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 대기근 - 삼백만 명이 굶어죽은 허난 대기근을 추적하다 걸작 논픽션 5
멍레이 외 엮음, 고상희 옮김 / 글항아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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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73년이 넘은 오늘날 우리는 중국의 허난성에서 있었던 일들을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중국조차도 마찬가지다. 역사의 블랙박스 속에 집어넣어진 채 1942년의 아픈 상처와 비극은 그 생존자들의 가슴 속에서만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남아 있다.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가뭄으로 생긴 자연적 재해가 사회적 인재와 겹쳐져 부산 인구가 아무런 시선도 구제도 받지 못하고 1년 동안 대한민국에서 모두 사라져버린다면.... 그들 모두가 굶어서 죽게 된다면....

  때는 1938년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때 국민당 정부는 하나의 중대한 결정을 내리게 된다. 황하의 물을 담고 있는 화이안커우 제방을 폭파하기로 한 결정이 바로 그것이다. 이 제방의 폭파가 바로 1942년의 대기근을 낳게 한 원인이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제방 폭파가 일본군의 저지와 그 피해를 주기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위정자라면 이러한 결정은 도저히 내릴 수 없는 것이었다. 폭파로 인해 황하물이 범람하면서 수많은 시민들은 자다가 지붕 위로 들어찬 물에 수장당할 운명이었던 것이다. 폭파로 인한 직접적인 사망자수는 89만명이고 그로 인한 피해민은 1250만명으로 추산되었다.

  북극에 있는 빙하의 사진을 보면 그것이 이 사건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면 위로 드러난 부분은 자연적 재해라고 한다면 그 물 아래의 대부분의 덩어리들은 1942년의 대기근이 갖고 있는 사회적 재해 부분이다. 전쟁이라는 미명 하에 이를 의도적으로 무시해버린 국민당 정부와 장제스 그리고 부패한 관리들,  막힌 언론과 부실한 피해구제책이 이토록 절묘하게 어우러져 허난성 주민들을 굶주림 속으로 내몰았고 최소 300만에서 최대 500만에 이르는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죽어가기까지 수많은, 존재할 수 있는 모든,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이 지상의 지옥을 경험했던 것이다.

  당시 허난성은 일본군과 중국군의 전쟁 속이었고 국민당은 주민들의 생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로지 주민들의 구제책이 일본군에게 식량을 제공해주거나 중국군의 사기저하로 이어질까 걱정하였던 것이다. 허난성은 인류최대의 기근을 겪으면서도 중국에서 세금이 가장 많이 거두어진 지역이 되었고 부패한 관료들은 일신의 부귀를 위해 주민들을 사지로 내몰았다. 재난을 기회삼아 부를 축적했고 욕망을 충족했으며 지위를 추구했다.

  지옥이 있다면 우리들의 사악한 마음에서 드러나서 펼쳐진 세상이며 그 지옥에서 핀 선의 꽃 또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일본군의 폭격으로 수많은 사상자들이 생겨나고 나무껍질과 갈매기 똥과 흙으로 연명하던 주민들이 결국은 굶어서 죽고 아버지가 아들을 팔고 아내를 팔아넘기고 자식의 인육을 먹는 반인륜적인 일들이 자행되고 있을 때에도 그 지옥에 내린 구원의 손길을 정부와 국가의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가혹한 정치는 전쟁보다 더 무섭다고 했던가? 삶의 희망이 보이지 않았던 사람들은 외부로부터 오는 반인륜적이고 식인적인 행위 또한 마음에서 장벽을 쳐서 닫아버렸다. 기차에 걸린 시체를 밟고 기차에 오르고 길거리에 밟히는 신체 일부가 없어진 시신을 밟고 지나가면서도 먹을 것을 찾아서 살기 위한 몸부림을 쳐야 했던 지구의 역사 한 켠에서 그들은 그 누구의 희망의 손길도 받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자식의 인육을 먹던 사람도 다른 사람의 음식을 훔쳐먹으며 생을 이어갔던 사람도 갈매기의 똥을 먹고 나무껍질을 벗겨 먹으며 살려고 몸부림쳤던 사람들 모두가 굶어죽었다.

  물론 그런 와중에도 삶의 성숙함과 고결함과 아름다움은 있었다. 자신을 팔아버린 남편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대하면서도 자신이 입은 바지가 더 깨끗해서 바꿔입자고 하는 아내의 모습에서...추운 겨울 거리에서 먹을 것이 없이 차가운 땅에 누워서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이의 육체를 껴안고 죽음을 맞이하는 부부들과 비록 자신의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도 같은 이재민을 챙겼던 이름없는 수많은 사람들...

