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도시 이야기 찰스 디킨스 선집
찰스 디킨스 지음, 권민정 옮김 / 시공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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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하라, 지옥문이 열릴 것이다.

인스타그램에는 불행이 없다. 헬스와 필라테스로 관리한 몸, 최신 유행 패션과 소품, 세련된 인터레리와 수입 가구, 화려한 조명과 미슐랭 가이드 음식점, 오마카세 데이트와 다양한 취미, 풀빌라 휴양지와 풍경 사진.... 자기 삶의 가장 아름답고 기억하고 싶은 순간들, 기록하고 싶은 욕망은 권장할만하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광고와 밴드왜건 효과는 불행을 양산하고 욕망을 창출하며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며 천국의 열쇠 대신 지옥문의 손잡이를 돌린다.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다. 차리리 모든 걸 전복하는 혁명이 장기적 관점에서 쉽고 빠른 방법이다. 점진적 변화와 발전에 대한 희망은 신기루처럼 현실의 고통을 견디고 미래를 위해 남겨둔 비밀 처방전이 아닐까. 범주가 다르지만 남자와 여자, 청년과 노인, 동양과 서양, 서울과 지방, 한국과 일본, 대구와 광주, 유럽과 미국, 과거와 현재, 오늘과 내일을 비교하는 건 어떤가. 빅토리아 여왕 시절, 찰스 디킨스의 장편 소설은 대중의 폭발적 지지와 관심의 대상이었다. 헐벗고 굶주린 대다수 평민들의 삶을 고스란히 담아냈기 때문이다. 낭만적 사랑과 연애가 아니라 현실적 고통과 일상적 삶을 묘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대한 유산』과 달리 『두 도시 이야기』는 읽는 내내 불편했다. 프랑스 혁명의 주체로 등장하는 대표적 개인 ‘드파르주’와 주변사람들에 대한 묘사, 마네트 박사의 투옥 원인부터 빅토리아 시대의 전형적 여성상을 보여주는 루시 마네트, 객관적 사무원으로 등장하는 자비스 로리 등 등장인물들에 대한 찰스 디킨스의 심리적 거리에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대의 현실을 담아내 고고학에 버금가는 고현학考現學이라 평가받았던 박태원의 『천변풍경』,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등은 서술자가 풍경에 개입하지 않는 관찰자의 역할에 머문다. 이 소설도 전지적 작가 시점을 유지하고 있으나 18세기 중반 영국의 노동 현실, 말하자면 페르낭 브로델은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Ⅱ-2 교환의 세계』에서 “도시에 대해서 말하자면 이곳은 주지하다시피 근대성의 원형이며, 근대 국가와 국민경제가 탄생할 때 모델이 되었다. 도시는 늘 다른 사회를 희생해가면서 축적과 부의 장소가 되었다.”라는 주장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21세기의 도시도 다르지 않다. 자본의 축적과 경쟁 이외의 장소로 평가받을 만한 요소가 남아 있을까. 그래서 사람 사는 곳마다 나름의 방식으로 마을을 이루고 삶이 이어지지만 기본적으로 도시적 삶의 원형은 달라지지 않는다. 이 소설에서 비교하는 두 도시, 즉 런던과 파리는 유럽의 근대적 삶을 적확하게 드러낸다. “젠트리(gentry)라는 말은 프랑스 부르주아지의 상층을 가리킨다. 이 층은 상업을 통해서 부를 쌓았지만 한두 세대 전부터 상점과 계산대를 떠나서, 즉 상품을 직접 다루고 장부를 작성하는 일로부터 해방되어서 이제는 대토지를 경영하거나 돈놀이를 하거나 안전한 가산(家山)이 된 국왕 정부의 관직을 구입함으로써 부와 안락한 생활을 누리는 알뜰하고 보수적인 사람들이다.”, 또한 “부르주아지(bourgeoisie)라는 용어는 부르주아(bourgeois)라는 용어와 운영을 같이했다. 두 용어 모두 12세기부터 사용한 말이다. 부르주아란 한 도시의 특권 시민을 가리켰다. 그러나 이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이 말은 지역이나 도시에 따라 16세기 말이나 17세기 초에 가서 널리 퍼졌으며, 18세기에 가서 일반화되었고, 프랑스 혁명이 이 말을 대단히 널리 쓰이도록 만들었다.” 젠트리와 부르주아는 전체 인구의 극소수에 해당한다. 이들은 마르크스의 분석을 실천하며 축적에 축적을 더해 자본이 굴러가며 증식하는 신비한 꿈과 환상의 미래를 맞이한다. 그런데 노동자와 농민들은?

