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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역사
제임스 수즈먼 지음, 박한선.김병화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2년 8월
평점 :
경제 문제는 우리 모두가 무한한 욕구와 유한한 수단 사이의 연옥에서 살라고 저주하는 것 같지만, 수렵채집인들은 물질적 욕구가 많지 않아서 그 욕구는 몇 시간만 일하면 채워질 수 있다. 그들의 경제적 삶은 희소성에 대한 집착보다는 풍부함의 전제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 들어가며, 21쪽
일과 놀이를 구별하는 일은 헛되다. 누군가에게 삶은 놀이처럼 쉽고 누군가는 시시포스Sisyphos의 고뇌에 불과하다. 그 차이를 극명하게 가르는 사회적 계층과 보이지 않는 계급 사이에서 우리는 종종 길을 잃고 방황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 삶의 목적지와 방향을 탐색하려는 목마름조차 사라지면 인간의 삶은 생존과 경쟁에 매몰된다.
사회인류학자 제임스 수즈먼은 ‘일work’을 들여다본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우리에게 일은 무엇이며 어떤 의미를 갖는가. 일은 노동labour보다 넓은 의미로 사용된다. 생존을 위한 모든 활동이 일이다. 자본과 결합한 노동의 개념과 역사는 숱한 경제학자와 사회학자들의 밥줄이니 굳이 재론할 필요도 없고 앞으로도 다양한 해석과 분석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요한 하위징아의 놀이하는 인간 『호모 루덴스Homo Ludens』의 현대적 고찰은 잘 이뤄지지 않는다. 인류학이 경제학에 밀린 탓일까. 태초에 벌어진 도구와 기술에서 출발해서 공생하는 인간의 모습, 끝없는 노역과 시간이 돈이 되는 과정, 도시를 이뤄 끝없는 욕망을 분출하는 현대인에 이르는 과정을 살펴보면 인류의 역사가 과연 발전했다고 말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과학기술의 발달과 문명발달로 인해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진보적 관점은 부정되어야 할까.
인간은 스스로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어리석은 존재가 아닐까. 모두 이기적 욕망 탓이라고 하기엔 인류의 역사가 보여준 모습이 혼란스럽다. 목적지를 알 수 없고, 방향이 설정되지 않아 한 국가와 공동체는 때때로 퇴보하며 흔들리고 해체되고 되살아나기를 반복한다. 문명의 흥망성쇠는 필연이다. 인간의 탄생과 죽음처럼. 이 과정에서 우리는 한순간도 쉼 없이 일을 한다. 때로는 생존을 위해 때로는 이타적 목적과 사회 전체를 위해. 그러나 저자는 이 책에서 그 과정의 결정적 장면과 결과가 과연 필연적인지 묻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은 쉬기 위해 일하지만 일없는 시간을 불안해 한다. “2008년 폴 돌란 등의 연구에 의하면, 우리는 근무 시간이 줄어들수록 불안을 더 크게 느낀다. 근면과 성실은 우리 스스로 부여하는 낙타의 짐이다. 이걸 프로테스탄트 윤리로 부르든, 육 윤리로 부르든 그건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약 5,000년 전 낙타가 가축화된 것처럼, 인류도 신석기 혁명 이후 스스로 가축화되어가는 과정에서 묵묵한 인내의 가치를 체화해 왔다는 것이다.”라는 박한선의 해제가 책 머리를 두드린다. 과연 우리에게 일은 무엇인가.
일과 인간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불의 사용, 농경 사회, 도시의 탄생, 산업혁명이라는 결절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인류 역사에서 이 장면들은 이후에 태어난 인간의 삶을 완전히 뒤바꿔버렸다. 유발하라리가 『호포 사피엔스』와 『호모 데우스』에서 상술했듯 현재의 변화는 느린 점들의 변화를 한 곳에 모아 폭발하듯 현대인의 뇌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4차 산업혁명이 아니라 우리는 상시 혁명 시대를 살고 있는게 아닐까.
빅데이터, 사물인터넷은 물론 AI 알고리즘이 일상생활을 파고든 지 오래다. 나를 위한 과학, 기술의 발달은 오히려 종속적인 존재로 만든다. 주체적인 판단력과 지속 가능한 일의 즐거움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딩크 족Double Income, No Kids을 넘어 파이어 족(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이라는 신인류가 등장하며 인류의 삶에서 일의 의미와 역할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저자는 우리에게 ‘일’이 무엇이었는지 말해주는 대신 미래의 인류에게 ‘일’의 개념을 다시 설명하려는 듯하다.
예를 들어, 오늘 저녁 메뉴를 떠올리는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살펴보자. 음식을 먹는 목적, 방법, 과정이 제각각이다. 내가 먹는 음식이 나를 말해준다. 어디 음식뿐이랴. 내가 사용하는 물건, 입은 옷, 사는 집도 마찬가지다. 다만 조금 다른 관점에서 살펴보면 일의 기쁨과 슬픔은 우리 삶의 핵심에 해당한다. 무슨 일을 하는지, 일을 통해 무엇을 얻고 싶은지,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그 일은 어떤 기쁨과 슬픔을 주는지 등등. 돈만 벌 수 있다면 ‘불쉿 잡Bullshit Jobs’을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노동의 미래와 경제 문제에 골몰하는 우리에게 ‘일의 역사’는 어쩌자고 자꾸 뒷통수를 당겨 뒤를 돌아보게 하는가. 현재와 미래가 고민이라는 그 방향과 목적지는 늘 과거에서 먼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충분한 가치가 있다.
에너지와 삶과 일의 관계는 인간이 다른 모든 살아 있는 유기체와 가진 공통된 연대의 일부이며, 인간의 목적의식, 세속적인 데서도 만족을 찾아내는 무한한 재주와 능력 또한 지구상에 생명이 처음 태동한 이후 내내 연마된 진화적 유산의 일부다. - 42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