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 내가 왜 오지도 않을 그녀를 그곳에서 기다리게 되었는지....

학교 건물 옥상에 앉은 까마귀의 울음 소리가 너무 슬퍼보였기 때문인지

아니면 흐린 잿빛 하늘에서 끊임없이 쏟아져내리는 눈발때문이었는지

썼다가 지우고 썼다가 지운 하얀 종이위에 새겨진 글들을 차마 건네지 못하고

종이 위의 글들에 담긴 마음을 하나 둘씩 어둠 속으로 숨겨버려야 했던 날들

교정 앞에서 매일 그녀를 기다렸던 시간 속에

우연을 가장한 필연적인 만남을 만들기 위해

그녀를 기다렸던 시간들이

산너머로 번져가는 노을을 바라보는 시간으로 변했고

어둑어둑해질 무렵의 어색한 시간들에

나의 내면이 차분해지는 시간이 좋아지게 되었다.

그 날도 그랬다.

발목까지 눈에 잠기어 발의 감각이 점점 무디어져가고 있는데

잿빛 하늘에서 눈은 멈추지 않고 펑펑 쏟아져내리는데

오지도 않을 그녀를 기다렸던 시간들이

어느새 나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는 시간으로 변해갔다.

왜 초조하지도 않았는지 슬프지도 않았는지

우연을 가장한 필연들이 우연히 새로운 눈을 뜨게 했을 때

내게선 무엇인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다시 봄이 와서야 비로소 나는 지독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봄비가 내리면 늘 혼자서 바다를 찾곤 했다.

지금도 첫눈이 오면

그 때가 생각난다.

올 수 없는 사람을 기다린다는 것은

내 마음이 어떻게 변해가는 것인가를 지켜본다는 것

어쩔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인다는 것

이미 와 버린 현실을 받아들인다는 것

그것은 나뭇가지 위에 앉은 새가 해지면 둥지를 찾아 날아가는 이유요

무심코 지나가는 내 머리위로 비둘기가 똥을 싸고 날아간 이유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비가 그친 후의 맑은 하늘을 투명하다.

오늘 나는 리라 연구 그룹의 자연음악을 듣는다.

귀를 타고 가슴으로 전해지는 선율을 타고 세상이 춤춘다.

마음이 차분해지고 고요해진다.

뒷산의 초록이 더욱 무성해지고 있다.

생명을 키우는 우주의 선율은 모유처럼 아기 대지를 키우고

대지의 뭇생명은 엄마 젖을 그리워하는 아이처럼 공으로부터 뻗어나온다.

삶과 죽음이 돌고 돌아 서로 잡아먹는 되먹힘의 순환은

오늘을 만들어내고 선율도 만들어낸다.

내 마음 속에서 피워내는 삶과 죽음에 대한 의문들...

하나의 선율 속에 묻힌 채 같이 흔들린다.

봄 햇살 같은 따사로우면서도 감미로운 선율 위에서

외줄을 타듯이 하지만 가벼이 타고 함께 흐르는 마음

세상은 외롭지 않다.

아니 마음은 외롭지 않다.

외로움은 외로움일 뿐...

우주는 원래 웃음이다.

소리없는 웃음, 표정없는 웃음

마음이 떨린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글샘 2006-04-20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을 떨리게 하는 글이네요.

달팽이 2006-04-20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생님, 좋은 아침입니다.

2006-04-21 18: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달팽이 2006-04-21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교단에 계신 선생님을 또 한분의 친구로 알게 되어 기쁩니다.
아직은 미혹한 사람이지만 부지런히 길을 가렵니다.
님은 남들의 보이지 않는 장점을 잘 읽어내는 눈을 가졌군요.
그것이 값매길 수 없는 님의 장점입니다.
좋은 만남 기대합니다.
 

여느 아침과 같이 차에서 내린 나는

산새소리에 잠시 서 있었다.

조그만 새들의 지저귐이 있더니

산까치의 울음이 산골을 가득 메운다.

그때다.

