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를 위한 여섯 가지 은유
이어령 지음 / 열림원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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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어머니를 소재로 책을 썼을까? 그 모든 문학적 소산이 어머니라는 탯줄에서부터 나왔다는 것일까? 흔한 상상과 더불어 이 책을 펼쳤다. 선생님이 그간 보여주었던 우리 문화에 대한 해박하고도 깊은 해설이 그리고 물흐르듯 표현하는 한국어의 구사가 나에게 깊은 인상으로 박혔던지라 이 책을 고민하다가 구입하여 들었던 것이다. 선생님이 기독교세례를 받았다는 것에 일종의 편견같은 것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굳이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를 읽지 않았더라도 이 책을 읽게 됨으로써 선생님에 대한 편견같은 것이 오래된 낡은 껍질처럼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진실한 삶에 대한 고민과 살아있는 영성 같은 것이 선생님으로 하여금 그 길을 찾게 만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여섯 가지 은유는 자신의 문학적 샘물이고 우물물이고 바다였다. 어머니는 책이었고 나들이였고, 끊임없는 식량의 원천인 뒤주였으며, 어떤 과자보다도 맛있는 금계랍이었으며, 귤이었다. 그리고 바다였다. 어머니가 마지막 병석에서 드시지 않고 귀한 것이라 보내온 귤은 어머니의 유골과 함께 묻혀졌으니 그 귤은 가슴 속에 묻어둔 귤이지 이미 먹는 과일이 아닌 것이다. 바다 해 자에는 어머니 모자가 들어가있다. 자식을 향한 무한하고 아낌없는 사랑의 원천 그것이 바로 어머니란 존재일 것이다.

 

  감기에 걸려보지 않은 사람과는 대화조자 나누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선생님. 아픔이 없는 사람과는 인생을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감기몸살로 꼼짝없이 누워있는 아들의 이마에 짚는 손이야말로 타인의 아픔과 소통하는 것이며 그 아픔을 내것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이다. 즉 어머니의 마음이다. 세상과의 소통엔 이런 이마를 짚는 소통이 필요하다. 세상을 모든 어머니의 마음으로 품는 자가 있다면 바로 예수님이고 부처님이고 절대자일 것이다.

 

  마지막 부분에서 선생님이 세례를 받은 마음의 동기에 대해 풀어놓으신다. 일평생 지식과 지성으로는 최고의 삶을 사셨다. 26에 대학교수와 신문사 논설위원이라는 최고의 지성의 자리를 지켜왔고 그만의 방식으로 우리 문화에 대한 이해와 해설을 통해 한국에 그 이름을 새겼으니 말이다. 하지만 70이 넘어가면서 그같은 지식과 정보는 진정한 삶을 만나는 데 장애물이 된다는 깨달음을 가진 것이다. 정직한 믿음과 깨인 마음이야 말로 순간의 삶을 받아들이고 살게 되고 순간의 주어진 생명을 축복하고 감사하게 된다는 깨달음 속에서 비로소 참된 행복과 삶의 의미를 느끼게 된다고 말씀하신다.

 

  선생님의 마지막 걸음을 통해 보다 새로워지고 깊어진 글들이 나올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최고의 지성인으로 맹목적 기독교의 폐단을 이미 알고 있으시기 때문에 그만의 독실하고 참된 믿음으로부터 시작한 영성의 성장과 그 영성의 글을 계속해서 세상에 풀어놓으시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혹시 알겠는가? 모든 종교를 떠나 진실한 믿음의 세계에서 보는 세상은 모두 아름답다는 진리의 말씀을 세상에 풀어놓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의 영성의 세계의 첫 발이 지성의 세계에서와 마찬가지로 부지런하고 박식하고 끊임없는 탐구정신을 통해 깊어지고 또 넓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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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견문록 - 에디오피아에서 브라질까지 어느 커피광이 5대륙을 누비며 쓴 커피의 문화사
스튜어트 리 앨런 지음, 이창신 옮김 / 이마고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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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느 아침 처럼 물이 끓는다. 나는 예멘의 '마타리'커피를 내린다. 일반 원두 커피처럼 쌉싸름한 맛이 없는 예멘 커피는 달짝지근한 맛에 커피의 깊은 향이 코끝을 스친다. 초코렛 향인지 옅은 한약재 향인지 고소하면서도 단 듯한 커피향에 오감이 또렷해진다. 불과 몇 년 사이 한국은 커피의 제국으로 바뀌었다. 일회용 커피에서 내려먹는 원두커피집까지 동네마다 몇 개씩 생겨나고 이제 아침을 커피와 함께 시작하는 문화는 이 곳에서도 이미 시작되었다.

