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데이아, 또는 악녀를 위한 변명 환상문학전집 23
크리스타 볼프 지음, 김재영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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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의 재해석은 패러디라기보다 일종의 오마주가 아닐까 싶습니다. 현재적 유용성을 따지기 전에 우리에게 익숙한 고전은 인류가 공유하는 문화적 유전자인 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가 주는 재미, 서사를 통해 얻는 교훈, 인간 본성에 관한 성찰, 지나간 시간에 대한 추억뿐만 아니라 지금-여기 발 딛고 선 ‘나’를 위한 위로와 격려가 고전이 주는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고, 네 고통과 슬픔도 사실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라고, 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부과 권력도 언젠간 스러지고 생은 언제든 비극적 결말을 준비하고 있다고.

크리스타 볼프는 프랑스 문학이론가 제라르 주네트Gérard Genette의 ‘아크로니achrony(시간의 흐름을 무시하고 사건들을 동시에 일어난 것처럼 배열하는 이야기 방식. 비시간적 서술.)’와 ‘마트료시카матрёшка(하나의 큰 인형 속에 여러 개의 작은 인형들을 크기가 점차 작아지는 순서로 집어넣은 러시아의 전통 인형. 비옥한 토지와 다산을 의미. 러시아어 여자 이름인 ‘마트료나Матрёна’의 애칭.)’를 소개하며 소설을 시작합니다. 문제적 여인 메데이아는 자식을 죽였는가, 동생을 살해한 범인도 메데이아일까, 아버지와 조국을 배반한 이유가 단순히 이아손을 향한 사랑때문인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이 이어질 수밖에 없는 한 여인의 삶은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와 다른 버전의 이야기를 찾아 읽는 수고와 무관하게 독자 개인의 관점과 태도를 돌아보게 합니다.

평온한 일상일 때는 모릅니다, 한 인간의 본성과 내면을. 위기의 순간, 힘겨운 시절을 지나고 나면 알게 됩니다, 내 곁에 남은 사람을. 메데이아와 이아손도 다르지 않습니다. 아르고호 원정의 목적은 황금 양털이 아니라 이올코스의 왕위였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메데이아의 도움을 받아 황금 양털을 얻었으나 우여곡절 끝에 코린토스에 도착한 이아손이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로 끝낼 리 없습니다. 아버지 아이손이 잃어버린 왕권을 찾으려는 목적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아손의 어머니는 마미손이 아니라 알키메데입니다. 코린토스의 딸이 젊고 예뻐서가 아니라 자기 삶의 지향점을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는 이아손을 위한 변명은 비난받아 마땅한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쎈 언니의 대명사 메데이아가 눈뜨고 당할 리 없습니다. 이 과정에서 메데이아는 물론, 이아손, 아가메다, 아카마스, 글라우케, 로이콘 등 6명의 등장인물이 각각 제 목소리를 냅니다. 도대체 그때 코린토스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요.

소설의 원제는 ‘Medea, Stimmen’, 메데이와 목소리들입니다. 살로메, 유디트 같은 팜 파탈로 보는 관점에는 동의하지 않으나 메데이아의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태도에 대한 평가는 시대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모임에서도 주된 논의는 메데이아에 대한 재평가, 이아손에 대한 논란, 아카마스의 욕망 뿐만 아니라 신화의 역할과 기능에 대한 이야기들이었습니다. 평소 신화에 관심이 많고 배경지식이 풍부한 분이 사회를 맡아 논의가 풍성했습니다. 소설제목처럼 다양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무엇보다 작가가 바라보는 주관적 해석과 평가가 아니라 다양한 인물의 목소리를 통해 메데이아와 당시 상황을 입체적으로 상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익숙한 이야기를 보다 깊게 들여다보고 각자의 입장과 위치에서 서로 다를 수밖에 없는 수많은 변명 혹은 그럴듯한 상황을 읽는 시간이었습니다.

