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니까 청춘이다 - 인생 앞에 홀로 선 젊은 그대에게
김난도 지음 / 쌤앤파커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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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프니까 청춘이다." 아프지 않으면 청춘이 아니다. 기성세대들이 보기엔 어쩌면 우리 시대의 청춘들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죽도록 배고파보지도 않았고, 전쟁의 상흔을 겪어보지도 않았으며...가정을 책임지고 가계 전체의 삶을 짊어지고 살았던 적도 없이 보잘것없는 고민들로만 인생을 허비하는 존재들로 보일런지도 모른다. 나 역시 불안과 감정의 소용돌이처럼 청춘을 보내고 있을 때 아버지로부터 가끔씩 듣던 소리였으니까...그런데 지금 자라는 아이들을 보면 그리고 대학생들을 보면 과연 그들은 우리가 대학다닐때보다 훨씬 더 많은 불안과 걱정 두려움 앞에서 자신들의 성장통을 겪어야 한다. 취학 전부터 공부로 경쟁을 해야 하고 그 경쟁의 끝에 대학이 있는 것이 아니라 또 더 치열한 경쟁사회의 문턱에 들어서는 것이 대학이요...또 대학 졸업인 것을.... 그러니 예전보다 훨씬 더 큰 영혼의 상처를 가지고 있는 아픈 청춘들에 대해 위로해주고 따뜻한 한 마디 말로 격려해주고 그들의 처지를 공감해주고 그러면서도 삶에 대한 전체의 시각으로 조언해주는 이 책은 고맙다.  

  인생이 커다란 바다라면 이제 그들은 배를 타고 강의 하구에 다다르고 있다. 그들이 헤쳐갈 바다엔 보다 큰 풍랑과 파도와 거센 두려움이 존재한다. 젊음을 보다 용기있는 시행착오로 단련시키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이다. 밑이 보이지 않는 우물 속에서 힘에 부치는 밧줄을 쥐고서 대책없이 버티는 삶, 그것은 사회가 강요한 삶이다. 자신 스스로의 내적인 동력에 의한 삶이 아니다. 그 사회적 밧줄을 놓고서야 사회적으로 강요된 두려움을 극복하고서야 비로소 자신의 인생을 성찰할 줄 알게 된다. 자신 앞에 놓인 자신의 사명, 또는 자신의 앞에 나타난 운명적인 사랑, 그 하나의 사건 그 한 사람이 그대에게 커다란 바다가 될 수 있도록 자신있게 줄을 놓아야 한다. 그래서 진정으로 한 번의 붓질도 하지 않는 흰 캔버스 위에 자신의 그림을 그려낸다는 것, 자신의 인생의 밑그림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우리의 삶은 단 한 번 뿐이며 소중한 까닭이다.  

  "죽도록 힘든 네 오늘도 누군가에겐 염원이다." 자신의 현재의 틀에 갇혀 인생을 보지 못하면 자신을 둘러싼 두려움과 장애가 너무나도 크게 보여 운신의 폭이 좁아진다. 어떤 극복방안도 떠오르지 않을 지 모른다. 삶의 희망을 찾는다는 것은 끝임없는 좌절의 끝과 마음으로 가닿을 수 있는 희망의 꼭대기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는 것이다. 자신을 둘러싼 인간관계와 환경이 바뀌면 이 어렵고 힘든 상황도 저절로 새로운 상황으로 바뀌고 그 속에서 우리가 찾는 삶의 의미는 그 상황에 우리가 어떻게 대처하고 어떻게 받아들였는가가 된다. 김난도 교수는 자신이 겪은 젊은 날의 방황과 그것을 지켜보며 얻었던 인생의 결실을 안다.  따뜻한 눈길로 세상의 모든 학생과 청춘에 격려를 하고 있고 그 선물이 바로 이 책이다.  

