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가보겠습니다 - 내부 고발 검사, 10년의 기록과 다짐
임은정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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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은 한여름 김밥과 같다. 상하기 쉬운 음식처럼 부패는 권력의 본질적 속성이다. 감시와 견제 없이 건전한 긴장감을 유지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인간의 욕망과 이기심은 본능에 가깝고 제어 장치 없는 권한과 통제력을 개인의 선의에 도덕적 책임감에 의지하는 조직은 거대한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한다. 대한민국에서 유일무이한 영속적 합법적 권력 조직인 검찰은 정권의 부침, 경제 상황과 무관하게 상명하복, 검사동일체의 원칙이라는 전근대적이고 몰상식한 문화를 자랑처럼 외치면서도 무엇이 잘못이냐고 반문하는 조직이다. 


대체로 조직 문화가 병들고 수술이 불가능할 정도의 환부가 일상적 관행으로 여겨지는 집단에 속한 구성원은 내면 깊숙이 문제를 인식하지 못한다. 마치 조지오웰의 소설 『1984』에 등장하는 ‘101호’를 거친 사람들처럼 조직의 논리와 강점, 전통과 문화의 이로움에 대해 피를 토한다. 그렇게 내면화된 무소불위의 자기 무오류성은 언제나 ‘법과 원칙에 따라’를 붙여 선량한 시민을 간첩으로 조작해도 대통령을 보좌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오만함으로 무장한다. 선택적 정의와 지연된 정의로 단련된 법 기술자들이 사건 뭉개기와 집요한 표적 수사와 기소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거쳐 그들만의 리그와 권력의 사유화에도 그들에게 박수를 보내는 일부 국민들을 오히려 ‘개돼지’로 명명하며 자신들의 논리와 공정과 정의를 응원한다는 오만을 합리화한다. 박수부대로 동원되는 레거시 미디어와 언론인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민망한 부나방들의 합작품이 양산하는 현실은 참담하다. 거대한 무지와 맹목적 지지가 사회를 병들게 한 역사적 사례를 일일이 나열할 필요도 없다. 비판적 사고가 없는 인류의 악행을 다시 거론할 이유도 없다. 


이것은 진영논리가 아니다. 박근혜 정부든 문재인 정부든 한결같은 목소리를 내던 임은정 검사에게 붙여진 별칭들이 황당했을 것이다. 우리 편 아니면 적이라는 이분법적 논리가 현실을 지옥으로 만들기 십상이다. 내부 고발자 임은정의 목소리가 다른 조직, 다른 집단에서 없었던 건 아니다. 이해관계에 얽힌 그들은 조용히 수많은 임은정들을 묻었다. 나름의 논리와 나름의 정당성을 내세우며 비판적 목소리를 내는 입을 막고 목을 비틀었다. 행정기관, 공공기관, 군대, 학교, 기업 어느 곳 하나 그렇지 않은 곳이 있을까. 상호 이익을 나누고 묵묵히 눈빛을 교환하며 때로는 적극적으로 가담해서 그들을 엿 먹이지 않았는가. 


왜 나서서 불편하게 하나, 너만 그렇게 불만이 많은 거야, 그냥 가만히 있으면 안 되느냐, 누군 몰라서 그러지 않는 줄 아느냐, 나도 젊었을 땐 그러지 않았다, 너도 나이 들어 보면 안다, 지금은 니가 뭘 몰라서 그렇다, 전체 조직을 생각해…… 우리는 그들 곁에서 침묵하지 않았는가. 알고도 외면하지 않았는지. 당신들은, 아니 우리는 모두 공범이다. 

임은정 검사는 “정권은 유한하나 검찰은 영원하고, 끈끈한 선후배로 이어진 검찰은 밖으로 칼을 겨눌 뿐 내부의 곪은 부위를 도려낼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188쪽)라고 단언한다. 그리고 “문이 열릴 때까지, 벽이 부서질 때까지 저는 두드릴 것이고, 결국 검찰은 바뀔 것”(227쪽)이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 우리의 무지가 그들의 권력에 복무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비판과 견제 없는 권력을 ‘국민’에게 위임받을 수는 없다. 세금으로 월급 받는 자들의 오만함이 때때로 상상을 초월한다. 그들의 고용인이 누구인지 망각하는 걸까. 특히, 대한민국 건국 이래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자기 혁신 없이 병든 환부를 도려내지 못하고 그들만의 고리를 끊지 못하는 현실은 정치, 경제, 사회를 오염시키고 더 나은 세상이라는 꿈을 버리게 한다. 그래도 검사 임은정은 외친다. 계속 가보겠다고. 고장난 저울은 고쳐 쓰는 게 상식과 공정과 정의가 아닌가?


