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하 - 민족주의자의 길
박경수 지음 / 돌베개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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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신독재시대를 살다가 그들의 혼을 조국의 민주화의 제단에 바친 이들이 어디 한둘이랴. 우리가 평화롭게 숨쉬는 오늘이 먼저 간 넋들의 피와 땀으로 일구어진 보석이라는 것을 어찌 잊으랴. 하지만 역사 앞에서 피를 뿌리며 사라진 그들의 역사는 저기 저 너머로 뿌옇게 흐려져만 가고, 여기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은 역사적인 인식은 메말라 자신의 한 치 앞만을 보고 사니 가끔 우리들은 그들을 떠올려야 하리라. 이 평범한 일상에 장엄하고 치열했던 그들의 삶을 빌려와야 하리라.

  함석헌 선생님과 김지하 시인, 김대중 대통령과 지학순 주교, 김수환 추기경, 장일순 선생님의 삶들을 보고 삶의 교훈을 삼게 되면서 늘 기회가 닿게 되면 한 번 펼쳐보리라 마음 먹었던 삶이 바로 '장준하'선생이었다. 일제하에서부터 조국의 독립을 위해 많은 뜻을 세우고 일군 학도병을 탈출하여 조국의 광복군으로 활동하면서 젊어서부터 조국과 민족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가슴에 품었으나 분파주의 정치에 싫증을 느끼고 민중들 속에서 재야에서 자신의 뜻을 실현해갔던 고독했지만 정의로웠던 한마리의 호랑이...

  해방을 전후해서 김구 선생님을 보필하다가 자신의 소임을 마치고 민중의 입이 되어 독재정권에 대항해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싸웠던 그는 정치권력에 대한 욕망도 부에 대한 욕망도 없었다. 다만 그가 가진 자존심이라곤 정의와 역사와 민중을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소임을 대가없이 하겠다는 역사의식과 민족사랑이었음이다. 한국의 민주화과정에서 피를 흘린 숱한 사람들이 많았고, 그 중에는 자신의 야망을 채우기 위한 색깔을 걷어버리고 순수하게 살다간 유명 무명의 삶들이 있어 역사를 이끌었다면 그 중심에 장준하 선생이 우뚝 서 있었던 것이다.

  일제하에 일본 학도병으로 자원한 데에는 자신의 가족을 방어하고자 하는 마음이 앞섰고, 또한 춘원의 연설을 듣고 자신의 삶을 내던지는 로맨스도 없지 않았으나 이후에 펼쳐지는 역사에서 그의 민족주의에 대한 생각은 보다 깊어지고 체계화된다. 외세의 개입이나 간섭없이 우리 민족간의 자주적이고 평화적인 통일에 가장 중심을 두었던 그가 정작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반독재투쟁으로 일생을 보내야만 했던 시간들이 조금은 아쉬움이 남았을런지도 모른다. 고향 땅에 대한 그리움과 훌륭한 목사가 되겠다는 꿈을 접고 한 시대의 굴곡 속으로 몸을 던져야만 했던 그에게는 이미 자신의 영달과 심지어 자아에 대한 상마저도 접어야만 했으리라.

  삶은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가? 그의 파란했던 반독재투쟁, 유신이 무너져내릴 무렵 어이없는 의문사로 삶을 마감했던 그에게 많은 사람들은 아쉬움을 보인다. 하지만 그는 역사속에 민주화를 위한 사명으로 부름받은 한 인간이었으며 자신의 소명과 함께 역사의 무대속으로 사라진 인물로서 우리들에게 기억되게 되었다. 그의 죽음으로부터 멀지않은 시기에 박정희의 암살과 유신독재체제의 막도 내리게 되니까 말이다. 이렇게 장준하 선생처럼 역사속에서도 자신의 삶과 의미를 다했던 그가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어떤 교훈을 찾게 될까? 인간의 삶은 역사적인 삶과 개인적인 삶이 있다. 물론 정확하게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때로는 역사적인 무대에서 흔적도 없이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이렇게 역사의 무대 가장 선봉에서 살다간 사람들도 있다. 문제는 무대의 앞과 뒤가 아니라 그것이 자신의 내면적인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되는가에 있다.

