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용론 한길그레이트북스 144
볼테르 지음, 송기형.임미경 옮김 / 한길사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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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이후 벌어졌던 참혹한 살육과 잔인한 복수는 ‘아우슈비츠’로 상징되는 제노사이드의 기원이 아닐까 싶습니다. 가톨릭과 개신교 그리고 유대교는 모두 하느님을 섬깁니다. 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자식들 간의 처절한 증오와 절멸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인간의 행동이라고 믿을 수 없는 끔찍한 일들이 수없이 벌어졌습니다. 야만의 시대를 지나 이성의 빛이 스며듭니다. 볼테르는 ‘이제 그만!’이라고 외칩니다. “고마 해라, 마이 묵읏다 아이가.” 영화 <친구>의 대사가 생각났습니다. 철저한 가톨릭 신자인 볼테르는 개신교를 이해할 수도 수용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싶었던 거죠. 그러나 생각이 조금 다르다고 해서, 하느님을 믿는 방법이나 성경 해석 몇 줄 때문에 폭력과 살인을 계속할 수는 없지 않느냐는 이성적 호소이자 애타는 절규입니다. “진짜 그만들 하라고!!!”

물론 볼테르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는 사람이 얼마나 있었을까요. 한 사람의 목소리가 세상을 울리고 한 사람의 행동이 변화를 일으키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타인의 공감과 변화를 이끌어내는 건 설악산 흔들바위를 옮기는 일보다 어렵습니다. 지지하는 정당을 바꾸고 응원하던 프로야구 팀을 바꾸는 일보다 훨씬 힘듭니다. 그러니 그만 싸우고 이제 나만큼 너도 중요하다는 사실만큼만 인정하자. 이해할 수 없어도 서로 죽이지는 말자. 맘에 들지 않는다고 칼로 찔러서야 되겠느냐.

나는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그 의견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면 나는 당신의 말할 자유를 위해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 볼테르

우리가 자주 인용하는 볼테르의 이 말 한마디가 똘레랑스tolérance의 본질이 아닌가 싶습니다. 민주주의의 기본질서는 획일과 강요가 아니라 다양성에 대한 존중입니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토론과 타협의 길을 찾아야 합니다. 1534년 마르틴 루터가 독일어로 신약을 번역 출간합니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인쇄술은 불의 발견, 직립보행, 농경으로 인한 정착생활 이후 가장 강력한 혁명적 변화였습니다. 지식의 독점 시대가 종말을 고했습니다. 라틴어로 된 성경을 읽고 하느님의 말씀을 해석해주던 성직자들의 충격보다 다이렉트로 하느님의 음성을 듣게 된 사람들의 감동이 훨씬 컸습니다. 그러니 이제 누구나 자기 생각과 믿음을 갖는 시대가 열립니다. 종교적 도그마는 종파와 무관하게 한 개인을 넘어 집단적 무의식으로 자리잡습니다. 신들린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이성으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볼테르는 지난 역사를 돌아보며 피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칼라스 사건이 기폭제가 되어 써내려간 이야기는 한숨과 울분이 뒤섞여 있고 이성과 감정이 엉켜 있습니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종교를 떠나 현재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의 현실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입니다. 모임에 참석하신 분들이 들려주신 이야기들이 각자의 상황과 위치에서 어떻게 타인과 세상이 작동하고 있는지 간접적으로 설명해 줬습니다. 특히 자본주의 시스템을 무너뜨리는 경제사범이나 유아 성범죄에 대한 불관용, 편견과 불안은 인정욕구에 대한 부작용이라는 지적,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생존 수단으로서의 의도적 냉소와 본능적 구별짓기 등에 대한 이야기가 가슴 한켠을 두드렸습니다.

