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조너선 사프란 포어 지음, 송은주 옮김 / 민음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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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1 사건에 의해 세계무역기구 건물이 지상에서 사라진 지 6년 째가 되는 해다. 사람들 사이에서 이제 더이상 입에 오르지 않는 아팠던 역사의 상처를 말없이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아직 우리 주위에는 있다. 아물지 않은 상처로 늘 반복되는 같은 하루의 기억으로 괴로워하며 어제와 똑같은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역사란 과거가 아니며 오늘이라는 현재로서 살아있다. 이 책은 9.11사건이 남겼던 역사적 흔적이 고스란히 한 아이의 가슴 속에서 살아있는 모습을 아이의 섬세한 감정과 생각들 그리고 아버지를 찾으려는 깊은 그리움과 두려움의 이야기로서 보여준다. 소통을 원하는 간절한 욕망과 단절된 세계와 바로 옆에 있지만 그 사이에 놓여진 벽 때문에 괴로워하는 한 아이의 성장기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을 사랑해주는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의 진정한 소통을 원한다. 그토록 가까이 존재하면서도 한번도 그 사람의 진정한 마음과 소통해본 적이 없는 삶은 아직 우리에게 남겨진 인간의 비극의 골자이며 무거운 과제이다.

  베트남 전이 일어났을 때 수많은 신문보도와 뉴스보도도 베트남 전에 대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진 못했다. 사람들의 마음 속 어딘가를 건드려야만 그들의 억눌렀던 감정을 분출시키고 그들이 마음 속에서 하고 싶었던 내면의 말들이 두려움과 공포를 걷어내고서 양심의 소리를 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런 비밀의 열쇠는 쉽게 찾아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한 사진기자에 의해 비로소 이루어졌다. 네이팜탄을 맞고서 절규하는 한 베트남 소녀의 울부짖음이 담긴 사진 한 장을 통해서였다. 그것을 통해 미국사회에서 반전여론이 거세게 몰아치게 되었고 그 폭풍과도 같은 양심의 소리는 세상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는 똑같은 한 점을 자극하여 같은 목소리를 지구상 곳곳에서 울려나오게 하였다. 이 책도 바로 그러하다. 미국의 세계지배구조라든지, 아랍과 이스라엘의 민족분쟁이라든지, 미국과 이라크의 대립이라든지 오사마 빈 라덴이라는 무거우면서도 역사적인 사건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으면서(때로는 그런 역사적 사건은 그와 동떨어진 개인의 삶에 아무런 침투도 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저 한 아이의 아버지를 추억하는 과정을 따라 솔직하고 감동적으로 써내려가면서 보여주는 그 상처를 보고 있으면 어쩔 수 없이 우리 마음의 작동기제 한 점이 꼼짝없이 눌러진 것처럼 테러와 전쟁의 비극과 그 씻을 수 없는 상처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세계무역기구 빌딩이 무너지는 그 순간 오스카의 아파트로 전화가 걸려온다. 오스카는 얼어붙은 채 전화를 받지 못한다. "너 거기 있니? 너 거기 있니? 너 거기 있니? 너 거기 있니? 너 거기 있니? 너 거기 있니? 너 거기 있니? 너 거기 있니? 너 거기 있니? 너 거기 있니? 너 거기 있니?"(열한번이나...)하는 아버지의 전화를 그는 절대로 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아이의 정신적인 상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아버지를 잃은 상실감보다 그 아버지의 마지막 전화를 받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두려움이 바로 세상 사람들과의 소통을 단절시키는 삶의 시작을 만들어낸다. 대중교통수단에 대한 공포증이 생기고 고층 아파트의 윗층으로 올라가지 못하게 된다. 론이라는 아저씨를 사귀는 엄마와의 소통도 단절되고 그는 그저 아무것도 없는 자신의 가슴 속 황폐한 한 곳으로 갇힌다. 그 곳에서 그는 움직일 수도 움직일 의지도 잃게 된다. 그것은 이 세상으로부터 점점 멀어져가는 뉴욕의 여섯번 째 구가 되어버린다.

  이러한 그의 상처는 할아버지의 상처와 닮은 데가 있다. 드레스덴의 한 마을에서 자신의 사랑하는 여인이 아이를 가지게 된 것을 들은 다음 날 자신을 이루고 있던 모든 것을 그 도시에 무수하게 쏟아져내린 짧은 폭격으로 잃어버린다. 우리들의 삶은 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연약한 기반 위에 서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인가가 영속적으로 지속되기를 기대하는 것만큼 우리를 어리석게 만드는 것은 없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들 모두를 잃었고 자신의 육체의 일부를 잃었다. 하지만 그가 잃었던 가장 큰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과의 소통 자체를 잃어버렸다. 그는 단지 오른손에 '예'와 왼손의 '아니오'를 통해서만 세상과 소통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늙은 할아버지의 쭈굴쭈굴한 손에 적힌 두 글자는 오스카의 모습을 달리 보여주는 거울이다.

