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을 폄하한 글처럼 됐지만, 나는 몇 몇 시인들을 실제로 옆에서 봤었고

소설가는 단지 책으로만 봤기 때문에, 하루키의 저 말을 납득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자기 경험이고 다 용감하던(무식해서) 시절의 이야기니까, 


지금은 시인이 더 나은지, 소설가가 더 훌륭한지, 평론가가 더 대단한지, 잘 모르겠다.

(계속)]




앞의 포스트는 끝맺음이 이상하게 되어버렸는데,

원래는 다른 말을 이어서 계속 쓰고 있던 중이었다 :


'아무튼, 지금도 나는 소설가에 대해서는 어떤 경외심(나같은 사람과는 다른 사람들이다)과도 같은 무엇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아마도 내가 평생 동안 필기든, 일기든, 뭘 쓰는 버릇이라곤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 '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읽다가 뭔가를 쓰는 행위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는데

하지만 두번째 포스트는 다음날이 되면서, 왠지 말하려던 마음이 시들해져버려서 

방치해두고 있다가, 휴가를 다녀왔다.


그것과는 좀 다른 얘기지만, 얼마 전에 티비 채널을 돌리다가 필리핀 영화인지, 태국 영화인지 모르겠는데 3류 무술영화의 끝부분을 잠깐 보게 되었다. 주인공은 부상을 당한데다가 홀로 악당들에게 완전하게 포위된 상황이었다. 악당 두목은 거드름을 피우며, 너는 이제 곧 죽게 될 것이다, 너에게는 비참한 최후 밖에 남지 않았다, 살아날 가망성은 없다는 식으로 선언을 한다(바로 죽이면 될 텐데). 


주인공은 뭐라고 했을까? 그는 눈하나 깜빡하지 않고 "그건 니 생각일 뿐"이라고 외친다. 역시 주인공의 말대로, 도리어 악당들이 전부 죽게 되는, 뻔한 결말.


근데 이 영화 지금도 잊지 않고 있는 것은, 영화가 좋고 후지고를 떠나서 "그건 니 생각일 뿐" 이라는 대사, 이 말은 확실히 그 상황, 시점(누군가 미래를 장담할 때)에 꼭 맞는 말 같았기 때문이다. 뭐든 시간이 지나봐야 알 수 있지 않나? 그러니까 가만 있어도,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지 않나? 


그럼에도 우리는 결코 가만히 있는 것을 선택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예상을 하고, 혹은 마음속으로 결론은 이미 내려져 있는 상태. 이렇게 될 것이다, 아니, 반드시 이렇게 돼야만 한다, 같은 기대가 있다. 무슨 일에든.


그런데 "그건 단지 니(내) 생각일 뿐" 아닌가? 그 말, 우리가 늘상 쓰는 말이고 말싸움 할 때도 가장 흔하게 하는 말이지만, 생각해 보면 정말 그렇다 ㅡ 인생은 니(내) 생각대로 되는게 아니다 ㅡ 싶은 말 중 하나, 라는 생각을 했다.  


[지금은 시인이 더 나은지, 소설가가 더 훌륭한지, 평론가가 더 대단한지, 잘 모르겠다.]


언젠가도 말했던 것 같지만, 나는 시든 소설이든, 미술이든 영화든, 그게 싸구려 오락이든 예술이든 <잘 만든 작품>을 좋아한다. 그게 취향이라면 취향이지만, 어느 장르가 더 위인지, 어느 쪽이 더 훌륭한지, 더 좋은지는 모른다. 내가 해보지 않고,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해서는 도무지 잘 알지 못한다.


그런데 간혹 외국인을 만났을 때 친절하게, 잘해주고 싶을 때가 있다. 마음은 그렇지만, 외국어를 못해서 그냥 지나치고 말 때면 그런 생각이 든다. 내가 자유롭게 의사소통이 가능한 사람이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그러니 만약 나에게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시인보다는 소설가가 되기를, 화가보다는 영화 감독이 되기를 선택할 것같다. 왜냐하면 분명 나는 의사소통이 되는 쪽을, 안 되는 쪽보다 더 선호하는 인간이기 때문에. 