관용은 남의 잘못 따위를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한다는 뜻입니다. 똘레랑스와는 맞지 않는 번역어입니다. 개념 자체가 다르니 새로운 한국어 단어를 만들거나 번역어를 그대로 사용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컨실리언스consilience라는 개념을 ‘통섭’으로 설명한 최재천과 이후의 논쟁들이 대표적입니다. 잘못 사용되면 ‘용서’ 혹은 ‘너그러운 태도’ 쯤으로 해석될 수 있으나 똘레랑스는 상대방을 향한 존중입니다. 타인의 생각과 태도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내가 존중받는 건 불가능합니다. 전제조건은 아니겠으나, 개무시 당하지 않으려면 어느 누구도 어떤 이유로도 무시하지 않아야 합니다. 성별, 종교, 인종, 나이, 직업, 학력, 장애, 성적지향, 출신지역에 따라 ‘차별’하는 마음과 태도가 내안에 숨어 있다면 드러나지 않도록 조심하고 티나지 않게 숨겨야 하는게 세상을 살아가는 최소한의 예의입니다. 그것이 인간에 대한 기본 도리이며 스스로를 지키는 방법입니다.

사회심리학자 고든 올포트는 “관용의 한 중요한 요인은 우리가 그리 잘 알지 못하는 어떤 능력이다. 이 능력은 때때로 공감empathy이라고 불리는데, ‘다른 사람을 파악하는 능력’, ‘사회적 지능’, ‘사회적 감수성’이라고 할 수도 있고, 풍부한 의미가 담긴 독일어 단어를 비리자면 ‘인간 이해Menschenkenntnis’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공감하지 못하면 차별과 편견이 생기고 똘레랑스와도 멀어집니다. 말하자면 사회적 감수성은 인간의 본능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한 인간의 능력에 해당하므로 부단히 노력하고 꾸준히 학습해야 하는 태도일 것입니다.

키케로는 “Cui bono(누가 이득을 보는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누구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지 살피라는 말입니다. 이해관계에 따른 관용과 불관용이 결정된다면 이기적 욕심과 똘레랑스를 착각하는 일일 겁니다. 모임에 참석하신 분의 지적대로 똘레랑스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박해’하지 않는 정도의 합의도 이뤄지기 어려운 실정입니다. 일상생활은 물론 정치,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불관용의 정신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사람들이 인식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유튜브 알고리즘에 길들여져 점점 좁고 깊은 자기만의 프레임 속에 갇혀 살게 됩니다.

19세기 말에도 볼테르처럼 용감하게 ‘나는 고발한다’라고 외친 에밀졸라는 드레퓌스 사건을 다시 한번 세계사의 중심으로 끌여들입니다. 프랑스의 지적 전통과 지식인들의 단호한 목소리가 부러울 따름입니다. 홍세화의 『나는 파리의 텍시 운전사』(1995)가 출간된지 30년이 다 되어 갑니다. 당시 똘레랑스에 대한 관심만큼 우리의 생각, 말과 행동은 조금 나아졌을까요. 우리 사회는 나와 다른 타인의 생각과 태도를 ‘인정’하고 대화하며 타협하는 문화를 갖게 됐을까요. 기득권의 카르텔에 침묵하며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눈감고, 주변 사람들과 내 일상에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다면 우리가 사는 내일은 또 어떤 모습일까요. 일요일 밤 늦은 시간까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이런저런 생각에 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오늘 아침 모두들 각자의 삶 속으로 또 치열하게 달리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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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하는 인간 - 확증편향의 시대, 인간에 대한 새롭고 오래된 대답
박규철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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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건한 믿음과 단단한 신념의 반대편에 끊임없는 질문과 합리적 의심이 앉아있다. 시소게임을 하듯 시대정신과 맥락에 따라 어느 한쪽으로 무게 중심이 기운다. 이는 단순히 근대 이후 과학의 발달에 따른 자연스런 결과라고 오해하기 쉽다. 중세 신분질서의 붕괴와 이성의 빛을 따라 걷는 개인의 탄생이 인류 문명의 변곡점이라는 사실은 틀림없다. 하지만 그 이전에도 몇몇 사람은 호모 두비탄스homo dubitans, 즉 의심하는 인간으로 살았다.