1775년 11월 현재를 작가는 “최고의 시절이었고, 최악의 시절이었고, 지혜의 시대였고, 어리석음의 시대였고, 믿음의 세기였고, 불신의 세기였고, 빛의 계절이었고, 어둠의 계절이었고, 희망의 봄이었고, 절망의 겨울이었고, 우리 앞에 모든 것이 있었고, 우리 앞에 아무것도 없었고, 우리는 모두 천국을 향해 똑바로 나아가고 있었고, 우리는 모두 천국을 등진 채 반대로 나아가고 있었다.”라고 회고한다. 1859년, 그러니까 프랑스 대혁명을 거쳐 공화정이 수립된 파리의 모습을 런던에서 바라보는 찰스 디킨스는 오래된 미래를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휴머니즘도 인류애도 아닌 시드니 카턴의 마지막 바꿔치기 기술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건 시대의 모순 혹은 혁명에 따른 부작용, 또는 헤게모니를 가진 인간의 속성에 대해 조금 더 깊이 고민할 순 없었을까. 런던에서 도버 바다 건너 칼레에서 생탕투안을 왕복하며 벌어지는 마네트 박사 일가와 얽힌 혁명의 뒷담화를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지 궁금해졌다.

문학은 현실원칙을 넘어선 자리에 놓인 인간의 쾌락원칙을 위한 면죄부가 아닌가. 소설적 상상력과 구성의 탄탄함에 대한 아쉬움이 아니다.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1775년은 조선의 영조 51년, 미국 독립 전쟁이 한창인 시절이다. 프랑스 민중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며 혁명의 횃불을 지켜든 1789년이 인류사에 남긴 족적은 형언하기 어렵다. 유럽의 민주주의는 왜 미국가 다른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왜 비판적 성찰 없는 진영논리에 빠져 허우적거리는가. 스스로 왕의 목을 쳐 본 시민들의 자유와 평등과 우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외침이 당대 사회와 인류의 역사를 어떻게 뒤바꿔 놓았는가. 역사소설로서 가져야 하는 무게와 역할에 대한 기대가 너무 큰 탓이었는지 모르겠으나, 거시적 관점에서 다루기엔 너무 버거운 주제였을 지도 모르겠으나 두 도시 이야기는 시대의 산물로서 당대를 살아냈던 혁명 과정의 희생양 혹은 윤리적 딜레마에 관한 보고서로 읽혔다. 당대의 기나긴 만연체 문장과 고대 영어를 번역하며 고민한 흔적이 곳곳에 배어 있는 번역자의 고백까지 찬찬히 살폈으나 아쉬움이 지워지진 않는다. ‘근대’가 주는 위로, 당대성을 배제한 고전읽기의 어려움은 모든 독자들이 겪는 문제가 아니라 개인적 독법 차이일 수도 있다. 그래도, 고전이 주는 의미는 현재적 유용성에서 관한 고민에서 출발해야 하는 게 아닐까.

상상력이 기록되기 시작한 이래 상상된 것들 가운데 온갖 게걸스럽고 탐욕스러운 괴물들을 하나로 융합하여 만들어낸 것이 있었으니, 바로 기요틴이었다. - 6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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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 밀란 쿤데라 전집 9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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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관심이 우리 시대의 유일한 집단적 열정인 셈이지. - 91쪽

노르망디 해변가 작은 도시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 구글어스의 최초 아이디어는 젊은 예술가와 해커에서 출발했다.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방식, 온 세상을 날아다니는 상상력은 독일의 아트+ 컴에서 실현됐다. 상상이 현실이 되지만, 천문학적 액수가 걸린 구글과의 소송에서 진다. 사실과 진실 사이, 법과 현실 사이에서 좌절하는 건 인간의 숙명인지 모른다. 노르망디 해변의 작은 도시로 날아가 거리를 살펴보고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현실에서 소설은 여전히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세계로 안내한다.

