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미술사가의 편지 -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이에게, 강우방 예술론
강우방 지음 / 솔출판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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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이야기가 있다. 70대 중반은 은퇴 학예사의 이야기이다. 공무원으로서의 신분도 은퇴하고 대학교 교수 신분으로서도 은퇴한 한 미술사가의 이야기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고 평생 몸담고 공부한 미술사에 매진해왔고 또 그 공부를 젊은이의 열정으로 이어가며 한국 건축과 불교 사찰 건축에 드러난 무늬의 의미를 쫓고 쫓는 이야기이다. 그 이야기를 통해 우리나라의 고대사에 드러난 무덤양식 속의 무늬와 건축양식 속에 드러난 무늬의 상징성을 이해하는 코드를 갖게 되었다. 나는 [한국미술의 탄생]에 이어 이 책을 읽으면서 그의 이야기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서양과 동양의 무늬는 고대사로부터 그 보편성으로서의 공통점과 특수성으로서의 표현의 차이를 가진다. 그러나 무덤양식이 의미하는 것은 생명과 죽음과 사후 세계이고 또 왕이 상징하는 것은 용인데 그것이 무늬상으로 어떻게 원초적으로 생명이 나타나고 형화되어 표현되는지에 대해 '영기화생'이란 말을 사용하여 한, 중, 일의 고대사 양식을 해석하는 독창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가 접근하는 방식과 격물하는 방식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 지식과 정보를 통해서 알아가는 방식보다는 예술품을 직접 격물하며 자신의 이해가 생길 때까지 마음 속에 발효시키는 과정을 거쳐 자신만의 이해와 깨달음을 통해 진실에 접근하는 방식이 마치 불교의 '선'과 비슷하다고 생각되었다.

 

  불화나 고구려벽화에 드러난 무늬의 새로운 색칠을 통해 무수하게 그려가며 가진 새로운 해석은 아주 설득력있게 무늬와 도상의 설명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그 예술품이 사용되고 수요되는 주체와의 지위와 상징과 더불어 일목요연하게 설명된다. 그런 방식을 통해서 우리나라 신라 금관에 사용된 옥벽이 태아의 모습, 즉 생명의 단초의 모습이며 그것이 홍산옥기에 드러난 옥벽에서 용모양의 옥으로 화해가는 과정을 보며 한, 중, 일의 문화가 그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민족적 경계없이 서로 교류하여 공유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놀랍고 설득력있는 것이었다.

 

  선생님 자신이 무엇보다 공부를 사랑하였고 한국미술을 통해 나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스스로의 공부인연을 깊게 만들었고 그래서 인연지어진 '일향'연구소의 탄생과 계속된 공부과정에서 드러나고 완성되어가는 세계미술사에 대한 공통적으로 나타난 보편성의 발견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감동적이다. 이렇게 공부하는 것이 즐겁고 의미있는 과정이 되는 것은 스스로의 즐거움과 의미성이 충만하기 때문이다. 불교미술사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인연의 만남은 한 곳에 자신의 정신을 집중하여 오랜 세월을 발효시켜가면서 '돈오점수'의 과정을 준비하였기 때문에 그것이 때가 되어 그를 통로로 해서 드러난 신의 비밀이요 진리의 발현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아직은 뭔가 일목요연하게 체계잡힌 것이 아닌 까닭에 제목을 '어느 미술사가의 편지'로 붙인 것은 어느 때인가 선생님의 새로운 책이 탄생하기 전의 초고같은 느낌을 준다. 그래서 '세계미술의 탄생'이라는 제목이 붙든지 또는 어떤 제목의 책이 자신감과 더불어 나올 것을 기다린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뜻으로 세워지는 길만큼 분명하고 뚜렷하고 가능성이 확실한 길이 또 어디 있을까? 나이로는 한참 어리지만 그 열정과 학구열로는 부끄럽기 그지없는 한 후학이 그의 책을 읽으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됨은 비단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시단의 고은 선생님과 비슷한 분이 있다면 한국미술의 강우방 선생님이다. 라고 나는 당당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선생님의 책을 좀 더 전작으로 읽어갈 듯 하다. 감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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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발, 자신을 비워 세상을 담는다
타니 아키라, 신한균 지음 / 아우라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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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에서는 고려시대가 차의 전성기였다 한다. 그래서 다반사란 말도 이 때 생겨났다. 차를 마시는 그릇은 우선 문양이 화려하지 않으면서 차의 빛깔과 향을 잘 품을 수 있어야 하고 뜨거운 온도를 방지하기 위해 굽을 높게 만들어야 한다. 차를 타기에도 마시기에도 편리한 구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렇게 발달한 고려의 차문화가 조선에서는 대부분 사라져버렸다. 조선시대 다완은 지방가마에서 사발이라는 명칭으로 사용되며 분청사기에서 많이 구워낸다. 임진왜란을 도자기전쟁이라고 부르듯이 일본인들은 조선의 도공들을 데려가 일본 도자기의 전성기를 일구어 낸다.

