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츠키와 야생란
이장욱 지음 / 창비 / 202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리액션reaction은 즉각적인 반응에 불과하지만 리스판스response는 생각을 한 후의 응답이라는 어느 ‘미드’의 문장 하나가 하루를 가득 채우는 날이 있었다. 관습적 사고, 습관적 행동은 반응이다. 그것이 본능적 욕망에 기인한 것이든, 후천적 반복 훈련에 의한 것이든, 조건 반사든, 무조건 반사든 상관없다. 리액션은 결국 관성의 법칙을 따른 결과물이다. 힘들이지 않고 귀찮지 않으며 편하다. 리스판스는 ‘생각’이라는 거름 장치를 통과해야 한다. 질문이고 호기심이며 문제 제기다. 라틴어 “Nullius in verda”는 어느 것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의미다. 리스판스가 여기에 해당하는 게 아닐까. 


이장욱의 소설집 『트로츠키와 야생란』이 그렇다. 어떤 소설가는 리액션의 결과를 추적하고, 리액션에 대한 우리의 자세를 가담으며, 리액션의 근본적 이유를 묻는다. 생각없이 쓴다는 말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의 촘촘한 그물망을 짜는 일이 시인의 천형이라면 보이는 세계의 이야기를 깁는 일이 소설가의 임무다. 이장욱은 노골적인 것과 솔직한 것 사이의 간극을 보여준다. 때로는 경계를 허무는 일은 산을 옮기는 일보다 힘겹다. 틀을 깨고 나와 또 다른 세계로 나아가려는 ‘노오력’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의무가 아니다. 스스로 아프락사스의 품에 안기려는 자들의 땀방울이 세계를 조금씩 변혁시켜 온 게 아닌가. 


밀란 쿤데라는 소설을 “아무도 진실을 소유하지 않지만 모두가 이해받을 권리가 있는, 매혹적인 상상력의 영토”라고 정의했다. 이장욱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한 칸에 분류하기 어렵다. 다양한 인상 군상에 대한 관심이 모든 소설가의 눈에 비치지 않을 리 없다. 다만 그들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에 궁금할 따름이다. 누군가는 작가의 눈치를 보며 그가 주제와 핵심을 파악하려 노력하나 또 누군가는 자기 삶을 투영하는 거울로, 또 하나의 벽을 넘어서는 담쟁이 넝쿨로 소설을 읽기도 한다. 자기 세계관을 들어올리는 지렛대의 역할로 책을 활용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오히려 안일하다. 작가에게 귀책 사유를 돌리거나 이미 만들어진 세계로 진입하려는 태도 때문이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일들이 인생을 이룬다고 생각하면 허망한가.” 단편 「잠수종과 독」에서 공이 현우에게 물었다면 다른 대답이 돌아왔을까. 독자는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작가의 질문에 응답한다. 그러한가, 아닌가. 공은 ‘부작용을 최소화하고 작용을 최대화하는 것이 의사의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생각이 많고 양면성을 강조하고 상태의 복합적 측면들을 고려하며 아우르려는 사람들이야말로 무기력하다는 것을 공은 알고 있었다.” 아니, 무기력한 사람들은 자기 점검을 위해 오히려 다양성과 열린 태도를 살피라는 충고가 아닐까. 소설의 문장, 책장의 갈피마다 독자가 머무는 시간은 제각각이다. 


어떤 소설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건 결국, 자기 삶에 대한 고백이며 타인과 세상을 향한 독백이다. 유명한 정희가 그렇고, 혹자가 그러하다. “저들은 무엇에도 속하지 않고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고 자기 자신이 되도록 해주기 때문에.” 외롭다. 쓸쓸한 고독 너머에 자기 존재 의미를 발견하려는 자들의 몸부림은 오늘도 계속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관념과 세계사와 사후세계를 버리기. 성별과 이름과 가족계획을 망각하기. 우리가 함께 머물렀던 도시를 홀로 찾아와 헤매는 미래의 어느 날을 상상하지 않기.” 트로츠키는 멕시코에서 프리다 칼로를 만났다. 그의 마지막 연인이 되어 암살당했으나 세상에 남은 사람들은 그를 여전히 기억한다. 왜?


