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를 보라 - 인문학과 영화, 그 어울림과 맞섬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8년 6월
평점 :
절판


  창을 사랑한다는 말은 태양을 사랑한다는 말보다 눈부시지 않아서 좋다는 김현승의 말이 새삼스럽다. 우리는 때때로 새롭고 시선한 눈을 책에서 얻는다. 알지 못했던 사실을 깨닫기도 하지만 이미 알고 있던 사실들도 새삼스럽게 정리하고 확인한다. 나는 그렇게 책을 통해 같은 사물을 보고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부분들을 타인의 눈을 통해 다시 확인한다. 물론 그러다 보면 100% 모두 동의할 수는 없고 공감하기도 하지만 이의를 제기하고 반론을 제기할 때도 있다. 어쨌든 이 모든 과정은 하나의 의사소통 과정이고 저자와 대화를 나누는 과정이고 말없이 정서를 공유하기도 한다.

  특히 나이, 지식, 학력, 세대, 지역을 뛰어 넘을 수 있는 ‘영화’라는 장르는 공감대를 형성하기에 가장 적합한 예술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고전평론가’라는 특이한 직함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고미숙의 새 책 <이 영화를 보라>는 조금은 안타깝게 읽었다. 이 책에 소개된 여섯 편의 영화를 다 보았기 때문에 안타까웠고 같은 영화를 보고 내가 미처 보지 못한 부분에 대한 시선이 안타까웠다.

  괴물, 황산벌, 음란서생, 서편제, 밀양, 라디오스타 - 이 여섯 편의 영화를 분석한 책으로 고미숙은 머리말에서 ‘나는 영화를 즐겨 보지 않는다.’는 도발적인 문장으로 인사를 시작한다. 하지만 그녀의 영화를 보는 독법은 예사롭지 않다.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지만 풍부한 인문학적 지식에 기초한 영화 뜯어보기는 구석구석 영화 전체를 조망하는 미시적이지만 거시적 관점을 하나도 놓치고 있지 않다.

  예를 들어 ‘괴물’을 보면 ‘위생권력과 스펙터클의 정치’라는 부제에서 보여주듯이 교육은 학교에 건강은 병원에 저당 잡힌 채 위생과 청결이 근대화의 첩경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사람들의 무의식을 파헤친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읽어내야만 영화를 제대로 보았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왜 재밌게 보았는지, 무엇이 재밌었는지 왜 무서웠으며 괴물보다 더 끔찍한 현실의 모습을 우리는 제대로 바라보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고미숙은 표상을 전복하는 ‘황산벌’을 이야기하면서 ‘상상의 공동체’인 민족을 풀어내고 있으며 사투리로 범벅이 되어버린 전쟁의 비장미를 가볍고 코믹하게 그려버린 감독을 이해한다. 말하자면 전쟁은 미칫 짓이다! ‘거시기’를 통해 말의 무의식적 속성을 간파하고 영화를 통해 감독의 의도보다 먼저 관객에게 전달되는 반체제적인 병사 ‘거시기’에게 전쟁과 민족의 의미를 묻는다.

  포르노그라피와 멜로가 범벅이 된 ‘음란서생’, 1916년 <조선의 미>를 통해 ‘한恨’의 정서를 심어준 야나기 무네요시가 새롭게 재조명되는 ‘서편제’, 가족․고향․신으로 대표되는 폐쇄회로 속에 갇힌 ‘밀양’, 이주민들의 접속과 변이를 그려낸 ‘라디오스타’도 어느 것 하나 대충 보아 넘긴 영화가 없다. 하긴 자주 보지 않는 영화 중에 기억할 만한 혹은 인상 깊은 영화에 대해 근대를 이해하고 우리의 삶에 내재된 특징들을 그려 낸 영화들에 대해 어찌 대충 보아 넘길 수 있었겠는가. 고미숙의 영화 이야기는 그녀의 관심사인 고전과 근대, 탈근대를 통한 탈주와 유목의 세계를 누비고 있다.