우리가 다른 동물과 달리 자연을 극복, 지배하게 된 계기는 호기심과 상상력 덕분이다. ‘why not?’이 주는 창조적 혁신이 문명 발달의 초석이 됐다. 여전히 사는 대로 생각하는 사람들 건너편에는 생각한 대로 사는 소수가 앉아 있다. 누가 맞고 틀렸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과 태도의 문제다. 어떻게 살 것인지에 고민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다만 그 고민의 이유와 방법,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은 조금씩 다르다. 근대 이전에는 대부분 사람들이 이런 고민을 할 이유가 없었다. 태어나는 순간 직업이 결정됐고 삶의 길은 정해져 있으니 오히려 불안과 고독이 아닌 안정과 행복을 누렸을지 누가 알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철학자들은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의심을 멈추지 않고 깊이 생각하며 프레임을 리프레임하기 위해 노력했다. 알은 하나의 세계다. 그 알을 깨고 나오는 고통의 쾌락을 모든 사람이 원하는 건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종교와 과학의 대립과 갈등은 서로 영역 다툼을 멈춘지 오래지만 접경지역에선 여전히 날선 논쟁이 그치지 않는다. 확고한 진리를 찾아 헤맨 인간의 갈급한 욕망도 여전히 계속되지만 아무도 그것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 없다는 사실만 확인하는 중이다. 니체는 그조차도 ‘사실fact은 없다. 다만, 해석이 있을 뿐.’이라며 인정하지 않는다. 평생 공부하고 생각한 결론이 겨우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 하나만은 알고 있다고 한 소크라테스의 ‘무지無知의 지知’는 여전히 유효할까.

박규철은 확증편향의 시대에 필요한 인간형으로 『의심하는 인간』을 제시한다. 이 책은 마치 거대한 ‘의심의 계보학’처럼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으로 시작된 아카데미 학파의 회의주의와 피론학파 그리고 중세의 아쿠스티누스와 근대의 몽테뉴에 이르는 의심 철학을 역사를 샅샅히 뒤적인다. 회의주의자들은 현실에 적응하기 어렵고 사람들에게 환영받기 힘들다. 어느 조직의 리더로도 적합하지 않다. 회의주의자의 건너편에는 독단주의자가 앉아 있다. 인간은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라 합리화하는 존재다. 상황에 따라 회의주의와 독단주의를 오가며 제 잇속만 챙기는 이기주의자는 이 책에서 다루지 않는다.

논의의 중심은 아카데미 학파와 피론 학파의 회의주의다. 아카데미 학파의 아르케실라오스, 카르네아데스와 피론 학파의 아네시데모스,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의 논리 싸움은 흥미진진하다. 두 학파의 차이를 확인하기 위해 이 책을 읽을 이유는 없다. 일반 독자라면 21세기에 소환된 고대 회의주의가 근대적 인간에게 미친 영향과 21세기에 다시 소환된 이유를 고민하는 정도면 충분해 보인다. 몽테뉴 이후 데카르트와 스피노자 ‘회의주의적 방법론’, 존 로크의 라이프니츠의 계몽주의, 프리드리히 니체의 《안티 크리스트》에 영향을 미친 회의주의는 삐뚫어진 시선, 부정적 관점과 거리가 멀다. 아이러니하게도 회의주의자로서 피론이 가장 강조했던 개념은 ‘마음의 평안’이었다. 아타락시아ataraxia를 위해서는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의심하고 질문하는 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진실에 대한 탐구는 그 전까지 ‘진실’이라고 믿던

모든 것에 대한 의심으로부터 시작된다. - 프리드리히 니체, 3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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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생각이 내 생각이 되지 않으려면 - 내 삶의 주도권을 되찾는 필로소피 클래스
오타케 게이.스티브 코르베유 지음, 김윤경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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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과 번식을 위한 생리적 욕구는 본능이다. 자연 선택에 의한 적자생존 DNA는 인간의 1차적 욕망을 자극한다. 학습과 경험이 필요 없다. 하지만 본능적 욕구를 넘어선 고차원적 욕망은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보고 듣고 배우며 익히고 자연스럽게 내면화된 존경과 자아실현의 욕구는 후천적 의지에 따른다. 짜장면을 먹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짜장면을 먹고 싶다는 자유 의지나 욕망이 생길 리 없지 않은가.

