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과 자본주의
김영민 지음 / 늘봄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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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분이 지나고 나면 해가 길다. 특히 하지 부근의 저녁 어스름은 글자 그대로의 ‘산책’을 하기에 맞춤한 시간이다. 길 건너 편 중앙공원에 들어서면 산길을 절개해서 도로를 만들고 도심의 숲을 고립시킨 작위적 공원을 만날 수 있다. 공원을 중심에 두고 사방은 빽빽한 아파트 숲이다. 나무의 숲과 고층 빌딩의 숲은 서로를 원망하며 그로테스크한 모습으로 우리들의 우울한 자화상을 보여준다. 도시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도심의 공원들은 인공의 섬이 되거나 본래의 모습을 잃고 길 잃은 아이처럼 콘크리트 숲 속을 서성인다. 그 산길 구석구석을 개미처럼 걷는 사람들, 작은 호수가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사람들, 광장에서 자전거를 타거나 인라인을 타는 꼬맹이들과 마주하는 일상은 흔히 볼 수 있는 도심의 생활이다.

  현대 사회에서 ‘산책’이라는 호사를 누릴 수 있는 계층은 그리 많지 않다. 일선에서 은퇴한 노인 계층이 아니라면 하루하루가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어디서 걸을 것인가? 어디를 향해 누구와 걸을 것인가? 목적 없이 홀로 걷는 여유로움은 자본주의 사회를 견뎌내야 하는 사람들에게 행복한 사치이다. 붕어빵처럼 비슷한 가족의 모습으로 주말에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 속에 서성이다 보면 자본주의 사회의 행복은 공식화 되어 있고 여가를 즐기는 방법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저절로 습득하게 된다. 독서 후에 목적도 방향도 없이 사색의 즐거움을 배가시키는 산책과 적당한 대화가 가능한 노을 지는 저녁 어스름은 과연 사치인가?

  철학자 김영민은 산책을 ‘전일화한 자본주의적 삶의 양식을 배경으로 해서만 성립하는 어떤 태도와 실천’이라고 말한다. 한마디로 ‘산책’이 불가능한 사람들이 많다는 이야기이다. <동무와 연인>을 읽고 탄력 받아 주문한 책이 바로 <산책과 자본주의>이다. 이 책은 문화비평서이다. ‘문화비평은 역사학과 사회학이 겹치는 그 첨단의 지점에서부터 오히려 삶의 조직 속으로 가장 깊이 들어가려는 감수성’이라고 정의하는 저자의 말에 귀 기울여 본다.

  <사랑, 그 환상의 물매>(2004)라는 근사한 제목의 책도 구미가 당긴다. 나는 개인적으로 김영민의 문장들을 신문의 칼럼이나 짧은 글들로 만나왔다. 긴호흡으로 읽어가는 맛은 확실히 다르다. 내게는 사유의 물꼬를 트여줬고 한 문장을 반복해서 읽는 즐거움을 전해주었다.

  짧은 글들이 모여 하나의 주제를 드러내는 구성을 취하지 않고 오히려 짧은 글들이 모여 제각각 다른 소리를 내지만 독자는 하나의 큰 흐름을 짚어 내거나 저자의 말하기 방식을 통해 소통하게 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청계천이나 명절, 핸드폰, 비만, 전두환, 5.18, 인문학, 표절, 사랑, 혼인 등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상사를 통한 문화 비평이면서 철학적 사유를 시도한다. 숱한 사상가들을 인용하고 그들의 핵심 개념들을 통해 대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방식은 낯설지만 통쾌하다.

  대단히 직관적인 사물과 상황에 대한 인식 태도를 보여 주기 때문에 은유적이고 감성적으로 접근하기도 한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직설적이고 차분한 논리로 그것들을 해체하고 분류하며 기저의 흐름을 꿰뚫어 분석을 시도한다. 대체로 통쾌하고 유쾌한 느낌의 문장들은 군더더기가 없고 지나치게 매끈하며 지나치게 관념에 기대고 있기도 하지만 논리적이다.