  이주일동안 이재민과 함께하며 취재하여 타임지에 실어서 미국민들의 구제여론을 이끌었던 화이트 기자와 대공보를 통해 허난성의 재난을 바로 알리려고 노력했던 장가오펑 그리고 많은 이재민을 살린 예극의 여왕 창샹핀 등 사람을 살리기 위해 사재를 기꺼이 털어서 먹을 것을 제공했던 많은 사람들이 그래도 지옥 속에서도 피는 꽃이었다. 비록 자신의 이해관계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어도 기꺼이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려고 했던 보살들이었던 것이다.

  뒤늦은 국민당의 구호정책과 그 속에서도 구호물품을 빼돌렸던 탐관오리들과 탕언보의 사악함으로 이재민 구호정책도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렇게 1942년의 대재앙은 중국역사에서 잊혀져서는 안되는 꼭 기억해야만 하는 시대의 비극으로 남았다. 이제 그 생존자들도 소수만 생존해있다. 1942년이 단순히 중국만의 비극과 상상할 수 없는 재난의 역사가 아니라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는 사람들 마음의 보편적인 악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인류의 교훈이 된다.

  그것은 바로 내 마음 속의 악을 치유해야만 하는 또 다른 이유가 된다. 어찌 지금 우리라고 이런 일이 없을 거라고 보장할 수 있겠는가? 부패한 정치인과 자신의 이익에만 골몰하는 인간의 이기심이 어떤 인연과 상황을 만나면 1942년은 지금 이 곳에서도 얼마든지 재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아팠다. 그것이 바로 남의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고 1942년에 어떤 잘못도 없이 선량하게 살다가 전쟁과 국가의 무능과 부패한 관료와 허술한 사회시스템으로 지옥 속에서 고통받았던 그 영혼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위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을 동안이라도 금강경 독송하며 이 경을 읽는 공덕을 1942년 허난성 이재민의 영령 앞에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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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하 - 5000년 중국 대륙을 가로지르다, MBC 다큐멘터리 1
MBC 황하제작팀 지음 / 아롬미디어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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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MBC 한중수교 15주년 특별기획 다큐멘터리 황하제작팀에 의해 이 책은 2005년 여름 사전답사를 시작으로 1년 6개월 동안 황하의 전구역을 탐사해서 만들어졌다. 5000m 고원에서 시작되는 화하의 발원지인 칭짱고원에서의 고소증과 8월에 때아닌 눈을 만나 취재진이 단체로 고열에 시달리기도 하고 계곡의 급류에 보트가 뒤집혀질 뻔한 일도 맞고 조난을 당하는 등 많은 어려움과 생사의 고비를 거친 후의 결실로 만들어진 이 책은 황하에 대한 전방위적인 접근을 통해 황하의 시작과 끝 황하의 5000년의 물줄기를 통해 그로 인해 사는 많은 뭇생명들과 황하를 삶의 터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황하는 길이가 5464km로 중국 최대 강인 양쯔강보다 좀 짧다. 발원지부터 바다에 이르기까지 칭하이, 쓰촨, 간쑤, 닝샤, 네이멍구, 산시(산서), 산시(협서), 허난, 상둥 등 9개 성과 자치구를 지나가며 산둥선 컨리현에서 보하이만으로 들어간다. 발원지부터 입해구까지 큰 지류만 40여 개가 있으며 평균 강우량은 400mm, 연간 경류량은 574억 세제곱미터이다. 황하 전체 유역에 걸쳐 약 2억묘(1묘는 200평)의 경작지가 있고 주변에는 주로 짱족, 후이족, 멍구족 등 9개 소수민족을 포함한 약 1억 명의 인구가 살고 있다. 대대로 황하유역에서 사는 사람들은 찬란한 고대 중국문화를 창조했으며, 중화민족의 요람이 됐다.  황하 유역은 북위 32~42도, 동경 96-119도 사이에 있고 서쪽으로 야라다쩌산, 동쪽으로 보하이, 북쪽으로 인산, 남쪽으로 친링까지, 동서 19,000km, 남북 1,100km에 걸쳐 있어서 유역 면적 75만 km2에 달하며, 이는 우리 나라 국토 면적의 8배에 해당한다. 오르도스 내륙지역의 면적까지 포함한다면 79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한다. 황하의 길이와 유역면적은 토사의 침식과 퇴적에 따라 계속 변하고 있다. 특히 하류의 입해구 지역은 퇴적량이 많아 수심도 낮아지면서 땅이 계속 생기고 있다. "  

