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에 공감한다는 착각
이길보라 저자 / 창비 / 202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통은 함께 나눌 수 없다. 다만, 공감을 통해 추론할 수 있을 뿐이다. 수잔 손택은 『타인의 고통』에서 “우리는 보통 타인의 기쁨과 아픔을 공감할 수는 있다고 믿지만 그 말은 진실이 아니다. 타인의 고통을 내 방식대로 재해석하거나 유추해서 이해할 뿐, 그 사람이 느끼는 고통의 정도를 측정하거나 공유할 수는 없다. 비극은 여기에서 시작된다.”라고 냉정하게 말한 적이 있다. 아픈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 임종을 앞둔 부모 곁의 자식, 시한부 인생을 통고받은 연인은 바로 우리 자신이자 이웃이다. 그 고통은 본능적이고 감각적으로 전달되고, 때때로 육체적 고통을 동반한 슬픔으로 전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대신 아프거나 죽을 수는 없다. 모든 생의 감각은 오롯이 각자의 몫이다. 그래서 인간은 외롭고, 인생은 쓸쓸하다.

안산 동산고 재학 중 혼자 여행을 떠난 이길보라는 ‘로드 스쿨러’가 되어 돌아온다. 농인聾人(청각 장애인을 병리적으로 대하는 차별적 시선과 편견을 거부하고 수화언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음성언어를 중심으로 의사소통하는 사람을 청인이라 부른다.) 부모를 둔 공부잘하는 모범생, 일찍 철이 든 맏딸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성장 과정, 다큐멘터리에 대한 관심과 애정, 글을 쓰는 작가로서의 삶을 담담하게 풀어낸 글들이 읽는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흔들어 놓는다. 차별은 본능일까. 나와 다른 종에 대한 경계가 생존확률을 높인 적자생존의 DNA라는 진화생물학적 설명이 편견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허나, 머리로는 안 되는 줄 알면서 가슴이 시키는 대로 사는 게 일반적인 태도다. 문명사회를 이뤄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내세우며 민주국가에서 사는 개인에게 인권 감수성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다. 나의 권리만큼 너의 권리도 소중하다는 당연한 인식이 부족한 공동체는 적자생존의 원리가 작동하는 정글과 크게 다르지 않다. 부와 권력에 따라 의무가 다를 수 없고 헌법정신을 자의적으로 해석해서도 안 된다는 생각이 상식이다. 대통령부터 비정규직 알바생까지 개인의 권리와 의무, 시민의 책무는 동등하다. 그 말과 행동의 무게가 다르다고 해서 특권과 특혜가 주어지는 사회는 미래가 없다. 장애인과 노조에 가입한 사람들은 불가촉천민이 아니다. 가족이고 이웃이며 나 자신이다. 그들 모두가 국민이다. 이기적 행동과 불법 행위가 될 수는 없으나 문명국가에서 시민에게 주어진 기본적인 권리를 제한하거나 헌법에 위배되는 법률과 시행령으로 통제하려는 생각 자체가 대단히 위험하다. 피아 전환의 순간, 책임질 수 없는 말과 행동으로 분노와 박수가 교차하는 태도는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착각’에 불과하다.

이 책의 제목처럼 고통에 공감한다는 착각은 ‘선량한 차별주의자’의 다른 버전으로 읽힌다.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처럼 대통령이나 야당 대표의 편을 들며 핏대를 세우는 사람들의 생각은 과연 어디에서 출발한 것일까. ‘all or nothing’을 외치는 극한 대립과 갈등은 결국 나만 옳고 너는 틀렸다는 오만이다. 이길보라는 자신의 부모를 통해 세상을 배웠다. 아니 자신의 삶을 통해 타인의 생각과 태도를 읽는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공동체를 들여다본다. 감정이 앞서거나 논리가 부족한 생각이 허물이 될 수 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이 책은 농인 자녀로 태어나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30대 여성의 관점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모든 글은 한계가 있다. 그 한계의 다른 말은 글쓴이의 개성이자 고유하고 빛나는 글의 특징이다. 특수한 경험을 일반화시켜 타인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이길보라의 글에는 울림이 있다. 비록 그 생각과 감정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글을 쓰는 태도와 방법은 눈여겨볼 만하다.