  가벼운 문화 비평서로 읽히지만 뒷맛은 진한 에스프레소를 닮았다. 비평의 조건에 해당되는 여건도 안되는 건 아닌가? 우리의 삶이 말이다. 산책조차 불가능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불성설일지도 모르는 말들을 쏟아내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철학적 인간과 일상적 인간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사유의 힘과 능력이 현실에서 발현되지 못하는 안타까움과 분노는 긍정적인가? 끊임없이 던져지는 질문과 선택의 방식들에 고뇌하는 영혼의 그림자를 밟으며 오늘도 산책하고 싶은 욕망만은 통제 불가능이다.

  하버마스의 말대로 ‘의사소토의 구조가 뒤틀린 탓에 생화세계가 식민화되었다’.  혁명이 배신당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비애는 온몸으로 거부하기 힘들다. 내가 너이고 네가 나인 시대인 것이다. 자기 부정을 통해 긍정에 도달하지 못하는 암울한 시대를 살고 있다. 때때로 가슴 속의 쌓인 넋두리와 울분을 토해내는 일은 이렇게 보이지 않는 컴퓨터 모니터 화면 뒤의 악마의 얼굴이지도 모른다. 나는 누구인가?

  근원적인 존재론적 질문에 당면한 인간은 불안하다.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사람이 아니라면 일단 정지, 전원을 내린다. 자본주의를 산책하는 김영민의 방식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와 함께 한 번 쯤은 산책을 권하고 싶다. 그의 방식은 때때로 무념무상한 일상의 틀에 대해 작은 질문을 던질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렇게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다. 책장을 덮기 전에 고백하는 저자의 한마디는 ‘아, 찔레꽃’이다. 아, 봄날은 간다! 이렇게.

나는, 그렇게, 몇몇 인간들을 그리워하였고, 훈련을 통해 마침내 그리움을 끊었으며, 그 여력으로 아무런 생각 없이 찔레꽃으로 사랑하였다. - P. 255


080514-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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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도 2008-05-16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처를 아는 자에게는 어떤 역사도 미학이 될 수 없다. (상처를 미학으로 처리하려는 모든 태도는, 그 근본에서 파시즘!)역사를 미학으로 꾸미는 짓은 몰락하는 특권층의 비극적 감상주의일 뿐이니, 차라리 그것은 정치학이거나 생물학!

모욕과 상처의 기억은 단순히 기억이 아니라 여전한 폭력이다. 왜냐면 상처의 기억은 곧 기억의 상처이기 때문이다.

요컨데 보이지 않는 '마음'으로 자의적 분란의 늪을 만들지 말고, 그냥 살과 말을 더 공대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전략이다.

연인들은 '마음'을 챙기느라 '언어'를 늘 혹사한다. 그래서/그러므로 그 언어의 반란에 직면할 수밖에 없고, 결국 벼랑 끝에 떠밀리고 나서야 비로소 꿍쳐 놓았던 '마음'을 호출하지만 알고 보니 호출부호가 없었다!?(얘들아, 도대체 얼마나 얘기해야 하겠니? '마음'을 저리 밀쳐 두고 '피부'와 '언어'로써 연애하라지 않든!? 그 연하고 순한 것이 불쌍하지도 않든!?)

-사랑, 그 환상의 물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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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모르는 철학용어들이나 한자어들이 많이 쓰였네요.
사실 어려운 글은 별로 안좋아하는데
문장 하나 하나의 밀도가 높고 사유가 빛나고 있어서
님의 말처럼 반복해서 음미하게 됩니다.

