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의 역사
제임스 수즈먼 지음, 박한선.김병화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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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문제는 우리 모두가 무한한 욕구와 유한한 수단 사이의 연옥에서 살라고 저주하는 것 같지만, 수렵채집인들은 물질적 욕구가 많지 않아서 그 욕구는 몇 시간만 일하면 채워질 수 있다. 그들의 경제적 삶은 희소성에 대한 집착보다는 풍부함의 전제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 들어가며, 21쪽


일과 놀이를 구별하는 일은 헛되다. 누군가에게 삶은 놀이처럼 쉽고 누군가는 시시포스Sisyphos의 고뇌에 불과하다. 그 차이를 극명하게 가르는 사회적 계층과 보이지 않는 계급 사이에서 우리는 종종 길을 잃고 방황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 삶의 목적지와 방향을 탐색하려는 목마름조차 사라지면 인간의 삶은 생존과 경쟁에 매몰된다. 


사회인류학자 제임스 수즈먼은 ‘일work’을 들여다본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우리에게 일은 무엇이며 어떤 의미를 갖는가. 일은 노동labour보다 넓은 의미로 사용된다. 생존을 위한 모든 활동이 일이다. 자본과 결합한 노동의 개념과 역사는 숱한 경제학자와 사회학자들의 밥줄이니 굳이 재론할 필요도 없고 앞으로도 다양한 해석과 분석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요한 하위징아의 놀이하는 인간 『호모 루덴스Homo Ludens』의 현대적 고찰은 잘 이뤄지지 않는다. 인류학이 경제학에 밀린 탓일까. 태초에 벌어진 도구와 기술에서 출발해서 공생하는 인간의 모습, 끝없는 노역과 시간이 돈이 되는 과정, 도시를 이뤄 끝없는 욕망을 분출하는 현대인에 이르는 과정을 살펴보면 인류의 역사가 과연 발전했다고 말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과학기술의 발달과 문명발달로 인해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진보적 관점은 부정되어야 할까.


인간은 스스로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어리석은 존재가 아닐까. 모두 이기적 욕망 탓이라고 하기엔 인류의 역사가 보여준 모습이 혼란스럽다. 목적지를 알 수 없고, 방향이 설정되지 않아 한 국가와 공동체는 때때로 퇴보하며 흔들리고 해체되고 되살아나기를 반복한다. 문명의 흥망성쇠는 필연이다. 인간의 탄생과 죽음처럼. 이 과정에서 우리는 한순간도 쉼 없이 일을 한다. 때로는 생존을 위해 때로는 이타적 목적과 사회 전체를 위해. 그러나 저자는 이 책에서 그 과정의 결정적 장면과 결과가 과연 필연적인지 묻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은 쉬기 위해 일하지만 일없는 시간을 불안해 한다. “2008년 폴 돌란 등의 연구에 의하면, 우리는 근무 시간이 줄어들수록 불안을 더 크게 느낀다. 근면과 성실은 우리 스스로 부여하는 낙타의 짐이다. 이걸 프로테스탄트 윤리로 부르든, 육 윤리로 부르든 그건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약 5,000년 전 낙타가 가축화된 것처럼, 인류도 신석기 혁명 이후 스스로 가축화되어가는 과정에서 묵묵한 인내의 가치를 체화해 왔다는 것이다.”라는 박한선의 해제가 책 머리를 두드린다. 과연 우리에게 일은 무엇인가. 


일과 인간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불의 사용, 농경 사회, 도시의 탄생, 산업혁명이라는 결절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인류 역사에서 이 장면들은 이후에 태어난 인간의 삶을 완전히 뒤바꿔버렸다. 유발하라리가 『호포 사피엔스』와 『호모 데우스』에서 상술했듯 현재의 변화는 느린 점들의 변화를 한 곳에 모아 폭발하듯 현대인의 뇌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4차 산업혁명이 아니라 우리는 상시 혁명 시대를 살고 있는게 아닐까. 


빅데이터, 사물인터넷은 물론 AI 알고리즘이 일상생활을 파고든 지 오래다. 나를 위한 과학, 기술의 발달은 오히려 종속적인 존재로 만든다. 주체적인 판단력과 지속 가능한 일의 즐거움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딩크 족Double Income, No Kids을 넘어 파이어 족(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이라는 신인류가 등장하며 인류의 삶에서 일의 의미와 역할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저자는 우리에게 ‘일’이 무엇이었는지 말해주는 대신 미래의 인류에게 ‘일’의 개념을 다시 설명하려는 듯하다. 


