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은 가장 온당한 존재 방식이다"
《막다른 골목이다 싶으면 다시 가느다란 길이 나왔어》의 머리말 제목이다.
나는 태어나서 지금껏 가난하지 않은 적이 없다. 그렇다고 먹고 자고 입고 할 것들이 없었다는 건 아니지만...
'가난'을 말할 때 흔히 떠올리는 풍경은 어떤 것일까? 내가 '가난하지 않은 적이 없다'고 말하는 근거랄까, 맥락은 뭘까? 자주 "돈 없다"는 소리를 들어야 했던 것, 돈 때문에 벌어졌던 부모님의 잦은 다툼, 진학할 학교를 학비와 취업 등의 이유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었던 것, 학자금 대출과 끊임없이 이어진 아르바이트, 부모님의 금전적인 지원 없이 이뤄진 결혼, 내 집 마련은 요원하다는 것, 특별히 대단한 걸 하는 것도 아닌데 늘 따라다니는 빚과 쪼들리는 생활... 그리고 집안 사람들의 낮은 교육열, 폭력적인 행동과 언어들, 흡연, 음주, 질병, 불법... 얼핏 떠오르는 이런 경험들이 내가 '가난하지 않은 적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이자, 가난을 듣거나 말하는 순간 내 머릿속에서 펼쳐지는 풍경 혹은 단어들이다.
나도 안다. 이런 것들이 꼭 '가난'이라고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걸. 어떤 것들은 사회적으로 학습된 가난의 이미지일지도 모르고, 또 어떤 것들은 나의 기억이 왜곡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내가 가난한 것에 대해 심각한 수치심이나 부끄러움을 느꼈던 것은 아니다. 지금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가난을 말할 때 구체적으로 떠오르는 풍경, 특히 폭력과 관계된 모든 이미지들은 나를 부끄럽게 한 적이 많다. 가정 폭력, 아내 폭력, 언어 폭력, 뭐 그런 것들 말이다. 그러니까 "나는 가난해. 그게 뭐?"라고 말할 수 있는 반면에, "우리 아빠가 엄마를 때렸어.", "우리 아빠는 욕을 많이 해."라고는 말하지 못했던 것이다.
여성의 구술생애사 두 권을 읽으면서 나는 가난에 대한 나의 생각들, 내가 갖고 있던 이미지들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예전엔 모든 이미지가 그저 '가난'이라는 단어로 뭉뚱그려져 있었다면... 이젠 내가 경제적 궁핍함에 대해서는 그닥 부끄러워하지 않는 반면, 학습된 가난의 이미지나 편견들로 인해서 나와 내 가족들의 모습을 부끄러워 하기도 했다는 걸 알겠다. 가난하다고 다 폭력적인 것도 아니고, 부자라고 폭력적이지 않은 것도 아니라는 걸 알겠다. 폭력에는 여러 모습과 층위가 있다는 것도 알겠다. 내가 폭력의 피해자였음에도 부끄러워 했다는 것도, 막상 가해자는 나만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것도 모두 알겠다. 나를 부끄러워 하도록 한 것, 그걸 당연하게 여기도록 한 것이 억압이고 폭력이라는 걸 알 것 같다.
가난한 여성들의 생애를 보면서, 난 그들과 같은 가난한 여성이기에 공감하는 점이 많았다. 비록 그들과 내가 2~3 세대 차이가 난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그들을 억압한 가부장적 질서, 내가 그 억압의 질서를 나도 모르게 내면화하고 있고, 그 질서 속에서 나보다 약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 알량한 권력을 마구 휘두른 적도 있었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나도 아직 멀었다.
가난이 가장 온당한 존재 방식이라는 건 어떤 의미일까? 가난하기 때문에 스스로의 힘으로 삶을 헤쳐나갈 수밖에 없다는 것. 가난한 사람들, 약한 사람들, 억압 받는 사람들... 그런 모든 '미미한' 존재들을 더 잘 이해하고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힘을 모을 수 있다는 것. 자립과 연대. 그렇다면 가난한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런 일들이 아닐까 싶다. 가진 사람들은 자기가 뭘 가졌는지도 깨닫지 못할 때가 많으니까. 그래서, 무지해서 폭력을 휘두를 때가 많으니까.
"근데 불행하게도 기득권자들은 자신이 기득권자로 누구를 억압하고 있다는 걸 깨닫는 게 정말 '죽었다 깨나는' 일이더라구. 철저한 성찰과 비움이 있어야 가능한 거지. 그리고 요행히 그걸 깨달았다 하더라도 그 기득권을 내어주는 것은 또 다른 문제야.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잘라내서 줘야 하니, 아깝고 불편하고 괘씸해서 도저히 안 주고 싶거든. (…) 나두 내 자식한테 그랬고 나보다 더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런 마음이더라구." (《천당허고 지옥이 그만큼 칭하가 날라나?》, 347쪽)
사실 이 두 권의 책은 '가난' 보다는 '여성의 생애'에 방점이 찍힌 책들이다. 가난하건 그렇지 않건 여성의 생애는 어느 시대에나 비슷하게 겹친다. 책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삶에 우리 할머니의 모습이 겹치고, 엄마의 모습이 겹치고, 나의 모습이 겹친다. 돌봄 노동과 가사 노동의 굴레, 모성의 강요, 아버지와 남자 형제와 남편의 속박, 경력 단절과 최저 임금 노동, 한 인간이나 동료가 아닌 성적 대상으로의 전락…. 거기서 벗어나(려 하)면 쏟아지는 온갖 비난과 편견과 낙인. 그래서 말을 잃고 자신도 잃고 삶도 역사도 잃는다. 우리는, 여성들은 더 많이 말해야 한다. 자신과 자신의 삶에 대해서. 너무나 쉽게 '사소한 것'으로 무시되고, 나중으로 미뤄지고, 결국엔 잊히고 말았던 것들을 자꾸 자꾸 말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