메데이아의 동생과 이아손 사이에 낳은 아이 둘을 과연 메데이가 죽였을까요, 코린토스의 공주까지? 제작비를 고려한 흥행 압박으로 에우리피데스가 막장 드라마를 쓴 건지 알 수 없으나 가장 강력한 캐릭터 중 하나인 메데이아는 입체적이고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여전히 매력적입니다. 키르케, 판도라, 카산드라 등 새로운 시각으로 재조명해 보고 싶은 인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모임을 마무리했습니다.

생명과 분별력을 가진 만물 중에 우리 여자들이 가장 비참한 존재예요. 첫째, 우리는 거금을 주고 남편을 사서 우리 자신의 상전으로 모셔야 해요. 이 가운데 두 번째 불행이 첫 번째 불행보다 더 비참해요. 다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얻는 남자가 훌륭하냐 나쁘냐 하는 거예요. 헤어진다는 것은 여자들에게 불명예스럽고, 남편을 거절하기도 불가능하니까요. 새로운 관습과 규범 속에 뛰어든 여자는 집에서 배운 적이 없으니, 어떻게 해야 남편을 가장 잘 다룰지에 관해 점쟁이가 되지 않으면 안 돼요.

- 「메데이아」중에서, 메이아의 독백(코로스에게), 230행~(38쪽)

에우리피데스가 쓴 비극의 일부입니다. 번역가 천병희는 “메데이아는 결론에서 인간을 움직이는 대립적인 두 힘은 격정thymos과 숙고bouleumata며, 이 가운데 격정이 숙고보다 우세해지면 그것이 곧 인간에게 재앙의 원인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라고 해석합니다. 과연 우리는 ‘격정’과 ‘숙고’ 중 어느 쪽에 무게 중심을 두고 살까요. 나이, 성별, 직업,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열정과 냉정 사이에서 망설이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메데이아의 목소리는 전혀 다르게 들릴 지도 모릅니다. 정답 없는 인생이라고 삶은 계속 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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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크 - 제28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김희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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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였을까. ‘그리움’이란 단어를 잊고 살았다. 잊고 사는 단어들을 떠올리는 순간이 온다. 제임스 W. 페니베이커는 『단어의 사생활』에서 “결국 우리는,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들의 총합이다.”라고 했다. 빈번하게 사용하는 단어가 바로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는 법이다. 그러니 한곳에 머물지 않고 흐르듯 사람도 변한다. 어제와 같은 나는 없다. 존재의 연속성은 단순히 습관과 기질 혹은 기억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비관적인 평가일지 모르나 모든 사람은 매일 죽는다. 그리고 매일 다시 태어난다.

그 허망함을 견디지 못한 인간의 최고 발명품이 종교다. 상상의 질서를 유지하는 종 특성을 설명하지 않아도 우리에겐 ‘믿음’이 내재한다. 대상이 무엇이든, 기간이 얼마든, 방법이 어떠하든. 김희재의 『탱크』는 종교소설이 아니다. 그러나 믿음의 이쪽과 저쪽을 다룬다는 점에서 해석의 다양성을 열어 놓은 좋은 소설이다. 소설의 탱크는 ‘Subconscious Tank(잠재의식 탱크)’의 준말이다. 텅빈 컨테이너 박스가 탱크 역할을 한다. 믿음의 대상과 종교적 도그마는 없다. 자기 자신을 믿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 필요할 뿐. 통렬한 자기반성이든, 현실적 욕망 실현의 기원이든, 미래를 향한 염원이든 상관없다. 중요한 건 자기만의 시간과 공간이다.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으로 데뷔한 김희재는 영화를 전공했다. 장면 전환이나 구성이 탄탄하고 인물에 대한 거리가 객관적이다. 서사는 기본이다. 재미없는 소설을 읽는 독자는 이제 거의 없다. 소설은 이제 ‘재미’로 경쟁이 불가한 대상이 너무 많아졌다. 과거에 누린 영광은 다시 돌아올 가능성이 없다. 나름의 역할과 기능을 찾지 않으면 텍스트 시대의 추억만 곱씹게 된다. 시나리오를 염두에 두지 않았더라도 이 소설은 흡입력이 높다. 등따시고 배불러 걱정 없는 인물이 소설에 등장할 리 없지 않은가. 실패와 좌절은 주인공의 필수 스펙이다. 문제는 일반화와 공감력이다. 도선과 둡둡과 양우와 황영경과 손부경과 강규산은 제 역할을 충실히 해낸다. 탱크를 향해 자기 서사에 충실하다.