 

  아라비카의 고장 에티오피아 하레르

  지금으로부터 1500~2000년 전 세계에서 가장 먼저 커피를 좋아한 유목민 오로모족이 케파왕국에 살았다. 이들은 커피를 부수어 기름과 섞은 뒤에 골프공만한 크기로 둥글게 만들어 먹었다. 이들은 전투를 벌이기 전에 이 커피를 먹었다. 이들이 바로 전쟁에서 포로로 잡혀 들어온 하레르 지역에 커피를 들여온 부족이었다. 비교적 낮은 지대인 케파의 거대한 커피 밀림에서 자라는 원두는 수천년 전 콩고 밀림에서 자생했다고 추정되는 동그랗고 거친 로부스타이고 하레르에서 자라는 커피는 원두가 길쭉하고 아라비카처럼 향이 풍부하다. 따라서 우리가 원두커피점에서 만나는 맛과 향이 좋은 커피는 대부분 아라비카로 아프리카 일부 지역과 브라질에서 생산된다.

 

  악마의 유혹인가? 신의 선물인가?

이슬람 신비주의자인 수피교도는 커피를 종교의식에 이용한 대표적 집단으로 이들에게 커피는 정신적 도취감을 일으켜 신과 소통하게 하는 도구였다. 커피는 영적 세계로 들어가는 관문으로 의식용 빨간 잔에 커피를 돌려마시며 궁극적 대상인 신과 초자연적 일체감을 형성하는 의미를 가진다. 중세 수피교도 신비주의자 루미가 빨간 옷을 입고 끊임없이 빙글빙글 돌아가며 추는 춤을 나는 어딘가에서 보았다. 반면에 다른 이슬람교도나 기독교에서는 커피를 악마의 음료로 규정해서 엄격히 금지했다. 이슬람 성지인 메카에서 1511년 커피를 금지하였다. 포도주와 같이 사람을 흥분시킨다는 이유와 예배 전 커피잔을 돌리는 수피교도의 행위는 술마시는 행위를 연상시킨다는 이유 그리고 커피를 '탄화'될 때까지 볶는데 이는 코란에서 금지한 행위였기 때문이다.

 

 최고급 커피 원숭이 똥 커피, 사향고양이 커피

  19세기 인도에서는 커피를 따는 원숭이를 조련하는 곳이 있었고 이 원숭이는 나무에서 열매를 따서 먹는데 여기서 채취한 커피를 멍키커피라고 불렀다. 원숭이는 아주 잘 익은 좋은 열매만을 따서 먹고 내장에서 화학반응을 일으키며 독특한 향을 낸다고도 했다.

  인도네시아의 야행성을 좋아하는 사향고양이는 야자주 주조에 쓰이는 자연 알코올이 포함된 수액과 신선한 커피 열매를 먹고 산다. 이 고양이의 장액이 커피에 특별한 향을 첨가해서 그런지 아니면 고양이가 잘 익은 열매만 골라먹어서 그런지 모르지만 사향고양이의 배설물은 잘 닦아내면 세계 최고의 커피라고 많은 사람들이 입을 모은다. 현재 이 커피는 일본이 대부분 소비하지만 미국기업 M.P 마운타노스가 '코피 루와크'라는 이름으로 1파운드(450그램)당 300 달러에 판매하면서 세계에서 가장 비싼 커피가 되었다. 레이븐즈 브루 커피에서는 이 커피를 판매하면서 티를 나누어 주는데 티셔츠에는 엉덩이 밑에 컵을 놓고 열심히 볼 일을 보는 사향고양이 그림과 함께 '마지막 한 방울까지 최고의 품질을'이라는 문구가 새겨 있다.

