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된 시와 사랑 이야기 진경문고 3
고형렬 지음, 이혜주 그림 / 보림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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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이 나이가 들면 점점 무감각해진다고들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부분적인 사실일 뿐입니다. 나이가 든다고 해서 반드시 감정이 무디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인생길을 거쳐가며 사람들이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감정이란 것이 실체가 없는 것으로 인연따라 생했다가 인연따라 멸하는 것임을 경험을 통해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즉 감정의 생멸의 과정을 통해 그것이 나에게 남겨주는 것이 무엇인지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고, 따라서 그 감정을 좀 더 여유있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기 때문인 것이지 그 감정을 회피하거나 부정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경우도 그러합니다. 대학생활 때와 지금의 나를 비교하자면 특정한 감정에 대한 열정이야 젊을 때만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사람을 대하는 것이나 사건을 바라보는 것 그리고 자연과 생명을 느끼는 나의 감정은 확실이 보다 풍부해지고 다양한 색조를 띠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것은 특정 감정에 빠져 전체적인 여러 가지 정서를 느낄 수 있는 감각을 가질 수 없었던 젊은 날에 비해 좀 더 세밀하고 좀 더 전체적으로 풍경과 사람이 주는 느낌을 음미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경에서 간추린 21편의 이 이야기들도 인간의 사랑과 그 때문에 갖게 되는 슬픔과 기다림과 애절함의 사연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삶의 애환과 정서의 이야기가 시적 형식을 빌어 2500여년이 지난 오늘에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 때나 지금이나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정서는 별 변함이 없을까요? 그 때의 이야기들이 지금의 우리들에게 여전히 같은 감동과 정서를 전달하고 있으니까요. 문제는 그것을 어떤 형식을 빌어 후세에 전달하였기에 시공간을 넘어서 시인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지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주 매력적인 부분이죠.

  그런 의미에서 옛 사람들은 자신의 일상적인 감정의 생멸과정이지만 그것을 온전히 마음에서 느낄 수 있었고 또한 그것을 시적 형식을 빌어 주위의 지인들과 나눌 수 있었고, 또 이렇게 먼 후세에 까지 그들의 마음을 고스란히 전달할 수 있었으니, 세월이 변한다고 해서 꼭 사람살이 멋과 재미가 더 좋아진다고만은 할 수 없을 듯합니다.

  우리의 일상 생활을 한 번 돌아봅시다. 과연 우리는 우리들의 감정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때가 과연 일생 중 얼마나 될까요? 늘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일상 속에 우리들은 감정도 없이 우리 일생을 컨베이어 벨트에 실어 보내고 있지는 않는지 반성하게 됩니다. 사람과 만나든, 마음으로 만나든, 풍경을 아름답게 바라보든, 마음 속의 영원성과 진리를 찾든 우리는 우리 삶에서 깨어 있는 시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동물적인 것을 벗어나 인간으로서만이 가질 수 있는 정신적인 고양을 위해 깨어 있는 그 순간만이 우리들의 삶의 존재 이유인 것입니다.

  처음에는 우리를 가슴떨리게 하는 그 무엇이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경험들을 자꾸만 만들어내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순간 순간 우리가 깨어 있다면 순간 순간 우리는 세상의 것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 마음이 깨어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내 인생의 의미지워짐을 말합니다.  마음 속에서 그것을 보는 눈이 만들어질 때 우리는 이제 이 시를 지은 이와 마음으로 만날 수 있게 됩니다.

  고형렬 시인은 시경을 읽는 자신의 독법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시는 그것을 읽고 해석하는 자에게 의미를 갖는 대로 보이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마음으로 시를 읽으며 그것이 자신의 마음에 일으키는 떨림의 색깔을 포착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그런 면에서 시경의 구절들을 자신의 살아온 과거와 함께 재미있게 풀어내고 있는 저자의 개성적인 면과 20년이 넘는 시단생활의 경력으로 풀어낸 맛깔스럽고 시원한 해석이 우리들의 마음을 끌어당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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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5-06-06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님의 글을 읽으면 자꾸 제 인생 선배되시는분처럼 여겨집니다.

달팽이 2005-06-06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분한 말씀입니다. 파란 여우님. 늘 저는 종착역이 없는 인생길을 가는 아이일 뿐입니다.