예를 들어, 오늘 저녁 메뉴를 떠올리는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살펴보자. 음식을 먹는 목적, 방법, 과정이 제각각이다. 내가 먹는 음식이 나를 말해준다. 어디 음식뿐이랴. 내가 사용하는 물건, 입은 옷, 사는 집도 마찬가지다. 다만 조금 다른 관점에서 살펴보면 일의 기쁨과 슬픔은 우리 삶의 핵심에 해당한다. 무슨 일을 하는지, 일을 통해 무엇을 얻고 싶은지,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그 일은 어떤 기쁨과 슬픔을 주는지 등등. 돈만 벌 수 있다면 ‘불쉿 잡Bullshit Jobs’을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노동의 미래와 경제 문제에 골몰하는 우리에게 ‘일의 역사’는 어쩌자고 자꾸 뒷통수를 당겨 뒤를 돌아보게 하는가. 현재와 미래가 고민이라는 그 방향과 목적지는 늘 과거에서 먼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충분한 가치가 있다. 


에너지와 삶과 일의 관계는 인간이 다른 모든 살아 있는 유기체와 가진 공통된 연대의 일부이며, 인간의 목적의식, 세속적인 데서도 만족을 찾아내는 무한한 재주와 능력 또한 지구상에 생명이 처음 태동한 이후 내내 연마된 진화적 유산의 일부다. - 4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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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 - 26가지 키워드로 다시 읽는 김수영
고봉준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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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푸른 하늘만큼 회색빛 하늘이 주는 무색무취의 날들이 좋다. 비가 와도 다시 맑아져도 하늘은 여전히 별들을 숨기고 있을 테니까. 김수영과 신동엽으로 가득했던 20대 젊은 날도 괜찮았지만 더 이상 외부 세계에 휘둘리지 않는 지금도 좋다. 독자는 변하고 시인은 늙는다. 얼마 전 정호승 시인 등단 50주년이라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새벽 편지』에 실린 형형한 눈빛은 그대로인데 시간은 자꾸 흘러 『슬픔이 택배로 왔다』 하지만 김수영은 박제된 사진 그대로 살아 있는 듯 싶다. 흰 ‘난닝구’를 입은 사진 한 장이 김수영의 시각적 이미지다. 그 사진을 오래 간직했다. 1921년생인 시인의 100번째 생일이야 무슨 의미가 있을까마는 때때로 시간이 흘러 새롭게 시인의 시세계를 들여다보는 일은 의미 있는 일이다. 같은 작품도 시대정신에 따라 다른 평가를 받기 마련이니 어쩌면 당연한 통과의례인지도 모른다. 수많은 시인과 소설가가 명멸했으나 여전히 주목받고 널리 읽히는 작가는 많지 않아 보인다. 시절 인연처럼 한 시대를 풍미하고 사라져 버리는 시인과 소설가가 무의미하지는 않다. 당대의 고민을 담아 동시대인들의 슬픔과 기쁨을 함께했다면 그 또한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다. 하지만 시와 소설이 갖는 순기능, 본질과 역할에 닿아 있는 작가로 평가받는 일은 쉽지 않다. 이어령과의 순수, 참여 논쟁이 아니더라도 김수영은 시대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가족, 일본어, 설움, 하이데거, 전통, 자유, 혁명, 비속어, 번역, 여혐, 죽음, 사랑, 풀 등 26가지 키워드 하나하나를 한참씩 들여다 볼만하다. 김수영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그의 시 세계를 다시 톺아보는 계기가 될 것이고, 김수영이 낯선 독자라면 좋은 안내서가 될 것이다. 시인, 평론가, 교수 등 26번에 걸쳐 신문에 연재된 글들은 일정한 분량과 뚜렷한 목적으로 쓰여 한 권의 책으로 손색없이 묶였다. 시대상황이 그러했기 때문일 수도 있으나 ‘현실’을 떠나 김수영의 시를 읽을 수는 없다. 현실에 대한 외면도 작가의 태도일 수 있으나, 대체로 인간의 내면과 섬세한 감정선이 주를 이루는 시와 소설이 ‘보편성’이라는 이름으로 다수 독자를 확보하는 경우가 많다. 시와 소설을 읽는 목적에 따라 독자의 성향에 따라 다른 평가가 가능하겠으나 문학은 여전히 인간과 세계의 본질을 향한 아픈 비명이며 더 나은 삶을 위한 고민이다. 슬픔 없는 기쁨이나 고통 없는 행복 따위가 있을 수 없듯 내면의 상처와 개인의 불행은 근본적으로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부조리한 삶의 이면을 읽으려는 노력만큼 삶의 조건을 이루고 있는 세상에 대한 고민이 없는 문학은 가당치 않다.