검찰의 저울이 고장 나 있다는 것을 기억해 주십시오. 저울을 고치라고 계속 외쳐주십시오. 검찰이 고치는 시늉이라도 하고 있으면, 더는 고장 나지 않을 테고, 편향적이고 불공정한 검찰권 행사를 다소나마 주저하지 않겠습니까? - 2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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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빈곤 사회 - 나는 질문한다, 고로 존재한다
강남순 지음 / 행성B(행성비)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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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질문한다, 고로 존재한다.” - 「프롤로그」 중에서


“악이란 비판적 사유의 부재”라는 아렌트의 새로운 정의가 여전히 유효한 시대다. 사유하는 주체로서 스스로 생각하라는 칸트의 계몽주의 모토가 필터 버블, 확증편향의 정보 홍수 시대에 더욱 필요한 이유를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스스로 질문하지 않으면 악인, 즉 나쁜 사람이 된다는 논리의 비약이 가능해진다.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민주주의를 시대를 사는 현대인에게 어떤 의미일까. 레거시 미디어에 기대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거나 주변 사람들의 말에 휩쓸려 사는 건 편안하지만 나와 타자 그리고 세계를 망치는 지름길이다.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의 명제 “지식은 권력이다knowledge is power”를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권력은 지식이다power is knowledge”로 뒤집는다. 이것은 라틴어 격언 “어느 것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라Nullius in verda”에 대한 도전이 아니었을까. 현재 우리가 목도하는 권력과 미디어, 정치와 종교의 협업 플레이는 사유하지 않는 사람들의 뇌 구조를 뒤튼다. 지식권력의 중심에 선 미디어와 냄새나는 신문과 기자들이 어디 한 둘인가. 알고리즘으로 유형화된 정보만 편협하게 흡수하는 정보 탐색은 균형을 잃고 삐뚫어진 우리들의 자화상을 보지 못하게 한다. 비판 정신이 결여된 미디어보다 심각한 건 필터링 없이 노출된 정보에 대한 맹목적 믿음과 태도다. ‘안다’는 착각에 빠지는 순간, 자신의 선택과 판단력을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사 빅포르스가 『진실의 조건』에서 밝힌 명제 중 하나는 ‘지식은 우리 모두가 협력해 만든 창작물’이라는 사실이다. 각자 다양한 방식으로 기여해온 인식적 노력이 누적된 결과물인 지식을 바탕으로 한 진실은 떼거지로 우기거나 군중심리에 올라타거나 우매한 다수의 밴드왜건 효과와 분명한 차이가 있다. 지식과 진실을 다수결로 결정할 수는 없지 않은가. 집단지성으로 포장된 다수의 횡포가 언제나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는 건 아니다. 


강남순의 『질문 빈곤 사회』가 보여주는 문제의식은 여전히, 아직도, 그대로인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 반성과 성찰은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짓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나의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하며 욕망을 채우는데 충실한 삶은 동물과 다를 바 없다. 강남순은 우리 사회가 질문이 빈곤한 이유를 질문한다.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드러난 현상에 대한 비판이며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이정표에 가깝다. 권력과 언론에 묻는다, 타자의 얼굴에 묻는다, 관행과 대안에 대해 묻는다, 존재와 혐오를 묻는다, 희망과 생명을 묻는다. 


전체 다섯 개의 주제로 묶었지만 개인을 둘러싼 타자와 세계에 대한 근원적 질문들이다. 우리는 언제부터 호기심과 질문을 땅에 묻었을까. 질문이 직업인 기자들조차 질문을 잃어버린 한국 사회는 여전히 선진국 신화에 들떠 있는 건 아닐까. 개인의 삶에서 질문은 성적, 취업, 재테크에 대한 노하우로 한정되기 쉽다. 그러나 대체로 근본적인 질문은 삶의 목표와 가치에 닿아 있다. 방향없이 흔들리면 모든 게 불안하다. 부족하고 먹을수록 배고프며 가질수록 가난해진다.