또 하나 우리가 살펴야 하는 지점은 이길보라의 끊임없는 도전과 용기다.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노력, 자기 성장을 위해 보다 넓은 안목을 키우려는 태도가 우리를 한뼘 성장시킨다. ‘why not?’ 질문하지 않고 의심이 없는 생활처럼 무기력한 삶은 없다. 고인물은 썩는다. 자기 생각과 감정의 한계를 살피고 이것이 진짜 ‘공감’인지 ‘착각’인지 다시 한번 돌아보는 과정 자체가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가져야 할 태도가 아닐까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베카리아의 범죄와 형벌 - 법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이다의 이유 7
체사레 베카리아 지음, 김용준 옮김, 볼테르 해설 / 이다북스 / 2022년 4월
평점 :
품절


738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26세 때인 1764년 『범죄와 형벌』을 세상에 내놓는다. 이 책은 억측과 예단, 종교적 편견으로 뒤덮인 야만적인 행형제도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기념비적 저서로 남아 있다. 한마디로 전근대적인 범죄와 형벌에 대한 전근대적 시스템 자체를 뒤흔들고 사회계약설에 의한 국가형벌권, 죄형법정주의를 확립했다. 자연스럽게 고문과 사형과 같은 잔혹한 형벌 제도를 비판했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중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체사레 베카리아는 한 사람의 용기와 첫걸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듯하다.

자유와 행복을 추구하는 개인의 중요성에 눈을 뜨기 시작한 유럽은 계몽주의, 즉 이성의 찬란한 빛을 찾아 먼 여행을 떠나기 시작했다. 법은 사회적 합의를 지속하는 조건이며, 형벌은 범죄를 억제하고 예방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는 생각은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설』(1762)의 이론을 전폭적으로 수용한 결과로 보인다. 종교적 의미의 원죄 의식과 절대왕정의 핍박에 시달리던 중세적 개념의 전근대적 범죄와 형벌에 경종을 울리는 사건이 된 이 책의 의미는 현대 사법 체계와 형법에도 그 영향이 남아 있다.

특히 고문에 의한 자백은 진실을 밝히지 못하며 부당하다고 강조한다. 체사레 베카리아의 범죄와 형벌에서 주장한 내용은 250년이 지난 1980년대까지 대한민국에서 지켜지지 않았다. 영화 『1987』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박정희 군사 독재 시절에서 전두환 쿠데타 정권에 이르기까지 쉼 없이 자행되던 야만적인 고문과 비인간적 수사 관행이 사라진 건 오래전 일이 아니다.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대한민국의 현실이라고는 지금도 믿기 힘든 일들이 벌어졌고, 여전히 그 시절에 향수를 느끼거나 그 시절에 뿌리를 둔 정권에 지지를 보내는 사람도 적지 않은 현실은 더욱 놀랍다. 베카리아는 절대왕정 시기에 이 같은 목소리를 높였으니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인 동시에 출간 즉시 교황청에 의해 금서로 지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베카리아 자신도 이 책의 반향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으니 실명이 아닌 익명으로 출간했다.

근대 형법의 토대를 마련한 베카리아의 용기는 현실에 대한 과격한 저항이었으며 합리적 이성을 향한 인류의 매우 중요한 진보였음을 역사가 증명한다. 시대를 앞선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은 대체로 기득권의 탄압과 저항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정부가 승인한 이후에야 실명으로 책을 출판했던 당대 유럽은 그래도 동양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행복한 시대가 아니었을까. 18세기 유럽의 지성사와 사회사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관용론』(1763)의 저자 볼테르는 이 책을 계몽주의 시대 가장 중요한 저서라고 평가했으며 직접 해설을 썼을 만큼 깊은 애정을 보였다. 베카리아의 본문 분량만큼 기나긴 볼테르의 해설은 또 단순한 설명이 아닌 또 하나의 사회론이다.