김수영의 시 전집과, 산문 전집을 가끔 꺼내 읽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될 때가 있다. 아니, 김수영이 아니라 누구라도 좋다. 혼자만의 시간, 언제든 꺼내 읽고 싶은 몇 권의 시집이 꽂혀 있는 책장을 가진 사람의 삶은 조금 다른 향기를 난다. 가을이 곧 지나면 겨울을 인내한 봄이 다시 온다. 그렇게 자연의 순리에 따라 시간이 흐르고 점차 사라지는 삶의 순환 논리에 적응하는 삶의 자세가 공동체와 우리가 사는 시대에 적용될 수는 없다. 인간은 생각하고 움직이고 변화를 추구한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해도 그것은 일시적인 성장과 발전을 위한 디딤돌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김수영은.

그래서 그의 시 한 구절을 따온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는 제목의 울림이 크다. 내 안의 반동, 세상 곳곳의 무수한 반동들이 시대와 역사를 추동하는 힘이다. 김수영은 시인들을 위한 시인이기도 하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문학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성찰과 고민을 위해 조금 더 깊이 고민하는 시인과 소설가가 늘 때 독자들은 풍요로운 한국문학을 즐길 수 있다. 자유와 혁명, 사랑과 죽음은 김수영의 시가 아니라 우리 삶의 뜨거운 키워드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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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소리 하고 자빠졌네 창비시선 475
송경동 지음 / 창비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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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시를 쓰고 독자는 시를 읽으며 꿈을 꾼다. 현실 밖을 꿈꾸는 무수한 사람들의 그루터기 쉼터여야 할 시는 때때로 찬물을 끼얹는다. 비현실적인 공상이 현실을 견디는 힘을 주지만 두 발은 언제나 현실을 딛고 있다. 문학의 역할과 기능에 대한 각자의 생각과 판단이 어떻든 세상에는 다양한 시와 소설이 독자를 기다린다. 망설이다 다시, 송경동을 읽는다. 가장 치열하게 현실의 한복판에 서 있는 시인의 모습은 애처롭고 위태하다. 시가 혁명의 도구로 기능할 수 있다는 순진한 생각 때문에 참여시가 소비되는 건 아니다. 


감옥이 따로 없어

법정최저임금 정도나 받는 강제 노역에 시달린 후

저물 무렵 반지하나 옥탑방으로 자진해 입방하는

당신이 양심수

-「당신이 양심수」중에서, 20쪽


누군가는 소리를 내야 한다. 소리는 소리를 부른다. 외면하고 싶은 현실이지만 부정할 수는 없지 않은가. 지난여름 물에 잠긴 반지하, 뜨거운 옥탑방에 사는 사람들을 송경동은 현대판 ‘양심수’라고 부른다. 청소용역노동자들의 선언을 시작으로 아직도 강철이 어떻게 단련되는지 묻는 시인에게 대한민국은 누구나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는 행복한 나라가 아니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정부의 정책이 어떻게 달라지든 돈 없고 힘없는 사람들의 자리는 변함이 없다. 현실의 최전선에서 하루를 견디고 삶을 지탱하는 이웃들을 바라보는 시선과 태도가 세상을 살아가는 바로 우리들의 삶의 자세다. 타인을 바라보는 기준과 공동체를 향한 목소리가 지금, 여기에 선 내 삶의 무게다. 무엇을 할 것인가.