  아버지를 그 누구보다도 사랑했고 아버지와의 추억만이 자신의 삶 속으로 깊이 들어왔던 것이라고 믿고 있던 한 아이에게서 세상은 훌쩍 아버지를 앗아가버렸다. 그는 저 세상으로 갈라진 틈새에다 대고 자꾸만 아버지를 불러댔을 것이다. 순간 늘 그대로 있던 그의 모든 공간이 이젠 그저 껍질만 남은 채로 그에게 주어졌다. 그에게 있어 오로지 의미있었던 것은 아버지를 기억하는 것이었고 그 아버지에게 깊이 다가가지 못했던, 그래서 하지못했던 숙제를 마치는 것이었으리라. 파란 병 속에 든 열쇠의 자물쇠를 찾아가는 과정은 바로 그 과정이었고 그는 그것을 통해서 아버지에게 다가가려고 하였다. 또한 그것은 진정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오스카의 이런 생각과 일상 그리고 감정들을 대할 때마다 그 작고 다른 아이들과 조금밖에 다르지 않은 생각들과 행동에서 전쟁과 테러의 흔적을 읽어낼 수 있고 눈물을 흘릴 수 있다. 다시는 이런 전쟁이 되풀이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 조그마하고 손톱만큼 이상한 행동과 세밀하면서도 감수성깊은 심리 묘사. 그것이 이 소설이 가진 매력이다.

  그 인류의 비극이 한 가정의 분위기를 어떻게 구성해가고 있는지 오스카와 엄마와의 관계, 그 누구보다도 오스카에게 절대적인 사랑을 바친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할머니(아들의 죽음이후 자신의 삶의 연속이 오로지 손자에게 존재한다고 생각하는지..) 그리고 외부세계와의 소통을 잃고 말을 잃어버린 할아버지의 손바닥을 통해 볼 수 있다. 그 손바닥의 주인공이 아들에게 보내지 못한 그리고 썼던 글씨도 없는 무수한 편지들...이 가족을 지배하는 기묘한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이해되지 못하는 이들의 행동 속에 깊은 영혼의 상처와 절망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이 주는 유일한 낙관이 있다면 상처받은 영혼을 가진 가족구성원들 간의 동병상련적인 배려와 보살핌이다. 한 아이의 영혼을 치유하기 위한 길었던 여정에 엄마도 론 아저씨도 그의 친구들도 할머니도 블랙할아버지도 그리고 쪼글한 두 손 위에 '예'와 '아니오'를 쓴 채 말을 잃어버린 할아버지도 꼭 필요한 존재였다. 즉 오스카 하나의 존재를 이 세상에 있게 하기 위해 그 모든 것이 다 필요했던 것이다.(드레스덴의 폭격도 세계무역기구의 테러도...) 할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의 시체도 없는 관을 파헤치던 날 할아버지와 오스카는 비로소 부재한 아버지를 통해 자신들의 인생의 지워지지 않는 상처의 일부를 묻을 수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 부분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어떤지 모르지만 나는 마음에 든다. 우리는 무사할 것이다. 실제로 그의 마음은 사건이 일어나기 전으로 거슬러간다. 아버지가 세계무역기구 건물의 바닥에서 다시 떨어졌던 장소로 올라가고 건물에서 거꾸로 스텝을 밟으며 나온다. 집으로 들어와서는 나이프와 포크가 입에서 음식을 꺼집어내고 면도기가 아버지의 수염을 갖다붙인다. 아버지와 함께 했던 침대에서 뉴욕의 여섯번째 구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오스카는 아버지에 대한 정신적 상처를 씻어내었음을 보여준다. 어떤 역사적 상처와 비극 앞에서도 우리들의 영혼이 상처받지 않는 부분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메세지는 아니었을까? 티베트의 비극에서는 달라이라마가 있었고, 캄보디아에선 마하 고사난다가 있었고 베트남엔 틱낫한 선사가 있어 전쟁의 상흔과 상처를 보듬어준다. 보이지 않는 곳의 영혼의 상처를 감싸안고 어루만져주는 많은 부처님들. 그들은 우리들의 곁에 우주라는 이름으로 늘 존재한다. 문득 마음이 환해진다.

  이렇게 일상적이고 조그만 이야기들을 통해 전쟁과 인류의 비극이라는 무거운 주제에 깊이 천착할 수 있다니...소설가 김연수의 다음 말이 이해가 된다. "지난 5년간 나온 소설 중 가장 아름답다." 그리고 존 업다이크란 사람이 누군지 몰라도 이 책에 대한 그의 소감은 마음에 든다. "드높은 독창성과 감정의 집요한 묘사." 어떤 찬사도 아깝지 않다. 그러니 사람들이여, 이 책을 읽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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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2-28 2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명하고 감동적인 리뷰에 보관함으로 직행입니다.^^

달팽이 2007-03-01 0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은 제쳐두고 제 마음은 전달되었나요?^^

짱꿀라 2007-03-04 0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관함에 잠자고 있는 책인데 역시 달팽이님의 서재실에서 다시 리뷰를 읽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명쾌한 리뷰 명리뷰 잘 읽고 갑니다.
 
신 기생뎐
이현수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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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현수 작가는 2005년의 어느 4월 기생 부용의 산소를 찾았다. "봉분의 잔디가 하도 푸르러 눈이 아팠다. 나는 묏등에 가만히 손을 갖다대었다. 그대가 잃어버린 신발을 찾아주겠노라고, 그대들이 하고 싶은 말을 놓치지 않고 쓰겠노라고, 상상이 아닌 짐작으로."  부용의 봉분 앞에서 그녀의 삶을 생각하던 작가는 어쩌면 조선시대에 한많은 상처를 안고 살다간 기생의 환생은 아니었을까? 그녀는 이 소설을 소재가 작가를 선택한 것이라고 했다. "기생들은 불현듯 나를 불렀고, 나는 그들이 불러주는 말을 받아적었다." 조선시대 기녀들의 영혼이 그녀의 이야기 속에서 되살아난다. 그 기녀들이 자신의 삶 속 깊이 아로새겨진 영혼의 상처와 못다한 이야기들이 현대 여성의 펜을 통해 하소연되고 있다. 그 영혼들은 다만 자신들의 애처로웠던 삶의 이야기를 누군가가 공감하고 연민의 눈물을 한 방울 떨구면 영혼의 위안을 받을거라 생각하였는지도 모른다.