  청춘만 읽어야 하는 책은 아니다. 중년 어느 언저리서 삶의 좌표를 잃어버린 사람도 노년의 허무한 일상에서도 자신을 찾아야 하는 사람들 아주 평범한 일상의 나태함에 젖어 어떤 꿈도 꾸지 않는 사람들 모두가 이 책의 교훈을 배워야 할 것이다. 삶이 전 생을 통하여 배우고 성숙하는 것이라면 '아프니까 청춘이다.'란 말은 나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다. 그 성장통을 고스란히 내가 가져서 이 시기의 삶이 가리키는 바를 나는 직시하고 살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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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 어진 현자 지셴린이 들려주는 단비 같은 인생의 진리
지셴린 지음, 이선아 옮김 / 멜론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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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속의 얼굴이 마치 우리들의 할아버지처럼 인자하고 소탈하다. 중국의 '지성'이라고 불리울 정도의 큰 스승이자 지도자이지만 마치 집안의 할아버지처럼 곱게 늙어서 일상의 소박하고도 솔직한 이야기들을 재미있게 손자손녀에게 들려주듯이 그렇게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사실 이 글이 그 동안에 언론을 통해 발표한 것을 묶은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망설였지만...목차를 보고서 마음에 들어 결국은 읽게 되었다. "바다는 비에 젖지 않는다", "만물이 내 벗이라네", "남은 연꽃이 빗소리를 들으니" 등의 제목이 마음을 건드렸다. 인생의 큰 바다를 지나서 어느덧 노년의 끝에서서 바라본 인생의 글들은 비록 깨우침이라는 표현을 빌리지 않아도 삶에 대한 애정을 갖고 있으면서도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본 관조적 성격과 더불어 삶의 깊은 지혜를 배우게 한다.  

  비가 내린다. 봄의 잎사귀를 성장시키는 봄 비 속에 어느덧 봄은 자라고 있다. 이미 겨울이 왔으니 봄은 멀지 않으리...라는 표현처럼 조급하게 삶과 생활을 마주하지 않고서 느긋하고 수용하는 마음의 큰 그릇으로 그것을 바라볼 줄 아는 능력...그것이 나이듦의 기쁨이라면 기쁨이다. 나이들어서 몸이 불편해지고 외로워지고 사람들로부터 무력한 사람이라는 눈빛을 느끼는 것...그런 것들을 이겨내고 나이와는 상관없이 삶의 어떤 목표를 향해 열정을 갖고 나아갈 수 있다는 것. 그것을 지센린 선생님께 배운다. 촉촉히 젖은 산비탈에 천연의 노랑으로 피어난 개나리꽃을 보고서 기쁜 마음이 드는 것, 봄을 알리는 순결한 목련의 하얀 잎이 마치 허공에 핀 빛의 꽃처럼 신비스러워 보이는 것, 나이가 들수록 세상의 희노애락과 자연의 숨결이 더욱 마음 속으로 깊이 스며드는 것...그러니 나이든다는 것은 무디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섬세해지고 더욱 깊어지는 것이리라... 

   그런 마음을 공유하며 읽어가는 한 문장 한 문장은 가슴에 와 닿는다. 비에 젖지 않는 바다처럼 섬세하게 모든 것을 느끼면서도 그 삶의 굴곡에 휘둘리지 않는 마음의 거대한 바다...인생의 경험과 경험이 쌓여 그렇게 될 수 도 있고 또 삶의 깨달음으로 그렇게 될 수 도 있을 것이지만 마음을 열고 바라본 세상이 문득 그렇게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그런 마음으로 젊은 세대와 소통하여 서로가 가지지 못한 것을 배울 수 있다면 그렇게 자연과 인간이 서로에게 공존하며 도와가며 사는 세상이 될 수 있도록 마음의 장벽을 걷어내야 한다.  

  깊어지는 봄 속 자연의 생동감이 움틀대고 있다. 그 기운을 받아 내 마음도 알지 못할 활기가 흘러다닌다. 매년 거쳐가는 인생의 길목이지만 문득 서서 마음을 멈추고 바라보면 그 풍경 속의 또 다른 세상이 보인다. 그를 보면서 내 인생길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하고 생각해보게 된다. 사람들의 저마다의 인생길은 어느 곳을 향해 가고 있는가 하고 생각해보게 된다. 그러니 이 길은 나만이 걷는 길이기도 하지만 세상 사람들 모두가 걷는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봄 비 내리는 소리 속 어딘가에서 나의 상념이 뿌리를 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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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3-31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린 시절, 젊은 시절에는
새로운 문명에 대한 호기심과 나는 누구인가 라는 화두에 매달려있었으니
주위를 돌아볼 여유가 적었답니다..