예의란 교양 있는 중산층 소시민들의 애티튜드에 불과하며, 예술이란 바로 그런 태도를 조롱하고 비판하고 전복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나는 배웠다. - 「노보 아모르」, 267쪽


예의 없는 것들의 세상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모두 예술을 향유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건 어불성설이 아닌가. 노보 아모르의 음악을 들으며 이장욱의 마지막 단편을 읽는 동안 오랜만에 소설다운(?) 소설을 읽은 여운을 놓치기 싫었다. 아무리 많은 이야기가 쏟아져도 이야기는 계속된다. 그것은 지극히 생의 이편과 저편을 가르는 도구가 아니라 세상을 이해하고 견디는 최음제의 역할만으로도 충분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984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7
조지 오웰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0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치적 글쓰기의 전범

조지 오웰은 1인 미디어다. 현장 르포에 능한 기자처럼 온몸으로 자신의 글을 밀고 나갔다. 버마, 파리, 카탈로니아의 현실을 묘사했고 20세기 초 그가 살던 시대정신을 충실하게 전달했다. “우리 시대에는 ‘정치와 거리를 두는 일’ 같은 건 있을 수 없다. 모든 문제가 정치 문제이며 정치란 본래 거짓과 얼버무리기, 어리석음, 반목, 정신분열증의 집합체인 것이다.”(『나는 왜 쓰는가』, 271쪽)라는 말에 잘 나타나 있듯 글쓰기를 정치적 행위의 도구로 삼았다. 피를 토하며 생애 마지막 역작으로 남긴 『1984』는 소설이라기보다 ‘과두 정치적 집산주의의 이론과 실제’에 관한 보고서다. 

모름지기 글쓰기는 현실에서 공중 부양한 채 대증요법으로 실현된 자기만족이나 달콤한 현실 도피와 거리가 멀다. 우리는 낭만적 사랑과 원초적 고독에 대한 글들이 넘치는, 자기 삶이 당면한 현실에 대한 외면과 회피에 급급한 시대를 살고 있지 않은가. 조지 오웰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지금-여기를 정면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현실 너머에 숨은 인간의 욕망, 세계의 본질에 천착한다. 그것은 물론 정치 체제에 대한 비판적 관점에서 비롯된다. 대안이 없다고 해서 아쉬울 일이 아니다. 작가는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니 대안과 정답을 요구하는 건 무리데쓰.

사랑과 이별조차 그 원인은 지극히 정치적이다. 정치 아닌 것이 없다는 정치 만능주의에 거부감을 느끼더라도 할 수 없다. 광의의 개념으로서 정치는 인간의 삶에 투영되지 않는 곳이 없다. 인간의 말과 행동, 생각과 사유 자체가 정치 행위이기 때문이다. 결국 지극히 사적인 글쓰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일기조차 사실은 이 세상에 살아가는 또 다른 윈스턴과 줄리아처럼 체제가 반영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전체주의에 대한 비명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반유대주의’와 ‘제국주의’가 전체주의의 발원지라고 지적한다. 20세기 ‘나치즘’, ‘파시즘’, ‘스탈린주의’는 현대 사회의 가공할 폭력 장치를 작동하는 기원이 되었다. 히틀러, 무솔리니, 스탈린은 사라졌으나 그들의 그림자와 망령은 세상을 떠돌고 있다. 학습된 무기력과 이중사고doublethink는 자기 삶을 합리화하는 도구로 활용된다. 개인과 집단의 갈등은 사라지지 않는다. 자기 이익을 배반하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 없다는 착각이 오히려 새로운 형태의 집단적 무의식과 맹목적 팬덤 현상으로 나타나는 건 아닐까. 전체주의에 대한 유혹은 오히려 85% 프롤에게 더 큰 추억으로 남은 게 아닐까. 

오세아니아의 내부자와 외부자는 누구일까. 빅브라더보다 임마누엘 골드스타인을 따라가 보자. 미셸 푸코가 날카롭게 분석한 『감시와 처벌』을 이 소설에 적용하면 그 대상은 프롤이 아니다. 애정부의 오브라이언 말대로 사상은 통제, 감시, 조정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전체주의는 내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굴종과 예속, 복종과 열망으로부터 시작된다. 마동석에게 수없이 데려갔을 ‘진실의 방’은 ‘101호’와 전혀 다른 공간이다. 폭력 앞에 굴복한 범죄자들의 자백은 빅브라더를 사랑하게 된 윈스턴의 고백과 질적으로 차이가 난다. 자신을 잊고 완전히 동화되어 지난 40년간의 투쟁이 부질없었음을 자인하는 윈스턴 스미스의 눈물이야말로 전체주의의 기원을 날것 그대로 드러낸다. 