  에필로그 형식으로 붙어 있는 글들 또한 영화를 이해하고 현실과의 접점을 찾는 데 유효하게 읽힌다. 앞서 소개한 여섯 편의 영화를 하나의 주제나 범주로 묶을 수는 없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결코 환상과 모험을 미끼로 던진 영화 산업의 소비재로 볼 수만은 없는 영화들이다. 흥행과 작품성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뇌(?)하는 감독들의 고민들을 동정하거나 읽어 낼 필요도 없다. 그걸 걱정하는 감독이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한 편의 영화를 통해 보여주는 것은 극히 일부분인 것 같지만 무수한 코드와 다중분할 접속 장치들이 숨어 있다는 사실이다.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 고민했던 벤야민의 고민이 어떠했는지 새삼스럽게 생각해 보지 않더라도 우리에게 영화는 생활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 안 본다고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통해 꿈을 꾸고 생각하고 과거를 추억하고 미래를 예견하고 현실을 성찰한다.

  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태도로 항상 우리 곁에서 가깝게 기능하는 가장 친근한 매체인 영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또 하나의 가상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인가에 대한 고민이기도 하다. 우리가 열망하는 세상과 그것의 꿈을 실현시켜주는 공간으로서 기능하는 영화만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외면하고 싶은, 알지 못했던 현실에 대한 공포와 경고, 때로는 해학과 신명으로 풀어낼 수 있는 우리 영화를 관객들은 항상 기다리고 있다. 수요가 없는 것이 아니라 만족하고 싶은 욕망을 충족시킬 영화를 욕망하는 영화가 없다는 아이러니!

  고미숙의 표현을 빌리자면 언제나 영화에서 ‘재미’를 기대하는 관객들의 봉상스(상식)를 충족시킬 영화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보여지는 혹은 만들어지는 영화를 제대로 볼 수 없게 만드는 현실의 패러독스(역설)를 읽어낼 수 있는 영화를 우리는 기다린다. 만국의 관객들이여 단결하라, 그리고 영화여 영원하라!


080707-07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즘 - 철학.정치 편 - 인간이 남긴 모든 생각
박민영 지음 / 청년사 / 2008년 5월
평점 :
절판


  “도대체 네 정체가 뭐냐?”라고 물어볼 때조차 우리는 무의식에 내재된 플라톤의 현상과 본질의 문제를 끄집어 내는 것이다. 이원론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세상을 해석하고자 했던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의 고민은 여전히 유효하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세상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지금까지 전개된 모든 서양 철학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철학의 주석에 지나지 않는다는 평가를 차지하더라도 우리에게 직면한 삶의 문제는 시대의 변화 속도와 눈부신 발전에 발맞춰 해결됐다고 보기 어렵다.

  지금까지 인간이 해왔던 모든 생각의 흔적을 우리는 이즘ism이라 부른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많은 사람들은 앞선 시대를 정리하고 그 시대정신zeitgeist을 한마디로 명명하고 싶어하는 범주와 구별의 본능을 발휘한다. 우리는 그것을 이즘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인간의 체계적 사유의 산물이 바로 우리가 사용하는 이즘이다.

  박민영의 <이즘>은 곁에 두고 오래 참고할 만한 책이다. ‘인간이 남긴 모든 생각’이라는 부제에 어울리는 책이다. 철학과 정치편으로 나온 이 책의 다음도 봐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면 이 책은 성공적이다. 저자는 저술가로서 갖추어야할 꼼꼼함과 부지런함 그리고 자기 판단과 신념까지 갖추고 있다고 감히 평가할 수 있겠다. 세상에 객관적인 생각이 불가능하다는 전제하에 나는 모든 이데올로기에 대해 자신의 방식으로 정리해할 필요성을 느낀다.

  하나의 이데올로기는 사회적 성격을 반영하고 사회적 성격은 사회경제적 조건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에리히 프롬의 말은 이즘의 사회적 역할을 잘 표현하고 있다. 물론 이 말은 역도 성립한다. 사회경제적 조건은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받아 변화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즘은 하나의 문화현상이나 유행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조건을 규정하는 말이고 이 말에 따라 사람들의 의식과 행동이 달라지며 사회가 변화 발전하기도 한다.