  다시 수백년의 세월이 흐른 뒤 한 여인이 꿈을 꾼다. 자욱하게 깔린 안개 속으로 정처없이 걸음을 옮기다가 멀리서 부옇게 불을 밝히고 있는 등을 발견할런지도 모른다. 반가운 마음에 걸음을 옮기자 안개는 걷히면서 부용각의 선명한 기와 아래로 분주하게 오가는 기생들을 만날런지도 모른다. 말없이 오가는 분주한 발걸음 사이로 바람맞아 소슬하게 쓸리는 댓잎의 소리가 뜰 안을 가득 메우고 한바탕의 꿈같은 햇살은 묘한 색채의 마술로 공간을 더욱 신비롭게 만들런지도 모른다. 우리 옛 조상들의 삶 중 하나였던 기생들의 삶, 그 마지막 자리에 이 부용각이 있었고, 그 곳에서 마지막 기생으로서의 삶을 살다가 미스 민의 아릿다운 환영이 눈 앞을 스치고 간다. 그녀는 바로 나다. 나는 잠에서 깬다. 그리고 나는 전생에 마지막 기생으로서의 삶을 기억해낸다. 그리고 그 삶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묻는다. 그 답이 하나의 소설로 이어진다.

  처음 듣는 작가 이름. (문학에 약한 탓이지만) 하지만 그녀가 뿜어내는 이야기들은 마치 실제로 눈 앞에 부용각과 그 주위 배경과 구조와 위치 그리고 살아나는 인격들로 인해 문득 현실적인 화면이 되어 가득 찬다. 타박네의 앙칼지면서도 매서운 고함소리가 등골을 시리게 하고 오마담의 소리는 갈빗뼈를 서걱서걱 긁어댄다. 교자상 가득히 채워진 맛난 음식들 사이로 남녀의 허무한 욕망은 춤을 추고 그 욕망을 또 다른 욕망이 집어삼키고 그 욕망은 또 다른 욕망이 집어삼키면서 그 욕망의 허무함을 알게 된다. 그렇게 평생을 제대로 된 기생노릇에 걸었던 오마담은 욕망 없이 모든 남자들을 받아들이게 된다. 정사의 절정에 다다랐을 때 정면으로 바라본 그녀의 얼굴은 표정이 없었던 것이다. 남자에게서 받은 재산은 그것이 필요한 남자에게 아무런 거리낌없이 돌려지고 자신의 몸 속으로 들어왔던 수많은 남자들이 오고 가도 자신의 마음이 그에게 따라가지 않고서 왔을 때 남김없이 사랑하는 그녀는 이미 기생생활로서 인생을 꿰고 목에 걸고 다녔던 것이리라.

  한 남자가 와서 사랑이 되고 그 사랑이 남긴 상처는 어디로 갔을까? 기생에게 있어 그것을 무로 돌려보내는 작업이 바로 '소리'이자 '춤'이다. 미스 민의 춤사위는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기와 그 삶의 상처를 씻어내는 춤이자 남자와의 잠자리의 욕망과 집착을 털어내는 춤이 된다. 춤은 하나의 예술을 통해 승화된다. 자신이 춤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오마담의 '소리'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가 닿으려했던 스승의 소리는 바로 자신의 인생을 완성시키는 닿을 수 없는 절대의 소리였지 싶다. 모든 남자를 받아주면서도 박기사만은 받아줄 수 없었던 것은 바로 그 가져서는 안되는 욕망과 집착에 자신이 빠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라고 믿고 싶다.(박기사의 순수하고 지극한 사랑에 대한 죄책감이라기보다는..)

  집시 여성에게는 불문율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돈을 받고 몸을 주는 것은 상관없으나 '마음'을 주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욕망과 사랑의 집착을 완전히 버리고 바람처럼 걸림없는 삶을 지향했던 그들의 마음을 볼 때 능히 그럴만한 일이다. 우리 나라의 기생들을 생각하며 문득 집시 여성의 삶이 떠올랐던 것은 왜일까? 미스민과 오마담의 삶은 여러겹의 지층처럼 쌓인 한과 상처로 얼룩진 것이었을까? 아닐 것이다. 비록 사회적으로 신분적으로 천시받고 자신의 재능을 펴지 못하는 기생이었지만 바로 그 제약적인 삶을 통해서도 삶의 깨달음을 추구했던 그리하여 삶의 의미를 얻었던 영혼이 아니었을까?

  그 삶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 옛날의 기생들이 신분제적 한계 속에서 그 흔하디 흔한 한 남자의 마음을 평생 얻는 것이 이룰 수 없는 한이 되어 마음의 긴장감을 만들어내었다면 이제는 그 긴장감을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 그러한 한계를 만들어내어야 하는 점은 대비된다. 그래서 이미 평등위주의 사회에서 기생의 마지막 삶을 이어가기 위해 미스 민은 스스로 마음 속의 한계와 긴장을 놓치지 않는다. 그것이 기생의 삶을 지향하는 한 여자의 팽팽한 마음의 현을 고르는 방법이었으리라.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친구를 스스로 버리고 화초를 올리는 살풀이 춤에서 그는 끊어질 듯 끊어질 듯 마음의 현줄을 팽팽하게 만들어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 삶의 모습이야 뒤바뀌어도 그 이면에 정신적인 삶이야 어찌 다르다 할 수 있겠는가?

