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언 반스의 아주 사적인 미술 산책
줄리언 반스 지음, 공진호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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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 주는 지속적인 즐거움 가운데 하나는 의외의 각도에서 접근하여 우리의 걸음을 멈추게 하고 감탄을 자아내는 힘이다. - 347쪽

‘롤랑 바르트는 저자의 죽음을 선언했다. 텍스트를 저자의 의도에서 해방시키고 독자에게 자율권을 준 것이다.’ 마찬가지 논리로 화가의 죽음, 즉 예술가에게 사망 선고를 할 수는 없을까. 그림과 음악은 인간의 눈과 귀라는 원초적 감각 기관으로 수용한다. 표현론적 관점을 떠나 오로지 독자 혹은 관객에게 도달하는 순간 텍스트와 오브제는 철저하게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해석의 대상일 뿐이다. 도슨트의 설명이나 평론가의 비평은 누구 말마따나 소 등짝에 앉은 파리처럼 들리지도 않고 효과도 없는 잔소리에 불과한 게 아닐까. 줄리언 반스도 “화가는 그림에 대한 글을 쓰는 사람들을 깊이 불신한다.”라는 헨리 제임스의 말과 “한 예술형식을 다른 수단으로 설명한다는 건 무도한 행위다. 세상 모든 미술관에 해설이 필요한 그림은 단 한 점도 없을 것이다. 미술관 안내서에 설명이 많은 그림은 그만큼 좋지 않은 그림이다.”라는 말로 그림 설명 따위는 필요 없음을 강조한다. 닥치고 보라는 말일 터인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쉴 틈 없이 화가와 그림에 대한 ‘뒷담’을 멈추지 않는다. 400쪽 가까이 떠들고 난 후 “이만하면 말은 할 만큼 했다.”는 문장으로 마무리한다. 요설에 가까운 수다와 소설적 상상력은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자 단점이다. ‘아주 사적인’이라는 수식어는 매우 주관적이다. 미술 비평의 무게와 책임에서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애정 어린 시선과 자유분방한 형식으로 다양한 형식의 접근을 시도한다. 산책에 값하는 줄리언 반스의 속도에 발을 맞추면 화가들의 일기와 기록과 평론을 종합한 거대한 구조물 안으로 걸어온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마치 단단한 소설처럼 구체적이고 편안한 에세이처럼 다변적이며 비평처럼 날카롭고 진지하다.

비접촉, 비대면 시대라도 인터넷으로 그림을 감상하라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지식과 정보는 습득할 수 있는 예술이 내포한 아우라에는 근접조차 할 수 없다. 원본이 갖는 색감과 분위기뿐만 아니라 감상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그림의 크기를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술가의 상상력을 즐기기 위해 관객의 추측과 오해를 덧붙일 수는 없지 않은가. 들라크루아의 <사르다나팔로스의 죽음>,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은 책에 소개되어 있지 않아 아쉬운 대로 LCD 혹은 OLED를 거친 빛의 조각들이 망막에 투영된 그림자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나는 책에 실린 화보 정도가 예술 감상의 최소한이라고 생각한다. 전쟁 기념관에서 본 클로드 모네의 <빛을 그리다>에 가서 느낀 허망함을 잊을 수가 없다. 시뮬라시옹(Simulation)으로 구축한 시뮬라크르(Simulacra)는 예술에 대한 조롱으로 느껴졌다. 개인적 취향이겠으나 눈의 간사함을 부추기고 간접경험을 권하는 사람들의 장난질로 여겨질 뿐이었다. 발터 벤야민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일이 아닌가.

하여, 현대인에게 예술이란 자기 삶을 고양시키는 최소한의 방편이거나 교양과 품위를 완성하기 위한 도구로 기능한다. 물론 예술이 유한계급의 고급스런 취미라는 사실은 여전히 불변의 사실이지만 대중에게도 그 기회가 주어진 예술 민주주의가 방구석 애호가들을 즐겁게 한다. 줄리언 반스가 아니라면 쓸 수 없는 미술 감상기는 그렇게 시작된다. 미술관에 가 그림을 감상하고, 도록을 뒤적이며 그림에 얽힌 매혹적인 이야기를 듣는 일은 오래된 추억 여행처럼 아련하다. 지난 역사의 단면을 살피고 당대를 살아낸 사람들을 관찰하고 시대의 아픔과 고통에 공감하는 일은 그림을 보는 또 하나의 방식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린 화가들, 보이는 것을 자기만의 빛과 그림자로 표현한 그림들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예술적 감동과 영감을 선물한다. 텍스트로 전해지는 역사, 과학적 사실로 증명된 사실 너머에 이성과 감성이 어우러진 화가의 내면과 마주하는 일은 때때로 즐겁기만 한 일은 아니다. 재현된 과거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수많은 말을 건네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일은 순전히 개인의 몫이다.