 

  커피의 눈물, 브라질

  오로모 전사들이 노예가 되어 하레르에 커피를 들여온 것처럼 커피는 노예제와 깊은 관계를 가진다. 남아메리카 커피 플랜테이션은 노예 노동력의 수요를 창출했고 이런 현상은 아프리카와 신대륙의 눈물의 역사를 만들어냈다. 노예 수입의 양적인 측면에서 보면 브라질이 단연 으뜸이다. 지난 200년 동안 아프리카에서 노예 약 300만 명이 개인이 운영하는 커피왕국에 동원되었다. 그 외에도 약 500만 명이 설탕 플랜테이션에 노예로 징발되었다. 이런 노예 노동의 착취 속에 오늘날 브라질 인구 상위 10퍼센트가 전체 부의 54퍼센트를 소유하고 노예의 직계 후손들은 오늘날에도 문맹률과 빈곤율이 높고 빈민굴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족쇄를 차고 하루 14시간 이상의 살인적인 노동환경에 처해졌으며 살인, 강간 등의 인권적 유린을 견뎌내야만 했다.

 

  맛없는 미국 커피로 세계의 입맛을 사로잡은 스타벅스 커피

  미국은 서양에서는 처음으로 국가의 탄생과 더불어 카페인에 전적으로 맛을 들인 나라이다. 보스턴 차 사건을 계기로 미국은 커피를 본격적으로 마시는 커피제국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한 번도 제대로 된 커피 제조법이 없는 나라이기도 하였다. 그래서인지 1800년대 들어와 남북전쟁이 일어날 당시 군용커피로 찬 물에 풀어먹는 인스턴트 커피를 만들어냈고 이 커피는 세계 2차 대전 후에도 사람들 사이에 퍼져갔고 1960년이 되기까지 인스턴트 커피는 미국 커피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했고 1971년 스타벅스 커피가 만들어졌다. 스타벅스 커피는 처음엔 원두를 판매하는 곳이었지만 점차 집이나 직장에 대한 생각을 잊고 쉬는 장소와 결합된 신개념 판매로 사람들의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다시 모카향이라고 할까 한약향이라 할까 부드럽고도 진한 커피 향이 얼굴에 퍼진다. 커피가 만들어지기까지의 노예노동을 생각하면 커피의 맛과 향을 느끼기에 앞서 가슴의 아픔이 함께 한다. 그리고 커피의 탄생과정에 얼룩진 그들의 눈물을 생각하게 한다. 하지만 갓 볶은 원두의 맛과 향 그리고 기분좋은 자극과 각성의 효과를 가진 커피 한 잔이 내 눈 앞에 놓여진 일을 집중하게도 하고 또 이슬람 신비주의자들이 했던 것처럼 신과의 일체감으로 향한 마음의 길을 걸을 수도 있게 한다. 또 중세 사람들이 느꼈던 것처럼 최음제로서의 역할도 한다.(적어도 커피 광고에서만큼은 말이다.)

그렇다면 선택의 길은 당신 앞에도 있다. 악마의 유혹인가? 신의 선물인가? 당신의 어떤 커피를 마시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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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란 무엇인가 - 예일대 17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 삶을 위한 인문학 시리즈 1
셸리 케이건 지음, 박세연 옮김 / 엘도라도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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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이란 무거운 주제이다. 특히 자신의 죽음이나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에 있어서는 그렇다. 이 죽음이라는 주제를 통해 샐리 케이건 교수는 보다 세밀하고 이성적으로 의문을 던지라고 조언한다. 죽음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죽음 이후에는 과연 영혼이라는 존재가 있어서 죽음을 경험하는 주체가 있는지 아니면 육체적인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우리의 모든 것은 끝이나는 것인지...또한 나를 나이게 하는 정체성은 어디에 있는지...어제의 나는 지금의 나라고 할 수 있는지...마찬가지로 지금의 나는 가치관과 성격과 육체가 완전히 바뀌어버린 30년 후의 나와 같다고 할 수 있는지...등 등 죽음에 대한 정밀하고도 주어진 문제에 대한 새로운 물음으로 자신의 삶을 보다 지혜롭게 들여다보기를 원한다.