  그는 아마 자신의 삶을 후회없이 살았으리라고 생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삶이 역사적으로 드러난 자리라서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돌이켜봄에 후회없이 자아에 대한 욕망없이 떳떳하게 살았으니까. 함석헌 선생님이 모시던 다석 선생님이나 무위당 선생님같이 역사무대의 전면에 나서지 않으면서도 숱한 사람들 뒤에 묻혀 있으면서도 자신의 역할을 다하시고 살다간 사람들도 또한 얼마나 많을 것인가? 그러하기에 삶의 의미는 자신이 자신에게 내리는 평가에서 얼마나 의미있는 삶을 살았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이러한 관점이 때로는 역사평가에서 민중적인 사관이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는 점들을 보게 해 줄 때가 있는 것이다.

  다시 삶이란 무엇인가? 그의 고단한 육체가 약사봉 계곡의 한 곳에 누웠을 때 그의 영혼은 그것을 바라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 것인가? 자신의 삶에 대한 꼭지를 떼는 듯한 가벼운 마음, 내 역할은 이제 끝이 났다고 생각하는 수용의 마음이 그의 가슴 한켠에 자리잡았지 않았을까? 내 삶은 고단했지만 그래도 열심히 보낸 거야. 비록 삶의 의미를 다 깨우치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의 인생은 큰 의미를 가지고 우리의 현대사 곳곳에 그 흔적을 드리우고 있다.

  나는 장준하 선생의 삶처럼 무대에 나서는 역할이 주어진 것은 아니다. 나의 삶을 보다 의미있고 가치있게 보내는 것은 무엇인가? 나에게 주어진 삶의 길은 무엇인가? 내면의 소리를 따라 살아온 몇 몇의 세월에 나는 진리를 향해 길을 간다. 그 진리....역사 속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모든 인류의 삶의 궤적 속에서 사람들은 각각 저마다의 삶의 의미와 진리를 찾아서 간다. 그것이 드러난 삶이 어찌되었건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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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 마틴 루터 킹 자서전
클레이본 카슨 엮음, 이순희 옮김 / 바다출판사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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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골짜기마다 돋우어지고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게 될 날이 있을 것이라는 꿈입니다."

    주님의 영광이 이 땅위에서 실현될 것이라는 그의 꿈은 외부현실의 질곡과 어려움을 바라보는 그의 성숙한 태도를 지속시켜주는 가장 큰 힘이 되었다. 인류 문명이 가장 발달한 미국, 그래서 가장 풍요롭고 문화적인 미국 땅위에서 벌어지는 불평등과 인종차별, 빈부격차와 인간적 존엄성의 상실에 맞서 평등과 평화와 사랑을 위한 비폭력운동에 인생을 헌신했던 킹 목사의 울림은 지금 우리들에게 주어진 평등과 평화의 씨앗이었다.

    '두려움 말고는 우리가 두려워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라고 하는 그의 말대로 자신은 수많은 암살과 테러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내면적 신의 임재의 경험으로 그 두려움마저 극복할 수 있었다. 정신병자 여성에 의한 치명적인 가슴공격으로 생명을 잃을 뻔한 순간에서도 그가 놓치지 않았던 주님에 대한 믿음이 그의 삶의 기둥이었던 것이다. 간디가 그랬듯이 절대자의 내면적 경험을 이루어내지 못한다면 맹목적인 믿음으로서 그런 삶을 살기는 힘들것이다. 세상의 잣대로 보면 사회적으로 출세한 저명인사의 지위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늘 주님의 영광 속에 살았기 때문에 자신의 욕망과 자아를 비울 수 있었고, 그것이 진정한 마르틴 루터 킹을 만들어내었던 것이리라.

    그의 비폭력 운동의 보이지 않는 곳에 이러한 정신적 뒷받침이 없었더라면 현실적으로 아무런 힘도 없는 비폭력 운동은 그저 패배자들의 불복종운동에 불과했을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온갖 폭력과 탄압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뛰어넘는 내면적인 힘이 바탕이 되었기에 비로소 그 어떤 폭력으로도 막아낼 수 없는 거대한 역사적 흐름을 형성시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삶의 가장 중요한 변화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시작된다. 내 마음 속에 켜진 진리를 향한 아주 작은 촛불이라할지라도 오대양의 모든 물을 갖다 부어도 꺼뜨릴 수 없는 법이다. 현실적인 힘이 작용하는 이면의 보이지 않는 곳에 마음의 작용이 있고, 그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은 일정한 조건을 갖추어 세상에 물화된다. 지금은 비록 결함이 많고 우둔하지만 밝은 곳 향하는 그 마음과 절대자를 향한 그 마음이 우리를 그것으로 인도해 준다.