숱한 철학적 개념과 사회학 이론이 등장하는 책을 읽는다고 해서 자기 삶이 변한다면 얼마나 쉬울까. 든 사람은 빈 사람보다 굳기 쉽다. 끊임없이 의심하고 쉼 없이 흔들이며 앞으로 나아가려는 노력없이 인간은 귀한 존재로 거듭나기 어렵다. 성장을 멈추지 않는 일상, 생각하고 질문하는 태도가 우리를 좀 더 나은 인간으로 매일매일 다시 태어나게 할 뿐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고립isolation과 외로움loneliness을 창의적인 경험으로 전이할 수는 없는 것인가. 아렌트는 그것이 바로 고독solitude이라고 본다. 자신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면서, 외로움을 고독으로 전환하는 지속적인 시도를 하는 것이다. 외로움과 고독의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외로움은 세상이나 주변 사람들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소외되는 것이다. 반면 고독이란 ‘자기 자신과 함께 있음’의 상태이다. - 3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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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과 함께 사는 법 - 다양한 몸 사이의 경계를 허물기 위하여 땅콩문고
백정연 지음 / 유유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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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식할 때마다 짜장면이 먹고 싶다고들 해서 짜장면을 좋아하는 건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외식하며 먹어 본 음식이 짜장면밖에 없어서 항상 짜장면을 고른 거더라고요.” - 50쪽


어쩌다 한번 외식을 할 때 떠오르는 메뉴가 자기 경험의 한계다. 마치 언어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인간의 세계처럼 음식은 삶의 경험을 함의한다. 무엇을 먹었는지 말해보라, 네가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는 어느 요리사의 금언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주어진 환경, 양육과정, 현재 생활 정도에 따라 선호하는 음식이 달라진다. 우영와 김밥은 어머니와 고등와 또 다르다. 가수 김창완은 「어머니와 고등어」에서 한밤중에 목이 말라 냉장고를 열어보니 한 귀퉁이에 고등어가 소금에 절여져 있는 걸 발견하고 소금에 절여놓고 편안하게 주무시는 어머니의 나지막한 코 고는 소리를 듣는다. 자신의 경험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상상력의 한계가 자기 인식의 범위를 뛰어넘을 수는 없는 법. 


백정연은 장애인을 소외된 이웃이나 배려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척수장애인 남편과 결혼하기 전에도 발달 장애 관련 기관에서 일했으나 생활 속의 장애는 지극히 구체적이고 일상적이다. 거주지의 조건은 물론 욕실의 배치와 가구, 생필품의 위치까지 장애인과 함께 사는 법은 신경쓸 일이 한둘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정적 수사가 없고 건조하고 덤덤한 목소리로 일관한다. 이 책의 미덕은 바로 여기에 있다. 유아, 노인, 환자를 포함하면 버스를 타고 지하철로 환승하며 외출을 하는 일이 얼마나 대단한 행사인지 실감한다. 장애인 이동권에 관심을 기울인 적이 있나. 아니 적어도 그들을 비난하거나 내 불편을 호소하며 분노하지는 않았을까. 장애인과 함께 사는 법은 장애인 가족을 위한 매뉴얼이 아니라 비장애인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필독서다. 다양한 몸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 효율성과 자본의 논리에서 벗어나 다양성과 행복의 크기를 위해 장애인과 함께 사는 법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넷플릭스 전 세계 1위를 차지했다는 한국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화제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ASD)라는 용어도 낯설지만 아스퍼거 증후군에 해당하는 천재 변호사 우영우는 더 어색하다. 장애에 대한 관심을 촉발하고 이해의 폭을 넓힌 드라마의 순기능을 부정할 생각은 없으나 현실은 드라마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는 대략 5%, 250여만 명의 장애인이 살아간다. 비장애인 4,750만명에 비하면 극히 일부에 해당하기 때문일까. 여전히 우리는 장애인과 그들의 삶에 대해 무지하다. 