내 아이들이 자라며, 호기심이 줄며,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몰라도
크게 마음 쓰이지 않는 나이가 되며
푸른 하늘과 살랑거리는 바람과 이쁜 꽃들에 더 많은 눈길을 주게 되었답니다.
하하


달팽이 2010-04-01 0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른 하늘과 살랑거리는 바람과 이쁜 꽃들에 더 많은 눈길을 주게 되었다."는 표현 속에 담긴 한사님의 마음을 배웁니다.어떤 형식도 절차도 필요없이 그저 주어지는 일상과 자연에서 느끼는 마음...분노할 땐 분노하고 슬퍼할 땐 슬프고...기뻐할 땐 기쁘고..
 
미학 오디세이 1 미학 오디세이 20주년 기념판 3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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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 오래 전에 읽었어야 하는 책이었다. 하지만 나에겐 그 만남의 인연이 늦게 왔다. 대학교때에 읽었던 사회주의 예술로서의 미학에 관한 책 몇 권이 전부였고 제목에서 짐작하듯 사회주의 예술이론에서 미학이란 노동과 사회주의적 가치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그러니까 나에게 처음으로 아름다움에 대한 상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은 '노동'이라는 단어와 관계가 깊었다. 그러나 그 이후의 삶을 살아오면서 나는 노동과는 다른 내 가슴을 직접 울리는 영역의 예술작품과 만났다. 아주 드물기는 하지만 음악의 세계와 그림의 세계에서 나는 인연이 닿는 몇 몇 곡과 그림들을 만났고 그것은 이전에 내가 처음 접했던 '노동'이라는 단어와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세계의 경험이었다.  

  에셔의 그림을 이 책에서 몇 점을 보게 되었다. 그의 그림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책의 각 장 앞마다 모든 곳에 그려진 '뫼비우스의 띠'도 저자가 이 책의 전반을 관통하는 메세지로서 잘 보여준 것이라 생각하였다. 가상과 현실, 진리와 속세, 신과 인간, 주관과 객관 등등 예술을 생각할 때 흔히 다루어지는 범주 또는 개념의 카테고리에서 그가 가지는 일반적인 생각은 현실에서는 구분되지 않고 모두 존재하는 양면성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하고 추측한다. 한 시대에서 한 시대로 넘어가면서 대립되는 듯 보이는 한 범주의 후퇴와 부족했던 반대범주의 등장이 시대를 갈랐다. 신을 죽임으로써 원시시대에서 고대 그리스 로마 문화로 넘어가고 다시 신을 살려서 중세로 넘어간다. 다시 신에게서 인간에게 중심이 넘어가면서 중세와 근대의 구분이 생기고 과학(경험)이냐 종교(직관)냐에 따라 다빈치와 미켈란젤로의 시각이 구분된다. 초월적 세계냐 객관적으로 경험가능한 세계냐에 따라 예술의 보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구분이 생기듯이 현재에 있어서도 아름다움은 객관적인 세계에 존재하느냐 또는 주관적인 마음 속에 존재하는 것이냐에 대한 여전한 물음이 남아 있게 된다. 

  존재의 원천인 태극에서 음양이 생긴다는 주역에서와 같이 생명의 원천인 그 공간에서 무엇인가가 생겨나고 또 그것이 선명하게 음양의 세계로 나뉘다가 사멸의 공간에서는 다시 생명이 태어났던 그 자리로 돌아가는 에셔의 작품들은 주역의 세계관과 닿아 있다. 설명으로서는 미의 보편성에 근거한 객관적인 아름다움이 존재할런지는 모르지만 그것을 느끼는 사람들의 마음에 따라 미추와 선악이 달리보이기도 한다는 사실 역시 비슷하다. 음과 양은 태극에서 나와서 서로 다른 성질을 갖는 보편적인 성질이지만 그래서 사괘 8괘로 펼쳐지지만 한 사람의 마음에서 그것은 서로 침범하고 바뀌기도 하는 것이다. 오행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물은 불과 상극의 요소에 놓이지만 우리들의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불 위에 올려진 냄비는 우리들이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게 데워주는 상생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러니 앞에서 나눈 범주들이야말로 인식을 위한 또는 미학사를 설명하는 편의를 위한 범주일뿐 사실은 미학사를 통틀어서 또는 한 시대 내에서도 서로 교류하고 대립하는 하나의 현실로서 존재했을 것이다.  

