들의 힘이 발휘되기 시작한 것은 불과 100여년 전의 일일 뿐이다. 그래도 그 변화의 속도를 정신을 차릴 수 없을만큼 급진적이며 변화양상 또한 파격적이다. 그 숱한 변화와 다양한 문화 현상 속에서 현대인의 사유 특징을 나름의 방식대로 읽어낸다는 것은 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슬라예보 지젝의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이라는 책은 1989년에 출판된 그의 초기작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지젝 철학의 근간을 이루는 고민과 사유 방식들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의 사상적 배경과 문화 해석의 논리들이 어디서 출발하고 있으며 어떤 방식으로 드러나는지 선명하게 보여주는 그의 대표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제 1부 증상에서는 마르크스가 어떻게 증상을 고안해냈는지를 살펴보고, 그의 증상에서 증환으로 나아가는 방식을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는 프로이트와 알튀세르, 카프카의 작품이 동원되며, 헤겔식 농담과 영화 ‘타이타닉’을 동원하여 이해를 돕는다. 물론 문화 현상들이 지젝의 이론을 대변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론과 언어 형식에 매몰될 수 있는 개념들을 이해하기 위한 방식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제 2부 타자 속의 결여에서는 ‘케 보이’와 ‘당신은 두 번 죽는다’는 제목으로 이데올로기의 정체성과 왜상, 동일시, 욕망의 그래프를 통해 본격적으로 지젝의 사상을 배경이 되는 라캉의 이론들을 꼼꼼히 분석하고 있다. 통상적으로 ‘포스트 구조주의자’라는 총체적 분류방식을 거부한 지젝은 라캉의 누빔점과 타자의 개념의 오독을 지적하고 있다.

  마지막 제 3부 주체에서는 실재의 주체 개념을 확인하고 ‘메타언어는 없다’는 후기 구조주의자들의 유명한 명제를 분석하며 지젝 나름의 주체와 실재 사이의 개념을 확립하고 있다. 그것은 라캉이 말한대로 상징계와 상상계의 모호한 구분과 구별되는 실재계에서 존재하는 주체의 역할과 개념을 확인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읽은 지젝은 뼈와 살에 달라붙지 않았다. 이물감을 느낄만큼 거부감이 들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내 안에 소화되어 내재화 되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것은 개념과 언어때문이었다. 철학의 대상자체가 ‘언어’로 귀착되기 시작하고 모든 사유 방식의 근원이 되는 ‘언어’에 대한 분석과 해석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20세기 언어 분석철학부터 시작된 이 기나긴 여행은 언제쯤 또다른 변화와 도전을 겪게 될지 알 수 없다. 지난 세기 가장 명민한 철학자로 일컬어지는 비트겐슈타인의 관한 <비트겐슈타인은 왜?>라는 책을 보았을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지젝의 사상적 배경과 변모과정을 설명한 <누가 슬라예보 지젝을 미워하는가>를 통해 대강의 모습을 그리고 시작한 책읽기였지만 선명한 개념과 인식 방법을 체득하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마르크스든, 헤겔이든, 라캉이든 그들의 개념을 재해석하고 있는 지젝이든 인류의 사상적 진보는 계속될 것이며 그들이 하고 싶은 말을 귀기울여 들어보고 21세기에 그려나갈 우리의 모습이나 지나온 20세기를 정리해서 현재를 살아가는 ‘누빔점’을 삼을 수 있다면 충분히 의미있는 일이지만 내게는 좀 더 정밀한 책읽기와 사유가 필요한 듯 싶다.


2005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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