 

  일본인들의 문화적이고 예술적 감각은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우리나라에서는 좋지 못한 연질 또는 조질 흙을 사용해서 일상용품 또는 실용적 보관용품으로 구워낸 막사발을 일본인의 미감으로 세계 최고의 예술품 취급을 했다. 츠츠이 준케이가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미움을 받아 성의 공격을 받을 위기에 처하자 가지고 있던 이도다완 하나를 선물함으로써 오히려 큰 상을 받게 된 것에서 조선의 막사발 하나가 성보다 더 가치가 있다는 말이 생겨날 정도였다. 이처럼 일본의 지배층이 가진 미의식은 화려함과 기교를 떠나 자연스러움과 실용성이 어우러진 조선의 그릇을 최고의 예술품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우리가 분청사기 그릇을 재현해내고 그것을 말차 그릇이나 다완으로 사용하게 된 데에는 일본의 역영향이 크다고 볼 수 있다. 그제서야 분청사기나 백분장사기에 대해 새롭게 해석해내고 재현해내게 되었고 또 기교로 만들어낼 수 없는 자연스러움과 투박함에 미적 가치를 부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자연스러운 유약의 흘러내림이나 맺힘, 굽는 과정에서의 자연스러운 요변현상으로 인해 세상에 다시 만들어낼 수 없는 유일함은 중국 송나라 다완을 밀어내고 세계 최고의 가치를 가진 그릇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이유가 된다. 이 책을 통하여 나도 백분장사기 다완을 몇 점 소장하게 되었고 또 그 아름다움과 실용성을 음미하게 되었으니 고맙다.

 

  이러한 사발류는 조선에서는 당시 관요가 아니라 지방가마에서 구워낸 민요였다. 일반 서민들이 사용하는 흔한 그릇에 미의식을 찾아내고 음미하는 일본인들의 미감이 훌륭하다 생각한다. 또한 나아가 자신들의 미감을 반영해 적극적으로 자신의 구미에 맞는 그릇들을 주문제작하였던 점도 조선의 그릇에서 나아가 일본인의 문화로 재창조된 것이라 인정할 수 밖에 없다. 화려하고 귀족적인 청자의 그림이나 문양은 소박하고 자연스러웁고 서민적인 미를 나타나는 반면에 가장 흔하고 서민적이고 화려함이라고 찾아볼 수 없는 조선의 사발은 일본 권력층의 선호로 인해 가장 귀하고 중요하게 취급받으니 물건의 업도 아이러니하고 우리들의 눈으로 알 수 없다.