  "황하의 상류의 유역 면적은 38.6 제곱킬로미터이고, 전체 황하 유역 면적의 51.3%를 차지한다. 상류구간의 총 낙차는 3,496m이고, 이 구간에는 유역 면적 1000제곱킬로미터 이상의 지류만 43개 나 있다. 상류 구간의 모래량은 전체 황하 모래량의 약 8%를 차지한다. 물은 많고 모래가 적어 이 구간은 맑은 물의 시원이다. 상류에서 아니마칭산 등의 영향을 받아 황하는 S자 형으로 흐른다. 황하 물길의 특징을 따라 상류구간을 다시 하원구간, 협곡구간, 충적평원구간으로 나눈다. " 

  "네이멍구 터쿼터현의 허커우진부터 허난성 정저우시 타오화위까지는 황하 중류이며, 그 유역 면적은 34.4제곱킬로미터로서, 전체 황하 유역 면적의 45.7%를 차지한다. 중류구간의 낙차는 890m이며 이 구간에서 30개의 큰 지류가 황하로 유입된다. 이 구간의 수량은 황하 전체의 약 42.5%를, 모래는 약 92%를 차지한다. 즉 이 구간은 황하 모래의 주발생지이다. " 

  "타오화위 이하는 황하의 하류로, 유역 면적은 2.3만 제곱킬로미터이고, 전체 유역 면적의 3% 정도를 차지한다. 하류의 낙차는 93.6m이고 증가된 수량은 황하 수량의 3.5% 밖에 안된다. 모래가 많기 때문에 이곳에서 유명한 지상하(물길이 주변 평야보다 높다)가 형성되고 높은 제방 안에 갇혀 흐르는 황하가 하이허유역과 화이허유역의 분계령이 된다. 다원허가 둥핑호를 통해 황하에 유입되는 것 외에 큰 지류는 없다. " 

 

  황하는 상류부터 고원사람들이 삶을 살아가는 생명수를 제공한다. 야크를 기르고 살면서 하늘에서 내려온 물이라 불리는 황하의 발원지 주변에서 소박하게 삶을 영위한다. 이들은 알까? 여기서 시작된 황하가 엄청난 물줄기로 온마을을 덮쳤다가 수많은 문명과 도시를 낳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희망이요 절망이라는 것을.....때로는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생명수로 내려 허기지고 갈증난 땅과 사람들을 적셔주고 때로는 성난 파도처럼 모든 것을 삼켜버리고 때로는 엄청난 쓰나미로 문명을 쓸어가고 때로는 환하게 웃으며 이 모든 생명들의 삶을 돌보며 흐른다는 것을...이 황야를 배경으로 사람들은 제 사는 지역과 위치에 따라 수많은 문명과 민족을 만들어냈고 그 많은 문명과 민족이 바로 이 황하물을 생명수로 해서 그들의 문명을 이어왔다. 대륙의 삶 속에서도 황하의 물줄기는 5000년을 흘러온 것이다. 황하는 흐르며 전통적인 티베트인의 삶도 지켜보고 눈 덮힌 다르 산의 사람들의 삶도 어루만진다. 시닝의 현대화된 삶 속으로도 들어가 그들의 정신을 지탱하며 만리장성의 생성과정도 지켜보았을 것이다. 닝샤에는 황하의 선물을 내려주었고 숱한 석굴의 역사와 진시황제의 두려움을 지켜보려 시안에 이르렀다. 황하가 거쳐간 문명들....황하가 선물해 준 들판들 그리고 양식들.... 그 모든 것은 시작도 끝도 없는 황하의 물줄기가 되어 끝없는 순환의 과정을 거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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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인간의 경제학 - 경제 행위 뒤에 숨겨진 인간의 심리 탐구
이준구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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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트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죽염 치약 하나 2000원짜리를 세 개 묶어서 5000원에 파는데다가 하나를 더 얹어서 준다는 광고가 있다. 애초에 나는 치약 하나만 사려고 갔다가 결국엔 머리를 굴려보다가(하나에 결국엔 1250원이라는 파격적인 가격에 산다는 생각을 하고서...)네 통짜리 치약묶음을 덥썩 주워들고 만다. 그러면서 잘 샀다고 뿌듯해한다. 그러나 사실은 이것이 판매자의 입장에서는 4개의 치약을 사도록 의도한 것이고 나는 그 속임수에 말려든 것일 뿐이다. “닻내림효과”라고 하는 것이 이것의 이름이다. 배가 어느 곳에 닻을 내리면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자 그 부근에서 맴돌게 된다. 이처럼 아무 의미없는 숫자가 제시된다 해도 어떤 것에 대한 최종적인 판단이 그 숫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현상이 나타날 때 닻내림효과가 발생한다고 한다. 이 경우에는 내가 애초에 하나의 치약에 닻내림을 하고 있었지만 매장에서 4개가 한 묶음에 싼 가격에 제시되어 4개를 사도록 닻내림시킨 판매자의 의도에 굴복한 경우이다.