그러나 개연성과 핍진성이 결여된 장면이나 표현은 홍범도 장군 영화 배경에 KTX가 지나가는 것과 같다. 회계사 시험 준비를 하는 황영경은 “내년에 시험 합격하면 나갈 세무사도 알아봤고.”라고 말한다. 1, 2차 시험 시기까지 확인한 작가가 왜 이런 표현을 수정하지 않았는지 편집과정에서 걸러내지 못했는지 안타깝다. 앞뒤 문맥을 몇 번이나 읽어봐도 당황스럽다. 춘천교대를 졸업한 손부경이 초등교사 임용시험에 계속 떨어지는 설정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지역별 경쟁률이나 합격률 등을 조사하지 않았을 리 없을 텐데. 옥의 티를 찾아내자는 게 아니라 재밌는 소설을 읽으며 잠시 몰입의 즐거움을 누리려던 욕심이 지나쳤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으려는 이기심 때문일 수도.

어쨌든 감각적 문장과 표현을 즐기는 소설과 결이 다르지만 문제의식과 고민의 깊이는 충분해 보인다. 소설도 취향이다. 좋아하는 작가도 제각각이다. 논픽션을 읽는 재미와 달리 소설에서 찾고 싶은 혹은 찾으려는 ‘쾌락원칙’에 대한 욕망의 모양과 부피가 조금씩 다르기 때문이리라. 적어도 내게는 충분했다. 입체적인 방식으로 인물과 사건을 배치한 구성뿐 아니라 인물에 대한 작가의 지나친 감정 몰입이나 감상적 태도가 없다고 느꼈다. 추천의 말에서 김건형은 “지리멸렬하고 상투적인 세속의 질서에 흡수되지 않도록, 고유한 자신을 유지할 수 있는 자기 수행의 형식에 대한 믿음.”이라는 말로 이 소설을 평가했다. 어차피 문학은 현실 너머, ‘세계의 바깥’을 향한 그리움이 아니겠는가.

소설에 썼듯 “모든 미래는 빠짐없이 과가 된다는 사실을 믿으며, 그 희망을 잃지 않기 위해 계속” 쓰시기를. 소설가 김희재의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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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대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9
윌리엄 골딩 지음, 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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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악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인간의 도덕 체계가 근본적으로 천박하다는 사실의 새로운 발견이다.” - E. L. 엡스타인

인간과 세상을 보는 상반된 시선은 어느 시대나 갈등과 충돌을 일으켰다. 긍정과 부정, 낙관과 비관, 희망과 절망, 기대와 실망 사이에서 사람들은 서도 다른 말들로 설득한다. 철학자, 사회학자, 소설가, 정치가 등 각자의 위치에서 현재를 살피고 미래를 전망하는 관점이 다르다. 같은 직업, 같은 시기에도 성향과 기질, 경험과 생각에 따라 인간 존재에 대한 평가, 사회 구성체의 향방이 엇갈린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을까.

