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과 열광 - 황우석 사태 7년의 기록
한재각.강양구.김병수 지음 / 후마니타스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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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그동안의 언론 보도를 통해 접한 정보들로써 황우석 사태에 대한 일련의 흐름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때로는 애국주의에 묻혀가기도 했고 때로는 장애인들에게 새로운 삶의 희망이 주어질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기도 했다. 그런 생각의 이면에 유전자 조작에 대한 인간성 문제에 대한 잠재된 두려움 또한 적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황우석 사태의 전말에 대한 이해가 궁금했다. 조그만 새로운 정보에도 결론을 뒤집어대는 사람들 속에서 도대체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대중들의 이러한 혼란과 어지러움에 보수언론들의 몫이 컸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왜? 국민들이 그렇게 '황우석'이라는 한 사람에게 그토록 많은 희망과 열망을 가졌다가 일순간 바람빠진 풍선처럼 모든 것이 빠져버리고 그를 둘러싸고 형성되었던 수많은 이해관계자들은 모두 피해자로서만 목 메인 목소리를 내고 있는가? 그에게 걸었던 국민적이고 세계적인 관심과 기대는 또 단순한 몇 가지 사실로서 180도 뒤집혀지고 그를 바라보며 자신의 미래를 꿈꾸었을 수많은 계층의 사람들은 이제 돌이킬 수 없었던 한 순간의 부끄러운 과거처럼 빨리 잊혀지기만을 기다리는가? 이러한 사실에서 우리는 황우석 교수라는 한 인물의 문제가 아니라 더욱 심각하게 감추어져 있는 우리 사회의 보다 깊은 문제점들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반성해야만 앞으로 우리가 엉뚱하고 빗나간 열정으로 민주주의를 질식사시키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 책은 이른바 '황우석 사태'라고 지칭되었던 황우석 교수의 복제소의 탄생과 배아줄기세포에 얽힌 사이언스의 발표와 국내외의 관심과 집중, 그리고 정부의 정책 변화와 언론의 보도, 국민들의 영웅만들기 심리와 과학기술계와 의료학계의 권력의 집중과 부패구조에 대해 7년 동안의 꼼꼼하고 세밀한 자료 조사와 정리를 통해 이 사건이 가진 의미에 대해 보다 포괄적이고 심도있게 다루고 있다. 황우석 사건이라는 일대의 사건 속에 우리 나라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문제점들이 압축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학자로서의 자질보다는 언론과 매체를 통해 보였던 쇼맨쉽과 과학기술계와 의료계의 학계를 통해 형성했던 권력구조와 이를 지탱하기 위한 정부 주요 인맥과의 관계와 재계와 정계 인사와의 인맥 맺기는 이 사건이 한 학자의 연구를 넘어 사회적인 국가적인 모순구조와 맞물려들어갔음을 보여주었다. 자신을 대통령으로 뽑아준 사람들을 하나 둘씩 배반해가는 노무현 정부에게 그는 재임기간 중 국가 장기 발전 계획에 대한 청사진을 보여주고 현 정부의 성과로 시작하게 하는 환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고, 2002년 월드컵 이후 국민적 영웅과 대중들의 관심과 열정을 모으는 촛점으로 제격이었다.

  거의 '황우석 신드롬'으로 한국 사회를 물들일 무렵, 그에 대한 어떤 사소한 비판조차도 반애국주의와 반국가주의로 매도당하였으며, 과학기술, 의료계 내부에서의 비판은 이미 그가 접수한 권력 구조내에서는 더 이상 자신의 길을 포기하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함부로 입밖에 꺼낼 수 없는 얘기가 되어버렸다. 정작 외국에서는 치열하고 광범위하게 진행되었던 인간 본성에 대한 문제나 인간 윤리에 대한 심도있는 논쟁이 눈이 없는 맹목적 열정 속에 녹아버리고 고삐풀린 망아지처럼 설쳐대는 과학기술에 대해 그 누구도 다치는 것을 회피했던 우울한 시대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MBC의 PD수첩은 결국 중단되었으며, 공개 사과를 해야 했고, 지독한 국민들이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이러한 전체주의와 파시즘같은 분위기속에서도 바른 소리를 내었던 용기있는 지역 과학도들의 비판의 글 게재와 자성의 목소리와 반성의 움직임은 이 사건을 통해 우리 사회가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 무엇보다 국민들이 바른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정보를 얻고 판단할 수 있는 눈을 빼앗아버린 현대 사회의 언론이 빚어낼 수 있는 무시무시한 파시즘과 전체주의적인 움직임.