  그것을 알지 못한 몽매한 현실 정치인들, 관료들, 언론들의 작태는 2008년 ‘촛불집회’를 바라보는 다양한 계층의 견해차에 적나라하게 나타난다. 이렇게 쏟아지는 장대비가 대한민국의 이즘을 변화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현실에 복무하지 못하는 모든 이즘은 가라. 저자의 말대로 이즘에 대해 공부하는 것은 ‘세계를 보는 나를 보는 일’이기도 하다.

  경제학자 하이예크는 이런 말을 했다. “이론화되지 않은 사실은 침묵한다.” 이 말을 이즘과 연관시켜 이해하면, 어떤 사물이나 사건은 ‘이즘’이라는 ‘체계화된 이론’ 속에서만 그 존재와 존재의 의미를 드러낸다는 말이 된다. 이즘은 그 자체로 체계를 갖춘 하나의 세계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창이다.

  머리말에서 인용한 하이예크의 말이 이 책의 의미를 함축한다. 또한 저자는 이즘을 ‘관계의 산물’이라고 표현했다. 당대 사회적 조건과의 관계, 이전 역사와의 관계, 다른 이즘과의 관계 속에서 탄생한 이즘을 이해하는 것은 세상의 모든 조건과 인류의 역사, 사회, 문화, 경제적 조건을 이해하는 고도의 정신 작용이다. 단순하지 않은 작업을 시도한 박민영의 노고에 감사할 뿐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남는 의문과 미진함은 무궁무진하다. 부록에 정리되어 있는 이즘 일람과 이즘 연표, 그리고 참고문헌을 뒤적이며 평생을 보내고 싶은 욕망! 한 개인의 생각이 반영된 이즘은 정당한 평가를 받았다고 할 수 없지만 인류의 사상사를 일괄할 수 있다는 무임승차의 특권이 주어진다. 많이 팔릴 수 없는 책이지만 반드시 필요한 책은 이런 책이 아닐까 싶다. 저자의 노고에 경의를 표한다.

  철학편에서 경험론을 시작으로 계몽주의, 공리주의, 구조주의, 니힐리즘, 데카르트주의, 마르크스주의를 거쳐 칸트주의, 플라톤주의, 합리론, 해체주의, 헤겔주의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정치편에서는 공동체주의와 공화주의를 시작으로 관료주의 군국주의, 나치즘, 마오주의, 마키아벨리즘, 매카시즘을 거쳐 아나키즘, 유토피아주의, 자유주의, 파시즘, 페이비어니즘에 이르는 이즘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우리가 지금 말하고 생각하고 표현하고 지향하는 모든 것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전망은 늘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다. 개인과 사회가 조화와 갈등을 겪는 과정에서 한 걸음씩 내딛는 것이다. 역사는 발전한다는 진화론적 관점은 아니어도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보다 다른 형태로 나아가야 한다는 기준점을 설정하기 위해서도 우리에게 이즘에 대한 성찰은 필요하다. 관계의 산물이라고 하는 것도 사회와 사회와의 관계라기보다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회의 관계를 이르는 말일 것이다.

  슬라보예 지젝의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을 떠오르게 한다. 새로운 사상과 가치를 내세우고 있지 않고 과거의 이즘에 대해 정리하는 데 충실하지만 그 자체로 높은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 정리된 생각들은 현재를 돌아보고 과거를 성찰하며 미래를 지향할 수 있는 이즘의 새로운 발견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자, 이제 우리 눈앞에 펼쳐진, 전개되고 있는 이즘에 대해 다시 고민해 볼 시간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어떤 이즘으로 평가 받을 수 있을까, 먼 미래에.