반면,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는 현실주의적 태도는 곧 평범함과 진부함이기 때문에, 저속하고 타파되어야 할 구태며, 오히려 소설이나 영화의 범람은 예술의 발전을 방해하고 있는 현상에 다름 아닐 것이다. 즉 "저마다 자기 나름의 사소한 관찰로 소설을 꾸며댄다." 그 결과 "인간의 삶은 개 같은 인생이 되었다."


같은 이유로, 나는 오히려 정반대로 생각한다. 현실주의적 태도를 초현실적 태도보다 더 선호하는 것이다.






ㅡ<단속사회> 중에서


어떤 사람은 시를 실천하는 일이, 현실적 세계에 종속되지 않는 방법으로써, 더 중요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시에서는 논리나 문법의 틀에서 벗어난 말의 자유로움도 중요하다. 의미를 지향하지 않고, 오히려 의미를 거부하는 태도는 꼭 시뿐만 아니라 소설이나 미술, 모든 예술에서 오래전부터 있어온 주요한 사조다. 


그런 점에서 나는 오히려 문학이나 예술에 있어서 부조리의 논리, 낯선 이미지, 유추적인 비약 등이 오히려 실용적 담화가 갖는 한계를 넘어서는 글쓰기이기 때문에 옹호하는 편이다.


그렇지만, 시인에 대한 동경은 없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밥먹고 축구만 하면서 사는 호날두나, 공을 참 기가 막히게 잘 던지는 커쇼나, 늘 몸을 단련하고 주먹을 휘두르는 타이슨을, 보는 것은 좋아하지만 그들의 삶을 동경하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니까 주장이 아니고, 자신의 경험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사람들은 온라인을 통해서 "낯설고 다른 것과의 부딪침과 만남을 통해서" 서로의 경험들을, 나누고, 참조한다. 단지 그뿐, 이라고 생각하면 다른 사람의 글을 볼 때, 일일이 마음 상하지 않고 스트레스 받지 않고 미워하지 않고 마음이 평화로웠던 경험 다들 있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자신과 취향이 같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다.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직업이 있고 다양한 장르가 있을 것이다.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중 반드시 스승이 있게 마련이다. 좋은 것은 본받고 나쁜 것은 살펴서 스스로 고칠 수 있기 때문이다. 


깨끗함도 더러움도, 그것은 자기의 생각일뿐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 자신이 왜 그처럼 확신을 하고 미워하는지 순간 알기가 어려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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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역시 소설가는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작가가 책상에 앉아서, 현대인의 시각으로 모든 시대를 재단하는 그런 소설들 말고요 -_-)


가끔 과거를 정말 살았던 것처럼, 또는 자기 시대를, 모든 사람의 생을 다 살고 이해하는듯 현실적으로 묘사해내는 작가들 있잖아요 


우리가 알 수 없는 세계를 마치 거기에 사는 사람처럼 써내는 작가들에게는 감탄하게 돼요. 저로서는 어떤 소설들은 (시와는 달리)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란 생각이 들 때가 있거든요. 


(신지)


한 십년 쯤 전에 커피숍에서 지인과 나눴던 대화가 생각난다. 어느날 지인은 평론가나 소설가보다, 자신은 시인이 훨씬 대단한 사람들인 것 같다고 자신있게 말했다. 나로서는 쉽게 동의하기 어려웠는데, 시모임 때 나도 몇 몇 유명한 시인들을 꽤 여러명 옆에서 보았지만, 왠지 시인들에게 그런 존경심까지는 느껴지지지 않았던 기억 때문이다. 그냥 그들도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구나.