  집시 음악을 켠다. 스산하게 이는 바람 속에서 슬픈 듯 슬픈 듯 울리는 선율 너머로 그 슬픔을 묘하게도 아름다움으로 바꾸어내는 영혼의 연금술이 있다. 그 슬픔이 슬픔인 듯 하면서도 선율에 마음이 실리는 순간 그것은 그저 내 가슴 온통 젖게 하는 선율이 되고 슬픔은 사라지고 선율만 남는다. 이현수 작가는 이 책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우리 앞에서 사라져가는 기생의 삶이 그 애처로움이 그 슬픔이 점점 어둠 속에 파묻혀가며 남기는 여운 뒤에 이들의 삶 속에서도 다른 어느 계층 못지 않게 추구해왔던 삶의 의미는 있지 않았을까? 하고 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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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2-12 1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생들의 가얏고 소리와 허공에 그려내는 살풀이의 춤사위, 그리고 집시음악...
이 모두가 조화를 이루어내는 멋진 글입니다. 집시의 춤은 우리네 정서와는
반대쪽에 있지만 왠지 그들의 외면적인 정열 뒤에도 스산함이 서려있는 게 아닌지.
이 책, 언어적 감각이 노랫가락처럼 살아있어 군데군데 소리 내어 읽었지요..

달팽이 2007-02-12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랬군요. 드팀전님 블로그 들렀다 구해본 책입니다.
이현수작가의 글솜씨가 보통이 아니더군요...
앞으로 더욱 기대가 됩니다.

파란여우 2007-02-13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런 책 읽으면 여성의 상대인 남성이 가여워져요.
모성(자궁에 집착하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함몰된채 살아가는 남성성을 가엽다고 하면
화를 내시려나요. 뭐 부성성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박근혜같은 여자도 있지만.
기생이 불러주는 말을 적었다는 책을 그냥그저 바라만 봤는데 달팽이님의 리뷰는
어째 자꾸 지름질을 재촉하십니다.

달팽이 2007-02-13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뭐 저도 가여운 남자입니다.
파란여우님같은 멋진 여자 앞에만 서면...

짱꿀라 2007-02-26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작품을 대하면서 뭐라 할까? 참 고민이 된 작품이었습니다. 워낙 작품성이 있어서 그런가 저는 읽는 멍한 상태에서 읽었습니다. 뭐 어렵기도 했고요. 리뷰 잘 읽고 갑니다.
 
도쿄 타워 - 엄마와 나, 때때로 아버지
릴리 프랭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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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놀라운 책이다. 릴리 프랭크의 자서전적인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세살때부터 아버지와 별거에 들어간 어머니와의 동거를 통해 성장한 그가 아무런 가족관계의 결핍 없이 자랄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지극하면서도 애틋한 사랑때문었다. A를 투입하면 B를 꼭 산출하고야 마는 솔직하고 단순한 기계처럼, 이 이야기는 우리의 가슴 속에서 올라오는 감동과 눈물을 산출해낸다. 한번도 자식에게 힘들다는 소리도 못하고 자신을 위한 것에 한 치의 마음도 쓰지 않았던 어머니의 헌신적이고도 순교자적이기까지 한 사랑 앞에서 우리는 숙연해진다. 그런 어머니 아래서 자란 아이가 잘못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밤하늘에 수많은 별들 중 마음에 찍었던 하나의 별이 바로 지구를 향해 돌진해서 폭파되는 확률보다도 적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밤하늘에 보이는 수많은 별들이 시원하게 보인다. 그가 올려보는 도쿄타워 주위에 넓게 분포된 별들 사이로 어머니의 시선이 따뜻하게 내려오고 있을 것이다.

  왜 이 책이 감동적일까? 왜 첫 장을 넘긴 손이 책을 놓지 못하고 끝까지 읽어내어야만 마음이 해소되듯한 급속한 블랙홀 속으로 독자들을 빨아들였던 것일까? 지독하게 어려워서 수시로 이 집 저 집을 옮겨 다녀야 했던 유년시절에도, 서로 미워하지도 증오하지도 않아보이던 어머니와 아버지가 함께 살지 못하고 떨어져 살면서 결손가정이라는 구조를 유지하면서도, 이 모든 약점을 없이보이게 만들었던 어머니의 말이 없으나 뜨거웠던 그 사랑이 이야기의  전 공간을 따스하게 덥혀주기 때문이다. 그가 아무리 객관적이고 감정을 배제한 묘사를 해내려고 노력하더라도 이미 그와 엄마 사이에 놓여진 끊을 수 없는 질기고도 튼튼한 하지만 헌신적이면서도 애틋한 사랑 속에 모든 것은 이미 빨려들어가버렸던 것이다.