080705-07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랑, 그 환상의 물매
김영민 지음 / 마음산책 / 2004년 8월
평점 :
품절


무릇 연인은 늘, “사랑하는 것만큼 사랑받지 못 한다”는 결여에 시달리는 법이다. 그 시달리는 방식은 은밀하고 집요하다. 수동과 능동의 정서가 변덕스럽게 교차하면서 양철판을 긁듯이 간지럽힌다. - P. 21

  결핍과 잉여는 연애의 영원한 딜레마이다. 항상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동반한 열병처럼 찾아오는 연애의 시작은 찬란하기보다 깊은 고통이다. 견딜 수 없을만큼 지독한 불면과 울렁증으로 연인에 대한 그리움보다는 스스로 만들어 낸 열정 속에 함몰하게 된다. 대개의 경우 그 지속 기간은 그리 길지 않다. 이후 벌어지는 상황과 두 사람 사이에 형성된 관계에 따라 다양한 양상으로 변화되지만 식어버린 감정은 참담하기까지 하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철학자 김영민은 ‘환상의 물매’라는 말로 ‘사랑’에 대한 정의와 분석을 시작한다. 은밀하고 집요한 방식으로 인간의 영혼을 잠식하는 그 모호한 감정에 대해 정의하는 일이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김영민은 특유의 사색적이고 분석적인 방식으로 하나하나 사랑의 모호한 안개를 걷어낸다.

  우리가 쉽게 공감할 수 있는 표현과 문장들을 찾아내는 것은 쉽지 않다. 언어의 사유의 힘이며 개념은 대상에 대한 분명한 이해로부터 출발한다. 그런 점에서 김영민의 문장들은 대상의 분석에 천착하고 있다. 언어와 개념들 간의 관계는 일시적이고 우연적일 수 없다. 사랑이라는 대상에 대한 깊은 성찰과 아포리즘들은 짧은 문장들의 긴밀한 긴장감을 통해 더욱 견고하고 분명하게 표현되고 있다.

  결코 만만치 않은 글들이 이어진다. 때로는 한 문장으로 명징한 상상의 세계로 이끌고 때로는 탄탄한 구조의 문장들이 하나의 관계망을 만들어낸다. 우리는 그 안에서 사유하고 공감하며 돌아본다. 김영민의 글들을 계속 읽게 되는 이 묘한 매력에 대해 뭔가 분명하게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젊은 시절 2000여편의 시와 6편의 소설을 불태웠던 지난한 과정으로 길어낸 사색과 문장의 힘일까?

모욕과 상처의 기억은 단순히 기억이 아니라 여전한 폭력이다. 왜냐하면 상처의 기억은 곧 기억의 상처이기 때문이다. - P. 46

  예를 들어 이와 같은 문장은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라 언어를 뒤집어 주체와 객체의 관계를 전복시킨다. 상처의 기억이 기억의 상처가 된다는 동어반복적이고 역설적인 표현은 순간 멈칫거리게 한다. 내 기억의 상처는 무엇일까? 그것은 상처의 기억일까?

  사랑이라는 가장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주제를 다양한 콘서트처럼 아포리즘 형식으로 이끌어 낼 수 있는 김영민의 힘은 놀랍기만 하다. 단순하고 가벼운 놀이로서의 감정이 아니고, 일상에서 마주하는 욕망과 생활의 대체물로서 사랑도 아니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벌어지는 관계 속에서 풀어내고 있는 이 놀라운 감정을 김영민은 차분하게 사유하고 있다.

  필연이고 숙명이라 굳게 믿고 싶었던 환상에서 벗어나는 순간 비로소 사랑은 제 모습을 드러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열정과 자기 파괴적이고 소모적인 사랑에서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보다 객관적인 거리와 시선으로 사물과 상황을 바라본다. 우리는 그것을 상처의 기억이라 부른다.

  철저하게 남녀 간의 연애 감정을 전제로 한 이 죽일놈의 사랑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한다. 내가 궁금했던 것은 사랑의 실체가 아니라 타인의 관점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있으며 끊임없이 변주되는 사랑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것은 지나가버린 시간들에 대한 경의로움보다는 아쉬움과 기억의 상처 때문이리라.