  이 사례에서 보면 우리들의 전통경제학은 뭔가 석연치 않음을 알게 된다. 인간은 자신의 이기성에 근거하여 합리적인 선택을 한다는 가정 자체가 붕괴되고 마는 것이다. 실제로 인간이 경제학 교과서에 나오는 이상적 선택을 하게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인식능력과 정보의 한계와 지식의 현실적 한계로 말미암아 비합리적 선택을 하는 것이 더욱 일반적인 경우이고 또한 합리적 선택을 하기 위한 과정 역시 비용의 지불을 요구하기 때문에 때로는 그 비용과 귀찮음이 싫어서 그냥 눈앞의 선택에 닻내림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다음 사례를 통하여 보다 자세히 살펴보자.

“김영민 씨는 31세의 미혼청년이며 매우 외향적인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그는 대학에 재학할 때 철학을 전공했으며, 여러 가지 학생 활동에 상당히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그는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여름 휴가 때마다 농촌으로 봉사활동을 떠납니다.”라는 묘사가 있은 다음 아래와 같은 서술을 제시한다.

1)김영민 씨는 고리 대부업체의 사원이다.

2)김영민 씨는 환경운동을 지원하고 있다.

3)김영민 씨는 고리 대부업체의 사원이며 환경운동을 지원하고 있다.

  마지막 단계에서는 사람들에게 이 세 가지 중에 김영민 씨에 대한 올바른 서술일 확률이 높은 것부터 순서를 매기게 한다. 이 때 (3)번이 문제가 된다. 논리적으로 생각해보면 2번이 70%의 확률이고 1번이 20%의 확률이라고 가정해보면 3번은 14%의 확률(1과2의 결합)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반응은 주로 3번을 두 번째로 많이 선택한 것이다. 그것도 상당히 지성적인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도 말이다. 이를 대표성 휴리스틱의 모습을 띤다고 한다. 대표성 휴리스틱이란 어떤 사람에 대한 묘사를 두고 그 사람의 직업을 짐작해 볼 때, 그 묘사가 특정 직업의 전형적 특성을 얼마나 잘 대표하는지에 따라 판단을 하는 방법으로 때로는 심한 오판을 가져올 수 있다.

  이러한 인간의 선택은 일정한 조건이 조금만 가해지면 어긋나고 왜곡되어 버린다. 그래서 합리적인 선택에 가정하고 있는 전통경제학의 현실해결력이 떨어지고 수식과 그래프와 도표에 의존한 어려운 경제학은 사람들의 외면 대상이 되어 왔다. 최근에는 이러한 인간의 선택의 내면에 존재한 심리적인 면들에 대해 많이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러한 경제학을 행태경제이론이라고 한다. 비록 경제학의 교과서체계를 바꾸어 쓸 정도는 아니라도 변해가는 현실에서 인간의 경제적인 판단과 행동에 보다 구체적인 설명을 해줄 수 있는 여지가 많다고 생각한다. 다음은 벌금효과의 어긋난 예를 살펴보자.

  이스라엘의 한 탁아소는 약속한 시간에 맡겨 놓은 아이들을 데려가지 않는 부모들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었다. 생각 끝에 탁아소측은 늦게 나타나는 부모들에게 벌금을 부과하기로 결정했다. 늦게 나타나는 부모가 줄 것으로 기대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벌금내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늦게 나타나는 부모는 결국 더욱 증가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예전에는 부모들이 미안한 마음으로 아이들을 찾으러 왔지만 이제는 벌금을 내기 때문에 그 마음이 사라진 것이다. 자기 때문에 늦게 퇴근해야 하는 교사들에 대한 죄책감을 씻어버린 것이다. 이렇게 경제적 유인이 오히려 엉뚱하게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는 것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성과급 제도와 같이 신자유주의적인 정책에 대한 어떤 시사점이 있기 때문이다. 성과급제도는 게을리 일하는 사람에게 불이익을 주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에게 경제적 유인을 주어 사람들로 하여금 개미처럼 일하게 하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공정성의 문제를 중요하게 여겨 자신의 체면이나 자존심에 상처를 가지게 될 때에는 오히려 생산성이 떨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이상의 측면에서 살펴볼 때 사람들은 단순한 경제적 유인의 관점보다는 심리적이고 마음의 요인에 의한 경제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다. 나아가 그 사람의 가치관과 공정성의 문제에서는 경제학 교과서의 합리적인 선택은 이미 꾸어다놓은 보릿자루의 신세를 면할 길이 없다. 인생의 주된 가치가 돈과 물질적 욕망의 충족이라고 하는 전제가 만족된 후에야 비로소 고전경제학의 이론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그보다 더욱 복잡한 존재이며 그보다 더욱 고차원적인 존재라는 것이 이 책의 설명이다. 비로소 딱딱하고 차가운 경제학에서 온기있고 사람다운 경제학의 느낌이 올라온다. 그래서 이준구 선생님은 이를 36.5도의 인간의 경제학이라고 이름붙인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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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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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일보 04월 04일자에는 도시 한복판의 "Sky Farm"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58층짜리 건물 하나에다 태양과 풍력을 이용하여 병충해 걱정없이 1년 내내 농사를 지어 3만 5천명이 먹을 식량이 나온다고 한다. '공중농경' 또는 '수직 농경'이라 불리는 이 신개념의 농사는 미 컬럼비아대 환경학과의 딕슨 데스포미어 교수가 고안했다. 이 스카이 농장은 실내에서 완벽히 중앙통제돼 병충해의 위험을 낮출 수 있고 유기농 재배도 가능하다. 날씨의 영향에서 자유로워 흉작도 피할 수 있고, 소비 지역인 도시에 위치해 농산물 수송비도 크게 줄일 수 있다고 한다.