무죄추정의 원칙과 죄형법정주의는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가. 원고와 피고에 따라 관점과 태도가 전혀 다를 수밖에 없으나 지지하는 정당과 정치적 신념이 다르다고 해서 원칙이 달라진다면 법은 우리에게 무슨 의미이며 범죄와 형벌 사이에 놓인 생각의 차이는 어떻게 좁힐 수 있을까. 20대 청년, 체사레 베카리아 생각이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현실적 문제와 고민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18세기 중반 유럽의 정치, 경제 상황에 대한 이해는 프랑스혁명으로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근대적 개인이 이성에 눈을 뜬 계몽의 시대에 절대왕정과 신의 권능의 자리는 위태롭기만 하다. 종교개혁과 인쇄술의 발달이 가져온 지식의 대중화는 왕과 성직자, 귀족들이 오랫동안 거머쥔 헤게모니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는 상황으로 전개된다. 체사레 베카리아의 《범죄와 형벌》(1764)과 볼테르의 해설(1766년)은 인류문명을 진일보를 위한 기폭제라 할 것이다. 개인과 국가의 관계 설정에 따라 범죄와 형벌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형벌의 기원부터 법률의 해석, 범죄의 구분, 형벌의 목적, 고문, 명예훼손, 사형, 자살, 파산, 사면에 이르기까지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도 익숙하고 현실에서도 논쟁이 되는 대목이 많다. 그래서 놀랍다. 260년의 세월을 뛰어넘는 이성의 힘, 아니 인간과 사회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과 고민의 흔적은 시대와 무관하게 계속돼야 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공공의 이익, 인간애, 참된 종교를 열망하는 한 사람이 쓴, 죄 없는 여성들의 결백을 옹호하는 글에 따르면, 기독교 종교 재판에서 10만 명이 넘는 마녀가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이 합법적인 대학살에 그보다 훨씬 더 많은 희생된 이단자들을 더한다면 지구상에서 유럽은 판사, 경비대,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형집행자와 희생자로 꽉 찬 거대한 처형대처럼 보일 것이다. - 볼테르 해설, 221쪽

1761년 10월, 툴루즈의 평범한 상인 장 칼라스의 아들 마크 앙투안이 집에서 자살한 사건이 벌어진다. 가톨릭 신자들은 개신교 신자인 장 칼라스가 가톨릭으로 개종하려는 아들을 살해했다고 모함했다. 칼라스 가족이 모두 체포되어 신문을 받았고 자살이 심각한 범죄였던 당대의 법 때문에 가족들은 앙투안이 살해됐다고 진술했다. 결국 아버지 장 칼라스는 살인 혐의로 수레바퀴에 묶여 사지가 찢기는 참혹한 죽음을 맞는다. 종교의 이름으로 규정된 범죄와 형벌은 이루 헤아릴 수도 없다. 유럽의 역사는 잔인한 종교 전쟁의 역사라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볼테르는 이 소식을 듣고 구명운동에 나서 재판정에서 앙투안은 도박 빚 때문에 자살했으며 장 칼라스는 반가톨릭 광신자가 아니라고 항변했다. 결국 1764년 프랑스 황제 루이 15세는 사형을 선고한 재판관을 파면하고 칼라스의 무죄를 선고했다.

베카리아의 이 책은 같은 해에 출간됐으니 볼테르의 슬픔과 분노가 길고 긴 해설에 자세히 나타나 있음은 물론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저질러진 만행들, 이를테면 마녀사냥 같은 구체적인 사건과 비이성적이고 무도한 처벌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볼테르는 베카리아의 주장에 힘을 싣는다. 볼테르의 해설은 이단과 신성모독 등 종교의 이름으로 규정되는 범죄와 형벌에 대한 비판과 정치와 사회 관련 형벌과 집행에 대해 베카리아의 논의를 보충하고 현상적 분석을 가한다. ‘이성은 정념의 노예’라 일갈했던 데이비드 흄은 인간의 지식과 이성의 한계를 지적하며 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이 칸트의 관념론으로 정리되는 듯했으나 존재론과 인식론, 합리론과 경험론은 이후에도 숱한 철학적 난제를 남겼다. 베카리아는 법과 사회, 아니 국가와 개인의 역할과 의미에 대한 철학적 고민을 던진 철학자가 아니었을까 싶어진다. 단순히 역사와 전통에 따라 시대정신이 반영된 지금, 여기의 법이 존재하며 그 법을 만들고 집행하고 판단하는 사람들과 주권자와의 관계를 어떻게 형성하느냐에 따라 정치와 경제 그리고 우리가 사는 사회의 모습이 결정된다는 중요한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는 여전히 헌법정신에 반영된 권력의 주체와 위임과정 그리고 대의 민주주의가 양산하는 문제해결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존 브라운을 위한 청원과 시민불복종 -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정치평론집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지음, 서경주 옮김 / 지에이소프트 / 2017년 6월
평점 :
절판