귀엽기도 해요.^^

sceptic 2008-05-21 20:56   좋아요 0 | URL
그냥 살과 말을 더 공대하는 것이 현명하다...그렇죠? 피부와 언어로 연애해야죠...공허한 마음에 기대지 말고...^^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패러독스 1
피에르 바야르 지음, 김병욱 옮김 / 여름언덕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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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의 출판된 책의 절반만 팔리고 팔린 책의 절반만 읽히고 읽힌 책의 절반만 이해되고 이해된 책의 절반만이 소화되어 지식으로 남는다는 말은 책의 운명에 대한 가장 정확한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일생 동안 얼마나 많은 책을 읽는가? 아니 얼마나 책을 읽지 않는가? 책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현존하는 인류의 절반 이상은 글자를 알지도 못할뿐더러 책을 읽지도 않는다. 1년에 한 권 이상의 책을 읽는 사람은 전 인류의 몇 퍼센트나 될까 궁금하다. 책을 읽는 것과 읽지 않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오늘날과 같은 문명의 발달은 지식의 축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으며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책이라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의 과학 기술은 책보다 훨씬 효과적인 방법으로 지식을 생산, 축적하고 우리는 어느 시대보다도 더 빨리 더 쉽게 얻을 수 있다. 그렇다면 책의 미래와 운명은 어떠한가?

  끝없는 의문들이 꼬리를 물고 책의 효용에 대해 회의하게 된다. 피에르 바야르는 바로 이 질문들에 대해 책으로 답한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이라는 다소 도발적이고 장난스러울 것 같은 제목의 이 책은 진지하고 성찰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저자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책을 썼단 말인가?

  우리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책의 노예가 되어 살아왔다. 전통적으로 독서의 중요성을 유교 문화권만큼 강조한 곳도 없을 것이다. 독서가 곧 공부였다. 지식을 얻고 세상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책을 통해서였다고 하면 과장된 말일까? 유아나 어린이용 출판시장은 급속히 성장했다. 중, 고등학교생들은 책을 읽지 않는다. 공부를 하기 위해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성인들도 책을 읽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다. 선택 능력이 부족하고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책을 읽히는 부모가 늘면서 아이들에게 독서는 필수가 되었다. 초등학생용 책에도 ‘논술을 위한~’ 어쩌구 하는 문구가 붙어있는 것을 보면 한심스러울 따름이다.

  그렇게 일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늘 책에 대한 부담과 공포와 죄책감을 경험한다. 책에 대한 콤플렉스는 죽을때까지 계속된다. 특히 꼭 읽어야 하지만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이라는 장난스런 정의가 어울리는 고전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독서의 양이 곧 교양이 될 수는 없다. 어떤 책을 어떻게 읽었으며 어떻게 활용했는가에 대한 질문에 나름의 소신과 논리로 답변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이 오래된 질문들에 대해 자신있고 당당하게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을 주장한다. 비독서는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한다. 책을 전혀 읽지 않은 경우(Unknown Book), 책을 대충 훑어보는 경우(Skimmed Book), 다른 사람들이 하는 책 얘기를 귀동냥한 경우(Heard Book), 책의 내용을 잊어버린 경우(Forgotten Book)로 나눈 저자의 분류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여기서 책을 대충 훑어보는 경우와 책의 내용을 잊어버린 경우는 책을 읽지 않았다고 보기 어렵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어떤 책을 읽지 않았다는 것은 그 책의 내용을 모른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저자의 분류법에 따른 SB와 FB는 읽은 책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독서의 방법은 읽는 사람의 목적에 다양하게 전개된다. 저자는 SB와 FB의 경우 ‘정독’을 하지 않은 책으로 분류하는 것이고 우리가 흔히 읽지 않은 책으로 분류하는 것은 UB와 HB로 볼 수 있다. 어쨌든 내면의 독서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모두 읽지 않은 것이다. 저자는 이 책들에 대해 담론 상황에서 자신 있고 당당하게 대하라고 충고한다. 사교 생활이나 선생 앞에서 그리고 작가 앞에서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궁금해지기 마련이다. 이 책은 결코 간단하고 만만한 방법들을 전해주지 않는다.

  요약된 대처 요령을 전해준다. 부끄러워하지 말 것, 자신의 생각을 말할 것, 책을 꾸며낼 것, 자기 얘기를 할 것 등 네 가지로 요약된 대처 요령은 이 책의 진수를 보여준다. 과연 책을 왜 읽어야 하며 읽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무엇인가? 책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어떤 목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진지한 고민을 통해 저자와의 대화를 시도해 볼 일이다.