 

  그가 안내해주는 주제를 따라가다보면 그의 의문이나 전제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던지 그의 논리나 서술방식이 때로는 나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는 때도 있다. 하지만 그가 어떤 결론을 미리 내려 놓고서 자신의 주장을 사람들에게 설득하는 데 고집하지 않고 사람들이 자신의 논의와 서술을 따라 각자의 의문을 던지고 생각해볼 것을 권한다는 점에서는 정직한 학자라고 보여진다. 또한 때로는 불필요하고 의미없어 보이는 그의 논리전개방식도 사유를 전개해가는 방식으로서는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하게 된다. 나이와 상관없이 그는 학자이다.

 

  결국 죽음이라는 문제는 삶과 죽음 전체를 바라보는 지혜가 필요하고 또 삶과 생명이라는 주제에 대해 경험적인 깨달음을 필요로 하는 주제이기 때문에 학문적인 접근이 가져다 줄 수 있는 한계는 이미 그가 갖고 있다. 즉 죽음을 바라보는 그는 삶의 한 가운데서 죽음을 사유하기 때문에 사유로는 알 수 없는 죽음 이후의 세계나 죽음을 경험하는 사람들의 경험을 지금의 과학으로는 해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과 죽음에 대한 종교적 통찰은 이미 오래 전부터 많은 것을 이야기해 왔다. 그런 종교적 가르침이 오래전부터 자명한 사실조차도 사유적 논리로 판단을 내리는 부분은 별로 그의 말에 신뢰가 가지 않았고 읽는 재미도 없었다. 하지만 종교적 가르침이라고 해도 내 경험적 깨달음에 의해 알지 못한 지혜에 대해서는 그의 사유가 내 진리를 찾아가는 채찍은 될 수 있었다. 내 삶의 진리나 화두를 들기 위한 회초리 말이다.

 

  논리를 파고 들면서 한 주제에 대해 결론은 내리는 일은 양파의 껍질을 까는 것과도 같다. 한 껍질을 벗기면 또 다른 껍질이 나타나고 또 한 껍질을 벗기면 또 다른 껍질을 만나게 된다. 그렇게 해서 세밀하고 정밀하게 한 논리에서 더 깊은 논리로 들어가면 결국에는 정확하게 결론내릴 수 없는 텅빈 공간을 만나게 되는 점에 있어서도 똑같다. 삶은 죽음을 통해 보아야 더욱 지혜롭게 영위할 수 있고 또한 죽음은 삶을 통찰하는 지혜를 가져야 제대로 준비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내 마음이 경험하는 것이고 또한 내 마음이 창조해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자살은 괜찮은 것인가? 아니면 모든 자살은 나쁜 것인가? 타살은 상대방 동의없이 타인의 생명을 빼앗는 것이라면 자살은 피해자 자신의 동의를 얻고 있다는 점에서 사회적 해악은 적지 않은가? 그런데 피해자 자신이 느끼기에 죽음보다 못한 삶이거나 죽음이외에 다른 대안이 없을 때 선택하는 자살을 무조건 나쁘다고만 할 수 있을까? 이런 문제에서조차 인간과 생명에 대한 깊은 통찰이 결여된 논리적인 사유만으로는 올바른 방향을 세울 수 없다고 생각한다. 특히 죽음 이전과 죽음 이후의 행복을 공리주의적으로 비교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단 말인가? 또한 과연 비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인가? 저자도 스스로의 논리전개에서 모순에 빠져들 수 밖에 없는 사유의 공간, 사유의 블랙홀이 생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세이건 교수는 물리주의자로서 죽음 이후의 영혼의 경험을 부정한다. 따라서 죽음 이후의 어떤 것도 의미가 없다고 본다.

 

  이제 그의 사유를 따라가다가 나는 그의 사유의 길로부터 벗어난다. 나는 내 오솔길을 따라 간다. 삶과 죽음에 대한 보다 지혜로운 길은 내 삶을 더욱 밝게 해주고 또 내 마음을 더욱 넓게 하고 또 늘 공부의 길을 제시하는 길이다. 그 길은 내 스스로의 삶을 비춰주고 또 밝게 하기 때문에 스스로의 아는 마음이 이를 안다. 달리 말이 필요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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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와 사이 - 유쾌한 지식여행자의 커뮤니케이션 강의 지식여행자 12
요네하라 마리 지음, 홍성민 옮김 / 마음산책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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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참 잘 붙였다는 생각이 든다 "차이와 사이"

그녀가 프라하의 소비에트 학교생활에서부터

많은 학교 친구들이 가진 언어와 문화와 인종의 차이에서부터

그들과 소통하기까지의 힘겨움과 어려움 그리고 소통의 기쁨을

이 책이 좀 더 성숙하고 미학적으로 담아냈다고 생각한다.

