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의 노래 1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3년 12월
평점 :
절판


  임진왜란의 흉흉하고도 절망적인 세상, 전란의 절박함과 처절함과 피비린내 나는 생존의 몸부림 속에서 장수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했던 이순신에게서 삶의 의미란 무엇이었을까?

도처에서 목이 잘리고 굶어  쓰러지고 강간당하고 창에 찔리고 불에 타 죽는 사람들과 숫적으로 감당하기 힘든, 끊임없이 밀려드는 적들과 싸우는 수장으로서의 근심과 조정에서의 형편없는 전세파악과 당쟁, 그리고 임금의 사직 유지의 두려움에서 오는 광적 숙청과 횡포 속에서 그는 삶의 무의미함과 덧없음을 언제 죽음의 순간이 올지 모르는 전장에서 느꼈을 터이다.

이 모든 삶의 부조리와 허망함 그리고 무의미함을 끊어내기 위한 칼이 그에겐 필요했으리라. 그 칼은 적을 향해 있지 않았다. 임금을 향해 있지도 않았다. 그것은 이 무의미하고도 덧없는 세상을 향해 있었고, 그것은 그 무의미한 세상을 응시하는 자신에게 겨누어져 있었던 것이다.

끝없이 파고드는 죽음의 두려움과 그것을 넘는 조국의 운명과 백성들에 대한 생각들이 그에게 칼을 더욱 날카롭게 벼리게 만들었고, 그 칼은 단 한 번에 그 모든 것을 없애버려야만 하였으리라.

칼은 일회성이요 단순함이다. 또한 불가역성의 현실이다. 한 번 베어진 것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인생이요 세상이다. 한 번 펼쳐진 인생과 세상은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것이다.

그 칼 한 자루에 삶의 노래를 담았다. 자신의 생사를 넘어서 무의미한 세상의 덧없음을 넘어서 그 삶과 세상을 넘어서는 노래를 담아내었다.

그 순결한 칼은 한 번도 사람을 그리고 세상을 배반하지 않는 정직함을 갖추었다. 칼은 우회하지 않고 세상에 직접 나아간다. 그 순결함과 정직함 앞에 베어지는 것은 세상이 아니다. 자신의 마음 속의 상념들이 하나씩 베어지는 것이다.

이순신을 죽이려 형을 내리는 것도 적의 존재요, 그를 다시 살려내는 것도 적의 존재이듯 그 적의 존재는 칼로 모아진다. 이 위대하고도 단순한 칼의 상징성 앞에서 그의 삶은 담겨진다.

임진왜란과 전쟁의 서사적 구조와 이순신의 내면적인 묘사가 어쩌면 이렇게 언어로 잘 표현했을까? 그의 말대로 현충사를 수시로 드나들며 그의 칼에 어린 충무공의 혼을 읽어내려는 그의 마음을 읽어내려는 그의 간절함이 충무공의 마음과 만난 것은 아닐까?

충무공의 한산도 야음을 마지막으로 적는다.

한 바다에 가을빛 저물었는데

찬바람에 놀란 기러기 높이 떴구나

가슴에 근심 가득 잠 못 드는 밤

새벽 달 창에 들어 칼을 비추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람으로부터 편안해지는 법 - 소노 아야코의 경우록(敬友錄)
소노 아야코 지음, 오경순 옮김 / 리수 / 2005년 6월
평점 :
품절


  현대 사회에서 인간은 복합적인 층의 인간관계를 수많게 그리고 다양하게 맺고 산다.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외로움을 피하기 위해서 많은 관계망들을 만들어내고 때로는 많은 사람을 사귀고 아는 것이 자신의 영향력과 능력인 것처럼 돈과 시간을 투자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하지만 본래 나는 그런 인간관계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나처럼 소극적이고 사변적인 성향이 있는 사람은 친구들과의 적당한 거리를 원하고 또 나 자신이 친구들에게 많은 기대나 욕구를 가지지 않는 편이다.