    이러하기에 모든 세상의 비밀은 마음의 비밀에 있다.  자신의 마음 속에서 절대자를 경험한 자만이 비로소 세상의 조건에서도 인연 연기법칙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다. 킹 목사가 신의 임재를 경험한 순간, 그는 온갖 현실적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도 이미 자유로웠던 것이다. 내 안의 영원성을 발견한 순간부터, 그 때부터 마침내 자유로다. 마침내 자유로다...

P.S : 킹의 자료를 정리했던 엮은이의 많은 정성을 느낄 수 있었다. 글의 편집도 매우 매끄러워 감동적으로 잘 읽힌다. 단지 개인적으로 좀 더 아쉬운 부분은 너무 정치적, 사회적인 면에서 킹의 일대기를 그렸다는 점에서 그의 내면적 기록을 다룬 개인사가 좀 빈약하게 다루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원래 내가 좀 서정적인 면이 있어서 그런지 삶의 내면적 기록들에 더욱 마음이 가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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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거울 속의 슬픈 얼굴 - 사람 담은 최민식의 사진 이야기
최민식 글, 사진 / 현실문화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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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찍는 그의 첫번째 포커스는 가식과 왜곡없는 리얼리즘에 있다. 렌즈를 통해 보는 그의 눈은 서민들의 가난과 고통을 가장 사실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순간을 노리고 있다. 전쟁의 폐허 위에 피와 살에 양분을 제공할 수 없었던 굶주림과 허기짐을 해소하기 위해 몸부림쳐야만 했던 삶의 고달픔이 있고, 그 무거운 삶의 무게에 짓눌린 얼굴과 눈빛에는 그늘이 서려 있다. 하지만 그의 사진은 어둠에만 머물지 않는다. 50년대와 60년대의 각박한 민중의 삶에서 그 순간적 진실성을 포착했던 그의 사진에는 말로는 다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다. 여기에서 사진은 단순히 현실의 상을 그대로 뜨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눈에 의해 포착된 예술로서 승화되는 면이 있음을 알게 된다.

'순간적 진실성'이란 무엇인가? 그가 담아내는 사진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표정엔 가식이 없다. 그들의 생활에는 그들의 인생이 담긴 모습을 짓고 있고, 그 모습에서 될 수 있는 한 가장 진솔한 순간을 작가는 포착한다.  그 한순간의 포착이 바로 작가의 몫이다.  그 궁극적 한 점에서 담긴 사진의 얼굴에는 그 사람의 내면이 담겨지게 된다. 그 담겨진 내면을 우리가 눈으로서만이 아니라 가슴으로서 보고 감동을 느낄 때 '영원성'이 담겨지게 된다. 또한 그가 담아내는 사진에는 사회적 현실에 대한 비판정신이 담겨져 있다. 부와 빈의 차별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다수민중의 아픈 삶을 그려냄으로써 이 사회에 대한 풍자와 고발을 하고 있다.

작가가 만들어내는 사진에는 과거와 미래가 없다. 늘 현재만이 있을 뿐이다. 그는 찍는 순간만을 위해 존재한다. 이미 만들어진 사진은 그에게 있어 굳어져버린 인생의 일부분으로 남게 된다. 물론 독자들이 사진을 대하는 시간은 또 다른 현재이다. 하지만 작가에게 있어서는 늘 박제화된 사진을 버리고 초심으로 돌아가 '순간적 진실성'을 위해 무아의 경지에서 누르는 셔터만이 '영원성'의 작품을 만들어내게 된다. 그것은 유명세를 타고 부와 명예를 갖게 되더라도 그것을 넘어서는 예술성에 대한 헌신이나 부나 명예에 휘둘리지 않는 인격을 갖추고 있을 때만 극복할 수 있는 장애물이 된다.

최민식이란 작가가 매력적인 이유는 그런 작가의 초심을 스스로의 방식으로 살려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매 사진 한 장 한 장에 자신의 인생을 담아내려고 했던 그의 열정과 예술혼이 스스로의 사진인생에 만족하고 보람을 느끼게 하는 무엇을 만들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러한 자신의 내면적인 보람과 만족없이 어찌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으랴.