  여전히, 사랑은 환상이며 환각이고 환유이며 환멸이고 환락이며 환영이다. 누구나 한 번쯤 정의내리는 사랑에 대한 지극히 주관적이고 사적인 세계를 넘어 사랑의 진경은 어디쯤에서 만날 수 있을까? 아니 어쩌면 그것은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 다만 철학작 김영민이 말하는 사랑은 어떤 것인지 궁금하다면 감성과 파토스의 세계가 아니라 이성과 로고스의 세계로 수평 이동해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아닐까? 그 안에서 답을 구할 수는 없겠지만 그저 한가롭게 거닐다 어떤 순간을 조우할 수도 있을 테니까 말이다.

  안다는 것과 모른다는 것의 모호한 경계는 사랑하는 두 사람의 관계에 가장 정확하게 적용되는 말일 수도 있겠다. 김영민은 이 책의 마지막을 이렇게 장식한다. 자신의 마음조차 모른다는 사실 속에 ‘사랑의 진실’이 맥동한다는 아이러니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독자들은 공감할 수 있을까? 아니 이해할 수 있을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사랑은 도대체 무어냐? 책장을 덮고서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알 수 있다면 사랑은 사랑이 아닌 것일까?

“달은 기울어 밤이 삼경인데, 두 사람의 마음은 오직 두 사람만이 안다”고 하였다. 그러나 삼경이든 오경이든, 두 사람의 마음을 두 사람조차 모른다는 사실 속에 사랑의 진실이 맥동脈動하는 법. 그 마음은 어느 먼 미래의 것이었고, 매번 여기가 아니라 저기에 속하였다. - P. 255


0806025-073

댓글(5)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Alicia 2008-06-26 0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이버보다는 여기가 한가로운거 같아요~ 리뷰도 찬찬히 읽어볼만하지만
댓글이 더 재미있어요. ^^
동무와연인 이후로 김영민한테 반해버리셨나바요~ ㅎㅎ

전 사랑은 미친짓이다, 라는 책을 보는데 잘 들어오진 않네요
그래도 윤대녕의 글은 단숨에 읽었어요
음.. 이런 사람있으면 사랑하고 싶을 것 같아요 .
시드니폴락감독은 작품을 지탱하는 건 골격이고 그 골격이 없으면 작품은 무너지지만
그건 보이지 않아야 한다, 골격이 보이면 실패작이다, 라고 말했다지요..
윤대녕이 그런것 같아요
제가 좋아하는 작가들은 바로 그런 어떤점에서 닮아있어요..

바쁘시다면서 어쩜 이런 일기를 쓰실수 있죠?
연구대상이세요. ㅎㅎ
편안한 밤 되시길. ^^

sceptic 2008-06-27 12:30   좋아요 0 | URL
동의합니다. 골격에 대한 시드니폴락의 이야기...

소설이든 어떤 이야기든 서사구조는 늘 그런식이죠. 숨은 골격에 붙은 살덩이만 파먹을 수 없으니까요.

김영민의 문장은 탄탄한 골격을 겉으로 드러내기도 합니다. 오히려 이물스럽지만 그 점이 맘에 들기도 하구요. 현학적이거나 작위적이라고 느껴지지 않고
소화시키고 싶은 욕망과 여운이 남으니까요.

바빠도 일기는 써야죠...^^
즐거운 시간 보내고 계시죠?

2008-06-29 2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7-13 16: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7-13 23: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죽음의 밥상 - 농장에서 식탁까지, 그 길고 잔인한 여정에 대한 논쟁적 탐험
피터 싱어.짐 메이슨 지음, 함규진 옮김 / 산책자 / 200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교보문고가 있다. 주말에 한 번씩 들러 포식자가 먹잇감을 사냥하듯 천천히 서점을 산책한다. 나는 이것을 눈으로 즐기는 뷔페라고 하는데 그 포만감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것으로 실제 음식으로는 절대 채워지지 않는다. 팔짱을 낀 채 분류된 코너 매대를 돌며 신간을 확인한다. 관심이 가는 실용서까지 훑어보는 것으로 에피타이저를 마친다. 본격적으로 벽과 스탠드형 책꽂이로 발길을 옮긴다. 일요일 오후의 여유 있는 만찬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분야별 개론서와 전문서를 일괄하고 한 권씩 꺼내들고 목차를 읽고 첫 페이지 첫 문장을 읽는다. 책등을 보인 채 일목요연하게 늘어선 책들의 제목을 훑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흐름이 파악되고 내가 읽은 책 주변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상하좌우에 꽂혀 있는 책들을 통해 다시 한 번 의미를 되새기기도 하고 다름 도서 목록에 참고하기도 한다. 힐쉬베르거의 <서양철학사>를 꺼내들고 강유원을 떠올리다가 <천의 고원>은 수없이 표지만 만지작거리다 도로 꽂아 넣는다. 장석주의 말이 생각나서 사지 않는다.