지금은 짬뽕이 좋아 자장면이 좋아-처럼 주관적이고 답이 없는 얘기라는 것을 알지만,


당시에는 시인들에게 항상 의구심이 있었다. 그 시에 과연 표현된 것 만큼, 무엇이 있을까?  또 그 사람의 명성과 실질이 과연 맞기는 한건가, 싶었다. 그래서 난 그 사람이 쓴 산문을 보지 않고는 시인을 쉽게 믿기 어렵다고 그랬다. 가끔 신문에서 시인들이 쓴 칼럼을 봤을 때 자주 실망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무리 거기에 올바른 슬로건이 있고 아름다운 메시지가 있어도 그 올바름이나 아름다움을 뒷침해줄 만한 영혼의 힘, 모럴의 힘이 없다면 모든 것은 공허한 말의 나열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가 그때 몸으로 배운 것은, 그리고 지금도 확신하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말에는 확실한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힘은 올바른 것이 아니어서는 안 됩니다. 


적어도 공정한 것이 아니어서는 안 됩니다. 말이 본래의 의미를 잃고 제멋대로 왜곡되어서는 안 됩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40)



얼마 전 몇 몇 시인들의 문단내 성추행 사건들이 여러 여성 피해자들에 의해 폭로되었을 때 크게 배신감을 느끼지 않았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과연 그 시인이 자기가 말한 것에 대해 정말 알고 있을까, 시인이 자기 자신보다, 세상을 더 잘 이해하고 있는지, 그런게 궁금했다.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지금은 당연히 시인들 중에도 실질에 부합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안다. 반대로 소설의 경우에도 현실의 사회문제들에 대해서, 도덕에 대해서 마치 자신은 정답을 알고 있다는 듯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패기만만한 소설가들이 많이 있지만,


소설가라는 종족은(...) 실제로 내 발로 정상까지 올라가보지 않고서는 후지산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부류입니다. 아니, 그러기는커녕 몇 번을 올라가도 아직 잘 모르겠다, 혹은 올라가볼수록 점점 더 알 수가 없다, 라는 게 소설가의 천성인지도 모릅니다. (26)


어쨌든 소설은 오랜 기간에 걸쳐 하나의 마을이 완성되듯 상당한 시간과 노력(지식)과 사실과 사고와 생각들을 작품에 투여해야 하고, 또한 그러한 작가 자신의 의식 속에 있는 것을 하나하나 ‘스토리‘라는 형태로 치환해서 표현하는, 한마디로 ˝상당히 멀리 에둘러 가는˝ 작업이다.


하나의 개인적인 테마가 있다고 합시다. 소설가는 그것을 다른 문맥으로 치환합니다. 


'그건요, 이를테면 이러저러한 것이에요'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그 치환 속에 불명료한 점, 애매모호한 부분이 있으면 그것에 대해 '그건요, 이를테면 이러저러한 것이에요.'라고 다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그러한 '그건요, 이를테면 이러저러한 것이에요.'가 끝도 없이 줄줄 이어집니다. (...) 꺼내도 꺼내도 안에서 좀 더 작은 인형이 나오는 러시아 인형 같은 것입니다. (23)


어쩔 수 없이 작가 자신의 안목과 통찰, 세계관이나 관점 같은 것이 소설에서는 보여지게 되고, 그것은 다시 말하면 ㅡ 읽히기 위해 작품을 쓰는 이상 ㅡ 소설가는 그것을 평가하고자 하는 독자들의 눈을 피해갈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해서, 분명한 건, 뭘 알아야 소설을 쓸테고, 인물이나 말은 생생해야 하고, 어쨌든 모든 상황이 말이 되게끔 써야 사람들도 공감이든 이해든 납득이든 될 것이다. 


그에 비하면 시인들은 시로써 자신을 감출 수도 있지 않나?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아도 되어서, 마치 내게는 단지 언어를 잘 다루는, 일종의 생활의 달인 같았달까.