  지구의 식량 생산량은 이미 지금 인구의 두 배인 120억 인구를 먹여살릴 정도의 생산력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 5초마다 한 명 씩 기아로 굶어 죽고 있으며 매 3분마다 한 명씩 비타민 A의 결핍으로 시력을 상실한다. 세계 인구의 7분의 1인 8억 5000만 명이 치명적인 영양 결핍 상태에 놓여 있다. 해마다 우리들은 이 지구라는 별 위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어린이 무덤을 만들고 있다. 그 어떤 환경 재앙보다도 그 어떤 전쟁보다도 더 많은 수의 어린이들이 그저 먹을 것이 없다는 이유로 무덤 속으로 걸어들어가고 있다. 왜 이런 일이 생기고 있는 것일까?

  1970년 11월 칠레의 대통령이 된 아옌데는 소아과 의사 출신의 정치인이라서 유아기의 비타민 및 단백질 부족이 소년 소녀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15세 이하의 모든 어린이에게 하루 0.5리터의 분유를 무상으로 배급한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1971년 스위스 베베이의 네슬레 본사는 칠레 민주정부와의 협력을 모두 거부했다. 당시의 미국의 닉슨대통령과 키신저가 아옌데 정권의 사회주의적 개혁정책을 꺼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옌데 정권의 개혁정책이 성공한다면 미주대륙에 미칠 영향을 고려할 때 미국의 다국적 기업에 심각한 피해를 야기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1973년 9월 11일 CIA는 피노체트를 도와 대통령궁으로 침입하여 아옌데를 살해했다. 그리고 칠레는 아옌데 정권이 들어서기 전처럼 수만명의 아이들이 다시 영양실조로 배고픔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p99~102

  부르키파나소의 예를 보면, 프랑스로부터 독립된 직후 세계은행의 통계에 의하면 170개국 중 124위, 1인당 국민소득 164위였다. 남부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국토의 대부분은 경작하기 어려운 땅이었다. 경작가능한 땅 중에서도 25%만이 경작되었고, 곡물수확량은 헥타르당 540kg에 불과했는데 이는 프랑스의 경우 헥타르당 4883kg에 비하면 턱없이 낮은 것이었다. 이웃나라와 같이 부르키파나소도 부패한 관료밑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38000명의 관료가 국가예산의 70%이상을 자신들의 급여로 챙겼다. 이 때 젊은 혁명가인 상카라는 '자주관리정책'을 채택하여 국내의 30개 행정구를 자치제로 전환하고는 주민들 자신이 그 지역을 다스리게 했다. 관리도 직접 뽑을 수 있게 했고, 도로 건설이나 수도 사업 보건의료사업 등 자신들의 실제 생활에 필요한 공공 서비스를 실시해 나가도록 했다. 행정구역 설정은 대체로 각 종족들의 거주지와 일치토록 했다. 철도건설사업, 인두세 폐지, 개간가능한 토지의 국유화의 정책은 4년도 지나지 않아 농업생산량을 크게 늘이고 도로와 상수도 건설 농업교육 등으로 국민들은 식량 자급자족의 새시대를 맞게 되었다. 부르키파나소의 경험은 이웃나라 대통령들에게도 큰 압박으로 다가갔고 무엇보다도 제국주의였던 프랑스의 일부세력과 다국적농업의 이해관계와 대립했다. 그래서 상카라는 결국 동지이자 참모였던 콤파오레에 의해 살해되고 말았다.