나중에는 나도 무장하고 다녔다

상처받고 싶지 않아 먼저 공격했다

짓밟히고 난 뒤의 모멸과 분노를 견딜 수 없어

목청을 먼저 높이 올렸다

「목소리에 대한 명상」중에서, 48쪽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감동적인 자연과 두근거리는 순간 보다 피 흘려 싸우는 현장과 땀으로 범벅이 된 노동의 순간들이 모여 거대한 삶의 뿌리를 이룬다. 기막힌 묘사와 감각적 언어보다 때때로 목청 높여 외치는 송경동의 목소리를 아프게 읽어야 한다. 시는 슬픔의 미학이다. 삶은 고통의 연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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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만세 매일과 영원 6
정용준 지음 / 민음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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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현대소설(살아있는 작가들의 작품)이 안 읽히기 시작한 지 오래다. 사적 영역에 머물러 감정 과잉으로 심리 묘사와 미문에 집착하거나, 인물 간의 관계를 통해 인간 존재에 대한 탐구에 이르지 못하거나, 구조적 모순과 시대정신에 천착한 작품을 찾지 못했거나, 특정 직업과 상황에 몰입해 보편성을 획득하기 어려운 소설들이 많아서라고 위로해 보지만 전적으로 ‘나’라는 독자 개인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고 진단한 지 오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편도 읽지 않은 소설가의 에세이 『소설 만세』에 도전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픽션을 다루는 작가의 산문집을 멀리한다. 사적인 영역에 대한 무관심과 작품으로만 만나고 싶은 생각 때문이다. 이 책은 에세이의 형식을 빌린 ‘소설론’이다. 소설 작법 혹은 소설에 관한 명상이라고 해도 좋고 소설의 기능과 역할 혹은 개성과 특징이라고 해도 좋다. 이는 『근대문학의 종언』을 선언한 가리타니 고진을 새삼스레 떠올릴 필요도 없다. (참고 : 우리시대 지식논쟁_'근대 문학은 종언을 고했나' 1. 이제 '그들만의 문학'...근대문학은 끝났다, 조영일 2. 근대문학 종언론은 상상 혹은 소통일 뿐, 최원식 3. 종언 '위기'를 근대문학의 '기회'로, 권성우)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리얼리즘이 사라진 자리에 무엇이 자리를 잡았나 살펴보라. 근본적으로 체제와 시스템을 뒤흔들만한 비판적 문학이 사라진 자리에 놓인 ‘공감’은 이기적 욕망과 숱한 ‘사랑’으로 채워졌다. 비평의 종말은 자연스러웠으며 한국의 문예비평은 그들만의 리그로 축소됐다.


정용준은 소설을 쓰며 소설을 가르친다. 소설의 성격과 특징을 설명하기 위해 개인적 경험을 살피고 자신의 소설 작법을 소개한다. 창작수업과 일반적 글쓰기에도 도움이 될만한 에피소드가 나열된다. 가끔, 독서와 글쓰기를 가르칠 수 있을까, 싶은 회의적 생각이 든다. 기초적인 방법론과 첫발을 내딛는 사람들을 위한 안내는 필요하겠으나 결국엔 각자의 길을 찾아 떠나야 하는 유목적 책읽기와 비판적 글쓰기로 귀결돼야 하지 않을까. 


자연과학을 제외하고 문학과 사회과학 혹은 예술 영역은 학문적 체계와 이론을 배우고 익히는 단 하나의 길이 정해져 있지 않다. 인지주의 학습 곡선을 따라가며 성실하게 차곡차곡 실력을 쌓아가는 방법도 있고, 쾰러의 통찰설에 걸맞게 계단식으로 단번에 쑥쑥 자라는 사람도 있다. 축적된 내공과 경험과 사유의 깊이는 지극히 개별성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며 관점에 따라 열정의 온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소설은, 아니 문학은 점점 위태롭다. 어쩌면 텍스트의 위기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시각적 동물이며 본능은 입체적이다. 추상적 기호, 2차원의 세계에서 펼쳐지는 텍스트의 모호함은 지난하고 힘겨운 자기와의 싸움이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 소설을 쓰고 읽는 일은 작가와 독자 모두 무언가 다른 세계에 대한 열망과 꿈이 있어야 가능하다. 