어느 날 남자들이 더 이상 그녀를 돌아보지 않는다는 그녀의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샹탈은 시간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 아이를 잃은 엄마가 아닌 여자로서의 삶도 끝나간다는 슬픔의 그림자. 장마르크의 가상한 노력은 역효과를 불러오고 이별의 빌미를 제공한다. 사랑을 시작할 땐 이유가 없지만 사랑이 끝날 때는 헤아릴 수 없는 이유가 생긴다.

며칠 동안 잠을 자지 못하고 불면증에 시달리면 시야가 좁아지고 생각이 멈춘다. 꿈과 현실 사이를 헤매고 두세 시간 이상을 자기도 어렵다. C. D. B가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의 이니셜이 아니면 어떤가. 어차피 멍한 눈길로 바라보는 푸른 하늘 너머에 존재하지도 않는 꿈을 좇는 게 인간의 숙명이다. 상상의 질서를 만들어 경계를 만드는 위대한 면도 있지만 인간은 그 벽을 넘다 지치기 마련이다. 시지프스의 신화처럼 이카루스의 꿈처럼 뫼비우스의 띠처럼 무한반복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소설을 읽는 게 아닐까.

밀란 쿤데라는 샹탈의 입을 통해 “당신이 내가 상상하는 사람이 아닌 다른 어떤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어. 당신의 정체성에 대해 내가 착각을 했다는 생각.”이라고 선언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타인의 정체성은 무엇인지 묻는다. 일관성과 동일성을 유지한 어떤 본질적 특성이라는 정의는 그 자체로 모순이다. 인간은 일관성과 동일성을 유지할 수 없는 유기체다. 변하지 않는 존재의 본질이라니.

인간에게 그런 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정체성의 혼란은 불가피하다. 확고한 믿음과 뚜렷한 신념이 무너지는 경험을 한 사람은 안다. 고집스런 자기 확신만큼 타인에 대한 신뢰는 불안하게 흔들린다. 발 딛고 선 현실은 생각보다 복잡하고 어림짐작하기 어렵다. 지구 반대편에 사는 사람들, 우리가 잠든 사이 깨어 있는 불빛, 내가 굳게 믿었던 연인과 친구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않는 편이 낫다.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을 존재의 가벼움’을 느낄 때마다 ‘농담’을 던지는 대신 자기 ‘정체성’이 아닌 타자에 대한 오해를 점검하라고 조언하는 듯하다. 나는 누구인가, 만큼 중요한 ‘누구냐 넌?’

“밤새도록 스탠드를 켜 놓을 거야. 매일 밤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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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호실로 가다 - 도리스 레싱 단편선
도리스 레싱 지음, 김승욱 옮김 / 문예출판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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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이었다. 소설을 읽고 표지 그림을 찾아봤다. 화가 우지현은 그림에 관한 에세이를 쓴 작가이기기도 하다. <그리운 것들은 당신 뒤에 있다>라는 제목으로 전시회가 열렸었다는 사실도 뒤늦게 확인했다. 영화 「셜레 관한 모든 것」 포스터처럼 현대인의 고독에 침잠했던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Morning, 1952」이 언뜻 떠오른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우지현의 「어느 밤」은 로리스 레싱이 표현하고 싶은 단편의 이미지를 시각화하는데 성공했는지 알 수 없다. 주인공 수전의 내면을 드러내고 싶었을까. 소설에 묘사된 호텔을 시각화하는데 몰입했다는 이 그림은 의미가 퇴색했을 터. 창밖에 지는 석양은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매슈의 아쉬움이 짙게 배어 있다. 혼자만의 공간에 머물러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응시하는 뒷모습이 쓸쓸하지만 무기력해 보이지는 않는다.