-p137~148

  제레미 리프킨의 육식의 종말에 보면 15억 소를 키우기 위해 소모되는 식량은 인구 전체를 먹여살리고도 남는 양이라고 나온다. 세계 식량과 농산물을 둘러싼 금융자본가들의 권력에 의해 대공황 판의 '풍요속의 빈곤'이 21세기의 지구 위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소는 배불리 먹고 사람은 굶게 되는 현상이 바로 그것이다.(물론 내가 소에게 유감이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안에 갇혀서 배불리 먹는 삶이 절대로 부럽지 않으니까!) 세계시장에서 식량의 가격은 일반적으로 수확량, 수송경비의 변동, 투기적 거래, 세계시장의 수요 같은 요소가 영향을 미치지만 투기적 거래에 의한 영향은 더욱 커지고 있고 그 사각지대인 빈곤지대에 사는 어린이들의 생명은 풍전등화의 운명이 되고 만다.

  우리들은 기아를 흔히 식량 생산량의 한계에 따른 불가피한 현상으로 잘못 알아왔다. 하지만 이 책은 '기아'라고 하는 세계적 현상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상품화되는가를 전세계적 자료를 취합하여 상세하고 본질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우리들의 직접적인 도움만으로는 세계 구조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지만 그래도 나 개인적으로는 목숨이 까딱 까딱 넘어가는 환자 앞에서 왜 이런 현상이 생겼을까? 하고 원인을 따지기 이전에 액션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비록 우리들이 건네는 작은 돈이 아이들에게 10%만이라도 직접 닿을 수 있다면 그래서 한 아이라도 살리는 생명의 밥 한 공기가 될 수 있다면 우리는 기꺼이 90%의 낭비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우선 우리의 호주머니를 살펴 돈을 꺼내어야 한다. 능력껏..

  다음으로 직접적인 구호활동의 한계도 명확히 알아야 한다. 유럽 연합의 다국적 기업은 정부로부터 받는 보조금과 세금감면으로 아프리카의 농산물의 3분의 1가격으로 농산물을 수출한다. 아프리카의 부지런하고도 근면한 농민들은 하루 15시간씩 뼈빠지게 일해도 절대빈곤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는 구조이다. (나쁜 xx!) 이것이 다국적기업의 이윤논리에 의해 돌아가는 세상을 인간적으로 만들어내는 정치구조와 사회구조의 개혁 노력이 필요한 이유이다. 인간이 제기한 문제는 인간이 해결할 수 있다는 맑스의 교훈처럼 우리들이 모여 만든 구조와 조직의 개혁 역시 우리들의 손으로 이루어내어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그것을 넘어서 나는 이 불가항력적으로 맞닥뜨리는 절망의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원하는 바가 있다. 너무 오만해서 그런지 몰라도 나는 이 말을 빼놓을 수 없다. 그들은 이미 자주적이고 혁명적인 역사적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들을 지배하는 독재자가 있다면 일부는 권력과 총을 쥔 자의 책임이기도 하지만 일부는 그 지배를 수용하고 있는 자들의 책임이기도 하다는 생각이다. 그러니 그 상황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의식의 변화야말로 근본적인 문제해결의 실마리가 될 것이다. 이것이 빠진 외부적 구호는 단지 그들을 또 다른 노예적 삶에 순종시킬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부디 그들이 처한 환경에 대항하여 인간적 존엄성을 회복할 수 있게 의식의 혁명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그것이 그들이 결코 물질적, 육체적으로는 몰라도 영혼으로는 꺾지 못할 우리 마음의 봄은 아닐까?

P.S : 이 책을 더디 읽는 시간동안 나는 우울했다.

  뒤에 읽는 사람이 있다면 빨리 읽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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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from 風林火山 : 승부사의 이야기 2007-11-18 22:00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갈라파고스 2007년 11월 도서목록에 있는 책으로 2007년 11월 8일 읽은 책이다. 관심분야의 책들 위주로 읽다가 알라딘 리뷰 선발 대회 때문에 선택하게 된 책인데, 이런 책을 읽을 수록 점점 내 관심분야가 달라져감을 느낀다. 총평 물질적 풍요로움이 넘쳐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이기에 이 책에서 언급하는 "기아의 진실"은 가히 충격적이다. 막연하게 못 사..
 
 
비로그인 2007-04-27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란여우님의 페이퍼에 이어, 잘 읽었습니다.

달팽이 2007-04-27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체셔고양이님.
이 좋은 봄날 하늘에 우울의 먹구름이 덮혔습니다.
비록 다국적 기업이
봄날의 꽃들을 모두 꺾는다해도
봄기운을 어쩌지 못하겠죠?
봄기운 속으로 들어가야겠습니다.