그의 사진을 들여다보며 우연한 기회에 그의 사진집 9집을 보게 되었다. 1950-97년까지 찍힌 그의 사진이 더욱 나의 눈길을 끌었던 것은 그의 주요활동이 부산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가 찍은 옛 흑백사진을 보면서 "아, 이곳이 옛날에는 이랬구나"하면서 지금의 모습과 대비하면서 옛모습에 대한 그리움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는 점이다. 남부민동의 언덕비탈길에 촘촘하게 지어진 50년대의 피난민들이 지은 집들의 모습과 80년대에 들어와서 개발되기 시작한 을숙도의 개발전의 원래의 모습, 낙동강과 김해의 옛 모습은 불과 50년도 채 되지 않은 세월동안 우리들의 삶의 모습이 얼마나 많이 바뀌었는지 알게 해주며, 지금은 이런 모습을 볼려고 해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게 되어버린 안타까움을 더해준다. 또한 자갈치의 생생한 인간냄새가 나는 사진들도 최민식이라는 이름에서 빼놓을 수 없다. 70년대와 80년대로 넘어가면서 사람들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밝은 기운들도 그의 사진역사를 따라가면서 알 수 있는 점이다. 물론 어느 시대건 아이들의 얼굴에서는 어쩌지 못하는 그 왕성한 생명력을 발산하고 있다.

이러한 최민식의 작품은 왠지 현대에는 잘 맞지 않을것이란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디지털 카메라에 의해 손쉽게 사진을 찍어대고 온갖 화려한 색깔의 옷과 거리의 풍경을 흑백 아날로그 사진기로 담아내는 데에는 이미 시대가 떠나가버린 것일까? 그래서인지 80년대로 넘어오면서 그의 사진에는 인도와 네팔 그리고 유럽의 모습들이 담겨지고 있었다. 어쩌면 그의 사진이 담아낼 풍경이 없는 이 사회가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울지는 모르지만 삶의 진실성과 아름다움을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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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참스승 선비 2
이용범 지음 / 바움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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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선비들의 곧은 정신의 칼날은 나의 허수아비 마음을 사정없이 내리쳐서 산산히 부서버렸다. 그들의 삶 속에서 바늘 하나 꽂을 곳 없는 기개에 나의 게으르고 나태한 정신은 사정없이 베이고 있었다. 죽음 앞에서조차 한 치의 흐트러짐없는 그들의 행동이 단순히 맹목적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우리는 그들의 삶 속에서 알 수 있다.

삶을 이끄는 것은 무엇인가? 사리사욕을 벗어나 옳음을 위해 자신의 정신의 칼날을 세워가는 것이 그들에겐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삶이었다. 그리하여 죽음 앞에서도 태연하고 곧은 절개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정신이 그들의 몸으로 체화된 인격을 이루었음을 말해준다. 인생의 의미에 대한 깊은 통찰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정승의 벼슬에 올라서도 조금도 자신의 부를 축적하지 않았으며, 관직에서 물러날 때 다 쓰러져가는 초가삼간 한 채로 미련없이 떠날 수 있었던 자의 뒷모습에서 어쩌면 아주 까마득히 잊혀져버린 군자와 참선비의 모습을 우리들 마음 속에서 찾아헤매게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의 삶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내 마음 속에서 아직 떨쳐내지 못한 아상이 슬며시 고개를 들이밀 때면 선비들의 칼날을 치켜세워야겠다. 그 서슬퍼런 칼날위로 나의 부끄러운 알몸을 드러내어야겠다. 내 삶 속에서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칼날 앞에서 까발려야겠다. 그리하여 내 허영과 자만의 얼음이 찬란한 햇볕아래 완전히 녹아내려 아무것도 없는 그 곳에서 나의 본모습을 발견해야 하리라. 그래서 비로소 나의 삶이 온전히 나의 것이 되도록 하는 정직한 대나무의 마음을 배워야 한다.