  통사적으로 다룬 글들이 가진 단점을 이 책도 또한 갖고 있다. 너무 개념이나 범주를 통해 설명하려고 하는 학문적인 성격을 띠기 때문에 그림에 대한 마음의 흐름을 느끼는 것은 개인적인 몫으로 남겨진다는 점이다. 분류해서 한 곳에 위치지우고 또는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의미와 구분을 하는 것으로는 그 작품에 대한 깊이있는 이해가 부족하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책 한 권이 어찌 그런 것을 다 채워줄 수 있겠느냐고 하면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이중섭님의 소그림처럼 또는 최장조교수님의 지리의 이해처럼 우선은 깊이 몰입하여 사랑하는 것보다 그것을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말을 나침반 삼아서 보면 너무 논리적으로 교묘하게 잘 짜여진 배치 속에서 그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그의 범주와 개념으로서만 그림과 작품을 이해하게 되는 한정성이 생기고 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가 내린 미학에 대한 인식틀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에셔의 그림을 통해서 그가 미학의 역사를 통찰하면서 기본적인 인식틀로 사용했던 관점에 대해서는 박수를 쳐주고 싶은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내가 이 책이 나왔을 무렵 이 책을 읽었다면 저자의 카리스마넘치는 인식틀로서만 작품과 책을 따라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행히도 시류를 한참이나 놓쳐버린 지금에서야 이 책을 들게 되어 가끔은 그의 인식틀을 옆에 밀쳐두고서 그림에 몰입하는 시간도 갖게 되고 그의 세밀하고도 정연한 인식틀의 빈틈에서 놀 수 있었다는 점도 나름대로 이 책을 즐기는 이유가 되었던 것 같다. 계속해서 2,3 권을 읽어갈 것이다. 하지만 이 책에 대한 더 이상의 리뷰는 생각지 않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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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박물지 - 이어령의 이미지 + 생각
이어령 지음 / 디자인하우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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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위, 갓, 거문고, 계란꾸러미, 고봉, 골무, 나전칠기, 낫과 호미, 논길, 다듬이, 담, 담뱃대, 돗자리, 뒤주, 떡, ㄹ, 매듭, 맷돌, 무덤, 문, 물레방아, 미륵, 바구니, 바지, 박, 버선, 베갯모, 병풍, 보자기, 부채, 붓, 비녀, 사물놀이, 상, 서까래, 수저, 신발, 씨름, 연, 엽전, 윷, 이불과 방석, 장롱, 장독대, 장승, 종, 지게, 창호지, 처마, 초롱, 치마, 칼, 키, 탈, 태권, 태극, 팔각정, 팔만대장경, 풍경, 한글, 한약, 항아리, 호랑이, 화로. 이것이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우리 나라의 문화를 잘 보여줄 수 있는 주인공들..이 책은 이들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다. 

  적어도 내 짧은 독서의 경험에서 보면 우리 문화에 대한 깊은 통찰과 그것을 글로 옮겨놓은 것에는 이어령 선생님을 빼놓을 수 없다. 물론 최순우 선생님이나 오주석 선생님(젊은 나이에 일찍 세상을 버리셔서 안타깝다.)등 몇 몇 우리 문화예술의 우수성에 대해 눈을 뜨게 해준 분들이 계시지만 일상적인 우리들의 옛 삶 속의 지극히 평범한 소재에서 그것에 담긴 깊은 뜻을 포착하여 이렇듯 물흘러가듯 글로 옮겨다 놓은 것에는 그저 감탄 밖에 나오지 않는다. 글은 글 이전에 마음이 작용하는 것이므로 일상적인 소재를 들여다보는 선생님의 내면의 눈이 특별한 것이다. 오랜 연륜에서 오는 삶을 꿰뚫어보는 지혜와 선생님만이 가진 언어에 대한 감각과 능력 또한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과 기질적인 이해력의 깊이가 이런 책을 만든 인연이 되지 않았는가 하고 생각해본다. 