  그 전체 분위기에서 때로는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을지도 모른다. 한 사람의 이지러진 욕망과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각계 각층의 역시 왜곡된 욕망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어긋난 열광들 속에 많은 사람들의 침묵은 민주주의의 밑동을 잘라낸다. 마치 조지 오웰의 '1984년' 현실이 우리 사회를 훑고 지나갔던 것 같은 악몽이 다시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민주주의가 '지금' 바로 '여기'에 잘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인간답고 참다운 삶을 위한 민주주의가 이 땅에 안녕하신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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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2006-07-17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기에 결국은 사회의 모든 문제가 우리들의 문제인 것이군요.
사회로 나아갈수록 어둡고 비관적인 면들만이 자꾸만 보이게 됩니다.
그것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에 대해서도 사실 별로 뚜렷한 무엇인가가 떠오르지 않구요.
이런 세상을 의미있게 살아가는 방법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볼 뿐입니다.
논의로도 행동으로도 다 안되는 그 대안은 무엇인지를 또 묻습니다.

비자림 2006-07-18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잘 읽고 갑니다.
후후 오늘은 여기가 글샘님 서재같은 느낌이 드네요.^^

달팽이 2006-07-18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비자림님.
방학이라 서재활동이 활발해지기를 기대합니다.

monstino 2006-11-20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넷 언론 프레시안을 통해 당시 사태에 대한 많은 기사를 냈던 강양구 기자를 비롯, 세 지은이들은 과학기술 민주화'라는 테마를 공유하며 7년여간 황우석 사태를 추적, 정리, 비판해왔다. --- 과연 몇번이나 책상에서 만들어낸 거짓이아닌 취재에 의한 기사를 기고했을까? --

달팽이 2006-11-20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부분에 대한 정보의 진위는 제가 파악할 수 없군요.
혹시 좀 생각이 있으시면 글로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자료와 더불어 남기어 주시면 고맙겠네요..
 
인류의 미래사 - 21세기 파국과 인간의 전진
W. 워런 와거 지음, 이순호 옮김 / 교양인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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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인류의 미래가 공동체와 개인이라는 두 극점 사이를 흔들리는 추와 같다고 한다. 인류의 진보가 국가와 공동체의 책임과 굴레로부터 벗어나 개인의 자유와 정신적 진보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인류절멸의 위기를 헤쳐나가는 과도기적인 정치형태로서의 세계연방이라는 특별한 정치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삶은 현실을 헤쳐나가는 코드이다. 그 코드는 현실과 현실인식이라고 하는 조건으로부터 생긴다. 인간 역사의 추는 현실과 현실 인식 사이에서도 오가고 있다. 인류 시계의 추는 또 인간 존재의 극과 극 사이에서도 오가고 있다. 와거교수는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우리 삶의 목표와 의미에 대해서도 시간의 추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미래에 대한 역사적인 기술은 단지 미래를 살아가는 인간의 삶의 다양성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와거 교수는 복잡하고 불규칙적으로 나열된 것 같은 인간의 미래적인 삶에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일반화를 시도한다. 그것을 통해 역사는 불규칙적으로 나열된 것이 아니라 일정한 법칙에 의해 흘러가는 것임을 보여준다. 자칫 구조적이고 딱딱해지기 쉬운 역사이해를 보충하기 위한 그의 책 서술은 단원 말미 부분에 들어간 편지형식의 글을 통해 개인적이고 사생활의 삶을 통해서 미래를 살아가는 인간의 의식을 세밀하고 자세하게 보여준다.

  인구의 폭발과 자원부족, 생태계의 파괴와  빈부격차의 문제, 계급갈등과 남북의 격차 등의 첨예화는 인류가 안고 있는 문제들의 총체적인 해결을 요구하였고, 그것은 세계 3차 대전으로 현실화된다. 세계 대전으로 모든 것이 파괴된 폐허의 땅 위에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물질적인 새로운 문명 뿐만이 아니라 새로운 인간성도 만들어진다. 인류를 공멸로 유도했던 과거의 인간은 인류 전체의 진화와 창조를 위한 새로운 인간형으로 변화될 것이 요구된다. 그러기 위해 개인적인 삶은 모조리 반납하고 공동체와 세계 연방을 위한 새로운 삶이 그 자리를 대체한다. 조지 오웰이 말한 '1984년'과도 같은 전체주의 국가가 도래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전체주의는 인간 진화의 과도기적 단계에 놓여져 있을 뿐이다. 개인의 자유로운 정신이 질식당할 것 같은 세계국가적 공동체의 삶은 내부적인 모순의 씨앗을 키워가고 있었다. 아니 인류의 공멸을 뛰어넘기 위해 필요악으로 존재했던 세계 연방 체제는 이제 진정한 인류의 진보를 위한 텃밭에 거름이 되어야 할 운명이 되었다. 민주주의적 선거에 의해 연방 체제는 와해되고 작은당은 집권하자마자 자신의 모든 권력을 내던진다. 결국 텅빈 자리를 차지한 것은 자치와 자율, 소규모의 지역주의였다. 그것이 새로운 인간을 창조하기 위한 삶의 형태가 되는 것이다.