  이 책은 그녀의 삶을 살아온 바탕으로 한  敬友錄이다. 따라서 친구들이라고 부르는 사람들과의 관계맺음이다. 그녀는 주로 친구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따라서 자신의 욕구에도 솔직하라고 말한다. 친구들의 요구가 마음이 내키지 않을 때에는 솔직하게 표현하고 비록 그 친구와 소원해지더라도 그렇게 서로의 성격을 인정하고 수용한 상태에서 유지되는 우정이야말로 오래 갈 수 있다고 한다. 서로에게 어떤 기대없이 사귀고 베푼다고 생각하는 것은 순간 순간 잊어버리는 관계가 그녀에게는 맞는 인간관계라고 한다.

  그녀의 이런 말이 나에게도 가끔은 들어맞는다. 한 인간이 가진 관계망은 다층적이기 때문에 늘 한 관계에 엮이게 되면 다른 관계들이 소원해지기 마련이다. 때에 따라서 남들의 부탁이나 요구를 거절하는데 능숙하지 못한 나는 오랫동안 친구들과의 기대와 요구 때문에 마음의 걱정을 겪어왔던 경험이 있다. 그래서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그대로 표현하며 사는 것이 때로는 필요하다는 생각에 동감이다. 부모지간에도 부부간에도 친구간에도 때로는 그저 형식적으로 만나는 사람들이라도 말이다.

  그녀는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에게 좋은 사람으로 인식되려고 하지 말라'라고 했다. 그녀가 얘기하는 인간관계의 기술들은 그녀의 삶의 체험에서 나온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들이 삶과 인간관계의 기술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인격적인 뒷받침이 되어야 한다. 자신의 삶의 진정하고 가치있는 것을 위해서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자신의 생각으로만 남들을 이해하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면 남을 미워하기도 하고 무관심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솔직한 마음을 인정해주고자 하는 마음이다. 자신과는 다른 성격과 개성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관계는 시작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은 어렵다. 특히 자신의 이해관계를 내세우게 될 때에는 더욱 그렇다.  될 수 있는 한 인격으로써 사귀려고 해야하며 친한 관계를 유지한다고 하더라도 많은 기대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 하지만 관계의 당사자가 서로에게 요구하는 기대수준이 다른데 문제점이 발생하기도 한다. 그럴 때에는 하나의 관계가 또 다른 관계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럴 때에는 우선 자신의 욕구에 솔직해져야 한다. 비록 그것이 잘못된 판단일지라도...따라서 나같은 사람은 될 수 있는 한 많은 인간관계를 맺지 않는 것이 좋다. 그저 주어진 관계나 근근히 유지하면서 살면 그만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람풍경 - 김형경 심리 여행 에세이
김형경 지음 / 예담 / 200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40대가 된 한 여인이 자신의 살던 아파트를 팔아서 세계여행을 떠난 이상한 내력이 그녀의 여행에 대한 관심을 더욱 끌었다고만은 할 수 없을 것이다. 목차에서부터 그녀가 떠난 세계의 한 곳 한 곳의 풍경과 그것에 투사된 자신의 마음이 똑같은 깊이만큼 방향만 달리했을 뿐 자신의 내면 속에 어떤 떨림을 만들어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여행기는 특별하다. 풍경과 지식에 대한 정보와 그것에서부터의 감정과 정서가  평범한 여행기의 내용이라면 적어도 이 여행기는 여행에서 만나는 모든 낯선 것들이 자신의 '마음'을 되비추어주고 있다는 것이고, 그런 마음의 상태의 섬세하고도 자세한 추적을 통해 자신의 존재에 대한 보다 깊은 상처와 아픔을 건드리면서 그것을 이해해내고 그런 과정에서 마음 내부로 쌓여져왔던 벽을 허물고 세상과 보다 투명하고 있는 그대로의 접촉과 받아들임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여행 도중 그녀는 아무런 기록에 대한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단지 자신의 온 존재로서 여행을 통해 자신에게 떠오르는 생각과 느낌에 충실해보겠다는 다짐만이 있었다고 한다. 그랬기 때문에 모든 여행의 단면 단면들에서 자신에게로 들어가는 문을 발견할 수 있었을테고 그것은 여행을 통해 보다 훌쩍 성장해버린 그리고 자신에 대해 보다 깊고 넓게 이해할 수 있게 된 마음의 눈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무의식에서 시작된 그녀의 마음 여행은 사랑과 분노 우울 등의 부정적인 감정들의 원인을 파헤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그러한 원인이 형성되었던 시기와 그 당사자들의 마음의 이해와 공감으로부터 상처는 아물게 되었다. 이후에는 그러한 이해와 성숙이 그녀의 긍정적인 변화로 이끌게 되었고 자기애, 자기 존중, 몸 사랑, 에로스, 친절, 인정과 지지, 공감 용기와 변화 등의 자신 속의 잠재적인 행복의 씨앗들을 발견할 수 있게 하였다.