나치즘과 파시즘, 스탈린주의로 이어지는 당대 현실에 대한 환멸을 조지오웰은 이 한 권의 거대한 성인용 우화를 통해 냉정하게 곱씹는다. 애초에 희망 따위를 기대할 수 없으나, 노동자로 대표되는 프롤에게 미래를 엿보는 건 ‘자유’가 주어져 있기 때문이 아니라 건강한(?) 사상, 아니 순수한 자연 상태의 동물적 욕망 때문이 아닌가. 거추장스러운 제약과 상황 혹은 주어진 여건, 타인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 자기 욕망에 충실한 삶이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다면 주저할 이유가 없다. 각자의 삶이 모여 전체를 이룬다. 같은 조지 오웰이 다르게 읽히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네 언어의 한계가 세계의 한계다


구어와 신어의 대비가 보여주는 언어의 세계는 다소 혼란스럽다. 조지 오웰은 언어 분석철학자가 아니다. 허나, 세계 인식의 도구는 ‘언어’일 수밖에 없고 그것을 해명한 순간 철학의 제문제는 모두 해결했다고 선언하며 철학계를 떠난 비트겐슈타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신어newspeak는 오세아니아의 공용어다. 마치 영어가 이제 만국 공통어가 되듯이. 인간은 언어로 사유한다. 영어의 어순, 단어, 표현은 한국어와 다르다. 사물에 대한 인식, 관계 양상에 영향을 미치는 건 개인적 성향과 태도가 아니라 언어일 때가 많다. 사상죄thought-crime, 2분 증오Two Minutes Hate, 표정죄facecrime, 독생ownlife, 선사적goodthinkful, 선사자goodthinker, 범죄 중지cirmestop 등 신어는 시대 정신을 반영하며 집단적 무의식을 형성하고 암묵적 질서와 자기검열을 실행한다. 

몸은 본능을 번역하고 말은 세계를 인식하며 글은 미래에 대한 기대와 희망의 끈이다. 조지 오웰에게 언어는 세계를 인식하는 도구에 불과한 게 아니라 세계 변혁을 위한 무기다. 언어의 한계가 세계의 한계로 나타나는 개인의 울타리를 과감하게 허물 수 있는 방법 또한 타인의 글을 통해 세계를 확장하고 좋은 책을 골라 인식의 힘을 기르는 일이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라는 주장을 우리는 매일 확인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한 글자에 기대 시스템을 바꾸고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일들을 찾아낸다. 누군가는 박수를, 또 누군가는 비난의 화살을 쏜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


아이러니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선언 앞에 독자들은 침묵한다. 자신이 이중사고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은 이중사고가 아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자기 신념으로 굳은 생각, 바뀌지 않는 태도가 이중사고다. 인지부조화를 극복한 확증편향과 내로남불의 확장판이 이중사고다. 언어가 담은 모순과 그 의미를 포작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지 말고 내 안의 불편함을 제거하고 완전한 행복에 이르는 최음제가 바로 이중사고다. 

자유와 행복, 그 모순된 양가 감정

이 소설에는 ‘행복’이라는 단어가 스물네 번 등장한다. 디스토피아에 대한 우울한 자화상을 보여주는 이야기로 가독성이 떨어지는 이 노잼 소설에서도 행복은 여전한 키워드다. 빅브라더가 지켜보는 행복과 원시상태의 자유라는 선택지 앞에서 인간은 어느 쪽을 택할까. 감시와 통제가 일상화되고 자유에 제한을 가하더라도 안전과 평화를 제공받는다면 다수의 사람들은 자유를 포기하고 행복을 선택할 거라는 생각은 착각일까. 혼란과 불안이 계속되는 불행을 감수하더라도 한없는 자유를 보장받고 싶은 사람이 더 많을까. 

현대판 빅브라더를 떠올릴 필요는 없다. 구글 창은 모든 걸 알고 있다. 네이버 검색창은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다. 인터넷 쇼핑, 교통 카드, 위치 정보, 쿠키 정보 …… 일일이 나열할 필요도 없이 현대인은 모두 빅브라더의 흐믓한 미소 앞에서 말할 수 없는 행복과 편안한 일상을 즐긴다. 20세기 중반 조지 오웰이 바라본 현실과 오늘이 크게 다르지 않다면, 아니 오히려 빅브라더가 더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시대, 개인의 취향과 일상이 알고리즘을 통해 낱낱이 까발려져 자신의 욕망조차 통제받고 조정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자유의지 따위는 잊은 지 오래다. 오늘도 우리는 행복하고 자유롭다는 이중사고로 무장한 채, 긴 장마와 폭풍 뒤의 고요함과 밝은 햇살을 즐기면 그만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
벵하민 라바투트 지음, 노승영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슈뢰딩거 방정식의 물리적 측면을 곱씹을수록 혐오감이 커진다네. …… 슈뢰딩거의 글은 도통 이치에 맞지 않아. 개소리라는 생각이 든단 말일세.” 