줄리언 반스는 그 과거를 낭만주의와 사실주의를 거쳐 모더니즘에 이르는 시기로 한정한다. 이 시기는 1850~1920년 무렵으로 흔히 ‘벨 에포크belle époque’라고 명명한다. 좋은 시기, 아름다운 시절이라는 의미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인류 역사상 가장 자유분방하게 다양한 사상과 예술적 상상력이 발휘되던 시기다. 1946년생인 저자가 걸어온 삶의 궤적을 이해하기 위한 직전 시대에 해당하며 현생 인류에게 가장 추억하고 싶은 아름다운 시절이다. 소설가의 미술 이야기는 제리코에서 출발한다. 충만한 똘기로 가득한 화가의 성격은 물론 작품의 탄생 배경, 이면에 숨은 이야기는 소설가의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해 보인다. 문학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예술작품은 시대정신을 반영한다. 당대의 역사적 사건, 사람들의 관심사, 사상사의 흐름과 세상을 보는 관점이 그림에 녹아 있다. 선과 색의 대결로 요약한 앵그르와 들라크루아의 자존심 대결은 흥미롭다. 르동에 의해 정신적인 색을 건드린 작가로 평가받은 들라크루아의 <사르다나팔로스의 죽음>은 화가 개인의 해석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벨 에포크의 그리스인이라는 세잔에 대한 평가,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에 대한 해석 또한 익숙한 그림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다. 무엇보다 흥미로웠던 화가는 발로통이다. 우울증과 신경쇠약으로 고생한 발로통의 <석양 풍경>(1919)이 매혹적이다. 그의 그림을 10년 단위로 구분해보면 일몰을 그리지 않은 시기가 없다. 하지만 그렇게 일몰을 그리면서도 일출은 전혀 그리지 않았다. 소개된 화가들의 그림을 일일이 찾아보며 읽어야 하는 수고로움이 있지만 책에 소개된 그림만으로는 이 책의 재미를 절반도 얻지 못한다.

예술가의 ‘도덕성’은 치욕에 가까운 말이지만 브라크가 보여준 엄결한 정신은 사적인 영역의 윤리의 문제와 차원이 다른 사회적 책무와 도덕적 태도를 의미한다. “브라크의 도덕적 권위는 공공연히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의 침착성과 침묵, 예술을 통한 사회참여에는 무언가, 부지중에, 도덕적으로 열등한 사람들을 폭로해내는 구석이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권위는 결국 그림 자체에서 나온다. 그 형태감과 균형감, 조화로운 색감―사실성에 대한 진지함, 예술에 대한 충실성―은 다름 아닌 도덕성에 기초한 것들이다.” 평범한 일상인으로서 삶을 대하는 태도, 타인과의 관계, 세상을 향한 발언은 그림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다. 법과 질서, 일상의 규범 안에서 상상력은 숨을 쉬지 못한다. 이 모순이야말로 모든 예술가의 삶과 작품을 이해는 가장 근본적인 해석의 도구라고 생각한다. 데이비드 실베스터는 1992년 연구서 마지막 구절에서 마크리트의 작품을 “일식이 일어날 때의 경외감 같은 감정”을 유발한다고 평가했다. 수많은 평론가의 해설과 마찬가지로 줄리언 반스의 설명 또한 객관을 가장한 주관적 감상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론 뮤익의 《죽은 아빠》와 같이 예술은 문외한인 우리에게도 언어로 발화될 수 없는 깊은 울림을 주고 공감을 통해 상처를 치유하며 이성적 사유를 유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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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이해관계
임현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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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거리감을 느끼기 시작한 이유를 알 수 없다. 아니, 굳이 확인하고 싶지 않은 지도 모른다. 특히 한국 현대소설과 심리적 거리감이 생긴 지 오래다. 취향은 변하고 입맛도 달라지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만 자연스러운 변화에 의도적 거리 두기가 보태졌다. 그래서 오랜만이란 말이다. 임현의 단편들은 끊긴 듯 이어져 있다. 대개 소설집은 한 작가의 시절 관심이다. 현실을 바라보는 태도가 반영되어 인간과 세계에 대한 관점이 드러난다. 표제작 「그들의 이해관계」가 2017년부터 2020년 사이에 소설가 임현이 주목한 화두라고 할 수는 없겠으나 적어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인 ‘관계’ 양상에 천착했음은 틀림없어 보인다. 해주, 도경, 종구, 해원, 노아, 명조, 연재, 연희 등 등장 인물의 내적 갈등은 대개 관계로부터 출발한다. 소설이 아닌 현실도 마찬가지겠으나 원인을 알 수 없는 근원적 고독이나 존재론적 통증을 호소하는 인물은 드물다. 드물다는 말은 없지 않다는 뜻이다. 그러면 재미 없지 않은가. 현실의 반영론적 관점에서만 소설을 읽는다면 오히려 현실 도피 혹은 현실에 대한 외면이 아닌가.