법치주의를 외치는 자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때때로 입법기관의 기능을 무력화하거나 사법부의 판단에 저항하지 않는가. 오히려 법의 테두리 안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선을 넘지 않으며 스스로 한계를 만든다. 철저한 준법정신과 규정을 준수하는 태도가 틀렸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법이 시민의 권리와 의무를 완벽하게 규정할 수 없고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을 만들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도덕의 최소한으로서 법은 자본과 권력을 보호하거나 기득권의 이익에 복무하는 경우가 더 많다. 법을 만들고 집행하고 판단하는 사람들은 대다수 시민의 이익을 위해 싸우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왜 우리는 침묵하고 외면하거나 분노하면서도 행동하지 않을까.

사백만 명의 노예는 독립전쟁을 통해 영국의 식민지에서 벗어난 미국인에게 어떤 존재들이었을까. 숨 쉬는 공기처럼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지극히 당연하고 합리적인 제도가 아니었을까. 종교는 신의 이름을 팔아, 자본가들은 산업 발전이라는 명목으로, 정치가들은 상충하는 지역 이기주의에 편승하며 노예제도를 공고히 했던 시절은 불과 160여 년 전 일이다. 노예제도가 상식이던 시대에도 몰상식한 존 브라운이 있었다. 폭력적이고 과격한 방법이 아니면 야만의 시대를 끝낼 수 없다고 판단했던 숭고한 정신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으나 그 무모한 도전은 실패로 끝나지 않고 미국 남북전쟁(1861~1864)의 도화선이 되었다. 급진적 노예제도 폐지론자의 삶은 비현실적이다. 존 브라운은 아들을 포함해서 21명의 추종자들과 하퍼스 페리의 병기고를 급습한다. 병기고에서 탈취한 무기로 노예들을 무장시켜 노예제도를 존치하려는 남부에 대항하려는 시도를 어떻게 볼 수 있을까. 반란을 일으키려는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결국 1859년 12월 2일 처형됐으나 그가 보여준 용기와 노력은 나비효과를 일으켰다.

헨리데이비드 소로는 1859년 10월 30일, 존 브라운을 위한 청원 연설을 통해 10년 전 「시민불복종」(1849)에서 보여준 인간의 존엄성, 시민들의 기본적인 권리와 정부의 역할, 사유하는 힘과 행동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존 브라운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반란의 과정에서 보여준 실천과 태도는 단순히 법을 위반한, 사회 질서를 파괴한 범법자로 규정할 수 없게 만든다. 군주제의 전통과 유교 문화가 관습적 태도로 전해지는 한국인의 관점으로 존 브라운을 바라보면 어떨까. 찬반 투표를 거칠 필요도 없고, 논쟁의 여지가 없을지도 모른다. 정부가 멕시코와의 전쟁 비용 충당을 목적으로 국민에게 인두세를 징수하자 세금납부를 거부하다 체포되어 투옥된 소로는 또 어떤 죄를 다스렸을까. 불순한 의도와 헌법 질서를 문란케 한 죄는 물론 선전선동을 일삼는 불순분자로 몰려 내란음모 내지 국보법 위반으로 중형을 선고받지 않았을까. 시절을 잘못 만났다면 이틀을 넘기지 못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을 수도 있다. 다행히 친척이 세금을 대답 후 풀려났지만, 소로는 스무 살에 하버드를 졸업하면서 5달러를 내야 졸업장을 준다는 사실에 분노하며 졸업장을 거부했으니 될성부른 나무였는지도 모른다.