어둔이 2005-06-07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자께서는 시삼백편이 사무사라고 했습니다. 사랑노래라고해도 아무런 삿됨이 없다는 말입니다. 성경의 애가서가 솔로몬의 사랑노래라서 청교도적인 기독교인들에게 적잖은 당황을 느끼게 한것에 비하면 시경은 아예 옛선비들이 통채로 외우고 다녔지요. 두문화의 이질성을 확연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이름모를 뭇사람들의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노래라면 그게 사랑이든 고통의 신음이든 모두 하늘의 뜻이 담겨 있다고 본 것이지요. 중용에서도 감정이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을 중이라고 하고 드러나도 모두 제갈길을 찾아서 딱 맞아 떨어진 상태를 화라고 했습니다. 시삼백편은 그래서 사무사라 했겠지요 우리의 희비애락의 감정생활도 모두 그리되었어면 좋겠습니다. 아주 오래된 시를 새로난 나의 사랑노래로 읽기를 원합니다. 나는 금방 이책을 들었습니다. 이 서평이 주는 마음으로 깊이 잘 읽겠습니다.

비로그인 2005-07-04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좋습니다. 스크랩해갑니다. ^-^

달팽이 2005-07-04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변변치 못한 글을...감사합니다..

ppyoongu 2007-01-26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으로 와 닿습니다....글 속에서 제 삶을 고요히 내려다 보게 되었습니다.

달팽이 2007-01-27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처음뵙겠습니다.
 
옛시와 더불어 배우며 살아가다
김풍기 지음 / 해토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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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래에 나는 시에 푹 빠졌다. 물론 내가 시인은 아니지만 시를 향유하며 즐기게 되었다는 얘기다. 벗과 함께 시작한 휴대폰을 통한 다섯 줄 문자메세지에서부터 시작한 나의 시공부는 삶의 미학을 넘어서 삶의 깨달음으로까지 지향되길 원한다. 하지만 예전에 미처 느끼지 못했던 가슴떨리는 감정을 발견하는 시 한편이 있다면 그것이 인생 속에 거품처럼 생겼다가 사라지는 것이라고 해도 그 순간만큼은 내 가슴 속 깊은 곳으로 나를 데려다 준다.

  내 가슴을 울리는 시는 이렇다. 조금씩 시에 대해 알아가면서 단 한 줄의 글에서 내 가슴을 흔들어 이 우주를 함께 흔들어낼 수 있는 마음의 진동을 느낄 수 있는 시, 그런 시가 나는 무척 좋다. 한시에서도 이것은 예외가 아니다. 단 한 줄의 고양되는 감정의 마술이 없다면 시는 그저 아무렇게나 쓰여진 언어의 잡다한 정보에 그치고 말 것이리라. 때로는 그것이 글 사이의 여백에서 드러나는 경우도 있다. 담박하고도 평범한 글과 글 사이의 여백에서 그런 가슴 싸해지는 경험을 하고 있으면 이것이 인생 사는 또 다른 재미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렇게 시에 빠져들면서 몇 가지의 생각이 들게 되었다. 우선은 인생이라는 삶의 경험 속에서 가끔씩 나타나는 삶의 깨달음과 눈 앞에 드러나는 또 다른 세상의 경험을 어떻게 언어로서 표현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깨달음은 그저 깨달음으로서 느낄 뿐이지 그것을 언어로 빌게 되면 이미 "도가도 비상도"가 되어버린다. 감정도 또한 그러하다 멋진 풍경 앞에서 압도당해 그 풍경 속에 자신을 잊고 서 있을 때의 감정을 어떻게 언어로써 다하겠는가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언어라는 형태를 통해 그 순간의 정황을 남겨두려고 하지만 사실 언어로서 남게 되는 것은 그 사람의 박제된 마음 뿐이지 않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선택되고 마음이 담겨진 한 줄의 글을 보면 글쓴이와는 달리 또 읽는 이의 마음으로 빚어내는 새로운 세상과 감동이 있고, 그 속에 시의 매력이 놓여져 있다는 점이다. 그것이 때로는 '화개장터'에 한 번도 가지 않고 '화개장터'라는 노래로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글을 만들고 '흑산도 아가씨'를 만들고 '돌아와요 부산항에' 라는 글들을 만들어 내었지만 말이다. 왜냐하면 예술 작품이란 만들 때에는 만든 이의 세상이 되고 그것을 감상할 때에는 감상하는 이의 전혀 다른 세상이 되기 때문이다. 별 것 아닌 문장 속에서도 자신의 가슴이 열리어 그것을 바탕으로 명문장이 생길 수도 있고 또 자신의 삶을 움직여낼 수 있는 힘을 얻기도 한다. 이것은 모두 격물하는 자의 마음이 만들어내는 세상이 아니던가?