1인칭 나레이터인 주인공이 겪는 일들은 누구나 경험할 만한 보편적 서사다. 누군가를 만나고 헤어지거나 사별하고 은퇴한다. 아내나 남편이 죽고 아버지가 사망한다. 비현실적이지는 않으나 확률이 거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부조리한 현실과 마주한 개인은 거대한 벽을 넘지 못하고 좌절하고 방황한다. 오죽 답답했으면 혼자 떠드는 한 편의 소설을 써야만 했을까. 임현은 현실의 이면을 드러내는 일보다 하나의 사태가 빚어내는 다양한 층위를 세밀하게 묘사하는 데 관심을 둔다. 어차피 이야기로 진실을 드러낸다거나 변혁을 시도하는 게 아니라면 현실의 단면을 드러낸 일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나는 그렇습니다. 사람이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어느 한쪽으로 너무 치우치게 되면 결국엔 경로를 벗어나 버리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한쪽이 자꾸 좋아진다는 것은 누군가 나쁜 쪽을 떠안게 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그들의 이해관계」, 27쪽) 모든 이해관계는 쿠이보노cuibono다. 고대 로마인들이 던졌던 질문이다. 원인을 모르는 일이 벌어졌다면 가장 먼저 그 사건이 누구에게 도움이 되는지 질문하라는 것이다. 대개 관계가 절단나는 이유는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해관계를 금전적 득실로 오해하기 쉽지만 모든 관계는 평등하지고 서로의 이익이 균등하지도 않다. 물론 여기서 이익은 행복, 기쁨, 만족을 포함한다. 연인도 친구도 만나서 생기는 두근거림과 즐거움이 없다면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 임현이 말하는 ‘그들의 이해관계’는 거시적이긴 하지만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 될 수도 있고, 나의 불행이 타인의 즐거움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한다. 소설의 본질은 이렇게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인간의 본심을 드러내고 욕망의 바닥을 보여주며 설명할 수 없는 관계 양상이 정리되지 않으면 깐다.