  한 편 한 편의 글은 길지 않다. 하지만 그 길지 않은 글들은 마치 흘러가는 물처럼 자연스럽게 마음으로 흘러 들어온다. 또한 그 짧은 글에서 그 소재가 보여주는 깊은 통찰이 비유와 상징의 매체를 타고 자유롭게 노닌다. 엿장수 가위를 "절단작용을 청각작용으로 전환시킨 순간 악역에서 정겨운 주역으로 바뀌게 된다. 그래서 엿장수의 가위소리는 늘 현실을 넘어선 꿈결 속에서 들려 온다. 그리고 그 가위는 무엇을 잘라내는 공포, 프로이드가 말하는 거세콤플렉스의 불안이 아니라 오히려 듬뿍 덤을 주는 훈훈한 인정을 느끼게 한다."라고 표현한 것이라든가,  "갓, 그것은 한국인의 이념이 물질 그 자체로 응집되어 있는 머리의 언어이다." "한국인이 만들어낸 계란꾸러미는 기술적 합리주의가 낳은 단순화와 협소화에서의 해방을 시도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꿈을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반만 포장된 계란꾸러미야말로 기능성을 소통성으로 바꾸어가는 탈산업화 시대의 정신과 통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계란꾸러미는 형태와 구조를 노출시킨 아름다움, 깨지지 않게 내용물을 보호하는 합리적인 기능성, 그리고 포장 내용을 남에게 알려주는 정보성의 세 가지 특성을 동시적으로 만족시켜주고 있는 포장 문화의 가장 이상적인 모형이라고 할 수 있다." 등 무수한 주옥같은 압축의 묘미를 만나게 된다.

  책의 어느 장을 펼쳐보더라도 짧지만 하나의 완결되고 아름다운 문장을 만날 수 있고 또한 그 글을 바탕으로 하여 생각의 날개를 달고 날아다닐 수 있다. 특히 이 곳에 등장하는 소재는 산업화를 급속하게 겪어오던 시기에 자라서 산업화 이전의 삶의 모습의 흔적들을 유년시절의 삶의 일부로서 기억하는 세대의 사람들에게 짙은 향수를 불러일으키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 삶에 대한 향수가 이 글의 통찰과 멋스러움 위에 가미되어 책을 잡은 순간부터는 마치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듯 그리운 어머니를 생각하듯 행복한 꿈결처럼 가물가물하고도 아스라한 마음으로 읽어내리게 하는 마법이 있다.  

  글 한 편 한 편의 첫 페이지를 장식한 소재를 드러내는 그림 또한 눈을 즐겁게 한다. 엿가락 가위와 거문고, 고봉, 골무, 장롱, 맷돌 등의 사진과 책의 표지로 사용된 검은 갓을 위에서 내려다본 사진...이것만으로도 또 하나의 사진집을 본 듯하다. 표지로 사용한 검은 갓은 아마 선생님의 단정하고도 고아한 분위기가 엄정하고도 바른 기세를 가진 우리의 선비와 닮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자연스럽게 굽은 논길 사진은 마치 포근하고도 정겨운 고향집에 들어서기 전에 만나는 누런 논길을 생각하게 한다. 논길 어디선가 누렁소 한마리 주저앉아 긴 울음소리 하나 뽑아낼 듯 하고 반가운 손님이 온 것을 알리듯 멀리서 짖어대는 개소리 또한 고향집의 하늘 위에 울릴 것 같다. 그 고향집의 툇마루에 걸터앉으면 문고리 옆으로 창호지의 결과 무늬가 눈에 들어올 듯 할 것이고 그 창호지의 문을 침을 발라 뚫어내던 어린 날의 밤들이 그립다.  

  이 책을 읽으면서 때로는 나의 유년시절을 다시 사는 시간이 되고 또한 우리의 옛 모습과 삶을 다시 보는 듯한 느낌을 가지게 되어 이름모를 따뜻함과 정겨움이 작은 공간에 가득히 퍼지는 느낌이 든다. 책 한 권이 이런 것을 줄 수 있다면 그 책의 가치는 뒷면에 인쇄된 가격보다 더 넘어서는 것이 아닐까. 나는 오늘 책 값이 아깝지 않은 책 하나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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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2-12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의 어느 장을 펼쳐보더라도 짧지만 하나의 완결되고 아름다운 문장을 만날 수 있고 또한 그 글을 바탕으로 하여 생각의 날개를 달고 날아다닐 수 있다.