  세상에 태어나서 유아기 때 가지게 되는 경험이 그 사람의 성격형성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고 따라서 성인이 되었을 때의 문제행동과 성격의 원인은 치유되지 못한 유년기의 사건에서부터의 정신적인 상처와 고통으로부터 비롯된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의 이상 성격의 원인이 제대로 이해되기만 해도 그는 더 이상 그같은 상처로부터 계속해서 고통받지 않을 수 있다고 한다. 적어도 그녀에게만큼은 이러한 정신분석적이고 심리치료적인 면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결국 자신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겪는 대부분의 고통은 그것이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정신적 상처와 이상 성격의 원인을 제대로 이해하기만 해도 우리는 그 상처로부터 어느 정도는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녀는 결론부분에서 조심스럽게 심리치료와 정신분석이 가진 한계에 대해 이야기하며 종교로의 길을 열어놓고 있다. 자신을 바로 아는 데에 있어 과학적인 방법으로서의 심리학과 정신분석의 한계는 있기 마련이며 따라서 온전히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종교적인 방법만이 완전할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내가 누구인가? 에 대한 답을 온전하게 내릴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세상은 나에게 왜곡되지 않은 모습을 띄고 나타나게 된다. 내 마음이 비뚤어져 있으면 내게 비친 세상도 비뚤게 마련이다. 타인과 관계맺는 것에서부터 일을 하고 사랑을 하게 되고 세상을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의 출발점이자 귀결점은 우선 나를 바로 보는 것이다. 나의 대한 모든 의문들이 풀릴 때에 비로소 세상은 그리고 모든 존재는 나에게 온전한 의미로서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누아 2005-09-19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브랜드 베이슨의 [치유]를 따라 감정과 신체치유를 한 후 유아기 때의 경험이 왜 그토록 깊이 한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합니다. 전생으로 해석해내야 하는 걸까요? 그때는 우리 모두가 너무 약했잖아요?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의 삶이 내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니...제가 관심을 갖고 있는 부분의 이야기가 이 책에 있나 봐요. 보관함에 넣어 두었다 여유가 생기면 한번 보고 싶네요. 제가 궁금해하고, 무언가 읽을까 고민하고 찾을 때면 님이 어김없이 먼저 읽고 리뷰를 남기시네요. 일부러 그러시는 건 아니겠지만 고맙습니다.

글샘 2005-09-19 2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에 대한 모든 의문들이 풀린다...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요? 그런 걸 꿈꾸는 것만으로도 벅찬 느낌입니다. 추석 잘 보내셨나요? 잘 읽고 갑니다.

달팽이 2005-09-19 2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요. 이누아님 가끔 님의 글을 읽으면서 저도 비슷한 마음의 궤적을 가진분이라 생각을 하곤 하였는데..
글샘님 추석 잘 보내셨나요? 저희학교는 화요일도 임시 공휴일이라 미뤄두었던 일이나 좀 할까 생각합니다.