“나는 내가 논해야 하는 책은 절대 읽지 않는다. 너무 많은 영향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 오스카 와일드(228페이지)

  얼마 전 김성동과 김성종을 구분하지 못해 개망신을 당한 대학 교수 문학평론가의 일화가 떠오른다. 차라리 읽지 않았다면 오스카 와일드의 말처럼 냉정하게 정확한 평가가 가능했을까?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책들의 양에 비교해 본다면, 우리가 일생 동안 읽는 책의 양은 부끄러운 지경이다. 양이 문제가 아니라 질이다!라는 선언이 무색한 읽지 않은 책에 대한 이야기는 가히 충격적이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가 방점을 찍고 싶었던 대목은 어떤 책을 읽었는지 여부가 아니라 그 책들을 통해 성찰하고 우리들 삶의 가치를 새롭게 만들어 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고민이다. 한 발 더 나아가 읽지 않은 개별적인 책들이 아니라 그 책이 내면의 도서관 전체에서 차지하는 총체적 가치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것이 화면의 책(도서관)이든 내면의 책(도서관)이든 잠재적인 책(도서관)이든 관계없이 우리의 삶을 보다 풍요롭고 가치 있게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이며 어떤 태도와 방법이어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해 보자.

  독서는 과연 시간의 낭비에 불과한가? 읽은 사람과 읽지 않은 사람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불완전한 독서와 비독서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 정독한 책 건너편에 자리 잡은 모든 책들에 대한 열망과 호기심, 그것들이 가진 가치에 대한 올바른 평가와 자신감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책에 대한 진면목에 대해 깊이 있게 고민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질문에 쉽게 답할 수 없다. 저자는 진짜 비독서가가 아니다. 저자만한 비독서가가 되려면 책을 읽는 것 보다 더 진지한 사색과 총체적인 통찰력이 요구된다.

  단순히 책을 읽지 않고 다른 사람을 현혹시키는 싸구려 기술 습득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며 이 책에서 손을 떼야 한다. 앞서 말했듯이 이 책은 누구보다도 책에 대한 애정과 관심과 열정이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이렇게 오만한 책을 쓴 저자의 목적이 어디 있겠는지 잠시만 생각해 봐도 답은 금방 찾을 수 있다. 더불어 이 책의 갈피갈피에 숨어 있는 저자의 의도와 노력들을 만날 수 있다면 책에 대한 또 다른 태도와 방법을 스스로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080513-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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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가문의 쓴소리 - 이덕무 <사소절(士小節)>, 이 시대에 되살려야 할 선비의 작은 예절
조성기 지음 / 김영사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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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는 무엇을 경계하며 살아갈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삼가는 걸까? 예절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지켜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질서의 다른 이름이다. 함부로 행동하지 않고 타인을 배려하며 나를 절제하는 일은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조건이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는 ‘인간에 대한 예의’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렵지만 이기적이고 무례한 사람들은 점점 많아진다. 범위를 조금 넓혀 가족 이기주의가 예절과 삶의 토대를 형성하는 기본 틀로 작용한 것이 근대 이후라고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그것이 절대 가치가 되어 버렸다.

  예절은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하는 법이다. 그 형식과 내용을 구별할 수는 없고 형식이 내용을 구속하기도 하지만 습관이 되고 그것이 행동을 변하시키고 인생을 살아가는 기준이 되려면 온몸으로 실천해야 한다. 특히 작은 예절을 지키지 않으면 타인은 물론이고 나를 온전하게 세울 수 없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내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라는 것을 선조들은 책 속에서가 아니라 실천적 삶을 통해 체득했을 것이다. 우리는 그 가르침에 귀 기울이고 고개를 끄덕이며 반성의 거울로 삼는다.

  영, 정조 대문장가인 박지원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한 사람이 이덕무이다. <사소절士小節>은 작은 예절의 소중함을 일깨우기 위한 훌륭한 저서이다. 선비의 작은 예절이라는 뜻의 제목을 달고 있지만 선비의 가정에서 지켜야할 예절 모음집이다. 이 책을 소설가 조성기가 <양반 가문의 쓴소리>라는 제목으로 해설을 달았다. 말하자면 이 책은 조성기의 <사소절> 해설집이다. 그래서 몇 가지 장점과 몇 가지 단점을 함께 가지고 있다.