발달장애 관련 기관에서 일하다가 세상의 모든 정보를 쉽게 만들어 장애인들의 자립을 돕는 사회적 기업 ‘소소한 소통’을 설립한 백정연은 척수장애인과 결혼했다. 내 삶의 일부, 아니 장애인이 가족일 때 일상생활은 이전의 삶과 전혀 다르다. 저자는 결혼과 일상을 통해 장애인과 사는 법을 비로소 알게 된다. 동료로, 친구로 조금 더 알아야 할 일들이 일반 시민들의 책무라면 저자는 조금 더 세심하고 깊은 곳까지 헤아리며 장애인의 문제를 짚어내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다른 책과 달리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무관심을 질타하지도 않고 분노를 표출하지도 않는다. 일상에서 보고 듣고 느낀 동료, 친구, 남편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들려준다. 그 갈피마다 숨어 있는 비장애인들의 시선과 제도적 문제점은 우리 사회가 함께 고민해야 한다. 정책 변경, 시설 개선을 촉구하는 대신 ‘장애인과 함께 사는 법’이라는 제목의 이유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마지막 부분에 제시한 장애인과 경계를 허물고 함께 살아가기 위한 방법이 매우 현실적이다. “모든 집마다 장애인이 있으면 좋겠어.”라는 문장을 한참 들여다봤다. 이해와 공감은 경험에서 나온다. 남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라면 함부로 말하고 행동할 수 없다. 장애인 문제가 그렇다. 행복한 사회는 다수가 행복한 사회보다 소외된 소수가 행복한 사회에서 더 빨리 실현된다는 저자의 말은 울림이 크다. 공평하지 않은 사회에서 장애인 또는 장애인의 가족으로 산다는 것은 차별 또는 폭력을 감수하며 사는 것과 같다는 주장에 공감할 수밖에 없다. 


세상은 아는 만큼 보인다는 진부한 문장이 때로는 새로운 관점을 제공한다. 어린이, 노인에 대한 배려가 장애인에 대한 배려와 다를 바 없다. 건강한 성인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세상에서 장애인과 노약자는 소외될 수밖에 없다. 이제 우리는 그들과 함께 사는 법을 고민할 만큼 충분한 경제력 토대를 마련했고 성숙한 시민의식도 갖추고 있다고 믿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장애인과 함께 사는 법에 대해서도 좀 더 관심을 기울여 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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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호소의 말들 - 인권위 조사관이 만난 사건 너머의 이야기
최은숙 지음 / 창비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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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1호 터널을 빠져나온 버스가 정류장에 설 때마다 고개를 들어 건물 꼭대기에 적힌 ‘국가인권위원회’ 일곱 글자를 올려다본다. 2001년 김대중 대통령이 설립한 국가 기관이다. 감사원과 헌법재판소처럼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중립적 기관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기관의 수장에 따라 애초부터 가능하지 않은 중립을 지키지 못하고 정치적 편향성에 몸살을 앓기도 했지만 국가인권위원회는 다른 어떤 기관보다 국민들의 삶과 맞닿아 있다. 아니, 그 상징성만으로도 인권감수성을 높여온 공을 인정받아 마땅하다. 


20여 년간 인권위에서 조사관으로 일한 최은숙의 책 제목은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호소’라는 단 한마디가 그렇다. 이메일 주소를 결정할 때 의견이 모아졌다는 ‘호소’라는 말이 인권위의 성격을 말해주는 듯하다. 법치를 부르짖는 법기술자들, 선택적 정의를 구현해온 정치인들, 사람보다 이익과 효율을 앞세운 자본가들 앞에서 잃어버린 인권은 여전히 ‘호소’의 대상일까. 『불편해도 괜찮아』같은 책은 물론 인권영화프로젝트 등으로 꾸준히 국민들의 인권 감수성을 지켜온 인권위의 노력과 달리 이 책은 지극히 개인적인 소회를 담고 있다. 생활인으로서 느낀 소탈함, 조사관의 고충과 애로사항, 안타까운 사연과 진정인들의 아픔이 그대로 전해진다. 현실을 전하는 다양한 방식이 있다면 이 책은 쉽고 친근하게 다가서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것을 일반화하는데 성공하고 있어 공감과 설득력을 얻는다. 