변연계의 지배를 받는 감정, 즉 애정의 욕구는 생존과 번식에 필수적 요소다. 이성을 지배하는 전두엽의 발달은 우리가 ‘생각하는 존재’라는 신화를 창조했다. 근대 이후 종교와 맞선(?) 과학은 이성의 빛을 따라 걸었고 현재의 눈부신 문명을 이뤘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특징으로 손꼽는 ‘생각’은 어떤 과정을 거쳐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도구로 자리 잡을 수 있을까. 모든 사람은 생각하는 힘을 길러 온전한 자유인으로 거듭날 수 있으나 식욕, 성욕처럼 절대 사라지지 않는 본능과 달리 ‘이성’은 적극적 노력과 오랜 시간이 걸리는 힘겨운 자기와의 싸움이다. 그래서, 혹은 귀찮아서 스스로 생각하는 대신 남의 생각을 받아들인다.

오타케 게이와 스티브 코르베유는 남의 생각이 내 생각이 되지 않으려면 김수영의 말대로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철학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행동과 실천이 철학의 종착역이라는 선언이 아니라 누구나 철학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몸 철학을 전제로 한다. ‘옳음’이나 ‘대답’이 아니라 ‘프로세스’가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있는가?” 이 책은 어쩌면 이 질문에 대한 정교한 질문의 연속이며 앎과 삶을 연결하려는 노력이다.

대중적 철학서는 대개 철학사에 대한 이해, 철학자의 삶과 사상, 철학 개념에 대한 설명, 적용과 실천 등에 집중한다. 2차 저작물들의 특징은 쉽게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 철학과의 거리를 좁히는데 주된 목적을 둔다. 그러나 이 책은 철학 입문서가 아닌 철학 개념 정리와 실천적 워크북에 해당한다. 정리, 해체, 탐구, 발전, 재생, 창조 등 여섯 가지 철학 수업은 ‘보는 것은 세계와 관계를 맺고 세계를 바꿔나가는 일’이라는 수업 준비를 통해 가능하다. 주로 근, 현대 철학자들의 핵심 개념을 짧은 분량으로 정리하고 삶의 문제와 직결되는 부분을 짚어준다. 적극적인 참여와 적용 문제는 독자의 몫이다. 좋은 책은 손 놓고 입 벌린 독자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는 대신 스스로 생각하고 고민하라고 독려한다.

수업을 진행하듯 커리큘럼 소개라는 머리말에서 저자는 “철학을 ‘알아두어야 할 지식’으로 전달하는 일은 철학하는 것이 아니다. 철학을 하는 데는 반드시 신체가 필요하다. 철학한다는 것은 헛된 논의가 아니라 ‘행위’다.”라고 말한다. 지식이 육화되는 과정은 사람마다 다르다. 직접 경험을 통해서만 삶의 지혜를 깨닫는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 한계를 뛰어넘기 어렵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 ‘내가 직접 봤다니까~’, ‘분명히 본인한테 직접 들었기 때문에~’로 시작되는 신념에 가까운 확신은 의심을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 그 생각의 빈틈을 채우려는 지식과 정보에 대한 욕심보다 중요한 건 ‘관점’이다. 지식과 경험을 정리하고 해체하며 탐구하고 발전시켜 재생하고 창조하는 작업은 철학자의 고유 업무가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과 태도다.

비판적 관점을 상실한 정보 수용, 맹목적 신뢰와 지지, 변함없는 신념과 자기 확신이야말로 철학의 최대의 적이다. 아니, 동굴에 갇혀 그림자만 바라보면서도 충분히 행복하고 즐거운 삶이다. 아는 게 힘이 될 때보다 모르는 게 약이라고 믿고 싶은 심정은 낮은 자존감에 기인한다. 무엇이 바람직한 것인지, 누구를 위한 말과 행동인지, 본질적인 목적과 이유가 어디를 향하는지 ‘생각’하는 건 고통스럽고 적극적인 노력과 변화 의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현실은 때때로 우리를 슬프게 하지만 철학은 지속적으로 나를 의심하는 태도다. 온몸으로 내 삶을 밀고 나가는 힘의 원천은 1차적 본능을 넘어 인간다운 삶과 더 나은 미래를 위한 2차적 의지에서 나온다. ‘뭣이 중헌디?’ 이 질문에 정답은 없다. 그러나 최소한 옳고 그름이 아니라 다름과 차이에 대해서는 생각해야 한다.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나’를 위해서. 그것이 철학하는, 아니 생각하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작은 이익이자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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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구 평화론 - 하나의 철학적 기획, 개정판
임마누엘 칸트 지음, 이한구 옮김 / 서광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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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철학적 기획’이라는 부제가 붙은 임마누엘 칸트의 『영구 평화론』에 영구는 없다. 현실적으로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듯, 평화는 멀고 전쟁은 가깝다. 칸트가 말하는 인류의 영구 평화는 이상적 소망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갈등과 투쟁의 역사가 인류 문명을 이룩하는 데 토대가 되었다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앞에서 잠시 호흡을 멈춘다. 과연 법과 질서를 준수하는 세계 시민 사회의 평화는 가능할까.