  성품과 행실에 관한 교훈인 성행性行, 언어생활에 관한 교훈인 언어言語, 의복과 음식에 관한 충고인 복식服食, 행동거지에 관한 충고인 동지動止, 기타 삼가야 할 것들인 근신勤愼 편으로 나뉘어져 있고 하나하나 항목화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박지원의 <양반전>에서 양반의 법도와 권한을 듣고 “나, 양반 안해!”라고 외쳤던 사람의 심정을 헤아려 보자. 만약 그 사람이 이덕무의 <사소절>을 보았다면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까무라쳤을 지도 모르겠다. 선비로 살아가는 일은 겉으로 드러난 형식과 격식의 틀에 매여 살아야 함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얼마나 스스로의 생각과 행동을 엄격하게 다스리고 통제하며 삼가고 또 삼갔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은 이덕무의 생애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가벼운 책이다. 스스로 그렇게 살았을 것이고 그것을 권면하는 책이니 이덕무의 입장에서 보면 일상생활에서 반드시 필요한 ‘실용서’를 쓴 셈이다.

  지금의 관점에서 읽다보면 오히려 웃음이 나고 재미있는 부분들도 많다. 특히 복식과 행동에 관한 충고들은 당시의 풍속과 일상을 상세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된다. 성품과 행실, 언어생활에 관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방법과 태도가 조금씩 변했겠지만 그 근본정신과 타인에 대한 기본적인 배려는 고스란히 남아있다.

  ‘머리의 좋고 나쁨에 구애되지 말라, 뜻을 다하여 목표를 정하라, 정성을 기울여 날마다 부지런히 정진하라, 올바른 정신을 소유하도록 하라’는 것은 공부하는 기본자세에 대한 충고이다. 공부하는 사람들이 갖추어야 하는 기본자세는 하나도 달라지지 않은 것이다. 월급을 물으며 축하하지 말라는 충고나 음식이 차려지면 지체하지 말고 먹으라는 충고, 약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놀리지 말라는 충고, 근거 없는 말을 퍼뜨리지 말라는 충고 등은 현대인들도 뼈에 새겨 들을만한 충고이다.

  영조의 탕평책으로 규장각 검서관이 될 때까지 아니 그 이후에도 서출이라는 신분의 제약과 무관하게 책 속에서 진정한 자유를 찾아 스스로 ‘간서치’ 불렀던 이덕무. 방안에 들어온 햇빛을 좇아 책상을 들고 옮겨 다니며 하루 종일 책을 읽었다는 고리타분한 서생 이덕무. 그가 말한 선비는 돈과 권력의 정점에 서 있는 벼슬아치를 말한 게 아니었다. 소박하고 평범한 일상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지켜야 하는 기본적인 예절들과 ‘선비’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마음가짐과 행동거지에 대한 사소한 충고들이다.

  어찌보면 지루하고 쪼잔한 잔소리쟁이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에게 ‘선비정신’이라는 게 있다면 정신세계에 면면히 흐르는 거대 담론으로서의 사상이 아니라 이렇게 일상에서 마주할 수 있는 실천적 지식인으로, 생활인으로 진솔한 모습을 보여주었던 이덕무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그는 갔지만 그나 남겨 놓은 정갈하고 깨끗한 정신은 살아 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자유와 제멋대로를 구분하지 못하는 우리 모두의 행동들을 돌아 보았다. 조선시대 냄새나는 생활규범이 아니라 오래된 미래가 보여주는 우리의 정갈한 생활 풍속을 오늘에 되살려 보는 것은 남다른 의미가 있다.

  느닷없이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에서 유사한 내용들을 끌어다 붙이고 인용하는 저자의 종교적 색채만 아니라면 깔끔하게 읽을 수 있었던 책이다. 오래 곁에 두고 생각날 때 마다 조용히 읽어 볼 만하다. 인간에 대한 예의와 사소한 법도가 시대가 흐른다고 해서 얼마나 달라지겠는가.