  인간의 수명도 유전자조작과 의료기술을 발달로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인간의 신체를 모두 바꾸어도 인간 의식을 보존하는 방법이 개발됨에 따라 '과연 인간 존재란 무엇인가?'라고 하는 철학적 물음을 물어야 하게 되었다. 그가 대단한 점은 예측할 수 없는 인류의 미래사회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릴 수 있게 하는 것을 넘어서서 인간 존재의 궁극적인 물음을 던지는 것으로 나아갔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인간 존재의 근원에 대한 물음과 답 속에 인류의 미래가 갖고 있는 진보의 형태가 결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가장 인간다운 정치체제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가장 인간의 본성을 발현시키는 삶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인간의 모습이 어떠하든지 인간의 삶의 모습이 어떠하든지 인간 영혼의 지구적이고 우주적인 삶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는 목적에 얼마나 가까이 도달하느냐가 인간다운 삶의 기준이 될 것이다. 200년을 살 수 있으면 행복할까? 인생의 목적없이 부초처럼 떠내려가는 삶이 무엇이 아름답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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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6-07-05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거는 미래의 거울이라는 의미인가요?
그나저나 땡스투를 누른다는게 추천단추를 눌렀으니 어쩜 좋아요!

달팽이 2006-07-05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때로는 의지를 벗어난 손처럼
궤도를 벗어난 발도 때론 필요한데..
그나저나 여우님 오랫만에 발걸음이군요.,
 
90%가 하류로 전락한다 - 한 일본 지식인이 전하는 양극화의 미래
후지이 겐키 지음, 이혁재 옮김 / 재인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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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사회의 양극화 현상에 대한 분석들이 우리 사회와 그리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에 좀 더 정리해보고픈 마음이 생겨서 바로 읽어나갔다. 세상의 흐름으로서의 자본의 세계화와 글로벌화는 일본사회든 미국 사회든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선진국에서 기존의 중산층이라고 불리우던 계층의 소멸과 소수의 상류층과 대다수의 하류층을 만들어낸다는 점이 공통적이다.

  하류가 90%이상을 차지하는 사회에서 하류층들은 기존의 물질적 풍요와 사회적인 관계로부터 소외당한다. 따라서 개인적으로 버려진 삶을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부정적으로만 바라본 하류사회이다. 지금까지의 인류는 지구가 가지고 있는 자연조절능력을 무시하고 개발이라는 맹목적인 목적앞에 복종해왔다. 결과 환경은 더이상 인류가 함께 공존할 수 없는 막바지로 치닫고 있고, 자원은 더욱 고갈되고 있다. 더글러스 러미스가 얘기했듯이 "경제성장을 이루지 못하면 우리는 살아갈 수 없는가?"라는 질문은 "제로성장을 인류가 받아들일 수 없다면 더 이상의 생존은 없다."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미국처럼 세계 5%의 인구가 인류 전체의 에너지 25%를 소비하는 소수의 상류층으로 사는 것이 바람직한가? 나는 차라리 물질적 소비를 줄이고 의식과 영혼의 성장을 추구하는 자발적 하류층이 되겠다. 90%의 하류층이 왜 물질적으로 경제적으로 부족하다고 해서 불행해야 하는가? 인간사회는 이미 절대적인 빈곤을 오래전에 극복해왔다. 문제는 상대적인 박탈감이다. 왜 남들의 삶을 늘 비교해서 외부에서 삶의 행복을 찾아야만 하는가? 내 삶의 주인은 바로 내가 아니던가?

  이 책의 저자는 하류사회의 저자와는 다른 결론을 내린다. 하류사회의 저자는 다시 광범위한 중산층을 사회적, 제도적으로 양산해내는 대안들이 필요하다고 한다. 내가 보기엔 그 방법은 결국 물질적으로 더욱 풍요로운 생활을 할 때 인간은 행복하다는 말과 일치한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양극화를 세계적인 대세로 받아들인다. 그러면서 일본의 닫힌 양극화 현상이 아니라 미국식의 열린 양극화 현상을 주장한다. 미국은 일본과 달리 상류층의 부의 사회적 환원과 기부문화가 정착되어 있으며, 빈곤층을 위한 대학 진학을 위한 장학금 제도가 잘 마련되어 상류층으로의 계층이동에 커다란 장애가 없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은 하류층의 상류층으로의 이동이 거의 폐쇄된 양극화라서 더욱 문제가 된다고 한다.