_베르너 하이젠베르크가 볼프강 파울리에게 보낸 편지


생각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한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보다 이성적 사고의 결여가 감정적 대응보다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문제다. 나는 어떤 부류에 속할까. 타인을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사물과 사건, 즉 세상은 이해 가능한 영역이다. 아니 어쩌면 모두 주관적 해석에 불과할 수도 있다. 지극히 일시적 잠재태에 불과한 현상들을 우리는 세계 이해의 토대로 삼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현실은 초월적 세계를 반영하지 못하고, 미지의 영역은 늘 불안을 잉태한다. 그래서 대개 사람들은 가시적인 범주에 머문다. 확정적 사실을 지지하고 가능성을 신뢰하지 않는다.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 아니 그 노력마저 포기할 때 인간은 비루한 존재로 전락한다. 


그것이 수학과 과학으로 이루어진 진리의 영역이어도 별반 다르지 않다. 경험적 추론으로 세상을 판단하는 사람들도 나름의 근거를 제시하고 자신의 ‘감’이 휴리스틱에 기반한 블링크의 법칙이 적용된다고 믿는다. 문제는 이에 대한 반론 가능성을 차단하며 합리적 판단과 논리적 근거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다. 타인의 생각과 감정을 가르치려 들거나 삶의 목적과 가치, 윤리적 판단에 정답을 제시하는 사람들이 흔하다. 항상 고민하고 끊임없이 사유한다는 착각이 불러오는 편견과 오류가 작동하는 방식은 대개 그러하다.


심지어 수학이나 과학의 세계도 별반 다르지 않다면 사회, 정치, 종교, 문화, 예술 등 인간의 주관적 해석과 가치 판단의 영역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분법적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종류의 인간과의 거리두기는 자기 삶의 질적 향상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거르고 잘라내야 하는 게 암세포만이 아닐 터. 벵하민 라바투트는 독특한 방식으로 세상, 아니 인간에 한발 다가서기를 시도한다. 모두가 거리두기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문학을 통해 인간과 세상을 이해하려는 자들의 수고는 애처롭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을 통해 우리는 세상을 아주 조금 이해할 가능성이 커진다. 그들이 활용하는 도구와 그들의 관점을 잠시 빌릴 수 있는 기회는 오로지 몰입의 독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책을 읽을 수 있는 권리, 아니 좋은 책을 골라 읽어야 하는 능력은 자기 삶의 유한성에 기반한다. 시간이 많지 않다. 애써 노력하고 훌륭한 텍스트를 선별하고 깊이 사유하며 인간과 세계의 본질을 깨닫는 과정이 자길 삶의 등급을 결정한다고 믿는다. 


때때로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심리학과 생물학, 인류학과 사회학이 동원된다. 그래도 번번이 실패하는 건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에 비해 세상을 이해하는 데는 관찰과 실험이 필요하다. 지식과 관점이 세상을 이해하는 척도다. 수학과 과학은 물질계를 바라보는 프레임을 제공한다. 단편 「프라시안 블루」는 허구의 문장이 단 하나밖에 없다는 고백이 놀랍지 않다. 현실이 소설을 능가하는 놀라움을 매일매일 전하고 있지 않은가. 반지하에서 숨진 일가족의 뉴스를 능가하는 픽션이 가능한가. 20세기에 벌어진 인류의 참상과 21세기의 일상이 겹친다. 누군가의 절규는 여전히 누군가의 돈과 권력과 맞바뀐다. 이 책에 실린 다섯 편의 소설은 역사적 진실, 과학적 사실 사이와 사이의 공백을 메운다. 현실을 비틀어 소설을 만드는 대신, 과거를 뒤적여 빈틈을 이어붙이는 과정 또한 훌륭한 이야기가 아닌가. 