  ‘생긴 대로 살고 싶다. 내키는 대로 행동한다. 다른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난 나다. 편한 게 최고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이 책을 피해 가야 한다. 숨통을 조이는 올가미로 여겨질 테니 말이다. 그렇지 않다면 한 번쯤 그 시절을 상상하며 이 시대와 비교하며 시간의 흐름을 확인하고 예절의 의미를 돌아볼 수 있는 책으로 가볍게 읽어볼 수 있겠다.


080429-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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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무와 연인
김영민 지음 / 한겨레출판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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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곁에 두고 오래 사귄 벗을 친구라고 한다. 동무는 무엇이라고 규정될까? 단순히 정서적 동반자를 동무라고 부를 수는 없다. 동무는 스승이자 친구이고 연인이다. 말과 살의 관계처럼 동무와 연인은 쉽게 단정 지어 그 관계를 말할 수는 없다. 그저 함께 걸어가야 할 동행이며 사상적 동지이자 거처이다. 연인과 동무는 멀리서 그리워하다가 하나로 겹쳐져 같은 사람이 되기도 한다.

  교수였다가 스피노자의 삶을 선택한 철학자 김영민의 <동무와 연인>은 신문 칼럼 모음이지만 최근에 읽은 가장 인상 깊은 책이다. 깊이와 넓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 할 만큼 매력적이다. 지극한 상찬이 이어져도 지나치지 않겠다. 이 책은 스물 한 명의 서른아홉 명을 소개한다. 한 개인과 개인과의 관계를 묶어 그들의 관계가 동무이며 연인이고 친구이자 스승이었음을 증거한다.

  보부아르와 사르트르로 포문을 여는 저자의 이야기는 문장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다. 점착인 문장은 다음 문장과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하나의 단락은 완벽한 의미의 덩어리로 살아 움직인다. 글쓰기 교재로도 손색없을 만큼 잘 다듬어져 있으며 탄탄하고 긴장감 넘치는 필력을 보여준다. 이덕무와 박제가 하이데거와 아렌트, 프로이트 융, 윤심덕과 김우진, 매창과 유희경 등 동서양은 물론 고전과 현대를 넘나들며 팀을 이루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통해 그들의 말과 살과 삶을 통해 세상을 보여준다.

  쇼펜하우어와 그의 어머니 요한나의 관계나 비트겐슈타인과 그의 애인들의 관계, 에밀 졸라와 드레퓌스의 관계처럼 특이한 경우에 더 눈이 가는 것은 단순한 호기심에서가 아니라 다. 생의 비극과 열정, 부조리에 대한 보편성에 대한 성찰 때문이다. 지금도 어디선가 그리고 누군가 반복하고 있을지 모르는 이 관계들은 이 책을 통해 배우는 게 아니라 그것들을 사물화하고 객관하며 하나의 유형을 만들어가기도 한다. 인간관계의 유형화는 애당초 불가능하다. 비슷한 경우의 수를 더듬어 볼 뿐이다. 이 책은 그것을 제공해 주고 있는 걸까?

  역사에서 눈에 띠는 특별한 관계들을 고찰하는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근원적 탐색으로부터 시작된다. 이성과 감성은 말과 살로 분해되고 나와 세상은 관계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무엇이 남는 걸까? 보부아르에게 죽음이란 ‘다시는 내게 말을 걸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사르트르가 죽음 앞에서 그녀가 가장 슬퍼한 것은 ‘그의 말을 더 이상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고 하는 말을 다시 되새겨 본다.

 ‘연인의 살이 이윽고 고기[肉]로 느껴질 때에도, 그 고기를 다시 살로 되돌리는 법은 오직 말 밖에 없다.’는 저자의 말은 동무와 연인을 ‘말, 혹은 살로 맺은 동행의 풍경’이라고 표현한 이유를 짐작케 한다. 종교와 연애, 가족과 사랑에 대한 지극히 보편적인 관계들이 주는 환상을 꿰뚫어 볼 수 있는 혜안을 갖는 것은 철학자들만의 특권은 아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늘 마주하는 사람과 관계들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성찰의 기회를 갖게 하는 것은 순전히 저자의 힘이다.