꿈 없는 잠이 이어진다. 목적 없이 걷고 방향을 가늠하기 어려운 일상이 지나간다. 타인과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자기 삶에 대한 고민이 없다면 오히려 ‘행복한 삶’에 가까운 게 아닐까. 아는 게 병이고 모르는 게 약인 경험을 우리는 자주 하지 않는가. 안다는 건, 알고 싶다는 열망과 너무 차이가 크다. 질문과 성찰이 불행을 자초하기도 하고, 관계를 망치기도 한다. 문학은, 아니 소설은 단순한 허구의 세계가 아니다. 또 다른 현실이며 다양한 삶의 스펙트럼이다. 특별한 사건을 중심으로 서사가 펼쳐지더라도 공감할 수 있는 인물과 개연성과 거리가 멀어지는 순간 게임은 끝난다. 많이 팔리는 책이 아니어도 좋고, 모두 공감하지 않아도 좋다. 소설은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러 사람들을 위로하고 쉬어갈 수 있는 벤치가 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때때로 고독한 독서가 주는 효용을 생각하면 소설가의 역할도 저마다 다를 테다. 소설이 ‘만세’라고 외쳐도 좋다. 아니, 소설가는 그럴 수 없다면 쓸 수 없으리라. 독자는 그 소설가들에게 진심으로 박수를 보낼 수 있을지 오늘도 고민하며 책장을 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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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1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인규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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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왼손을 다친 산티아고 노인이 물 한 모금을 마시기 위해 사투를 벌인다. 길이 5.5미터 무게 70킬로그램은 족히 넘을 듯 싶은 인생 물고기를 포기할 어부가 있을까. 인간은 누구나 상황에 적응하고 현실을 타계하는데 온 힘을 쏟는다. 장기적인 목적을 세우고 삶의 가치를 고민하는 일은 등따시고 배부를 때 할 수 있는 법이다.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선 산티아고 노인은 84일이나 허탕을 쳤다. 85일째 손맛을 봤으니 어찌 포기할 수 있을까. 자연에 대한 경이로움, 인간 삶의 숭고함, 위기를 극복하려는 불굴의 의지, 먹고사니즘을 너머 자기 극복을 통한 해방감 따위는 어찌보면 허울좋은 평론이 아닐까. 노인은 그저 배가 고팠고 거대한 청새치와 밀당의 짜릿함을 포기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위험한 순간이나 포기하고 싶은 고통이 없지 않으나 무언가를 얻기 위해 누구나 견뎌야 하는 시간과 과정이 아닌가. 


소년 시절과 중년에 읽는 『노인과 바다』는 같을 수 없다. 이해할 수 없었던 노인의 말과 행동, 신념이라기 보다 고집스러움, 물고기 한 마리에 매달리는 집착이 무엇을 말하는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오히려 바닷가에 사는 소년의 일상과 미래가 따분해 보였고 지루한 스토리에 별 감흥이 없었다. 사춘기를 넘기며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무기여 잘 있거라』를 읽으며 헤밍웨이라는 작가에 관심을 갖게 됐으나 아주 오랫동안 『노인과 바다』를 재독하지는 않았다. 이제 소년보다 노인의 나이에 가까운 나이가 되어 다시 읽는 소설에서 보이는 건 노인의 지난했을 삶과 현재의 일상, 대책 없는 미래다. 일상을 돌보는 소년과의 우정 혹은 애정이 그를 견디게 하지만 그저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사는 노인의 삶이 보편적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을 떠올리게 했다.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 “질병은 나에게 태만을 허용하는 동시에 명령한다. 질병은 나에게 늘어진 자세, 여가, 기다림과 인내에 대한 의무를 선사한다. 그러나 사유로 인도하는 것이야말로 질병의 가장 큰 선물이다.”라고 말했다. 상처를 입고 육체적 고통을 견디는 상황에서 노인은 혼잣말이 는다. 청새치에 대한 연민, 수많은 ‘죄’에 대한 명상, 바다에 대한 생각들이 이어진다. 혼자 견디는 시간이어서가 아니라 사유로 인도하는 가장 큰 위기의 순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질병을 통해 건강의 중요성을 깨닫고 고통과 아픔을 거쳐 성숙하며 위기와 불안을 견디며 자기 삶의 자세를 가다듬는다. 불운과 역경과 고난은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숙명이자 삶의 통과의례다.


이를 통해 ‘겸손’을 배운다. 타인을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 다만 인정하는 태도, 열린 생각이 자신을 자유롭게 할 뿐이다. 85일째, 평생 물고기를 잡아 온 노인의 불운에도 끝이 보일 때가 됐다. “노인의 모든 것이 늙거나 낡아 있었”지만 “그는 희망과 자신감을 잃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오늘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다는 희망과 자신감을 잃는다는 건 삶을 포기하는 일일 테니까 말이다. 그는 쿠바 아바나가 보이는 멕시코 만 인근으로 출항한다. 무역풍이 부는 9월의 바다를 헤밍웨이는 직접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마이애미로 향하는 하늘의 비행기의 경로를 통해 자신의 위치를 파악한다. 예전에 일했던 니콰라과 동부 모스키티아 해안의 카리브 해와 사자를 보았던 북대서양 카나리아 군도는 멕시코 만에서 멀지 않은 곳들이다. 바다는 노인에게 삶의 터전일 뿐 아니라 생애 무대이자 추억의 전부다. 