슈뢰딩거와 하이젠베르크, 슈바르츠실트와 모치즈키 등 세계사에 족적을 남긴 천재 수학자와 과학자를 기릴 목적의 소설들은 아니다. 인류가 살아온 과거를 돌이켜 보는 건 현재의 원인을 알고 싶어하는 호기심 때문이다. 어쩌면 그보다는 미래를 내다보고 싶은 욕망 때문일까. 드라마틱한 과학사가 소설로 읽히는 느낌은 나비가 꿈을 꾸는 현실을 보여주는 장자의 상상력이 재현되는 듯하다. 소설은 소설일 뿐 현실이 아니다. 현실은 현실일 뿐 소설이 아니듯. 그렇다면 현실같은 소설, 소설같은 현실은 어쩌란 말인가.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 비극은 비로소 시작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콜레라 시대의 사랑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7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프루스트의 마들렌처럼 마르케스의 소설에선 아몬드 향이 진하게 배어 있다. 

그는 플로렌티노 아리사를 통해 사랑의 유효기간이 53년 7개월 11일이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사랑(혹은 사람)이 어떻게 변하니?” 남자의 외침이 허공에 흩어지는 어느 영화의 한 장면이 공허하게 흩어진다. 심수봉의 말대로 사랑밖에 난 모른다고 고백하듯 『콜레라 시대』의 사랑은 낭만적 사랑과 연애의 결정판을 보여준다. 근대 이전 인류의 최고 발명품이 종이, 화약, 나침반이라면 근대 이후 최고의 발명품은 자유연애와 낭만적 사랑이다. 개인의 삶에 주어진 자유와 인간 평등사상은 누구든 자기 욕망과 의지에 따라 짝짓기를 시도할 수 있는 원시시대로의 회귀로 해석하는 것은 지나칠까. 상대가 누구든 내가 어떤 사람이든 우리에겐 사랑할 자유가 권리가 있다. 물론 그 사랑을 거절하고 이별할 수 있는 티켓을 손에 쥐고 있다는 사실도 잊지 않는다. 페르미나 다사의 특별함이 서사의 중심을 이룰 수 없다. 이 소설은 후베날 우르비노와 플로렌티노 아리사 그리고 페르미나 다사의 삼각 관계와 거리가 멀다. 각자가 맺은 관계양상은 전혀 다른 형태와 의미를 지니며 삶의 시기에 따라 독립적 형태로 나타난다. 만약 후베날 우르비노가 아니어도 플로렌티노 아리사와 페르미나 다사의 사랑과 이별 그리고 노년의 재회에는 큰 영향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모든 사람은 자기 삶의 과정과 결과를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그것은 절반의 필연과 절반의 우연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페인 식민지였던 콜롬비아는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해 있다. 1819년 독립한 후에도 금과 은 같은 보물을 스페인으로 보내고 아프리카 노예시장으로 번성했던 선명을 기억을 항구도시 카르타헤나에 새겨져 있다. 아마도 마르케스는 카리브해의 뜨거운 태양과 조국의 역사와 문화가 짙게 드리운 공간을 배경으로 전근대 사회의 모순과 식민지 시절의 고통, 낭만적 사랑과 열정을 에로스적 욕망으로 풀어내고 싶었던 게 아닐까. 인간의 본능과 배치되는 모든 규범과 질서에 대한 저항은 근대와 현대를 가르는 분명한 기준이다. 집단과 전체주의적 삶에서 벗어난다는 건 가부장적 질서와 여성의 질곡으로부터 자유를 의미한다. 스페인 정복자들이 첫발을 내디딘 남아메리카의 관문에서 ‘늙음’을 거부하고 예순이 되기 전에 자살한 제레미아 드 생타무르의 이야기로 시작되는 소설은 아이러니하게도 칠순이 넘은 다음에야 비로소 사랑에 눈을 뜨는 플로렌티노 아리사와 페르미나 다사의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소설의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을 뒤집으면, 사랑은 “우리 목숨이 다할 때까지.”(마지막 문장)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첫 문장)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영화 『세렌디피티』에서 케이트 베켄세일이 자신의 이름과 연락처를 적어 헌책방에 판 책이 바로 이 소설이다. 존 쿠삭의 ‘지폐’와 ‘콜레라 시대의 사랑’은 운명적 사랑과 낭만적 연애로 포장된다. 우연을 가장한 음험한 욕망은 반드시 현실을 능가한다. 인간은 그런 존재다. 세기말(19세기말)과 새로운 시대(20세기)를 시대의 사랑은 콜레라만큼 치명적이고 사회적 질병으로 다뤄져야 할만큼 혼란스럽다. 전통과 문화는 단단한 보수적 이데올로기와 관습적 사고에 불과한 고정 관념이다. 선악의 판단이 불가능한 선택적 기호와 취향의 결과물이다. 우르비노의 계급과 계층, 종교적 태도가 만든 사랑과 결혼은 육체적 욕망과 부딪쳐 혼란스런 결과를 초래한다. 겉으로 페르미나 다사와 쇼윈도 부부로 원만하고 평온한 삶을 유지하지만 페르미나의 개인적 태도와 아버지의 욕망이 투영된 결혼은 결코 ‘행복’과 거리가 멀다. 플로렌티노 아리사에게 622라는 숫자에 아로새겨진 여인들은 어떤 의미일까. 페르미나 다사에 대한 사랑은 광기와 집착을 넘어 진정한 사랑이라고 명명하고픈 낭만주의자들의 바람은 이루어진 걸까. 