  그래서 늘 글을 보고 있을 때면 우리는 언어의 미로 속에 빠져 그 글이 쓰여진 풍경과 마음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환상에만 집착하는 우를 범할 수도 있다. 삶이 한바탕의 꿈이듯, 우리는 그 꿈 속에서 또 많은 작은 꿈들과 환상을 접한다. 그래서 우리는 원초적으로 늘 깨고 싶어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어하고 보다 진실한 세상의 비밀을 알고 싶어한다. 한시에서 삶의 깨달음을 지향하는 시가 빠지지 않는 이유도 그러할 것이다.

  시를 풀이하면   언어(言)의 사원(寺)이 된다. 언어의 가장 순수하고도 깊이있는 추구를 통한 삶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곳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그리고 시를 통해 우리에게 오는 느낌이나 감정 또한 그 원인이 없는 것이니 이 모든 것이 내가 비워진 상태에서 나를 통해 스치는 것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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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기의 방법
유종호 지음 / 삶과꿈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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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를 구성하는 언어들의 배열과 선택에 있어 시인의 마음으로 돌아가보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왜 이런 어휘가 어떤 과정을 통해 선택되었고 시 전체에 흐르는 움직임과 감정의 고양이 어느 부분에서 이루어지는지에 대해 시인과 공감하지 않을 때 그 시는 그저 지적 이해에 머물 뿐이다. 시의 이해에 있어 유종호 교수의 안내를 받는다는 것은 이런 면에서 축복이다.

  필연적인 언어, 대체될 수 없는 언어의 사용도 시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적어도 이 50편의 시를 읽는 동안 시의 맥락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내가 바꿀 수 있는 어휘가 거의 없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온 언어를 다 돌아서 눈 앞에서 확연하지고 또렷해지는 단어 하나가 시 속으로 들어가 제자리를 차지하게 될 때 우리는 그것이 단순히 돌아가는 톱니바퀴의 언어가 아니라 유기체의 한 부분으로서 살아 숨쉬는 생명을 얻게 됨을 보게 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시를 읽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무리 뛰어난 평론가의 글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그 무엇인가를 느끼며 읽는 시맛에 비할 것이 없다. 시의 질퍽하고 거친 골짜기를 지나 능선을 타고 한껏 올라서 어느듯 사방이 탁 트인 마루에 올라 맛보는 천의무봉의 열림! 그 열림 속에서 나는 우주와 하나가 되고 시와 하나가 된다. 그곳에서 시인과 나는 만나고 마음은 한 편의 시 그 자체가 된다.

  그러므로 시읽기의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의 가슴을 열고 그 심장의 떨림과 함께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시에 대한 불필요한 많은 설명을 피해야 한다. 독자의 상상력에 메스를 가하지 않는 시론이 필요하며, 독자들이 시와 만나는데 매개자없이 체험할 수 있는 책이 필요하다. 우리들의 삶이 상품화되어 갈수록 더욱 우리들의 체험도 간접화되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시적 이해를 위한 책보다는 시가 가슴에 담기도록 해줄 수 있는 그런 책이 나는 더욱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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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줄도 너무 길다 - 하이쿠 시 모음집
류시화 옮겨엮음 / 이레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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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이쿠, 5-7-5의 음절로 이루어진 한 줄짜리 정형시를 일컫는다.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시로 유명하다.  수백년전 일본에서 시작되어 지금은 하이쿠 시를 쓰는 작가가 백만명 정도라고 추산된다. 대표적인 하이쿠 시인 바쇼와 이싸와 부손은 각기 다르다. 바쇼는 고행자, 구도자적인 성격을 지녔으며, 부손은 화가와도 같은 원근감과 시공간 배치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싸는 인간주의자.

  하이쿠는 가장 압축된 글로 쓴 시이다. 그 압축된 글 속에 인생과 우주를 담아내는 시를 접하고 있으면 나는 깜짝 놀라고 만다. 아! 하이쿠는 단순한 시가 아니구나. 그것은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속으로 우리들의 삶속으로 이 우주의 심장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그것은 영혼을 울리는 선율이며 가슴을 뛰게 하는 그림이다.