  저자의 미국 생활이 미국의 양극화 현상을 보다 좋게 본 면이 없지 않다고 생각된다. 제레미 리프킨에 의하면 미국만큼 빈부의 격차가 극대화되고 하류층과 흑인들의 삶이 피폐해진 나라도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논의의 대부분은 물질적인 조건과 경제적인 조건이 인간의 행복과 사회적 정의를 결정한다는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 물론 인간다운 생활을 위한 어느 정도의 경제적 조건은 필수적이다. 하지만 우리들의 삶을 결정하는 요인은 물질적인 풍요와 정신적인 황폐함이 아니지 않은가?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욕구와 욕망을 줄여서 삶의 행복에 도달하는 여러 가지 방법들이 모색되었다. 아미쉬 공동체, 스코트 니어링과 헬렌 니어링의 자연적인 삶, 소로우와 에머슨의 자연적 삶과 영성,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영성과 각종 종교들은 인간의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한 모색의 결과 찾아진 길들이다. 이 길의 모색에서는 기존의 가족관계, 사회 관계, 제도와 법들이 모두 문화적인 산물임을 인정하고 우리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 중의 하나로 인식한다.

  상류층이 못 되서 불행한가? 결혼을 못 해서 불행한가? 좋은 집과 차가 없어서 불행한가? 문제는 물질과 조건의 부재가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나의 태도이며 내 인생의 가치 추구와 상관이 있다. 세상의 모든 일들은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의 이중성을 동시에 가진다. 그것을 인류 발전의 기회로 삼을 것인지 아니면 타인에 대한 적대감에 바탕한 투쟁으로 우리들의 상대적 박탈감을 채울 것인지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나는 상류층이 부럽지 않다. 오히려 불쌍한 사람들이 아닌가? 성과주의에서 돋보인 그들이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 좋은 차와 편안한 집을 얻기 위해 일생동안 일에 쫓겨 사는 것이 행복한가?

  삶의 마지막 순간 과연 그들은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욕구를 줄인 간소한 경제생활과 풍요로운 정신적 생활을 추구하는 자발적인 하류층이 되겠다. 그것이 저자가 바라보는 미래세계와는 다른 내가 꿈꾸는 희망적인 하류사회의 밑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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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덕화 2006-05-19 0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합니다._()_

달팽이 2006-05-19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내리는 오늘 좋군요..

2006-05-19 19: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달팽이 2006-05-19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알고 있는 책이었습니다만 아직 읽지 못하고 있던 책입니다.
감사히 받아보겠습니다.

시베리아도서관 2006-05-24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한 신념을 갖고 끝까지 살아가면 좋겠죠. 상대적인 박탈감이라는 게 있는 것 또한 현실이 아닐까요? 하류사회에 나온 바, 스스로 하류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왠지 개성있고 즐거워 보이지만, 생활에 대한 만족도가 다른 계층에 비해 가장 낮은 이유는 뭘까요? 마냥 '하류가 좋아'라는 식이 사고는 계층의 격차를 더욱 벌어지게 할 것이고, 사회문제를 낳을 것입니다. 나아가 자발적 하류라 해도 그들을 역으로 상업적으로 이용해 부를 축적하는 게 자본주의의 현실이 아닌지. 문제는 늘어만 가는 하류계층이 난 '이대로가 좋아' 할 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상류계층의 부를 축적해주는 수단이 되어간다는 것입니다. 무인도에서 자급자족하며 살지 않는 이상, 이른바 '자발적 하류'라고 하는 것은 너무 순진하거나 사회에 무책임한 건 아닌지. 그렇다고 모두가 중류, 상류가 되어야 한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그렇게 될 수는 없죠. 정말 극소수의 신념을 갖고 로하스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계층 사회에서 추락한 대부분의 하류는 더욱 추락할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은 나름대로 먹고 살만 하지만 나중에는 가난에 허덕일 때가 오지요. 돈을 벌어 중류가 되어라는 말을 하고 싶지 않지만, 적어도 하류를 즐길 만한 능력의 하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유지하는 것만해도 쉽진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진정한 하류가 아니죠. 그들에겐 의욕이 있으니까. 이른바 '하류사회'가 문제 삼는 하류는 의욕상실자입니다. 그들이 큰 문제라는 것입니다. ... 중언부언했지만 '하류'를 조금 긍정적으로 보셔서 제 생각을 올렸습니다. 결론은 책에서 말하는 '하류'는 극복해야 할 문제라는 점입니다.