특히 이 곳에 등장하는 소재는 산업화를 급속하게 겪어오던 시기에 자라서 산업화 이전의 삶의 모습의 흔적들을 유년시절의 삶의 일부로서 기억하는 세대의 사람들에게 짙은 향수를 불러일으키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 삶에 대한 향수가 이 글의 통찰과 멋스러움 위에 가미되어 책을 잡은 순간부터는 마치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듯 그리운 어머니를 생각하듯 행복한 꿈결처럼 가물가물하고도 아스라한 마음으로 읽어내리게 하는 마법이 있다."

이어령 선생님의 문장을 방불케 하는 글귀입니다. 달팽이님 글 좋습니다. 감동... 하하


달팽이 2010-02-12 20:36   좋아요 0 | URL
아마 한사님께선 이어령 선생님들의 글들이 저보다 더 마음깊이 와닿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마음을 조금이나마 공유할 수 있음에 자족합니다. ㅎㅎ

달팽이 2010-02-12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방면으로 지적 사유를 펼쳐가는 여우님의 여행길에 가끔은 동행할 때도 있어 기쁩니다. 공산품이 아니라면 어찌 동서고금의 사람들을 만날 것이며 또 음악을 그림을 만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 면에서는 고마운 면이 있습니다. 제 기질은 아무래도 조금 그런 쪽에 인연이 있는 듯 합니다. 아주 조금요...그런데 기질을 바꾸는 것은 큰 공부라 했는데...가만히 생각해보니 일정한 기질을 갖지 않는 것이 바로 큰 공부인 듯 느껴집니다. 아직도 저는 느릿느릿 달팽이입니다. 하하.
 
축소 지향의 일본인
이어령 지음 / 문학사상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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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말에 일본에 있었다. 처가 무척 여행을 좋아한 탓이기도 하지만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에 대한 호기심도 있었던 데다가 여행이라는 매력을 나도 또한 바라고 있었다. 여행 전에 일본어까지는 배우지 못해도 일본인에 대해 조금은 알아야겠다는 마음에 몇 권의 책을 보았다. 여행의 맛의 하나는 풍경이요 또 하나는 맛이요. 나머지는 그 사람과 문화에 있다. 그런데 풍경과 맛은 어차피 외국이니 어느 정도 새로움과 호기심이라는 위안으로 적응해야만 하는 면이 있음을 어쩔 수 없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과 문화인데 언어가 잘 안되니 책으로라도 허기짐을 조금 채우고 가려했다. 결론적으로 몇 권의 책을 읽었지만 이 책을 읽지 않고서 갔다는 것만으로도 절반은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일본이라는 나라와 문화 그리고 사람들의 의식을 이해하는데 꼭 필요한 책이었기 때문이다. 

   텐류지(천룡사)에서 본 용 그림은 훌륭했다. 구름 속인 듯 용은 그 뚜렷하게 살아있는 눈매와 발톱들 사이로 그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휘어진 몸의 부분부분은 구름 속에 묻혔으나 그의 눈앞에 펼쳐진 회오리가 만들어내는 허공은 마치 현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어떤 다른 존재의 공간을 상상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이 텐류지의 아주 정제되었으면서도 인공적으로 만든 호수와 그 호수 위에 분재처럼 가지를 뻗은 소나무 그리고 별채로 이어지는 디딤돌의 의미를 나는 이 책을 읽고서야 이해하게 되었다. 청수사 입구에 도열된 가게에 놓여진 부채와 도예공품들 그리고 교토 거리의 다양한 도시락도 나는 이 책을 접하고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축소지향"이라는 표현 속에 어쩌면 이렇게 일본의 특성을 일관되고 잘 캐치해내었는지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나라 사람이 이 책을 썼다는 자부심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 책을 일본인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것이 첫번째 물음이었다. 경제대국이며 아시아의 유럽을 지향하는 일본인의 자존심에 어감부터 좋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 책 제목부터가 잘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정직하고 열린 일본인이라면 식민지시대에서 살아온 저자가 모국어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언어의 수인 처지를 겪어오고 난 후 그 지배자에게 대한 글을 썼다는 것을 어느 정도는 이해해 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한국어의 아름다움에 대해 선생님은 그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계실테니까) 더구나 일본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보고 일본인의 특성을 외부에서 바라보아서 제대로 정리된 일본론을 접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면 그 가치는 결코 언어적 표현 몇 가지를 꼬투리삼아 내버리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것을 수용하는 마음의 포용력 또한 일본인들의 오지랖이니까... 일본에서도 양심적인 학자들이 많아서인지 이 책은 그들에 의해 일본론의 고전처럼 소개되었고 일본에서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로서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다.