우리에겐 『월든』(1854) 으로 잘 알려져 있으나 소로는 한 사람의 시민으로 정부의 부당한 명령에 저항하는 태도를 일관되게 보여준 반항의 아이콘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속박을 거부하고 자유롭게 살아가야할 권리가 있으며 이러한 ‘천부적 권리로서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정부와 개인 역시 지배와 복종의 불평등 관계가 아니라 대등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이 소로의 핵심 사상이다. 원주민인 인디언을 정복하고 노예제도를 유지하는 정부에 대해 소로는 소비지상주의, 속물주의, 대중오락, 분별없는 기술의존에 반대했다. 월든 호숫가의 삶은 반문명적 생태주의라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누구나 그런 삶을 꿈꾸지만 아무나 실천할 수 있는 삶이 아니라는 평가도 있다. 스콧 니어링의 『조화로운 삶』, 실화를 바탕으로 한 미드 ‘맨헌트유나바머’의 주인공 테어도르 카진스키의 『산업사회와 그 미래』 등은 여전히 또 다른 세상, 현실 밖의 삶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생각의 곁가지를 마련해준다.

독일 간첩 누명을 쓰고 투옥된 유대인 드레퓌스 대위가 무죄라고 주장하며 에밀 졸라가 「나는 고발한다」 공개선언문을 발표한(1898년) 시기보다 40여 년 앞서 소로는 존 브라운을 위한 청원 연설에 나선 것이다. 물론 이 책의 주인공은 소로가 아니라 존 브라운이다. 빅토르 위고는 이 소식을 듣고 1859년 12월 31일 《런던 뉴스》에 기고하면서 “존 브라운을 죽이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죄악이다. 그로 인해 연방에 잠재되어 있던 균열이 드러날 것이고, 머지않아 대혼란(실제로 ‘남북전쟁’이 터졌다)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말했다. 먼 훗날 말콤 X 는 “흑인 민권 운동에 같이 참여할 만한 백인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없다. 혹시 존 브라운이 다시 살아 돌아온다면 몰라도.”라고 대답했다.

어느 시대나 현실을 앞서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좀 더 멀리 바라보며, 체제에 균열을 일으키고, 변화를 시도했던 그들의 생각과 행동 때문에 인류는 조금씩 나은 세상을 만들어왔다. 존 브라운이 시도한 반란은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라 인상적이고 역사적 사건이었다. 오늘, 이 시대의 존 브라운은 누구인지, 혹시 내 생각과 행동이 존 브라운을 닮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보려면 그 목적과 방향 그리고 결국 누구에게 이익이 돌아가는지 생각해보면 된다. 우리에게 익숙한 노랫소리로 지금까지 남아 있는 존 브라운의 숭고한 ‘태도’는 여전히 우리에게도 깊은 울림을 준다.

Glory, Glory, hallelujah

His soul goes marching on

John Brown’s body lies a moldering in the grav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밀을 말할 시간 창비만화도서관 5
구정인 지음 / 창비 / 202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냥 만화라고 하기엔 조금 애매한 장편 단행본을 그래픽 노블이라 부른다. 내용과 형식이 어떻든 명명법은 그 실체를 규정한다. 뭐라고 부르는지에 따라 대상은 다르게 인식된다. 수준 낮은 심심풀이용 만화가 예술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트 슈피겔만의 『쥐』, 안토니오 알타리바의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처럼 시대의 고통과 아픔을 색다른 형식으로 조망하는 만화는 순수 문학과 또 다른 방식으로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구정인의 『비밀을 말할 시간』을 읽은 후에 《종이의 집》에서 열연한 배우 이치아르 이투뇨를 따라《인터머시》를 보게 됐다. 그 유명한 트롤리 딜레마를 연상시킨 드라마 《트롤리》를 클릭한 건 연이은 우연일까.