달팽이 2006-05-24 2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인간의 역사는 늘 계급사회로 점철된 역사였습니다.
인간사회가 조직과 국가를 구성한 후에, 잉여생산물이 생기면서 비노동계급이 존재하면서부터 그랬습니다. 심지어는 공산주의의 이념을 지향한 국가에서도 당 고위간부와 하류계급간의 생활격차는 심했습니다.
앞으로도 완전하게 평등한 사회는 힘들것입니다. 물론 노력은 해야겠죠..
하지만 무엇보다 우선 저의 문제의식은 지금처럼의 미국식 자본주의로의 필요이상의 소비와 새로운 필요의 창출이라고 하는 경제구조로서는 지속가능한 삶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극복하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물음을 던질때 결국은 인간의 마음에서 시작된 의지가 씨앗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하류사회에서 저자가 의도한 밑그림을 저도 모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책은 스스로의 생각으로 읽어야 하고 스스로의 실천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왜? 읽는 사람 모두의 생각이 같아야 합니까? 정해져야 합니까?
그렇게 추락하는 하류사회의 깊은 고뇌와 그늘을 제도적으로 개선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경제체제가 바뀌어야 하지요...
하지만 지금의 경제체제를 뒷받침하는 것은 우리들의 내면의 욕망과 이기심입니다.
바로 나의 그리고 당신의 욕망과 이기심 말이죠...
나는 좀 풍요롭고 잘 살고 싶다는 이기심과 욕망 말이죠...
그것은 우선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아야 할 문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것이 해결되지 않고서는 제도를 바꾸어놓아도 결국은 다시 돌아올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남들을 착취하여 잘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기심과 욕망을 우리들의 똑같은 이기심과 욕망이 받쳐주기 때문입니다.
화폐(자본으로서의 화폐)란 실체하는 것이라기 보다 우리들의 이기심과 욕망이 만들어낸 이미지와 환상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 이미지와 환상에 아무런 욕망과 이기심을 싣지 않게 될 때
화폐는 그저 유통 수단에 불과한 존재일 것입니다.
아니 다른 유통 수단으로 바뀌겠죠...
님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상대적 박탈감이 과연 우리 내면의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 먼저 들여다보아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분배의 평등이란 우리 마음 속에 남과 더불어 나누고 함께 행복하려는 순수한 마음이 지배적일 때 그리고 그 마음의 빈탕을 들여다 볼 수 있을 때에나 가능한 일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류사회 - 새로운 계층집단의 출현
미우라 아츠시 지음, 이화성 옮김 / 씨앗을뿌리는사람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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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서양에서 시작된 포디즘의 도입과 인간의 기계화와 도구화로 단순작업의 형태는 보다 널리 보편화되었다. 그리고 뒤이은 세계화는 자본의 집적과 집중으로 부의 편중 및 소득의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킨다. 서양에서도 양극화의 진행에 대한 대안으로 일본식의 종신고용제나 사주제 등의 기업 형태가 제시되기도 한 것이 겨우 20년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서 일본 역시 양극화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조사 자료를 통해 보여준다. 1억 인구가 중산층이라 불리우던 일본사회, 그 사회를 안정감있게 받쳐주던 중산층의 급속한 몰락과 하류화 현상은 자본의 세계화로부터 인류가 갈 수 있는 미래상이 어떤지 그려준다.

  계층화로 인해 처음 드러나게 되는 것은 소비층의 분열이다. 예전과 같은 방법으로 상품을 팔려고 했던 기업들은 하나같이 매출의 감소에 어리둥절해질 것이다. 그것은 소비층에 맞는 새로운 상품의 개발과 소비전략이 부재한 탓이다. 보다 상류층에게는 더욱 차별화되고 고급화된 상품을 하류층으로 몰락한 사람들에겐 더욱 저렴하고 실속있는 상품을 개발해서 팔아야 하는 양극화 상품시대가 된 것이다. 다음은 독신자 수의 증가이다.  몰락하는 중산층들에게 있어 결혼은 먼 나라의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일본에서는 300만엔 이상을 벌지않으면 가정을 꾸릴 수 있는 경제력을 갖지 못한다. 또한 남녀가 만날 기회도 부족해졌다. 가상세계의 활동은 전세계적으로 이루어지지만 현실 공간에서의 만남은 더욱 협소해지고 고착화되어버린다. 그래서 2-30대 여성과 남성의 결혼율은 50 이내로 떨어지게 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여성들의 사회진출도 두드러진 현상 중 하나다. 이젠 여성도 능력과 실력에 따라 전문적인 고소득 직종에 종사할 수 있게 되고, 전문직 여성들의 사회진출과 나머지 여성들의 하류화가 동시에 진행된다. 이젠 남자를 잘 만나 자신의 행복을 찾는 여성들의 비중이 더욱 줄어들고 있고, 전문직 고소득 여성들이 그와같은 조건의 남자를 만나는 신세대 상류층이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그들은 서로간에 누리는 문화가 비슷하고, 사고와 대화가 동질적이며, 서로간에 대한 이해도 높다. 주로 30대에 들어서서 결혼하여 아이들을 가지게 되고, 여행과 골프, 스포츠와 독서 등 광범위한 취미활동과 자아실현을 위한 투자에 적극적이다.