혜덕화 2007-04-27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침묵의 봄, 미국 민중사, 또 제목도 긴 다른 책들도 사 두고는 읽지 못하고 있습니다. 리뷰를 읽는 것으로 우선은 독서를 대신할까 합니다. 남회근 대사의 논어를 읽고 있는 중이고 이누아님의 추천으로 선관책진과 참나를 읽고 있는 중입니다. 우선 사량으로라도 화두에 대한 지식적인 접근이라도 하려고 앉았는데, 쉽게 넘어가지 않는 책이네요. 님의 글을 보니 문득 어느 시가 떠오릅니다.
"벚꽃 가지를 아무리 잘라 보아도 벚꽃이 보이지 않더니
어느 봄, 벚꽃이 가득 피었다."
정확하게 기억하는 선시는 아니지만 누군가의 게송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봄 기운을 꺽지는 못하겠지만, 얼어죽을 봄 꽃들을 생각하면 가슴아픕니다.

프레이야 2007-04-27 2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권력과 지배의 손에 길들어 있는 사람들의 의식의 개혁부터 촉구해야한다는 달팽이님의 생각에 동의하면서도 그러기엔 너무나 벽이 높다는 생각을 하면 더 암울합니다. 원인을 따지고 있기 이전에 행동부터 하자는 말, 기억해야겠어요. 하지만 그것으로도 근본적
해결은 어려우니 또 마음이 어두워집니다. 열변을 토하며 또박또박 말하는 것 같은
님의 리뷰, 잘 읽고갑니다.

달팽이 2007-04-27 2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덕화님/기도가 왜 중요한 것인지, 저는 이 책을 읽으며 알게 되었습니다.
혜경님/이 우울한 마음을 어떻게 달래볼까요?
이 봄날이 무심치 못합니다. 제게..

파란여우 2007-04-27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울하죠. 우울하기만 한게 아니라 열도 나지요..
근데 정말 달팽이님 리뷰는 흔들림없이 쓰셨습니다요.

달팽이 2007-04-27 2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우님. 가끔은 이런 책 안 읽고 살고 싶을 때가 있어요.
연민과 사랑 아닌 분노와 흥분이 나를 태우고 있을 때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마음 속의 선함을 해치지 않으면서
세상의 문제를 받아들이고 해결할 것인가의 문제가
여전히 삶의 화두같은 것으로 남습니다.
파란 그대의 빛깔에 마음이 좀 내려갑니다. ㅎㅎ

짱꿀라 2007-04-28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연적 재해 뿐만이 아니라 더 심각한 것은 고위 지도층에 부정부패와 선진국들의 잘못된 경제관에서 더욱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달팽이 2007-04-29 2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공감합니다. 산타님..
그래서 기아의 문제를 사회과학적 접근에서는 주로 민주주의의 문제로 결론을 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욱 우리가 의식적으로 깨어있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처럼 삶이 더욱 개인주의적이고 직접적인 욕망 추구만이 지배적인 세상에서요..

yongkyukim 2007-04-30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달팽이 2007-04-30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갑습니다.
처음뵙겠습니다. 용규님.
 
천 개의 공감 - 김형경 심리 치유 에세이
김형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06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누구나 자신의 내면에 어린 아기가 웅크리고 있다. 때로는 분노에 가득찬, 때로는 좌절감으로 녹아버린, 때로는 수치심과 부끄러움으로 보이지않을 만큼 작아져버린 아이 하나. 어쩌면 이 모든 심리적 약점을 모두 갖춘 아이가 아직 우리들 가슴 한 켠에서 울부짖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아이를 내팽개친 채 우리는 밖으로 향하는 마음의 고삐를 쥐지 못하고서 우주 천지를 다니며 소동을 일으킨다. 우리가 지나온 곳마다 폐허다. 상처투성이이다. 그 아이는 부정적인 양분을 먹고 자라는 괴물이다. 이 괴물의 마음을 어떻게 치유하는가가 우리들의 인간관계맺기에 있어서의 열쇠가 된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이 아이에 대해 바로 쳐다보기를 주저한다. 두려워한다. 아니 회피하고 싶어한다. 그런 이유로 그 아이는 여전히 방치된 상태로 남겨져 있다.

  김형경씨의 치유의 첫단계는 바로 이런 자신을 '직면하기'이다. 그동안 꺼려했던 사소한 일 하나가 마음에서 눈덩이처럼 부풀어 나의 우주를 오염시키는 경험을 사람들은 누구나 한번쯤 경험한다. 그러나 그 눈앞을 가득 메운 문제가 사실은 그것을 제대로 눈 앞에 가져와 다정하게 쳐다만 보아도 해결되는 경우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에 끼인 작은 티 하나가 세상을 왜곡되게 만들듯 우리는 그것을 제대로 직면할 용기를 갖지 못한다. 작가 스스로 이야기하듯 자신도 이런 힘든 과정을 거쳤고 그 시작을 하는 데 가장 많은 시간과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이미 '직면하기'가 되면 문제의 반은 해결된 것이고 그 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 낙관해도 좋은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다음 헤르만 헤세의 말은 이런 이야기를 뒷받침해준다. "만일 당신이 누군가를 미워한다면, 당신은 그 사람 안에서 당신의 일부인 그 어떤 점을 발견하고 미워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일부가 아닌 것은 아무것도 우리를 괴롭힐 수 없다." 사실 자기 알기가 바로 되면 나머지는 불필요한 부분이다. 그래서 작가는 이 장을 제일 처음 썼을 것이다.