홉스는 자연 상태를 전쟁의 상태로 보았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상태. 개인뿐만 아니라 국가도 마찬가지 논리가 성립한다. 국제법이 없는 자연 상태의 세계질서는 상상보다 동물적일 수 있다.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현실은 말할 것도 없고 역사가 이를 충분하고 남을 만큼 증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리적, 철학적 접근을 시도하며 갈등과 전쟁이 아닌 ‘평화’를 위한 칸트의 고민은 높이 살 만하다.

칸트가 말하는 공화정의 세 가지 원리는 법의 지배, 삼권분립, 대의 제도다. 이 조건이 갖춰진 국가가 국가 간 영구 평화를 위한 첫 번째 확정 조건이다. 그렇다면 공화정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국가와 공화정을 채택한 국가 간의 전쟁은 피할 수 없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또한 영구 평화를 위해 칸트는 국내법, 국제법 그리고 세계 시민법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그러나 영원한 평화의 가능성을 이론적으로 논증하려는 칸트의 노력은 현실 적용 문제에 설득력을 잃는다. 이론적 논문에 불과하다고 치부하기엔 현실이 참혹하고 영구 평화가 가능하다는 주장에 동의하기엔 지나치게 이상적이다. 역사는 인류가 야만 상태에서 국가로, 그리고 세계주의로 점차 진보해 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 과정은 치열한 투쟁과 야만의 시간을 거쳤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정치와 도덕의 관계에서 (1) 행하라. 그리고 변명하라. (2) 만일 당신이 그것을 했거든, 부정하라. (3) 분할하라. 그리고 지배하라. 이 세 가지 원칙은 정치가들이 사용하는 궤변들이다. 권력을 거머쥔 자들이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술책이다. 이런 일반적 처세술은 정치에서 도덕이 부재한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증명한다. 전혀 도덕적이지 않은 정치인에게 가장 숭고한 가치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 개인과 정파적 이익, 기득권 보호를 위한 노력이 뻔히 보여도 눈감고 표를 던지는 사람들에 대한 비난보다 우선 그러한 현실을 거부하는 태도와 고장 비판적 감시 기능에 대한 점검이 필요한 게 아닐까.