  하지만 빛이 밝으면 어둠도 더욱 짙어지는 법! 그들의 그늘에 서 있는 대다수의 여성들의 삶은 피곤하다. 중학교나 고등학교를 나와 슬럼가에서 같은 계층의 남자를 만나 덜컥 임신을 해서 결혼을 하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여성들은 카마야츠나 가류계 여성들의 삶을 살아간다. 그들은 중산층으로의 삶을 꿈꾸기는 하지만 이젠 자신들의 처지에서 벗어나려는 의지와 노력이 거의 없는 사람들이다.

  남성들도 마찬가지다. 부모님에게 의지해서 살아가면서 300만엔 이하의 연봉으로서는 결혼을 꿈꾸지도 못한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세계에 빠져 살고 있으며 혼자있는 시간을 즐겨하고 컴퓨터나 오락게임을 즐겨하며 소일한다. 나만의 개성을 찾으려고 하는 데에는 사교적인 만남이나 교류를 하기엔 그들이 가진 것이 너무 없다는 이유로해서 자신들만의 세계에 빠져들려고 하는 것이다. 이들은 주로 비정규직에 종사하며 간단한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울 때가 많다.

  이러한 양극화 현상의 진정한 문제는 그들이 하류층으로 전락했다는 사실보다는 더 이상 그들이 중산층으로 진입하려는 노력이나 의지가 없다는 점이다. 그들이 더 이상 꿈을 꾸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상류층과 하류층을 구분짓는 것은 의지의 부족여부이다. 상류층은 모든 일에 적극적이고 자신감에 넘쳐 있으며 의욕적이다. 하지만 이러한 의식의 차이는 다시 양극화현상을 더욱 심화된 형태로 재생산해낸다.

  그렇다면 급속화되고 있는 양극화과정에서 90%에 달하는 하류층들은 사회에 대한 불만과 구조개혁의 의지를 가지는가 하면 그렇지 못하다. 그들은 이러한 의지도 부족한 것이다. 그들은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하며 그것을 주어진 한도에서 행복으로 이끄는 방법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일까? 가족관계에 매이지 않는 개인적이고 자유로운 삶, 직장에 평생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필요에 따라 언제든지 관심과 직장을 옮길 수 있는 유목적인 삶, 삶의 어떤 순간에도 자신의 모습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동적인 측면도 동시에 가지는 것일까?

  미우라 아츠시는 이러한 하류층이 꿈을 가지고 사는 것은 이전처럼 보다 많은 중산층으로 진입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국가는 이를 위해 필요한 제도적 장치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동경대나 교토대에 하류층 자녀의 일정수를 배정하는 것이라든지 가산점 제도를 마련한다든지, 지방 학생의 대도시 대학 진학시 학비와 생활비를 제공해야 한다든지, 인터넷 수업화를 통해 지방대생이 좋은 강좌를 수강할 수 있게 한다든지 등의 제도적 장치를 통해 중산층으로의 편입만이 살 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책에서도 보여주고 있듯이 하류층을 대량 양산해내는 원인이 의식의 하류화에서 비롯되었듯이 하류층의 생활에서도 그것을 받아들이고 수용하여 행복하게 살아가는 의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우리 세계는 너무나도 물질적인 삶에 치우쳐있다. 그래서 부가 없거나 소득이 적으면 행복한 삶은 불가능한 것처럼 여겨진다. 최소한의 물질적인 조건의 충족으로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는 조건도 중요하다. 하지만 진정한 행복은 마음에 있다. 물질적 삶의 과소를 떠나 주어진 환경을 어떻게 행복한 삶으로 바꾸어낼 것인가에 대한 인식이 중요하다. 이 책이 빠뜨리고 말았던 것이 바로 그 부분이 아닐까?