소설을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내적인 충동, 장기간에 걸친 고독한 작업을 버텨내는 강인한 인내력, (...) 소설 한 편을 쓰는 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소설을 지속적으로 써낸다는 것은 상당히 어렵습니다.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29)


(무라카미 하루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시인을 폄하한 글처럼 됐지만, 나는 몇 몇 시인들을 실제로 옆에서 봤었고

소설가는 단지 책으로만 봤기 때문에, 하루키의 저 말을 납득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자기 경험이고 다 용감하던(무식해서) 시절의 이야기니까, 


지금은 시인이 더 나은지, 소설가가 더 훌륭한지, 평론가가 더 대단한지, 잘 모르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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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 2017-07-02 15:09   좋아요 0 | URL

수정.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지금은 당연히 시인들 중에도 실질에 부합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안다.)
ㅡ>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지금은 당연히 시인들 중에도 실질에 부합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안다. 반대로 소설의 경우에도 현실의 사회문제들에 대해서, 도덕에 대해서, 마치 자신은 정답을 알고 있다는 듯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패기만만한 소설가들이 많이 있지만,

인용문 추가.
소설가라는 종족은(...) 실제로 내 발로 정상까지 올라가보지 않고서는 후지산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부류입니다. 아니, 그러기는커녕 몇 번을 올라가도 아직 잘 모르겠다, 혹은 올라가볼수록 점점 더 알 수가 없다, 라는 게 소설가의 천성인지도 모릅니다. (26)

수정.
작가는 건축가가 건물을 짓듯 작품 안에 엄청나게 많은 것을 투여해서(...)
ㅡ>
어쨌든 소설은 오랜 기간에 걸쳐 하나의 마을이 완성되듯 상당한 시간과 노력(지식)과 사실과 사고와 생각들을 작품에 투여해야 하고, 또한 그러한 작가 자신의 의식 속에 있는 것을 하나하나 ‘스토리‘라는 형태로 치환해서 표현하는, 한마디로 ˝상당히 멀리 에둘러 가는˝ 작업이다.

 





어떤 면에서는 하나도 안 변한 것 같기도 하고, 또 반대로 어떤 부분에서는 과거의 내가 완전히 낯선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온라인에서 말하면서도


나는 참 진지했었구나. 

그리고, 왜 자꾸만 저렇게 남들에게 쉽게 속마음을 토로할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주기적으로, 그런 내 모습이 시간이 지나면 갑자기 싫어지고는 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내가 좋아하는 말하는 방식, 속마음을 그대로 말하는 방식은 친밀한 사람에게 말하는 방식인 것이다. 과거에 한 말들을 내가 무의식적으로 외면하게 된 이유 역시, 나중에 내가 한 말을 <관객의 시점>으로 다시 보게 된 때문이 아닐까. 


그때는 왜 그렇게도 하고 싶은 말이 많았을까, 싶다.ㅡ지금은 도무지 (하고 싶은 말이 없어서) 무엇을 쓸 마음이 생기지 않는데 말이다.ㅡ 알라딘에서 자기 얘기를 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에, 나는 다른 사람과 논쟁을 통해서 내 생각을 말하는 것이 좀 더 편했다. 그 때문에 번번히 후회하고 그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도 생각이 된다. 그때의 수치심과 상처들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을 알아가는 연료였기 때문에, 그럼으로써 "적의를 품은 대항조차도 지금은 나의 이익이 되고 행복이 되었(니체)"고, 나의 실수들은, 시간이 지나서 보면 자주 그렇듯이 어떤 "우정어린 협력보다도 더 신속하게 나를 계몽하였"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좀 더 살다 보면, 또 알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살아갈 가치가 반짝 빛나고 있다는 걸. 그리고 그것이 결국엔 나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이라는 걸. 다른 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나 자신이 되는 성장이라는 걸.

(...)