  우리는 가까이서 우리 인생을 나누는 사람들의 마음 속으로 진정으로 한 걸음이라도 들어가 본 적이 있는가? 이 책이 감동적인 두번째 이유는 이 책을 덮고 나서 나의 가족관계를 둘러보게 되기 때문이다. 좀 더 친절하고 배려있는 말을 나누지 못하는 나를 부끄럽게 만든다. 좀 더 어머니의 마음에 가까이 가보려 노력하게 한다. 그 희생적인 삶만을 살아오면서도 한번도 자신의 것을 가지려 하지 않았던 어머니의 마음을 생각하게 된다. 더욱 따듯하게 세상을 바라보게 하고 더욱 깊이 주위 사람을 배려하게 만드는 책이 바로 이 책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사랑 앞에서는 자신을 잃어버린다. 그 자신을 잃어버린 마음에서는 상대방의 마음만이 투명하게 비치기 때문에 우리는 어머니라는 존재 앞에서 한없이 부끄럽기만 한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된다. 더불어 진정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면 물질적인 것은 최소한의 필요한 것만으로도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다는 저자의 말에 공감한다.

  어머니와의 마지막 동거 생활의 공간이었던 도쿄에서의 삶. 어머니는 오로지 자식의 뒷바라지만으로 자신의 작은 몸 누일 곳 하나 장만하지 못하고도 자식에게 짐이 되지 않을까 걱정하며 동경행을 선택한다. 자신의 마지막 삶을 가장 행복하게 마무리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도쿄에서 나는 다시 일상의 무관심한 자식으로 돌아가버리고 짧았던 어머니의 행복은 잠시 그렇게 지나가고 되돌릴 수 없는 어머니의 죽음을 직면해야 하는 시간이 온다. 비로소 나는 묻혀져 있던 어머니의 삶을 조금씩 보게 되고 그 이면에 숨겨졌던 어머니의 끝없는 희생과 사랑을 보게 된다. 이제야 비로소 어머니의 사랑을 조금씩 알게 되는데 이젠 더 이상 어머니에게 효도할 수 있는 기회가 다시는 없게 된다. 정말 살아생전에 고쳐하지 못할 일을 두고 나는 샘물처럼 자꾸만 흘러내리는 눈물을 그냥 둘 수밖에 없었다. 죽음의 마지막 순간까지 자식을 위해 마음을 쓰는 어머니의 사랑 앞에 서러워진 나는 다시 울고 다시 울고....그러다 육체의 극한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팔에서 주사를 뽑고는 '이제는 고만 죽고 싶다.'고 말하는 어머니 앞에서 나의 미어진 가슴은 내려 앉는다.

  어머니는 죽기 전에 가본 적이 없는 도쿄 타워에서 세상을 내려보았다고 했다. 그 곳에서 내려다본 세상은 아름다웠을 것이라 생각된다. 프랭키는 어머니가 죽은 몇 년 후 도쿄타워에 오른다. 그곳에서 내려다본 도쿄는 의외로 죽음의 공간이었다. 수많은 도시의 삶 사이로 곳곳에서 눈에 띄는 묘지와 주검들이 죽음 앞에서 삶을 쳐다보게 한다. 진정으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그리하여 우리들의 삶과 죽음은 빙글빙글 돈다. 삶은 삶대로 빙글빙글 돌고 죽음은 죽음대로 빙글빙글 돈다. 그리고 삶과 죽음이 빙글빙글 돈다. 우리는 이미 우리 관계 속에 있는 행복의 파랑새를 외면하고서 밖으로 허황된 꿈을 쫓고 있는 어리석은 멍청이일런지도 모른다는 것이 그의 메세지이다. 지금 내가 존재하는 이 공간에서 인연을 갖고 만나는 사람들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하나되고 공유하는 마음없이 우리가 어찌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며 어찌 삶의 진정한 행복을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어머니가 죽은 후 벚꽃이 피고 지고 다시 벚꽃이 피고 졌다. 수많은 봄의 기억 속으로 어머니의 죽음의 기억들도 희미해져간다. 하지만 어머니가 프랭크에게 남기고 간 그 사랑은 아직도 그의 가슴 속에 남아서 꽃이 피고 지는 것을 맞는다. 꽃의 삶과 죽음 사이에 그것을 경험하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가지와 줄기가 있고 또 그것의 삶과 죽음을 경험하는 뿌리가 있다. 피어난 것은 피어난 대로 소중한 인연이고 지는 것은 지는 대로 소중한 인연임을 우리는 뿌리 속에서 느껴야 한다. 늘 밑에서 우리들을 받쳐주고 우리 삶을 지탱해주는 그 영혼의 뿌리 속에 어머니가 영원히 살고 있다. 그 영원을 향한 동경의 이야기가 그의 남겨진 이야기이다.  

 

P.S :  처가 무척 좋아하는 오다기리 조에 의해 영화화된 작품이 4월에 개봉된다고 한다. 이 작품을 영화가 어떻게 그려내었는지가 궁금하다. 아니 이 작품이 더욱 많은 사람들에 의해 읽혀졌으면 한다. 삶에 대한 깨달음이 존재한다면 바로 프랭키 어머니의 모습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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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꿀라 2007-02-09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문기사를 보면 정말 재미있을 것 같은데...... 달팽이님 서평보니까 더욱 읽고 싶어집니다. 거의 일본 소설은 잘 안 읽는 편인데 요것은 읽어봐야 할 것 같네요. 잘 읽고 갑니다. 행복하세요.