유명 화가의 그림을 표지로 활용하는 민음사 세계문학 전집들과 달리 소설에 맞는 그림을 의뢰해서 책을 만든 출판사의 노고에도 박수를 보낸다. 그리운 것들을 모두 뒤에 남겨진 시간 안에서만 머문다는 우지현의 그림 주제도 좋다. 물론 수전은 지난 세월을 추억하거나 그리움 때문에 눈물짓는 여성은 아니다. 어쩌면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해결할 수 없는 평범한 여성의 경력단절, 육아와 자아의 충돌, 평온한 삶이 주는 권태, 무료한 인생의 지루함을 프레드 호텔 19호실에서 달랜 건 아니었을까.

버지니아 울프가 여성에겐 자기만의 방과 돈이 필요하다고 선언한 건 근대적 여성의 조건을 세상에 알리는 신호탄이 됐다. 물질적 토대와 자기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주체적 삶의 태도는 현대인에게도 삶의 필수 조건이다. 매슈와 결혼, 출산과 육아로 행복의 외적 조건은 갖추었으나 교외의 저택과 경제적 풍요가 수전에게 삶의 전부일 수는 없었다. 사랑이 식어버린 관계를 탓할 수만도 없다. 도리스 레싱이 단편 「19호실에 가다」를 통해 보여주려던 여성의 모습은 인간 일반으로 확대할 수 있다. 물론 수전이 처한 삶의 조건이 아니라면 19호실이 필요 없었을 지도 모른다. 남편 매슈는 다른 방식으로 자기만의 19호실을 만들었을 것이다. 다만 누구든 19호실은 필요하다. 존재론적 의미를 탐구하는 시간, 삶의 이유를 묻고 자기를 들여다보는 공간, 자기만의 방, 자기만의 동굴.

사랑하는 사람과 모든 걸 공유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모든 걸 알고 싶은 욕망이 불러올 부작용과 비극은 경험을 통해서만 배우게 된다는 아이러니. 누구에게나 비밀이 있다는 건, 양심과 죄의식의 문제가 아니다. 내밀하고 사적인 영역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오해와 불신이 쌓인다. 매슈와 수전이 공유하는 삶, 사랑하는 방식은 어쩌면 19호실과 무관하다.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우리에게 19호실이 필요한 이유는 너무 많다. 빈둥지 증후군을 겪는 여성의 일탈이 아니라 “이것은 지성의 실패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라는 첫 문장처럼 감상적 태도로 이해할 수 없는 삶의 부조리에 관한 이야기다.

소설 중간에 같은 문장이 세 번 반복된다. “그녀는 혼자였다. 그녀는 혼자였다. 그녀는 혼자였다.”(304쪽)가 그것이다. 남편과 세 아이의 엄마도 혼자다. 그녀는 혼자였고 여전히 혼자다. 그래서 “사실 그 방이 없으면, 나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야.”(328쪽)라는 고백이 가능하다. 어쩔 수 없다는 핑계와 외면이 한 인간의 삶을 피폐하게 한다. 개인적인 성향과 용기의 문제로 치부할 수도 없다. 세상에 수많은 책들은 우리에게 묻는다. 지금 괜찮으냐고, 그렇게 살아도 행복하냐고 그리고 당신만의 19호실은 어디 있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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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과 농담 말들의 흐름 7
편혜영 외 지음 / 시간의흐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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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구선수 김가영과 평론가 김나영은 자매일까?” 이런 말 같잖은 농담을 던져도 술자리라면 받아줄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물론 농담은 맥락이니 뜬금포를 쏘아 올려 시베리아 벌판이 되는 부작용도 감수해야 한다. 허용적 분위기에서 이완된 사람들은 주변에 실존 인물 다영이와 라영이를 호출하고 대한이와 민국이 형제를 등장시킨다. 믿기 어려운 이름에 얽힌 에피소드가 이어지기도 한다. 다음날 기억나지 않을 정도의 가벼운 농담 혹은 웃음들. 술과 농담은 아마 뗄 수 없는 친구가 아닐까 싶다. 잠시 슬픔과 고통을 웃음으로 위로하는게 민족의 특성이라는 말은 믿지 않지만 유쾌한 만남을 위해 농담은 생각보다 긴장을 이완시키고 관계를 진전시키기도 한다. 물론, 귀갓길의 허무와 숙취는 각자의 몫이다.