  90%의 사람들이 하류층이 된다면 주어진 형식적인 민주주의라는 정치제도가 그 사회를 유지시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하류층에게 보이듯이 그것이 어느 정도의 자발성을 갖추고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속도의 삶과 소유의 삶을 자발적으로 버린 삶을 가진 새로운 패러다임의 사회화가 가능하다면 말이다. 어쩌면 우리들은 이전의 획일적이고 형식적인 삶에 찌들린 경험들을 회피하는지도 모른다. 영혼은 그런 이전의 경험에서부터 새로운 삶을 꿈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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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6-05-17 1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질적 토대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말은 거짓이 아닙니다.물론 전적이지는 않겠지만 말이죠.하류층이 하류의식에 젖어서 하류인생을 산다는 말에는 절대 동의할 수 없습니다.왜 그들이 절망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가에 대한.. 사회구조적 장벽에 대해 생각해야만 합니다.비정규직의 단 1%만이 정규직이 될 수 있는 사회입니다.비정규직은 하류인생을 살 수 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아이들 교육에도 영향을 미칩니다.가난이 대를 이어가지요.마음만 편하게 먹고 다 잊으라...후..우리 삶이 물질 중심주의적이므로 상류층이든 하류층이든 다 접고 행복을 마음 안에서 찾으라는 말씀처럼 들립니다.결국 마음 공부는 기존의 사회적 불평등은 접고 마음속으로 행복을 찾는 거로 끝나고 마는군요.미우라 아츠시는 왜 하류층이 꿈꾸기를 포기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부족해보입니다.그저 개인적인 능력부족 의지 부족으로 처리하는것은 절망적일 만큼 미우라씨의 빈약한 공부때문입니다.또한 마음 공부가 현실에 발을 딛지 않고 이어온 것이라면 사상누각일 뿐입니다.....후.....그렇게 얻는 진리라면 그게 견성이든 하늘의 도이든 버려도 부끄럽지 않습니다.

달팽이 2006-05-17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질적 삶의 개선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물질적 삶의 개선이 완전히 이루어지기 위한 노력만으로 나에게 주어진 세상의 의미가 다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님처럼 사회적 구조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런 일에 종사하면 되지요.
아니면 의식적으로라도 정치적인 지향점을 가지면 되지요..
저도 그런 정치의식을 가지는 것에는 공감합니다.
하지만 사회구조나 사회의 변화가 구조적인 문제이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어떻게 수용하며 살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대자본의 횡포인줄 알면서도 자동차도 타야하고 할인마트도 가야하고
대기업이 제공하는 아파트에서도 살아야 하고...
삶의 힘이 있어 그것을 모두 거부하는 자연적이고 평등한 삶이 있다면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이 개인적인 삶이지만 대안적 삶의 본보기가 되기도 하겠지요..
하지만 사회적 평등이 단순히 가진 자들의 것을 빼앗아 내가 잘 살려고 하는 이기심이나 집단 이기주의에서 기반한 것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마음공부도 필요하고요...
님이 제 글을 읽고 그런 생각을 했다면 나로서는 가슴아픈 일입니다.

2006-05-18 17: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minilove 2006-05-18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나가는 어린사람입니다만.. 저자가 이야기하는 하류의 본질은 우리 나라의 경우에는 아직은 적용하기가 이른 것 같아요. "일본의 베이비붐 열풍을 타고 풍요 속에 자라난 젊은이들 중 상당수가 여기에 해당한다는 것" 이라는 책의 설명으로 봐서는 풍요 속에서 하류인생이 되길 선택-의식적이든 그렇지 않든-한 사람들의 이야기 인것 같습니다. 드팀전님 말씀대로 우리나라는 하류층의 형성을 개개인의 하류의식으로만 돌리기에는 사회적으로 해결해야 할 구조적인 문제들이 많으니까요. 하지만 우리도 얼마 있지 않아 곧 저런 젊은이들이 속출하고 하류의식이 하류인생을 이끌에 낼 것이라는 사실은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제 주변만 봐도 단순히 공부하기가 싫다고 대학교를 자퇴하거나, 정말 인터넷만 벗삼아 지내고, 아무것도 하지않고 부모님 돈으로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달팽이 2006-05-18 2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카루님, 님의 공감이 힘이 되네요..
미니러브님, 우리나라도 그 추세로 본다면 이미 진행되었고(비정규직화와 노동유연성으로 그리고 젊은 층의 대량 실업문제로), 앞으로 10년 정도면 그 윤곽이 드러날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회현상이나 경제현상을 설명할 때 우리는 앞으로의 방향이나 추세에 대한 사람들의 의식이 현실을 더욱 크게 받아들이고 반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현실보다 현실인식이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내기도 하죠..
하류인생을 지향하는 한 사람으로서 그것이 단순히 개인으로 내던져진 외톨이로서가 아니라 같은 문화와 같은 의식을 지향하는 공동체로서 우리 세계적 삶의 흐름의 대안을 생각해보는 노력도 필요하겠지요...
누군가가 말하는 부족공동체라는 개념을 끌어들일 수도 있겠구요...
그럴 때 도래하는 하류사회는 나에게서 새로운 삶으로 펼쳐지겠지요...
내 마음이 펼쳐져서 이루어지는 나의 세상이 되죠..
세상의 변화가 나로부터 시작되며 그 나의 변화는 의식의 변화로부터 시작됩니다.
제겐...
 