우리 국민 대다수는 노동자다. 노동절을 여전히 근로자의 날로 불러야 하는 사람들이나, 자신이 노동자라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거나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노조는 어떤 의미일까. 사회적 계층 이익에 부합하지 못하는 투표 행위만큼 아이러니한 극소수 부자와 기득권을 위한 발언에 호응하는 국민(?)을 등에 업고 정치인들은 여전히 리벤지 포르노보다 천박한 빈곤 포르노를 시전한다. 유아 성폭력, 리벤지 포르노를 넘어 차별과 혐오를 부추기는 자극적 기사와 언론의 태도가 뒤섞여 현실에서 정의와 공정은 발 디딜 곳이 없다. 부화뇌동하는 포퓰리즘은 비판과 성찰을 망각한 지 오래다. 근본적인 문제 해결과 합리적인 태도를 기대하는 건 무리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고 성찰을 촉구한다. 느리게 변해도 세상이 조금씩 나은 곳으로 변할 수 있다는 희망의 끈을 놓을 수는 없다. 구정인은 비밀을 말할 시간은 바로 지금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비밀이 비밀이 아닌 세상이 될 수 있을까. 피해자다움을 요구하거나 2차 가해가 반복되는 현실은 정치적 이념과 개인의 이해관계 때문일까. 세월호, 이태원 참사는 정치와 무관한 사고다. 아무도 의도하지 않았지만 기어이 일어나고야 마는 일, 우리는 그것을 사고라고 부른다. 다만, 의도하지 않았어도 사고를 방지할 책무, 최선을 다해 그 사고를 막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무한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들이 아랫것들에게 책임을 묻는 태도가 당당하다. 정치라는 프레임으로 세상을 덧씌우는 사람들이 원하는 건 무엇일까.

공동체의 편견과 차별이 만들어낸 혐오의 피해는 언제나 가장 빈곤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몫이다. 『올해의 미숙』으로 깊은 인상을 남긴 정원의 『뒤늦은 답장』도 넓은 의미에서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단순히 동성애를 다룬 만화로 분류하기 어렵다. 곳곳에서 십자가를 흔들며 고막이 터질 듯 확성기로 소음 폭력을 가하는 ‘예수천국 불신지옥’ 만큼 동성애 반대 구호와 현수막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이 표현에서 ‘여성’의 자리에 대체될 말은 끝이 없다. 단지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단지 청소년이라는 이유로, 단지 노인이라는 이유로, 단지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단지 어린아이라는 이유로...

매일매일 우리가 직면하는 현실은 가히 블록버스터급 거침없는 혐오 발언과 권력 남용, 기득권 보호, 부자 감세, 노조 파괴 등등 헤아릴 수없이 많은 불공정과 불평등과 비민주로 가득하다. 그래픽 노블은 이렇게 참혹한 현실을 생생한 그림과 침묵의 시간을 통해 ‘보여준다.’ 말하지 않아도 인물의 표정과 행동을 통해 정서를 전달하는 수단으로서 만화는 미디어 시대에 부합하는 매체다. 텍스트의 종언을 논해야 할 만큼 읽지 않는 시대다. 보다 다양한 주제와 깊은 성찰을 통해 우리에게 필요하면서도 의미 있는 작업들이 계속되길 빈다.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닌 것처럼, 비밀을 말할 시간을 놓치거나 답장이 늦어지면 비극과 고통만 남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최재천의 공부 - 어떻게 배우며 살 것인가
최재천.안희경 지음 / 김영사 / 202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눈 감고 귀 닫고 살기도 쉽지 않다.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정도는 안다. 한 사람이 잘 못 들을 수도 있다. 그러나 눈 뜨고 코 베일 수 있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수많은 사람이 보고 들은 걸 부정하고 ‘진상을 조사’해야 한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무오류성의 덫에 걸린 종교의 역사만큼 특정 집단과 리더의 자기 부정은 그것이 통용될 수 있었던 과거와 조직 문화, 여전히 굳건한 그들만의 리그가 존재한다는 의미다.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본능적 자기방어 기제를 넘어선 왜곡은 단순한 이기적 처세술을 넘어 공동체 전체를 위험에 빠트릴 수 있다. 