달팽이 2007-02-08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타님같은 역사학도의 관심을 끄는 이 책은 괜찮은 책이라 생각합니다.
제 서평이야 뭐 무턱대고 갈겨 쓴 것이라...
님의 안목이 있음입니다. ㅎㅎ

프레이야 2007-02-12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에 오다기리 조가 나올 예정인가 보죠? 그 영화 봐야겠네요^^
책만큼이나 감동을 제대로 그려내야할텐데요.
달팽이님의 리뷰가 가슴을 적십니다..

달팽이 2007-02-12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를 좋아하는 혜경님.
보시고 페이퍼를 남겨주세요.
님의 영화에 대한 생각을 듣고 싶군요.
 
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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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직업적인 화학자이다. 그의 글은 화려하고 기교적인 문체가 전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이 감동적인 이유는 그의 진솔한 체험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이미 내 머릿속에 다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저 밖으로 나오게 해서 종이 위에 쓰기만 하면 되었다."라고 그가 말했듯이 이미 삶의 강렬한 체험으로서 그에게 남겨져있던 과거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대한 깊었던 절망과 잔인함의 기억들이 스스로의 생명력으로 글 위로 옮겨진 생명체였던 것이다. 그러니 밥벌이의 지겨움으로써 쓰여진 글처럼 뇌에서 집어짜내듯 써야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 그저 그 쏟아져나오는 이야기들을 병두껑을 열어서 내보내는 것만이 살아남은 그의 육체가 할 일이었던 것이다.

  이 책의 매력은 제목에서 보여지는 바와 같다. "이것이 인간인가?"라고 하는 그의 물음 속에서 나는 인간존재의 깊은 바탕에서 올라오는 희망의 메세지를 읽는다. 보통 아우슈비츠의 기억을 떠올리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잊을 수 없는 고통과 깊은 절망 그리고 지울 수 없는 상처와 분노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파괴되어 가는 인간성의 타락을 그려낸다. 물론 이 책도 그러하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인간 존재의 극한 상황을 아주 담담히 그려낸다. 마치 자신의 영혼이 빠져나와서 자신의 몸의 경험을 관조하는 듯한 자세로 말이다. 그러면서도 단순한 무감각이 아니라 그 삶의 악조건 속에서도 사람들이 밟아가는 마음의 타락에 저항하면서 휴머니즘을 지켜갔던 용기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그가 겪으며 내뱉었던 극한의 절망의 말들, 하지만 절망이지만은 않은 말들을 들어보자.

"오, 눈물이라도 흘릴 수 있다면!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대등하게 바람과 맞설 수 있다면...영혼이 없는 텅빈 벌레로 사는 이 곳에서는 그럴 수 없다."

"오늘은 무지개 빛의 가벼운 기름이 둥둥 떠다니는 변함없는 물웅덩이 위로 맑은 하늘이 비친다."

"수용소 자체가 배고픔이다. 수용소는 뚜렷하고도 거대한 생물하적, 사회학적 실험실이다."

"궁핍과 지속적인 육체적 고통 앞에서 수많은 사회적 습관과 본능이 침묵에 빠진다는 것 뿐."

"생존을 위한 투쟁을 한시도 쉴 수 없다. 모두 절망적일 정도로 잔인할 정도로 혼자이기 때문에."

"죽음으로 이르는 길이 단 하나의 드넓은 길이라면 구원의 길은 이와는 반대로 수없이 많고 험하고 가파르며 실제로 있을 것 같지 않다."

  수용소는 특수하게 환경지워진 하나의 공간이다. 하지만 그곳에서 또한 삶이 있고 삶의 희노애락이 존재하는 지금 이 곳과도 같은 인생이 펼쳐진다. 육체적으로는 완벽하지만 정신적인 문제를 안고 사는 엘리아스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결함들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정확히 말하면 그 결함들 덕분에 살아간다는 그의 지적은 옳다. 극한적 상황 속에서도 권력을 향한 투쟁은 치열하고 그 수용소 내에서도 인간적인 따스함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마음을 꼭 닫아야만 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 역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앞에 한 인간으로서 존재한 게 아니라, 그의 손에 좌우되는 도구였던 것은 아닌지 혼란스러운 의심이 든다." 우리 사는 인생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닌가?

  자신이 살기 위해서 아무것도 의심을 하지 않고 또 아무것도 묻지 않는 삶이 일상화되어버린 곳. 외부의 고통이나 타인의 죽음을 그저 아무 생각없이 바라만 봐야 하는 자기보호기제가 작동하는 그 곳에서는 "어느날 내일이라고 말하는게 아무 의미를 갖지 않을 때까지"라는 모토가 삶이 되게 살아야 한다. 그런 환경에서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고 무감각해지는 마음의 타락이 보편적인 공간에서 그는 자신의 삶의 생존을 위한 보호막을 작동시키되 권력구조에 의해 마음마저 타락시키지는 않는다. 그곳에서도 삶의 의미를 묻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과 생존을 나눈다. 나치의 패배가 확실시되고 수용소의 구조가 파괴되는 시간동안 그는 병든 자들과 자신의 삶을 연결시킨다. 공동의 생존을 위해 협동하고 공동노동하고 노인과 병자를 보살핀다.