안톤 체호프는 “외로움이 두려우면 결혼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사랑하는 연인, 결혼한 부부에게 외로움은 필수다. 무언가 극복하기 위해, 결핍을 채우기 위해 형성된 의존적 관계는 지속되기 어렵다. 아홉 개의 단편 중 「거의 하나였던 두 세계」에 오래 머물렀다. 경구 강박을 고백한 소설가 김연수는 시를 쓰면서 문학에 입문했음을 증명하듯 힘을 준 문장들이 독자를 사로잡는다. 단순한 미문이 아니라 생각의 깊이와 넓이를 확보한 문장들이 보석처럼 빛날 때 단편은 이야기의 재미를 넘어 영혼에 새겨진다. 윤대녕식 안개주의보와 달리 문체와 분위기가 독자를 무너뜨리거나 단단한 생각의 깊이와 아포리즘 같은 문장들이 오래 눈길을 끌기도 하는 경우가 그렇다. “관점에 따라 같은 것도 다르게 볼 수 있다는 말에는 만약 아무런 태도나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면 무엇도 볼 수 없다는 점이 전제되어 있다. 요컨대 우리는 의미 있는 무언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보는 무언가에 의해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셈이다.” 같은 문장이다. “나는 진실의 반대말이 주로 거짓이나 가짜라고 배워왔는데, 살면서 오히려 무지에 더 가까운 개념이 아닌가, 생각할 때가 많았다. 무엇보다 나는 종종 진실을 알고 있다고 오해할 때가 많았고, 그것이 잘못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은 대체로 무언가를 더 알게 되었을 때였으니까.”라는 문장도 마찬가지다. 외롭지 않으면 소설을 읽지 않는다. 동화 같은 현실, 행복한 하루하루를 사는 연인은 소설을 읽을 틈이 없지 않은가.

누군가는 오늘도 소설을 쓰고 어디선가 그 소설을 읽는다.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된 사람들은 읽는 동안 그리고 읽은 후에도 더 깊은 외로움을 느낄 수 있다. 누군가는 사람에 대해, 누군가는 세상에 대해, 또 누군가는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짓는다. 그리고 우리는 읽는다. 읽는 행위 자체의 숭고함이 그 많은 이야기 너머의 세계를 가늠하게 하는 게 아닐까 싶다. 소설을 읽는 시간은 현실 밖으로 여행을 떠나는 시간이며 오롯이 자신과 대면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소설가와 독자의 ‘이해관계’가 그렇게 잘 맞아떨어진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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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터 카멘친트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53
헤르만 헤세 지음, 박종서 옮김 / 문예출판사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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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신화가 있었다.

헤르만 헤세의 첫 번째 소설 『페터 카멘친트』의 첫 문장이다. 태초에 빛이 있듯 모든 사람은 자기만의 신화를 갖고 있다. 『데미안』과 『수레바퀴 아래서』를 읽으며 싱클레어에 몰입한 사춘기, 헤르만 헤세는 내게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권했다. 신열에 들떠 골드문트가 되어 불면의 밤을 보내기 시작했고 질풍노도의 시기를 통과했다. 스무 살 무렵 헤세의 마지막 소설『유리알 유희』와 함께 오랫동안 헤세를 잊고 지냈다. 『헤르만 헤세의 독서의 기술』을 읽은 적이 있으나 헤세는 여전히 내 삶의 첫 신화에 온기를 불어넣은 작가다. 이제, 그의 첫 소설을 읽으며 아련한 추억들이 떠올랐으며 열병을 앓던 사춘기의 느낌이 되살아 났다. 그땐, 그랬었지.

가족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길을 떠나고 친구의 죽음과 실연의 상처로 방황하다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 사랑과 연민을 통해 성숙한 인간으로 거듭나는 페터 카멘친트. 그는 모든 너고 오로지 나다. 체험의 깊이와 넓이가 한 인간을 완성하는 데 어떤 역할을 하는지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렵다.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신화’에 해당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 삶의 목적과 가치가 제각각인 건 근대 이후의 일이다. 전통 사회와 달리 개인의 정체성을 찾아 방황하거나 자유의 현기증인 불안을 두통처럼 안고 사는 현대인에게 피터 카멘친트는 과거의 인류 혹은 현재 진행형으로 읽힌다. 우리는 여전히 어머니의 죽음과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성자 프란체스코에 감동하는 유형의 인간에게 몰입할 수 있을까. 그럴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개체 발생은 계통 발생을 반복한다. DNA에 새겨진 자연선택과 성숙의 과정은 진화생물학이나 진화심리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 기질과 개체의 고유한 특성에 기인한다. 인간은 비슷한 존재이면서 서로 다른 생명체가 아닌가.