"뿌리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나무에게 줄기와 가지를 지탱하는 것이 뿌리이듯이 사람을 지탱하는 뿌리는 정신일 것이다. 그 정신이 곧고 굳을 때 비로소 세상의 풍파에 견디어 낼 수 있다.  뿌리를 깊게 내리고 거센 폭풍속에서도 말없이 줄기를 세우고 가지를 뻗어내어 세상을 향해 팔을 벌릴 수  있다. 그것은 사람을 사람이게끔 하는 본연의 모습을 보는 눈을 가지는 것이다. 몸의 생멸에 의존하지 않는 자신의 본래모습을 바라보는 관을 통찰할 때 비로소 몸에 의지하지 않는 참된 삶을 살아갈 정신적 뿌리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내 삶의 뿌리, 내 마음의 바탕, 그 곳에 내가 산다. 그 곳에 사는 참된 나를 응시할 때 나에게서 생로병사는 고개를 숙인다. 미혹한 사랑의 유혹도, 탐 진 치의 아상도, 깨닫고자 하는 그 마음도 쉬게 두고 자유롭고 자재한 인생을 대할 수 있게 된다. 마음없이 벼슬에 나아가고, 마음없이 세상에 나아가며, 마음없이 관직에서 물러나고, 마음없이 세상에서 물러나게 된다. 이 한 점에서 나도 세상도 시작되니, 이 한 점에서 나도 세상도 맺음된다. 열어내는 그 한 점이 닫는 한 점이 되니, 그 한 점은 무엇인가? 그것이 삶의 비밀이다. 그것을 찾는 것이 참선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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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참스승 선비 1
이용범 지음 / 바움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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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에서 항일기에 이르는 우리 옛 선비들의 일화를 담아낸 이 책은 오늘날의 우리 지식인들에게 주는 교훈이 작지 않다. 옛 선비들에게는 글공부에 대한 집념과 열정이 남달랐으며, 그것이 오늘날처럼 명예나 치부 또는 권력에 있지 아니하였다. 물론 부와 명예 권력을 위해 권력자에 빌붙어 아첨하는 소인배들이 없지 않았지만, 적어도 공부하는 옳은 방향을 지키며 살았던 인생의 스승들이었다. 높은 지위에 오를수록 청빈함과 굳은 절개를 놓치지 않았으며, 때로는 목을 겨누고 있는 서슬퍼른 칼날 앞에서도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초개와도 같이 자신을 버릴 줄 아는 그들에게서 참된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배우게 된다.

오늘날의 우리사회의 지식인들을 보라. 지식을 상품으로 팔아서 치부를 하려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대중들의 감각과 쾌락과 재미를 충족시켜 자신의 뜻을 꺽고 인기에 영합하려는 자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학문의 분야가 전문화, 세분화될수록 자신의 전문분야에 대한 오만함과 교만함으로 진리에 대해 외경스러운 태도를 이미 버린 자 또한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자신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거만함이 커지고 사람들 대하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자들 또한 얼마나 많은가?

우리의 옛 선비들은 자신의 글공부에 있어 우선 좁고 세분화된 길을 택하지 아니하였다. 文,史,哲  詩,書,畵 에 능해서 삶과 현실을 전체적으로 통찰하는 눈을 가지고 있어 어느 한편에 치우침이 없었다. 또한 글공부의 바탕에 인격함양과 삶에 대한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에 사회적 지위나 부와 권력을 뜬 구름과 같이 여길 수 있었다. 따라서 공사에 무사함으로 대하였기에 마음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었으며, 자신의 소신에 대해 죽음앞에 직면해서도 떳떳하게 맞이할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선비들은 인생의 참스승이라 불릴만하다. 이런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았고, 또한 이런 사람들의 마음이 통하는 세상이었기에 비록 물질적으로 풍요롭지 못하고 보다 불편한 삶을 살았다 하더라도 당시의 삶이 마냥 부럽게만 느껴지게 되는 것이리라.

그런데 요즘 세상에서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에서 무사 (無私)함을 실천하는 사람들을 보기가 어려워졌다. 또한 무사함의 삶이 세상사람들에게 인정되지 않고 오히려 무사함을 행하는 사람의 삶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우선 나조차도 반성할 일이 태산같으니 말이다. 하지만 마음으로라도 무사함을 행하려고 노력하고 살아야 한다. 옳은 것을 위해 부모도 버리고 자식도 버리는 일들과 같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는 어렵더라도 적어도 일들에 처해 마음 속에 허물을 스스로 더 지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든다.

234명이나 되는 선비들의 일화와 삶을 책 두 권으로 담아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적은 지면에 그들의 삶까지 다 담아내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대표적인 일화를 통해 그 사람의 됨됨이에 대해 우리들에게 교훈을 주는 책으로 만족해야 할 책이다. 하지만 읽는 이의 입장에서는 대표적인 일화도 좋지만 그 이면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지면의 할애가 있었더라면 더 감동적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 사람의 행동과 일화는 그 사람의 됨됨이와 그 사람의 삶에 대한 안목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도 그 사람의 행동과 일화이기보다는 그 사람의 삶을 사는 태도와 그 태도를 형성한 삶에 대한 보다 성숙하고도 깊은 관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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