칸트의 영구 평화론은 ‘예비 조항’ 여섯 가지와 ‘확정 조항’ 세 가지를 제시한다. 예비 조항은 “~~를 해서는 안 된다”라는 형식이고, 확정 조항은 “~~를 하여야 한다”라는 형식이다. 금기와 당위는 하나의 거대한 꿈이다. 먼 훗날 제1차 세계대전 후 국제연맹, 제2차 세계대전 후 국제연합과 유럽연합의 결성으로 구현되는 칸트의 원대한 이상은 아직 미완성이지만 국제 평화와 안전 유지를 위한 철학적 기초를 정립했다는 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칸트가 주장하는 실천 철학의 형식적 원리는 “네 의지의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되게 할 수 있도록 행위 하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정치는 도덕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것이 영원한 세계 평화의 근본적 토대다. 또한 칸트는 “영원한 평화를 보증해 주는 것은 참으로 위대한 예술가인 자연”이라고 말한다. 이때의 자연은 현상으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이념으로서의 자연이다. 역자 이한구는 기계론적 자연이 아니라 반성적 판단력의 대상이 되는 유기적 전체로서의 자연이라고 분석한다. 이기적, 감정적 동물인 인간에게 기대가 너무 큰 칸트의 잘못은 아니다. 우리는 어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포기한 적이 없다. 전쟁과 평화도 마찬가지다. 영구 평화가 아니라 일시적 평화라도 좋다. 평화를 위한 노력 혹은 평화를 향한 발걸음이 중요하다. 변명하고 부정하고 지배하려는 자들의 말과 행동을 걸러내고 일상에서 평화를 위한 노력이 무엇인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국가 간의 평화는 국민들의 생각과 태도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개인보다 더 위험해 보이는 성찰 없는 정치인과 정부는 전쟁보다 위험하다. 일상을 무너뜨리고 꿈과 희망을 빼앗는 자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길고 긴 법 고전 산책이 끝났다. 마무리가 칸트의 영구 평화론이라는 건 아이러니하기도 하지만 어쩌면 놓칠 수 없는 희망 고문 같은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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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 정신
샤를 드 몽테스키외 지음, 이재형 옮김 / 문예출판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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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테스키외가 말하는 법은 모든 이법 이전에 존재하는 ‘자연의 법’으로서 새로 만들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원래 상태도 되돌려야 하는 것이다. 그 궁극적 토대는 루소처럼 ‘사회계약’이라는 인간 사이의 합의가 아니라 신의 지혜에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그 완벽한 종교적 실현은 기독교에 의해 가능하다. 정치적 자유는 오직 법 이후에 존재하며 오직 법에 의해 결정될 뿐이라는 주장은 프랑스 혁명 이전 중세적 가치관의 끝물에 놓인 금수저의 한계를 확인할 수 있다. 볼테르는 몽테스키외보다 다섯 살 연하고, 디드로와 루소는 23~24년 후에 태어났으니 완전히 다른 세대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 혁명의 사상적 단초를 제공했을 『사회계약론』과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을 비교할 수 없으나 사회를 보는 관점과 태도의 차이는 분명하며 법과 사회의 관계 설정도 전혀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갖는 의미는 법의 정신을 이해한다는 것은 이성과 실정법 사이의 간격을 이해한다는 주장이다. 개별적 존재로서 기능하는 다양한 개체들 사이의 합의된 질서와 규칙을 법의 정신이라 할 수 있다. 실정법에 대한 기본적인 정의와 태도와 달리 자연법과 만민법은 공화정(귀족정과 민주정을 포함한 개념으로 사용), 군주정, 전제정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고 적용될 수 있는데 몽테스키외는 이 책에서 그 정체들 사이의 차이와 적용의 문제를 꼼꼼하게 들여다본다.

로마는 처음에 혼합된 귀족정체였다가 혼합된 민주정체로 바뀌고 영국의 정체는 공화국의 성격을 상당히 지는 ‘혼합형 군주정체’다. 몽테스키외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분류 방법에 바탕을 두고 있으나 중도 군주제 형태를 띤 프랑스의 현실 정체와 유럽의 현실을 비교한다. 여러 나라를 여행하고 관찰하며 그 차이와 혼용을 통해 과거와 현재의 정치법과 종교법 그리고 정체에 따른 법의 의미를 분석한다. 전제정치(두려움)는 귀족적 전제정치와 국민적 전제정체로, 군주정체(명예)는 귀족정체와 민주정체로 나눌 수 있다. 공화정(덕성)은 이런 요소들이 뒤섞여 나타날 수도 있다. 몽테스키외는 미래를 예측하거나 더 나은 정체를 제안하는 대신 각 정체의 특징과 법의 역할을 설명하는데 치중한다. 물론 자유와 이성이 작동하는 범위와 한계, 그것이 제한받을 때의 위험성에 대한 경고도 잊지 않는다.

재미있는 주장 중 하나는 풍토이론이다. 유럽과 아시아 더운 지역과 추운 지역을 대비시켜 과학적 결정론이라기보다 운명론에 가까운 자의적 주장은 위험해 보인다. 물론 당대에 이와 유사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몽테스키외도 샤르댕의 《여행기》를 인용하며 자기 생각을 펼친다. 그러나 이는 결정론이라기 보다는 입법자들이 이러한 풍토에 맞서 효과적으로 법을 제정, 운용해야 한다는 주장에 가깝다. 법의 정신은 풍토에 대한 혹은 일반적으로 물질적 원인에 대한 도덕의 승리여야 한다는 의미에 가깝다.