페터 카멘친트는 목공의 딸과 불구자 보피를 통해 인간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경험하고 그들의 죽음을 수용하며 삶을 긍정한다. 젠알프스의 니미콘에서 태어나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를 거쳐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전형적 원점회귀형 소설이지만 길 떠남은 단순한 소설적 장치가 아니라 한 인간의 도전과 용기를 상징하며 현대인의 불안과 고독에 대한 항변으로 읽힌다. 여전히 치유할 수 없는 외로움에 부들거리는 21세기 네트워크형 인간도 1904년에 발표된 소설의 주인공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전체 8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요인물과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유년 시절(어머니) → 첫사랑(뢰지 기르타너) → 만남(리하르트/에르미니아) → 우정(리하르트) → 우울(엘리자베트) → 향수(아버지/나르디니) → 죽음(목공의 딸) → 우정(보피) → 귀향(아버지)’ 내용을 따라가며 주인공의 이동 경로를 따라가 보자. ‘니미콘 → 취리히 → 파리 → 바젤 → 아시시 → 취리히 → 니미콘’으로 순환한다. 타인과의 만남과 교류는 번번이 어긋난다. 사랑은 남의 일이다. 페터의 진심과 그녀의 생각은 다르다. 보피와의 만남으로 인간애를 느끼지만 그 역시 죽음으로 끝이 난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끊임없이 만남과 이별을 경험한다. 가족, 친구, 연인 등등. 긴 여행길에 스치는 사람은 기억조차 희미하다. 그들은 각각 다른 의미로 타인을 규정한다. 기억도 다르고 판단도 상이하다.

헤세는 그의 첫 소설에서 전통적인 교양소설Bildungsroman을 문법을 철저히 따른다. 괴테에서 토마스 만의 『마의 산』으로 이어지는 성숙한 인간에 대한 갈망이 헤세로 이어진다. 물질문명이 발달과 과학기술의 눈부신 발전으로 지구인이 하나로 접속해 있으나 우리는 페터 카멘친트가 느낀 대자연의 신비와 경외, 인간에 대한 이해와 겸손으로부터 한 발짝도 더 나아가지 못한 건 아닐까. 싱클레어와 골드문트의 방황과 고민을 여전히 계속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아무렇지도 않은 척, 세상은 그런 곳이라고 사람은 그런 존재라고 믿으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살아가는 건 아닐까.

꽃 같은 아름다운 시절도

덧없이 사라져버린다.

좋은 일이 있거든 마음껏 즐겨라

내일을 알 수 없는 인생이어니.

- 로렌초 메디치, 1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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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최승자 지음 / 난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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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시네마 천국》(1988)에서 내게 꼽는 명장면은 고향에 돌아온 토토가 알프레도가 남긴 필름을 돌려보는 장면이다. 검열 아닌 검열로 관객들은 볼 수 없었던 영화의 숱한 키스 장면들. 엔니오 모리꼬네를 통해 OST를 듣기 시작했고 영화에 깊이 빠지는 계기가 된 영화였다. 지나간 모든 게 아름답게 기억될 순 없으나 빛바랜 흑백사진으로 남은 추억은 누구에게나 있는 법. ‘두근거림’을 상기시키는 최승자의 산문이 시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에 눈 뜬 시절을 떠오르게 했다. 마치 프로이트의 마들렌처럼.

현실 밖으로 걸어 나간 최인훈처럼 신비주의에 빠진 최승자는 가늠하기 어렵다. 아주 오래된 산문을 아껴 읽으며 빛바랜 흑백사진을 더듬었다. ‘이 시대의 사랑’을 읽던 청년의 눈으로. 시인에게 부여된 게으를 수 있는 권리,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를 누리며 이 시대를 살아온 그녀의 삶에서 현실은, 그리고 그 너머에서 찾고 싶었던 꿈은 무엇이었을까.

젊은 시절의 일기장 같은 산문을 읽으려면 어느 정도 얼굴이 따뜻해질 수도 있음을 감안해야 한다. 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노력, 정해진 길을 오차 없이 걷는 즐거움, 정해 놓은 목표에 도달하는 성취감, 성공을 향한 맹목적 질주 등과 거리가 먼 낭만과 치기, 냉소와 허무로 가득했던 청춘이 없는 사람의 인생은 부럽지 않다. 현실의 이쪽과 저쪽을 넘나들며 경계인으로 살아갈 숙명 같은 게 존재할 리 없으나 시인은 적어도 빼어난 외모나 솜사탕 같은 부드러움으로 승부할 수는 없지 않은가. 최승자 정도의 카리스마가 없다면 표지에 얼굴을 드러나지 않았으면 싶은 건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이다.