한국인 코드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6년 2월
평점 :
절판


  '물고기는 물을 모른다.' 물고기는 물 밖에 나와 봐야 물이 무엇인지 안다고 강준만 교수는 말한다. 하지만 물고기는 물 속에 있을 때에도 물을 알 수 있다. 물을 아느냐 모르느냐를 구분짓는 것은 주어진 환경이 아니다. 그것은 물고기의 의식이요 마음이다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이런 강준만 교수의 말의 뒤집기가 저자의 말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저자의 말을 달리 표현했을 따름이다.

  지금까지 우리 학계의 한국 사회의 분석과 한국인의 이해는 주로 사회과학적이고 주어진 사회환경을 이해하는 데 있었다. 또한 한국인의 의식의 해석은 주로 외국이론의 수입이거나 외국의 이론 틀을 갖다 댄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래서 한국인이야말로 한국인에 대해 모른다고 말한다. 기껏해야 아는 사람은 자신이 인맥을 맺고 있는 수백명의 사람들, 수천명의 사람들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과연 그렇다. 한국 사회학자들의 한국인에 대한 설명은 주로 사회구조적인 설명에서 그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의식에 대한 설명도 자신의 입장에서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많다. 선거철이 되면 이러한 경향은 더욱 짙어지고 강해진다. 이러한 기존의 한국인의 이해에 대해 저자는 사회과학 이외의 심리학, 인류학, 인구학, 인문학의 성과들을 수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한국인의 특성을 주어진 현실에서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한국인의 바른 이해야말로 현재의 정치적 의사결정을 내리는 국민들의 의식을 해명하게 해준다. 이런 듯 하면서도 어느 순간에 보면 다시 바뀌어버린 국민들의 의식을 이해하게 해준다. 펼쳐진 환경과 외부적인 사회구조는 이러한 국민적 의식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고 또 기여해왔다. 하지만 이렇게 형성된 의식은 다시 현실을 이해하고 변화시키는 코드로써 작용한다. 이제까지의 사회과학적 분석은 중간과정이 생략된 사회적 환경과 구조의 변화와 그 원인에 치중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빨리 빨리와 냄비 근성, 최고 최대 최초에 대한 집착, 정실주의와 가부장주의, 쏠림 현상, 지도자 추종주의, 단기적 극단과 장기적 중용이라고 하는 그의 코드들은 한국 사회 현상과 국민의 의식을 이해하는데 아주 실증적이면서도 명쾌하다. "부분 속에는 전체가 존재하고 전체 속에는 부분이 존재한다."는 존재의 법칙이 유효한 것처럼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하루 하루의 사건과 정보 속에는 한국인의 의식을 해명하는 코드가 존재한다. 뛰어난 학자는 그 전체와 부분이 현실에서 어떻게 연관되는 지를 보여주는 데 자신의 소임을 둔다. 그것이 성공하면 정보는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현실 이해의 코드가 되며 실패할 때에는 쓰레기더미처럼 쌓이는 종이조각일 뿐이다.

  한국인 코드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때로는 긍정적으로 작용하기도 하고 때로는 부정적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쏠림현상과 지도자 추종주의는 급격한 경제 성장과 민주주의의 성장을 가능하게 한 요인이 되었고, 국민적 행사에 국민적 힘을 모아내는 구심점으로 작용하기도 하였지만 대중 추종 현상과 정치 주체 의식의 부재와 독재 정치의 초래를 낳기도 했다. 정을 바탕으로 한 가부장주의는 급격히 진행된 물질사회의 부족함을 충족시켜주는 동시에 권위주의적 가족 형태와 사회 형태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결국 현실을 이해하는 코드는 '마음의 코드'다. 주어진 현상과 한국인의 특성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사용하는가의 문제도 마음의 문제이다. 냄비근성이 변화를 수용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해가는 것에 촛점이 있다면 미래를 열어가는 힘이 되지만, 깊이를 추구하지 못하고 빨리 식어버려서 대충주의식으로 흘러간다면 사회적 정체를 초래한다. 한국인 코드의 이면인 마음에 타인을 생각하고 더불어 사는 마음이 동기가 된다면 그런 현실을 창조해갈 것이고, 내가 좀 잘 되야지 하는 마음과 남들이야 어떻게 되든 하는 마음이 도사리고 있다면 현실은 이기심과 이기심이 충돌하여 빚어내는 비극의 소용돌이 속으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

  한국인 그들은 누구인가?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하여 우선 우리 스스로의 마음에 대고 묻자. 스스로의 모습을 비추어보고 성찰하자. 우리 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이자 우리 스스로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는 "성찰"이다. 그 깊은 성찰로부터 펼쳐지는 세상이야말로 한국인을 세계 속의 한국인으로 펼쳐나가게 만들 것이고 그것은 한국인들의 마음 속에 세계를 아름답게 담아내는 일로부터 시작한다.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한국인은 무엇인가? 나를 이해하고 한국인을 이해하기 위한 코드 속으로 들어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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