해 질 녘, 개와 늑대의 시간은 술과 농담의 시간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이 하루해가 저물 때만 술을 마시는 건 아니다. 이 책에도 숱한 낮술과 새벽의 혼술이 등장한다. 글을 쓰는 사람들의 특성을 감안해야겠지만 술과 농담 이야기에 옷깃을 여밀 필요는 없다. 에세이는 대체로 글을 쓴 사람에 대한 호기심과 글 자체의 여운이 관건이다. 편혜영과 조해진과 이장욱의 소설을 읽었으니 그들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고, 건조한 문체로 뛰어난 농담을 선보인 한유주의 소설을 읽어싶어졌다. ‘연애와 술’, ‘농담자 그림자’ 대신 말들의 흐름 시리즈 중 ‘술과 농담’을 집어 든 건 순전히 제목 때문이다. 가끔은 의미보다 재미를 찾는 독서가 위로를 건넨다. 술과 농담을 주제로 편혜영, 조해진, 김나영, 한유주, 이주란, 이장욱의 글을 모은 옴니버스 영화같은 에세이다. 유일한 평론가의 글이 재미없고 유일한 남자 소설가의 글이 너무 진지한 점을 제외하면 가볍게 읽을 수 있는 분량의 재밌는 에세이다. 술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술취한 원숭이』, 『양주 이야기』, 『알코올과 작가들』, 『어느 애주가의 고백』도 권할 만하다.

위대한 조상이 있느냐는 한유주의 질문에 아버지가 “한니발”이라 답한다. 로마 한씨냐고 묻자 카르타고 한씨 아니겠냐고 답하는 부녀의 모습을 상상하며 부러웠다. 때로는 관계를 망치지만 대개 농담은 경계를 허물기도 한다. 개그 코드가 맞는 연인이나 부부는 성격 차를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웃음 코드가 맞는 부모 자식 사이에 갈등은 극단으로 치닫지 않을 듯싶다. 발베니 21년산을 단 한 번 단 한 잔 마신 적이 있는데 그대로 죽고 싶었다는 한유주는 모두 농담이고 거짓말이라고 눙친다. 한유주와 발베니 한 잔을 마시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동동주, 과일주, 인삼주도 아니고 한유주라니 이름부터 술을 부르지 않는가. 모두 농담이고 거짓말이다.

술 속에 진리가 있다In vino veritas는 이장욱의 마무리는 사람들에게 술이 주는 의미와 숱한 에피소드, 알콜 의존과 중독, 질병과 죽음에 이르기까지 삶의 희노애락을 들여다보게 한다. 술 한 잔 마시지 않는 사람과 모든 음식이 안주인 사람 모두에게 술과 농담은 생각보다 가깝고 어렵다. 술이 농담을 부르기도 하고 농담이 술로 이어지기도 한다. 술이 없으면 농담을 못하는 것도 아니고, 농담 없는 술자리도 많다. 둘 사이가 어찌됐든 각자의 삶에 술과 농담은 무엇인지 낄낄거리며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다. 편혜영의 말대로 “술이 불어넣은 준 용기와 허세, 객기와 수줍음, 그대 발생한 우정”을 기억할 수 있다면 충분하다. 말 없는 술잔, 농담 없는 술자리에 오가는 훨씬 더 깊은 대화도 있다. 떡은 사람이 될 수 없어도 사람은 떡이 될 수 있다는 광고처럼 술에게 먹히지만 않는다면, 아니 때로는 떡이 된 순간이 찬란하게 빛나던 시절이었고, 그조차 망설여지는 무심함과 못난 마음이 더 커지는 시간도 흘러갈 뿐이다.