무엇인가 시커먼 새가 내려온다.

까마귀인가 했는데 그것이 까치를 쫓는다.

까치는 순간 날아올라 힘껏 도망간다.

따라가는 저것은 매였다.

이른 아침 생사를 건 쫓고 쫓김을

나는 멍하니 쳐다본다.

까치의 비명같은 울음이 들리고 매는 집요하게 따라붙는다.

"까치야 부디 잘 도망가거라"하고 기원하고 보니

저 매가 며칠을 굶었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매야, 부디 먹이를 구해 배불리 먹거라"하는 마음도 든다.

어허, 이것 참, 애매해지네...

그러다가 슬며시 웃음이 난다.

여기 서있는 나까지 하나의 놀이가 되고 만다.

놀이같이 하루를 살 수 있다면..

놀이같이 인생을 살 수 있다면..

문득 당신 향한 내 마음이 그리움이 된다.

그리고는 내 마음이 환해진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글샘 2006-04-15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를 향한 내 마음이라고요? 그리움이라고요?
제가 누군줄이나 아시나요? ㅋㅋㅋ

달팽이 2006-04-15 1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하늘이 흐리고 날이 찹니다.
 

새벽에 택시를 타고 집으로 왔다.

베란다에서 내려다본 아파트 건물 뒤엔 꽃비가 내린다.

무수하게 많은 벚꽃잎들이 회오리처럼 돌면서 하늘로 솟아오르기도 하고

한쪽으로 쓸려서 차례로 날아가고 있기도 하다.

꽃잎 한 장 한 장 인생의 꿈을 안고 피어난 꽃이다.

생명이란 얼마나 절실한가?

손으로 쓸어내면 금방 사라질 조그만 흙덩이에서도 씨앗은 내리고

절벽에 자리한 바위와 바위의 작은 틈 속에서도 생명은 자라고

물이 내려가는 하수도 입구의 어느 작은 물기베인 곳에서도 싹을 틔운다.

무수히 흔날리던 벚꽃잎 한 장 한 장 자신만의 고유한 생명의 이야기를 간직한 채

어딘지도 모를 인연의 땅으로 인연의 하늘로 날아간다.

아! 나도 꽃 잎 한장이 아닐까?

무수하고 영겁의 시간 속에서

전생에서 또 꽃 잎 한 장 처럼 날아가서 어느 나무아래서 썩어졌을 것이고

이번 생에도 몇 몇의 꽃잎과 섞이어 짧은 비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꽃잎들이 날리는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흐린 봄 하늘 위로 꽃잎은 날리고 날리운다.

꽃잎 한 장씩 한 장씩 자신의 인생의 비행을 하며

회색 하늘 속으로 사라져간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어둔이 2006-04-14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게 세상의 꽃잎이 훨헐 다 지고 난 다음의 일은 어떠합니까?

달팽이 2006-04-14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밥그릇이 깨진 이야기로군요.
무엇일까?

글샘 2006-04-15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연히 정자가 난자를 만났을 때, 밥그릇이 왜 깨지나요?

달팽이 2006-04-15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자가 정자를 먹고, 난자가 난자를 먹습니다.
모든 것이 사라진 그 자리...
밥그릇 생각이 날리가 없죠..
 

집을 나서니 벌써 벚꽃이 날리어 쌓이기 시작했다.

봄은 아쉽게도 그 옷자락만을 길게 늘어뜨린 채 떠나가고 있는 것이었다.

"천성산엔 아직 봄이 남아 있으리라."

영산대학교에서 올라가기 시작한 등산로에는 지천으로 핀 진달래가 먼저 우리를 맞는다.

바람에 쓸리는 억새풀과 저 멀리 시원하게 내다보이는 능선을 뒤로 하며 우리는 걸었다.

진달래 꽃잎을 따서 입에 넣어서 씹으니 이젠 좀 억세어져 가는 꽃의 섬유질이 씹힌다.