  현실은 늘 축소와 확대의 파동을 따라 등락한다. 때로는 어떤 영역에서는 축소의 성향이 강점을 가지기도 하고 다른 한 편에서는 확대의 성향이 강점을 가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축소지향의 일본인 특성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면 그들의 강점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를 고민할 수 있으며 나아가 어떻게 확대해야 하는가도 고민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일본인들은 이어령 선생님께 감사해야 하는 것이다. 제대로 된 일본론에 대한 이 책이 일본인의 21세기의 세계적 요구와 역할에 부응할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축소지향의 20세기의 일본에서 결여된 세계사적 요구와 세계적 공동체의식에의 참여 등의 일본적인 과제를 그들 앞에 시원하게 내어놓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을 펴는 나는 처음에는 일본에 대한 비판적 시각과 한국인의 우월성같은 것에 대한 시원함을 느낀 것이 사실이다. 적어도 일본의 정원보다는 소쇄원같은 한국적인 자연스러움의 미가 좋았고 사찰의 종소리도 우리의 것이 훨씬 깊고 그윽한 맛이 있어 오랫동안 내 마음에 울려왔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의 과잉친절과 그 이면에 놓여진, 마음으로 교류할 수 없는 외부성이 나의 기질에는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면 내 오랜 삶의 습관처럼 일본보다는 한국적인 것이 끌리고 한국적인 것을 일본적인 것과 비교하여 나름대로의 우월감으로서 가지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식민지배의 삶을 직접 살아온 선생님에게는 그러한 마음이 얼마나 더 클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자적 객관성 이외에 사족같은 감정과 분노를 붙이지 않은 선생님의 마음의 평정심이 부러웠다. 이 제대로 된 책 하나로 이미 그의 자존심과 당당함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 아닐까? 

  책을 덮을 때 쯤에는 오히려 이 책은 우리들을 다시 보게 하는 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확대지향과 축소지향의 모든 면을 세상에 맞추어 함께 길러야 하는 사명을 안고 있다. 삼성전자와 LG전자의 세계 전자산업의 석권이라고 하는 축소지향적인 면과 세계의 것을 신속히 받아들여 세계시장에서 문화적 갈등없이 진출하고 나아가는 확대지향적인 면 모두가 우리들에게 있다. 또한 자연의 것을 우리들의 삶으로 그대로 축소시켜 끌어들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미로서 느끼는 호연지기, 우리들의 고전문화에서 보이는 훌륭함들은 확대와 축소의 양면들에 통달했던 선현들의 지혜를 보게 한다.  그러나 세계공동체의식으로 세계사적 과제와 요구에 동참하고 세계인의 행복 실현으로 나아가려는 확대지향성은 이미 갖추어진 어느 것이 아니라 우리들에게 과제로서 늘 앞에 놓여진 것이 아닐까? [작은 분재가 좁은 정원에 놓였을 때에는 아름다운 예술품이 되지만 그것을 넓은 대지에 옮겨놓으면 그 미와 특색을 상실하고 말 것이라는 비유]는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 안의 배타성과 타인과의 소통의 장벽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우리들로서도 일본이라는 거울을 통해 배워야 할 것이고 그것은 이어령 선생님이 이 책을 통해 한국에 전하는 메세지이기도 한 것이라고 생각드는 이유는 왜일까?  다시는 타국의 식민지배의 상처를 가져서는 안되며 그러기 위해서 우리들이 반성해야 할 점은 무엇인가? 하고 또한 타국을 식민 지배 하지 않기 위해 우리들이 가져야 할 태도는 무엇인가? 하고 말이다. 타인과 더불어 함께 잘 살아갈 수 있는 준비가 우리에겐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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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1-09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읽는 달팽이님의 글이 단정합니다.
글 좋습니다.
이어령 교수님은 천재의 반열이시지요..


달팽이 2010-01-09 22:56   좋아요 0 | URL
이어령 교수님의 책이 이게 제겐 세번째입니다. 아직 사놓고 못 본 몇 권의 책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천재의 반열이라는 표현처럼 타고난 석학이시라는 생각입니다. ㅎㅎ

2010-01-09 2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09 23:0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