국가의 이름으로 자행된 실수를 바로잡는 일은 왜 어려울까. 공무원들은 실수를 인정하는 데 인색하다. 국가는 국민을 위해 존재하나 때때로 자기 책무를 방기하고 권한을 남용하는 사람들에게 책임을 묻는 경우는 거의 없다. 직급이 높을수록, 권한이 많을수록. 그래서 최은숙은 “비극적인 사건은 본래 자신들이 해야 할 일들을 정확히 정반대로 한 경찰, 검사, 판사, 국선변호인이 만들어낸 불법과 무책임과 무능의 총체적 결과였다.”(73쪽)라고 말한다. 엉뚱한 사람이 누명을 쓰고, 공권력이 남용되며, 시민이 보호받지 못하는 상황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전체를 위해 개인의 피해는 감수해야 한다거나, 너 하나 때문에 모두 불편하다거나, 그걸 왜 갑자기 문제삼느냐고 말한 적은 없을까.


내로남불은 모든 인간의 습성이라는 사실 앞에 좌절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건 그걸 인정하고 끊임없이 성찰하고 바로잡으려는 노력이 아닐까. 인정할 수 있는 용기를 내는 건 나이, 학벌, 재산, 권력과 무관하다. 한 인간이 타인과 세상을 향한 태도의 문제다. 대개 그걸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정치를 하거나 진영논리의 첨병이 된다. 특정 직업의 확증편향으로 나타나거나 자신에게 손해가 되는 일은 눈곱만큼도 하지 않으려 든다. 이 책의 주인공들은 대개 문해력이 떨어지고 가진 게 없거나 몸과 마음이 불편한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공정과 정의는 너무 멀다. 


공감도 능력이다. 감수성도 공부가 필요하다. 이성적 분노와 논리적 증오도 노력이 필요하다. 저자의 이야기가 자칫 인권위 조사관이라는 흔치 않은 직업에 대한 호기심으로 소비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가 사는 현실이 조금 더 나아지고 있는지, 내가 선량한 차별주의자로 살아가는 건 아닌지, 세상이 조금씩 성숙한 사회로 발전하는지 살펴보는 바로미터의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 어떤 책은 독자에게 호소하는 대신 스스로 세상을 향해 빛을 낸다. 그 말들 사이사이에 놓은 너무 당연한 생각들이 더 많이 공유되었으면 정말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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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세대는 없다 - 불평등 시대의 세대와 정치 이야기
신진욱 지음 / 개마고원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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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리 사회의 불평등 현실을 ‘기득권 기성세대’와 ‘희생자 청년세대’ 간의 대립으로 해석하는 세대 불평등 담론과 비판적으로 대화하면서 각 세대의 계층격차 현실과 더불어 한국사회 불평등 구조의 세대 구성을 조명했다. - 10쪽

세대차generation gab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것은 개인과 집단에 따라 전혀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성급한 일반화는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을 뭉개고 정치적 수사로 활용되어 특정 집단, 정당에 대한 비난으로 활용된다. ‘청년세대’와 ‘기성세대’의 갈등을 부추기는 언론과 선거에 활용하는 정치인의 발언을 객관적으로 들여다 볼 수는 없을까. 사회학자 신진욱은 『그런 세대는 없다』고 단언한다. 지시어 ‘그런’은 대중문화, 교육환경, 시대 배경 등 통상적으로 느끼는 세대가 아니라 ‘청년 담론’이 본격 적으로 시작된 세대 간 갈등 양상을 의미한다. 신진욱은 1990년부터 2020년까지 30년간 국내 모든 중앙지와 경제지에서 ‘청년’이라는 단어가 등장한 모든 텍스트의 빈도 추이를 주간과 일간 단위로 분석했다. 2011년 8월, 2015년 8~9월, 2019년 9~10월이 지난 30년 동안 가장 의미있는 청년담론의 폭발기였음을 확인한 신진욱의 분석은 짐작되지 않는가.