글을 쓰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태도는 무엇일까. 조지오웰을 ‘나는 왜 쓰는가’를 오용하는 사람처럼 최승자를 낭만적 연시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나름의 방식이 있을 터. 시인의 산문은 남다른 통찰이나 미려한 문장 읽는 재미와 거리가 멀다. 시인의 시를 읽은 독자들이나 기웃거릴 만한 시인에 대한 존경과 팬심 정도면 충분하다. 최승자 시인의 시를 읽지 않고 이 산문집을 읽는 일은 부질없는 짓이다.

시인은 “그만 쓰자 끝”이라고 선언했지만, 나는 이제 조금 쓰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더 깊이 읽고 한 번 생각하며 ‘목적’과 ‘태도’를 돌아본다. 불확실한 희망보다 언제나 확실한 절망을 선택해야 성공 확률을 높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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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 숙녀 여러분, 가스실로 - 폴란드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타데우쉬 보로프스키 외 지음, 정병권.최성은 엮고 옮김 / 창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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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겨울방학에는 어머니가 가끔 고구마를 쪄주셨다. 동치미 국물 혹은 잘 익은 김장김치와 함께 먹었던 기억이 난다. 시골에서 어머니가 드셨던 맛 그대로인지 알 수 없으나 옛날에는 구황작물인 감자, 고구마가 끼니를 대신했으리라. 자라면서 김동인의 감자를 배웠고, 고흐의 감자먹는 사람들을 보면서 생존, 가난, 죽음을 어렴풋이 짐작하기 시작했다. 가까운 역사였음에도 관찰자, 방관자의 위치에 선 자들의 게으름은 내내 부채감으로 남는 법이다. 폴란드가 가해자(나치)와 피해자(유대인) 사이에서 관찰자 혹은 방관자로 남은 것처럼.

 

폴란드의 근현대 단편소설을 모은 신사 숙녀 여러분, 가스실로는 아프게 읽힌다. 18세기 후반부터 1차대전이 끝날 때까지 120여년이나 외세의 지배를 받았던 나라에서 기쁨과 행복의 코드를 찾기는 쉽지 않다. 잔혹한 전쟁은 위정자들의 세력 다툼일 뿐이다. 국가의 경계, 민족의 구분 따위는 어느 동물 종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인간만의 분열 도구다. 만물의 영장으로 자부하지만 인간은 그저 스스로 만든 상상의 공동체속에서 허우적거린다. 유발하라리는 상상 속의 질서를 통해 협력하고 사회적 규범과 공통의 신화를 창조했다고 주장했으나 그 환상은 21세기에도 여전히 계속된다. 인간의 존엄을 주장하고 민주주의와 인권을 표방하면서도 국가의 경계를 넘어 그 범위를 확대하고 온 인류의 평화와 화해가 이루어지기는 요원해 보인다.

 