2000번 차를 타고 오며 들은 이정현이 '꽃잎'이란 영화에서 불렀던 그 노래가 나를 훌쩍 대학시절로 돌려 놓았다.

다시 오지 않을 그 시절과 사랑의 아련한 기억을 가슴에 품고 오르는 산길에 깊 양쪽에서 맞아준

진달래 군락은 그야말로 추억 속의 길이었다.

이제 연초록의 싹들이 자꾸만 피어나고 온 산은 초록으로 덮힐 것이다.

진달래 군락지가 끝나갈 무렵 저기서 안적암이 보인다.

안적암으로 쳐다본 산은 파스텔, 그 위로 펼쳐진 하늘은 흰구름 둥둥 떠가는 수채화...

지하철을 타고 오며 내려다본 사람들의 신은 십중팔구가 등산화였지만 영산대학교에서 안적암으로 안적암에서 노전으로 내원사로 이어지는 코스엔 사람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3년만에 찾은 이 코스는 늘 내게 천성의 봄빛을 유감없이 가슴 속에 불어넣어준다.

고찰 안적암을 지나 다시 노전으로 향하는 길에는 얼레지 군락지가 있다.

사람들이 분재로 쓰기 위해 파가버려서 군락지에 피해가 많다고 한다.

그 얼레지도 사람들의 발길에 고개를 꺽이기도 하고 때로는 인적이 드문 비탈에 피어서 그 아름다움을 뽐내기도 한다.

아! 천성의 봄빛은 역시 흐르는 푸른 계곡물에 있었다.

초록빛 푸른빛 맑고 투명한 천성의 계곡을 보는 것보다 내 마음을 더 투명하게 만드는 것이 있을까?

오늘따라 까마귀도 유난히 낮게 날아 천성의 계곡에 그 자태를 비추어본다.

5시간의 쉽지 않은 코스임에도 불구하고 정쌤의 두 아이인 경화와 석원이는 참 잘도 걷는다.

아마 봄빛에 마음이 흥겨워졌으리라.

노전 가는 중간길에 드러난 계곡에 짐을 내려놓고 정쌤이 준비해온 간단하지만 실속있는 점심을 먹는다.

계곡 물소리 뒤에서 들리고 수채화처럼 그려진 하늘엔 햇빛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계곡물에 술을 담가두고 밥과 함께 비벼먹는 봄은 우리 입안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다.

기분좋은 취기로 우리들은 다시 길을 걷는다.

잠시 걷다가 아주 너른 바위에서 우리들은 드러누워 봄의 햇살이 주는 단잠에 잠시 빠진다.

아! 물소리 아이들의 웃음소리 그리고 사방에서 들리는 새소리...점점 희미해져가고....

단잠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이 맛....

이 맛있는 깜박잠을 깨고 우리는 다시 천성의 계곡을 옆으로 두고 걷는다.

내원사 입구에 있는 손두부집으로...

천성산을 걸으면서 계곡을 내려오면 늘 마음 속에 이 두부집과 막걸리가 생각난다.

고소하고 입에 딱 들러붙은 두부와 봄나물 그리고 간장, 젓, 젓갈로 우리들의 소박한 저녁은 시작된다.

천성의 봄빛을 가슴에 가득 품고 돌아오는 길은 온천지 봄빛이다.

아! 이 좋은 봄날..


댓글(4)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비자림 2006-04-09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즐거운 하루셨군요.
봄을 가득 느끼고 있는 사람들, 사람들 속에 어느새 비집고 들어온
새봄, 새봄의 에너지...

달팽이 2006-04-09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봄빛 가득한 우주에서 봄날의 의문이 가슴에서 씨앗을 틔웁니다.

파란여우 2006-04-10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꽃놀이는 다 그런거고
소박한 저녁(두부, 봄나물, 젖갈)이 입에 침을 가득 물게 합니다.호호

달팽이 2006-04-10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여우님의 위장에서 나는 소리에 웃음이 슬며시 나는군요..
봄빛을 안주삼아 먹어서 더욱 좋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