  가족관계, 성과 사랑, 관계 맺기는 사실 그 영역이 독자적으로 구분되는 것은 아니지만 편의상 사례를 중심으로 그렇게 구분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렇게 드러난 문제의 대부분의 원인은 유아기 때의 가족 내에서의 부모와 자식 간의 억압기제와 뒤틀린 욕망구조와 관련된다고 한다. 자신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스펀지같이 세상을 흡수하고 형성할 때 ,절대자의 위치에 있는 부모의 마음 상태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처럼 보인다. 그 문제행동이 성인이 된 지금에 있어서도 드러나고 있다는 점도 공감이 간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모든 문제행동의 원인을 유아기때 형성된 심리적인 문제로 환원시키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것들도 있다. 작가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500여권이 넘는 많은 심리학 책들을 읽고 정리해내었고 그것을 사람들의 경험을 분석함으로써 많은 사례적인 검토를 거쳐서 이야기한다. 자신을 알고자했던 그 치열했던 노력이 자신의 심리를 깊이 이해하게 했고 그 깊은 내면에서 나오는 말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진단에서 많은 공감이 가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또 다른 위대한 정신을 드러내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지금 이 순간'에 깨어 있으면 우리가 과거에 자아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고 자아를 초월할 때에 비로소 온전한 삶을 살 수 있다고 한 것도 고려해야만 한다.

  심리치료는 현대생활의 관계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상당히 많은 도움이 될 것임을 인정한다. 그리고 자신을 들여다보는 디딤돌의 역할도 충분히 해내리라는 것도 인정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수많은 이론을 갖다붙여서 현실을 설명하는 것보다 자신의 마음을 직접 들여다보고 알아가는 체험이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주는 힘이 된다. 타인의 설명은 비록 한 순간의 이해와 해결을 가져올런지는 몰라도 결국은 나의 문제를 타인의 설명을 빌어서 넘기는 것에 불과하다는 단정을 감히 한다. 물론 그 타인의 말과 설명이 자신의 삶을 더욱 잘 이해시켜주고 자신 스스로를 바라보게 도움이 됨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타인의 설명으로서가아니라 자신 스스로의 체험으로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자신의 문제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자신을 이해하고 바로 보아서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학문을 넘어서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심리치료가 가진 한계는 두더지 뿅망치처럼 당장 올라온 두더지의 머리를 방망이로 두드림으로써 그 구멍의 문제는 해결할 수 있을지라도 또 다른 구멍에서 올라오는 두더지의 머리를 순간 순간 힘껏 두드려야 하는 문제가 생긴다는 점이다.

  작가의 책을 '사랑을 선택하는 기준'이라는 책부터 거의 다 보아왔다. 그의 삶과 공부가 나에게도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고 생각할 단서를 제공하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작가와 같은 자기보기를 제대로 해낸다면 성격과 인격의 안정성 속에서 타인과 더불어 사는 문제를 지혜롭게 해결할 수는 있을 것이라 공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삶은 단지 문제행동을 교정하는 것으로 의미가 한정지워지지는 않는다. 그녀가 말하듯이 삶의 성숙을 향한 방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심리학과 종교적 영역에 대한 인식의 가능성을 열어두었으리라고 생각한다. 비록 내 인식이야 작가의 능력에 한참 따라가지 못하지만 그래도 이 책을 덮으며 작가가 열어두었던 심리학의 한계 영역에(경계가 가물가물한) 눈길이 더 가는 것을 어찌할 수 없다.

  나는 나이고 너는 너이고 우리는 마음이 만들어낸 경계인가? 나 속의 마음의 문제를 해결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나는 나이자 너이고 우리다라고 말한다. 나와 너의 구별이 없고 나와 우리의 경계가 없다. 그러면 문제는 바로 나 속에 갖추어져 있는 그것을 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공감'은 이미 우리가 갖추고 있는 타인의 마음이다. 나 아닌 타인의 마음..그런데 원래부터 우리는 쭈욱 '공감'이었던 것이다. 아름다운 말 공감 그 자체였다고... 하나의 공감 속에 이미 천의 만의 공감이 다 갖추어져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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