1927년생 마르케스가 58세가 되던 1985년에 출간된 이 소설은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와 전혀 다른 성격의 소설이다. 팬데믹을 진지하게 다루며 인간의 실존적 의미를 묻는 카뮈와 달리 마르케스는 수인성 전염병인 콜레라 6차 대유행의 끝물을 경험한 세대에게 과연 사랑의 본질은 무엇이며 에로티즘은 사랑의 어떤 표정에 해당하는지 묻고 있는 듯하다. 100년 쯤 지난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코로나 시대의 사랑’을 묻는다면 무어라 답할 수 있을까. 환멸, 연민, 추억, 후회로 점철된 소설 속 주인공들의 사랑과 체스, 사진관, 앵무새, 망고나무, 가지, 테레빈유, 돈 산초 호텔의 거울에 투사된 마르케스의 열망은 어떻게 읽어내야 할까. 낭만적 사랑의 개막 혹은 종말은 플로렌티노 아리사의 변비처럼 꽉 막힌 채 해결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소설의 알레고리가 마르케스가 경험한 시대에 대한 향수이든 현대 사회의 사랑에 대한 비판적 분석이든 상관없다. 뜨거운 태양과 마그달레나 강의 축축하고 끈적한 분위기가 시원한 배설이 불가능한 변비의 고통을 생생하게 전한다. 

“난 절대로 노인이 되지 않을 거야.”라는 제레미아 드 생타무르의 절규와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은 나를 창녀로 만들어주었거든요.”라는 나사렛 과부의 고백보다 “공적인 생활의 과제는 두려움을 지배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고, 부부 생활의 과제는 지겨움을 극복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라는 페르미나 다사의 깨달음과 “훌륭한 결혼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행복이 아니라 안정이오.”라는 플로렌티노 아리사의 조언보다 나이브하게 들린다. 우리는 각자 자기 삶의 주인공이다. 무엇이 어떠하든 자기 몫의 사랑, 욕망, 환멸, 추억, 후회, 연민, 환희, 절망을 남긴다. 