사람은 매순간 성장한다. 성장한다는 것은 더 지혜로워지고 더 인내심이 강해진다는 뜻이 아니다. 그건 혼돈을 수용하는 능력이 더 생긴다는 거고, 불안 속에서도 균형을 잡을 수 있다는 의미다. 


ㅡp.7, <<그녀의 시간>>, 한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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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7-06-26 03:19   좋아요 0 | URL
오랜만이어요~신지님!
새벽에 북플 들어오니 제일 먼저 맞아주는 글이라 반갑네요~^^

신지 2017-07-21 14:13   좋아요 0 | URL
앗, 순오기님! 반갑습니다.^^ (어쩐지 이제는 아는 사람이 별로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거든요)

항상 용기를 주시네요. 자기 전에 포스팅을 하면 왠지 밤잠을 설치게 되는데
복 많이 받으세요~ ^^

한수철 2017-06-27 10:25   좋아요 0 | URL
왜 그런 말이 있잖아요. 나를 아는 사람이 10이라면 1은 나를 좋아하고 1은 나를 싫어하고 8은 무관심하다고.^^

무관심이라는 표현이 좀 그런가요? 그렇다면, 8은 일종의.... ‘해류海流‘ 같은 게 아닐까요?

그것은, 내 주변에 좋은 영향을 미칠 수도, 황폐하게 만들 수도 있는 무언가죠. 그 누구도, 흐름의 흐름을 창작해 낼 수 없죠. ‘좋은‘ 흐름을 선취하기 위해 나름의 최선을 다할 뿐.^^

그런데 그 흐름이라는 게, 사실은 부질없죠. 어휴, 길게 이야기하고 싶은데, 제가 또 나름 바쁜 사람이라. 흠흠...ㅎㅎ

아무튼 저는 신지 님을 좋아하는 1人이라는 말이나 부기하겠습니다. 서로 좋아하며 살기만도 짧은 인생, 니미럴.... 그럼 이만

총총.

신지 2017-06-27 15:20   좋아요 0 | URL
˝ 내 주변에 좋은 영향을 미칠 수도, 황폐하게 만들 수도 있는 무언가죠. 그 누구도, 흐름의 흐름을 창작해 낼 수 없죠. ‘좋은‘ 흐름을 선취하기 위해 나름의 최선을 다할 뿐.^^ 그런데 그 흐름이라는 게, 사실은 부질없죠. 어휴, 길게 이야기하고 싶은데, ˝

ㅡ>
맞아요 (말씀하신 것과 다른지도 모르지만) 사실 저도 요즘은 비슷한 생각을 많이 해요.
그러니까, 살면서 매순간, 우린 어떤 선택을 해야 되잖아요.
(가령 화를 낼 수도 있고,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못 본척 하고 넘어갈 수도 있고...)
그렇게 그때마다 우리는 그저 ˝ ‘좋은‘ 흐름을 선취하기 위해 나름의 최선을 다할 뿐.˝인 거죠. 인연은 알 수 없는 거잖아요.
하지만 실은 매순간 나쁘거나 좋은 연을 만들 수 있는데도
대부분 우리는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죠. ㅠ

그런데 사실 저는 내가 무엇을 하고 싶고 무엇을 하든
내가 한 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관계가 그렇게 한 것 같다는 것이, 저의 실감이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그 흐름이란 게, 사실은˝
부질없는 것 같아요. ㅠ
좋고 나쁘고는 다 자기가 생각하기 나름 아닌가 싶거든요
 





어젯밤, 샤워를 하려다가 문득 반신욕을 하며 맥주를 마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욕조에 몸을 담그고 기분이 조금 좋아지면서 스마트폰을 들었다. 

뭘 볼까- 

하다가 우연하게 (알라딘의) 내 지난 글들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은 어떤지 모르겠다. 