연애의 열정은 어느 무지(無知)에 근거하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바로 그 무지는 어느 특권적 지식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 P. 46

바타이유나 베블런 등이 종교의 본질을 낭비와 사치로 규정한 바 있지만, 종교와 더불어 인류의 양대 환상인 사랑이야말로 낭비를 위한 낭비의 방식에 다름아니다. - P. 109

동무의 길은 인정과 배려를 통해 사랑의 열정을 생산적으로 승화시키는 데에서 트인다. - P. 114

  짤막한 경구처럼 쏟아지는 문장들은 폐부 깊숙이 들어와 박힌다. 사랑과 연애에 관한 통찰은 열정적이지도 그렇다고 냉소적이지도 않다. 눈에 보이지 않는 환상들을 우리는 어떻게 만들어 왔는가. 혹은 그 안에서 얼마나 맹목적인 행복과 좌절을 맛보았던가. 아찔한 순간들은 봄눈처럼 사라지고 생의 뒤안길에서는 늘 지나간 시간들에 대한 자책과 후회 혹은 아쉬움과 미련에 잠 못 들어 하는 법이다.

  세기의 연인도, 더없이 부러운 사제지간도, 그 둘이 합쳐진 사람들도 이제 모두 사라져 버렸다. 과거의 기억 속에서 깊은 인상을 남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는 우리 삶의 자세를 가다듬는 것 뿐이다. 신기하고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나 숨겨진 이야기에 대한 궁금증으로 끝날 수 있는 내용은 결코 아니다.

  어떤 책이든 반은 독자가 만들어간다고 하지만 이 책은 너무 먼, 나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지금 내가 엮어 가고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와 삶에 대한 반성이자 성찰이고 확인이자 전망이다. 지금 내 곁에는 누가 있지? 나는 어떤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어가고 있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그들과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그들의 살을 만져 본 적은 있는지 혹은 그것들을 소중하게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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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방법 - 히라노 게이치로의 슬로 리딩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김효순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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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3년간, 올해 3개월을 포함해서 3년 3개월간 480여 권의 책을 읽었다. 3분의 1쯤이 문학 서적이고 나머지는 인문, 사회, 철학, 역사, 예술 등 다양한 분야의 책들이다. 고전은 물론 최근에 발간된 책에 이르기까지 꼼꼼하게 훑어보고 신중하게 선택하고 진지하게 읽어왔다. 결코 적지 않은 분량의 책들에 대한 애정과 관심과 열정은 순전히 ‘무목적성’ 때문에 가능했으리라. 아무 이유도 목적도 없이 걷는 길은 행복하기만 하다. 책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이다.

  특별한 목적이 있었거나 생계와 직결된 일이었다면 나는 절대로 책을 즐길 수가 없을 것이다. 서늘한 바람이 부는 나무 아래, 따스한 햇볕이 드는 호수가의 그늘진 벤치, 창 밖에 눈 내리는 겨울밤의 따스한 거실, 차창에 부딪히는 빗소리를 들을 수 있는 버스 창가, 여명이 밝아오는 새벽 기차의 구석 자리. 책을 읽는 장소가 중요하지 않겠지만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 습관은 고치고 싶지 않다. 주변에 흔한 다독가에 비하면 많은 책을 읽는 것은 아니다. 목적과 방법이 다르겠지만 1년에 300권이 넘는 책을 본다는 사람도 보았기 때문이다.

  버릇처럼 이야기하지만 질은 양을 담보로 하지만 양이 곧 질이 될 수는 없다. 책에 관한한 스스로 프로라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히라노 게이치로의 <책을 읽는 방법>은 마음 가짐을 다시 가다듬는 계기가 되는 책이다. 다소 황당하게 들리겠지만 단순한 활자 해독 수준에서 시작하는 독서는 그 질적 수준이 천차만별일 것이고 한 권의 책에서 건져내거나 얻을 수 있는 정보의 양과 질적 변화의 과정은 독자들마다 상당한 차이를 보일 것이다.