공부하지 않는 사람의 생각과 태도는 가릴 수 없다. 학력과 직업, 시험과 자격증이 공부의 전부라는 착각이 우리 사회의 민낯을 잘 드러낸다. ‘최재천의 공부’는 특별한 분야에 한정돼 있지 않고, 숨은 비법을 공개하려는 목적도 아니다. 지금, 자기 삶에 만족하는 사람에겐 독서가 취미고, 공부의 필요성도 느끼지 않는다. 무엇을 더 바라지 않고, 문제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책은 철 지난 지식과 정보 수단의 매개체로 보일 뿐이기 때문이다. 


지나친 자기 경험의 일반화와 자기 삶의 이력이 곧 근거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잊은 최재천의 말은 논거는 부족하다. 인터뷰가 아니라 단행본 글쓰기였다면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었겠으나 유튜브 시대의 인터뷰는 사람들의 흥미를 끌고 인상적인 메시지를 전하는데 익숙해진 독자를 설득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으니 이해할 만하다. 어쨌든 책이라기보다 텍스트 유튜브를 본 느낌이라는 게 중론이었다. 대체로 익숙한 독자인 모임 참석자들에게 난이도를 떠나 투자(시간과 노력) 대비 효과(지적 충격, 정서적 감동, 새로운 지식과 정보, 낯선 생각과 태도 등)가 별로 없을 수밖에 없다. 형식은 내용을 지배한다. 바쁜 시간을 쪼개 굳이 책을 낼 필요는 없다. 글을 쓰는 일보다 바쁜 일이 있으면 그 일을 하는 편이 낫다. 지금 쓰는 글이 가장 중요한 일일 때 독자들은 그에 걸맞는 반응을 보인다. 


사회생물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국에서는 최재천을 피해갈 수 없다. 진화론이나 과학의 경이로움을 대중에게 전파한 공도 빼놓을 수 없다. 다만, 인지도는 양날의 검이다. 스스로 베일 수 있는 위험에 대한 콘트롤은 자기 몫이다. 그러나, 그 인지도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을 미치고 대중의 타성적 사고에 균열을 일으켜 변화를 끌어낼 수 있다면 충분한 매력이다. 더 많이 팔리고 더 많이 읽혀 대한민국 공부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진짜 공부란 무엇인지, 왜 계속 공부해야 하는지, 인간에게 공부란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된다면 충분해 보인다.


공부는 자기 성장이다. 공동체의 발전과 사회에 대한 기여는 자기 성장의 결과일 뿐이다. 스스로 깨닫는 즐거움, 부족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는 괴로움, 견고한 현실의 벽과 마주하는 슬픔, 타인과 세상을 향한 관심 등 공부는 쉼 없이 자신의 변화를 이끄는 원동력이다. 독서 모임도 마찬가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이 된 이후의 자기 공부의 방향과 성장에 관심을 잃은 사람들이 많아지는 세상은 탐욕과 이기적 본능으로 가득할 수밖에 없다. 권력과 자본이라는 토르의 망치 앞에 자유로운 사람은 많지 않다. 공부는 자존감을 높여주고 두려움을 없애주며 당당함을 선물한다. 


모든 사람이 자기만의 공부 방법을 가졌으면 좋겠다. 변치 않는 건 아무것도 없다. 가만히 있어도 달라진다. 수많은 독학자들이 세상을 바꾼다. 모든 공부는 자신을 향한다. 앎이 곧 삶이 되는 건 불가능에 가깝지만, 공부는 적어도 무엇이 부족한 지 정도는 깨닫게 한다. 모임에 참석하신 분들은 각자의 방법과 스타일로 꾸준히 공부하는 사람들이다. 분야와 상관없이, 넓이와 깊이도 무관하게 자기만의 철학, 자기만의 공부가 따로 또 같이 뒤섞이는 자리가 이어지고 언제 어느 곳에서든 계속된다면 네가 잘못 본 거라고, 네가 잘못 들은 거라고 끝까지 우기는 대신 인정할 수 있는 용기와 겸손을 배우게 되지 않을까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