인간은 언제든 ‘악’을 행할 수 있는 존재다. 생물학적 DNA나 이기적 유전자 때문인지 타고난 본성인지 알 수 없으나 지루한 성선설과 성악설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인간 ‘악’의 본성은 지울 수가 없다. 생존에 위협을 느끼는 상황이 아닐 때, 나와 무관한 일이어도 마찬가지다. 합리화할 수 없는 악행과 사건 사고가 없는 날은 단 하루도 없다. 법과 질서로 통제된 규율 사회가 악을 제거할 수는 없다. 인간 내면의 선한 아이가 숨어 있지만 그 아이들은 대체로 그 존재를 숨기거나 활동 의지가 없는 경우가 더 많다. 한 인간의 선악 갈등, 공동체 내의 선한 인간과 악한 인간이 뒤섞인 사회를 살면서 ‘인간의 도덕체계가 근본적으로 천박하다’라는 엡스타인의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책꽂이 한쪽 구석에 나란히 서 있는 에드워드 윌슨의 『인간 본성에 대하여』와 스티븐 제이 굴드의 『인간에 대한 오해』를 한참씩 쳐다본다. 생물학자가 바라본 ‘인간’은 데즈먼드 모리스의 말대로 ‘털 없는 원숭이’에 불과한 건 아닌지 모르겠다. 외딴 섬에 불시착한 소년들의 무리는 짐승에 가까운 본성을 드러낼 가능성이 크다. 겨우 초등학생 정도의 나이라면 합리적 이성보다 생존 본능이 앞설 가능성이 높다. 규율과 통제는 인간의 본성과 거리가 멀다. 법과 질서는 군집 생활의 효용 때문이다. 윌리엄 골딩은 이 소설을 통해 “인간 본성의 결함에서 사회 결함의 근원을 찾아내려는 것이 이 작품의 주제다.”라고 말했다. 인간은 완전하지 않다. 의도치 않은 실수를 하고, 누군가는 의도적으로 범죄를 저지른다.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는 상상에 불과하다. 인류는 한 번도 그런 공동체를 유지한 적이 없다. 그 이유가 근본적으로 인간 본성의 결함 때문이라는 윌리엄 골딩은 『파리 대왕』이라는 우화소설로 증명하려 애쓴다.

소설은 대립하는 두 소년 랠프와 잭을 통해 인간 본성의 어둠을 들여다본다. 도덕적 우화이자 정치적 우화소설로 읽으면서 개별 독자들은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하다. 인간과 사회의 본질에 대한 깊은 통찰이 이 소설의 미덕이라면 작가의 회의적이고 비관적인 인간관과 사회관에 대한 상찬과 비판이 엇갈릴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말대로 “가장 위대한 생각이란 가장 단순한 법이다.”(194쪽) 절망적인 공포 상황에서 인간의 본성이 드러난다. 자기 안에 숨어 있는 ‘악’이 발현되고 타인에 대한 태도가 드러난다. 사회적 가면인 페르소나가 없는 무인도의 소년들은 점점 본능에 따라 행동한다. 생존에 필요한, 약육강식의 논리대로 움직이는 인간 본성을 비난할 수는 없다. 파괴적이고 잔혹한 충동은 모든 인간의 내면에 숨은 기질일까.

도덕적 알레고리로 가득한 장편소설의 스토리는 단순하다. 점점 가열되는 폭력과 잔인한 행동에 놀랄 무렵 ‘어른’들이 섬에 도착한다. 영국 해군이 문제의 해결사로 등장하는 건 아니지만 소년들만의 세계는 끝이 나고 무인도에서 구조된다. 양계초는 인간이라면 ‘신독愼獨’에 힘써야 한다고 했다. 공적인 장소나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가 아니라 방안에 혼자 있을 때가 자신의 본모습이다. 신독은 혼자 있을 때야말로 삼가고 조심해야 한다는 의미다. 타인과의 관계와 시선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말과 행동의 주인으로 살려면 극기하고 신독하여 ‘악’의 본성을 억눌러야 한다는 충고가 아닐까 싶다. 소년들의 리더로 선출된 랠프는 “잃어버린 천진성과 인간 본성의 어둠과 돼지라고 하는 진실하고 지혜롭던 친구의 추락사가 슬퍼서 마구 울었다.” 지도자의 전형을 보여주는 주인공 랠프는 소년이라고 보기 어렵다. 우화소설의 특성상 개별 인물에 대한 몰입도는 낮고 개연성이 떨어지는 묘사가 많다. 행동이 둔하고 겁이 많으며 천식을 앓는 안경 쓴 ‘돼지’, 공포의 대상인 짐승은 소년들의 내면 모습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사이먼, 잔혹한 사형 집행인으로 친구를 고문하는 로저는 랠프나 잭 메리듀와 또 다른 모습으로 다양한 캐릭터를 잘 소화한다.