이누아 2005-09-20 0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슷한 마음의 궤적 때문이 아니라 님의 방대한 독서량 때문은 아닐런지...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4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지음, 우석균 옮김 / 민음사 / 200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스카르메타는 정말 네루다를 좋아했구나. 그만큼 네루다를 국민시인으로서 국민들의 일상생활속에 네루다의 시가 스며들었던 것을 작품을 통해 보여주려했다는 것이다. 문학에 대해서 한 번도 공부해본 적이 없는 어부의 아들인 마리오가 네루다를 만나면서부터 시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시가 자신의 가슴속에서 살아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베아트리스를 만나고 사랑을 하게 되고 가정을 꾸리는 전 과정에서 그는 점점 더 시인과 끈끈한 인간관계를 맺게 되고 시인의 시와도 그렇게 된다.

  베아트리스가 그녀의 과부어머니와의 얘기 속에도 시는 메타포로서 살아있다. "기막혀! 남자애 하나가 내 미소가 얼굴에서 나비처럼 날갯짓한다  그랬다고 산티아고에 가야 되다니."하자 과부역시 말한다. " 닭대가리 같으니! 지금은 네 미소가 한마리 나비겠지. 하지만 내일은 네 젖통이 어루만지고 싶은 두 마리의 비둘기가 될 거고, 네 젖꼭지는 물오른 머루 두 알, 혀는 신들의 포근한 양탄자, 엉덩짝은 범선 돛, 그리고 지금 네 사타구니 사이에서 모락모락 연기를 피우는 고것은 사내들의 그 잘난 쇠몽둥이를 달구는 흑옥 화로가 될걸! 퍼질러 잠이나 자!"

  삶 모두가 온세상이 메타포가 된다는 것은 우리들에게 주어진 현실이 오감각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아니 오감각이 상상력을 통해 뒤엉킨 새로운 세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이다. 사실 칠레사회를 사회주의적인 개혁을 거쳐 민중이 살기좋은 세상을 만든다는 것도 가슴속에서 먼저 만들어진 메타포이며 우리들의 삶을 아름답게 사랑의 색깔로 채색한다는 것도 일종의 메타포다. 그래서 현실보다 더욱 현실인 메타포가 되며 메타포는 새롭게 현실을 창조해간다.

  네루다가 파리대사로 가서 병들었을 때 소니녹음테이프로 파도소리와 종소리 갈매기소리 등 자연의 소리를 담아달라고 했을 때 마리오는 그 소리들을 정성껏 채집하는 과정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이런 자연의 소리가 어떻게 네루다의 마음을 통해서 시로 형상화되는 것인지...그것은 마리오에게 있어서 네루다의 가슴과 직접 만나게 해주는 시작의 과정이었다. 평범한 어부의 아들이 시인적 감성을 갖고 시작을 시작하는 과정. 자연의 소리를 가슴에 담아 자신에게 일어나는 느낌들을 포착하는 과정...

  왜 이 이야기의 결론은 검은 물이었을까? 칠레혁명의 실패와 좌절을 담았을까? 네루다의 죽음을 의미했을까? 그토록 경쾌하고 가벼운 필체로 써내려간 이 이야기가 마지막 부분에서 감당하기 힘든 어두움과 무게로 끝을 내려했던 스카르메타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자신의 삶이 대중음악과 자전거여행과 춤과 여러 가지 가볍고도 즐거운 취미들로 가득찼었고, 그것도 문학속에 반영되었지만 그 가벼움을 바탕으로 한 생활에서도 역사와 삶과 시에 대한 무거움이 마치 바람을 맞아 강표면의 물이 나부끼더라도 밑바닥의 물이 그것을 지탱해주는 것처럼 버티고 있었던 것일까?

 


댓글(6)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5-08-28 15: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icaru 2005-08-28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마지막 부분이 어둡게 끝났었지...싶어요...
근데 베아트리체의 엄니는 질펀하게 말씀도 잘 하신다니까요~

2005-08-28 16: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달팽이 2005-08-28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반갑습니다. 이카루님 이렇게 또 과부아줌마의 말에 감동하는 독자를 만나게 되어서요...ㅎㅎㅎ

2005-09-02 11: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달팽이 2005-09-02 1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속삭인 님 잘 읽어보세요...
 