나에게는 때때로 도마뱀처럼, 내 과거와 단절하려고 하는 욕망 같은 것이 (전에는)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지난 시절의 글들은 도무지 잘 보지 않게 되는 편이다.  


그래도 어느정도 정제된 (의견을 말하거나 논쟁적인) 페이퍼들에 비해 

그리 많지는 않지만, 마치 편지, 고백과도 같은 어떤 말과 글들은

내게는 무슨 트라우마와도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가령 나는 내가 남들과 주고받은 '댓글'들을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는 좀처럼 다시 읽지 못하는데, 만약 우연히 다시 읽게 되면 자꾸 고치고 싶어진다. 


또 (물론 나중에 읽게 되었을 때 아무렇지도 않은 댓글들도 있지만) 타조가 위험한 순간에 다다르면 자기 얼굴을 땅속에 파묻음으로써 두려움을 잊으려는 것처럼, 어떤 댓글, 어떤 글, 어떤 부분에서는 자동적으로(무의식적으로) 건너뛰기 때문에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 부분은 다시 읽지 않는 부분으로 계속 남아있게 된다.


따뜻한 목욕물과 차가운 맥주가 어제는 나를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몰고갔고, 나는 한참동안 저 뒷편에 있던 글들을 이것저것 클릭해가며 읽었다.


내가 이런 말을 했다니...


정말 내가 저때는 저랬나...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그동안 시간이 참 많이도 지났구나.  어떤 말들은 자기애, 자의식 과잉 같은 것이 엿보여서, 그리고 전반적으로 유치해서 우스워 보이기는 했지만, 시간이 많이 지나서인지,    아니면 이제는 <내 모습이 원래 그 정도>라는 것을 알게 된 때문인지, 이상하게도 전처럼 창피한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연인의 지고지순한 밀어는 남이 듣기에 따라 코미디가 되기도 한다.


"네가 아니었으면 이 세상에 나 혼자였을 거야. 고마워."

"나도 고마워. 당신 때문에 다시 태어났어."


이런 말을, 두 손 꼭 잡고 주고받는 연인을 상상해 보라.

그런데 우리는 이 코미디를 사랑한다. 우리도 그렇게 했으며, 그 말의 기운이 사그라지기도 전에 헤어졌으며, 상대를 죽도록 미워했으며, 그러다가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웃으면서(혹은 비웃으면서) 그 사람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간혹 이 코미디는 그 무엇보다 슬픈 장면으로 탈바꿈한다. 우린 그런 순수한 연인을 보면 왈칵 눈물을 쏟게 되는 것이다. 시간이 그렇게 만든다. 시간은 많은 것을 가르친다.(...)


ㅡ p.6 <<그녀의 시간>>, 한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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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실제로는 아무리 시간이 가도 이루어 놓은 일이 하나도 없으면서 
그런데도 나는 왜 늘 시간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까.....
저는 이게 참 의문입니다.



B 군대에 있을 때 이런 일이 있었어요. 호우 시절이 도래하기 전에, 담당 지역의 모든 배수로를 점검해야 했죠.
하지만 어디 그러나요. 막히면 그제서야 나가서 뚫는 거죠.^^
그런데 상급자가 되고 나니, 미리 확실히 배수로를 점검 보수해 놓으면 편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깊고 넓게 파기로 결정했습니다. 아무리 비가 쏟아져도 걱정할 일이 없게. 
그런데 정작 실제로 깊고 넓게 파거나 하지는 않았어요. 오고 가며 생각만 했지. 그런데 아시겠지만 생각은, 생각만으로도, 얼마나 피곤한 일입니까?



A  ......




ㅡ>

어렸을 때 방학이 되면, 첫날은 꼭 계획표를 세우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그때 만큼은 아주 열심이었고, 신이 났던 것 같다. 색칠까지 꼼꼼히 해서는 붙여놓고 그랬다. 내 계획표의 장점이라면 우선은 느긋하게 여유를 즐기면서 좀 천천히 시작되지만 결국 막판에 궤도에 오르기만 하면 각종 예체능과 교양은 물론 끝내는 꼭 전교 1등까지 되고야 마는 치밀하고 정교한 설계에 있었다. 