자연을 바라보는 두 가지 태도


이런 바다가 남성성의 상징인 ‘엘 마르el mar’라 명명돼야 마땅해 보이지만, 노인은 여성성의 바다 ‘라 마르la mar’였다고 고백한다. 원형적 상징으로서 바다의 이미지가 독자에게 어떻게 각인되어 있든 상관없다. 자연에 대한 공감 능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려 삶을 영위해온 노인에게 바다는 애증을 느낀다. 물고기를 죽여 자기를 살려야 하는 생태계의 순환 논리 앞에 겸손하다. 역대급 태풍 소식에 한반도가 긴장하고 있다. 자연은 때를 알고 찾아왔다가 물러가는 게 아니라 인간이 적응하며 생존을 거듭했을 뿐이다. 


도시인의 삶은 부자연스럽다. 자연스러운 삶이 들과 산과 바다에만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가장 원초적인 삶의 형태를 통해 본질적인 문제에 천착하기 위해서 자연이라는 프리즘을 통과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다. 열심히 일하고 편안한 노후를 준비하는 대부분의 인간은 자연으로 돌아간다. 꽃을 찍는 나이, 푸른 바다와 하늘에 감탄하는 나이가 따로 있는 건 아니지만 이를 대체로 나이들어감의 증거로 삼기도 한다. 자연스런 삶은 어디에나 있으나 부자연스러움을 우리는 문명, 발전, 성장이라고 말한다. 


불멍을 위해 캠핑을 하고 하늘멍을 위해 잔디밭에 눕는 사람들이 느끼는 여유와 만족감은 설명하기 힘들다. 누군가는 써핑을 하고 누군가는 등산을 가며 또 누군가는 낚시를 즐긴다. 자전거를 타고 달리며 모터보트로 강 위를 누빈다. 바다로 상징되는 자연이 노인에게 어떤 즐거움과 만족을 주는지 우리는 이해하기 어렵다. 단지 먹고 살기 위한 어부의 노력이 아니라 라 마르la mar의 품에 안겨 평생을 보낸 한 인간의 감동적 서사가 아닐까. 


문학의 보편성과 작가의 문체


문학은 대개 작가의 사상을 반영하고 사회를 투영하는 척도로 기능한다. 소년과 노인의 관계를 파악하고 머리와 꼬리만 남은 청새치의 결핍과 노인의 귀가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궁금하지 않다. 오독의 즐거움 또한 독자 각자의 몫이다. 짧고 간결한 단문 위주의 스타일리쉬한 문체를 가진 헤밍웨이는 나름의 세계를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드보일드 문체가 주는 효과는 담백함이다. 감정의 과잉이 없고 군더더기 수식어가 따라붙지 않는다. 압축과 절제는 글쓰기의 교본이 되기도 한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 여백을 두되 허전하지 않다. 헤밍웨이는 당대 사회, 삶의 현장을 통해 독자들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개성적인 인물과 특별한 사건을 통해 서사가 이어지는 소설의 재미는 텍스트 세대에겐 여전히 매력적이다. 현재적 유용성의 남아 있는 한 문학은 보편적 정서를 통해 인간 삶을 위로하고 개인이 겪는 혼란에 돌파구를 마련해주기도 한다. 누구나 그럴 수 있다고, 너만 그런게 아니라고, 모양과 빛깔은 다르지만 우리는 그렇게 한 생을 살아간다고. 지식으로서의 문학, 흥미진진한 스토리의 재미가 무용하지 않으나 우리는 대개 보편적 인간의 삶에 대한 감동과 위로를 위해 책장을 넘긴다. 


모임에서 다룬 이야기는 각자의 메모와 각자의 기억 속에 또 다르게 적힐 것이다. 삶과 죽음, 소년과 노인, 바다와 노인, 열림과 닫힘, 낮과 밤이 주는 시간과 공간 사이 사이에 산티아고 노인과 마놀린 소년과 각자의 닉네임과 토론장의 열기와 귀갓길의 불빛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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