소설을 읽는 내내 한가지 거슬렸던 점은 번역문의 표현과 문장이다. 문학평론가 유종호의 번역은 가독성을 떨어뜨릴 때가 많았다. 현재 사용하지 않는 한자어, 우리말 어휘는 얼마든지 새로 번역하거나 손봐야 하지 않을까. 예를 들어, “귀쌈을 질러박았다” “납덩이 같은 감정을 치지도외하고” 같은 표현이 무인도에서 겪는 소년들의 심리와 행동 묘사에 어울리는지 의문이다. 얼마든지 편하고 쉬운 우리말로 번역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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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그말리온 열린책들 세계문학 176
조지 버나드 쇼 지음, 김소임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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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비법은 나쁜 매너, 훌륭한 매너 또는 어떤 특별한 매너를 지닌다거나 하는 게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똑같은 매너를 보여 준다는 데 있다. 마치 3등칸이 없는, 한 영혼이 다른 영혼과 똑같이 소중한 천국에 와 있는 것처럼 말이지.”

성격과 매너를 바꿀 수 없는데 말투와 억양을 바꿀 수 있을까. ‘미션 임파서블’의 에단 헌트처럼 무모한 도전에 내기를 거든 히긴스와 피커링의 승자는 누구인가.

신화는 인류의 꿈이자 희망이며 현실 너머 환상의 세계다. 불안과 두려움 없는 인생은 불가능하듯, 고난과 좌절을 겪지 않는 신화는 없다. 현실원칙을 넘어 쾌락원칙에 도달하려는 인간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누군가 이야기를 만들고 그 이야기에 또 다른 이야기가 보태져 거대한 신화의 세계가 탄생했으리라. 그래서 신화는 영원히 이루지 못한 꿈으로 아쉬움과 미련을 남기리라.

“우물쭈물 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라는 묘비명으로 유명한 극작가 조비 버나드 쇼가 소환한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이아는 희곡의 주인공 헨리 히긴스가 꽃파는 소녀 일라이자 둘리툴과 전혀 다르다. 목적과 태도 뿐만 아니라 개연성과 핍진성을 논할 수 없다. 신화는 신화이고, 희곡은 희곡일 뿐! 그러나 인간에겐 유사성을 토대로 비유와 상징을 즐기고 메타포의 감동을 즐길 줄 아는 DNA가 숨겨져 있다. 그것이 비록 왕의 DNA는 아닐지라도 신산스런 일상을 견디고 예술적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본능적 유전자에 해당한다.

피그말리온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키프로스의 조각가다. 나그네들을 박대한 키포스의 여인들이 아프로디테의 저주를 받아 몸을 팔게 되었고 피그말리온은 이를 탄식하며 독신으로 살았다. 현대판 전신인형의 탄생을 예고하듯 피그말리온은 상아로 아름다운 여인을 조각해서 함께 생활한다. 갈라테이아라는 이름까지 붙이고 옷도 갈아입히고 키스도 하고......진짜 연인처럼 살았으니 인터넷 가십뉴스에 나올만한 이야기다. 심지어 아프로디테 축일에 참가해서 진짜 여자로 변하게 해달라는 불가능한 소원을 빈다. 그러나 신화가 아닌가. 그 소원은 이뤄지고 백년해로하며 아들까지 낳았다는 이야기.

형식은 로맨스를 예상하지만 사족처럼 붙은 후일담에서 밝히듯 이 작품은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는다.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이아는 인간의 헛된 꿈과 욕망을 실현하며 대리 만족을 느끼게 하지만 조지 버나드 쇼는 신랄한 풍자와 비판의 대가다. 당대 영국의 신분 제도와 교육, 경제 문제 등을 다룬 이 연극이 뮤지컬, 영화 등 다양한 장르로 변용되어 사랑받는 이유는 빈민가 소녀를 통해 런던 상류 사회를, 인간의 허위의식과 사회적 가면을 폭로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언어학자인 히긴스는 끝까지 거리에서 꽃 파는 소녀 리자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관객의 기대와 예상을 벗어나지만 그것이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며 사적인 로맨스를 넘어 당대 사회에 대한 풍자와 해악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마치 우리 판소리처럼 걸쭉한 입담과 19금 개그가 난무하지는 않지만 히긴스의 냉소적 태도와 무례함이 피커링의 매너와 비교되어 상류사회의 빛과 그림자를 들여다보는 듯하다.