  철학 분야 윤리학 코너의 책등을 읽다가 피어 싱어와 짐 메이슨의 <죽음의 밥상>이 윤리학 책이라는 사실이 생각난다. 원제가 ‘The Ethics of What We Eat’이다. 윤리학의 주체는 항상 인간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도대체 먹는 것까지 윤리를 따져야 한다는 말인가? 자연의 약육강식이라는 기본적인 법칙으로 보아도 인간은 먹이사슬의 정점에서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피터 싱어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한다. 옮긴이 함규진도 후기에서 이 책을 끝까지 번역하고 나서도 고기를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했다고 하는데 나는 이 책을 읽는 동안 여러 번 고기를 먹었지만 자연스럽게 젓가락이 채식 쪽으로 기울었다. 앞으로도 베건이 될 자신은 없다. 완전 채식주의자가 될 수는 없다면 양심적인 잡식주의자는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도대체 먹을 게 없단 말인가? 책은 나에게 희망과 즐거움보다 고민과 실천을 요구한다.

  이 책은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전형적인 현대의 식단을 관찰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양심적인 잡식주의자와 완전 채식주의자들을 살펴본다. 한 가정에서 먹는 일반적인 식탁의 풍경에서 시작해서 장을 보는 과정을 취재하고 그것들이 식탁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하나하나 역추적한다. 소나 돼지, 닭이 키워진 농장의 현실을 파헤친다. 앨빈 토플러처럼 발로 쓴 <죽음의 밥상>은 올해 읽은, 내가 뽑는 추천 도서에 오를 것이 틀림없다.

  이론에 치우치거나 일방적인 주장의 위험성을 극복하기 위해 그는 스스로 농장의 잡부가 되어 바닥을 기고 ‘쓰레기통 다이버’들의 생활을 알기 위해 직접 쓰레기통 속에 뛰어드는 철학자가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를 생각해 본다면 피터 싱어가 쓴 이 책의 의미를 알게 될 것이다. 이론과 실천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작가나 책을 만나게 되면 경외감을 느낀다. 이 책이 바로 그렇다.

  공장식 농장에서 길러져서 우리 식탁에 오르는 과정을 알게 된다면 육식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밖에 없다. A4 한 장 크기의 공간에서 생의 전부를 보내야 하는 닭의 일생에 대해, 전기충격기에 의해 기절하지 않은 채 목이 잘려 뛰어다니는 소에 대해, 꼼짝 못하게 갇힌 돼지의 스트레스에 대해 나는 한번이라도 생각해 보았을까?

  피터 싱어가 내세우는 동물에 대한 동정同情은 사실 인간에 대한 개념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나는 이 책을 통해 깨달았다. 각종 종교와 근대 시민 혁명을 통해 이루어낸 인종 차별의 극복과 남녀평등 등은 자연스럽게 인간과 동물의 ‘차별’ 문제로 이어진다. 그간 끊임없이 반박의 논리와 반대 이론들이 제기되었지만 인간의 종種차별주의에 저항하는 철학자 피터 싱어의 이야기는 한 마디 한마디가 살을 파고들며 뼈에 사무친다. 나는 그렇게 읽었다.