"강물에 떠내려가는 나뭇가지 위에서 아직도 벌레가 노래를 하네"

"나비 한마리 절의 종에 내려 앉아 졸고 있다"

"밭에서 무우를 뽑아든 사람이 무우로 길을 가리켜 보이네"

"꽃잎 하나 떨어지네 어, 다시 올라가네 나비였네!"

"가을 달빛 속에 벌레 한마리 소리없이 밤을 갉아 먹는다"

"한 번의 날카로운 울음으로 꿩은 넓은 들판을 다 삼켜버렸다"

"한 낮의 정적, 매미 소리가 바위를 뚫는다"

  설명을 해서는 안된다. 함부로 입을 열어서도 안된다. 존재가 스스로를 드러내게 해야 한다. 살아있는 존재의 생동감이 나의 마음에서 일으키는 일들을 필연의 압축어를 통해 한 자도 버릴 것 없이 써내려간 글이어야 한다. 하이쿠를 보는 자는 말문을 닫는다. 아! 하는 탄성과 함께 그저 느낄 뿐이다. 촌철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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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5-05-14 0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든 정형시는 번역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하이쿠는 번역해 놓고 나면 김빠진 맥주가 되어 버리고 말거든요. 영어의 소네트도 마찬가진거로 말이죠. 저도 외국어를 잘은 못하지만, 역시 정형시의 맛은 그 나라 말의 정수를 느끼게 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달팽이 2005-05-14 0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그래서 원문이 실리지 않은 안타까움이 있군요...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류시화 엮음 / 오래된미래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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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삶에 대한 치유와 깨달음의 시는

우리 시대의 역설을 수용하고 소화해내는 마음의 비밀에 있다.

전문가가 많은 세상에 문제는 더욱 횡행하고

약이 많은 세상은 병은 더욱 만연하고

많은 종류의 쾌락이 추구되지만 삶의 행복은 찾을 수 없고

삶의 속도가 빨라지고 더욱 편리해지지만 삶은 더욱 황폐해져서

삶을 살아도 삶의 의미를 담아내지 못하는

우리시대의 역설을

어쩌지 못하는 역설을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살아간다.

벚꽃이 만발하여 하늘을 가린 숲에서

한 잔 술을 돌려가며 나누는 옛 이야기

젊은 날의 가슴아픈 사연들도

이 아름다움 풍경아래선 아름다움일 수밖에 없듯이

삶의 상처와 역설을 아듬는 우리 삶의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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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둔이 2005-04-13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하라 상처투성이 이 험한 길위에서
고귀하게 적막한 사랑하지 말고
사랑하라 사랑하지 못할 것같은 벼랑 끝에서
마지막 몸을 날리는 세상의 끝에서
사실 그렇게 사랑하다 모두 죽어가는 것은 아닌가
꽃잎 한자락의 아름다움이 잠시 아름다운 것은
사랑의 벼랑 끝에서 우리 시들 것을 알기 때문이다
사랑하라 세상이 내다버린 쓰레기 오물통에서
구역질 눈물범벅으로 울며 아름다움 하나없는 곳에서
그런 곳에서 인생의 상처를 훈장처럼 달며
매끄러운 사랑노래 목이 메어 꺼억거리는 저녁
그래도 그 시린 4월의 잔인한 저녁
갈고리같은 초승달이 봄가지 끝에 걸리고
여리고 흰 벚꽃잎 바람에 눈빨처럼 휘날린다
사랑하라 사랑하라 사랑하라
세상을 향해 외쳐되는 사랑의 외마디는 하늘의 별이 되고
봄밤에 쏫아오른 하늘의 꽃잎이 되고
사랑이 있어서 청춘은 이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사랑이 있어서 인생이 그 얼마나 죽을만큼 쓸쓸한가
외로운 봄밤 언덕에 올라서서 사랑하라 사랑하라
아직 상처받은 영혼이 사랑으로 이렇게 아프다
어느 가슴의 등불과 어느 하늘가의 별빛이
봄의 꽃잎으로 점을 찍은 풍경아래
그래도 사랑하라고 사랑하라며 나는
쓴 소주 한잔을 입안에 털어넣는다. 사랑의 상처속으로

달팽이 2005-04-13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캬아,,,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