불평등, 공정, 기득권, 일자리, 청년실업 등 우리에게 익숙한 세대 간 갈등 요인이 사실은 세대 내 담론에 대한 비판적 기능이 상실되었음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586으로 대표되는 50대를 조금 자세히 들여다면, “80년대에는 고교진학률부터가 지금보다 훨씬 낮았기 때문에, 전체 학령인구 중 대학 취학자의 비율은 대학진학률에 한참 못 미쳐서, 공식 교육통계에 따르면 1980년대에 학력인구 중에서 고등교육기관 취학률 평균은 20%였고, 4년제 대학 취학률은 13% 정도 된다.” 10명 중 8~9명은 대졸이 아니다. 지금보다 임금 격차가 극심했고 그들은 여전히 비정규직과 자영업자로 살아간다. 4년제 대학을 졸업한 소수의 50대가 청년세대의 일자리를 빼앗고 부동산소득을 독점했다는 착각은 2030세대의 정규직, 소득, 자산 규모에 대한 분석으로 자명하게 드러난다. 

결국 세대 간 갈등은 세대 내 불평등의 착시현상에 불과한 게 아닐까. 공정의 정의 그리고 불평등의 문제에 ‘세대’를 개입시킨 이유와 의도는 무엇일까. 객관적 지표가 가리키는 현실은 자본주의가 배태한 본질적 모순이며 해방 이후 근대화 산업화 과정에서 해결되지 않은 문제의 악순환에 불과한 게 아닐까. 87체제 이후 우리가 놓친 문제, 해결하지 못한 과제는 여전히 계급 배반 투표, 정치적 프로파간다 그리고 거시적인 사회구성체에 대한 의제 부족이다. 시대적 화두가 급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근대사를 돌아보면 대개 사회를 보는 관점과 비논리적 경제 발전의 방향에 대한 이견이 모든 문제를 촉발한다. 그걸 확대 재생산하며 정치와 언론, 기업의 논리가 춤을 추며 혹세무민한 결과는 양극화의 심화, 비정규직 확대, 고용없는 성장, 자영업의 증가로 이어져 청년실업과 노인빈곤으로 나타난다. 

당대의 사회현상을 한두 가지 문제로 압축하거나 몇 가지 정책으로 해결하겠다는 거짓말에 속는 국민들의 고통은 참담하지만 성찰없는 시민은 유사한 실수를 반복할 뿐이다. 신진욱은 기성세대가 곧 기득권이라는 착각이 한국사회의 불평등 구조를 가린다고 주장한다. 누가 왜 ‘청년’을 말하는지, 정치 담론에 세대 담론이 희석되는 순간 우리의 현실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매일매일 목도하고 있다. 정치는 현실이며 내 삶의 뿌리다. 정치에 대한 외면과 무관심은 곧 자기 삶에 대한 외면이다. 사회학자의 눈으로 바라본 세대 담론이 지워버린 현실과 눈감아버린 삶은 생각보다 처참하다. 

성찰 없는 진보, 대안 없는 보수의 정치 게임에 자기 등이 터져도 감정적 대응과 인터넷 댓글놀이에 몰입하는 우리의 미래는 어떨까. 2030과 4050 같은 세대 분리가 가져오는 문제를 들여다보는 신진욱은 “흐르지 않는 물길에 고인물은 오래 되어서 고인물이 아니라 처음부터 고인물이다.”라고 일갈한다. 10대에 이미 고인물이 될 수도 있고 70대에도 흐르는 물이 있다. 숱한 세대론 사이에서 2022년의 현실을 냉정하게 분석한 신진욱의 노고와 관점을 높이 평가할 수밖에 없다. 뜨거운 가슴과 차가운 머리를 정치적 이념,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고무줄처럼 늘어나는 이기적 잣대로 활용할 수는 없지 않은가. 

독일의 작가 페터 바이스는 그의 장편소설 『저항의 미학』에서 지배에 대한 저항은 연대를 통해 가능해지며, 연대는 타인에 대한 상상력을 토대로 한다고 썼다. 노년의 안도, 중년의 안도, 청년 안도가 서로의 삶과 역사를 상상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불평등으로 갈라진 시대를 함께 넘어설 세대 간 연대의 토대가 형성될 수 있을 것이다. - 3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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