 

  까칠까칠한 표면에 굽은 회돌이나 감꼭지가 달리고 못으로 파내어 돌린 자국이나 흙의 색깔이 드러나거나 유약을 바르지 않은 굽 등 그릇이 만들어지고 표현되는 방법도 다양하였다. 물론 이는 수요층의 다양한 미의식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고 제작자의 미감과 능력이 발휘된 것이기도 하다. 굽의 형태도 높은 굽, 보통 굽, 도린 굽, 십자형 굽 등 다양하게 제작되었고 용도 또한 실생활용과 제기 등으로 다양하게 사용되었을 것이다.

 

  일본인의 수요와 미감으로 인하여 우리나라 도자사의 중요한 공백이 다시 메워지고 다시 연구되고 재현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을 보면 문화란 자연적으로 서로 퍼지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연속성을 유지하기도 하고 단절되기도 하는 등의 다양한 변화를 겪게 된다는 점이다. 현재의 국가적 경계나 그 당시의 민족적 경계를 떠나 예술품과 미감은 세계보편적인 것이며 그것을 누군가가 독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기도 한다. 제작자나 제작국가가 독점할 수도 없고 수요자나 수요국가가 독점할 수 없음도 명약관화하다. 인연에 의해 주어진 순간에 그 아름다움을 느끼고 음미하는 자가 진정한 주인의 자격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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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구라컬렉션, 일본에 있는 우리 문화재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엮음 / 사회평론아카데미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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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 부르기도 한다. 전쟁은 그 지역을 통해 경제적 이익, 군사적 이익 등을 노린 사회적 행위다. 일제강점기의 제국주의 역사에서 그것은 문화재의 찬탈로 나타났다. 영국의 내셔널갤러리, 대영제국박물관, 빅토리아앤 앨버트 박물관과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의 수많은 유물들이 바로 그것이다. 일본 역시 침략한 한국과 중국, 동남아의 문화재를 약탈해갔다. 그 많은 문화재가 앞으로 수많은 문화재반환 문제로 시끄러울 것이지만 반환이 윤리적인 측면에서의 생각처럼 그리 쉽지는 않다. 이미 법으로는 제국주의 역사 속에 찬탈한 문화재에 대해서는 시효적으로 소급되지 않게 되므로 양심적 소장자나 기관에 의한 자발적 반환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상 문화재반환이라는 역사단추바로끼워맞추기는 쉽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생각에는 단순히 니네들이 우리나라를 강제합병하고 약탈해간 문화재니 모두 반환하라라는 식의 주장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왜냐하면 정당하게 우리나라에서 수출된 물건들도 있고 우리나라에 들어와 정당한 상거래로 구입한 물건들도 있고 한국문화재에 대한 애정과 관심으로 사재를 털어 소장하고 있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불법으로 찬탈한 문화재라 하더라도 2차, 3차 거래를 통해 합법적으로 구매한 현재 소장자가 있는 경우 문제는 더욱 복잡해지게 된다. 나아가 정황적으로 고적조사사업을 명목으로 불법적으로 유출된 것이라 하더라도 정황만으로는 반환을 주장하기 어렵다. 정확한 증거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그 유물의 반환을 일방적으로 주장하기에는 현실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기 때문이다.

 

  그 일본에 간 우리 문화재 중 그 규모나 중요성 가치면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손꼽히는 것이 오구라 컬렉션이다. 그것은 오구라 다케노스케(1870~1964)가 한국에서 전기사업을 하면서 그 돈으로 모은 엄청난 규모의 한국문화재를 말한다. 오구라는 한국 문화재에 대해 관심이 많았고 그 우수성과 예술성을 일찍 알아봤다. 또한 대구에 전기사업본부를 두고 경주와 경남지역의 문화재발굴 현장에 대한 정보와 전기사업으로 벌어들인 막대한 자금을 바탕으로 많은 한국문화재를 구입했다. 애초에 그는 한국과 일본의 유물사를 통해 한일고대사를 연구할 목적으로 유물을 구입하였으나 소장과정 중에 한국문화재에 더욱 애착과 욕심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가 이렇게 가치있고 중요한 한국문화재를 많이 모을 수 있었던 것은 조선총독부와 고적조사사업이라고 하는 한국문화재 수탈계획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우리나라의 재벌들을 보라. 돈이 많다고 해서 누구나가 문화재를 구입하고 소장하고 관리하지는 않는다. 삼성처럼 비자금이나 재투자목적으로 특별히 관심을 가지는 경우라 아니라면 간송 전형필 선생님이나 호림 윤장섭 사장님처럼 한국 민족과 역사와 문화재에 대한 특별한 자부심을 가지고 소장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오구라는 한국문화재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욕심과 뒤섞여 있었지만  애정과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선 도굴해온 물건이라도 물건이 가치있으면 값을 매우 높게 쳐 주었으며 비록 돈이 되지 않더라도 웃돈을 들여 보관 수리하며 자신만의 기준으로 한국문화재를 시대별로 선별해가며 전체적인 소장을 하게 된 것이 바로 그러하다.