입법권과 집행권 그리고 사법권의 분리 이론은 이 책의 핵심 사상이다. 권력은 절제되고 중단될 수 있어야 하며 당연히 조화를 이룰 때 가장 이상적으로 작동한다. 권력 분립은 현대 민주주의 정치 체제의 핵심 중 하나다. 1789년 인권선언문 16조, “인권이 확실하게 보장되지 않거나 권력이 분리되지 않는 모든 사회는 헌법을 갖고 있지 않다.”라는 선언은 대한민국의 짧은 정치사와 오늘의 현실을 성찰하게 한다. 국민의 대표인 입법기관을 존중하지 않는 집행권자 대통령, 집행자들에게 영향을 받아 사법농단을 일으킨 판사들, 독립성을 상실한 입법권자들의 행태를 우리는 매일 목도하고 있다. 보수와 진보 따질 것 없이 진영 논리에 매몰되거나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서만 날고기는 모습은 대한민국의 정체를 의심케 한다. 몽테스키외가 주장한 대로 삼권 분립의 균형과 견제가 이뤄진다면 적어도 지금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겠으나 비대한 대통령의 권한과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입법권과 사법권 또한 문제가 심각하다.

해설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몽테스키외를 사회학의 선구자로, 프랑스혁명의 선구자로, 자유주의의 선구자로 내세우는 것은 너무 성급한 해석이다.” 쓸데없이 덧붙여진 과장된 의미 부여와 지나치게 부풀려진 오독이 때때로 아전인수식 해석을 낳는다. 이는 아마도 몽테스키외가 전하고 싶은 생각과 주장이 방대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서문에서 “나는 이 책을 수도 없이 시작했고, 수도 없이 포기했다.”고 고백하며 “20년 동안 나는 내 책이 시작하고, 커지고, 앞으로 나가고, 끝나는 것을 보았다.”고 설명한다. 이 지난한 시간 동안 유럽을 여행하고 세상을 경험하며 생각이 바뀌고 사회를 보는 관점도 달라진다. 역사에 대한 평가는 물론 법이 갖는 역할과 의미도 일관성있게 유지될 수 없을 만큼 긴 세월이다. 전체 6부 31편으로 구성돼 있지만 내용은 1~13편(1~2부), 14~25편(3~5부), 26~31편(6부)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된다. 각각 구체적인 내용과 구성을 살피는 건 내 관심사가 아니나 다소 복잡하고 체계적이지 못한 면이 있으나 정치 체제에 따른 사회의 특징과 법의 의미를 살피려는 노력, 삼권 분립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논리적 주장, 당대 사회를 토대로 종교와 사회의 관계 그리고 법의 역할에 대한 깊은 고민과 그 결과는 이후 다양한 분야에서 여러 사람에게 영감을 주고 생각의 화두를 삼기에 충분해 보인다.

몽테스키외(1689~1755)는 16세인 1715년 백부의 고등법원 판사직을 세습한다. 배타적 특권 계층으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몽테스키외는 자신의 계급적 지위와 기독교적 윤리에 바탕을 둔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1748년 60세가 되어 펴낸 이 책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분류한 군주정, 귀족정, 민주정이 아니라 공화정, 군주정, 전제정이라는 세가지 정치체제를 중심으로 자신의 경험과 사유의 결과를 당대 현실에 맞춰 서술하고 있어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공화국은 ‘덕성이 필요하고, 군주국에는 ‘명예’가, 전제국에는 ‘두려움이’이 필수적인 조건이라는 주장이 인상적이다. 우리가 사는 21세기는 이제 민주주의가 인류의 대세로 자리잡았으나 그 정체와 무관하게 인간과 사회, 그 공동체 안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충돌은 오늘 우리가 가진 법의 정신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자연법, 만민법, 정치법, 종교법, 실정법 등 몽테스키외가 분류한 법들의 종류와 특징, 그 법들 사이의 논리적 모순과 현실 적용 문제를 적용하려는 데 이 책의 목적이 있는 건 아니다. 또한 법은 만들고 집행하고 판단하는 사람들의 것도 아니다. 시민들의 생각과 태도가 반영된 철학적 고민의 결과다. 정치 체제와 법의 정신은 바로 나, 우리가 만들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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