리자의 아버지 둘리틀은 중산층 도덕률에 대해 묻는다. 비보호대상 빈민에 해당하는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며 히긴스에 속물근성을 드러내지만 그것이 둘리틀 개인의 인성이 아니라 영국사회의 구조적 문제라는 점을 조지 버나드 쇼는 분명히 드러낸다. 보편적 복지와 차별적 복지의 프레임 전쟁으로 시끄러운 진영논리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복지란 무엇인지, 그 지향점과 목적지를 분명히 점검해야 하는 상황의 대한민국의 오늘을 돌아보는 데까지 나아가면 지나칠까.

전체 5막으로 구성된 희곡은 서문과 후일담이라는 사족이 길다. 연극이라는 제한적 장치로 다 드러내지 못한, 자신의 생각과 의도를 자세히 설명하는 TMI가 너무 많다. 하지만 희곡은 지루하지 않으며 내용은 진부하지 않다. 여전히 세련된 작품으로 읽고 볼 수 있을만큼 시대를 앞선 듯 인간의 욕망과 내면을 잘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신화에서 이름과 모티프를 가져왔으나 피그말리온이나 갈라테이아의 재해석이 아니라 그들과 전혀 다른 인간 세계의 히긴스와 리자 이야기라서 더욱 매력적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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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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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램이 오죽하면 글겄냐. ‘오죽’해도 사람이 다 그런 건 아니다. 그러니까 사램이 오죽하면 글겄냐는 너그러움과 태도는 고아리의 아버지 개인적 성향이다. 그것을 사회주의자가 인간을 향해 갖고 있는, 혹은 가져야 하는 민중에 대한 믿음과 사랑일 수는 없다. 바보처럼 순진하고 따뜻한 사람의 면면이 드러나 보는 사람의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이 소설의 실제 주인공 ‘아버지’는 우리 모두의 아버지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소설을 읽는 동안 내 아버지가 떠올라 눈물이 났다.

그(?) 시대를 다른 방식으로 견뎌야했던 분들의 신산한 삶이 어디 소설 한 두권 안되는 사람이 있을까마는 우리 현대사의 트라우마로 남아 있는 6.25 전쟁을 겪은 분들의 이야기는 조금 다르다. 오로지 생존을 위해, 유일하게 군대에 보내지 않기 위해 아들을 사범학교에 보낸 할머니 덕에 내가 존재한다. 희박한 비율의 생존확률을 뚫고 살아남은 아버지 덕에 그분의 삶을 전하는 빨치산의 딸 정지아도 자기 존재의 근원을 밝히려 이 소설을 쓴 건 아닐 게다. 절절한 사부곡思父曲이 되어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린 이유는 그 어떤 이데올로기의 갈등도 좌우대립도 올곧은 신념도 아닌 아버지와 딸의 이야기가 바탕을 이루기 때문일 것이다.

여전히 빨갱이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한국 사회는 아무렇지도 않게,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대통령을 향해 빨갱이나 간첩이라고 짖어도 될만큼 민주화된 시대를 살고 있다. 그 이면에 숨은 두려움과 공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 원한과 감정 너머 현실을 살필 합리성이 결여된 비난들이 나는 오히려 더 무섭다. 이념에 매몰된 시선은 인간에 대한 예의를 잃고 그 이념이 지향하는 목적지를 상실하기 마련이다. 겨우 장만한 집 한 채 세금을 덜 내고 싶어 투표했다는 후배나 집값이 너무 올라 화가나서 투표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당선된 대통령의 능력과 됨됨이에 국한 문제가 아니다. 또 다음에 누가 대통령이 되든, 내년에 어느 쪽이 다수당이 되든 마찬가지다. 인간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태도가 결정된 사람들의 단단한 논리를 깰 능력은 아무에게도 허락되지 않는다. 그 길에 이르는 개인적 경험, 합리화 과정도 제각각이다. 소설은 관계의 단절을 가져오는 종교와 정치 이야기와 무관하게 사회주의자 ‘뽈갱이’였던 한 아버지의 삶을 돌아본다.