차이는 남녀 사이에서 시작한다.

'사랑의 법칙'에서는

생물학적으로 다른 남녀의 소통은 시대적인 필연이고 인류의 숙제였다.

문학작품에서나 현실에서나 우리는 이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기혼자이건 미혼자이건 아니면 태어나면서부터 남녀의 성이 주어지면서부터...

그 사이의 소통을 여자인 그녀는 참 재미있게 표현한다.

A는 꼭 자고 싶은 남자,  B는 자도 괜찮을 것 같은 남자,  C는 절대 자고 싶지 않은 남자...ㅎㅎ

그녀만의 남녀 해법이지만 난 개인적으로 B형 정도로 만족한다. ㅎㅎ

'이해와 오해사이'에서는 동시통역을 직업으로 삼으면서 느끼는 커뮤니케이션의 비평론이라 할 수 있다. 한 문화와 또 다른 문화가 소통하는 것이 언어로 가능하다면 그것은 기호와 개념이라는 통로를 통해 가능하고 그것에 익숙해지고 전문화되기 위한 과정에서 그녀가 느끼는 것들이다.

무엇보다도 기호와 개념보다는 관심과 배려가 중요하고 단어와 기호보다는 문맥과 느낌이 중요하다.

'통역과 번역의 차이'에서는 통역의 즉시성에 대해 말한다. 그러기 위해 독서가 키포인트라고 한다.

많은 어휘의 습득과 언어감각을 놓치지 않는 방법은 그녀의 경험에서 폭넓고 깊은 독서였다.

'국제화와 글로벌리제이션 사이'에서는 그녀만의 독특한 해법으로서 일본이라는 나라와 일본인의 속성을 끄집어낸다. 그러면서 경제력과 군사력에 의한 세계화와 국제화를 경계한다.

 

문화적 코드를 통해 세상의 현실을 비판하면서 새롭게 소통을 이야기하는 그녀의 입담이 놀랍다. 더구나 차이를 받아들이고 함께 살아가는 데 있어 필요한 소통의 방법을 우리는 그녀에게서 배워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녀의 매력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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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의 소녀시대 지식여행자 1
요네하라 마리 지음, 이현진 옮김 / 마음산책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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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놀라운 책이다. 이 책은..

일본인 소녀 요네하라 마리가

공산당원인 아버지를 따라

프라하의 소비에트 학교에서 보낸 1959년에서 1964년까지의 기록이다.

자신의 생활을 기억하며 적은 자서전적 에세이라고 할까...뭐 그런 책이다.

이 책이 놀라운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그녀의 놀라운 기억력과 친구들의 성격과 특징을 마치 눈 앞에 보는 듯이 그려내는 섬세함과 관찰력이다.

둘째, 어린 소녀시대의 체험이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역사의식과 시대에 대한 인식과 통찰이다. 이 인식과 통찰이 그녀의 프라하의 생활에서 보인 행동과 사고 곳곳에 드러난다.

셋째, 무엇보다도 이 책이 매력적인 이유는 기껏해야 열네살인 소녀가 보여주는 삶의 깊은 통찰에 있다.

역사와 시대의식이 옛 친구들을 다시 만나는 추억여행을 넘어 그 친구의 삶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게 재조명해주었다면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가진 성숙한 영혼은 시대와 역사도 휩쓸어가지 못하는 삶과 생명으로 그 시절의 생활을 묘사한다.

어찌 어린 소녀가 러시아 공산당이 수정주의라 비판하는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원의 딸인 야스나와

일본공산당원 중에서도 가장 좌파에 속하는 아버지의 딸인 그녀가

시대를 뛰어넘는 화해와 공존 그리고 평화와 사랑의 공간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

그녀의 매력에 푹 빠져버린 나는

마치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그녀의 또 다른 저서를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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