  우리의 일상에서도 이제 유기농은 낯설지 않다. 공정무역이 활성화되고 있지만 아직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나로서는 조금 더 많은 관심과 실천을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다. 좁은 면적을 가진 우리와는 거리가 먼 것 같지만 로컬푸드는 화석 연료의 사용, 지역경제 활성화, 우리 농민들의 삶을 생각해보면 쉽지 않은 문제로 얽혀 있다.
 
보통 미국인의 한 끼 식사는 그 거주 지역에서만 식재료를 구해 만든 식사에 비해 석유 사용량이 17배나 높다. 따라서 이산화탄소 배출량도 17배나 높다. 따라서 이산화탄소 배출량도 17배가 된다는 것이었다. - P. 205

조그마한 텃밭이라도 스스로 가꾸고 상추 한 잎이라도 키워 먹어야겠다는 뼈아픈 자각들이 생긴다. 늘 그렇지만 문제는 실천이다. 이 책 한 권으로 피터 싱어의 생각과 방법을 모두 알 수도 없고 실천할 수도 없겠지만 아주 많은 생각을 했다. 과연 인간이란 존재는 무엇인가? 먹거리에 대한 윤리학이 철학적 문제를 동반하고 있으며 오로지 자본의 논리에 의해 산업이 되어버린 우리의 식탁을 돌아보게 되었다.

  ‘농장에서 식탁까지, 그 길고 잔인한 여정에 대한 논쟁적 탐험’이라는 부제에 어울리는 긴 여행처럼 읽었다. 미친소 문제로 뇌용량 2MB임이 드러난 대통령 덕분에 이 책이 조금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혔으면 하는 바람이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없고 국가가 국민위에 존립할 수는 없다. <리바이어던>의 가르침이나 <아나키즘 이야기>의 주장이나 <코뮨주의 선언>이 아니더라도 이렇게 실천적인 책 한 권은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때가 있는 법이다. ‘죽음의 밥상’이 아닌 ‘건강한 밥상’은 국가라는 괴물이 아니라 우리가 차려 먹어야 한다.


080602-06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몸으로 하는 공부 - 강유원 잡문집
강유원 지음 / 여름언덕 / 2005년 7월
평점 :
품절


  나는 회사원 철학박사 강유원을 무림의 고수로 여긴다. 그의 텍스트 지향 홈피를 들락거리고 그가 쓴 책과 번역한 책들은 의심 없이 읽고 있다. 호남의 강준만이나 영남의 박홍규처럼 의심 없이 돈을 주고 책을 사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하나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 대해 절대적인 믿음을 가질 정도로 순진하지도 어리석지도 않지만 책을 읽으면서 오호惡好의 감정이 생기기도 하고 깊이 공감하기도 한다. 자연스런 현상이지만 선호하는 저자가 생기고 혐오스럽지는 않더라도 다시는 그의 책을 사지 않게 되는 경우도 있다.

  강유원의 <몸으로 하는 공부>는 몇 년 전에 출간 된 책이지만, 기회를 놓치고 미루다가 집어 든 책이다. 이 책은 그의 표현대로 잡문집이다. “‘잡문’이라는 단어는 논쟁들, 지엽말단의 문학, 지나친 자유, 언어의 가치하락에서 유래하는 폭력들로 이루어진 무질서한 총체로 이해해야 한다.”는 투르니에의 글을 인용해서 그 의미를 밝히고 있다. 말하자면 강유원식 겸양 어법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어쨌든 그의 생각과 그간의 이력들을 짐작할 수 있게 되어 편안했고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적어나가 쉽게 읽혔으며 그의 글에 대한 이해를 돕고 그가 걸어온 길에 대한 과정을 밝히고 있어 흥미롭다.

  단순한 호기심에서 강유원 개인에 대한 궁금증까지 골고루 해소할 수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공부’를 통해 우리가 만났던 강유원에 대해서는 다양하고 깊은 대화가 가능하다. 생각의 끝자락을 내보이고 편안하게 들려주는 이야기들 속에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 책은 그렇게 강유원식 공부 방법에 대한 관심을 가진 독자에게 긴요한 책이다. 소설 읽기 이외에 다른 독서가 필요하지 않거나 조중동의 기사가 세상의 전부라고 믿는 독자들에겐 필요없는 책이니 선별해서 읽어야겠다.