장례를 치르는 3일동안 찾아오는 사람들과 아버지의 인연 그 머나먼 현재와 과거의 이야기가 긴 조사弔詞처럼 딸의 입을 통해 전해진다. 슬픔과 고통을 웃음으로 승화시킬 줄 아는 민족답게 해학으로 가득한 표현 속에 정지아의 슬픔은 더욱 짙게 배어나온다. 모든 자식이 부모에게 갖는 마음이 같지 않듯, 모든 부모도 자식에 대한 마음이 같지 않다. 본능은 관계 속에서 다른 형태의 감정을 만든다. 부모와 자식 관계도 서로에 대한 말과 행동과 태도에 따라 각자 다른 모습으로 형성된다. 지나친 일반화의 오류로 고아리와 아버지의 관계를 규정할 수 없다. 그 관계의 특별함이 이 소설의 독특한 아우라를 빚는다.

비전향 장기수 허영철의 삶을 구술한 『역사는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를 읽다가 흐르는 눈물을 참지 못한 기억이 떠올랐다. 1955년에 수감되어 1991년에 석방될 때까지 무려 36년간 세상에서 배제된 한 인간의 신념과 이데올로기 따위는 궁금하지도 않았다. 동시대인으로 헌법에 보장된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억압한 시대를 함께 살아온 동시대인의 참담함 때문이었다. “나는 당신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지만, 당신이 그것을 말할 권리는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 지켜내겠다”고 외쳤던 볼테르의 말에 대한민국은 동의하지 않는다, 여전히. 지식의 가장 큰 죄는 침묵이다. 이런 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으나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뽈갱이’에 대한 적개심과 ‘전라디언’에 대한 혐오를 버리지 못하는 외눈박이로 살아간다. 그들이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구별짓기는 계층 사회의 보이지 않는 거리두기가 아니라 뼛속까지 스며든 무지의 오류이거나 극단적 편견의 전형이다. 차별하는 사람은 반드시 차별받기 마련이다. 아니 차별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차별하기로 실천하는 비겁함은 아닐까.

혼자만 잘살믄 무슨 재민겨, 라던 전우익 선생의 말이 소설 속 아버지의 ‘항꾼에’에 담겨 있다. 너와 나는 다르다. 우리는 서로의 이익과 생각과 감정이 일치할 때만 성립되는 교집합이다. 혁명에 실패한 자들의 변명은 성공한 자들의 후일담보다 길고 지루하다. 각자의 ‘선’이 달라 참고 견디지 못하는 기준과 영역도 다르다. 그래서 부와 권력을 가진 자들에 의해 대개 세상이 움직여지고 인재임이 분명한 사고에도 책임은 아랫 것들의 몫으로 남는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그들을 응원하는 사람들이다. 일시적으로 부와 권력이 있을 뿐 미래의 권려과 부는 자기 것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일까. 그들은 왜 그들을 옹호하고 응원하는가. 놀랍지만 그 비밀을 아는 자들만 출세에 성공하고 미련스럽게 민중에 대한 믿음과 짝사랑을 앓는 사람들이 고아리의 아버지처럼 사회주의를 꿈꾸는 건 아닐까. 아니 그리 거창한 이념과 혁명이 아니더라도 더 나은 세상, 더불어 함께 잘 사는 세상을 희망하는 건 아닐까. 슬프고 재밌는, 눈물과 함께 읽은 나의 아버지와 고아리의 아버지 이야기가 혼재했던 이야기를 오래 잊을 수 없을 듯하다. 문학적 감동은 소설의 개연성과 핍진성이 아니라 독자 개인의 삶과 닿는 접점과 인물에 투사된 감정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끝까지 읽지도 못할 소설이 누군가에게는 눈물 범벅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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