에바 일루즈는 『사랑은 왜 끝나나』에서 “19세기 구애의 대부분은 처음부터 사랑을 선포하고 이루어진 것이지, 남녀가 서로 사귀며 키운 감정이 아니었다. 구애를 시작하면서 사랑을 선포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감정의 불확실성을 덜어주었다. 아니, 더 나아가 사랑한다는 고백을 처음부터 듣고 시작하는 감정적 확실성은 여성이 남성을 만날 조건”이었으며, “20세기의 흐름과 더불어 우아함과 매력과 물질적 풍요와 애정 생활을 가꾸는 책임은 전적으로 개인의 몫이 되었다. 이런 프로젝트를 위한 중요한 문화적 자원은 소비문화가 제공한다. 그 제공 방식은 다양하다.”고 분석했다. 우르비노와 플로렌티노의 사랑은 19세기식 연애 방식이 종말을 고하지 않은 상태에서 20세기식 사랑법을 시도했기 때문에 페르미나 다사는 극도의 혼란을 느꼈을 법하다. 그리하여, “전근대의 구애는 감정으로 시작해 섹스로 끝났다. 그리고 전근대의 섹스는 죄책감과 불안감으로 불러일으킬 정도로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현재의 관계는 (쾌락적) 섹스로 시작해 어디서부터 어떻게 감정을 가꿔야 할지 몰라 전전긍긍하며 관계를 두렵게만 여기는 불확실성과 씨름한다. 몸은 감정을 표현하는 무대로 기능해왔다(“좋은 관계는 좋은 섹스로 표현된다”는 상투적 표현을 보라). 그러나 감정은 성적 상호작용과는 관계없는 것이 되었다.”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낭만적 사랑과 에로티즘 사이의 혼란과 갈등은 콜레라 시대를 지나서는 좀체 찾아보기 힘든 선택의 영역이 되어버린 게 아닐까.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우리의 관점으로 플로렌티노 아리사, 후베날 우르비노, 페르미나 다사의 사랑법을 평가할 수는 없다. 그들은 전근대적 전통과 종교적 신념, 자본주의가 형성한 신흥 부르주와 계급 그리고 낭만주의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는 ‘영원한 사랑’에 대한 꿈을 간직하고 있다.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 또한 이 소설을 읽으면서 ‘사랑’의 의미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고 토로한다. 기혼과 미혼이 바라보는 ‘결혼’이 달랐고 후베날 우르비노와 페르미나 다사의 ‘거의 사랑’에 대한 의견도 제각각이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이유, 결혼을 결심한 순간, 이별의 아픔과 그리움이 교차했을 터. 사람이 산다는 건 끊임없이 누군가를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의 반복에 불과한 건 아닐까. 플로렌티노 아리사의 사랑을 광기 혹은 집착이라고 부르든 영원하고 순수한 사랑의 표본이라 생각하든 우리는 단 한 번 뿐인 인생에서 각자의 사랑에 대해 깊이 고민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 어떤 사랑도 틀린 게 아니라 다를 뿐이다. 남의 사랑을 저울질하고 평가하고 판단하지만 않는다면, 조금 더 다양한 방식의 사랑에 대해 관대할 수 있다면 나사렛의 과부처럼, 사라 노리에가처럼, 아메리카 비쿠냐처럼 각자의 방식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플로렌티노 아리사는 ‘한 여자가 없었던 까닭에, 그는 모든 여자들과 동시에 함께 있기를 원했다.’ 하지만 페르미나 다사가 아닌 여자들 입장에서는 아리사를 사랑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모든 작가와 독자에게 아직도 사랑에 대해 할 이야기가 남아 있어 다행이다.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사랑에 대해 아직도 할 이야기가 남아 있는 이유가 사랑은 목적이 아니라 과정이며 결과가 아니라 원인이기 때문이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때때로 캥거루 문학과지성 시인선 563
임지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제는 시집도 온라인으로 고른다. 이게 다 ‘코로나’ 탓이라는 좋은 핑곗거리가 생겼다. 밀린 숙제를 하듯 혹은 배부른 허기를 채우듯 시집을 게걸스레 먹어치우고 싶을 때가 있다. 포만감은 느껴지지 않고 더 큰 공허와 무기력에 빠질 때도 있으나 가끔 발바닥을 간질이는 문장을 만나고 겨드랑이가 움츠러드는 표현 때문에 여기저기 기웃거린다. 시는 종이로 된 시집을 읽어야 한다는 지극히 평범하고 단순한 방법을 모르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인용과 crtl+v가 편리한 방법이라는 착각은 시가 주는 깊은 맛과 의미를 포기하는 일이다. 

문지와 창비 시집에도 옥석은 있다. 아니, 취향이 갈린다. 독자마다 다른 입맛 때문이기도 하고 나이, 상황, 감정, 건강, 계절이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할머니는 욕을 밥 먹듯이 했다 하루에 한 끼만 드셔야 할 듯’이나 ‘애인에게 이럴 거면 헤어져,가 튀어나오려는 걸 이러지 말자고 고쳐 말했다’는 「언어 순화」가 내게도 필요했기 때문일까. 처음 만난 임지은의 『때때로 캥거루』가 하루를 채웠다. 언어의 깊이와 무게, 이미지를 포착하는 능력 따위는 분석하는 일은 모르겠으나 시인은 ‘유머’라는 강력한 무게를 장착했다. 사람들은 흔히 아재개그를 단순한 언어 유희로 폄훼하지만 명징한 언어의 이면을 들추는 일, 다양한 컨텍스트를 활용하는 방법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재능이 아니다. 아니, 어지간한 노력으로 챙길 수 있는 즐거움이 아니다. 임지은이 아재 개그를 한다는 게 아니라 언어를 향한 탐닉의 정수에 유머가 놓여 있다는 말이다. 유머는 긴장을 늦추고 관계를 변형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관계는 문제가 없는데 사람이 문제인 걸까요 관계없는 사람과 관계를 맺으려다가 아, 저 사람은 관계가 필요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면서 만나게 되는 사람이 있고 영영 못 보게 되는 사람이 있고 -「잘잘못」중에서