 

  오구라 컬렉션이 제대로 관리된 것은 그의 생전까지이다. 오구라 컬렉션 보존위원회가 준비되고 그 위원회에 의해 일정한 시간동안 관리가 되었지만 그의 사후 유물추가구입은 없어지고 아버지의 유물을 억지로 관리하던 아들은 결국 1981는 도쿄국립박물관에 오구라컬렉션을 기증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일본은 이것이 한일간 문화재반환에서 빈번히 다루어지고 한국언론의 조명을 많이 받게 되자 '한국'유물전시실이라는 말을 빼버리고 '동양'이라는 말을 사용하게 된다. 오구라 컬렉션 중에는 다수가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우리나라가 힘이 없어 문화재를 약탈한 사실보다 현재의 국립중앙박물관을 비롯한 한국문화재에 대한 우리나라 국민의 인식과 관방의 인식이 낮은데 더 큰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

 

  중국은 시진핑 정부 들어와서 문화와 문화재를 중요시하는 정책을 우선적으로 추진하며 우리 고대사 유적들을 자국의 변방문화로 유네스코에 등록하는 등의 문화재 보존활동을 적극적으로 하고 있다. 일본 역시 제국주의 시대부터 문화재와 예술품에 대한 높은 안목으로 그 가치를 부여해왔고 경제적 성장을 바탕으로 세계의 중요 미술품 시장의 주요 메카로 기능해왔다. 우리나라 관방은 자신들의 좁은 관점에서 벗어난 기물에 대해 조금도 인정하지 않는 한편 일본과 중국에서는 빠르게 한국이 내다버린 문화재에 대한 자국문화재로의 등록 및 등재와 보호에 나서고 있다. 단순히 소장자의 애국심과 민족심에 기대어 무상기증이나 유도하고 해외문화재는 무상반환만 요구할 것이 아니라 문화국민으로서의 자부심을 갖게 문화의 중요성을 국민들에게 홍보하고 문화재에 대한 예산 배정을 많이 해서 좀 더 폭넓고 예술사의 공백을 메우는 다양한 유물 유적의 조사를 통해 잃어버린 우리 문화재의 복원을 통해 잃어버린 조상의 예술성과 정신을 찾아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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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역사로 읽고 보다
도재기 지음 / 이야기가있는집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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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의 문화재에 관심있는 사람치고 국보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국보의 선정과 관련한 배경이야기나 왜 몇 호의 국보로 넘버링되고 어떻게 관리되는지에 대해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저자는 20년이 넘는 문화부기자생활을 거치며 관심을 갖고 정리해 둔 우리나라 국보에 대한 정보를 일반인이 알기 쉽도록 그 흥미로운 이야기를 곁들여 설명하고 있다. 더불어 언제 처음 만들어졌고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고 어떤 예술적 건축적 가치를 갖고 있으며 언제 훼손되어 재중건을 거쳤는지에 대해 자세히 스토리를 써내려가며 사람들의 시선을 끈다.