어떤 무심함은 세월이 흘러서, 라는 말로는 변명이 되지 않는다. 상대의 서운함이나 아픔에 눈멀게 하는, 늘 너무 비대한 못난 마음 때문에 결국 멀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 조해진, 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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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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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설 자리를 잃었다는 풍문은 사실일까. 누군가는 근대문학의 종언을 선언했고, 누군가는 스토리텔링의 시대가 도래를 확신했다. 그 많은 소설들 사이에서 독자들은 위로와 안식을 얻었으나 또 그만큼 현실 인식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외면과 회피의 수단으로 삼았다. 그러나 여전히 소설은 우리에게 시간을 뛰어넘고 공간을 가로지르며 꿈과 환상을 선물한다. 소설가는 여전히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 혹은 환멸을 느끼며 삶의 진실을 찾으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듯하다. 우리는 왜 여기에 혹은 거기에서 그렇게 말하고 행동했을까. 가면을 가리키며 걸어보라던 김연수가 자기 언어를 소진한 듯 이야기를 멈췄다가 오랜만에 소설집을 냈다. 평범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짧고도 긴 이야기를 담은 단편 8개가 바닷가 카페 문 앞에 걸린 풍경처럼 서로 다른 소리를 낸다.

시에 먼저 닿은 소설가라서 해서 특별히 언어에 대한 깊이와 태도가 남다르진 않다. 다만, 외부를 관찰하기 위해 연 창문의 크기는 남달라 보인다. 적당한 거리에서 타자를 바라보고 세상을 들여다보는 태도에는 대체로 연민이 묻어난다. 슬픔과 고통에도 찬란한 햇빛 한 조각을 묻혀 놓는다든가, 산산이 조각난 거울의 유리 파편이 뒤섞여 있는 느낌이 드는 문장이 독자를 사로잡는다. 반짝이는 슬픔과 모래가 씹히듯 서걱이는 이물감이 불편하지 않게 자리를 잡는다.

핍진성이 결여된 소설을 읽는 일은 고역이다. 예술의 영역에서 진실은 극히 주관적일 수 있다. 개연성을 바탕으로 직조된 허구의 세계에 단단한 내적 구조에 균열이 생기면 독자들은 몰입의 즐거움을 잃고 창조된 세계의 질서에 의문을 품는다. 김연수의 소설은 일관성 있게 ‘시간’의 문제를 꺼내 들고 통시적 관점에서 현재를 묻는다. 당신의 오늘은 괜찮으냐고. 내일은 걱정하지 말라고.

표제작 「이토록 평범한 미래」는 매끈하다. 1972년 10월을 시간의 끝이라고 부른 연인의 이야기. 아주 사소할지라도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살겠다는 결심하기만 하면 우리가 계속 지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는 이토록 평범한 미래인 오늘을 제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전언이 새삼스럽다. 「난주의 바다 앞에서」 부는 ‘세컨드 윈드’가 그렇고, 「진주의 결말」에서 제시한 희망의 방향이 그러하다. “꿈은 밤의 수족관이다.”(「바얀자그에서 그가 본 것」)라는 빅토르 위고의 짧은 문장이 헛된 희망 고문일지라도 어쩔 수 없다. 연약하고 불완전한 ‘나’ 자신을 견디고 견딜 수밖에 없지 않은가.

실패와 상실은 피할 수 없는 삶의 조건이다. ‘단 한 사람이 없어서 사람의 삶은 외롭다’는 진부하지만 사랑을 잃고 나는 쓴다는 기형도의 고백처럼 김연수의 상실감은 대개 특별하지 않은 연인과의 이별, 오래된 기억과의 결별에서 비롯된다. 고독보다 쓸쓸함에 가까운 서사는 실존적 위기가 아니라 일상적 슬픔을 담아낸다. 익숙하면서도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는 이야기로 여백을 채우는 김연수의 대중성은 딱 여기까지다.

아주 오랫동안 한 작가의 글들을 읽는 일은 기쁨이자 슬픔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어느 순간 지루해지듯 어떤 소설가든 연타석 홈런을 칠 수는 없다. 하지만 시인과 소설가에도 정년은 필요하다. 누군가는 절필을 선언하고 누군가는 현실에 안주하며 자연스레 문학을 떠난다. 또 누군가는 독자들에게 외면받고 누군가는 새로운 문장과 이야기로 새로움에 도전한다. 일관성과 변화는 양날의 검이다. 정호승과 김지하의 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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