  익히 알려져 있듯 강유원은 직장 생활을 하며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경야독하는 사람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그의 공부방식 때문에 사람들에게 회자되었다. 힐쉬베르거 <서양철학사>를 50번쯤 읽고 나니 눈이 트이는 경험을 했다는 말을 듣고 나니 기가 질리는 게 아니라 막말로 참 ‘독한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방법과 태도에는 공감했고 스스로의 절제와 노력이 없다면 불가능한 것이 공부라는 사실을 이제 몸으로 깨닫는 나이가 되었다.

  진짜(?) 공부가 뭔지 공부 방법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모두다 챙겨 들을 만 하다. 왜냐하면 나름대로 공부를 해 본 사람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공부의 목적과 방법에 있는 것이 아닐까? 강유원의 생각에 동의한다면, 혹은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해 온 사람이라면 유용하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이고 나름대로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가 담겨 있는 책이다.

책이 손에 잡혀야 새로운 것을 알게 되고, 자신이 모르는 게 무엇인지도 알게 된다. 자신의 무지를 깨닫는 순간이 바로 지식에의 열정이 시작되는 때이다. - P. 18

  이렇게 작은 깨달음으로 시작하는 공부 이야기는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책 따로, 세상따로, ‘문화’라 부리는 것은 문화가 아니다, 학문의 현실적 쓸모 등 네 부분으로 편의상 나누어져 있지만 그 구분은 무의미하다. 마지막으로 제시한 ‘탈 아카데미즘의 길목에서’와 ‘내가 공부하는 방법’은 깊은 인상을 남긴다. 공부라는 대체 무엇이며 어떠해야 하며 또 무엇을 위한 것인가에 대해 정리되지 않는 사람들에게 혹은 나름의 방식과 비교 대상이 될 만한 사람에게 좋은 참고 도서가 될 것 같다.

  타인의 방식을 빌려 오는 것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그 안에서 자신만의 방법이 생기고 그것이 몸에 익혀진다. 완전히 자기만의 공부 방법이 생길 때 편안하고 자유로우며 즐겁고 행복한 공부가 된다. 입신 영달을 위해, 돈 벌이의 수단을 위한 공부를 공부라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는 것이 부정적이거나 잘못 되었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세상을 달리 보는 눈이 트이고 앎의 세계에 입문할 수 있는 입장권이 생기지는 않는다.

  즐겁고 행복한 공부는 스스로를 괴롭히고 채찍질할 수밖에 없다. 앎의 즐거움과 깨달음의 희열, 끝없는 지적 호기심도 ‘욕망’이라는 또 하나의 허영이 아니라 생의 진실을 들여다볼 수 있는, 세상을 올바로 볼 수 있는 방법과 도구가 되기를 희망한다. 그것은 온몸으로 전해지는 짜릿함이며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삶의 기쁨이다.

  나는 아직도 공부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세상을 바꿔야 진정한 목적이 달성된 것인지, 나의 안목과 시선이 달라지고 관점의 변화만 가져오면 되는 것인지, 실용적인 목적과 개인의 이익의 위해 노력하는 것인지. 하지만 책을 읽고 정리하고 무엇인가 써나가야 한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이제 어렴풋하게 체험하기 시작했다. 공부는 지겹고 고통스러운 과정이 아니라 스스로 즐기고 온몸으로 느껴야 하는 삶의 과정이다. 누구에게나 필요한.

지금까지 어설프게나마 적어본 <내가 공부하는 방법>을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인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자기 학대>이다. 스스로를 괴롭히면서도 스스로 즐거울 수 있는 매저키스트가 된다면 남이 뭐라 하든 신경 쓰지 않고, 공부를 해서 명예를 얻지 않아도 슬프지 않으며, 공부가 돈이 되지 않는다 해도 서럽지 않다. 어쩌면 이런 상태가 바로, 옛 사람들이 말했다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인지도 모르겠다. - P. 194


080525-05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