무서록 범우 한국 문예 신서 13
이태준 지음 / 범우사 / 1999년 12월
평점 :
품절


  무서록, 글의 일정한 순서나 형식없이 써내려간 글이라는 의미다. 수필형식으로 보여지는 이 책은 근대적 작가로서 "운문에는 지용, 산문에는 상허(그의 호)"라고 불릴만큼 그의 문장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42편의 제목으로 쓰여진 이 글들은 이태준의 삶을 바라보는 눈이 얼마나 깊고 투명했는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뿐만이 아니다. 글쓰는 형식에는 문외한이던 내게 글이 단지 마음만 잘 담아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이 잘 담겨지기 위한 필연의 형식을 발견해내는 것도 역시 글쓰는 이의 몫이라는 것을 절감하게 하였다.

  우선 그의 사람과 사물, 자연을 대하는 마음에는 우리 옛 조상들이 그러하였듯이, 깊은 관찰과 자아와 집착을 비우는 것에서부터 출발하여 대상과의 깊은 교감이 우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 나아가서는 구도자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 깊은 곳에서 건져올린 언어들이 일정한 배열을 갖추어 하나의 선율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문체가 화려하고 기교가 많은들 무엇하겠는가. 우선은 자신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의 울림없이 나온 글들이 어찌 타인의 마음 깊숙한 곳을 울릴 수 있겠는가 말이다. 글에는 우선 작가의 마음이 담긴다고 했을 때 그 마음없이 타인의 마음을 공명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필묵, 십분심사일분어, 자연과 문헌, 묵죽과 신부 등등의 작품에서 드러난 그의 세상을 보는 방식은 이미 삶의 멋과 지식을 쌓는 것을 넘어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탐구심이 바탕된 탐구자이자 구도자의 자세인 것이다.

  다음으로 그가 글을 쓰는 방식이다. 그의 글을 맑은 정신으로 읽다보면 그의 글에서 필요없는 군더더기가 거의 없을 뿐더러 그가 선택하는 어휘 하나 하나가 아주 압축적이면서 자신의 의도를 표현하는 가장 직설적인 언어라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문체 또한 마찬가지다. 그것이 독자의 마음 속에 일으키는 마음의 파동을 극대화하기 위한 문체의 선정에 대한 직감적인 포착이 엿보인다. 주제에 접근하는 방식 역시 그러하다. 때로는 직설적으로 바로 들어갔다가, 때로는 넌지시 둘러서 이야기를 하다보니 어느새 주제에 접근해버린 것이라든지....이런 다양한 방식에 따라 그것이 주는 느낌도 물론 달라진다.

  역시 글의 대가는 직관적인 글쓰기를 한다. 왜냐하면 글쓰기가 하나하나 논리적으로 맞추다보면 어설프기 그지없는 글이 되는 경우가 많을 뿐더러 글 전체의 느낌이 살아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글은 작가의 마음속의 직관에 의해 포착된 글들이 직관적인 에너지를 통해 분출할 때 자연의 선율을 타고 우리들의 가슴속에 잦아들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런 직관을 계발하기 위한 작가의 노력이 한 작품 이면에 얼마나 많은 습작과 고통의 세월이 쌓여진 것인지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그래서 재능과 노력이 뛰어난 작품을 만들어내듯, 세상을 격물하는 마음이 어떤 상을 그려내고 그 상을 따라 언어화시키는 작업의 독창성과 숙련도에 의해 작품은 그 빛깔을 달리하게 된다. 이런 면에서 이태준의 작품들은 물을 관찰하는 그의 마음과 그것을 일정한 형식의 글로 엮어내는 재주까지 모두 배워야 할 고전과도 같은 것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21세기를 살아가는 나에게는 그의 이 책이 고완이 되는 것이다. 새롭게 되살려야할 글쓰기의 텍스트가 되는 고전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