  같은 책을 읽었지만 기억에 남는 대목이 다르고 이해의 수준과 폭도 다르다. 독자의 반응과 이해의 수준이 그 책이 최종 소비자인 독자에게 의미하는 것은 작가의 그것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책을 읽는 방법에 따라 같은 책이 독자마다 다르게 전달될 수 있다는 말이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이면서 쉽게 간과했던 ‘책을 읽는 방법’은 자기 반성과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 나는 어떻게 책을 읽고 있는가? 왜 책을 읽는가? 지극히 단순하고 당연한 질문에서 출발한다면 이 책은 독자마다 다른 방식으로 다가 갈 것이다.

  히라노 게이치로를 처음 만난 건 <일식>을 통해서였다. 도쿄대 법학부에 재학 중이던 1998년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하며 등장한 괴물 같은 소설가로 기억한다. 무라카미 류와 비교되면서 화려하게 문단에 등단했다. 내가 ‘괴물 같은’이라는 수식어를 쓴 이유는 소설 <일식>에 대한 충격 때문이었다. 20대 초반의 젊은이가 썼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해박한 지식과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한 중세 유럽의 분위기가 그대로 전해지는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몇 권의 소설을 더 읽었지만 처음과 같지 않았고 <장송>은 아직 읽지 못했다.

  말하자면 ‘읽을 읽는 방법’에 대한 그 주관성과 허다한 방법론 속에서 히라노 게이치로라는 이름 때문에 읽은 책이다. 이 책은 몇 마디 충고로 요약할 수 있다. 하지만 문장 하나 하나에서 전해지는 실천과 경험의 충고가 뼈에 사무친다. 매끈한 말솜씨와 화려한 수식으로 현혹시키는 종류의 책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철저하게 개인적인 경험에서 우러나온 실천적 방법론으로 가득하다. 특별한 노하우나 비법을 전수하는 책은 아니지만 저자가 걸어온 길에 대한 실화를 통해 실전에 필요한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는 책이다.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천천히 읽어라!’로 요약된다. 속독법에 관한 책이나 속독법 학원을 운영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미칠 노릇이겠지만 ‘슬로 리딩’이라 명명된 히라노 게이치로의 책을 읽는 방법에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양의 독서에서 질적인 독서로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 저자의 일관된 주장이다. 그러다 보면 매력적인 ‘오독’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지독(遲讀)’이 곧 ‘지독(知讀)’이라는 말이 히라노 게이치로의 책을 읽는 방법을 요약하고 있다.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 푸코의 <성의 역사 1 - 앎의 의지> 등을 예로 들어 슬로 리딩을 어떻게 실천하는 지 직접 보여주는 대목은 많은 사람들에게 책을 제대로 읽는 방법에 대해 많은 공감을 주었을 것이다. 얼마나 많이 읽는가에 관심을 둘 것이 아니라 왜, 어떻게 읽는가에 관심을 두어야 하는 이유를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실용적 목적에 따라 짧은 기간 동안 많은 책을 조사하거나 자료를 수집하는 사람들, 단기간에 레포트나 논문을 써야 하는 사람들을 예외로 하더라도 책이 하나가 도구가 되거나 단순히 정보 수집의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이 책은 책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해 준다. 그렇다면 나에게 책이란 무엇인가? 가끔 떠올려 보는 생각이지만 이 책을 통해 나는 다시 한 번 자기 점검의 시간과 기회를 갖게 되었다.

  사람마다 책을 읽는 목적과 방법이 다르겠지만 서로 곁눈질하고 배워가며 자신의 방법을 찾아가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오늘도 손에서 책을 놓지 못하고 흐린 하늘을 쳐다보며 휴일의 아쉬움을 달랬던 나는 화창한 봄날이 와도 책을 찔러 넣고 떠날 것이다. 그곳이 어디든 책과 함께 떠나는 여행은 즐거움으로 가득하리라. 그래서, 행복한 여행은 계속된다.


08033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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