하지만 장점이 바로 단점이기도 했다. 방학 내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상상 속에서 나는 언제나 유능했기 때문에 개학이 코앞에 다가와도 절대 굴하지 않고 특유의 낙관적인 성격으로 대안을 찾아내곤 했다. 잠이야 매일 자는 거니까, 까짓거 이틀에 한번씩만 자면 지금이라도 목표달성쯤은 충분히 가능할 것이었다. 사실 늦었다고 생각될 때가 가장 빠른 때 아닌가. 


어떤 일들은 수십년 동안 반복되어도 숨쉬는 것처럼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되어서 본인은 정작 그 사실을 잘 알지 못한다. 그런 나의 사정을 B는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꽤 오래 전 일이지만 이제는 뭔가 경제적으로도 명실상부하게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마음 먹고 사업을 하겠다고 1억 몇 천 정도를 대출 받은 일도 있었다. 그때도 역시 통장 입금이 확인됨과 동시에, 마음은 이미 성공한 사업가였다. 여기저기 주변 사람들한테 선물도 좀 하고 모처럼 여행도 다녀오고. 그러고 나니 갑자기 책을 좀 사야될 것 같았다. 읽었고, 시 모임도 나가고, 온라인도 좀 하고, -자체검열-,  아무것도 안 했는데 잔고는 다시 마이너스였고. 또......그만 말하자.


[원인은 그대 자신에게 있다. 무의식 속에서 살아가는 그대 자신이 원인인 것이다.


ㅡ 오쇼 라즈니쉬 ]


내가 보기에 오쇼 라즈니쉬나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같은 사람이 그냥저냥 약장수는 아닌 듯했다. 가만히 나 자신을 돌이켜보고 세상을 관찰해 보면, 대부분 그가 하는 말이 맞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가령 생각으로는 내가 이미 변한 것 같고 마음으로는 충분히 문제들을 극복한 것 같은데도, 막상 현실에서 어느날 문득 되돌아보면 예전 그대로, 매사 습관적으로 반응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무의식으로 살 것인지, 아니면 나 자신으로 살아갈 것인지, 말하는 것은 것은 쉽다. 하지만 언제나 말보다는 꾸준함이 어렵고, 의지 보다는 습관이 앞서고, 지혜 보다는 감정의 힘이 더 강한  사람이 바로 나다. 원인은 나에게 있다.



(이번에는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있다. 완벽한 '계획'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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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철 2017-06-13 11:10   좋아요 0 | URL
자, 다음.

완벽한 계획을 말씀해 주시죠.

신지 2017-06-13 13:58   좋아요 0 | URL
그건 비밀입니다. 옛말에 입을 열면 바로 그르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처리님이니까 살짝 개요만 말씀드리자면)

아시겠지만 꼬끼리를 잡아서 냉장고를 열어서 코끼리를 넣고
냉장고를 닫으면, 끝. 완벽하지요

moonnight 2017-06-13 15:33   좋아요 0 | URL
죄송하게도ㅜㅜ 신지님 새 글을 이제야 발견했네요 알람이 왜 안 왔지-_-
이동진 작가가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인생은 되는대로 살겠다 그러셨다네요. 저도 무계획으로 삽니다. 대신 하루하루는 (가능한^^;) 열심히 살려고요. ( 잘 안 되지만. 시무룩ㅠㅠ)

신지 2017-06-22 14:54   좋아요 0 | URL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인생은 되는대로 살겠다,
저도 배워야겠어요 ㅠㅠ
저는 항상 생각만 하고, 계획만 하고 있어서
누가 너 뭐하고 사냐고 질문하면 막 횡설수설하고 그러거든요 ㅠ