 

  시기별로 우리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지 않는 상고사에 대한 국보급 유물에 대한 설명은 새롭다. 특히 최근의 발굴의 성과들을 꼼꼼히 정리하여 선사시대에 대한 유물도 깔끔하게 정리하고 있다. 물론 상고시대는 그 국가 경계가 지금의 민족적 경계와 다르고 따라서 그것이 어느 민족 또는 국가의 것이라고 전적으로 주장할 수 없는 문제가 있기에 조금 더 폭넓고 깊은 조사와 연구가 필요하리라 생각한다. 그래야만 중국이나 일본에서 적극적이고 공격적으로 문화재 등록을 통한 피해를 보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갈수록 이 땅에 묻혀진 많은 상고사에 대한 조사와 연구를 기반으로 더욱 상세한 지도를 그려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흔히 공예품이나 건축물은 지금과 가까울수록 더욱 많은 문화재가 남아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우리나라 국보의 특성은 조금 다르다. 많은 외적의 침입과 약탈을 거치면서 최근의 문화재가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청자는 많은 해저유물의 발견으로 흔해진 반면 조선 초기의 백자를 비롯한 왕실용 정품 백자의 가치는 더욱 귀하게 되었다. 재료의 소재에 따른 목조 건축물은 그 특성상 남아 있기가 힘들다. 토성도 오랫동안 남아있지 않듯이....... 특히 전세품을 통해 유물이 현세에 전해지는 것은 정말 희귀한 일이다.

 

  한국의 국보는 대부분 1960, 70년대에 지정되었기 때문에 그 이후의 반환 또는 발견에 따른 가치가 재조정되면서 국보지정도 수정되어야 하지만 아직 관방은 민간 소장의 다양한 유물에 대해 잘 인정하지 않는다. 더욱 해외로 나간 문화재에 대한 인식과 그것의 민간차원의 회수와 소장에 대해 인정하는 것에 매우 엄격하다. 그러나 수많은 민간 소장 문화재와 한국 공예품과 예술사의 공백을 메꾸어줄 수 있는 다양한 기물에 대해 보다 적극적인 인정과 수용이 필요하리라 생각된다. 그래야만 주변국의 문화재로 등록되고 문화재의 소유권조차 빼앗기게 되는 상황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외국 문화재에 대한 환수에 대한 문제도 복잡하다. 정당하게 거래된 물건이 소장자를 여러 단계 거친 것까지 환수하기는 어렵고 또 다 환수한다고 능사가 아니다. 오히려 외국에 있는 문화재의 전수조사를 해서 정당한 절차로 나간 것에 대해서는 대여 또는 현장전시를 통해 한국문화재를 세계에 알리는 것도 중요하다. 또한 강제 탈환 과정과 그 경로를 증명하지 못하면서 정황으로 우리문화재를 반환하라고 하는 것도 옳지 못하다는 생각이다. 조금 더 오랜 시야와 노력을 통해 우리 문화재를 우리가 아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것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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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실록을 통해 본 조선도자사
방병선 지음 / 고려대학교출판부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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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도자사는 대략적이고 복잡하지 않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도자기는 수 백 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실물을 접할 기회는 거의 없다. 박물관을 찾거나 개인 수장가를 찾지 않으면 실제 그들이 사용하다 전세된 물건을 보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도자사와 관련된 책들을 찾아보면 인용된 기물과 사진은 어딜 찾아봐도 나오는 기물이라서 새로운 도자양식에 의한 것이나 새로운 기법이 사용된 기물을 만나게 되는 날은 특별한 날이다. 나아가 도자사에 대한 새로운 사실 하나를 얻게 되어도 보람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 책은 이미 빌려서 읽은 적이 있다. 하지만 구입해서 다시 읽으려고 한 의도가 있다. 기록물로서 왕조실록이 가지는 중요성과 신뢰성 때문이고 또 그를 통해 한 시대를 풍미했던 최첨단 공예품이었던 도자에 대한 수요층이었던 왕실의 기호와 그 전용공급처였던 분원의 설치와 변화과정에 대해서 보다 자세히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왕조의 변화와 그에 따른 도자기 안료구입, 중국도자기의 사신을 통한 영향 그리고 그에 대응한 한국도자의 변천과정을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종 때의 백분장사기의 제작과 그 방식 그리고 다양한 기법의 사용과 제작가마의 이름을 쓰게 한 점. 그리고 그 자기의 사용처 등을 명시하게 된 점 나아가 세종 때의 중국 선덕황제와의 연관성으로 인해 그 때 제작된 청화백자의 쑤마리청의 빛깔과 모습의 비교가 가능하다. 또한 회화기법 또한 선덕년제 때의 영향으로 자기의 공간을 가득 채운 회화가 시문된 점과 용의 형태와 종속문양 또한 독자성을 드러내지 않았던 점을 살펴볼 수 있었다. 그리고 기물이 몇 점 남아 있지 않은 상감백자는 연질백자 형태의 사진이 실려 있고 유약색과 빙렬의 유무도 확인해볼 수 있다. 다만 다른 사진 기물과 비교하면 빙렬이 나타나고 경질백자를 사용한 것과도 비교해볼 수 있었다. 조선산 토청의 사용에 대한 점과 그 기물도 아직 정확하게 밝혀진 바는 없다. 그러나 연산군 때의 청화백자매조문항아리를 통해 그 빛깔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다. 이와 관련해 조선 청화안료의 발견을 위해 노력한 흔적을 왕조실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다.