편역자 정병권과 최성은은 낭만주의 시대부터 2차 대전 이후의 문학까지 시대별로 문제작을 엄선해 번역했다. 거의 500페이지에 육박하는 분량이지만 작품 수는 많지 않다. 여섯 명의 작가, 열 작품을 선보인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헨릭 시엔키에비치의 등대지기부터 마렉 흐와스코의 노동자들까지 중, 단편이 뒤섞여 있지만 대체로 호흡이 길다. 시엔키에비치의 등대지기를 읽다가 우리나라의 등대지기를 검색하니 경쟁률이 상당한 공무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파도와 싸우는 일, 혼자 견디는 일이 낭만적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원하는 사람이 그리 많다는 사실에 놀랐다. ‘등대지기는 거의 죄수와도 같은 생활을 했다.’는 표현처럼 당대의 등대지기와 지금 등대지기의 생활이 같을 수는 없지만 색다른 일임에는 틀림없다. 폴란드의 국민시인을 통해 모국어와 애국심에 호소하는 작품이 낯설다. 나라 잃은 민족의 설움, 뿌리내리지 못한 삶의 고통이 모든 사람에게 슬픔을 주진 않는다. 디아스포라 문제는 오늘도 계속된다. 미국 대사관 이전 문제로 인한 유혈 충돌을 보면서 미국이라는 나라, 트럼프의 역할이 새삼스럽다. 북미회담 성사여부, 결과와 무관하게 핵폭탄을 손에 쥐고 너는 갖지 말라는 오만함, 이에 동의할 수밖에 없는 대다수 국가들의 역할과 국제관계가 이론적 모순이다. 세계사의 흐름을 함부로 짐작할 수 없으나 폴란드처럼 동서 유럽의 교량적 위치에 있는 국가의 역할은 한반도와 유사하다. 전쟁, 외침, 가난, 죽음, 개혁 등 문학적 자양분은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다. 눈물과 고통을 먹고 자라는 소설의 속성상 더없이 좋은 환경이다. 하지만 소설을 읽는 내내 독자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 블레스와프 프루스의 파문은 되돌아온다, 모직조끼에 이어 마리아 코노프니츠카의 우리들의 조랑말로 넘어가면서 슬픔은 절정을 이룬다. “움푹 꺼진 그의 뱃속에는 허기만이 가득할 뿐이었다.”(우리들의 조랑말, 마리아 코노프니츠카, 180)는 단순한 문장의 여운이 길다. 1920년대 한국문학의 키워드인 가난과 죽음이 폴란드의 단편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특히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그려낸 우리들의 조랑말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더없이 투명하게 드러낸다. 단순히 가난이 주는 고통의 크기를 그려내기보다 한 가족의 겪는 일상을 통해 인간과 세상을 대하는 태도의 변화가 느껴진다. 끝까지 순수함을 잃지 않는 3형제의 모습이 훈훈하지만 슬픔은 오롯이 독자의 몫이다. 야로스와프 이바시키에비츠의 빌코의 아가씨들자작나무숲은 폴란드의 전통을 잘 묘사한다. 사랑이라는 보편적 정서를 다루고 있으나 시대와 지역에 따라 그 빛깔과 향기는 제각각이다. 인간 내면에 숨어 있는 욕망과 갈등은 세계문학을 읽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죽음을 앞둔 동생 스타시를 바라보는 형 볼레스와프의 속내는 복잡하다. 아내를 자작나무 숲에 묻은 상태에서 시한부 동생을 바라보는 심정은 어떨까. 소설을 읽는 동안 인제의 자작나무 숲이 떠올랐다. 사유지를 가꾼 사람은 무엇으로 그 시간을 견뎠을까. 막국수의 시원한 국물이 떠오른 건 순전히 제목 때문이었다. 표제작 타데우쉬 보로프스키의 신사 숙녀 여러분, 가스실로는 프리모 레비의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떠오르게 한다. 인류의 트라우마를 넘어서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 질문에 도달하게 한 유대인 학살은 불가해한 사건이다. 수많은 제노사이드 중에서도 유독 아우슈비츠가 도드라지는 이유는 그 원인과 방법과 결과가 특별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다양한 방식으로 분석하고 해석하고 설명하지만 언제나 새롭다. 영화 더 리더를 최근에 다시 보았다. 한나는 마이클을 사랑한 적이 있을까. 한나와의 만남이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들어버린 마이클과 달리 한나에게 아우슈비츠는 일상적 직업 공간이었다. 읽을 줄 모른다는 건(읽지 않는다는 건)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인공 한나는 현상을 파악하고 본질을 인식하지 못하고, 인과관계와 상관관계를 혼동하며, 감각을 통해 인지의 결과를 합리적으로 해석하지 못한다. 한나 아렌트가 지적한 악의 평범성은 무지와 침묵의 동의어다.

 

선한 의도가 항상 좋은 결과를 가져 오지 않는다.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과 이익을 따라가는 사람의 이율배반적 태도는 역겹다. 입으로는 가치를, 일상은 이익을 따라간다. 그걸 확인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페르소나는 누구에게나 필요하지만 이중적 태도는 혐오감을 불러온다. 사람은 누구나 그렇지 않느냐는 변명, 세상은 다 그렇고 그렇다는 핑계도 지겹다. 그래서 토마스 아 켐피스는 내가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더 나은 곳은 없더라.In omnibus requiem quaesivi, et nusquam inveni nisi angulo cum libro.’라고 했는지 모르겠다. 책이 있는 구석방 밖은 이불밖 보다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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