이렇게 관계양상을 정확히 비틀기도 하고,

나를 미워하는 사람의 수가 

두 손을 합친 것보다 많다 

손가락이 열 개뿐인 건 죄가 아니다 

-「죄가 아니다」중에서

자신을 항변하기도 하며, 관계맺기의 어려움을 토로한다. 어쩌면 삶이 곧 관계이며, 그 관계에 대한 태도가 자신의 본질이기도 하다. 참고 견디는 일이 모두에게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씨를 호출하고, ‘구태여’ 씨가 등장하기도 한다. 러시아 ‘형’식주의를 호출한 시인의 재치와 타인에 대한 애정 혹은 타인으로 인한 고통은 일반화하기 어렵다. 

사랑 혹은 이별의 고통에 대하여,

한밤중에 전화를 끊는 사람은 

가끔 알약처럼

잘 삼켜지지 않으므로

머리맡에 물 한 컵이 필요하다

-「사람이 취미」중에서

이렇게 직설법으로 토로하기도 하고, 가끔은 알아도 모른 척해야 했던 기억을 소환하기도 한다.

궁금한 게 있었다

너는 모른다고 했다

몰라는 주머니가 있는 동물이 아니었지만

뭔가 담아야 할 것 같았다

고민을 눌러 담자 토끼가 튀어나와 귀를 접었다

몰라의 정체성은 모르는 것에 있었다

가끔은 알아도 모른 척해야 했다

-「때때로 캥거루」중에서

김보경은 “언어에 자유를 부여해 스스로 자유로워지는 시인. 시의 자유는 아마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해설 「어느 유머리스트의 슬픔과 자유」중에서, 159쪽)라는 말로 임지은 시집을 정리한다. 언어의 자유는 유머를 통해 가능하고 시인의 슬픔은 관계의 자유로부터 시작되는 게 아니었을까. 공감은 향수처럼 진한 향기를 남긴다. 

인간은 악취 위에 뿌린 냄새 같아서

향수로도 잘 감춰지지 않고

틀어놓은 음악을 함께 듣고 있지만 

자기 자신만 듣느라

천사가 곁에 있다는 걸 알지 못한다

-「대충 천사」중에서

자기 자신만 듣는 사람과의 소통은 불가능하다. 숱한 아이러니와 패러독스 사이에서 허탈질 때 우리는 인생의 밝은 면을 기대하지만 그건 오로지 ‘웃음’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함정으로 가득하지만

내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면은

밝은 면도, 어두운 면도 아닌

바로 웃긴 면입니다

-「인생의 밝은 면」중에서

삶의 고뇌와 슬픔의 미학으로 시에 접근하는 대신 유머와 해학으로 위로를 건넬 수는 없을까. 웃음은 소설의 전유물이 아니다. 모른 척 외면하고, 알면서도 눈감고, 없는 것처럼 말하고, 안 보이는 듯 지낼 때도 있는 법이 아닌가. 그래서 시인의 눈을 통해 가끔 가닿지 않는 곳, 이성의 치외법권에 대하여 들여다보는 게 아닌가. 

시인은 직업이 아니라 상태입니다 머릿속에서 단어들이 불법 주차를 한 상태, 뜨거운 문장을 들어 올려야 하는데 냄비 손잡이가 다 타버린 상태, 하자니 괴롭고 안 하자니 더 괴로워서 치과 진료를 미루는 사람처럼 영혼의 치아 하나가 덜렁거리는 상태, 헬스 트레이너는 볼펜 끝을 살짝 깨문다 운동이 꼭 필요한 상태,라고 적는다

-「건강과 직업」중에서

김지, 박쥐, 큰 지은, 안경 지은, 까만 지은(「모두 다른 지은」중에서)…… 그 많던 흔한 ‘지은’이 중 시인의 흔한 이름이 오래 기억되기를. 이런 비유가 좋다. 선명하고 확실한 이미지로 복잡한 상황이나 언어 이전의 세계 혹은 욕망을 표현하는 임지은의 시가 괜찮지은? 

신발 끈같이 엉키고 있을 때였다

-「세상에서 가장 짧은 대화들의 대회」중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