 

  임진란과 병자호란을 거칠 때의 국가의 상황에 따른 청화백자 제작의 어려움으로 그 기물이 전하는 바가 적고 또 철화백자의 제작과 사용이 왕조실록에 기록된 점을 통해 도자 제작 상황을 유추해볼 수 있다. 항아리의 굽에 새겨진 한글의 사용과 회화의 변화 과정을 통해 그리고 굽과 항아리 구연부의 형태변화를 통해 도자기의 문화적 지형은 조금씩 변해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양란 이후 상공업의 발달과 신분제의 변화는 더욱 도자기법과 형태의 변화를 초래했고 이러한 사실 역시 왕조실록을 통해 조금은 드러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분원'의 설치와 그로 인한 도자의 제작은 이후 시기의 가장 중요한 변화이다.

 

  청화백자 묘지석의 제작과 다양한 형태의 제기 제작, 철화를 사용한 다양한 도자기의 제작 그리고 달항아리의 제작 등은 조선도자사의 한 획을 긋는 사건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숙종,  영, 정조 시대의 도래는 도자사를 획기적으로 발전시킨 기간이었다. 전문화원을 동원한 도자기 회화의 실현은 한국적이고 예술성 높은 18세기 도자기들을 대량으로 쏟아내었던 기간이었다. 다양한 기법의 도자기들 그리고 갑번을 사용한 기물들 그러나 정조는 검소한 조선왕실의 전통을 강조하였고 이는 상업 발달에 따른 도자제작의 시대적 흐름과는 맞지 않았다. 결국 순조 때에 잠시 활성화되는 듯 하다가 도자산업은 쇠퇴를 맞게 된다.

 

  비록 도자기 제작 장인의 땀과 열정 그리고 예술성을 알 수 없고 또 시장의 수요 또한 알 수 없지만 왕조를 통해 도자기법의 변화와 제작의 변화 환경의 변화 등을 알 수 있었던 점에서 이 책은 의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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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6-10-02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이 있으면 조금더 관심을 끌 수 있을 듯 해요 . 도자기 라는 것이 문화로서 사람들에 가까워진 게 오래되지 않아서 , 획일된 정보밖에 없거든요 . 개인적 정리인지 모르겠지만 .. 의미있는 글로 눈여겨 보게됩니다 .^^
좋은 책소개 감사해요~^^

달팽이 2016-10-06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주시고 댓글까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도자기에 관심이 있어 조금 소장하고 있습니다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