  그가 말하듯 순전히 운으로 살아남아서 이 글을 쓰게 되기까지 그의 아우슈비츠 경험은 그의 인생을 더욱 폭넓고 깊게 만들어주었다고 말한다. 물론 수용소에서 죽어간 사람들에 대한 죄스러움을 간직한 채 말이다. 나아가 그는 전체주의가 20세기에 아우슈비츠와 같은 비극을 만든 데에는 유대인의 역사적 행위에서도 그 잘못이 있다고 말한다는 점이 눈여겨보인다. 자신이 역사적으로 탄압받았다는 이유로 전세계에 흩어져서도 자신들의 유대감을 지나치게 강화하고 타 민족들의 눈에 띄게 단결하여 선을 그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아마 이러한 극단적 시오니즘이 선량한 유대인마저도 배반한 또 다른 전체주의는 아니었을까?) 결국 전체주의는 '우리'와 '타인'의 구별에서 시작된다. 독일의 나찌가 개인적인 이유와 사회적인 이유로서 게르만족과 유대족의 구별을 지은 것처럼...

  아우슈비츠의 기억을 자신의 삶의 성숙으로 받아들인 그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사태를 보고 눈을 감고 있지 않는다.

"우리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두 가지, 즉 도덕적인 것과 정치적인 면에서 베긴에 반대할 수 있다. 먼저 도덕적인 것은 다음과 같다. 아무리 전쟁 중이라 해도 베긴과 그의 동료들이 보여주었던 잔인한 오만함을 정당화할 수 없다. 정치적인 주장도 이와 마찬가지로 분명하다. 이스라엘은 지금 완전한 고립의 상태 속으로 추락하고 있다..... 우리는 보다 냉철한 이성으로 현재 이스라엘 지도부의 실수에 판결을 내리기 위해 이스라엘과의 감정적인 연대감을 억눌러야 한다."

  그의 말대로 전체주의는 얼굴을 바꿔서 우리 사회의 곳곳에 그 모습을 숨기고 있을런지도 모른다. 우리와 타인의 구별을 조장하는 어떤 작은 선동조차도 그것의 얼굴을 한 것인지도 모른다. 중요한 점은 역사적으로 용서받지 못할 그 전체주의의 흐름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무런 의식없이 동조하게 되거나 침묵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단순히 전체주의의 반대입장에 선다는 선언적인 말로서 그 책임을 다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 전체주의는 아주 교묘하고 세련되게 자신의 모습을 변화시키며 정치인의 모습으로 상류층의 모습으로 아니면 노동조합의 모습으로 심지어는 소외받는 자의 모습을 하고서 우리 앞에 나타날런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니 나아가서 나의 마음 속에 불현듯 나와 타인을 구별짓고 우리와 그들을 나누어서 타인과 그들에 대한 적대감이 싹틀 때에 우리는 이놈의 전체주의가 시공간을 넘어서 우리의 마음을 선동하고 있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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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꿀라 2007-02-07 0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팽이님, 읽으셨군요. 리뷰 잘 읽고 갑니다. 이 책을 읽다보면 사람의 한계란 도대체 어디까지일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행복하세요.

프레이야 2007-02-07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써 외면하거나 암묵적으로 동조하는 것으로 공범의 혐의를 벗어나지 못할 거라 생각됩니다. 그 시대 독일인들이 갖고 있었던 생각들을 읽고 섬칫 했습니다. 부록에...

파란여우 2007-02-07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경식씨의 단골 손님인 프리모 레비.
시를 쓰는 일 하나로 아우슈비츠에서 살아 걸어 나온 이 사람의 자살은
목구멍을 울컥 적십니다.
몸에 문신으로 새긴 수인번호 174517의 삶은 우리가 지닌 민족주의의 허상이 남긴
공동의 상처입니다. 상처에 더께가 앉아있다고 잊혀지는 건 아니라고 봐요. 우리의 전체주의를 지적하셨는데 배트남전에서 우리가 자행한 죄질을 아직 용서를 빌지 않고 있지요. 이주 노동자들을 바라보는 시선도 그렇고. 개인의 전체주의 신념이 막강한 권력을 얻으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가 다 봐서 알고 있으면서 오늘 날 반복하고 있는 인간. 스스로 인간임에 간혹 살갗이 부르르 떨려요.

달팽이 2007-02-07 2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타님/그러게요. 인간에게 실망하다가도 왠지모를 희망도 그곳에서 발견하게 되니까요.
혜경님/동감입니다. 내가 그 속에 놓였을 때 과연 내 양심을 속이지 않고 사는 방법이 무엇일까? 하고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여우님/시원하게 설명해주시네요. 지금 우리 사회에서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민족주의. 그것도 전체주의의 변용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자신의 선량한 마음을 지키며 사는 사람들도 늘 있었음을 기억합니다.
 
단순한 열정
아니 에르노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6월
평점 :
절판


예전에 알고 있던 한 여자가 이 책을 읽은 이야기를 해왔다. 그녀의 삶이 어떠한지 그리고 그 삶을 수용하는 태도는 어떤지 잘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녀의 최근의 삶속에 이 책이 주는 메세지가 있든지 아니면 이 책을 빌어 마음 속에 억눌렸던 무엇인가를 대리충족시키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무엇이었을까? 이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이 책이 궁금해졌다. 뭔가를 표현하고 싶은 욕구를 아니면 그녀의 삶에서 결핍된 어떤 욕구를 이 책이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궁금해졌다.

차갑게 느껴질 정도의 파란색 커버 위에 적혀 있는 '단순한 열정'이란 제목이 눈에 들어온다. 그토록 자신의 욕망과 열정에 모든 것을 바쳤던 한 여자가 그 사랑의 감정이 지난 후에 그토록 냉정하고 감정을 배제한 채 있었던 그대로의 사실을 적어 놓을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마치 남의 이야기를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듯한 표현 속에 어쩌면 그토록 광기에 가까운 열정의 숨결을 느낄 수가 있는지도 역시 놀랍다. 사랑은 기억을 붙들고 자라며 그 기억은 또 다른 집착과 욕망의 산물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한 여자가 한 남자를 사랑으로서 받아들일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가? 난생 처음으로 상대방을 위해서 모든 일과가 맞추어진 듯 돌아가는 시간을 응시하게 된다. 모든 것들의 의미는 상대방을 통해서 보이게 된다. 그저 의미없이 지나가는 사람 하나의 모습에도 그의 모습이 투영되고 구름끼어 시커멓게 된 하늘에서도 그를 생각한다. 라면에는 계란을 넣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도 그로부터 비롯되고 저녁 식사는 어떤 것으로 할것인지도 부재한 그를 통해 드러난다.

연하의 유부남과의 사랑에서 그녀는 사랑의 덧칠된 색깔마저도 감당해야 한다. 때로는 그와 그의 처와의 잠자리가 떠오르는 불편도 물리쳐야 하고 길거리에서 그의 가족과 만나는 것을 피해야 하는 압박에 사로잡힌다.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이 사랑이 부여하는 집착과 금기는 의외로 많다. 때로는 이러한 이유로 시작되지 못한 사랑을 접기도 하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이미 자신을 모두 휘어잡은 그 지랄같은 사랑 앞에 속수무책 당할 뿐이다. 때로는 그 아슬아슬하고 위험한 사랑이 또 다른 욕망을 낳고 그 욕망 속에서 더욱 큰 쾌감을 느끼기도 한다.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지루한 일상에 싫증이 났던 것일까? 인생을 살기 위한 또 다른 에너지를 갈망한 것일까? '단순한 열정'이란 이름은 의미없는 잡다한 일상에서 강렬하면서도 단 하나의 의미를 통해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는 우리들의 마음을 불러들인다. 우리는 늘 일탈을 꿈꾸는 또 하나의 자아를 갖고 있다. 주어진 직장과 가족에 안주하며 느끼는 안정감의 뒷면에 촛불처럼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는 우리의 욕망은 자꾸만 기형적이고 왜곡된 형태의 일탈을 꿈꾼다.

때로는 그 욕망 속에 몸을 던지고 싶은 유혹도 느낄 때가 있다. 기혼자에게도 삶의 로맨스는 필요하다는 궁색한 변명이 아니다. 어떤 사랑이든지 그 사랑이 한 사람의 마음 속에 들어앉게 되었다는 것은 그 사람의 내면이 그것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족이라는 틀 때문에, 배우자에 대한 의무감과 사랑 때문에, 그 바탕 위에 놓여진 많은 사회적 관계 때문에 이미 많은 삶의 감정들을 미리 접고 살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성숙해지고 싶다. 지금은 사람을 남,녀라는 구분없이 그 사람의 매력을 느끼고 좋아하고 만나고 싶다. 그리고 주어진 사회관계와 인연 속에서 만남을 다하고 미련없이 그들을 보내주고 싶다. 하지만 나는 이미 나스스로가 만든 마음의 경계선 앞에 서서 주저하며 그 사람들을 다 만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저 좋은 만남과 배움이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옭아매고 있는 관계의 사슬이 나를 붙들고 있을 때가 많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다. 그런 관계의 사슬이 한 사람을 제약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만남과 배움의 기회를 자유롭게 주면서 동시에 사람사이의 신뢰와 사랑을 키워갈 수 있을때 삶이 더욱 아름답지는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낙이불음, 애이불상. 즐기되 음란하지 않으며 슬프되 몸을 상하지 않을 경지가 필요하다. 사랑이 나에게 와서 지나가는 그 차가운 뒷면을 지켜보면서도 그것이 나에게 어떤 상처도 입히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될 때 나는 또 다른 사랑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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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2-08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올겨울의 명문입니다.
달팽이님. 저의 서재로 옮깁니다.
고맙습니다. 좋은글!!! 추천!


달팽이 2006-12-08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부끄럽군요.

프레이야 2006-12-08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책표지의 색상이 제목과 잘 맞아 떨어지는 '단순한 열정' 이미지 그대로 입니다. 리뷰 참 좋으네요. 즐기되 음란하지 않으며 슬프되 몸을 상하지 않을 경지...

달팽이 2006-12-08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망입니다. 혜경님..

글샘 2006-12-08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의 사랑은 '낙'이고 너의 사랑은 '음'이라고 보아서는 안 되겠지요.
모든 사랑은 '낙'이 아닐까 합니다.
정혜신씨가 한겨레 어느 기자를 칭찬하는 글에서, '말로 돼? 그럼 떡은 왜 쳐?'하는 글을 쓴 적이 있었어요. 음란에 대한 배타성과 상업성을 무시한다면, 사랑은 즐겁고 아름다운 것 아닐까요?

파란여우 2006-12-08 2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유, 그 사랑타령은 왜 이리 매번 히트상품인지요.
사랑은 지겹지만 또 그게 밥먹는 것과 같아서 버릴 수 없으니까요.

달팽이 2006-12-08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샘님, 모든 것을 낙으로 받아들이는 그 자리엔 낙이 상대적인 개념이 아니라 절대적인 체험이 되어야 함을 느낍니다.
그러는 여우님도 역시 그 사랑을 양식삼아 살고 있음을 모를 줄 아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